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는 많은 양의 배기가스만 남기고 부릉거리며 떠났다.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시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 정말 속이 좁네!” 시연은 윤건이 아까 칭찬한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고유건이 아직도 내가 장소미와 같은 드레스를 골랐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게 아니겠지?’‘정말이면, 고유건은 장소미에 완전히 빠졌구나!’ ... 시연이 BLUE에 도착했을 때,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엘리베이터 좀 기다려 주세요!” 시연은 급히 뛰어가며 외쳤는데, 순간에 멈칫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유건이 서 있었다. 그도 여기에 온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유건의 마음은 복잡했다. ‘지시연이 이런 옷을 입고 BLUE에 온 건, 그 드레스를 사준 남자를 만나러 온 거겠지?’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들어 닫힘 버튼을 눌렀다. 뒤에서 지한이 당황했다. “형님!” 시연이 막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려는 순간, 문이 차갑게 그녀 앞에서 닫혔다. 시연은 엘리베이터 문을 손으로 치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고유건!!!” 할 수 없이 그녀는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야 했다. 시연이 도착했을 때, 양석현은 이미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그는 학자로서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고, 고객을 접대하는 이런 자리에서 요령도 하나 없이 거절하지도 못하고 상대방이 권하는 대로 술을 다 마시고 있었다. 시연은 깊은숨을 한 번 들이쉬고 앞으로 나섰다. “교수님, 늦어서 죄송해요.” 시연이 도착하자마자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리고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양 교수님, 이 아가씨가 교수님의 제자입니까?” 양석현이 대답했다. “네, 제 가장 뛰어난 제자 지시연 선생입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젊고, 게다가 여자가 이렇게 예쁘기까지 하다니.” 다른 한 남자가 술잔을 들
호보창조차 돌아서서 웃음을 지었다. 쩔쩔매며 아첨하는 모습은 아까의 거만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고 대표님, 죄송합니다. 여기서 약간 문제가 생겨서요. 바로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시연을 재촉했다. “지 선생,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아...” 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호보창이 말한 ‘고 대표님’이 바로 고유건이었다. ‘고유건도 이 자리에 있었다니!’ 시연이 다시 술잔을 들기 전에, 유건이 손을 들어 그녀를 가리켰다. “너, 이리 와.” 시연의 심장이 갑자기 쿡 찌르는 듯했다. 그가 자신을 부르는 것일까? “다른 사람 보지 마.” 유건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너 말이야, 이리 와.” 방 안의 모든 시선이 다시 한번 시연에게 쏠렸다. 시연의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나에게 뭘 하려는 속셈이지?’ 순간에, 룸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유건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왜, 말을 못 알아들어?” 호보창은 안달이 나서 시연의 허리를 살짝 밀며 말했다. “지 선생, 뭘 멍하니 서 있어요? 고 대표님이 부르는 거 못 들었어요?”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유건 앞까지 걸어갔다. “고 대표님.” “응.” 유건은 느긋하게 시연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와서 술 따라.” 그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고, 많은 사람 앞이기도 해서 시연은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연은 웨이터에게서 술병을 받아 들고 말했다. “제가 따를게요.” 그러고 나서 유건 쪽으로 다가갔다. 오늘 시연은 샤넬의 시즌 최신상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얇은 두 줄의 끈이 어깨에 걸쳐져 있었으며, 우아한 쇄골과 가슴선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유건의 목울대가 불편하게 움직였고,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시연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그의 무릎 위에 앉은 꼴이 되어버렸다. “고... 대표님?” 유건은 그녀를 꼭 붙잡고, 얼
그 자세를 유지한 채, 유건은 고개를 들어 호보창을 바라보았다. 유건의 눈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호보창은 이미 겁에 질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제 와서 고유건이 지시연을 눈여겨봤다는 걸 몰랐다면, 그는 지금까지 헛살았던 셈이다. ‘비록 내가 먼저 그 지시연이라는 의사를 마음에 두었지만, 만약 지금 내가 고유건이 눈에 둔 이 여자 의사를 건드리면, 나중에 고유건이 나한테 따지고 들겠지? 그때는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거야!’이렇게 생각하자 호보창이 시연에 대해 갖고 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 고 대표님.” 유건은 눈을 살짝 움직이며 양석현을 가리키고는 차갑게 말했다. “G시 최고의 외과 교수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존경받아 마땅한 학자를 이 정도로 모욕한 건 너무 심하지 않나?” “네, 제 잘못입니다.” 호보창은 속으로 불만이 가득했다. ‘어차피 저 학자는 내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데!’ 유건은 시연의 가느다란 허리를 살짝 감싸며 그녀와 함께 일어섰다. 그리고 양석현을 향해 말했다. “양 교수님, 더 이상 여기서 이런 고생은 하지 마세요. 후원금 건은 제가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양석현은 깜짝 놀라 시연을 바라보았다. “이건, 이건...” 시연도 놀라서 유건의 팔을 잡아당겼다. “고 대표님?” 유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 “다시 말해야 해?” “아니요, 그게 아니고요...” “그럼 가요.” 유건은 그녀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며 정민환에게 지시했다. “양석현 교수님을 집까지 모셔다드려.” “네, 형님.” 방 안은 침묵에 빠져 있었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민환이 양석현과 함께 떠나고 나서야 호보창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양 교수가 정말 훌륭한 제자를 얻으셨군!” ... BLUE을 나와서도 유건의 차에 탄 시연은 계속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유건의 속마음을 전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
‘마침, 할아버지도 곧 퇴원하시고. 이혼 이야기도 다시 꺼내야 할 것 같은데.’한편, 시연은 기숙사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고, 갑자기 뺨을 감쌌다.“세상에!”‘방금 그건 꿈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일어난 일일까?’ ‘고유건이... 나에게 키스하다니!!’‘근데 왜? 고유건이 장소미를 사랑하는 거 아니었나? 그럼 조금 전 나한테 한 건, 그냥 장난친 건가?’지금 시연의 입안에는 아직도 희미하게 유건의 입술이 남긴 술 내음이 남아 있었다.‘그래서, 술에 취해서 그런 짓을 한 건가?’시연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가슴을 꾹 눌렀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고, 동시에 뭔가 시리고 답답한 느낌이었다....며칠 후, 아침에 시연은 고상훈의 전화를 받았다.“할아버지.”고상훈이 웃으며 말했다.[시연아, 바쁘니?]“낮에는 일해요.” 시연이 솔직하게 말했다. “오후 5시 반에 퇴근해요.”[그래, 할아버지가 오늘 퇴원했거든. 너와 유건이가 이렇게 오래 같이 있었는데, 오늘 저녁에 가족끼리 같이 저녁 한 끼 먹는 게 어떻겠니?]“그럴게요.”시연은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고상훈은 덧붙였다.[유건이한테는 네가 연락해서 말해줘야겠구나.]시연은 고상훈의 청을 거절하고 싶었다. 유건에게 전화하는 것도 싫었다. 그가 자신에게 키스했다는 생각만 해도 온몸이 불편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고상훈은 시연에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럼 그렇게 알고 끊으마. 할아버지는 집에서 너희를 기다릴게.]전화를 끊은 시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크게 쉬었다. 결국 유건에게 직접 전화해야 했기 때문이다.그녀는 연락처를 뒤져 유건의 번호를 눌렀다.그러나 유건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연은 유건이 아마도 바쁘겠거니 생각하고 메시지를 보냈다.[고유건 씨, 할아버지가 오늘 저녁에 같이 저녁 먹자고 하셨어요.]하루 종일 바쁜 일과가 지나간 뒤, 오후 5시 반이 되자 시연은 옷을 갈아입고 퇴근길에 나섰다.핸드폰은 여전히 조용했다. 오늘 유건은 시연에게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시연은 더욱 긴장했고, 작은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유건은 시연의 긴장감을 눈치채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지시연이 겁내는 거야? 이혼하기 싫어서 그런 걸까? 이렇게까지 이 결혼을 지키고 싶은 건가?’ 고상훈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너와 시연이가 어떻게 한다는 건지 다시 말해 보거라!” 유건은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제가 하려던 말은요, 원래는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조금 더 요양하시길 바랐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퇴원하셨나 싶어서요.” “난 또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고상훈은 약간 못마땅해하며 말했다. “병원에 너무 오래 있으니 멀쩡하던 사람도 환자가 다 될 지경이야. 병원이든 집이든 요양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맞지, 시연아?” “네.” 시연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으면 몸에도 좋을 거예요. 저도 방금 확인했는데, 간병인들이 정말 잘 보살피고 있어서 문제없을 거예요.” 그녀가 뒤에 하는 말은 유건을 향한 것이었다. 그때 가정부가 와서 말했다. “저녁 준비가 다 됐습니다.” “그럼 우리 가족 다 함께 저녁을 먹자꾸나.” 식사 시간 동안 시연은 고상훈의 기분을 맞추며 분위기를 조율했고, 고상훈은 오랜만에 반 공기나 되는 밥을 먹고 국도 한 그릇 다 마셨다. 고유건은 그 장면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할아버지가 정말 시연이를 좋아하시는구나!’‘할아버지 때문에 이혼 이야기는 잠시 미뤄야겠어...’ 식사가 끝난 후 유건이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희는 이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딜 가려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상훈이 말을 받으며 웃음을 지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가라. 방은 이미 가정부들에게 준비시켜 놓았단다.” 시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건은 더 격한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건 안 돼요. 저희는...” “너희는
“소리 내!” 유건의 얼굴에 열기가 도는 가운데, 그는 시연에게 명령했다. 시연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빨리 해!” 유건이 재촉했다. “네가 뭐 순결을 지키는 처녀도 아니고, 그런 소리 하나 못 내?” 유건의 말을 듣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아... 으아...” 유건은 순간 얼이 빠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남녀관계에서 어떤 소리를 냈는지도 기억 못 해?” ‘그때는 아주 격렬했잖아? 거기가 심하게 찢어지는 상처를 입을 정도였는데!’“나...” “됐어!” 유건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시연을 바라봤다. “네가 아까 내가 필요하면 뭐든 해준다고 했지?” “네.” 시연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고유건 씨는 지금 뭘 하려고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시연의 목에서 가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유건은 시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키스하고 있었다! “음... 하...” 시연의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도 자신의 소리에 놀랐다. ‘이게 정말 내가 낸 소리 맞아? 어떻게 이렇게 수치스러운 소리를 낼 수 있지!’ 그녀의 소리는 유건의 신경을 자극했다. “너, 경험이 많다며? 그런데 이렇게 쉽게 반응해? 겨우 키스 한 번일 뿐인데...” “당신...” 시연은 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여 그를 밀어내려 했다. “움직이지 마!” 유건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할아버지가 아직 밖에 계셔! 걱정하지 마, 그냥 키스일 뿐이야. 네가 소리를 제대로 냈다면 내가 이런 희생까지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시연은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본인이 희생한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이야?’ 남자의 키스는 계속 이어졌다. 유건의 코끝에 시연의 향기가 가득했다. ‘이 향기..
다음 날 아침. 식탁 위에서 고상훈은 활짝 펴진 얼굴로, 가끔 시연의 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흘끗 보며 크게 웃었다. “시연아, 더 먹어라. 너도 고생이 많구나.” 그리고 유건에게 당부했다.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시연이는 이제 혼자가 아니잖니!”유건과 시연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지만,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 두 사람은 함께 고씨 저택을 나섰다. 유건은 시연을 강울대학교 기숙사까지 데려다주었다. “오늘은 출근 안 해?” “아니요, 출근해야 해요.”시연은 가방을 메며 대답했다.“야간 근무라서 낮에는 병원에 안 가요.” 강울대학교 기숙사 건물을 힐끔 본 유건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 건물 정말 허름하고 낡았다.” 이건 그가 처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시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래요, 좀 낡긴 했죠. 고유건 씨,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 최근 유건은 은수 프로젝트로 바빠졌다. 마침내 모든 일이 정리되고,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유건이 한강우를 은수 프로젝트를 정식적으로 시작하는 축하 연회에 초대했을 때, 한강우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 생명의 은인인 지시연 씨도 올 거지?” 유건은 예상한 대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시연이와 함께 한 회장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좋아, 좋아.”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유건이 시연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전화기 너머로 시연의 늘 부드러웠던 목소리가 들렸다. 시연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유건은 입가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번 주말 은수 프로젝트 시작 연회가 있는데, 한 회장님이 너를 꼭 보고 싶다고 하셨어. 올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니, 시연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네, 갈 수 있어요.] “좋아.” 유건은 만족스러운 듯 다시 물었다. “적당히 입을
노은범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시연에게 말했다. “그래, 나야.”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연회장 안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도 이 연회에 참석하려고 온 거야?” 은범의 말투에는 어딘가 의아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시연이가 왜 이런 비즈니스 파티에 참석할까?’ “응.” 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애매하게 두 마디 정도로 설명했다. “어쩌다 보니, 이 곳의 주인을 구한 적이 있어.” “한강우, 한 회장님 말이야?”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한 회장님은 내 환자라고 볼 수도 있지.” “그렇구나.”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유건이 전화를 걸어 그녀를 재촉하고 있었다. 시연은 받지 않고 은범에게 손을 흔들었다. “누가 계속 날 재촉하네. 먼저 가볼게!” “천천히 가!” 은범이 말하기도 전에, 시연은 재빨리 후문 쪽으로 뛰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은범은 어딘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시연아, 나중에 보자.” ... 남쪽 문까지 달려가자 시연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겨우 주지한을 만났다. “미안해요, 늦었죠!” 지한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형님은 손님들을 맞이하러 먼저 갔어요. 저는 시연 씨 옷 갈아입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시연과 지한은 휴게실에 도착했다. 장소미는 유건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떠나 있었다. 주지한은 탁자 위에 놓인 선물 상자를 가리켰다. “이건 형님이 시연 씨를 위해 준비한 드레스예요.”“예? 그렇군요.” 선물 상자를 열자 시연은 놀란 숨을 들이마셨다. “엄청 화려한 드레스네요.” “당연하죠.” 지한은 유건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떠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형님이 특별히 해외에서 주문했어요. 다 디자이너와 보조들이 손으로 한 땀 한 땀 완성한 드레스예요. 전 세계에서도 단 한 벌밖에 없어요.”시연은 순간 멈칫했다. ‘고유건이 이렇게까지
시연보다 일찍 도착한 유건 일행은 이미 말을 타기 위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주정빈과 유강석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유건은 시연을 주시하며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를 본 부지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왜 갑자기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말을 타자고 하나 했더니, 알고 보니 여기 우리 고 대표님의 아내가 계시네.” 유건은 지하의 농담에 신경 쓰지 않고,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다 멈췄다. 지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아내가 방이 없어서 곤란해하는 거 보고도 안 도와줄 거야?” ‘도와주라고?’ 유건의 입술에 미소가 살짝 번졌지만, 곧 자리를 떴다.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옆에 딴 남자가 이미 있지.’ “시연아.” 그때, 은범이 차를 주차하고 시연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시연은 입을 삐죽 내밀며 방을 예약하지 못한 일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걱정하지 마. 작은 문제야.” 은범은 우주를 그녀에게 맡기고 말했다. “내가 해결할게. 걱정하지 마.” 그가 나서자마자, 문제는 금세 해결되었다. 은범은 두 장의 방 키를 들고 시연에게 흔들며 말했다. “다 됐어.” 그는 짐을 들고 설명했다. “내가 VIP 카드가 있어서 사전 예약 없이도 가능해.” 시연이 여전히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은범은 부드럽게 말했다. “왜 화가 나 있어?” 시연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성빈이도 못 오게 됐어...” 알고 보니 그 일 때문에 화가 난 거였다. “괜찮아.” 은범은 미소 지으며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우리는 우주를 위해 온 거잖아. 우주가 기뻐하는 게 가장 중요해. 나머지는 사소한 문제야.” 시연은 그의 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미소를 지었다. “응.”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분위기가 훈훈했다. “우주 손 잘 잡고, 방에 짐부터 놓으러 가자.” “그래.” 이 광경을 목격한 지하는 깜짝 놀라며 유건을 쳐
며칠 후, 노은범은 GP그룹에 갔다. HUA테크는 GP그룹의 요구에 따라 절차를 밟았고, 오늘은 고유건을 만나러 온 날이었다. 유건의 비서가 은범을 작은 회의실로 안내했고, 은범이 막 자리에 앉자 유건이 도착했다. 은범은 일어나 인사했다. “고 대표님.” “노 사장님.” 유건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악수했다. “앉으세요.” 두 사람은 짧은 인사 후 바로 협력에 대해 자세히 논의했다. 유건은 은범의 능력에 매우 만족했고, 바로 계약을 결정했다. “협력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야말로 고 대표님께서 저희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협력 잘 부탁드립니다.” 관례에 따라 저녁에는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유건이 초대했다. “노 사장님, 저녁 식사 같이하시죠?” 은범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고 대표님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만, 잠시 후에 일정이 있어서 오늘 저녁엔 G시에 있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다음에 제가 장소를 정해서 고 대표님을 초대하겠습니다.”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은범이 떠나자마자, 유건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늘은 금요일인데, 노은범이 저녁에 G시에 없다고? ‘CLOUD’는 G시 밖에 있는 곳이야. 시연도 오늘 저녁에 떠난다고 말했는데... 그러니까 이 여자는, 노은범과 함께 놀러 가는 거야?!!!’ 핸드폰이 울리자 유건은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해!” 부지하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렇게 거칠게 나올 것까진 없잖아! 누가 너 건드렸어? 저녁에 우리랑 같이 안 갈 거야?] 유건은 불쾌한 기분에 답했다. “너희들이랑 술 마시고 카드 게임하는 게 그렇게 재밌겠냐?” 지하는 웃으며 물었다. [그럼, 고 대표님. 뭐가 재밌는지 말씀해 보시죠?]유건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휴가 가자. CLOUD가 좋겠군.” ... 은범은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뭐?” 강석은 갑작스럽게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누가 연애 경험이 많다고? 나에게 그런 딱지 붙이지 마! 그 여자들은 다 내 여자 친구가 아니라 그냥 친한 여사진들이라고!” 나머지 세 사람은 가차 없이 눈을 굴리며 그를 향해 빈정거렸다. “헤헤.” 강석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개의치 않는 듯 웃었다. “애 있는 여자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지...” “하하!” 정빈이 강석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건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거지. 우리 강석 도련님이 만약 마음에 들었다면, 애가 있든 없든 상관없지. 그렇지?”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두 사람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강석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뭐 어때서? 요즘 같은 시대에 애 하나 때문에 평생을 묶어두겠어?” “네 말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 그동안 조용히 있던 지하가 끼어들며 말했다. “지금 시대가 어떻든, 옛날에 많은 나라들은 왕의 어머니도 딱 한 번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도 했지만, 결국 또 다른 군주와 결혼해 많은 자식을 낳았잖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고.” 지하는 유건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사랑한다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유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눈빛 속에 뭔가를 감추고 있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유건은 이내 흥미를 잃고, 밤 10시도 되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본가로 가는 길에 그는 문득 생각했다. ‘시연은 퇴근했을까?' 그때, 그는 우연히 버스에서 내리는 시연을 보았다. 이곳에서 집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고, 버스가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유건은 아무 말 없이 차를 그녀 가까이로 몰고, 창문을 내렸다. “타.” 시연은 남자가 유건인 것을 보고는, 거절하지 않고 차에 올랐다. “정말 우연이네요.” 차에 앉자마자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녀는 메시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유건은 그녀를 슬쩍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유건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빛이 어두워졌다. “맞아. 왜?” “감사해요.” 시연은 그를 바라보며 매우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감사해요. 어릴 때부터 저에게 잘해준 사람은 거의 없었거든요.” 유건은 가슴속이 찌릿하게 울리며, 그 느낌이 온몸에 퍼졌고, 겨우 입꼬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흥, 그래.” “그런데...” 시연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현진아? 내 친구 외투가 너에게 있다고? 알았어... 아, 그리고 아직 너한테 고맙단 말도 못 했네. 그날 밤, 내 친구를 위해 침대를 양보해 줘서 고마워. 너무 늦었고, 비까지 쏟아져서 호텔을 못 잡았거든. 너 주사실에서 자느라 아주 피곤했지? 나중에 밥 한번 살게.” 시연은 통화하면서 유건에게 지하철역을 가리키며 자신이 바쁘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고는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뛰어 들어갔다. “천천히 가!” 유건은 그녀가 그 말을 들었는지 확신하지 못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결국 올라가고 말았다. ‘이 여자가 결국 나한테 고마워하고, 내 마음을 알고 있었네!’ 게다가, 방금 시연이 전화에서 말한 내용을 유건도 아주 분명히 들었다. ‘그날 밤, 비가 쏟아지던 날, 그건 바로 노은범이 왔던 날이 아닌가?’ ‘이 여자는 노은범과 같은 방에서 자지 않았어!’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 그러니까 노은범은 지시연을 버렸었고, 두 사람은 아직 화해하지 않은 상태이야! 흥!’ 유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마음속 깊이 감추고 있는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태산요양병원. 은범과 시연은 문 앞에서 서 있었다. 방 안에서는 CA국에서 온 전문가들이 우주를 검사하고 있었다. 시연은 불안한 마음으로 손을 꼭 쥔 채 떨고 있었다. “시연아.” 은범은 시연의 옆에 서서,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힘차게 두근거리는 심장은 그녀의 진심을 속일 수 없었다. 전혀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잘해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얼마 되지 않는 만큼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시연에게 친절을 베풀면, 그 작은 호의조차도 그녀는 감사하게 여기며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남이 자신에게 베푼 작은 호의를 열 배로 갚으려 했다. ... 강울대학교병원을 나선 시연은 고씨 가문의 본가로 돌아갔다. 고상훈은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유건에게 전화를 걸었고, 시연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며칠 동안 네가 없어서 그런지, 우리 유건이도 뭘 그렇게 바쁜지 하루 종일 얼굴을 못 봤어. 마침 잘 됐어, 저녁에 같이 밥을 먹자.” 그러나 전화를 걸자, 유건은 말했다. [할아버지, 저 바빠서 못 돌아갑니다.] “뭐가 그렇게 바빠?” 고상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을 것 아니냐? 더군다나 시연이가 출장 갔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는데...” [할아버지, 회의가 있어서 이만 끊을게요.]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고상훈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이런 고얀 것! 정말 무례하군!” “할아버지.” 시연은 속으로 알고 있었다. 유건이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화내지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오늘 저녁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할아버지랑 밥도 먹고, 같이 바둑도 두고, 불경도 읽어드릴게요. 괜찮죠?” “좋지, 좋지.” 순식간에 고상훈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그날 저녁, 유건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시연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 그때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고유건이 돌아왔나?’ ‘침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니, 아마 아침에 돌아온 것 같네.’ 물소리가 멈추고, 유건은 욕실에서 나와 곧바로 옷방으로 들어갔다. 마치 그녀를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정
GP그룹 회의실. 주지한은 서류 폴더 하나를 펼쳐 유건 앞에 놓았다. 최근 GP그룹에서 추진 중인 프로젝트에 기술 협력 파트너가 필요한데, 현재까지 적합한 후보가 없는 상태였다. 이번에 제출된 것은 두 번째 후보군이었다. 유건은 한눈에 서류를 훑었다. [HUA테크, CEO 겸 총괄 엔지니어, 노은범]유건의 손가락이 ‘노은범’이라는 세 글자를 톡톡 두드렸다. 지한이 말했다. “형님, 노은범은 비록 최근에 귀국했지만, 해외 유학 시절 뛰어난 성과를 냈고, 여러 번 과학 기술상을 수상한 인재입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노은범은 매우 드문 전문가였다. 유건은 사업가이자 남자였다. 사업상의 문제를 감정과 잘 분리했고, 또한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좋아, HUA테크와 절차를 진행해.” 저녁에 유건은 부지하 등과 술자리 약속이 있었다. 유건은 노은범에 관해 이야기하며 물었다.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있어?” “노씨 가문의 도련님 말이지.” 주정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그거 못 들어봤어? 사람들이 G시 제일 미남이라고 평가했잖아.” 유건의 머릿속에 노은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유건조차도 은범이 그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지시연은 노은범의 외모에 반한 거야?!’ 유건은 무의식적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답답한 숨을 내쉬었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너 여자냐? 누가 외모 얘기를 물었어?” “그럼 뭘 묻는 건데?” 유강석은 웃으며 말했다. “은범 도련님은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고, 별다른 나쁜 습관도 없어. 너처럼 남녀 관계도 깨끗하고...” 하지만, 그도 말을 돌려 웃으며 덧붙였다. “하지만 너는 예전 얘기고, 지금은 본처와 첩을 두 손에 잡고 있는 상태잖아!” 유건은 침묵했다. ‘결국 노은범이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었던 거야?’ ‘좋네.’ ‘지시연도 눈이 멀진 않았고, 원하
문이 열리자, 노은범의 부드럽고 우아한 얼굴이 드러났다. 방금 샤워를 마친 그는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고, 상체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서 있었다. 하체는 시연이 방금 김현진에게서 빌린 널찍한 운동복 바지만 입고 있었다. 유건은 그를 가만히 응시하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 대표님.” 은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신 걸 보니, 시연이 찾으러 오셨나 봅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공기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은범은 말했다. “시연이 지금 욕실에 있어요.” 그는 이 말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남자의 직감으로, 은범도 유건이 시연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유건은 단순히 시연의 환자가 아니었어...’ 유건의 얼굴은 무표정하고 차가웠다. 지금 이 상황은 그를 화나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유건은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그저 낮게 말했다. “시연이 어디 있지? 직접 만나야겠어.” “은범아, 누구야?” 바로 그때, 시연이 나와 은범의 어깨 너머로 이쪽을 보며 걸어왔다. 유건은 은범을 무시하고, 시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유건 씨?” 시연은 놀라며 물었다. “여긴 왜 왔어요?” ‘이 남자는 조금 전까지도 장소미와 함께 있던 게 아닌가? 두 사람이 끌어안고 있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따라와.” 유건은 시연의 손목을 잡고 이끌려 했다. 그러나 은범이 유건을 막아섰다. “고 대표님, 이 손 놓으세요.” 그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퍼져나갔다. 유건은 비웃으며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 시연에게 물었다. “나랑 갈 거야, 말 거야?” 시연은 갈등을 피하기 위해 말했다. “은범아, 고 대표님과 몇 마디만 하고 올게. 걱정하지 마.” 시연이 이렇게 말하자, 은범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아주며 당부했다. “만약에 너를 괴롭히면 바로 소리 질러.” “알았어..
“설마 우리 우주를 위해서?” 시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물론이지.] 은범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와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킬 거야.] 시연은 이 일이 우주에 관한 것인 만큼 더는 따지지 않았다. “그럼 도착하면 전화해.” [알겠어.]전화를 끊고, 은범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시연이 우주 때문에 연락을 받았을 뿐이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시연이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고, 결국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 비는 점점 더 굵어졌다. 진아는 문 앞에 서 있는 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지네.” 그러더니 진아도 궁금한 듯 물었다. “누구 기다리는 거야? 너 정말 남편 기다리는 망부석처럼 보이는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시연이 뒤돌아보며 대답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시연은 1층 공터로 내려갔고, 그곳에서는 은범이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나오는 중이었다. 시연은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됐어?” 은범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젖어 있었고, 얼굴과 옷에는 진흙이 잔뜩 묻은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은범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는 길에 타이어가 터져서 타이어를 갈아 끼우느라 이렇게 됐어.” 시연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 내 잘못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은범은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진 걸 보고 말렸다. “내가 창우면에 오지 않았다 해도 타이어는 터졌을 거야.” 그는 시연의 뒤를 힐끗 보며 말했다. “나 안으로 들어가도 돼?” “아, 맞다!” 시연은 그를 손짓해 재촉하며 말했다. “어서 들어와!” “그래.” 시연은 그를 따라 2층으로 데려갔다. “여기는 병원 직원 숙소야. 좀 낡고 허름하지만, 화장실이 있으니까 샤워는 할 수 있어.” 말을 나누며 두 사람은 시연의 방에 도착했다. 시연은 문을 열며 말했다. “나랑 진아는 한방을 써.”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유건은 시연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유건의 전화를 전혀 받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시연은 의료팀과 함께 물품을 정리하고, 차에 싣고 출발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원래 그녀는 마지막 차로 떠나려 했으나, 이제 그럴 필요도 없었다. 시연의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유건의 이름을 보자, 시연은 아무 말 없이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 그 순간, 유건은 차를 몰고 병원으로 들어왔지만, 이미 첫 번째 의료 차량이 출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여기 주차하시면 안 됩니다. 중앙 주차장으로 가세요.” 유건은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려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서둘러 응급실로 향하며 물었다. “지시연 선생님 계신가요?” 접수대의 간호사는 시연과 친분이 있었다. “지 선생님이요? 방금 의료지원 차량과 함께 떠났어요.” “떠났다고요? 언제요?” “저기요!” 간호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출발한 저 차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벌써 달려 나갔다. “시연아! 지시연!” 막 출발한 차량은 병원 문을 막 나섰고, 차의 속도는 아직 빠르지 않았다. 차 안에서는 누군가가 차를 쫓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어? 저 사람 우리 차를 쫓아오는 거야?” “당연하지! 엄청나게 빨리 달리잖아!” “오, 키가 크네. 최소 190cm는 되겠어. 정말 잘생겼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들 한 번 봐봐. 저 사람은 누구를 쫓아오는 거야?” “맞아, 맞아. 일단 모두 일어나서 누굴 쫓는지 알아보자고. 뭔가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차 안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운전기사도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시연만은 차에 오르자마자 음악을 틀고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차 안의 소란을 전혀 알지 못했다. 차가 병원을 빠져나가 큰길로 들어서려 할 때, 운전기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