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모! 꼭 그 삼촌보다 저 잘생긴 남자를 찾아야 돼요. 삼촌보다 백배, 아니 만 배 잘생긴 사람!” 어느 한 패스트푸드 점, 하늘이는 감자튀김을 먹으며 사하나에게 말했다. 사하나는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왔지만 아이의 말을 듣고 나서야 별일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하늘이의 말에 대답했다. “그런 말들은 다른 사람이 한 거지 이우빈 그 사람이랑 상관이 없잖아. 이모 생각엔 이우빈 씨도 네 엄마한테 관심이 있어 보이는데?” 하늘이는 사하나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안 돼요. 그 삼촌은 제 아빠가 될 자격이 없어요.” 사하나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어 보였다. 감자튀김을 맛있게 먹고 있던 하늘이는 갑자기 차가운 액체가 자신의 입가에 닿는 느낌을 받았고 손으로 쓱 만져보았다. 어린아인지라 하늘이는 케첩인 줄 알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사하나가 깜짝 놀라며 다가와 말했다. “왜 갑자기 코피가 나는 거야? 빨리 업혀. 이모랑 병원 가자!” ... 이건 성유리가 현장에서 날밤을 샌 두 번째 날이었다. 이우빈의 설득 하에 성유리는 결국 그에게 두 장면을 더 추가해 줬고 내용은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랑 상의하며 하나씩 적어 갔다. 감독마저 아주 흡족해하며 박수를 쳤지만 여자 주인공 쪽은 불만이 가득한 눈치였다. 여자 주인공이랑 마주치기를 꺼리던 성유리는 끝나면 바로 몰래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나 여자 주인공의 매니저는 어느새 성유리를 찾아와 먼저 말을 걸었다. “성유리 선생님, 저희 그 추가된 두 장면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매니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의 핸드폰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 사람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리더니 정신없이 현장을 떠나갔다. “선생님! 성유리 선생님!” 매니저는 뒤에서 몇 번이나 성유리를 불렀지만 그녀는 망설이지도 않고 발걸음을 옮겼고 매니저는 화가 나 이빨을 꽉 깨물었다. “어떻게 됐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사하나는 성유리의 감정을 알아차리곤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언니도 결국 하늘이의 미래를 위해 이렇게 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합시다. 어차피 전 별로 바쁜 일도 없으니까 이번에 하늘이가 다 나으면 내가 애를 데리고 금청으로 먼저 돌아가죠. 가서 우리 부모님 댁에서 지낼게요.” “그분들도 손녀 얘기를 오래전부터 하셨거든요. 비록 의붓손녀지만 똑같이 사랑해 주실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하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하나는 그녀가 자신의 제안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기에 지금 당장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일단 이렇게 합시다. 언니도 피곤할 테니 오늘 밤은 내가 있을게요. 언니는 들어가서 좀 쉬세요.” “아니. 네가 먼저 들어가. 난 여기 있을게.” “하지만...” “지금 내가 들어가면 제대로 잘 수 있을 것 같아?” 성유리의 이 질문에 사하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사하나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성유리는 한참 후에야 하늘이의 침대 옆으로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아이는 오늘 채혈을 해서 그런지 팔뚝에는 여전히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작은 얼굴은 창백해 보였다. 하늘이에게 손을 뻗어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혹시 깰까 봐 망설이다가 성유리는 결국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한참 동안 가만히 하늘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하늘아.” 그 목소리는 아이를 깨우지 않을 만큼 작았는고 성유리 혼자만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며칠간 성유리는 더 바빠졌고 촬영 현장과 병원을 오가며 바삐 뛰어다녔다. 때로는 하늘이가 갑자기 뭔가 먹고 싶다고 하면 호텔로 돌아가 직접 만들어 오기도 했다. 고작 일주일 만에 그녀는 몸무게가 5kg이나 빠졌고 얼굴은 많이 초췌해졌다. 사하나조차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하지만 성유리는 마
2년 하고도 4개월. 성유리는 그와 다시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 그 상상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두 사람은 이미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의 곁에는 늘 샴페인과 꽃다발로 둘러싸인 화려한 삶이 있었고 그녀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교차할 일이 없는 평행선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등장은 성유리의 그런 믿음을 단번에 깨뜨렸다. 하늘이를 안고 있던 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엄마, 저 사람 알아?” 하늘이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니, 몰라.” 행여나 자신의 감정이 들킬까 성유리는 서둘러 대답했다. 한편, 박한빈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성유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을 들어버린 순간, 그의 발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버렸다. 방금 전까지 뛰던 심장은 순간 멈춘 듯 잠잠해졌고 뜨겁게 끓던 피는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더 이상 박한빈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만, 하늘이는 박한빈의 시선을 느꼈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며 그를 쳐다보았다. 이혼 당시, 두 사람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았다. 성유리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조차 박한빈은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잠들지 못한 채로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그러다 보니 박한빈은 심장과 위가 아파 견딜 수 없을 정도까지 되였다. 버티던 박한빈이 결국 병원을 찾아갔지만 의사는 그의 몸이 건강하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자 의사는 단지 “심리적 긴장”일 수도 있다고 알려줬다. 박한빈이 긴장했던 걸까? 아마 단순한 긴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긴장보다
이것은 박한빈이 처음으로 그들의 아이를 직접 본 순간이었다. 흐릿한 사진도 교묘한 각도로 찍힌 이미지도 아닌 눈앞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아이였다. 작은 소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박한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호기심과 함께 낯선 누군가를 관찰하는 듯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이를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박한빈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었고 이내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 성유리와 아이의 모습이 가려져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한참 뒤, 박한빈은 비로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는 자신의 감정을 빠르게 추스르며 평정을 찾으려 했지만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예상대로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박한빈은 새벽녘까지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고 나서야 간신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꿈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장면이 계속 반복되었고 그 장면은 성유리가 한 소녀와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장면은 따뜻하고 행복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낯선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박한빈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강렬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옆에 둔 핸드폰은 계속해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울리는 전화를 바로 받지 않았다. 대신 창밖의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방금 꾼 꿈의 장면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새겼다. 박한빈은 그 꿈을 이전에도 꾼 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 같았다.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소녀가 다른 누군가를 아빠라고 부르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박한빈의 심장과 위장은 다시금 은은히 아파지기 시작했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그는 그 감정을 억누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화를 받았다. 그는 이번에 경운시로 출장 온 상황이었다.
올해의 대작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 드라마는 촬영 당시부터 철저히 현장을 봉쇄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몰래 시도한 촬영이 완전히 막히지는 않았다. 박한빈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파란 천막 근처에 몸을 숙이고 카메라로 촬영장을 겨냥하고 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고 원래 그는 촬영장 안으로 바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비록 영상 산업이 그의 회사의 주요 사업은 아니지만 그는 그동안 크고 작은 영화와 드라마 투자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박한빈의 신분상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문득 그는 자신이 안으로 들어갈 명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누군가가 왜 왔는지를 물으면 그저 심심해서 와봤다는 핑계를 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박한빈은 발걸음을 뚝 멈춘 채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 그는 그 여자의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는 대상이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카메라 렌즈는 오히려 다른 방향, 즉 휴식을 취하기 위해 준비된 천막 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 천막 안에는 많은 스태프들이 있었고 주위는 정돈되지 않은 장비들로 어수선했다. 하지만 거리가 멀었음에도 그는 그곳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안경을 쓰고 있었고 옆 사람과 무언가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아이가 종이와 펜을 들고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와 아이는 자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기에 박한빈은 아무 걱정 없이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벽 구석에서 조용히 자라는 식물이 되어 오랜 그늘 속에서 갈망하던 햇살과 이슬을 처음으로 맛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그 “햇살”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때, 박한빈은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었다. “천한 여자! 염치도 없는 천한 년에다 저런 애까지!”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
그 여자는 박한빈의 말을 듣고 상황을 이해한 듯 비웃으며 말했다. “알겠네. 당신이 저 천한 년의 친구인가 보지?” 박한빈은 변호사와 통화하던 중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목소리는 뚝 끊겼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여자는 계속해서 빈정거리며 박한빈을 조롱했다. “아니지, 친구가 아니라 새로 사귄 남자인가? 참 대단하네. 어떻게 그 많은 남자들을 동시에 농락할 수 있지? 나도 알거든, 뭐 유명한 여신 만화작가라더니 다 허상이지. 분명 뒤에서는 당신 같은 남자들이나 떠받쳐 주는 걸 거야!” 그러면서 그녀는 박한빈을 위아래로 쭉 훑어보았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그녀는 화려한 물건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그 바람에 박한빈의 옷차림과 손목에 차고 있는 고급 시계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더욱 확신을 가졌고 박한빈에게 갑자기 존댓말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 저 여자 스폰서 맞죠? 그런데 그거 알아요? 저 여자는 매일 촬영장에서 내 오빠랑 엮이고 있다고요. 게다가 애까지 있어요. 누구 씨앗인지도 모르는 그 애 말이죠. 당신이 고작 저런 여자를 위해 돈을 쓰고 있다고요. 기분 더럽지 않아요?” 여자는 계속해서 험한 말을 쏟아냈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여자는 점점 흥분하며 박한빈을 설득하며 성유리를 “매장”해 버리자고 했다. 그녀를 완전히 끝장내자고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 변호사가 현장에 도착했다. 박한빈은 변호사를 발견하고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은 건 알아서 잘 맡아주세요.” 그러면서 그녀의 카메라에서 메모리 카드를 빼냈다. 여자는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달려들어 따지려고 했지만 변호사가 그녀를 막아섰다.“안녕하세요. 저는 박 대표님의 변호사입니다. 문제 있으시면 저와 말씀 나누시죠.” ...그날, 박한빈은 결국 촬영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온 그는 메모리 카드를 꺼내 사진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사진 속
“선생님, 큰일 났어요.” 전화가 걸려 올 때까지 성유리는 호텔에서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미 대본은 거의 수정을 마친 상태였기에 성유리는 하늘이와 함께 집에 돌아가 살기로 결정을 내렸다. 비록 2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호텔에서 머물렀지만 짐은 생각보다 많았고 성유리는 이사센터에 도움을 요청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성유리는 조금 멍해진 채로 물었다. “왜 그래요?” “뉴스 안 보셨어요?” “무슨 뉴스요?” “허유라 알아요?” 성유리는 그때까지도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지 못했었다. 통화를 하던 상대는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바로 말을 이어갔다. “빨리 뉴스 확인하세요. 전에 선생님이랑 같은 회사에 다녔다고 주장하는 사람인데 지금 선생님이 쓰신 [안개가 걷힌 뒤] 그 만화가 자기 작품이라고 우겨요. 자기 작품인데 회사가 선생님을 알리기 위해 자기한테서 뺏어갔다고 하면서요. 게다가 자기는 회사에서 잘리기까지 했대요. 난리가 났는데 못 보셨어요?” 상대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고 성유리가 뭐라 반응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바로 통화를 끝내버렸다. 성유리는 멍하니 서 있다 천천히 핸드폰을 열어 뉴스를 확인했고 상대의 말대로 인터넷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 1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성유리는 얼굴 하나 믿고 나대는 거라고. 무조건 다른 사람들 덕을 봤다니까?] [여신 만화 작가는 무슨! 남이 쓴 작품 베끼기나 하는 주제에.] [이런 저질스러운 만화도 베껴? 낯이 얼마나 두꺼운 거야?] [소문으로는 성유리 뒤에 돈이 엄청 많은 스폰서가 있다던데?] [게다가 현장에서 남자 배우들을 계속 꼬신대. 늙은 여우 주제에 왜 저런대?]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댓글은 수도 없이 많았고 성유리는 댓글들을 확인하며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하늘이는 옆에서 조용히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기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성유리를 발견한 하늘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말을 마친 상대는 바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성유리는 핸드폰을 손에 꽉 쥔 채 낯빛은 점점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하늘이는 그때까지도 얌전히 성유리의 옆에 앉아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성유리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나서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하늘이를 보며 말했다. “하늘아, 우리 집에 못 갈 것 같아.” “왜요? 우리 집에 안 가요?” 성유리의 말에 하늘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고 삐친 듯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계속 물었다. “엄마가 오늘 집에 간다고 했잖아요. 나 집에 갈래! 가서 민준 오빠랑 놀 거야.” “미안해, 하늘아. 엄마가 잘못했어.” 성유리는 떼를 쓰는 하늘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며 달랬다. “근데 지금 일이 좀 생겨서 어쩔 수 없어. 여기서 며칠만 더 있자. 엄마가 약속할게. 일이 다 해결되면 바로 집으로 가자.” 하늘이는 대답이 없었다. 성유리는 지금 아이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작사와 이우빈 회사 쪽에서는 성유리에게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 따졌고 빨리 해결하라고 보챘다. 또 어떤 사람은 이우빈과 성유리가 현장에서 같이 있던 사진을 터뜨리면서 두 사람은 촬영을 핑계로 밀회를 즐겼다고 주장했다. 만약 성유리가 솔로였다면 이우빈의 팬들은 불같이 화를 내지 않았겠지만 성유리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이우빈의 회사로 찾아가 난동을 부렸다. 커다란 광장에서는 성유리를 욕하고 저주하는 목소리가 울려 펴졌고 이렇게 된 이상 성유리가 지금 만화를 베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성유리가 결백하다고 해도 죄를 지은 죄인이 될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이우빈은 이미 잠적했고 제작사는 계속 헛돈을 쓰며 현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이번 드라마가 방영을 못 하게 된다면 그 모든 비용은 다 성유리가 책임져야 했다. 그 돈은 아마 성유리가 예상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큰돈일 것이다. 성유리는 부득불 다른
“저 아직 밥도 못 먹었는데 같이 가서 식사 하시겠습니까?”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그러나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윤도준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박한빈이 멀리서 가볍게 손짓을 한 뒤 그대로 성유리를 차에 태웠다.이 차는 어제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차체는 마을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온통 흙탕물로 뒤덮여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차가 한참을 달린 뒤에야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엄마가 알게 되면 어떡해요!”“걱정 마십시오. 혹시 유리 씨한테 화를 내면 제가 가서 설명할 테니까.”“아마 엄마는 분명 당신을 때릴 거예요.”박한빈은 여전히 운전대를 잡은 채 성유리를 슬쩍 바라보았다.“왜요? 걱정되십니까?”“당연히 그건 아니에요.”성유리는 즉각 반박하더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당신...”놀란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가만히 있으세요. 지금 저 운전 중이니까.”“게다가 손에 아직 상처가 있습니다.”그 말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췄다.고개를 숙여 보니 그의 흰 셔츠 아래로 여러 겹의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리고 그 아래로 스며 나온 붉은 피가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아직 안 나았어요?”성유리는 무심결에 눈썹을 찌푸렸다.“걱정 마십시오. 안 아픕니다.”박한빈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런 그를 한참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그러나 박한빈의 손이 닿아 있는 곳에서부터 이상한 감각이 퍼졌다.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성유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하더니 결국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박한빈이 성유리를 읍내로 데려간 것은 단순히 밥을 먹고 장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그녀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성유리가 자
할머니는 마을에서 작은 땅을 갖고 있었다.예전에는 옥수수를 심었지만 몇 년 전 이웃 마을에서 계약 농사를 제안하면서 딸기로 바꿨다.그러니 지금은 딸기 씨앗을 심을 시기였다.아침부터 소란을 피운 할머니를 성유리는 억지로 집에서 쉬게 하고 자신이 대신 밭일을 맡았다.일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다 보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쪼그려 앉아 씨앗을 심던 성유리가 잠시 눈을 감고 쉬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지금 뭐 하십니까?”고개를 들어보니 박한빈이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순간 얼어붙었고 이내 허둥지둥 그의 손을 밀어냈다.그리고는 황급히 몇 걸음 물러나 박한빈과의 거리를 벌린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저... 근데 왜 여기 계세요?”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절 무서워하시는 겁니까?”“아... 아니에요!”성유리는 서둘러 부정했다.마치 그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말이다.“다만... 엄마가 당신이랑 같이 있는 걸 싫어해요.”한참을 망설이다가 성유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엄마가 화낼 거예요.”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성유리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왜죠? 그쪽 어머니는 제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네.”“하지만 유리 씨는 제가 나쁜 놈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요?”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을 따르는 겁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의 질문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냥 혼란스러운 건지 알 수 없지만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게다가 유리 씨가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모를 텐데 말이죠.”“그럼... 그건 속이는 거잖아요.”“속이는 게 아닙니다. 그냥 말하지 않는 것뿐이지.”성유리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박한빈 또한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여기
박한빈은 많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환경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더구나, 이번에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창문 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누군가를 쫓아내고 있었다.이미 백발이 성성했지만 기운만큼은 넘쳤다.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몰아내는 동안, 마을 안팎 사람들이 소란에 놀라 몰려들었고 할머니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까지 싸잡아 한바탕 호통을 쳤다.그 뒤에는 성유리가 조용히 서 있었다.마치 어미 닭에게 보호받는 병아리처럼.주변을 궁금한 듯 둘러보면서도 절대 할머니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박한빈이 그 장면을 바라보던 순간, 성유리도 마침 그의 시선을 느낀 듯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려 할머니의 손을 붙잡았다.소동이 한참 이어진 끝에, 할머니는 성유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쾅!그 문이 닫히는 소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컸다.그러고 나서야, 할머니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겁먹지 마라. 저런 놈이 뭐라고!”“우리 딸처럼 좋은 아가씨가 결혼할 상대를 못 찾을 것 같아? 걱정 마. 엄마가 더 좋은 사람 골라줄 테니!”“엄마... 사실 저는 결혼 서두를 생각 없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말했다.“그건 안 돼!”할머니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칼에 잘랐다.“여자는 크면 시집가야 하는 법이야.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으면 어쩌자는 거냐?”“게다가 내가 지금은 네 곁을 지켜주지만 언젠가는 나도 떠나야 한다. 그때 네가 혼자 남으면 누가 널 지켜주겠어?”엄마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아직 화가 덜 풀린 할머니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하지만 문밖의 사람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안녕하세요.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이번엔 또 누구야?”할머니는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단정한 흰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
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황급히 돌아섰는데 마치 얼굴에 ‘당황’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은 듯했다.할머니는 가느다란 눈을 좁히며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다녀온 거야?”“저... 밖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서 좀 보고 오느라...”“고양이?”할머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이 마을에 고양이 몇 마리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해?”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할머니도 깊이 따지지는 않았다.“얼른 자라.”그저 짧은 말만 남긴 채, 제 방으로 돌아갔다.성유리도 조용히 뒤따라 방으로 향했다.그녀의 방 창문은 길 건너편 박한빈이 머무는 집과 마주 보고 있었다.그곳의 창문에는 어제 새롭게 창호지를 발라놓아 이제 더 이상 구멍이 나 있지 않았다.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빛 조명은 성유리의 방 조명과 똑같은 따뜻한 색이었다.성유리는 그 창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누워 잠을 청했다.그렇게 밤이 지나갔다.할머니는 원래 잠이 적었기에 해가 뜨기도 전에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침구를 정리한 후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계란을 깨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는 분명 할머니의 것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순간 긴장했다.그래서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문밖으로 나섰다.그러나 마주한 사람을 보고는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아주머니, 어쩐 일이세요?”“너희 어머니 계시니? 볼 일이 있어서 왔어.”여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아마 밭에 계실 거예요. 불러올까요?”“그래, 다녀와.”여자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그러더니 성유리를 한 번 훑어보곤,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별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마침 그 순간, 할머니가 밭에서 돌아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길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에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흠, 듣고 보니 꽤 재미있을 것 같군.”“그럼 이 일은 네게 맡길게.”“뭐라고?”“너도 알다시피 난 이미 죽은 사람이야. 그리고 사씨 가문 쪽도...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내가 직접 손을 대긴 어려워.”“예전부터 네가 한국 시장에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지금이 바로 기회 아닌가?”에릭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박한빈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이 마을 사람들은 일찍 잠드는 편이었다.지금은 사방이 조용했기에 그 작은 소리조차 유난히 또렷하게 들려왔다.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내려놓고 물었다.“누구십니까?”아직도 업무 모드였던 탓에 목소리에는 저절로 냉기가 서려 있었다.그랬더니 문밖에서 들리던 노크 소리가 멈췄다.하지만 대답은 없었다.불안해진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연정우 씨가 또 사람을 보낸 걸까?’그는 반사적으로 방 안을 둘러보며 무기로 쓸 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문밖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저예요.”박한빈은 순간 멍해졌다.그리고는 에릭이 뭐라고 하는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고 문 쪽으로 향했다.느슨하게 걸린 낡은 나무문을 밀어 열자 문 앞에는 성유리가 서 있었다.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 한 그릇이 들려 있었고 발치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물었다.어딘가 머뭇거리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는 이내 시선을 떨구며 덧붙였다.“저... 저녁을 드셨는지 몰라서요. 그리고 여기 불 때는 곳도 없길래... 그냥 면을 좀 끓였어요. 따뜻한 물도요.”박한빈은 그녀가 들고 있는 그릇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둔탁하게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박한빈이 문득 물었다.“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마을에서는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윤도준이 일부러 사람들을 데려와 집을 정리해 준 덕분에 겨우 머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신호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다행히 박한빈은 집 안 구석구석을 돌며 신호가 잡히는 곳을 찾아냈고 마침내 에릭과의 통화를 연결할 수 있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에릭은 비꼬듯이 물었다.“난 또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네?”“실망시켜서 미안한데 난 아주 잘 살아 있었어.”박한빈이 대답했다.“난 안 좋아.”에릭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지금 회사 쪽에서 어떤 난리가 났는지 알아? 전부 나한테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고! 이제야 확실히 알겠어. 네가 전에 말했던 불편해서 직접 나서지 못한다는 말, 결국 다 핑계였잖아. 나보고 대신 뒤집어쓰라는 거였지?”“일이 끝나면 내 몫의 이익 절반을 넘기지.”박한빈이 제시한 그 금액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하지만 돈은 이미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나 다름없었다.그들이 하는 일에서 중요한 건 오직 짜릿함이었다.애초에 한 번에 일을 끝낼 수도 있었다.에릭은 심지어 축하 파티에서 마실 술까지 이미 골라 두었었다.그런데 갑자기 박한빈이이 모든 걸 멈추라고 했다.그 순간, 에릭은 마치 새벽녘 힘차게 울 준비를 하던 수탉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목을 눌린 듯한 기분이었다.숨이 막히고 무엇보다 기분이 몹시 나빴다.그때 박한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파티장에서 사고 치지만 않았어도 내가 너를 급하게 건지러 가지 않았어도, 성유리는 애초에 위험에 빠지지 않았을 거야.”“뭐야? 지금 나한테 책임이라도 묻겠다는 거냐?”“책임을 묻겠다는 건 아냐. 다만 우리나라엔 이런 말이 있지. 한 방울의 은혜에도 샘물처럼 보답하라는 말.”“너...”“됐고, 본론부터 들어가자.”박한빈이 그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성유리를 찾았어.”“오, 그건 축하할 일이네.”그러나 에릭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기쁨도 담겨 있지 않았다.오히려 실망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그도 누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저희 또 만났네요.”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여기 사는 겁니까?”성유리는 묻는 남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여기 삽니다.”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네. 오늘 막 이사 왔거든요.”“아...”성유리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어딘가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런데 이 집, 꽤 오래됐어요. 비라도 오면 새는 곳이 있을지도 몰라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상했다. 정작 상대방의 이름조차 모르는 데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도 박한빈이 이곳에 산다는 말에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이 집과 그 남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그럼 그는 어디에 살아야 할까?성유리는 스스로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할머니는 박한한이 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 순간, 할머니의 표정이 확 변했다.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휘두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이 망할 놈아! 감히 내 딸한테 손을 대?”“어서 손 안 놔! 당장 안 놓으라고!”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가 먼저 할머니를 꼭 끌어안았다.“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엄마, 진정하세요. 그냥 얘기 좀 나누고 있었던 것뿐이니까.”할머니는 조금 전까지 윤도준을 쫓아 몇 바퀴나 뛰었는지 이미 숨이 가빠져 있었다.그런데도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박한빈을 보는 시선엔 노골적인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엄마, 우리 들어가서 밥 먹어요.”성유리가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가 아직 노려보는 와중에도 성유리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그쪽도 오늘 새로 이사 온 이웃이에요.”그 말에 할머니의 주의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성유리의 엄마라고 주장하는 할머니는 박한빈을 다시 한번 훑어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
“설아?”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렸다.“네. 엄마, 왜 그러세요?”“그건 내가 물어볼 말이지.”할머니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성유리의 밥그릇을 탁탁 두들겼다.“밥 먹는데 무슨 넋을 놓고 앉아 있어?”성유리가 그 말에 재빨리 고개를 숙여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럼에도 할머니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오늘 일에 대해 생각하는 거지? 그 경찰들 다 헛소리 지껄이는 거야.”“어쨌든 결혼 날짜는 이미 정해졌으니 결혼식은 먼저 치러. 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 만큼 결혼하자마자 빨리 애 낳아. 내가 돌봐줄 수 있게.”“제가 누구랑 결혼해요?”성유리가 물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복섭이지! 예물도 이미 받았는데 뭘 더 바라?”할머니의 언성이 높아지며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그 모습을 본 성유리가 재빨리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그냥... 물어본 거예요.”“네가 지금 행복에 겨워서 정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예전에 다 정해진 일 아니었니? 게다가 너랑 복섭이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결혼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어?”“제가 우섭이랑 오래 사귀었어요?”“그럼! 너희 어릴 때부터 함께 목욕도 했잖아. 몇 년이 아니라 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거야!”할머니의 말이 끝나가도 성유리는 아무런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가 애써 기억을 더듬으려는 순간, 머리가 격렬하게 아파지기 시작했다.고통을 무릅쓰고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밖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마을 길이 고르지 못해 차체가 격하게 흔들리며 지나가더니 성유리와 할머니가 앉아 있는 식탁 앞으로 먼지가 고스란히 날려왔다.그러자 할머니의 얼굴이 확 붉어졌고 젓가락까지 내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눈이 안 달렸냐! 밥 먹는데 먼지를 날리다니! 망할 놈의 새끼들아!”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 모르는 할머니의 욕설은 매 한 마디가 다 아주 더러운 말들이었다.마을 누구나 아는 할머니의 억척스러움은
“할머니, 보세요. 이게 바로 박한빈 씨의 아내 사진인데 여성분이랑...”“무슨 사진? 저 남자 아내가 생긴 거랑 우리 설이랑은 무슨 상관인데? 이 애는 내 딸이야!”“알겠습니다만 의혹이 제기된 이상 검사 한번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DNA 검사라도...”“DNA는 무슨 DNA! 너희들 다 미친 거 아냐? 내 딸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왜 남의 아내가 되냐고? 설아, 따라와!”할머니는 성유리의 손을 단호히 잡아끌며 몸을 돌렸다. 윤도준이 막 말을 걸려는 순간 박한빈이 오히려 그를 제지했다.“박한빈 씨, 이건...”“저 사람들 사는 마을이 어딥니까?”박한빈이 한없이 차가운 태도로 물었다.“네?”“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세상에 닮은 사람이 둘 있는 건 흔한 일이란 말을 누구나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확신했다. 자신이 틀릴 리 없다는 것을.그녀의 눈동자 깊이 스민 습관, 손가락을 깨무는 버릇까지 모든 게 36일 전 사라진 아내와 일치했다.사실 그는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갈 수도 있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만 한다면 설령 그녀가 저항해도 가장 가까운 신분으로 법적 조치가 가능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이 선택을 하기까지 결정했던 순간은 성유리가 노파의 품으로 달려가 엄마라고 부르는 모습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성유리가 어린 시절 엄마에게서 느끼지 못한 가족의 온기를 이 할머니에게서 찾고 있음을.병상에 누워 생명이 사라져가는 엄마와 달리 옆에서 챙겨주는 노파의 따스함이 지금 성유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이다.만약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간다면 그녀가 무조건 자신을 혐오하고 증오할 것이라고 믿었다.게다가 성유리를 데려간 사람들 또한 잘해주는 것 같았고 그녀 스스로도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가짜라고 한들 동년의 아쉬움과 공허한 마음 한구석을 채워주고 있으니 박한빈은 어쩌면 성유리에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당연하게도 염우섭이라는 남자의 존재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