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시선을 거두며 미소를 지었다."강씨 가문의 손자며느리라면 틀림없을 거예요."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유현진을 보고 주강운은 이렇게 설명했다."이쪽은 송민준이라고 해요. 어젯밤 화장실에 있던 그 아가씨가 민준이의 여동생이래요."그뿐만 아니라 송민준의 아버지와 강한서의 아버지는 같은 바지를 입을 정도로 친한 동창 사이였다.몇 년 전, 그들은 막내딸 송가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대부분 회사를 해외로 옮겼다. 송가람의 병세가 호전되고 나자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송민준의 아버지는 다 함께 국내로 이사할 계획이었다. 해외에 처리해야 하는 회사가 아직 남아 있는 관계로 그는 두 남매를 먼저 국내로 보냈다.어젯밤 남매는 원래 함께 파티에 참석할 계획이었지만 송민준은 다른 일이 있는 관계로 조금 늦게 도착을 하게 되었다. 송가람은 그 새로 화장실에서 발작을 하고 만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병원으로 옮겨진 송가람의 상태가 안정된 후, 송민준은 바로 호텔 측에 연락해 '생명의 은인'을 찾아 나섰다.호텔 매니저의 도움 하에 그는 주강운과 연락을 하게 됐고, 또 한주 강씨 가문의 손자며느리가 송가람을 도와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외에 있던 송 대표는 이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강씨 가문에 직접 방문해서 인사를 하라고 했다. 그렇게 이번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송민준은 아주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유현진한테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어젯밤 일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동생이 어릴 적부터 몸이 좋지 않았거든요. 만약 현진 씨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제 동생은 아주 힘들어졌을 것입니다. 제가 저희 가족을 대신해 이렇게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송민준은 이렇게 말하며 상자 하나를 꺼내 유현진한테 건네줬다."이건 저희 가족의 작은 성의입니다. 부디 받아주세요. 상자 속에 저의 명함도 있으니 혹시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드리겠습니다."만약 유현진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상자는
유현진이 멍하니 주강운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강한서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유현진은 그를 노려보면서 이렇게 물었다."너 뭐 하는 거야?"강한서는 유현진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잡고 담담하게 말했다."흰머리가 있길래."강한서의 손끝에는 확실히 하얀 머리카락이 있었다.유현진은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다. 어찌 됐든 지금은 흰 머리카락을 뽑을 타이밍이 아니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오늘따라 이상한 행동만 찾아서 했다.두 사람이 옥신각신하고 있는 모습은 금세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들어왔다.송민준은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우리가 저번에 만났을 때는 둘 다 고등학생이었는데 한서 너는 눈 깜짝할 사이에 현명한 아내를 찾아서 가정을 꾸렸구나."유현진은 겸손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강한서 곁에 드디어 똑똑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생각했다.이때 주강운도 이렇게 입을 보탰다."현진 씨는 제가 아는 여성분 중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에요."주강운은 어젯밤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기 시작했다.유현진은 자신이 한 일이 별로 용감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맨손을 변기 안으로 집어넣는 것은 꽤나 비위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일로 주강운은 그녀를 영웅이라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만약 유현진이 당사자가 아니었더라면 주강운의 말하고 있는 여자가 영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이야기를 듣고 난 정인월은 유현진이 아주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손자며느리가 얼마나 훌륭한 지를 칭찬하기 시작했다.화제는 어느새 유현진을 칭찬하는 것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처음에는 뿌듯하게 듣고 있던 유현진도 계속되는 칭찬 세례에 슬슬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이 와중에 강한서는 관찰하는 듯한 눈빛으로 유현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들이 칭찬하고 있는 여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여자가 맞는지 의심하는 것처럼 말이다.정인월은 말을 하다 말고 이렇게 한숨을 쉬었다."이제는 둘이 나한테 증손주만 만들어 준다면
"내가 요즘 너무 바빠서 자주 못 왔어. 절대로 네가 싫어진 게 아니라고. 왜 화를 내고 그래?""녀석이 알아듣나요?"주강운은 어느새 유현진의 옆으로 다가왔다.유현진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준이는 이 마구간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에요. 예전에 준이 앞에서 다른 말이 더 예쁘다고 칭찬을 했다가 물 마실 때 일부러 저를 향해 뱉기도 했어요.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다면 그렇게 했을 리가 없겠죠. 사람도 이 정도로 뒤끝이 길지가 않다고요!"준이는 유현진이 자신을 언급했다는 걸 알고 있는지 불만스러운 듯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유현진은 금세 말투를 바꿔 이렇게 달래줬다."착하지, 준이가 예쁘다고 칭찬해 주는 거야."이때 준이가 머리를 홱 돌려서 유현진과 마주했다.준이의 왼쪽 눈 위로 한 5cm쯤 되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흉터는 왼쪽 눈을 관통하고 있었다. 녀석의 왼쪽 눈은 밝게 빛나는 오른쪽 눈과 다르게 아주 어두웠다.이 흉터는 녀석에게 남다른 정중함을 선사했다. 마치 천군만마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전쟁의 신처럼 사람을 매료하는 매력이 있었다.준이가 갑자기 몸을 돌린 탓에 유현진은 깜짝 놀랐다. 준이는 그녀가 들고 있는 사과만 낚아챈 채 다시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그 모습에 유현진은 완전히 어이가 없었다.주강운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확실히 현진 씨를 좋아하는 것 같네요."송민준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잠깐 관찰하다가 강한서한테 이렇게 물었다."저렇게 자기주장이 강한 말도 길들여져?"강한서는 준이와 얘기를 하고 있는 유현진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누가 길들이냐에 따라 다르지.""한쪽 눈이 멀었는데도 길들일 수 있다고?""그럼 간단하게 경기라도 해볼래?"송민준은 강한서의 제안이 아주 솔깃했다."그럼 한 두 바퀴 돌아볼까?"강한서는 이렇게 말했다."말을 고르러 가자."송민준은 승마 고수였다. 그가 정인월한테 승마에 관심 있다고 말한 건 겸손에 불과했다. 그는 아마추어 승마 경기에 참가해서 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주강운은 실소를 터뜨렸다.“학생 때나 그랬지, 지금은 그렇게 유치하게 굴지 않아요.”‘서른이 넘은 남자 둘이서 형이라는 호칭 하나로 승마 시합을 하다니, 이러고도 안 유치하다고?’강한서도 역시 그의 제안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그럼 넌 오늘 형 생기겠네.”송민준이 웃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동생이 생길 수도 있는 거지.”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두 말은 쏜살같이 달려나갔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밤색 말이 준이를 꽤 많이 앞섰다. 두 말 사이의 간격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주강운이 말했다.“아무래도 시선이 가려져서 영향을 받나 봐요.”유현진이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준이는 절대 지지 않을 거에요.”게다가 준이를 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한서였다.그 둘은 환상의 짝꿍이었다. 강한서보다 경마로서의 준이의 프라이드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또 강한서보다 준이를 더 잘 다룰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참.”주강운은 갑자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이거 현진 씨 거죠?”유현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주강운의 손에 든 것은 그녀가 어젯밤에 착용했던 귀걸이였다.“네, 제 거 맞아요. 어제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감사 인사를 전한 유현진은 주강운의 선물을 챙기지 않은 걸 후회했다. 지금이 선물을 건넬 절호의 기회였는데 말이다.“민서는 뭐 하고 있어요?”주강운이 갑자기 물었다.유현진은 강민서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기에 건성건성 대답했다.“친구랑 나갔나 보죠.”주강운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한서가 안 혼냈어요?”“왜 혼내요?”“어젯밤 송민영 씨가 꽤 많이 다쳤거든요. 팔에 세 바늘이나 꿰맸어요. 당분간은 광고 촬영도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위약금도 꽤 많이 들었을걸요? 한서가 어젯밤 계속 병원에 있었어요. 걔 성격으로 민서를 엄청 세게 혼낼 줄 알았는데... 한서가 항상 민서를 엄하게 다뤘거든요.”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한서가 어젯밤 계속 병원에 있었어요."주
헬멧을 벗은 송민준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너 말한테 약이라도 먹였어?”강한서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트집 잡지 말고, 빨리 형이라고 불러.”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내기는 내기니까. 네, 알겠어요. 형.”강한서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주강운을 보더니 물었다.“녹음했어?”주강운이 핸드폰을 흔들며 말했다.“똑똑히 다 녹음됐어.”송민준이 입술을 씰룩거렸다.“왜 그렇게 유치하게 굴어?”강한서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주강운에게 말했다.“나한테 보내.”송민준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갑자기 물었다.“현진 씨는?”강한서는 그제서야 유현진이 사라졌다는 걸 발견했다. 그의 옷가지는 덩그러니 벤치에 놓여 있었다.주강운이 유현진의 말을 전했다.“해가 너무 비친다고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어.”송민준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오늘은 구름이 많아서 해가 그렇게 내리쬐지 않았다. 심지어 먹구름이 몰리면서 당장이라도 비가 내릴 기세였다.누가 들어도 해가 비친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했다.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여자들이 다 그렇지, 뭐. 내 동생은 흐린 날에도 탈까 봐 양산을 쓰고 다닌다니까.”강한서는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세 사람이 돌아올 때 유현진은 정인월을 도와 음식을 내오고 있었다.정인월은 돌아온 세 사람을 보며 얼른 손을 씻고 밥을 먹으라고 했다.정인월은 젊은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특히나 그들의 어릴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쭉 옆에서 지켜봤으니 애정이 더 많이 갔다. 그래서인지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아 밥맛도 더 좋아졌다.식사를 마친 후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옛날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유현진은 그들의 어릴 적 일들을 모르고 있었기에 얘기에 끼지 않고 과일 깎는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그녀는 주방에 있다가 거치적거린다는 소리를 듣고 곧 가정부에게 쫓겨났다.거실로 돌아가기 싫었던 유현진은 베란다로 에돌아가 잠시 머물기로 했다.목적
유현진이 멈칫하더니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왜 그렇게 물어요?”주강운이 악플러의 프로필 사진을 확대했다.“이 손을 봐봐요. 송민영 씨의 손 같지 않아요?”유현진에게 지속적으로 악플을 단 사람은 오른손으로 버블티를 들고 있는 프로필 사진을 사용했다.하지만 유현진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에게 악플을 남긴 대부분 사람이 송민영의 팬이라 프로필 사진으로 송민영의 사진을 써도 전혀 이상할 것 없었다.“그런데요?”“제가 이쪽 분야의 전문가인 친구한테 물어보니 그 어떤 플랫폼에서도 이 사진이 공유되지 않았대요. 사진 속의 각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버블티를 든 사람이 직접 찍은 사진 같거든요. 게다가 인스타그램이나 다른 플랫폼에서도 이 사진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어제 송민영 씨가 사인을 해줄 때 제가 유심히 손을 관찰해 봤어요. 사진에 찍힌 손과 똑같이 손아귀에 점이 있더라고요. 손이 가늘지 않은 관계로 송민영 씨는 촬영을 할 때 손을 클로즈업해야 하는 부분에서 대역 써요. 그래서인지 송민영 씨의 손 사진은 특히나 찾기 어렵죠.”주강운이 어제 송민영에게 사인을 받은 이유는 오로지 그녀의 손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유현진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곧바로 그의 뜻을 알아챘다.“그러니까 이 계정이 송민영 씨 본인 거라고요?”“본인은 아니더라도 주변 사람의 계정이겠죠. 아니면 어떻게 송민영 씨가 직접 찍은 사진을 갖고 있을 수 있겠어요?”차미주와 주강운 빼고 그 누구도 ‘선셋 스타’가 유현진의 계정이라는 걸 몰랐다. 주변 사람들도 모르는 걸 송민영은 더욱 알 길이 없으니 개인적인 원한 때문은 아닌 듯했다.그렇다면 이유가 더빙 일 말고는 없을 것이다.송민영과 유현진이 함께 한 작품은 대박을 터트렸다. 하지만 캐릭터를 제대로 살린 유현진의 더빙이 이슈가 된 덕분에 송민영이 받아야 할 관심을 가로채버렸다.송민영은 더빙 배우가 주목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팬들을 이끌고 몇 달 동안이나 악플을 달았다. 연예계에 몸 담근 지 한참 된 송민영은 물론 이번 일
유현진은 깜짝 놀랐다.‘양말 하나 갖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래?’그녀는 다급하게 설명했다.“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주머니 두 개가 거의 똑같게 생겨서 내가 잘못 봤어.”강한서는 여전히 유현진한테 쌀쌀맞게 굴었다.“그럼 전화해서 가져오라고 해.”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어떻게 그래? 이미 다 선물이라고 줬잖아. 그리고 2만 원짜리를 창피하게 어떻게 돌려달라고 해?”“선물한 걸 다시 가져가면 안 된다는 걸 너도 알고 있었어? 그러면서 왜 나한테 준 선물을 다른 사람한테 줘?”유현진은 강한서가 일부러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본가에 있을 때부터 예민하게 굴더니 그에게 양말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차에 진씨도 있었기에 유현진은 애써 화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나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양말이 무슨 대수라고, 하나 더 사주면 되잖아.”강한서는 무성의한 그녀의 태도에 더 울화가 치밀어올랐다.“하나 더 산다고 될 일이야? 너 전혀 양말을 챙기려고 하지 않았잖아!”유현진도 더는 이대로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진씨가 차에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버럭 화를 냈다.“그래, 난 챙길 생각이 없었어. 그러니 네가 알아서 챙기지 그랬어? 선물을 했는데도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도 없고 왜 그렇게 쌀쌀맞게 굴어? 네가 양말을 챙기려는지 안 챙기려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다른 사람한테 선물하니까 이제 와서 트집이야? 양말은 핑계고 나랑 싸우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강한서는 분노가 끓어올라 손까지 부들부들 떨렸다.“네가 잘못해놓고 왜 성질이야!”유현진이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내가 제일 잘못한 건 너한테 그 양말을 사준 거야. 싸움 걸 핑계만 만들어주고 말이야!”“아저씨, 차 좀 세워주세요!”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유현진이 고개를 휙 돌리면서 말했다.“네가 날 내쫓기 전에 내가 알아서 꺼져줄게!”강한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내가 언제 너한테 꺼지라고 했는데?”유현진은 이때다 싶어 옛날 일들을 들추어냈다.“강 대표님, 기
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얼마 후면 강한서와 이혼한다고 이실직고할 수도 없었다.“사모님. 큰사모님께서 받으시라고 하셨으니까 편하게 받으세요. 큰사모님이 알아서 답례를 하실 겁니다.”끝내 차 키는 유현진이 잠시 가지고 있기로 했다.별장으로 돌아간 후, 강한서는 이미 위층으로 올라가 있었다.가정부가 짐을 건네받으며 물었다.“사모님, 혹시 도련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얼굴색이 말이 아니에요.”유현진도 아직 화가 나 있었기에 덤덤하게 대답했다.“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마세요.”가정부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정신을 차렸다.유현진도 위층으로 올라갔다.다행히 강한서는 안방에 없었다. 안 그러면 유현진은 또 게스트 룸에서 자야 하는데 게스트 룸의 침대는 안방의 침대보다 불편했기에 그녀는 가기가 싫었다.그녀는 머리를 풀고 마른 옷을 챙기더니 욕실로 향했다.뜨거운 물이 머리부터 흐르며 온몸을 녹이자 스트레스가 저절로 풀릴 것만 같았다.강한서는 즐길 줄 아는 남자다. 그는 안방 화장실에 스파 욕조를 설치했는데 그 안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더없이 안락했다. 하지만 물을 받는 데에 20분이나 걸렸기에 유현진은 차마 기다릴 수가 없었다.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긴 그녀는 샴푸를 짜내 거품을 내고 부드러운 손길로 두피를 주물렀다.피부가 하얀 사람들은 보통 머리카락 색도 연한 편이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검고 풍성했다. 물에 젖힌 그녀의 머리카락은 마치 미역처럼 부드러웠다.유현진이 머리에 묻은 거품을 씻어내고 있을 때, 욕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그녀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타월을 찾았다. 하지만 발이 미끄러운 탓에 그녀는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넘어지려고 했다.강한서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주려고 했지만 유현진이 먼저 그의 팔을 덥석 잡는 바람에 두 사람은 같이 중심을 잃으며 바닥에 넘어졌다.강한서의 등이 바닥에 닿으면서 ‘쿵’ 소리가 났다.유현진은 발가벗은 채로 그의 몸 위로 넘어졌고 무릎도 까지고 말았다.하지
막 전화를 끊으려던 그 순간, 박안수가 다시 불렀다.“아, 그리고...”“뭔데?”“오늘 경찰서에서 한현진과 마주쳤어.”서해금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한현진이 경찰서엔 왜?”“나도 자세한 건 안 물어 봐서 잘 몰라. 하지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 혼자가 아니라 6, 7살 쯤 되는 어린 아이와 함께 왔었어.”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던 서해금이 또 물었다. “한현진이랑 얘기했어? 무슨 얘기했는데?”“괜히 의심할까봐 내가 경찰서에 간 이유를 사실대로 얘기했어. 한현진도 더 묻지 않았고.”우물 쭈물거리며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대답하는 편이 오히려 의심을 덜 사는 방법이었다. “그게 다야?”“응.”생각의 잠겼던 해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한테 손에 상처는 뭐라고 얘기했는데?”“회사에서 청소하다가 부식성 제품에 다친 거라고 했어.”서해금이 원망하듯 말했다. “왜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어. 회사에서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을 쓸 리가 없잖아.”“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다친 거라고 할 순 없잖아. 집에는 회사에서 다친 거라고 했는데. 조사 협조 요청을 나한테만 하는 게 아니잖아. 게다가 그 두 사람은 거짓말을 아예 못 해. 만약 경찰이 내 손에 관해 묻기라도 한다면 바로 들켜 버리는 거잖아.”서해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여자는 미쳤고 애는 귀가 먹었는데, 그런 병X도 제대로 통제 못 해?”순간 얼굴을 찡그린 박안수가 말했다. “말 그렇게 하지 마. 두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야.”“뭐가 불쌍해. 도박쟁이 가정폭력범을 성실하고 부지런한데다 박학다식한 남편으로 바꿔줬는데. 우리한테 고마워해도 모자라.”서해금의 말에 박안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너는 대화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던 서해금이 당부하며 말했다. “이만 끊어. 가람이한테 당신을 기사로 쓰라고 얘기하러 갈 거야. 소식 기다려.”박안수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지막하게 대답했다.“그래.”전화를 끊은 서해금은 아무리 생
“아니.”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찰에겐 뭐라고 했어?”수화기 너머의 사람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실대로 얘기했어.”“박안수!”서해금은 참기 힘들 정도로 화가 끓어올랐다. “지금이 농담할 때야?”“농담 아냐.”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가라앉았다. “그럼 내가 뭐라고 말할까? 네가 준 신분이니 난 당연히 주어진 대본대로 연기할 수밖에. 그럼 내가 난 박안수라고 얘기했어야 해? 죽은지 27년도 더 된 사람이야. 박안수가 어떻게 돌아와?”그의 목소리엔 고통과 원망으로 가득 했다. 그 순간, 서해금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날 탓하는 거야?”말이 없던 상대방은 잠시 후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박안수, 지금 날 탓하는 거잖아.”서해금이 공격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 빚을 진 사람도 당신이고,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이 가람이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거고, 당신이 가람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길 바랐고, 그래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사정한게 당신이었어.”“내가 당신한테 돈 안 줬어? 지금껏 내가 당신한테 준 돈이 얼만데. 당신은 얼마든지 해외에서 지금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어. 굳이 한주에 남겠다고 한 건 당신이야. 내가 당신에게 그럴 듯한 신분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당신이 무슨 명분으로 가람이 앞에 나타날 건데? 당신이 이렇게 당당하게 가람이를 만날 수나 있었을 것 같아?”목이 메인 남자는 한참만에야 눈을 감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탓한 거 아냐. 난 그저 이렇게 조마조마 마음 졸이는 생활에 지쳤을 뿐이야. 난 집에서도 감히 옷을 못 벗어. 잠도 깊게 잘 수가 없어. 길에서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 사람은 날 보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몰라. 그러면서도 아는 척, 반가운 척 인사를 해야 해. 심지어 아무리 아파도 검사도 못 해. X발, 병원도 가질 못한다고!”남자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네, 볼 일 봐요. 회사로 복귀하면 다시 얘기하죠.”한현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차는 이미 회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한현진은 곧바로 로비로 향했다. 회사의 프런트가 한현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짧게 인사를 받은 엘리베이터에 탄 한현진은 사무실이 아닌 2층을 눌렀다. 회사 건물은 2층부터 화장실이 있었기에 1층엔 화장실이 없었다. 한현진은 아예 2층부터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역시 공교롭게도 2층에 도착한 한현진은 마친 청소 중인 직원과 마주쳤다. 근무 시간이 화장실엔 사람이 없었다. 직원은 바닥을 닦고 있었고 세면대와 멀지 않은 곳에 청소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엔 청소 용품으로 가득 했다. 한현진은 고개를 숙여 청소 용품을 확인했다. 청소차엔 수많은 플라스틱 통과 병이 있었고 그 안엔 전부 액체가 담겨져 있었다. 굳이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소독제의 냄새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 제품들은 그 어떤 별다른 표시도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식성이 그렇게 강한 용액을 플라스틱 병에 담진 않았을 거 아냐.’“누구세요?”청소차를 관찰하는 한현진의 등 뒤로 사투리 억양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현진이 몸을 돌리니 청소 중이던 직원이 보였다. 그 직원은 아래층 청소를 도맡아 하는 분이라 한현진을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한현진이 화장실을 사용하려는 것이라 생각한 직원이 말했다. “아직 소독제를 쓰지 않았으니까 볼 일 보려면 얼른 봐요.”한현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청소차의 물건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 여쭤볼게 있어요. 화장실 청소를 하실 때 어느 브랜드의 농도가 얼마인 세정제를 사용하세요?”직원이 말했다. “도매 시장에서 파는 회색통이요. 커다란 거. 엄청 싸요.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사려고요?”한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항상 깨끗해서요. 저도 집에서 써보려고요.”청소 직원이 얼른 한현진을 말렸다. “절대 사지 마요. 변기의 때는 우리가 항상 솔로 조금씩 닦
또 다른 경찰이 물었다. “그래서 지장은 찍을 수 있어요?”“손이 그 지경인데 지장을 어떻게 찍어? 손을 보니까 지장은 무리인 것 같아서 포기했지. 어차피 지문도 완전히 회복하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애들한테 홍채와 성문을 따라고 했어.”말을 마친 키 큰 형사가 한현진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중에 회사에 가셔서 얘기 좀 하세요. 그렇게 부식성이 강한 제품은 얼른 교체하라고요. 만약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고 그 제품으로 가해라도 하면 회사에서도 책임지셔야 해요.”생각에 잠겼던 한현진이 그 말에 얼른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경찰서에서 나온 한현진은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은서가 본 것은 주혁의 태반이나 점이 아니라 청소 용액에 부식되어 생긴 상처였다. 어차피 납치 사건의 범인은 이미 잡혀 경찰서에 있는데, 대체 뭐가 그렇게 급해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고 경찰서로 달려온 것일까?한현진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회사에선 그런 고농도의 부식성 제품을 구매했을 리가 없었다. 형사의 말처럼 그런 제품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한현진은 이시연의 연락처를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음이 거의 끝나가도록 이시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곧이어 강한서에게 연락했다. 몇 초 후 통화가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강한서가 아닌 민경하였다. 강한서는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기에 민경하가 그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 “사모님, 저예요. 대표님께서 지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에요. 급한 일이시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 급한 일이 아니면 회의가 끝나면 바로 전화 드리라고 대표님께 말씀 드릴게요.”“급한 건 아녜요. 제가 지금 급히 회사에 가봐야 하는데 아직 은서랑 같이 있어서요. 제가 조금 이따가 회사로 가는 길에 은서를 먼저 한
주혁은 한현진보다 조금 더 먼저 경찰서에 도착한 것 같았다. 한현진이 도착했을 땐 주혁은 입구에서 통화 중이었다. 안색이 어두웠지만 그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대화하고 있었다. 그를 먼저 발견한 한현진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주혁이 곧 경계하듯 고개를 돌렸다. 한현진을 본 주혁이 멈칫하더니 곧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한현진이 말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기사님도 일 보러 오셨어요?”짧게 대꾸한 주혁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8년 전 제 아들을 납치한 마지막 용의자가 잡혔다고 해서요. 조사에 협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왔어요.”한현진이 놀라운 듯 물었다. “아드님이 납치되었었어요?”주혁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8, 9년 전 일이죠. 납치된 동안 납치범에게 맞아 치료 시간을 놓쳐 청력도 잃게 된 거예요. 그 사건을 맡은 형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사건이 종결되면 배상금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요.”얘기하는 동안 주혁은 아래쪽에서 자신의 손을 지긋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조용히 손바닥을 다리에 대고 말을 이었다. “곧 아이에게 인공 달팽이관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요.”주혁의 이야기가 한현진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그녀는 예의상 더는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다. 한현진은 대화주제를 돌리며 주혁에게 물었다. “제가 전에 추천해준 의사 분께 가 보셨어요?”주혁이 멈칫하며 대답했다. “아직이요.”한현진에게는 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주혁이 최대한 빨리 아이를 데리고 검사를 받으러 가 인공 달팽이관을 제작할 것이라 여겼다. 아무래도 주혁은 규정을 어기고 부업을 할 만큼 누구보다 간절하게 수술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현진이 그에게 일반 병원보다 더 싼 가격에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의사를 추천해주었음에도 지금까지 검사조차 받지 않았다고 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아내가 몸이 안 좋아서요. 전근된 곳이 전처럼
하온이는 적합한 골수를 기다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에게는 골수를 의식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처음으로 하은이에게 기회가 찾아 왔을 때는 골수 의식의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집안은 이미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라 아무리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도 수술비를 모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온의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수술을 포기한 채 아득바득 돈을 모으며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하지만 곧 있을 줄 알았던 두 번째 기회는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너무 오랜 기다림을 견뎌냈지만 하온의 몸은 이미 수술을 진행 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하온은 하루하루 날이 다르게 시들어 가는 꽃 같았다. 은서는 낮엔 하온이와 놀다가도 저녁엔 침대에 누워 눈물을 흘렸다. 하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은서는 강한서 품에 안겨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은서가 말했다. “삼촌, 저도 죽어요?”“삼촌, 우린 왜 이런 병에 걸린 거예요?”“삼촌 부자잖아요. 하온이 오빠가 수술할 수 있게 돈 빌려주시면 안 돼요? 제가 커서 돈 벌면서 갚을게요. 하온이 오빠 죽는거 싫어요.”강한서는 은서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서는 아직 너무 어려서, 인생은 가끔 이렇게 운명의 장난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목숨으로 돈을 맞바꾸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돈으로 목숨을 살 수는 없었다. 강한서는 은서가 아직까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때의 은서는 고작 5살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한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세상에는 가여운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니 혼자의 힘으로는 고작 얼마의 힘이나 보탤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 기대하는 아이의 기대를 깨트릴 수도 없었다. 한현진은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이거 전부 기부할 거야? 기부하면 은서에겐 아무 것도 없는 거야.”고개를 끄덕이던 은서가 곧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 “저 나
“넌 원래 은서한테 엄격하게 굴었잖아. 네가 나쁜 사람 역할을 하는 건 네 이미지에도 어울려. 난 평소에 은서한테 너무 따뜻하게 대해줘서 지금 엄하게 얘기해도 내 말은 안 믿을 거야. 그러니까 나쁜 사람은 역시 네가 해야 해. 한 번 더 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강한서가 대답할 새도 없이 등 뒤로 갑자기 은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모~”“응.”얼른 대답한 한현진이 몸을 돌리자 은서가 동그랗고 큰 눈을 반짝이며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두 분 연애하시는데 방해한 거예요?”한현진: ...“그건 아닌데...”“그럼 뭐하고 계셨어요?”한현진이 강한서에게 얼른 시작하라며 눈짓을 보냈다. 강한서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한현진을 배신했다. “은서야, 현진 이모가 은서한테 할 얘기가 있대.”한현진: ...은서가 한현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이가 눈빛으로 할 얘기가 뭐냐며 묻고 있었다. 한현진은 속으로 강한서를 의리도 없는 놈이라며 욕을 지껄였다. 단순하고 맑은 은서의 눈을 마주한 한현진은 그 어떤 훈육의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강한서는 그런 한현진의 속도 모르고 마음 독하게 먹으라며 뒤에서 슬며시 한현진의 허리를 다독였다. 입술을 달싹인 한현진은 계획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게... 사실은 별 거 아냐.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려고 했어.”강한서:...은서가 눈웃음을 지었다. “수제비요! 할머니가 이따가 만드는 법 배워주신다고 하셨어요. 이모가 새우 수제비를 제일 좋아한다면서요. 제가 배워서 만들어드릴게요.”마음이 약해진 한현진은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 맞다. 잠깐만 기다려요.”은서가 말하고 총총 달려갔다. 어리둥절한 한현진을 뒤로 한 채 잠시 후, 은서가 저금통을 안고 돌아왔다. 아이는 작은 돼지 저금통을 한현진 앞으로 들어 올리며 빨간 얼굴로 말했다. “현진 이모. 혹시 이 돈...”주머니에서 돈다발 하나를 꺼내 한현진에게 꺼낸 은서가
의사로서의 기본적인 도덕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부하 직원을 잘 대할 리가 없었다. 돈만 충분히 준다면 황 닥터의 죄증을 대신 비행기에 실어줄 사람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황 닥터는 외국인이었기에 이 곳에서 불법을 저지른다고 해도 결국 본국으로 송환되어 벌의 제재를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황 닥터를 처단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황 닥터의 입국이 금지 당한다면 송가람은 다른 방법으로 약을 구매할 것이다. 그때가 바로 송가람을 일망타진할 좋은 기회였다. 한현진이 알아차렸다는 듯 말했다. “결국은 돈지X로 해결한 거네.”멈칫하던 강한서가 갑자기 말했다. “너 방금 싸울 때 욕했지?”한현진이 눈을 깜박였다. “아닐걸.”“했어!”강한서가 한현진을 노려보았다. “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잊었어?”‘태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음악을 듣고 이야기를 해주고, 또 뭐가 있더라? 기억이 안 나네.’어제 들었던 태교 수업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한현진은 수면으로 채웠다. 강한서는 본인의 뱉은 말을 지켜 거금을 들여 태교 선생님을 고용해 1 대 1로 집에서 한현진이 수업을 받도록 했다. 유난히 나긋하고 부드러운 선생님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임산부와 아이들을 상대하는 본인의 직업과 찰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에 졸음이 솔솔 쏟아졌다. 수업하는 동안 한현진은 졸음이 몰려와 몽롱한 정신 상태를 유지했다. 학창시절 제일 싫어하는 수학 시간에도 이렇게 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한현진과 달리 강한서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노트를 정리했다. 한현진이 하품을 하며 강한서에게 물었다. “기억력도 좋으면서 노트도 작성하는 거야?”그때의 강한서가 뭐라고 했더라?“아무리 좋은 기억력도 작성된 기록보다는 못한 법이니까.”그 한 마디가 태교 수업 중 유일하게 한현진의 기억에 남은 말이었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전부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한쪽으로 흘러나간 탓에 단 한 글자에 머리에 남지 않았
막장 소설을 거부하던 강한서는 강박적으로 소설을 듣기 시작해 결국 소설의 내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아니, 왜 막장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하나 같이 멍청하거나 무지하게 구는 거야? 게다가 상남자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틈만 나면 여자 주인공에게 소리나 지르면서, 왜 그러는 거야?”“남자 주인공 미친 거 아냐? 억지로 여자 주인공이 신장 기부를 하게 하다니. 조직 폭력배야?”“이쪽 세계에서는 신고를 하면 판결이라도 받아?”“대체 왜 이렇게 멍청한 거야? 여자 주인공이 밀친 거라는 서브 여주인공 말을 믿어? CCTV를 찾아보는 건 불법인가 보지?”“현진아, 지금 나 미안하라고 들려주는 거야?”“난 못 해. 이 소설에 나오는 인간들은 전부 미친 거 같아. 대체 여자 주인공은 저런 남자를 왜 좋아하는 거야.”한현진이 말했다. “미쳤든 아니든, 소설처럼만 하면 돼. 순진한 척 하는 여우는 자기를 감싸주는 남자에겐 껌뻑 죽는 법이니까.”강한서는 전혀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머리는 몸보다 성실했다. 일부러 배우지 않아도 그의 머리는 이미 모든 것을 저장했다. 막장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대사를 완벽히 재현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표정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다행히 송가람은 표정까지는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 아니라면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송가람을 보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 강한서의 모습을 들켜버렸을 것이다. 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너에게 소설을 들려준 내 노력이 헛되진 않았어. 진보가 빠른걸? 뭔가 유용한 팁이라도 있을까요, 강 대표님?”강한서가 말했다. “소리를 잘 지르면 돼.”그 말에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녀는 1층의 베란다 난간에 기댄 채 강한서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이리 와.”“그렇게 나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강한서는 불만스럽게 투덜대면서도 한현진에게로 향했다. 베란다 밖에는 재스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한현진은 난간 너머로 강한서의 목을 끌어안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