송가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아빠, 한서 오빠는 지금 현진 씨를 기억 하지...”“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현진이와 아무 사이도 아닌게 되는 거냐?”송가람이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송병천이 손을 내저었다.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넌 아줌마에게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해.”송가람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불만과 억울함은 집어삼켜야만 했다. 주강운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현진 씨, 저도 같이 가요.”“괜찮아요. 금방 돌아올게요.”한현진은 말하며 강한서를 잡아당겼다. “제가 안내해 줄게요.”강한서가 한현진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옷을 정리했다. 그는 회사 대표 특유의 카리스마를 유지하며 말했다. “앞장서시죠.”한현진이 바득 이를 갈았다. ‘몸이 금방 회복된 것만 아니었다면 아까 뜨거운 물을 섞었을 텐데.’그녀는 강한서를 노려보더니 바닥을 쾅쾅 밟으며 길을 안내했다. 몇 분 후, 한현진은 강한서를 핑크빛으로 인테리어가 되어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강한서가 눈썹을 씰룩였다. “여기가 송민준 방이에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등골이 서늘해진 강한서는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는 얼른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한현진과 거리를 뒀다. 고개를 돌린 한현진은 방구석으로 도망한 강한서를 보고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그렇게 멀리 도망가는 거예요?”“왜 저를 현진 씨 방으로 데려온 거예요?”강한서는 잔뜩 경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현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했다. “여기가 오빠 방이에요.”강한서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전 기억을 잃은 거지 멍청해진 게 아니에요.”한현진이 입술을 짓이겼다. “오빠가 다른 사람이 자기 방에 가는 걸 싫어해서요. 제 방에서 해결하시죠.”강한서가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집에 갈 거라서요.”그가 말하며 방을 나서려 하자 한현진은 재빨리 움직여 강한서 앞을 가로막았다. “강한서 씨가 스스로 벗을래요, 아니면 제가 벗겨줄까요. 선
말이 끝나자마자 한현진은 강한서의 벨트에 손을 올렸다. 강한서는 마치 감전이 된 듯 장난스레 움직이는 한현진의 손을 꽉 잡았다. 한현진의 맹랑한 말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강한서는 목부터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마치 한현진을 찢어버리기라도 할 듯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한참을 입술을 씰룩이던 강한서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지금 대체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 있기는 해요? 한현진 씨, 당신은 정말... 정말 할 말을 잃게 하네요.”한현진이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 “뭐가요? 전 단지 아까 제가 약병을 가지려 할 때 주머니에 숨긴 물건이 뭔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에요. 대체 뭔데 그렇게까지 숨기면서 보여주지 않는 거예요.”강한서는 사실을 왜곡하는 한현진의 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금 분명...”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그러나 한현진은 봐줄 생각 없이 오히려 강한서에게 더 바짝 다가갔다. “제가 방금 뭐라고 했는데요?”강한서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불을 뿜어낼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한현진은 쯧 혀를 찼다. ‘섰다는 말도 하지 못하다니. 기억을 잃더니 순진한 대학생이 됐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강한서는 원래부터 그런 비속한 말을 잘 못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교육을 잘 받았으니까. 천생 도련님이시잖아.’자기가 그런 강한서를 속세의 사랑에 허덕이게 했다고 생각하자 한현진은 어쩐지 성취감이 생겼다. 그녀는 눈으로 강한서의 이목구비를 살피더니 웃으며 그를 놀리듯 말했다.“왜 말이 없어요?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강한서가 한현진의 손을 뿌리치며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본인이 잘 알겠죠.”화가 난 강한서의 모습에 한현진도 더 이상 그를 놀릴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굴을 가까이했다. “화났어요?”강한서가 다시 등을 돌렸다. 한현진을 보고 싶지 않다는 분명한 태도였다. 한현진은 다시 자
강한서는 순간 그날 한현진이 귓가에 속삭였던 말을 떠올렸다. “송가람을 감싸줄 때마다 난 송가람을 밟아버릴 거야. 그리고 네가 감히 송가람과 만난다면 난 네 후대를 끊어버릴 줄 알아.”강한서의 시선이 다리 사이에 놓인 발로 향했다. 조금 더 위로 향했다면, 정말 대가 끊어질 수도 있었다.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계속 집착하는 거, 재밌어요? 한현진 씨는 송씨 가문의 딸이자 아저씨의 금지옥엽이잖아요. 원하는 남자든 누구든 만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본인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집착하는 거예요?”며칠간 마음을 굳게 먹은 덕에 한현진은 이미 전처럼 그의 날카로운 말에 쉽게 상처받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여전했다. 그녀는 그저 강한서를 다그치며 물었다. “그럼 강한서 씨는요? 기억을 잃은 사람이 왜 기억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절 쫓아내는 일에만 집착하는 거예요?”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한쪽만 기억하고 다른 한쪽은 기억하지 못하는 생사를 함께 한 정이라는 건 말이에요, 기억이 없는 사람에겐 부담이라고요.”“거짓말.”한현진이 눈시울을 붉혔다. “너 나 기억하는 거 맞지? 설사 기억 못 한다고 해도 나에 대한 감정은 남아있잖아. 그렇지? 네가 왜 계속 날 쫓아내려 하는 건지 나 정말 모르겠어. 강한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한테 얘기해 줘. 우리 같이 해결해 나가면 안 될까?”강한서는 아무 말 없이 이상하도록 복잡한 심경이 가득한 눈빛으로 한현진을 바라보더니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강운이를 이용해 제 화를 돋우거나 그럴 필요 없어요. 좋아하지 않으시면 상처 주지마세요. 민 실장에게 정명석 씨가 한현진 씨 첫사랑이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정명석 씨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현진 씨와 나이도 비슷한 것 같던데, 아마 저보다는 더 말이 통할 거예요.”그 말에 한현진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갑자기 강한서의 어깨를 툭 밀쳤다. “강 대표님은 아량도 넓으시네요. 헤어지는 마당에 제가 만날 남자까
강한서가 약병을 주워 들자 한현진은 바로 그것을 빼앗아 안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삼켰다. 입술을 달싹이던 강한서는 곡 몸을 일으켜 테이블에 놓인 물을 한현진에게 건넸다. 이번엔 한현진이 거절하지 않았다. 강한서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사람을 부르려 하자 한현진이 눈을 감고 말했다. “나가기만 해요. 여기서 뛰어내릴 거예요.”강한서가 흠칫 몸을 굳혔다. “병원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한현진은 강한서의 무시한 채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강한서 씨. 다시 한번 물을게요. 정말 저와의 연을 끊을 생각이에요?”강한서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한현진의 얼굴을 향했던 시선을 내리며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전 현진 씨를 기억하지 못해요.”한참을 침묵하던 한현진이 냉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꺼져요. 강한서 씨가 바라던 대로.”한현진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깨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현진이 그런 말투로 강한서를 대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강한서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잠시 후 말했다. “푹 쉬어요.”말을 마친 그가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려왔고 곧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들려왔다. 문밖의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자 한현진은 그제야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얼굴엔 조금 전의 병색 짙던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걸음을 옮겨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잠시 후 강한서가 저택을 나오는 모습이 보였고 송가람은 종종걸음으로 강한서의 뒤를 따르며 뭐라고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차로 향하는 강한서의 걸음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가 차에 올라타서야 한현진은 어쩐지 어떤 시선이 유리 넘어 창가에 닿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아주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현진은 강한서가 자주 운전하던 벤츠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창가에 한참을 서 있다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임신 중절 수술 예약하려고 하는데요...”
송가람은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니 내연녀라는 오명을 쓰고 싶지는 않았고 그로 인해 송씨 가문과 멀어지는 일은 더욱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송가람은 강한서를 향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고 선을 넘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마도 강한서가 먼저 자기에게 고백하는 것일 테였다. 그렇게 되면 욕을 먹고 질책을 받는 쪽은 자기가 아니라 조강지처를 버린 배은망덕한 강한서가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송가람은 강한서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설사 정말 그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송가람에게 마음이 생겼다고 해도 전 와이프인 한현진과 송가람의 관계를 알게 된 이상 강한서는 절대 송가람과 만나지 않을 것이다. 송가람이 자기를 좋아하는 건 근친상간이라고 강한서가 본인 입으로 직접 말했었다. 강한서가 이토록 뼛속까지 고지식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송가람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만약 송가람이 강한서에게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면 당연히 한현진에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태도를 떠올린 송가람은 곧 한현진과 강한서 사이에 유쾌하지 않은 대화가 오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송가람의 말투가 바뀌었다. “현진 씨, 한서 오빠 기억을 찾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건 조급해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황 교수님께서 지금 한서 오빠의 대뇌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 너무 많은 자극을 받으면 오히려 탈이 난다고 했어요. 한서 오빠의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요즘엔 좀 자제하는 게 어때요? 한서 오빠는 현진 씨 때문에 이렇게 다친 거잖아요. 오빠는 현진 씨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는데, 현진 씨는 잠깐 거리를 두는 것도 그렇게 어려워요?”그 말에 한현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강한서의 기억이 차라리 한평생 안 돌아왔으면 좋겠죠?”송가람은 한현진의 말에 부정하려 했지만 한현진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송가람 씨,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 본인의 구역질 나는 탐욕에 핑계를 찾는 건 그만하죠. 송가람 씨가
“본인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는 해요?”한현진의 눈빛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위기의 순간에 구해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그걸 원하는지 아닌지는 알아야죠.”비록 한현진 역시 당시 생명을 구해준 인연으로 강한서의 외모에 한눈에 반했지만 그때의 상황에서 그녀는 전혀 많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만약 나중에 유상수가 강제로 결혼을 부추겨 강한서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그때의 교통사고가 그들에게는 마지막 만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한현진은 생각했다. 한현진의 말에 송가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긴, 아무도 10여 년의 사랑을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심호흡한 송가람이 나지막이 말했다. “한서 오빠는 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에요. 전엔 현진 씨에게 그랬겠지만, 지금은 현진 씨를 기억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니 현진 씨는 어떻게 한서 오빠가 저에게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요?”“한서 오빠가 눈을 뜬 그날, 오빠는 사실 대부분 일을 기억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오빠는 한눈에 절 알아봤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제일 방황하고 무력할 때 깨어나 처음 본 사람에게 의지하게 돼요. 오랫동안 의지하다 보면, 그 마음이 애착으로 변할지 누가 알겠어요?”한현진은 송가람의 표정을 지켜보며 조금의 미세한 표정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송가람 씨 말은, 강한서가 송가람 씨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건가요?”송가람은 한현진의 말에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강운 오빠가 아직도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배웅 안 해줘요?”말을 마친 송가람이 뒤돌아 그대로 자리를 벗어났다. 한현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송가람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송가람이 방금 했던 말을 떠올린 한현진은 가슴이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송가람, 이번엔 왜 이렇게 자신만만한 거지?’옷매무새를 정돈한 한현진은 주강운을 배웅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주강운과 송병천은 바둑을 두고 있었
주강운이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아저씨, 제 친구 중에 찻집을 하는 애가 있는데 거기서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많아요. 궁금하시면 다음에 제가 모시고 갈게요.”그러자고 대답하려던 송병천은 곧 자신의 들쑥날쑥한 바둑 실력을 떠올리곤 괜히 창피할 것 같아 헛기침하며 말했다. “바둑은 조용한 곳에서 두는 게 좋지. 난 그래도 집이 좋아. 언제 시간 될 때 또 나와 바둑 두러 오렴.”주강운이 말했다. “모레 올게요. 모레 오후엔 스케줄이 없거든요.”송병천이 굉장히 기뻐했다. “그럼 잊지 말고 모레 오렴. 아, 그래. 강운이 너 무슨 음식 좋아하니? 좋아하는 음식 있으면 현진에게 말해. 그래야 내가 다음에 잘 알고 준비하지.”주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럴게요.”그렇게 두 사람은 빠르게 다음 만남을 약속했다. 한현진은 어쩐지 주강운이 먼저 가족을 공략해 한 발 한 발 그녀에게로 다가가는 전략을 세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던 그녀는 주강운을 배웅하는 짧은 길 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주강운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말을 잇지 못하던 한현진이 드디어 한마디 내뱉었다. “강운 씨, 우리 아빠 어떤 분이신 것 같아요?”한현진이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던 주강운이 멈칫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따뜻하시고 털털하신 분 같아요. 유머도 있으시고 아랫사람에게는 다정하신 분이시죠. 좋은 어른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우리 아빠를 양아버지로 모실 생각 있어요?”“...”질문은 내뱉은 한현진은 바로 후회했다. 워낙 눈치가 빠른 주강운은 한현진의 질문을 듣자마자 바로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만약 강한서가 기억을 찾지 못하면 주강운과 만나보겠다더니 오늘엔 바로 그를 양오빠로 만들었다. 그러니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너무 뻔한 일이었다. 주강운의 얼굴에 걸렸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고 눈빛도 어두워졌다. 그는 침을 삼키며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현진
주강운은 왠지 모르게 다른 사람이 그를 모질게 대할 수 없게 했다. 주씨 가문에서 그를 항상 제일 마지막 순위에 놓도록 교육했기 때문인지, 그는 늘 습관적으로 자기를 제일 마지막 순위로 밀어 넣었다. 그 잘못이 그의 탓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한현진의 말을 들은 주강운의 눈빛이 점차 기대로 물들었다. 그가 나지막이 물었다. “정말요?”한현진은 주강운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아빠가 오빠보다 강운 씨에게 더 친절하게 대하는 거 못 느끼셨어요? 아빠는 강운 씨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시는 거예요.”“현진 씨...”주강운이 뭔가 말을 꺼내려 하자 한현진이 얼른 입을 열었다. “얼른 차 빼요. 길 막고 있어요.”주강운은 어쩔 수 없이 하려던 말을 삼키고 돌아서 차에 올라탔다. 유턴을 해 돌아온 주강운이 차창을 내렸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요. 몸조심하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배웅했다. 한편, 민경하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있는 강한서는 입을 굳게 닫고 가는 길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름드리 펜션에 거의 도착할 때쯤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민 실장, 프로게스테론이 뭐죠?”민경하가 운전하며 대답했다. “호르몬 보충제 같은데요.”‘프로게스테론... 호르몬 같은데, 자주 듣던 말 같은데 무슨 호르몬인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강한서가 휴대폰을 꺼내 검색창에 프로게스테론 약을 검색했다. 그리고 곧 강한서가 눈이 커다래졌다. “대표님, 오랜만에 사모님 댁에 가시는 건데 더 오래 계시지 않고요.”민경하가 신호등을 기다리며 물었다. 그는 뒷좌석에 앉은 강한서의 표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이 없자 민경하가 또 물었다. “대표님께서는 정말 사모님이 전혀 기억나지 않으세요?’강한서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한참 만에야 중얼거리며 말했다. “왜 임신 유지약을 먹고 있는 거야?”그 말에 민경하가 깜짝 놀랐다. “누가요? 사모님이요?”말이 없던 강한서가 한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