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시연은 진아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시연은 크게 하품했다. 진아는 그녀의 눈 밑 다크서클을 보고 물었다. “얼굴 왜 이렇게 피곤해? 몇 시 잤어?” “모르겠어, 아마도 새벽에.” 진아가 말했다. “알바하느라 몸을 너무 혹사하지 마. 건강이 우선이야.” “응, 알았어.” 시연은 속으로 죄책감이 들었다. 사실 그녀가 잠을 못 잔 건 번역 때문이 아니라... 눈만 감으면 유건의 커다란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젯밤, 고유건이 정말 나에게 키스하려던 걸까?’ ‘그랬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그게 아니었다면 또 어땠을까?’ “시연아.”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뺨에 손을 댔다. 진아였다. “얼굴이 이렇게 빨개? 열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시연은 깜짝 놀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따뜻한 국물 먹어서 그런지 좀 덥네...” 점심 후, 시연은 진료실로 돌아왔다. 주하은이 그녀를 불러 세우며 말했다. “시연아, 양석현 교수님이 너 돌아오면 교수님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셨어. 지금 안에 계셔.” “알았어.”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흰 가운을 입고 들어가려 했다. “시연아.” 주하은은 그녀를 잡아당기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장성산 교수님도 함께 계셔. 양석현 교수님과 함께 문광수 과장님을 만나러 갔는데, 상황이 안 좋아 보여...” 그 말을 듣자 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문광수는 외과 과장으로, 내년에 은퇴할 예정이다. 양석현과 장성산은 부과장으로, 두 사람은 과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그래서 둘 사이는 언제나 불편했다. 양석현은 실무 능력이 뛰어났고, 장성산은 탁월한 연구 실적을 내는 사람이었다. 양석현은 장성산을 무시했고, 장성산은 양석현을 질투했다. 특히 얼마 전 고유건이 부상으로 응급실에 입원했을 때, 그날 밤 장성산이 2차 당직을 맡고 있었다.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면 양석현 혼자 감당하지 못할 때 장성산에게 도움을 청할 수
차는 많은 양의 배기가스만 남기고 부릉거리며 떠났다.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시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 정말 속이 좁네!” 시연은 윤건이 아까 칭찬한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고유건이 아직도 내가 장소미와 같은 드레스를 골랐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게 아니겠지?’‘정말이면, 고유건은 장소미에 완전히 빠졌구나!’ ... 시연이 BLUE에 도착했을 때,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 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엘리베이터 좀 기다려 주세요!” 시연은 급히 뛰어가며 외쳤는데, 순간에 멈칫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유건이 서 있었다. 그도 여기에 온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유건의 마음은 복잡했다. ‘지시연이 이런 옷을 입고 BLUE에 온 건, 그 드레스를 사준 남자를 만나러 온 거겠지?’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들어 닫힘 버튼을 눌렀다. 뒤에서 지한이 당황했다. “형님!” 시연이 막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려는 순간, 문이 차갑게 그녀 앞에서 닫혔다. 시연은 엘리베이터 문을 손으로 치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고유건!!!” 할 수 없이 그녀는 다음 엘리베이터를 기다려야 했다. 시연이 도착했을 때, 양석현은 이미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 있었다. 그는 학자로서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고, 고객을 접대하는 이런 자리에서 요령도 하나 없이 거절하지도 못하고 상대방이 권하는 대로 술을 다 마시고 있었다. 시연은 깊은숨을 한 번 들이쉬고 앞으로 나섰다. “교수님, 늦어서 죄송해요.” 시연이 도착하자마자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리고 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양 교수님, 이 아가씨가 교수님의 제자입니까?” 양석현이 대답했다. “네, 제 가장 뛰어난 제자 지시연 선생입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젊고, 게다가 여자가 이렇게 예쁘기까지 하다니.” 다른 한 남자가 술잔을 들
호보창조차 돌아서서 웃음을 지었다. 쩔쩔매며 아첨하는 모습은 아까의 거만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고 대표님, 죄송합니다. 여기서 약간 문제가 생겨서요. 바로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시연을 재촉했다. “지 선생,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아...” 시연은 순간 멍해졌다. 호보창이 말한 ‘고 대표님’이 바로 고유건이었다. ‘고유건도 이 자리에 있었다니!’ 시연이 다시 술잔을 들기 전에, 유건이 손을 들어 그녀를 가리켰다. “너, 이리 와.” 시연의 심장이 갑자기 쿡 찌르는 듯했다. 그가 자신을 부르는 것일까? “다른 사람 보지 마.” 유건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너 말이야, 이리 와.” 방 안의 모든 시선이 다시 한번 시연에게 쏠렸다. 시연의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나에게 뭘 하려는 속셈이지?’ 순간에, 룸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유건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왜, 말을 못 알아들어?” 호보창은 안달이 나서 시연의 허리를 살짝 밀며 말했다. “지 선생, 뭘 멍하니 서 있어요? 고 대표님이 부르는 거 못 들었어요?”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유건 앞까지 걸어갔다. “고 대표님.” “응.” 유건은 느긋하게 시연을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와서 술 따라.” 그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었고, 많은 사람 앞이기도 해서 시연은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연은 웨이터에게서 술병을 받아 들고 말했다. “제가 따를게요.” 그러고 나서 유건 쪽으로 다가갔다. 오늘 시연은 샤넬의 시즌 최신상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얇은 두 줄의 끈이 어깨에 걸쳐져 있었으며, 우아한 쇄골과 가슴선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유건의 목울대가 불편하게 움직였고,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시연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그의 무릎 위에 앉은 꼴이 되어버렸다. “고... 대표님?” 유건은 그녀를 꼭 붙잡고, 얼
그 자세를 유지한 채, 유건은 고개를 들어 호보창을 바라보았다. 유건의 눈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호보창은 이미 겁에 질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제 와서 고유건이 지시연을 눈여겨봤다는 걸 몰랐다면, 그는 지금까지 헛살았던 셈이다. ‘비록 내가 먼저 그 지시연이라는 의사를 마음에 두었지만, 만약 지금 내가 고유건이 눈에 둔 이 여자 의사를 건드리면, 나중에 고유건이 나한테 따지고 들겠지? 그때는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거야!’이렇게 생각하자 호보창이 시연에 대해 갖고 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 고 대표님.” 유건은 눈을 살짝 움직이며 양석현을 가리키고는 차갑게 말했다. “G시 최고의 외과 교수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존경받아 마땅한 학자를 이 정도로 모욕한 건 너무 심하지 않나?” “네, 제 잘못입니다.” 호보창은 속으로 불만이 가득했다. ‘어차피 저 학자는 내 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인데!’ 유건은 시연의 가느다란 허리를 살짝 감싸며 그녀와 함께 일어섰다. 그리고 양석현을 향해 말했다. “양 교수님, 더 이상 여기서 이런 고생은 하지 마세요. 후원금 건은 제가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양석현은 깜짝 놀라 시연을 바라보았다. “이건, 이건...” 시연도 놀라서 유건의 팔을 잡아당겼다. “고 대표님?” 유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물었다. “다시 말해야 해?” “아니요, 그게 아니고요...” “그럼 가요.” 유건은 그녀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며 정민환에게 지시했다. “양석현 교수님을 집까지 모셔다드려.” “네, 형님.” 방 안은 침묵에 빠져 있었고,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민환이 양석현과 함께 떠나고 나서야 호보창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양 교수가 정말 훌륭한 제자를 얻으셨군!” ... BLUE을 나와서도 유건의 차에 탄 시연은 계속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유건의 속마음을 전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
‘마침, 할아버지도 곧 퇴원하시고. 이혼 이야기도 다시 꺼내야 할 것 같은데.’한편, 시연은 기숙사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문을 닫고, 갑자기 뺨을 감쌌다.“세상에!”‘방금 그건 꿈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일어난 일일까?’ ‘고유건이... 나에게 키스하다니!!’‘근데 왜? 고유건이 장소미를 사랑하는 거 아니었나? 그럼 조금 전 나한테 한 건, 그냥 장난친 건가?’지금 시연의 입안에는 아직도 희미하게 유건의 입술이 남긴 술 내음이 남아 있었다.‘그래서, 술에 취해서 그런 짓을 한 건가?’시연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가슴을 꾹 눌렀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고, 동시에 뭔가 시리고 답답한 느낌이었다....며칠 후, 아침에 시연은 고상훈의 전화를 받았다.“할아버지.”고상훈이 웃으며 말했다.[시연아, 바쁘니?]“낮에는 일해요.” 시연이 솔직하게 말했다. “오후 5시 반에 퇴근해요.”[그래, 할아버지가 오늘 퇴원했거든. 너와 유건이가 이렇게 오래 같이 있었는데, 오늘 저녁에 가족끼리 같이 저녁 한 끼 먹는 게 어떻겠니?]“그럴게요.”시연은 바로 대답했다. 그리고 고상훈은 덧붙였다.[유건이한테는 네가 연락해서 말해줘야겠구나.]시연은 고상훈의 청을 거절하고 싶었다. 유건에게 전화하는 것도 싫었다. 그가 자신에게 키스했다는 생각만 해도 온몸이 불편했기 때문이다.그러나 고상훈은 시연에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럼 그렇게 알고 끊으마. 할아버지는 집에서 너희를 기다릴게.]전화를 끊은 시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크게 쉬었다. 결국 유건에게 직접 전화해야 했기 때문이다.그녀는 연락처를 뒤져 유건의 번호를 눌렀다.그러나 유건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연은 유건이 아마도 바쁘겠거니 생각하고 메시지를 보냈다.[고유건 씨, 할아버지가 오늘 저녁에 같이 저녁 먹자고 하셨어요.]하루 종일 바쁜 일과가 지나간 뒤, 오후 5시 반이 되자 시연은 옷을 갈아입고 퇴근길에 나섰다.핸드폰은 여전히 조용했다. 오늘 유건은 시연에게
자신의 이름이 언급되자, 시연은 더욱 긴장했고, 작은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유건은 시연의 긴장감을 눈치채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지시연이 겁내는 거야? 이혼하기 싫어서 그런 걸까? 이렇게까지 이 결혼을 지키고 싶은 건가?’ 고상훈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너와 시연이가 어떻게 한다는 건지 다시 말해 보거라!” 유건은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제가 하려던 말은요, 원래는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조금 더 요양하시길 바랐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퇴원하셨나 싶어서요.” “난 또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고상훈은 약간 못마땅해하며 말했다. “병원에 너무 오래 있으니 멀쩡하던 사람도 환자가 다 될 지경이야. 병원이든 집이든 요양하는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맞지, 시연아?” “네.” 시연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좋으면 몸에도 좋을 거예요. 저도 방금 확인했는데, 간병인들이 정말 잘 보살피고 있어서 문제없을 거예요.” 그녀가 뒤에 하는 말은 유건을 향한 것이었다. 그때 가정부가 와서 말했다. “저녁 준비가 다 됐습니다.” “그럼 우리 가족 다 함께 저녁을 먹자꾸나.” 식사 시간 동안 시연은 고상훈의 기분을 맞추며 분위기를 조율했고, 고상훈은 오랜만에 반 공기나 되는 밥을 먹고 국도 한 그릇 다 마셨다. 고유건은 그 장면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할아버지가 정말 시연이를 좋아하시는구나!’‘할아버지 때문에 이혼 이야기는 잠시 미뤄야겠어...’ 식사가 끝난 후 유건이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저희는 이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딜 가려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상훈이 말을 받으며 웃음을 지었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가라. 방은 이미 가정부들에게 준비시켜 놓았단다.” 시연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건은 더 격한 반응을 보이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건 안 돼요. 저희는...” “너희는
“소리 내!” 유건의 얼굴에 열기가 도는 가운데, 그는 시연에게 명령했다. 시연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빨리 해!” 유건이 재촉했다. “네가 뭐 순결을 지키는 처녀도 아니고, 그런 소리 하나 못 내?” 유건의 말을 듣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아... 으아...” 유건은 순간 얼이 빠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남녀관계에서 어떤 소리를 냈는지도 기억 못 해?” ‘그때는 아주 격렬했잖아? 거기가 심하게 찢어지는 상처를 입을 정도였는데!’“나...” “됐어!” 유건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시연을 바라봤다. “네가 아까 내가 필요하면 뭐든 해준다고 했지?” “네.” 시연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고유건 씨는 지금 뭘 하려고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건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시연의 목에서 가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유건은 시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키스하고 있었다! “음... 하...” 시연의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도 자신의 소리에 놀랐다. ‘이게 정말 내가 낸 소리 맞아? 어떻게 이렇게 수치스러운 소리를 낼 수 있지!’ 그녀의 소리는 유건의 신경을 자극했다. “너, 경험이 많다며? 그런데 이렇게 쉽게 반응해? 겨우 키스 한 번일 뿐인데...” “당신...” 시연은 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여 그를 밀어내려 했다. “움직이지 마!” 유건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할아버지가 아직 밖에 계셔! 걱정하지 마, 그냥 키스일 뿐이야. 네가 소리를 제대로 냈다면 내가 이런 희생까지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시연은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본인이 희생한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이야?’ 남자의 키스는 계속 이어졌다. 유건의 코끝에 시연의 향기가 가득했다. ‘이 향기..
다음 날 아침. 식탁 위에서 고상훈은 활짝 펴진 얼굴로, 가끔 시연의 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흘끗 보며 크게 웃었다. “시연아, 더 먹어라. 너도 고생이 많구나.” 그리고 유건에게 당부했다.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시연이는 이제 혼자가 아니잖니!”유건과 시연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지만,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 두 사람은 함께 고씨 저택을 나섰다. 유건은 시연을 강울대학교 기숙사까지 데려다주었다. “오늘은 출근 안 해?” “아니요, 출근해야 해요.”시연은 가방을 메며 대답했다.“야간 근무라서 낮에는 병원에 안 가요.” 강울대학교 기숙사 건물을 힐끔 본 유건은 불만스럽게 말했다. “이 건물 정말 허름하고 낡았다.” 이건 그가 처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시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래요, 좀 낡긴 했죠. 고유건 씨,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 최근 유건은 은수 프로젝트로 바빠졌다. 마침내 모든 일이 정리되고,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유건이 한강우를 은수 프로젝트를 정식적으로 시작하는 축하 연회에 초대했을 때, 한강우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 생명의 은인인 지시연 씨도 올 거지?” 유건은 예상한 대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시연이와 함께 한 회장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좋아, 좋아.”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유건이 시연을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전화기 너머로 시연의 늘 부드러웠던 목소리가 들렸다. 시연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참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유건은 입가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번 주말 은수 프로젝트 시작 연회가 있는데, 한 회장님이 너를 꼭 보고 싶다고 하셨어. 올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니, 시연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네, 갈 수 있어요.] “좋아.” 유건은 만족스러운 듯 다시 물었다. “적당히 입을
문 밖.유건, 은범, 그리고 진주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가장 먼저 진주의 핸드폰이 울렸다.“엄마. 네, 이제 끝났어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진주는 은범을 바라보았다.“은범아, 우리 엄마가 집에 빨리 들어오래.”하지만 은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 없이 굳어 있었다.그는 무조건 시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진주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갈게.”“응...”은범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절대 시연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그러나 그때, 은범의 핸드폰이 울렸다.강수희였다.“어머니.”[은범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진주를 안 데려다준 거니? 서로 친해지는 건 좋지만, 너무 늦으면 진주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은범은 진주를 한 번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강수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이제 늦었으니, 무조건 진주 데려다줘야 해. 알겠지?]이를 악물며, 은범은 짧게 대답했다.“알았어요.”전화를 끊고, 그는 진주를 향해 말했다.“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어?”진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회의실 문을 가리켰다.“그래도 돼?”“너랑 같이 왔잖아.”은범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너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게 맞지.”시연에게는 나중에 충분히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니까.“가자.”“응.”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건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빛 가득한 냉소를 띄웠다.‘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이었어.’그는 긴 다리를 내디뎌 은범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비꼬는 듯한 미소.“어디 가려고?”“고 대표님...”은범이 답하려 했지만, 유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내가 있는 한, 넌 한 발짝도 못 움직여.”은범은 얼굴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말했다.“고 대표님, 전 친구를 집에 데려다줘야 합니다.”“헛소리 좀 그만하지 그래?”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몇 걸음 떨어진 곳.노은범과 하진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그리고 시연과 마주쳤다.“시, 시연아.”은범은 당황해 더듬거렸다.진주는 은범을 한 번 바라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친구야?”“응, 아니... 아니야. 내가 좋아한다던 그 사람이야.”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부정했고, 더 이상 진주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서둘러 시연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뜻밖의 조우에 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교수님이 여기서 회의 중이셔. 놓고 가신 자료를 가져다주러 왔어.”그녀가 유건에게 한 말과 똑같았다.“그렇구나.”은범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연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엔 허공을 잡았다.시연은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은범은 순간 멍해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연아?”시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엔 명확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먼저 가볼게. 그리고 널 방해하면 안 되잖아.”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려 했다.은범은 당황했다.시연이 오해했다고 확신했다.“시연아...”“잠시만요.”진주가 갑자기 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여자의 직감은 빠르다. 이 짧은 순간에도 진주는 분위기를 감지했다.시연과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말했다.“죄송하지만, 잠깐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어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시간 없어서요. 비켜주세요.”거절이었다.진주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강단 있게 나섰다.그녀는 시연의 팔을 잡았다.“잠깐이면 돼요! 금방 끝날 말이에요.”그녀는 은범을 흘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당신이 은범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오해하신 것 같아요.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친구일 뿐이거든요.”“하고 싶으신 말, 다 하신 거예요?”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진주를 힐끗 바라보았다.“내가 보기엔 진주가 참 괜찮은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우리 은범이 복이 없는 탓이지, 뭐.”진주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이모, 그런 말씀 마세요. 과찬이세요.”“진주야.”강수희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주의 손을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지난번에 은범이랑 같이 연극 봤다면서? 그 후로는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해 봐. 은범이의 뭐가 마음에 안들었니?”“그게...”진주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지난번에 은범과 미리 조율한 대로, 진주는 연극을 본 후 자기 부모님께 자신이 은범을 향한 마음이 없다고 전했다. 이는 진주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거였고, 은범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예상치 못하게 강수희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진주는 은범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모, 은범이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만, 저희는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이 말이 강수희에게 희망을 주고 말았다.“그럼, 좀 더 만나보고 알아가면 되잖아? 제발, 은범이에게 기회를 줘 봐, 응?”“어머니!”은범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왔다.그는 먼저 방혜령에게 인사를 건넸다.“이모, 오랜만이네요.”그리고 곧바로 어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어머니, 이모는 어머니를 뵈러 오신 거잖아요.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내가 이러는 건...”“괜찮아.”방혜령이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으면서 시선을 은범에게 두었다.“이제 많이 컸네? 그런데 너희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닌 것 같아.”그녀는 딸을 한번 흘긋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너희, 한 번 본 걸로 판단하기엔 너무 성급하지 않아? 좀 더 만나면서 알아가는 게 맞지 않나?”강수희가 기뻐하며 맞장구쳤다.“내 말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어머니!”“엄마!”은범과 진주가 동시에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고, 방혜령과 강수희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실 문 앞에서, 시연은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형수님.]“지한 씨.”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유건 씨와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당연하죠. 형님도 여기 계세요.]잠시 후, 수화기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유건의 무심한 어조.“심폐 프로젝트팀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 당신이 한 일이에요?”질문은 직설적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개입했다면, 바로 이해할 터였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남자의 답이 돌아왔다.[그래.]전혀 놀랍지 않았다. 시연은 눈을 감았지만,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여자의 침묵에, 유건은 비웃듯 말했다.[설마 거절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벌인 일이라는 이유만으로?]시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멍청하긴...]유건이 낮게 욕했다.[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간다는 게 너한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설명해야 하냐?]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팀에 들어가면 분명 시연의 수입도 늘어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경험과 기술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돈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지시연.]유건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나와 관계를 끊는 게 중요해? 아니면 네 미래가 더 중요해?]책망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시연도 알고 있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결정을 내렸다.“고마워요, 유건 씨.”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동시에, 안도감이 밀려왔다.‘다행이네. 이 여자, 결국 받아들였어!’하지만 시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유건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예전엔 내가 잘못했어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는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유건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원래라면, 저 여자, 부와 명예를 누려야 마땅해. 하지만 지금은...’...차에 돌아온 지한은 유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즉, 유건의 온몸에서 스며 나오는 묵직한 어둠과 슬픔을 느낀 것.‘설마, 또 형수님한테 혼난 건가? 그게 아니면, 이번엔 진짜로 맞기라도 한 건가?’“형님...”“지한아.”유건의 시선이 멍하니 허공을 가로질렀다.“방법을 좀 찾아봐. 시연이가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내가 돈을 건네면, 시연이는 절대 받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연이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건 아닐 거야.’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시연이가 돈과 명예를 탐하는 여자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지? 정말 한심해!’...시연은 임진아 집으로 돌아온 뒤, 저녁에 양석현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교수님.”[시연아, 내일 오전에 내 사무실로 와. 할 말이 있어.]“네, 교수님.”양석현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연은 교대 근무도 마치지 못한 채 서둘러 외과로 향했다.양석현은 회진을 마친 후에야 시간을 냈고, 시연을 과장실로 데려갔다.“일찍 왔구나. 앉아.”시연은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교수님, 무슨 일이신가요?”‘혹시 내가 1학년 실험 수업을 하는 데에 문제가 생긴 걸까?’“뭘 그렇게 긴장해?”양석현은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도, 결국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은 소식이야.”그는 서랍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시연에게 건넸다.“이걸 작성하면, 너는 공식적으로 심폐 프로젝트팀에 들어가게 될 거거든.”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교수님, 이게... 정말 규정에 맞는 건가요?”“규정대로라면, 맞지 않지.”양석현이 웃었다.“원래는 네가 대학원에 합격하면 팀에 넣을 생각이었어. 그 자체도 예외적인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아직 대학원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능하게 된 걸까?양석현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