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정이 되물었다.“모르고 있었어?”유현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 파티가 끝나고 나서 저는 바로 어머니를 보러 가서 나중에 있었던 일은 잘 몰라요. 한성우 씨가 민서를 집에 데려다줬을걸요?”신미정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나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아침에 민서가 울면서 나한테 오더니 한서가 자기를 화장실에 가뒀다가 아침이 돼서야 풀어줬대. 민서한테 물어봐도 얘기를 잘 안 하고. 어젯밤에 너도 있었으니까 네가 알 줄 알았지.”유현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강한서가 강민서를 화장실에 하룻밤 내내 가뒀다니. 미친 거 아니야?유현진은 강한서가 자신을 위해 화풀이를 했을 거라는 김칫국을 마실 생각은 없었다. 낮에 송민준이 본가로 감사 인사를 전하러 왔을 때도 강한서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마 송가람이 갇힌 걸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송민준은 전혀 강민서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었다. 아마 강한서가 먼저 강민서에게 벌을 내린 걸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송가람 때문에 강한서가 강민서를 가뒀다고 해도 유현진은 속이 후련했다.유현진은 어리둥절한 말투로 말했다.“저도 모르겠어요. 한서가 저한테 아무 얘기도 안 했거든요. 어머님, 민서는 어때요? 괜찮아요?”“별일 없어. 감기에 걸렸는지 약 먹고 바로 잤어.”‘쌤통이다!’속이 후련한 유현진이 능청스럽게 말했다.“제가 한성우한테 전화해서 물어볼까요? 어젯밤에 계셨으니 잘 아실 거 아니에요?”“아니야.”신미정은 모르는 사람한테 집안일을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유현진과 내일 오후의 약속을 잡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강한서는 저녁에 서재에서 잔 듯 했다.다음 날 아침, 유현진이 잠에서 깨어날 때 강한서는 이미 집을 나섰다.가정부는 그가 아침을 챙겨 먹지 않았다며 걱정을 했다.그 모습을 본 유현진은 어이가 없었다.‘다 큰 성인이 혼자 밥을 못 챙겨 먹겠어?’그녀가 집을 나서려던 찰나 가정부가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도시락을 건네주며 말했다.“사모님, 가는
만약 유현진이 신미정을 몰랐다면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직장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미정의 나이를 알고 있음에도 그녀의 젊은 얼굴에 유현진은 깜짝 놀라곤 했다.하지만 ‘젊은’ 시어머니는 그렇게 상대하기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그녀가 손주를 보려는 집착은 숨 막힐 정도였다.차 시동이 걸리자 신미정이 덤덤하게 말했다.“피 검사해야 하는데 뭘 먹진 않았지?”유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한서도 알고 있어? 내가 널 데리고 검사하러 간다는 걸?”“얘기 안 했어요.”두 사람은 한참 냉전 중이라 유현진은 강한서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먼저 말을 건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유현진은 강한서와 얘기할 마음도 없었다.신미정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차는 곧 상제 병원 앞에 멈춰 섰다.상제 병원은 사립 병원으로서 한주시에서 엄청 유명한 병원이었다. 비싼 만큼 의료 기기도 최고급이고 의사도 전문적이니 연예인이나 상업 거물 같은 사람들은 이 병원만 찾아다녔다.그리고 다른 병원보다 사람이 적어서 검사 같은 건 줄을 서지 않아도 되었다.대기 번호를 받고 의사와 진찰한 후 유현진은 신미정에게 말했다.“어머님,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검사는 모두 다른 병동에서 한다네요. 검사를 다 마치고 제가 이쪽으로 다시 찾아올게요.”신미정은 원래 그녀와 함께 가고 싶었는데 갑자기 전화가 오는 바람에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다.유현진은 피 검사, 소변 검사를 마치고 또 초음파실 밖에서 대기했다.사람이 많은지 그녀는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초음파실로 향했다.그녀에게 검사를 해주는 의사는 꽤 젊어 보였다. 의사는 한참 보다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혹시 전에 수술하신 적 있으세요?”“몇 년 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작은 수술을 했었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선생님?”“교통사고요?”젊은 의사가 한참 고민하더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자세한 건 주치의한테서 들으세요.”그러고는 검사 결과에 사인을 하고 다음 사람을 불렀다.유현진은 검사 결과를 한참이나
강한서는 민경하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유현진을 알아봤다.유현진은 덤덤한 얼굴로 그의 손에 든 머리띠를 힐끔 보고는 다시 시선을 강한서에게로 옮겼다.그는 저도 모르게 머리띠를 더 꽉 쥐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유현진에게 다가갔다.“네가 왜 여기에 있어?”유현진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걱정하지 마. 너를 미행할 정도로 내가 심심하진 않으니까.”그러고는 손에 든 검사 결과를 흔들며 말했다.“어머님이랑 검사하러 왔어.”강한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엄마랑 같이 왔어?”“응.”강한서의 표정은 아주 복잡했다.하지만 유현진은 그의 기분을 알아챌 겨를이 없었다. 아침부터 병원에서 강한서를 만난 것도 기분이 꺼림칙했다.‘이 시간에 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누구겠어? 강한서를 아침 6시에 서둘러 병원까지 오게 만들었으니 참 대단해. 얼씨구, 머리띠까지 챙기고.’그녀는 애써 화를 억눌렀다.“강 대표님은 계속 일을 보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유현진이 이 말을 남기고는 강한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그러자 강한서가 갑자기 그녀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잠깐만.”그러고는 머리띠를 민경하에게 넘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똑같은 거로 사다 줘.”그러고는 유현진을 끌고 입원 병동을 나섰다.유현진은 화를 꾹 참고 있던지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는 강한서의 손목을 꽉 깨물었다.강한서는 극심한 고통에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손목에 난 이빨 자국을 보며 강한서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유현진, 너 미쳤어?”“너나 미쳤겠지.”유현진이 버럭 화를 냈다.“강한서, 우린 지금 계약 관계야. 필요할 때만 서로 돕고 다른 때는 나에게 손도 대지 마.”강한서가 그녀를 힐끔 보며 말했다.“손목을 잡는 것도 손을 댄 거야? 그럼 술에 취하고 나한테 키스한 건 뭐야? 성추행?”유현진은 분노가 끓어올랐다.“내가 언제 키스했다고 그래? 말 조심해, 명예훼손으로 고소해버릴 수도 있으니까.”강한서는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숙여 남자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포개더니 과감하게 남자의 옷을 벗기려 했다. 그런데 생각처럼 벗겨지지 않자 이번에는 아예 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의 옷은 벗기가 쉬웠다. 끈을 당기는 순간, 옷은 어깨를 타고 스르르 흘러내렸다.바로 이 결정적인 순간에 남자는 손을 들어 휴대폰을 낚아챘다. 순간 화면이 흔들리더니 영상도 함께 종료되었다. 영상 속 과감한 그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본인이며 그녀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한 사람은 강한서였다.유현진은 눈이 휘둥그레서 손을 뻗어 강한서의 휴대폰을 빼앗으려 했다.강한서는 재빠르게 그녀의 손을 피해 휴대폰을 높이 들고서는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왜? 증거 인멸이라도 하려고?"유현진은 얼굴이 푸르딩딩해서 물었다. "강한서! 분명 내가 취한 걸 알면서 이런 걸 찍어? 사람이 왜 그렇게 못 됐어?"유현진이 억지를 부리자 강한서는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 "유현진, 당신 두 눈으로 대체 누가 촬영하고 있는지 똑똑히 확인해 보는 게 어때?"'이렇게 쪽 팔리는 영상에 대해 따져 물을 게 뭐 있어?'유현진은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촬영했다고 쳐! 나는 취해서 인사불성이었지만 당신은 멀쩡했잖아. 말리지도 못할지언정 영상을 그대로 두다니, 그거 정말 못 된 거야!"그녀는 강한서를 자극해 영상을 삭제시키려고 했지만 강한서는 오히려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못됐다고 그러는데 끝까지 못된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다들 볼 수 있게 SNS에 업로드 하지 뭐."말을 마친 그는 휴대폰을 들어 SNS에 로그인했다. 유현진은 참지 못하고 바로 그에게 덮쳐들어 휴대폰을 낚아채려 했다.하지만 강한서는 그녀보다 키가 한창 컸기에 휴대폰을 들고 팔을 머리 위로 올리기만 하면 아무리 유현진이 애써 뛰어봤자 기껏해야 손목밖에 닿지 않았다.당장이라도 업로드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유현진은 급해진 마음에 그의 목에 두 팔을 감고 머리를 들어 턱을 향해
신미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게 꽉 막힌 거야? 장난도 유분수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한주 강씨 가문을 노리고 있는지 몰라서 그래? 그리 행동이 가벼워서야. 오늘은 이 소문 내일은 저 소문. 사람들이 우리 한주 강씨 가문을 어떻게 생각하겠어!"강한서는 신미정의 잔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려, 머리를 돌려 유현진에게 말했다. "물이나 줘."유현진은 아까 사 온 물을 강한서에게 넘겨주었다.강한서는 병뚜껑을 따서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신미정은 강한서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그 일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었다. "아침부터 병원에는 웬일이야.""친구 보러." 강한서는 대충 얼버무리더니 반문했다. "현서는 왜 또 데려왔어요? 두 달 전에 검사받은 거 아니었어요?"신미정은 그제야 정서를 가다듬고 말했다. "별일 아니고, 그냥 해 본 거야. 한약도 오래 마셨으니 뭐 좀 효과나 있나 해서. 온 여사네 아들이 작년에 결혼했는데 며느리가 벌써 만삭이지 뭐야. 너희는 결혼한 지도 삼 년인데 내가 다 급하다."이 말은 보나 마나 유현진을 탓하는 말이다.강한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급해한다고 되는 일이에요? 아무리 한약 오래 마셔도 소용이 없잖아요? 한약 너무 많이 마셔서 안 생기는 거일지도 몰라요."유현진......그녀는 쓰디쓴 한약을 마시기 싫었지만, 유현진의 뻔뻔한 말이 더 거슬렸다.'노력하지 않는데 어떻게 임신이 되겠어!''몇 달에 한 번도 모자라 매번 배란기는 피해 관계를 가지는데, 아무리 임신이 잘 되는 체질이라 해도 맞춰주지 않는데 어떻게 가능해?'강한서는 버럭버럭하며 화를 냈다. "한약을 많이 먹어서 임신이 안 된다고? 내가 얼마나 힘들게 구했는지 알기나 해?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는데? 유현진이 임신이 되면 내가 이러겠어?"유현진은 두 사람이 곧 싸울 것 같아 미리 말렸다. "진정하세요, 어머니. 보약 잘 챙겨 먹을게요, 물 한 잔 마셔요."신미정은 유현진의 손을 쳐내면서 쌀쌀하게 말했다. "생각해 줘도 욕먹는 걸
강한서는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유현진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며 차갑게 말했다. "나 그렇게 못된 사람 아니야. 비록 당신이 먼저 시작했지만 나 때문에 다친 거니까 치료비는 내가 낼게. 적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어. 아직 이혼 안 했으니 나도 이게 최선이야."말을 끝낸 유현진은 지표에 사인을 하고 강한서에게 넘겨주었다. 강한서가 수표를 보니, 지표에는 400만 원이라고 적혀져 있었다.강한서는 어두운 표정으로 수표를 찢어 버리고는 말했다. "유현진, 그만해!"유현진은 바닥에 너저분하게 흩어져있는 종이 쪼가리들을 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받은 거로 할게. 참, 이혼 얘기도 강 대표가 하루빨리 처리하길 바랄게. 내가 임신이 안 된다는 누명도, 이젠 들어줄 수 없어."병원에서 나온 유현진은, 어깨가 힘없이 축 처져버리고 말았다.하나도 뜻대로 되는 일 없이,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유현진은 자기가 억지 부린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자기의 잘못인데도, 강한서에게 화풀이했다.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신미정에게서 받은 굴욕이 용서되지 않았다.유현진은 머리를 숙여 손등의 기다란 상처를 보았다. 신미정이 그녀의 손을 밀칠 때 긁힌 상처이다.신미정은 오랫동안 유현진에게 불만을 품어왔다. 비록 평소에 잘해주는 듯싶지만, 진심이 맞는지 아닌지는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유현진이라는 사람도, 그녀의 집안 배경도, 어느 하나 신미정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게다가 결혼한 지도 몇 년이나 되었건만 아이도 생기지 않고, 강한서까지 그녀의 편만 들어주니, 신미정이 유현진에 대한 불만은 극치로 도달했다.세상 모든 시어머니가 아들 부부의 행복한 모습을 보기 싫어하는지, 아니면 젊은 시절에 남편을 여인 과부라 아들 사랑이 지극한 건지? 그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어도, 매번 강한서가 유현진의 편을 들어줄 때마다 신미정은 더욱 그녀를 미워했다.마치 그녀의 손등에 난 상처와 같이, 고의가 아니라면 이렇게 까지
유상수는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안 대표님, 저는 모르고 있었어요. 우리 현진이한테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볼 테니, 분명 오해가 있을 거예요.""오해? 무슨 오해? 내 딸이 확실하게 말했어, 당신 딸이 부추겼다고. 이 팔찌 환불하던지, 당신이 사든지 알아서 해. 아니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상대방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유상수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 핸드폰을 놓은 뒤, 머리를 들어 유현아에게 물었다. "안 대표님이 얘기한 일, 대체 어찌 된 일이야? 55억짜리 팔찌는 또 뭐야?"유현아는 속으로 안하윤을 한바탕 욕하고 나서, 어제 있었던 일을 유상수에게 말했다.당연히 자기가 안하윤에게 암시해주었던 말들은 쏙 빼놓고 말이다.그러고는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이번 일은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언니가 나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안하윤 씨한테 끌려서 한 대표님의 샵으로 갔어요. 한 대표님과 매제는 사이도 좋고, 안 대표님은 한 대표님과 한주 강씨 가문을 건드릴 수 없으니 나한테 덮어씌우는 거예요. 제가 뭐라고 안하윤 씨가 내 말을 듣겠어요?"옆에 있던 여자가 휴지를 넘겨주며 유현아를 위로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55억짜리 팔찌 따위가, 체면을 얼마나 세워줄 수 있다고?"이 여자는 바로 유상수의 비서인 백혜주이다. 유현진이 그날 지하 주차장에서 보았던, 유상수 옆에 있던 바로 그 여자였다.여자는 편한 옷차림으로, 당연하다는 듯 하현주의 자리에 앉아 여주인 행세를 하며 식사했다.유상수는 미간을 찌푸리고 백혜주를 보며 말했다. "지금 그까짓 말이 중요해? 안 대표가 우리더러 돈 내놓으라는 거잖아!""돈 내놓으라 그러면 줘야 해요?" 백혜주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딸 하나 관리 못 해서 사고 쳐 놓고는 다른 사람한테 덮어씌우기는, 망할 회사 같으니라고, 동생이 시집 잘 간 덕에 버티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안 대표님, 안 대표님 불러주니 정말 뭐라도 된 줄 아네요!""여자들은 머리만 길었지 생각은 어쩜 이리도 짧은지, 상암동의 땅도 안세걸
"한서 찾는 건 아니고, 너한테 물어볼 거 있어."'아빠가 나한테?'"현진아, 너 한 대표랑 잘 알아?""아니요." 유현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거짓말이 아니었다. 유현진은 실제로 한성우와 친한 사이는 아니다. 엄격히 말하면, 강한서 주위 사람들과 별로 친하지 않았다.강한서는 아마도 이혼을 예상한 듯 유현진과 친구들의 모임에 동행한 적이 별로 없었기도 하고, 굳이 함께 어울리기도 귀찮아했다.'갑자기 왜 한성우에 관해 물어보시는 거지?'얼마 안 가 그녀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유상수가 말했다. "현아가 그러는데, 어제 주얼리 샵에 보석 보러 갔다가 널 봤대."유현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런 일 있었죠, 근데 왜요?""현아 친구가 55억도 넘는 팔찌 산 거 너도 알고 있어?"유현진은 그저 가볍게 "네" 하고 답하고 비꼬면서 말했다. "안하윤 씨 안광이 참 좋다고 하던데, 하이라이트 디자인을 바로 골랐다 그러더라고요."유상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안하윤이 그 팔찌가 싫다네, 그런데 환불이 안 된대. 한 대표 명의로 된 샵이라던데, 한서와 친구니까 네가 좀 물어봐, 환불 안 되겠냐고."'55억도 넘어가는 물건을 체면 때문에 질러버리고는, 이제야 정신 차리고 후회하는 거야?''안하윤을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거지, 아빠를 찾을 줄은 생각도 못 했네.''내가 짠 판을, 내가 치울 이유가 없잖아?'"아빠, 아빠도 장사하시니까 잘 아실 거예요. 제품은 질량 문제만 아니면 환불이 어려워요. 다들 안하윤 씨처럼 사고 나서 후회돼 하루 지나 환불하면 장사 어떻게 해요?""도리는 맞지만 그래도 안 된다는 법은 없잖아. 네가 한서더러 한 대표한테 얘기해 보라고 해 봐. 한서 한마디면 되는 일이잖아?"유현진은 당연히 싫었지만,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요, 한서 씨한테 물어볼게요. 그렇지만 한성우가 도와줄지는 저도 장담 못 해요."유상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서와 한 대표 사이가
염색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잘생긴 포즈로 거울 셀카를 찍은 진윤이 강한서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다시 시작.]강한서는 사진 속 검은 머리에 순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읽던 책을 내려놓은 한현진이 고개를 돌려 강한서를 쳐다보았다. “왜?”강한서가 진윤의 셀카를 한현진에게 보여주었다. 한현진 역시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금발에 눈썹도 살짝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고집하더라니. 눈썹 피어싱까지 빼니까 그냥 아기였네. 너무 귀엽게 생겼잖아. 훈이보다 어려 보여.”강한서도 한현진을 따라 웃었다. “선배도 그렇잖아. 50살도 넘은 분이 아직도 30대처럼 보이니까. 성우가 처음 선배를 봤을 때 형이라고 불렀다가 예의 없다고 혼났어. 그러다 다른 애들도 형이라고 하니까 말이 없더라고.”그 장면을 상상한 한현진은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역시 동안이 좋아. 50대가 되어서도 얼굴 하나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살 수 있잖아. 난 왜 동안이 아닐까?”그 말에 멈칫한 강한서가 한현진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구 마음을 사려고?”한현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강 대표님, 몇 십 년 후의 일도 미리 질투하실 거예요?”강한서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냐.”한현진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정말?”강한서가 확신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안 해, 질투.”예상 밖의 대답에 호기심이 불타오른 한현진이 물었다. 몇 십 년 후엔 사랑보다 정으로 사는 거라 신경 쓰지 않는 거야?”강한서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어.”“뭔데?”강한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대들은 그저 첩에 불과해.”멍해졌던 한현진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강한서를 품에 안고 뽀뽀 세례를 날렸다. “진지한 얼굴로 실없는 농담을 던질 때 정말 귀여워 죽겠다니까.”강한서가 힐끔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이런 걸 바로 조강지처의 자신감이라고 하는 거야.”한
순간 불쾌한 기분에 빠진 진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아마추어 경기는 사석에서 주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문적인 레이싱 경기도 아니었다. 오직 속도에서 주는 쾌락만을 추구하는 경기였다. 상금이 높은 만큼 위험부담도 컸다. 하지만 진윤이 경기에 참가한 것은 상금 때문이 아니었다. 돈 걱정 없이 산 진윤이 목숨 건 돈에 욕심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단지 경기의 주최 측에 F1 레전드 인물도 있다는 소식에 우승을 하면 그 사람과 만나 얘기를 나눌 기회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참가한 것이었다. 진윤은 그의 팀원들 역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함께 지금까지 뭉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의 말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사람이 진윤처럼 레이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프로 선수가 되길 꿈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레이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상금이라는 거대한 유혹일 수도 있었다. 팀원 중 위험한 내기 경기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진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경주마처럼 미친 듯이 산길을 휘저었다. 목숨을 내걸고 재벌들의 도박판에서 기꺼이 주사위가 되었다. 아차 하는 사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큼 어마어마한 상금이 주어졌다. 불행히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은 놀라운 액수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처음으로 팀원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의 진윤은 충격에 빠졌었다. 하지만 팀원들은 마치 일상적이 대화를 하듯 당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진윤은 그저 그들이 비슷한 일을 너무 많이 들은 탓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들은 그렇게 위험 부담마저도 부러웠었던 같았다. 팀원 중 대부분의 사람에게 레이싱은 그저 짧은 시간 사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구에 불과했다. 뜬 눈으로 꿈을 꾸고 있는 진윤이야말로 그들에겐 이상한 인간
“아들. 네가 공부가 하고 싶다면 복수 전공이 아니라 10개 전공을 배우겠다고 해도 엄마는 찬성이야. 엄마 지금 너무 기뻐. 만약 농담하는 거라면 지금 당장 거짓말이었다고 얘기해. 안 그럼 엄마는 진심으로 받아들일 거야.”진윤이 웃으며 홍혜림의 팔을 끌어안았다. “엄마. 저도 형처럼 엄마의 자랑이면 안 돼요?”홍혜림이 진윤의 금발을 어루만졌다. “너도 예전엔 엄마의 자랑이었지. 금발로 염색한 후로는 자랑이 아니게 되었지만.”진윤: ...“그럼 다시 염색할게요.”홍혜림이 얼른 헤어숍 VIP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얼른 가. 여긴 새벽 12시가 되어야 영업이 끝나는 곳이야. 지금 가면 아직 시간 있어.”진윤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홍혜림이 얼마나 진윤의 금발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네, 네, 네. 지금 갈게요.”외투를 챙겨주며 문앞까지 배웅 나온 홍혜림이 진윤에게 물었다. “아들. 조금 전에 누구한테 들은 말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잖아. 그 분 너희 교수님이셔?”“우리 교수님은 아녜요. 하지만 좋은 스승님이긴 해요.”‘사기꾼이기도 해. 하지만 꽤 능력 있는 사기꾼.’홍혜림이 호기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그 분 한 마디에 바로 생각이 바뀐 거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많이 얘기했었는데, 그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진윤이 말했다. “절 데리고 20km를 뛰었어요. 자길 이기면 날 뉴벨리 팀에 입단시켜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보다 10살이나 많아서 나이 많은 어르신한테 지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졌어요.”진윤이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저보다 빨리 뛴 건 아니었어요. 제가 적을 만만하게 생각한 거죠. 하지만 무서운 사람이에요. 지독하게 강해서 무서운 사람. 그 사람은 못 해낼 일이 없는 것 같아요. 입단은 무슨, 그냥 그 기회를 벌어 저에게 설교를 하려던 것뿐이었어요.”“내가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레이싱을 그만두게 하려고. 처음엔 엄마가 보낸 스파이인 줄 알았다니까요. 하지만
진윤에게 묻는 홍혜림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얘기해. 엄마 괜찮아. 파산이라도 하지, 뭐. 돈은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어. 아빠가 안 된다고 하면 쫓아내면 돼.’처음으로 느끼는 죄책감에 진윤은 고개를 숙였다. 홍혜림이 비록 관리를 잘 하긴 했지만 귀밑머리는 이미 하얀 서리가 내려있었다. 큰형은 어려서부터 얌전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라 부모님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유독 진윤이 고집을 부리며 걸음마를 뗄 때부터 뒤에서 마음을 졸이게 했다. 진윤의 수능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가 다니고 있는 대학교 전공은 전부 부모님이 수많은 돈을 들여 기획한 결과였다. 하지만 진윤은 본인이 좋아하지 않는 전공이라는 이유로 자포자기하며 지냈다. 부모님이 통제욕이 강하다는 것은 그저 진윤이 그들에게 씌워놓은 프레임에 불과했다. 정말 부모님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매일 모든 스케줄, 심지어 먹는 음식까지 전부 부모님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그의 부모님은 그저 애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레이싱을 좋아하는 진윤이 못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저 설득하는 것이 전부였다. 홍혜림은 단 한 번도 진윤의 레이싱 장비를 부순 적이 없었다. 매번 더는 새 장비를 사주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다짐도 진윤의 애교 몇 번에 곧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까지 실망만 안겨드릴 순 없잖아. 나도 엄마의 자랑이 되어야지 않겠어?’“엄마. 저 복수 전공하고 싶어요. 전 레이싱이 좋아요. 도무지 포기가 안 돼요. 저 실력 그 정도 아닌 거 알아요. 하지만 자동차 관련한 전공을 배워보고 싶어요. 지금 전공은 절대, 두 번 다시는 F학점 받는 일 없을 거라 약속 드려요. 복수 전공하게 해주면 안 돼요?”홍혜림: ??“그거 말고 다른 건 없어?”진윤이 멍해졌다. “네?”홍혜림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하려는 말이 그거야?”진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 그게 아니면요?”홍혜림: “사람을 치거나, 교통사고를 낸 게 아니고?”
눈에 띄게 변한 진윤의 모습을 홍혜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집 바로 앞이 학교라 진윤은 기숙사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자주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레이싱 게임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아 진윤은 큰형 아파트에 몰래 숨어있는 것을 좋아했다. 진윤의 큰형은 일 때문에 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9살이나 더 많은 그의 형은 가끔 부모님보다 더 진윤을 아끼기도 했다. 심지어 가끔은 진윤의 편을 들어 그의 비밀을 지켜주기도 했다. 큰형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니 제발 눈치껏 본가로 들어오라고 홍혜림은 몇 번이고 진윤에게 얘기했었다. 사실 예비 며느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진윤을 본가로 불러들이는 이유는 진윤이 곁에 없으니 도무지 관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윤은 그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매번 홍혜림이 같은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두 귀를 닫고 못 듣는 척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홍혜림이 먼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진윤 스스로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진윤에 홍혜림은 혹시 형제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전화를 했지만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홍혜림은 생각했다. ‘이 자식 또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돌아와서 얌전한 척 연기하는 거 아냐?’‘교통사고라도 내서 배상해 줘야 하는 건가? 아니면 레이싱 카가 망가져서 새 차를 살 돈이 필요한 건가?’‘설마 사람을 친 건 아니겠지?’진윤이 집에서 열심히 공부할수록 홍혜림은 점점 더 사람을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매일 밤 아무 일도 없는 척 진윤의 방 앞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먼저 잘못을 인정하면 요즘 얌전하게 지냈던 걸 정상참작해서 욕을 좀 덜해야겠어.’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진윤은 홍혜림을 부르지 않았다. ‘이상해.’‘너무 이상하잖아!’‘설마 사람을 친 것보다 더 큰 사고는 아니겠지?’‘대체 얼마를 배상해야 하는 거야?’1 주일이 지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홍혜림은 진윤의
진윤: ...강한서가 진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싫다면서 현 상황을 바꿔보려고 하지도 않은 거야?”진윤: ...‘왜 선생님께 혼나는 기분이 드는 거지? 진지하게 핵심만 꼬집고 있잖아.’입을 달싹이던 진윤은 변명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요.”진윤은 그동안 어떻게 반항해야할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강한서가 말했다. “네 인생은 네 거야. 네가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네 하루하루는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어. 네 태도에 따라 싫었던 그 경험들이 사라지지 않아. 단지 네가 싫다는 이유로 아무 문제도 해결하지 않고 대충 흘려보냈을 뿐 그것들은 계속 존재해.”“대충 공부해서 대충 졸업하면 또 대충 취직이나 하겠지. 아니면 아예 너희 회사로 입사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 그렇게 평생을 대충 흘려보낼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인생이야?”멍하니 강한서를 쳐다보던 진윤이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뇨.”부모님이 선택해준 전공이 싫어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얼른 졸업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강한서의 말처럼 졸업 후엔? 전공에 맞는 직업을 찾아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갈까, 아니면 부모님 회사에 입사해 되는대로 살아갈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진윤이 원하는 인생은 아니었다. 4년이란 시간을 허무히 흘러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전 이미 3학년이에요. 전과를 하기엔 늦었잖아요. 이젠 뭘 하려고 너무 늦은 것 같아요.”속상한 듯 대답하는 진윤의 말에 한현진이 말했다. “진윤 씨는 완전 MZ세대잖아요. 이제 갓 이십 대 초반인데 뭘 해도 늦지 않은 나이예요. 너무 빨리 본인의 가능성을 단정 짓지 말아요. 60세에 대학생이 됐다는 기사 못 봤어요?”“진윤 씨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도 늦었다고 생각 안 하는데, 진윤 씨가 왜 겁을 내요?”“전...”입술을 달싹이던 진윤이 한참이 지나서야 한숨을 내뱉었다. “두 사람 문제아 갱생
진윤은 6분 차이로 강한서에게 패배했다. 그가 결승점에 도착했을 때, 강한서는 이미 안정적인 호흡을 되찾고 있었다. 결승점을 통과한 진윤은 다리가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려 했다. 강한서가 다가가 그런 진윤을 일으켜 세웠다. “서서 쉬다가 나중에 앉아.”말하며 물뚜껑을 따 진윤에게 건넸다. “천천히 마셔.”진윤은 이 상황이 창피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엔 강한서를 얕보고 경기에 진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챙겨주는 강한서를 보며 자신이 너무 유치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숨을 몰아쉬며 강한서가 내민 물을 받은 진윤은 아무 말 없이 꿀꺽꿀꺽 물을 삼켰다. 한현진이 강한서에게 또 물을 한 병 가져다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넌 괜찮아?”강한서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괜찮아.”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비록 꾸준히 러닝을 하고 있었지만 하프 마라톤을 뛴 건 오랜만이었다.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진윤을 쳐다보았다. 충격이 꽤 컸는지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아이는 풀이 죽은 얼굴로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기대했던 것만큼 큰 실망이 안겨왔다. 진윤은 심지어 주호를 앞에 두고도 대화를 나눌 의욕조차 찾지 못했다. “가자. 쉬다가 같이 밥이나 먹어.”진윤이 시선을 올렸다. “이겼다고 저랑 축하라도 하시게요?”강한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조 회장님 소개해줄게.”멈칫한 진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제가 졌잖아요.”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졌으니까 팀에 입단할 수는 없지만 소개는 받을 수 있잖아.”강한서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소개받고 싶지 않은 거야?”“아뇨!”다급하게 대답하던 진윤이 곧 쑥스러운 듯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뭐야... 형님 그 나이에 체력이 아직도 좋으시네요. 제가 졌어요. 인정해요. 형님이 이기셨어요.”진윤의 말에 강한서가 멈칫했다. “그 나이라니?”곧 불혹의 나이라고 대답하려던 진윤은 강한서 뒤에서 눈짓을 보내는 한현진의 모습에 순간 뭔가를 깨달은 듯 아부했다.
한현진은 한참을 멍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강한서에게 그날의 일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강한서는 본인 덕에 한현진이 월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줄곧 월급을 전부 돌려받을 수 있었던 건 주최 측에서 한현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꽤 단순한 생각이었다. 모터쇼라는 큰 활동에 주최 측에서 안내 요원까지 신경 쓸 리가 없었다. 알바의 잘못이든 아니든, 그건 그들의 관심 밖의 얘기였다. 문제가 생겼을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일 간단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강한서였어... 강한서가...’“강한서 그 자식, 마음을 꼭꼭 숨기기도 했네. 이미 그때부터 눈 여겨 보고 있었던 거네요.”감탄하는 주한과 달리 한현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선배님, 강한서가 절 도와줬을 땐 아무런 사심도 없었을 거라고 전 생각해요. 그날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저든 아니든, 한서는 그렇게 했을 거예요.”당시 강한서는 한현진을 부르지도, 인사도 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시간이 흘러 한현진이 다시 그 얘기를 꺼냈지만 그는 여전히 솔직한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고 그 일을 핑계로 점수를 더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한현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강한서가 한현진을 도운 건 절대 사심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조한이 웃으며 말했다. “사심이 있었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어쨌든 두 사람 인연은 삼심할 매가 쇠줄로 꽉 묶어놓은 것 같네요. 인연이 깊어도 너무 깊어.”한현진도 그 말에 깊이 공감하는 바였다. 만약 한현진이 죽은 그 태아와 바뀌지 않았다면 그녀와 강한서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둘도 없는 사이였을 것이다. 바뀌었어도 결국은 돌고 돌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하늘이 이어준 인연이 틀림없었다. 진윤은 빠른 속도로 첫 바퀴를 완주했다. 강한서는 진윤과 2km정도 뒤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바퀴부터 진윤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지만 강한서는 여전
조한이 선글라스를 벗자 지적인 이미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입꼬리를 올려 씩 웃으며 말했다. “학교 다닐 땐 선배라고 부르더니 졸업하니까 회장님이야?”강한서가 한현진을 향해 설명했다. “대학원 선배님이셔. 같은 지도교수님이었거든.”한현진이 조한의 비위에 맞게 대답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역시, 제수씨가 한서보다 낫네.”한현진과 인사 몇 마디를 나눈 조한이 강한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넌 나이가 몇인데 어린애랑 따지고 그래?”강한서가 말했다. “선배보다는 어려요. 제 아내는 아직도 대학생 같다고 하던데요.”조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제수씨가 아이 달래듯 잘 하나봐.”한현진: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진윤도 도착했다. 강한서가 승부를 인정하지 않을까 걱정된 그는 증인이 되어줄 친구 두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기세등등하게 걸어오던 진윤은 한현진을 보더니 곧바로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더니 조한을 발견하고는 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진윤은 그제야 강한서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날 뉴벨리 팀에 추천해줄 수 있나봐.’조한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진윤을 응원했다. “청년, 저 자식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내가 팀장 자리도 고민해볼게요.”한현진도 진윤을 향해 말했다. “파이팅! 결승점에서 기다릴게요.”두 사람의 응원에 후끈 달아오른 진윤은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진윤에게 한현진과 조한은 그야말로 우주대스타였다. 그러니 그들의 응원은 그에게 흥분제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경기에서 진다는 것은 자신의 우상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일이었다. 준비 운동을 마치고 시작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리자 진윤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린 나이라 그런지 폭발력이 대단했다. 그는 곧 강한서와 차이를 벌리며 앞서나갔다. 강한서는 진윤의 속도를 따라 빨리 달리지 않고 꾸준히 똑같은 페이스를 유지했다. 한현진은 망원경을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