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보창조차 돌아서서 웃음을 지었다. 쩔쩔매며 아첨하는 모습은 아까의 거만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고 대표님, 죄송합니다. 여기서 약간 문제가 생겨서요. 바로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시연을 재촉했다. “지 선생,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아...” 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호보창이 말한 ‘고 대표님’이 바로 고유건이었다. ‘고유건도 이 자리에 있었다니!’ 시연이 다시 술잔을 들기 전에, 유건이 손을 들어 그녀를 가리켰다. “너, 이리 와.” 시연의 심장이 갑자기 쿡 찌르는 듯했다. 그가 자신을 부르는 것일까? “다른 사람 보지 마.” 유건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너 말이야, 이리 와.” 방 안의 모든 시선이 다시 한번 시연에게 쏠렸다. 시연의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나에게 뭘 하려는 속셈이지?’ 순간에, 룸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유건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왜, 말을 못 알아들어?” 호보창은 안달이 나서 시연의 허리를 살짝 밀며 말했다. “지 선생, 뭘 멍하니 서 있어요? 고 대표님이 부르는 거 못 들었어요?”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유건 앞까지 걸어갔다. “고 대표님.” “응.” 유건은 느긋하게 시연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와서 술 따라.” 그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고, 많은 사람 앞이기도 해서 시연은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연은 웨이터에게서 술병을 받아 들고 말했다. “제가 따를게요.” 그러고 나서 유건 쪽으로 다가갔다. 오늘 시연은 샤넬의 시즌 최신상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얇은 두 줄의 끈이 어깨에 걸쳐져 있었으며, 우아한 쇄골과 가슴선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유건의 목울대가 불편하게 움직였고,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시연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그의 무릎 위에 앉은 꼴이 되어버렸다. “고... 대표님?” 유건은 그녀를 꼭 붙잡고, 얼
그 자세를 유지한 채, 유건은 고개를 들어 호보창을 바라보았다. 유건의 눈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호보창은 이미 겁에 질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제 와서 고유건이 지시연을 눈여겨봤다는 걸 몰랐다면, 그는 지금까지 헛살았던 셈이다. ‘비록 내가 먼저 그 지시연이라는 의사를 마음에 두었지만, 만약 지금 내가 고유건이 눈에 둔 이 여자 의사를 건드리면, 나중에 고유건이 나한테 따지고 들겠지? 그때는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거야!’이렇게 생각하자 호보창이 시연에 대해 갖고 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 고 대표님.” 유건은 눈을 살짝 움직이며 양석현을 가리키고는 차갑게 말했다. “G시 최고의 외과 교수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존경받아 마땅한 학자를 이 정도로 모욕한 건 너무 심하지 않나?” “네, 제 잘못입니다.” 호보창은 속으로 불만이 가득했다. ‘어차피 저 학자는 내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데!’ 유건은 시연의 가느다란 허리를 살짝 감싸며 그녀와 함께 일어섰다. 그리고 양석현을 향해 말했다. “양 교수님, 더 이상 여기서 이런 고생은 하지 마세요. 후원금 건은 제가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양석현은 깜짝 놀라 시연을 바라보았다. “이건, 이건...” 시연도 놀라서 유건의 팔을 잡아당겼다. “고 대표님?” 유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 “다시 말해야 해?” “아니요, 그게 아니고요...” “그럼 가요.” 유건은 그녀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며 정민환에게 지시했다. “양석현 교수님을 집까지 모셔다드려.” “네, 형님.” 방 안은 침묵에 빠져 있었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민환이 양석현과 함께 떠나고 나서야 호보창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양 교수가 정말 훌륭한 제자를 얻으셨군!” ... BLUE을 나와서도 유건의 차에 탄 시연은 계속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유건의 속마음을 전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
‘마침, 할아버지도 곧 퇴원하시고. 이혼 이야기도 다시 꺼내야 할 것 같은데.’한편, 시연은 기숙사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고, 갑자기 뺨을 감쌌다.“세상에!”‘방금 그건 꿈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일어난 일일까?’ ‘고유건이... 나에게 키스하다니!!’‘근데 왜? 고유건이 장소미를 사랑하는 거 아니었나? 그럼 조금 전 나한테 한 건, 그냥 장난친 건가?’지금 시연의 입안에는 아직도 희미하게 유건의 입술이 남긴 술 내음이 남아 있었다.‘그래서, 술에 취해서 그런 짓을 한 건가?’시연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가슴을 꾹 눌렀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고, 동시에 뭔가 시리고 답답한 느낌이었다....며칠 후, 아침에 시연은 고상훈의 전화를 받았다.“할아버지.”고상훈이 웃으며 말했다.[시연아, 바쁘니?]“낮에는 일해요.” 시연이 솔직하게 말했다. “오후 5시 반에 퇴근해요.”[그래, 할아버지가 오늘 퇴원했거든. 너와 유건이가 이렇게 오래 같이 있었는데, 오늘 저녁에 가족끼리 같이 저녁 한 끼 먹는 게 어떻겠니?]“그럴게요.”시연은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고상훈은 덧붙였다.[유건이한테는 네가 연락해서 말해줘야겠구나.]시연은 고상훈의 청을 거절하고 싶었다. 유건에게 전화하는 것도 싫었다. 그가 자신에게 키스했다는 생각만 해도 온몸이 불편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고상훈은 시연에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럼 그렇게 알고 끊으마. 할아버지는 집에서 너희를 기다릴게.]전화를 끊은 시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크게 쉬었다. 결국 유건에게 직접 전화해야 했기 때문이다.그녀는 연락처를 뒤져 유건의 번호를 눌렀다.그러나 유건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연은 유건이 아마도 바쁘겠거니 생각하고 메시지를 보냈다.[고유건 씨, 할아버지가 오늘 저녁에 같이 저녁 먹자고 하셨어요.]하루 종일 바쁜 일과가 지나간 뒤, 오후 5시 반이 되자 시연은 옷을 갈아입고 퇴근길에 나섰다.핸드폰은 여전히 조용했다. 오늘 유건은 시연에게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시연은 더욱 긴장했고, 작은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유건은 시연의 긴장감을 눈치채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지시연이 겁내는 거야? 이혼하기 싫어서 그런 걸까? 이렇게까지 이 결혼을 지키고 싶은 건가?’ 고상훈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너와 시연이가 어떻게 한다는 건지 다시 말해 보거라!” 유건은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제가 하려던 말은요, 원래는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조금 더 요양하시길 바랐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퇴원하셨나 싶어서요.” “난 또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고상훈은 약간 못마땅해하며 말했다. “병원에 너무 오래 있으니 멀쩡하던 사람도 환자가 다 될 지경이야. 병원이든 집이든 요양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맞지, 시연아?” “네.” 시연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으면 몸에도 좋을 거예요. 저도 방금 확인했는데, 간병인들이 정말 잘 보살피고 있어서 문제없을 거예요.” 그녀가 뒤에 하는 말은 유건을 향한 것이었다. 그때 가정부가 와서 말했다. “저녁 준비가 다 됐습니다.” “그럼 우리 가족 다 함께 저녁을 먹자꾸나.” 식사 시간 동안 시연은 고상훈의 기분을 맞추며 분위기를 조율했고, 고상훈은 오랜만에 반 공기나 되는 밥을 먹고 국도 한 그릇 다 마셨다. 고유건은 그 장면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할아버지가 정말 시연이를 좋아하시는구나!’‘할아버지 때문에 이혼 이야기는 잠시 미뤄야겠어...’ 식사가 끝난 후 유건이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희는 이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딜 가려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상훈이 말을 받으며 웃음을 지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가라. 방은 이미 가정부들에게 준비시켜 놓았단다.” 시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건은 더 격한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건 안 돼요. 저희는...” “너희는
“소리 내!” 유건의 얼굴에 열기가 도는 가운데, 그는 시연에게 명령했다. 시연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빨리 해!” 유건이 재촉했다. “네가 뭐 순결을 지키는 처녀도 아니고, 그런 소리 하나 못 내?” 유건의 말을 듣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아... 으아...” 유건은 순간 얼이 빠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남녀관계에서 어떤 소리를 냈는지도 기억 못 해?” ‘그때는 아주 격렬했잖아? 거기가 심하게 찢어지는 상처를 입을 정도였는데!’“나...” “됐어!” 유건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시연을 바라봤다. “네가 아까 내가 필요하면 뭐든 해준다고 했지?” “네.” 시연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고유건 씨는 지금 뭘 하려고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시연의 목에서 가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유건은 시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키스하고 있었다! “음... 하...” 시연의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도 자신의 소리에 놀랐다. ‘이게 정말 내가 낸 소리 맞아? 어떻게 이렇게 수치스러운 소리를 낼 수 있지!’ 그녀의 소리는 유건의 신경을 자극했다. “너, 경험이 많다며? 그런데 이렇게 쉽게 반응해? 겨우 키스 한 번일 뿐인데...” “당신...” 시연은 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여 그를 밀어내려 했다. “움직이지 마!” 유건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할아버지가 아직 밖에 계셔! 걱정하지 마, 그냥 키스일 뿐이야. 네가 소리를 제대로 냈다면 내가 이런 희생까지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시연은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본인이 희생한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이야?’ 남자의 키스는 계속 이어졌다. 유건의 코끝에 시연의 향기가 가득했다. ‘이 향기..
다음 날 아침. 식탁 위에서 고상훈은 활짝 펴진 얼굴로, 가끔 시연의 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흘끗 보며 크게 웃었다. “시연아, 더 먹어라. 너도 고생이 많구나.” 그리고 유건에게 당부했다.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시연이는 이제 혼자가 아니잖니!”유건과 시연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지만,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 두 사람은 함께 고씨 저택을 나섰다. 유건은 시연을 강울대학교 기숙사까지 데려다주었다. “오늘은 출근 안 해?” “아니요, 출근해야 해요.”시연은 가방을 메며 대답했다.“야간 근무라서 낮에는 병원에 안 가요.” 강울대학교 기숙사 건물을 힐끔 본 유건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 건물 정말 허름하고 낡았다.” 이건 그가 처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시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래요, 좀 낡긴 했죠. 고유건 씨,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 최근 유건은 은수 프로젝트로 바빠졌다. 마침내 모든 일이 정리되고,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유건이 한강우를 은수 프로젝트를 정식적으로 시작하는 축하 연회에 초대했을 때, 한강우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 생명의 은인인 지시연 씨도 올 거지?” 유건은 예상한 대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시연이와 함께 한 회장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좋아, 좋아.”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유건이 시연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전화기 너머로 시연의 늘 부드러웠던 목소리가 들렸다. 시연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유건은 입가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번 주말 은수 프로젝트 시작 연회가 있는데, 한 회장님이 너를 꼭 보고 싶다고 하셨어. 올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니, 시연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네, 갈 수 있어요.] “좋아.” 유건은 만족스러운 듯 다시 물었다. “적당히 입을
노은범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시연에게 말했다. “그래, 나야.”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연회장 안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도 이 연회에 참석하려고 온 거야?” 은범의 말투에는 어딘가 의아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시연이가 왜 이런 비즈니스 파티에 참석할까?’ “응.”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애매하게 두 마디 정도로 설명했다. “어쩌다 보니, 이 곳의 주인을 구한 적이 있어.” “한강우, 한 회장님 말이야?”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한 회장님은 내 환자라고 볼 수도 있지.” “그렇구나.”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유건이 전화를 걸어 그녀를 재촉하고 있었다. 시연은 받지 않고 은범에게 손을 흔들었다. “누가 계속 날 재촉하네. 먼저 가볼게!” “천천히 가!” 은범이 말하기도 전에, 시연은 재빨리 후문 쪽으로 뛰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은범은 어딘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시연아, 나중에 보자.” ... 남쪽 문까지 달려가자 시연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겨우 주지한을 만났다. “미안해요, 늦었죠!” 지한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형님은 손님들을 맞이하러 먼저 갔어요. 저는 시연 씨 옷 갈아입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시연과 지한은 휴게실에 도착했다. 장소미는 유건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떠나 있었다. 주지한은 탁자 위에 놓인 선물 상자를 가리켰다. “이건 형님이 시연 씨를 위해 준비한 드레스예요.”“예? 그렇군요.” 선물 상자를 열자 시연은 놀란 숨을 들이마셨다. “엄청 화려한 드레스네요.” “당연하죠.” 지한은 유건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떠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형님이 특별히 해외에서 주문했어요. 다 디자이너와 보조들이 손으로 한 땀 한 땀 완성한 드레스예요. 전 세계에서도 단 한 벌밖에 없어요.”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고유건이 이렇게까지
장소미가 여기에 있는 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장소미는 고유건의 여자 친구였으니,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소미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 “네가 여기에 왜 있어?” 그러나 이것조차 소미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아니었다. 소미를 가장 충격에 빠뜨린 것은 바로 시연이 입고 있는 그 드레스였다. ‘이 드레스는 분명 내가 조금 전 고유건의 휴게실에서 본 그 드레스인데!’ 시연은 이 모든 것을 알 리 없었고, 그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말했다. “어떤 법에 내가 여기 있지 말라고 쓰여 있는 거야?” 시연은 배가 고파 더 이상 소미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지만, 지나가는 순간 소미가 시연을 힘껏 잡아당겼다. “지시연, 너 지금 못 가!!” 시연은 당황해서 말했다. “장소미, 너 제정신이야? 당장 이 손 놓으라고!” 하지만 소미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시연을 놓지 않고 더욱 악착같이 붙잡았다. “내가 말했잖아, 넌 아무 데도 못 가!” “정말 어이없네!” 시연은 몸을 비틀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소미는 강하게 손아귀에 힘을 줘 시연을 놓아주지 않았다. “너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아야...” 팔에 심한 통증이 느껴져 내려다보니, 소미의 손톱이 시연의 피부를 깊게 파고들고 있었다. 소미는 시연에게 마치 원수라도 된 듯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너 입은 이 드레스, 어디서 난 거야?” 시연은 어리둥절했다. ‘장소미가 이 일 때문에 이렇게 발광을 한 건가?’ “왜 내가 너한테 그걸 말해야 하지?” “너, 유건 씨와 무슨 관계야?” 소미의 눈빛은 분노로 불타올랐다. “이건 유건 씨가 나를 위해 산 건데, 왜 네가 입고 있는 거야?” “하!” 시연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날카로운 칼처럼. “맞아, 고유건 씨 거야. 그런데 왜 내가 입고 있는지, 네 남자 친구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시연
시연은 온몸이 찌릿하게 굳었고,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로얄호텔... 그날 밤... 그 남자...’ 애써 잊으려 했지만, 그건 분명 시연의 가슴 깊숙이 박힌 가시였다.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찔림. 그런데 소미가 지금 그걸 언급했다. ‘무슨 뜻이지? 설마... 뭔가 알아낸 거야?’ 시연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고, 소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너, 뭘 안다는 거야?” 시연은 숨을 참으며 다그쳤다. “그날... 그 남자, 누구야?” [진정해.] 소미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 지금 강울대 뒷골목에 있어. 우리 잠깐 만나자. 내가 아는 걸 다 말해줄게.] “좋아.” 시연은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근무 중 자리를 비우는 그녀를, 기환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소미가 보낸 주소를 따라, 시연은 강울대 후문 쪽에 있는 한 중식당으로 갔다. 물론, 식사하러 가는 건 아니었다. 그 식당엔 단독 룸이 있었고, 대화를 나누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먼저 도착한 시연은, 소미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걸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환은 무슨 일인지 몰라 식당 입구에서 대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미가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장소미 씨?” 기환은 의아해졌다. ‘설마 형수님이 만날 사람이 장소미 씨였어?’ “기환 씨.” 소미는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여기, 밀크티예요. 아까 주차하러 가는 길에 사 왔어요.” “아...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장소미 씨 드시죠.” “괜히 사 온 거 아니에요. 시연이도 있으니, 정기환 씨도 있을 것 같아서 석 잔 산 거예요. 안 드시면 그냥 버릴 수밖에 없는데요?” “그럼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기환은 어쩔 수 없이 받아서 들었다. “천만에요.” 소미는 환하게 웃은 후, 나머지 두 잔을 들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기환은 밀크티를 들고 복잡한 표정으로 생
“들어가시죠.” “응.”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밀어 열었다. 방 안엔 이미 두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말라보였지만, 한 명은 비대한 체격. 여자가 들어서자, 두 사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중 마른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현금은, 가져왔지?” 여긴 이태길, G시에서 알아주는 암시장이자,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될 모든 거래가 이뤄지는 곳이었다. 이곳의 규칙은 단 하나. 오직 현금을 이용하는 것.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말했다. “응.” 그녀는 미리 준비해 온 여행용 가방을 들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마른 남자가 옆의 뚱뚱한 남자를 흘끔 보더니, 둘이 함께 다가와 가방을 열었다. 현금다발을 일일이 확인한 뒤, 이상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시킨 일, 내용은 다 이해했어.” “좋아.” 여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끝나는 대로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그때 잔금을 줄게.” “거래 성사.” 이 말을 마친 여자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모자챙이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 놀란 여자가 허둥지둥 줍기 전에, 마른 남자가 손을 뻗어 먼저 집어 들었다. 그리고 씩 웃으며 내밀었다. “여기.”여자는 얼른 모자를 받아서 들었지만,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시선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뭘 그렇게 봐?” “아, 그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서. 우리... 예전에 본 적 있나?” “아니거든.” 여자는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뱉고, 단숨에 자리를 떠났다. ‘기분 나빠...’ 한시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를 벗어나 골목을 빠져나와 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마스크를 벗고 거칠게 숨을 몰아쉰 그녀는 전혀 생각지 못한 듯했다. ‘설마 했는데... 이 암시장에서 잡은 놈들이 그 둘일 줄은 몰랐네.’ ‘하마터면... 들킬
탈의실 한가운데엔, 의료진이 환복할 때 앉는 나무 벤치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시연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의식을 잃은 듯,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유건은 물론, 함께 들어온 간호사도 깜짝 놀랐다. “지 선생님, 왜 이러시죠?” “여보!” 유건은 단숨에 뛰어 들어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간호사님, 당장 의사 좀 불러주세요! 제 아내는... 임신 중이에요!” “네, 알겠습니다!” 간호사가 급히 뛰쳐나가려던 찰나, 유건의 품에 안긴 시연이 눈썹을 찌푸리며 낮게 신음을 흘렸다. “으...음...” 유건은 얼떨떨했다. ‘여보...?’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눈빛으로 유건을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탈의실이었다. “여긴...? 당신, 어떻게 들어왔어요?” ‘설마 이젠 수술실까지 침입하는 건가? 이 사람...?’“정신 좀 들어?” 유건은 대답 대신 그녀를 꼭 안은 채 그대로 걸어 나가려 했다. “어디 불편해? 쓰러질 때 부딪힌 데는 없어?” “어...어어?” 시연은 놀라 입을 벌렸다. “쓰러졌다고요?” 그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아... 이건 완전한 착각이잖아.’“내려줘요.” 시연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난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쓰러졌잖아.” “아니, 쓰러진 게 아니라...” 결국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너무 피곤해서 잠들었어요.” 이번 수술을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중간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생기긴 했지만, 시연은 끝까지 버텼고, 체력이 바닥나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으려다 잠시 벤치에 앉았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던 거였다. “진짜예요. 그냥 잠들었어요.” “잠든 거라고?” 유건은 여전히 믿지 못한 얼굴이었다. “나, 당신 생각만큼 그렇게 허약하지 않아요. 수술 끝났다고 바로 기절하는 스타일 아니라고요.” 옆에
시연은 유건을 조심스럽게 놓고,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나중에 봐요.” “응.” 그녀는 뒤돌아 수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문이 서서히 닫히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밖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유건은 처음으로, 시간이 이렇게까지 더디게 흐르는 걸 느꼈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 곧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지한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형님, 수술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잠깐 뭐라도 드시죠.” 하지만 유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안 먹을래.” 진심이었다. 그는 무언가 먹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고도의 긴장 상태에서는 배고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유건은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눈썹을 깊게 찌푸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지?’ ‘시연이가 분명... 이번 수술은 양석현 교수가 직접 지도하는 거고, 큰 수술이 아니라고 했었는데...’‘잘만 되면 정오쯤이면 끝날 거라고... 그런데 지금이 몇 시지?’ 벌써 12시를 넘겼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유건의 가슴이 조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불안하게 걸음을 옮겼다. 지한과 다른 이들도 그 모습을 지켜봤지만,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결국 한 시간 반이 지나, 오후 두 시가 가까워질 무렵 수술실 문이 열렸다. “할아버지!” 유건은 누구보다 먼저 뛰어갔다. 지한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 간호사가 밀고 나온 수술대 위, 고상훈은 조용히 누워 있었고, 팔에는 아직 링거가 꽂혀 있었다. 곧이어 양석현 교수가 마스크를 벗고 나왔다. 그는 유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고 대표님.” “교수님...” “수술은 아주 잘 됐습니다.” 양석현은 침착하게 말했다. “다만 어르신의 회복력이 떨어질 수 있어서 48시간 정도는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큰 문제가 없다면, 그 후엔
그 한마디가 소미의 뇌리에 박혔다.‘그래... 아직 끝난 거 아니야. 난 아직 포기할 수 없어.’‘그리고... 내 손에는 아직 남은 패도 있으니까.’ 그 순간, 눈물이 뚝 그쳤다. “늦었네, 이만 올라가서 쉬자.” “네...” 모녀는 서로의 팔짱을 끼고 계단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발밑을 가득 메운 아기용품들에 막혀 걸음을 멈췄다. “쳇!” 장미리는 갑자기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박스를 몇 번이나 세게 차도 성에 안 찼다. “네 아빠, 병에 걸리더니 이젠 정신까지 나갔나 봐. 죽기 전에 후회한들 뭐가 달라지니?” “엄마.” 소미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조용히 말했다. “아빠, 병 걸리고 나서 좀 달라졌잖아요. 너무 방심하지 마세요.” “왜?” 장미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몸 가지고 바람이라도 피울까 봐서 그래?” “그게 아니라...” 소미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저는 지시연이랑 지우주 쪽이 걱정돼요.” 장미리는 단번에 그 의미를 알아챘고,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너 지금... 그 둘한테 돈 줄까 봐 걱정하는 거야?” “네.” 소미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엄마, 이 집안의 돈은 엄마가 잘 관리해야 해요. 아빠가 몰래 두 사람한테 뭔가 주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요.” “네 아빠 감히...?” 장미리는 눈을 부라리며 이를 악물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이 집을 십수 년 동안 지킨 사람이야. 내가 그런 허튼 꼴 당할까 봐?” “아니면 다행이고요.” 금요일.오늘은 고상훈의 수술 날이었다. 아침 일찍, 유건과 시연은 병원에 도착했고, 모든 수술 전 준비는 이미 마무리된 상태였다. 고상훈은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채 병상에 앉아 있었고, 유건은 곁에서 말벗이 되어주고 있었다. 시연은 수술 준비 때문에 밖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할아버지.” 유건이 고상훈의 손을 꼭 잡았다. 오히려 고상훈보다 손자의 얼
소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이 집구석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네...’ 그녀의 시선이 장미리가 들고 온 박스들로 향했다. 전부... 아기용품이었다. 놀란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 설마, 진짜예요?” ‘설마 진짜 밖에 여자가 있어서... 애까지?’ 이쯤 되면 장미리의 의심이 헛된 것이라 할 수 없었다. 정말 너무 수상했다. “소미야...!” 장미리는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 으흐흑...” 지동성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며, 한결같이 말했다. “그런 일 없었다니까.” “그럼 이건 다 뭐예요?” 소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가 거짓말하는 건 같진 않아. 그럼 이 많은 아기용품은 대체 왜?” “선물하려고 산 거야.” 결국 지동성이 입을 열었다. “하! 웃기고 있네요!” 장미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나, 우리 집 사람들 경조사는 하나도 빠짐없이 챙기는 사람이에요” “요즘 주변에 임신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요!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믿든 말든 당신 마음이지.” 지동성은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소미야, 너도 들었지?” 장미리는 억울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며 울먹였다. 소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빠의 행동... 확실히 요즘 너무 이상해.’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아빠, 엄마가 이미 다 알아버렸잖아요. 차라리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건 어때요? 계속 숨기다간... 더 골치 아파질 거예요.” “소미야?” 장미리는 놀라 소리쳤다. “너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소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아빠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지동성은 입을 뗄 듯 말 듯 망설였다.그 모습에, 소미의 뇌리를 번뜩 스치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설마... 최근 들어 아빠가 보여준 수상한 움직임... 전부 지시연 때문인가?’ “아빠... 이거
기환은 시연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보고 급히 손을 뻗었다. “형수님, 괜찮으세요?”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근데... 내가 한때 사랑했고,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그 사람이...’‘그 사람이 병들었어. 그것도, 너무 많이...’기환은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시연을 본가까지 바래다주었다. 왕성애와 이호민에게 그녀를 맡긴 뒤, 유건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형님, 형수님이 노은범 사장님을 만난 건 아니지만, 진료차트를 보고 오셨습니다.” [알겠어.]전화를 끊은 유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노은범이... 우울증이라니...’ 그날 밤. 유건이 본가로 돌아왔을 때, 시연은 이미 잠든 상태였다. 그는 조용히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자의 눈가가 살짝 부어 있었는데, 많이 운 모양이었다. ‘내 아내가... 다른 남자를 위해 울다니.’ “됐어.” 유건은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만 봐준다. 딱, 이번 한 번만.” ...그 시각, 장소미는 하루 종일 병원에 있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건, 장미리의 날카로운 고함이었다. “말 좀 해봐요! 당신, 벙어리라도 된 거예요?” 며칠 전 퇴원한 지동성은 간 이식 대기 중이라, 당분간은 외래 치료로 버티고 있었다. “뭘 자꾸 설명하라는 거야?!” 지동성은 피곤한 얼굴로 짜증을 냈다. “분명히 말했잖아.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하? 아무 짓도 안 했다고요?” 장미리는 헛웃음을 지으며 비웃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당신, 사람을 기만하는 재주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네요!” 그때, 소미가 들어왔다. “엄마, 아빠, 또 왜 그러세요?” 부부싸움이 일상이 된 이 집안에서, 소미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소미야!” 장미리는 다급히 딸을 붙잡고, 손가락으로 지동성을 가리켰다. “너 잘 왔다. 엄마 좀 도와줘. 너희 아빠...
심재규에게서 들을 수 없었던 것들, 시연은 스스로 다 알 수 있었다. “그건...” 기환이 아직도 망설이자, 시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같이 가요. 제 말이 거짓말이라면... 당장 절 묶어서 끌고 가세요.” 그러곤 간절히 덧붙였다. “부탁이에요, 기환 씨, 은범이는... 제 친구예요. 지금 많이 아픈 것 같아요. 아주 심하게.” “그럼, 알겠습니다.” 시연의 간절함에 결국 기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혹시라도 시연이 은범을 직접 만나게 될까 봐, 기환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뒤따르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시연은 익숙하게 응급 외과로 향했고, 은범의 진료차트를 어렵지 않게 열람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차트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병력, 과거력란에서 시선이 멈췄다.‘우울증 병력, 3년?’‘왼쪽 손목 자해 흉터... 영구적 손상?’그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뻐근했다. 옆에 있던 당직 간호사가 말을 걸었다. “지 선생님, 지인분이세요?” “네.” 시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잘 부탁드릴게요. 많이 도와주세요.” “물론이죠.”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히 외상은 크지 않아요. 아직 젊으니까 회복도 빠르고요. 근데...” 간호사의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우울증이 꽤 심해요. 밤새 잠도 못 자고, 반복 행동도 있고... 오늘 정신과 교수님도 다녀가셨어요. 좀 나아진 것 같긴 한데...” 그 뒤로는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연의 머릿속은 엉망이 되었다가, 이내 텅 비어버렸다. “부탁드릴게요. 정말...” “걱정하지 마세요, 지 선생님.” 진료차트를 돌려주고, 시연은 그대로 몸을 돌려 병실을 빠르게 벗어났고, 끝내 은범과 만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기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그녀를 따라갔다. 시연은 점점 걸음을 재촉했고, 이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시연이? 우리 시연이, 너무 오랜만에
“네.” 유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딱히 움직임은 없어요. 아마, 자기들 살기 바쁠 거예요.” 고상훈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때마침 시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수술 날짜 정해졌어요. 이번 주 금요일인데, 그날은 할아버지 한 분만 수술이 잡혀 있어서 양석현 교수님께서 직접 집도하실 거예요. 물론 저도 양 교수님 곁에서 그분을 도와드릴 거고요. 할아버지, 제가 같이 있어 드릴게요.” “그래, 잘 됐구나.” 고상훈은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착한 손자며느리가 옆에 있는데, 내가 뭐가 무섭겠냐.” 수술 이야기를 마친 뒤, 유건은 먼저 병원을 나서 회사로 향했다. 시연은 고상훈 곁에 조금 더 머물다가 병실을 나섰다. 그런데 복도에서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 심재규였다. 그는 유건이 우주를 위해 따로 모셔 온 정신과 교수였다. “심 교수님?” “사모님.” 심재규 역시 시연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시간이라면, 그는 분명 태산요양병원에 있어야 할 터였다. 그래서 심재규도 급히 해명했다. “오늘 진행해야 할 우주 군의 치료 일정은 모두 끝났습니다. 요양병원을 떠나기 전에 최예민 선생님께 인수인계도 다 해뒀고요.” “혹시라도 상황이 생기면 바로 연락받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급한 볼일이 생기는 바람에... 바로 처리하고 돌아갈 겁니다.” 시연은 손을 내저었다. “교수님, 긴장하지 마세요. 따지러 온 건 아니니까요.” 그 말투와 표정이 진심처럼 느껴져, 심재규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제 환자 중 한 분이 지난번에 다쳤는데, 이후로 통 진료를 받으러 못 오셔서요. 시간 날 때 한번 보려고 들렀습니다.” “환자 보러 오신 거였군요?” 같은 의료인으로서, 시연은 그런 의사들을 가장 존경했다. ‘역시 심 교수님은 진짜 의사야.’ “교수님처럼 진심으로 환자를 생각하시는 분께 뭐라 할 이유는 없죠.” “사모님, 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