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운은 실소를 터뜨렸다.“학생 때나 그랬지, 지금은 그렇게 유치하게 굴지 않아요.”‘서른이 넘은 남자 둘이서 형이라는 호칭 하나로 승마 시합을 하다니, 이러고도 안 유치하다고?’강한서도 역시 그의 제안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그럼 넌 오늘 형 생기겠네.”송민준이 웃더니 자신 있게 말했다.“동생이 생길 수도 있는 거지.”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두 말은 쏜살같이 달려나갔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밤색 말이 준이를 꽤 많이 앞섰다. 두 말 사이의 간격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주강운이 말했다.“아무래도 시선이 가려져서 영향을 받나 봐요.”유현진이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준이는 절대 지지 않을 거에요.”게다가 준이를 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한서였다.그 둘은 환상의 짝꿍이었다. 강한서보다 경마로서의 준이의 프라이드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또 강한서보다 준이를 더 잘 다룰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참.”주강운은 갑자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이거 현진 씨 거죠?”유현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주강운의 손에 든 것은 그녀가 어젯밤에 착용했던 귀걸이였다.“네, 제 거 맞아요. 어제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감사 인사를 전한 유현진은 주강운의 선물을 챙기지 않은 걸 후회했다. 지금이 선물을 건넬 절호의 기회였는데 말이다.“민서는 뭐 하고 있어요?”주강운이 갑자기 물었다.유현진은 강민서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기에 건성건성 대답했다.“친구랑 나갔나 보죠.”주강운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한서가 안 혼냈어요?”“왜 혼내요?”“어젯밤 송민영 씨가 꽤 많이 다쳤거든요. 팔에 세 바늘이나 꿰맸어요. 당분간은 광고 촬영도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위약금도 꽤 많이 들었을걸요? 한서가 어젯밤 계속 병원에 있었어요. 걔 성격으로 민서를 엄청 세게 혼낼 줄 알았는데... 한서가 항상 민서를 엄하게 다뤘거든요.”유현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한서가 어젯밤 계속 병원에 있었어요."주
헬멧을 벗은 송민준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너 말한테 약이라도 먹였어?”강한서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트집 잡지 말고, 빨리 형이라고 불러.”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그래도 내기는 내기니까. 네, 알겠어요. 형.”강한서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주강운을 보더니 물었다.“녹음했어?”주강운이 핸드폰을 흔들며 말했다.“똑똑히 다 녹음됐어.”송민준이 입술을 씰룩거렸다.“왜 그렇게 유치하게 굴어?”강한서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주강운에게 말했다.“나한테 보내.”송민준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갑자기 물었다.“현진 씨는?”강한서는 그제서야 유현진이 사라졌다는 걸 발견했다. 그의 옷가지는 덩그러니 벤치에 놓여 있었다.주강운이 유현진의 말을 전했다.“해가 너무 비친다고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어.”송민준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오늘은 구름이 많아서 해가 그렇게 내리쬐지 않았다. 심지어 먹구름이 몰리면서 당장이라도 비가 내릴 기세였다.누가 들어도 해가 비친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했다.송민준이 웃으며 말했다.“여자들이 다 그렇지, 뭐. 내 동생은 흐린 날에도 탈까 봐 양산을 쓰고 다닌다니까.”강한서는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세 사람이 돌아올 때 유현진은 정인월을 도와 음식을 내오고 있었다.정인월은 돌아온 세 사람을 보며 얼른 손을 씻고 밥을 먹으라고 했다.정인월은 젊은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특히나 그들의 어릴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쭉 옆에서 지켜봤으니 애정이 더 많이 갔다. 그래서인지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아 밥맛도 더 좋아졌다.식사를 마친 후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옛날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유현진은 그들의 어릴 적 일들을 모르고 있었기에 얘기에 끼지 않고 과일 깎는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그녀는 주방에 있다가 거치적거린다는 소리를 듣고 곧 가정부에게 쫓겨났다.거실로 돌아가기 싫었던 유현진은 베란다로 에돌아가 잠시 머물기로 했다.목적
유현진이 멈칫하더니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왜 그렇게 물어요?”주강운이 악플러의 프로필 사진을 확대했다.“이 손을 봐봐요. 송민영 씨의 손 같지 않아요?”유현진에게 지속적으로 악플을 단 사람은 오른손으로 버블티를 들고 있는 프로필 사진을 사용했다.하지만 유현진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에게 악플을 남긴 대부분 사람이 송민영의 팬이라 프로필 사진으로 송민영의 사진을 써도 전혀 이상할 것 없었다.“그런데요?”“제가 이쪽 분야의 전문가인 친구한테 물어보니 그 어떤 플랫폼에서도 이 사진이 공유되지 않았대요. 사진 속의 각도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버블티를 든 사람이 직접 찍은 사진 같거든요. 게다가 인스타그램이나 다른 플랫폼에서도 이 사진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어제 송민영 씨가 사인을 해줄 때 제가 유심히 손을 관찰해 봤어요. 사진에 찍힌 손과 똑같이 손아귀에 점이 있더라고요. 손이 가늘지 않은 관계로 송민영 씨는 촬영을 할 때 손을 클로즈업해야 하는 부분에서 대역 써요. 그래서인지 송민영 씨의 손 사진은 특히나 찾기 어렵죠.”주강운이 어제 송민영에게 사인을 받은 이유는 오로지 그녀의 손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유현진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곧바로 그의 뜻을 알아챘다.“그러니까 이 계정이 송민영 씨 본인 거라고요?”“본인은 아니더라도 주변 사람의 계정이겠죠. 아니면 어떻게 송민영 씨가 직접 찍은 사진을 갖고 있을 수 있겠어요?”차미주와 주강운 빼고 그 누구도 ‘선셋 스타’가 유현진의 계정이라는 걸 몰랐다. 주변 사람들도 모르는 걸 송민영은 더욱 알 길이 없으니 개인적인 원한 때문은 아닌 듯했다.그렇다면 이유가 더빙 일 말고는 없을 것이다.송민영과 유현진이 함께 한 작품은 대박을 터트렸다. 하지만 캐릭터를 제대로 살린 유현진의 더빙이 이슈가 된 덕분에 송민영이 받아야 할 관심을 가로채버렸다.송민영은 더빙 배우가 주목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팬들을 이끌고 몇 달 동안이나 악플을 달았다. 연예계에 몸 담근 지 한참 된 송민영은 물론 이번 일
유현진은 깜짝 놀랐다.‘양말 하나 갖고 왜 이렇게 호들갑이래?’그녀는 다급하게 설명했다.“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주머니 두 개가 거의 똑같게 생겨서 내가 잘못 봤어.”강한서는 여전히 유현진한테 쌀쌀맞게 굴었다.“그럼 전화해서 가져오라고 해.”유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어떻게 그래? 이미 다 선물이라고 줬잖아. 그리고 2만 원짜리를 창피하게 어떻게 돌려달라고 해?”“선물한 걸 다시 가져가면 안 된다는 걸 너도 알고 있었어? 그러면서 왜 나한테 준 선물을 다른 사람한테 줘?”유현진은 강한서가 일부러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본가에 있을 때부터 예민하게 굴더니 그에게 양말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차에 진씨도 있었기에 유현진은 애써 화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나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양말이 무슨 대수라고, 하나 더 사주면 되잖아.”강한서는 무성의한 그녀의 태도에 더 울화가 치밀어올랐다.“하나 더 산다고 될 일이야? 너 전혀 양말을 챙기려고 하지 않았잖아!”유현진도 더는 이대로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진씨가 차에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버럭 화를 냈다.“그래, 난 챙길 생각이 없었어. 그러니 네가 알아서 챙기지 그랬어? 선물을 했는데도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도 없고 왜 그렇게 쌀쌀맞게 굴어? 네가 양말을 챙기려는지 안 챙기려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다른 사람한테 선물하니까 이제 와서 트집이야? 양말은 핑계고 나랑 싸우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강한서는 분노가 끓어올라 손까지 부들부들 떨렸다.“네가 잘못해놓고 왜 성질이야!”유현진이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내가 제일 잘못한 건 너한테 그 양말을 사준 거야. 싸움 걸 핑계만 만들어주고 말이야!”“아저씨, 차 좀 세워주세요!”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유현진이 고개를 휙 돌리면서 말했다.“네가 날 내쫓기 전에 내가 알아서 꺼져줄게!”강한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내가 언제 너한테 꺼지라고 했는데?”유현진은 이때다 싶어 옛날 일들을 들추어냈다.“강 대표님, 기
유현진은 할 말을 잃었다.얼마 후면 강한서와 이혼한다고 이실직고할 수도 없었다.“사모님. 큰사모님께서 받으시라고 하셨으니까 편하게 받으세요. 큰사모님이 알아서 답례를 하실 겁니다.”끝내 차 키는 유현진이 잠시 가지고 있기로 했다.별장으로 돌아간 후, 강한서는 이미 위층으로 올라가 있었다.가정부가 짐을 건네받으며 물었다.“사모님, 혹시 도련님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얼굴색이 말이 아니에요.”유현진도 아직 화가 나 있었기에 덤덤하게 대답했다.“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마세요.”가정부가 흠칫 놀라더니 이내 정신을 차렸다.유현진도 위층으로 올라갔다.다행히 강한서는 안방에 없었다. 안 그러면 유현진은 또 게스트 룸에서 자야 하는데 게스트 룸의 침대는 안방의 침대보다 불편했기에 그녀는 가기가 싫었다.그녀는 머리를 풀고 마른 옷을 챙기더니 욕실로 향했다.뜨거운 물이 머리부터 흐르며 온몸을 녹이자 스트레스가 저절로 풀릴 것만 같았다.강한서는 즐길 줄 아는 남자다. 그는 안방 화장실에 스파 욕조를 설치했는데 그 안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더없이 안락했다. 하지만 물을 받는 데에 20분이나 걸렸기에 유현진은 차마 기다릴 수가 없었다.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긴 그녀는 샴푸를 짜내 거품을 내고 부드러운 손길로 두피를 주물렀다.피부가 하얀 사람들은 보통 머리카락 색도 연한 편이었다. 하지만 유현진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검고 풍성했다. 물에 젖힌 그녀의 머리카락은 마치 미역처럼 부드러웠다.유현진이 머리에 묻은 거품을 씻어내고 있을 때, 욕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그녀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타월을 찾았다. 하지만 발이 미끄러운 탓에 그녀는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넘어지려고 했다.강한서는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주려고 했지만 유현진이 먼저 그의 팔을 덥석 잡는 바람에 두 사람은 같이 중심을 잃으며 바닥에 넘어졌다.강한서의 등이 바닥에 닿으면서 ‘쿵’ 소리가 났다.유현진은 발가벗은 채로 그의 몸 위로 넘어졌고 무릎도 까지고 말았다.하지
”대본이 통과됐어!”유현진이 샤워를 마치자마자 차미주가 잔뜩 신난 채로 전화를 걸어왔다.유현진은 활짝 웃으며 물었다.“결과가 이렇게 빨리 나왔어?”어제까지만 해도 차미주는 대본을 수정하고 있었는데 단번에 통과될 줄이야!“그래, 나도 엄청 놀랐어. 아침에 제출할 때도 퇴짜맞고 다시 수정할 준비를 했다니까. 그런데 방금 대본이 통과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지 뭐야. 다음 주에 와서 계약하래.”유현진이 머리를 묶으며 물었다.“얼마에 팔릴 수 있대?”“아직 정해진 건 아닌데 많아서 2억 정도 받지 않을까? 첫 권은 다 그렇게 받더라고.”“만약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작가가 될 수 있어?”“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보통 제작사에서 대본을 쌓아둔단 말이야. 내 대본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려면 기회가 딱 들어맞아야 가능해. 잘 나가는 작가들은 보통 계약하고 길어서 2년이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우리 같이 이름 없는 사람들은 저작권이 만료될 때까지도 그런 기회가 흔히 주어지지 않아. 작가는 꿈도 못 꾸지.”그녀의 말을 들은 유현진은 아쉬워했다.하지만 차미주는 꽤 긍정적이었다.“대본이 팔린 게 어디야. 난 아직 젊으니까 그렇게 급하지도 않아. 언젠간 내 대본도 방송되겠지.”유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그때면 신인이든 베테랑이든 다 네 작품에 출연해달라며 줄을 설 거야.”차미주도 히쭉 웃으며 말했다.“그럼 널 여자 주인공으로 발탁하고 슈퍼스타로 만들어줄게. 그때면 강한서도 너한테 쩔쩔맬걸?”유현진의 얼굴에 담긴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 사람 얘기하지도 마. 짜증 나니까.”차미주는 바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왜, 둘이 또 싸웠어?”울분에 차 있던 유현진은 오늘 있었던 일을 모두 차미주에게 얘기했다.그러고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그 사람이 양말 때문에 그러겠어? 내가 만만해 보인 거겠지! 나도 문제야, 왜 괜히 양말을 사서 이 고생을 해?”“잠깐, 내가 소개해준 변호사가 강한서 친구라고? 전에
신미정이 되물었다.“모르고 있었어?”유현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 파티가 끝나고 나서 저는 바로 어머니를 보러 가서 나중에 있었던 일은 잘 몰라요. 한성우 씨가 민서를 집에 데려다줬을걸요?”신미정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나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아침에 민서가 울면서 나한테 오더니 한서가 자기를 화장실에 가뒀다가 아침이 돼서야 풀어줬대. 민서한테 물어봐도 얘기를 잘 안 하고. 어젯밤에 너도 있었으니까 네가 알 줄 알았지.”유현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강한서가 강민서를 화장실에 하룻밤 내내 가뒀다니. 미친 거 아니야?유현진은 강한서가 자신을 위해 화풀이를 했을 거라는 김칫국을 마실 생각은 없었다. 낮에 송민준이 본가로 감사 인사를 전하러 왔을 때도 강한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마 송가람이 갇힌 걸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송민준은 전혀 강민서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었다. 아마 강한서가 먼저 강민서에게 벌을 내린 걸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송가람 때문에 강한서가 강민서를 가뒀다고 해도 유현진은 속이 후련했다.유현진은 어리둥절한 말투로 말했다.“저도 모르겠어요. 한서가 저한테 아무 얘기도 안 했거든요. 어머님, 민서는 어때요? 괜찮아요?”“별일 없어. 감기에 걸렸는지 약 먹고 바로 잤어.”‘쌤통이다!’속이 후련한 유현진이 능청스럽게 말했다.“제가 한성우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까요? 어젯밤에 계셨으니 잘 아실 거 아니에요?”“아니야.”신미정은 모르는 사람한테 집안일을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유현진과 내일 오후의 약속을 잡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강한서는 저녁에 서재에서 잔 듯 했다.다음 날 아침, 유현진이 잠에서 깨어날 때 강한서는 이미 집을 나섰다.가정부는 그가 아침을 챙겨 먹지 않았다며 걱정을 했다.그 모습을 본 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다 큰 성인이 혼자 밥을 못 챙겨 먹겠어?’그녀가 집을 나서려던 찰나 가정부가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도시락을 건네주며 말했다.“사모님, 가는
만약 유현진이 신미정을 몰랐다면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직장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미정의 나이를 알고 있음에도 그녀의 젊은 얼굴에 유현진은 깜짝 놀라곤 했다.하지만 ‘젊은’ 시어머니는 그렇게 상대하기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그녀가 손주를 보려는 집착은 숨 막힐 정도였다.차 시동이 걸리자 신미정이 덤덤하게 말했다.“피 검사해야 하는데 뭘 먹진 않았지?”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한서도 알고 있어? 내가 널 데리고 검사하러 간다는 걸?”“얘기 안 했어요.”두 사람은 한참 냉전 중이라 유현진은 강한서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먼저 말을 건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유현진은 강한서와 얘기할 마음도 없었다.신미정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차는 곧 상제 병원 앞에 멈춰 섰다.상제 병원은 사립 병원으로서 한주시에서 엄청 유명한 병원이었다. 비싼 만큼 의료 기기도 최고급이고 의사도 전문적이니 연예인이나 상업 거물 같은 사람들은 이 병원만 찾아다녔다.그리고 다른 병원보다 사람이 적어서 검사 같은 건 줄을 서지 않아도 되었다.대기 번호를 받고 의사와 진찰한 후 유현진은 신미정에게 말했다.“어머님,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검사는 모두 다른 병동에서 한다네요. 검사를 다 마치고 제가 이쪽으로 다시 찾아올게요.”신미정은 원래 그녀와 함께 가고 싶었는데 갑자기 전화가 오는 바람에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다.유현진은 피 검사, 소변 검사를 마치고 또 초음파실 밖에서 대기했다.사람이 많은지 그녀는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초음파실로 향했다.그녀에게 검사를 해주는 의사는 꽤 젊어 보였다. 의사는 한참 보다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혹시 전에 수술하신 적 있으세요?”“몇 년 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작은 수술을 했었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선생님?”“교통사고요?”젊은 의사가 한참 고민하더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자세한 건 주치의한테서 들으세요.”그러고는 검사 결과에 사인을 하고 다음 사람을 불렀다.유현진은 검사 결과를 한참이나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
진윤은 6분 차이로 강한서에게 패배했다. 그가 결승점에 도착했을 때, 강한서는 이미 안정적인 호흡을 되찾고 있었다. 결승점을 통과한 진윤은 다리가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 했다. 강한서가 다가가 그런 진윤을 일으켜 세웠다. “서서 쉬다가 나중에 앉아.”말하며 물뚜껑을 따 진윤에게 건넸다. “천천히 마셔.”진윤은 이 상황이 창피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엔 강한서를 얕보고 경기에 진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챙겨주는 강한서를 보며 자신이 너무 유치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숨을 몰아쉬며 강한서가 내민 물을 받은 진윤은 아무 말 없이 꿀꺽꿀꺽 물을 삼켰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또 물을 한 병 가져다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넌 괜찮아?”강한서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비록 꾸준히 러닝을 하고 있었지만 하프 마라톤을 뛴 건 오랜만이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진윤을 쳐다보았다. 충격이 꽤 컸는지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아이는 풀이 죽은 얼굴로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기대했던 것만큼 큰 실망이 안겨왔다. 진윤은 심지어 주호를 앞에 두고도 대화를 나눌 의욕조차 찾지 못했다. “가자. 쉬다가 같이 밥이나 먹어.”진윤이 시선을 올렸다. “이겼다고 저랑 축하라도 하시게요?”강한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조 회장님 소개해줄게.”멈칫한 진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제가 졌잖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졌으니까 팀에 입단할 수는 없지만 소개는 받을 수 있잖아.”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소개받고 싶지 않은 거야?”“아뇨!”다급하게 대답하던 진윤이 곧 쑥스러운 듯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뭐야... 형님 그 나이에 체력이 아직도 좋으시네요. 제가 졌어요. 인정해요. 형님이 이기셨어요.”진윤의 말에 강한서가 멈칫했다. “그 나이라니?”곧 불혹의 나이라고 대답하려던 진윤은 강한서 뒤에서 눈짓을 보내는 한현진의 모습에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아부했다.
한현진은 한참을 멍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강한서에게 그날의 일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강한서는 본인 덕에 한현진이 월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줄곧 월급을 전부 돌려받을 수 있었던 건 주최 측에서 한현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꽤 단순한 생각이었다. 모터쇼라는 큰 활동에 주최 측에서 안내 요원까지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알바의 잘못이든 아니든, 그건 그들의 관심 밖의 얘기였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일 간단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강한서였어... 강한서가...’“강한서 그 자식, 마음을 꼭꼭 숨기기도 했네. 이미 그때부터 눈 여겨 보고 있었던 거네요.”감탄하는 주한과 달리 한현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님, 강한서가 절 도와줬을 땐 아무런 사심도 없었을 거라고 전 생각해요. 그날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저든 아니든, 한서는 그렇게 했을 거예요.”당시 강한서는 한현진을 부르지도, 인사도 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시간이 흘러 한현진이 다시 그 얘기를 꺼냈지만 그는 여전히 솔직한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고 그 일을 핑계로 점수를 더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도운 건 절대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조한이 웃으며 말했다. “사심이 있었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어쨌든 두 사람 인연은 삼심할 매가 쇠줄로 꽉 묶어놓은 것 같네요. 인연이 깊어도 너무 깊어.”한현진도 그 말에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만약 한현진이 죽은 그 태아와 바뀌지 않았다면 그녀와 강한서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둘도 없는 사이였을 것이다. 바뀌었어도 결국은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하늘이 이어준 인연이 틀림없었다. 진윤은 빠른 속도로 첫 바퀴를 완주했다. 강한서는 진윤과 2km정도 뒤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바퀴부터 진윤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지만 강한서는 여전
조한이 선글라스를 벗자 지적인 이미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입꼬리를 올려 씩 웃으며 말했다. “학교 다닐 땐 선배라고 부르더니 졸업하니까 회장님이야?”강한서가 한현진을 향해 설명했다. “대학원 선배님이셔. 같은 지도교수님이었거든.”한현진이 조한의 비위에 맞게 대답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역시, 제수씨가 한서보다 낫네.”한현진과 인사 몇 마디를 나눈 조한이 강한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나이가 몇인데 어린애랑 따지고 그래?”강한서가 말했다. “선배보다는 어려요. 제 아내는 아직도 대학생 같다고 하던데요.”조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제수씨가 아이 달래듯 잘 하나봐.”한현진: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진윤도 도착했다. 강한서가 승부를 인정하지 않을까 걱정된 그는 증인이 되어줄 친구 두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기세등등하게 걸어오던 진윤은 한현진을 보더니 곧바로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더니 조한을 발견하고는 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진윤은 그제야 강한서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날 뉴벨리 팀에 추천해줄 수 있나봐.’조한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진윤을 응원했다. “청년, 저 자식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내가 팀장 자리도 고민해볼게요.”한현진도 진윤을 향해 말했다. “파이팅! 결승점에서 기다릴게요.”두 사람의 응원에 후끈 달아오른 진윤은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진윤에게 한현진과 조한은 그야말로 우주대스타였다. 그러니 그들의 응원은 그에게 흥분제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경기에서 진다는 것은 자신의 우상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일이었다. 준비 운동을 마치고 시작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리자 진윤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린 나이라 그런지 폭발력이 대단했다. 그는 곧 강한서와 차이를 벌리며 앞서나갔다. 강한서는 진윤의 속도를 따라 빨리 달리지 않고 꾸준히 똑같은 페이스를 유지했다. 한현진은 망원경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