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하고도 4개월. 성유리는 그와 다시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 그 상상을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세상은 이렇게 넓고 두 사람은 이미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의 곁에는 늘 샴페인과 꽃다발로 둘러싸인 화려한 삶이 있었고 그녀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교차할 일이 없는 평행선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등장은 성유리의 그런 믿음을 단번에 깨뜨렸다. 하늘이를 안고 있던 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엄마, 저 사람 알아?” 하늘이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니, 몰라.” 행여나 자신의 감정이 들킬까 성유리는 서둘러 대답했다. 한편, 박한빈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성유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을 들어버린 순간, 그의 발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버렸다. 방금 전까지 뛰던 심장은 순간 멈춘 듯 잠잠해졌고 뜨겁게 끓던 피는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더 이상 박한빈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만, 하늘이는 박한빈의 시선을 느꼈는지 계속 뒤를 돌아보며 그를 쳐다보았다. 이혼 당시, 두 사람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았다. 성유리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조차 박한빈은 그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잠들지 못한 채로 수많은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그러다 보니 박한빈은 심장과 위가 아파 견딜 수 없을 정도까지 되였다. 버티던 박한빈이 결국 병원을 찾아갔지만 의사는 그의 몸이 건강하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자 의사는 단지 “심리적 긴장”일 수도 있다고 알려줬다. 박한빈이 긴장했던 걸까? 아마 단순한 긴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긴장보다
이것은 박한빈이 처음으로 그들의 아이를 직접 본 순간이었다. 흐릿한 사진도 교묘한 각도로 찍힌 이미지도 아닌 눈앞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아이였다. 작은 소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박한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호기심과 함께 낯선 누군가를 관찰하는 듯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박한빈은 아이를 오랫동안 바라볼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박한빈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었고 이내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 성유리와 아이의 모습이 가려져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한참 뒤, 박한빈은 비로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는 자신의 감정을 빠르게 추스르며 평정을 찾으려 했지만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그날 밤, 그는 예상대로 잠에 쉽게 들지 못했다. 박한빈은 새벽녘까지 뒤척이다 결국 약을 먹고 나서야 간신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꿈속에서도 그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장면이 계속 반복되었고 그 장면은 성유리가 한 소녀와 함께 놀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장면은 따뜻하고 행복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낯선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박한빈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는 강렬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옆에 둔 핸드폰은 계속해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울리는 전화를 바로 받지 않았다. 대신 창밖의 햇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방금 꾼 꿈의 장면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새겼다. 박한빈은 그 꿈을 이전에도 꾼 적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 같았다.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소녀가 다른 누군가를 아빠라고 부르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박한빈의 심장과 위장은 다시금 은은히 아파지기 시작했다. 몇 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그는 그 감정을 억누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화를 받았다. 그는 이번에 경운시로 출장 온 상황이었다.
올해의 대작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 드라마는 촬영 당시부터 철저히 현장을 봉쇄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몰래 시도한 촬영이 완전히 막히지는 않았다. 박한빈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파란 천막 근처에 몸을 숙이고 카메라로 촬영장을 겨냥하고 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고 원래 그는 촬영장 안으로 바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비록 영상 산업이 그의 회사의 주요 사업은 아니지만 그는 그동안 크고 작은 영화와 드라마 투자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박한빈의 신분상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문득 그는 자신이 안으로 들어갈 명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누군가가 왜 왔는지를 물으면 그저 심심해서 와봤다는 핑계를 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박한빈은 발걸음을 뚝 멈춘 채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 그는 그 여자의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는 대상이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카메라 렌즈는 오히려 다른 방향, 즉 휴식을 취하기 위해 준비된 천막 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 천막 안에는 많은 스태프들이 있었고 주위는 정돈되지 않은 장비들로 어수선했다. 하지만 거리가 멀었음에도 그는 그곳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안경을 쓰고 있었고 옆 사람과 무언가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아이가 종이와 펜을 들고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와 아이는 자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기에 박한빈은 아무 걱정 없이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벽 구석에서 조용히 자라는 식물이 되어 오랜 그늘 속에서 갈망하던 햇살과 이슬을 처음으로 맛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그 “햇살”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때, 박한빈은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었다. “천한 여자! 염치도 없는 천한 년에다 저런 애까지!”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
그 여자는 박한빈의 말을 듣고 상황을 이해한 듯 비웃으며 말했다. “알겠네. 당신이 저 천한 년의 친구인가 보지?” 박한빈은 변호사와 통화하던 중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목소리는 뚝 끊겼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여자는 계속해서 빈정거리며 박한빈을 조롱했다. “아니지, 친구가 아니라 새로 사귄 남자인가? 참 대단하네. 어떻게 그 많은 남자들을 동시에 농락할 수 있지? 나도 알거든, 뭐 유명한 여신 만화작가라더니 다 허상이지. 분명 뒤에서는 당신 같은 남자들이나 떠받쳐 주는 걸 거야!” 그러면서 그녀는 박한빈을 위아래로 쭉 훑어보았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그녀는 화려한 물건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그 바람에 박한빈의 옷차림과 손목에 차고 있는 고급 시계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더욱 확신을 가졌고 박한빈에게 갑자기 존댓말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 저 여자 스폰서 맞죠? 그런데 그거 알아요? 저 여자는 매일 촬영장에서 내 오빠랑 엮이고 있다고요. 게다가 애까지 있어요. 누구 씨앗인지도 모르는 그 애 말이죠. 당신이 고작 저런 여자를 위해 돈을 쓰고 있다고요. 기분 더럽지 않아요?” 여자는 계속해서 험한 말을 쏟아냈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여자는 점점 흥분하며 박한빈을 설득하며 성유리를 “매장”해 버리자고 했다. 그녀를 완전히 끝장내자고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 변호사가 현장에 도착했다. 박한빈은 변호사를 발견하고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은 건 알아서 잘 맡아주세요.” 그러면서 그녀의 카메라에서 메모리 카드를 빼냈다. 여자는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달려들어 따지려고 했지만 변호사가 그녀를 막아섰다.“안녕하세요. 저는 박 대표님의 변호사입니다. 문제 있으시면 저와 말씀 나누시죠.” ...그날, 박한빈은 결국 촬영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온 그는 메모리 카드를 꺼내 사진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사진 속
“선생님, 큰일 났어요.” 전화가 걸려 올 때까지 성유리는 호텔에서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미 대본은 거의 수정을 마친 상태였기에 성유리는 하늘이와 함께 집에 돌아가 살기로 결정을 내렸다. 비록 2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호텔에서 머물렀지만 짐은 생각보다 많았고 성유리는 이사센터에 도움을 요청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성유리는 조금 멍해진 채로 물었다. “왜 그래요?” “뉴스 안 보셨어요?” “무슨 뉴스요?” “허유라 알아요?” 성유리는 그때까지도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지 못했었다. 통화를 하던 상대는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바로 말을 이어갔다. “빨리 뉴스 확인하세요. 전에 선생님이랑 같은 회사에 다녔다고 주장하는 사람인데 지금 선생님이 쓰신 [안개가 걷힌 뒤] 그 만화가 자기 작품이라고 우겨요. 자기 작품인데 회사가 선생님을 알리기 위해 자기한테서 뺏어갔다고 하면서요. 게다가 자기는 회사에서 잘리기까지 했대요. 난리가 났는데 못 보셨어요?” 상대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고 성유리가 뭐라 반응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바로 통화를 끝내버렸다. 성유리는 멍하니 서 있다 천천히 핸드폰을 열어 뉴스를 확인했고 상대의 말대로 인터넷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 1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성유리는 얼굴 하나 믿고 나대는 거라고. 무조건 다른 사람들 덕을 봤다니까?] [여신 만화 작가는 무슨! 남이 쓴 작품 베끼기나 하는 주제에.] [이런 저질스러운 만화도 베껴? 낯이 얼마나 두꺼운 거야?] [소문으로는 성유리 뒤에 돈이 엄청 많은 스폰서가 있다던데?] [게다가 현장에서 남자 배우들을 계속 꼬신대. 늙은 여우 주제에 왜 저런대?]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댓글은 수도 없이 많았고 성유리는 댓글들을 확인하며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하늘이는 옆에서 조용히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기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성유리를 발견한 하늘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말을 마친 상대는 바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성유리는 핸드폰을 손에 꽉 쥔 채 낯빛은 점점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하늘이는 그때까지도 얌전히 성유리의 옆에 앉아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성유리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나서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하늘이를 보며 말했다. “하늘아, 우리 집에 못 갈 것 같아.” “왜요? 우리 집에 안 가요?” 성유리의 말에 하늘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고 삐친 듯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계속 물었다. “엄마가 오늘 집에 간다고 했잖아요. 나 집에 갈래! 가서 민준 오빠랑 놀 거야.” “미안해, 하늘아. 엄마가 잘못했어.” 성유리는 떼를 쓰는 하늘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며 달랬다. “근데 지금 일이 좀 생겨서 어쩔 수 없어. 여기서 며칠만 더 있자. 엄마가 약속할게. 일이 다 해결되면 바로 집으로 가자.” 하늘이는 대답이 없었다. 성유리는 지금 아이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작사와 이우빈 회사 쪽에서는 성유리에게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 따졌고 빨리 해결하라고 보챘다. 또 어떤 사람은 이우빈과 성유리가 현장에서 같이 있던 사진을 터뜨리면서 두 사람은 촬영을 핑계로 밀회를 즐겼다고 주장했다. 만약 성유리가 솔로였다면 이우빈의 팬들은 불같이 화를 내지 않았겠지만 성유리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이우빈의 회사로 찾아가 난동을 부렸다. 커다란 광장에서는 성유리를 욕하고 저주하는 목소리가 울려 펴졌고 이렇게 된 이상 성유리가 지금 만화를 베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성유리가 결백하다고 해도 죄를 지은 죄인이 될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이우빈은 이미 잠적했고 제작사는 계속 헛돈을 쓰며 현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이번 드라마가 방영을 못 하게 된다면 그 모든 비용은 다 성유리가 책임져야 했다. 그 돈은 아마 성유리가 예상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큰돈일 것이다. 성유리는 부득불 다른
성유리는 새벽에 집으로 돌아갔다. 하늘이는 깊은 밤이라 이미 성유리의 어깨에 기대 잠에 들어 있었는데 너무 지쳤는지 호흡이 거칠어졌다. 성유리는 한손으로 잠든 아이를 부축한 채 다른 한 손으론 문을 열려고 애를 썼다. 집으로 들어선 성유리는 다른 일을 할 새도 없이 먼저 하늘이를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아이한테 이불을 덮어주고 문을 닫고 나서야 성유리는 거실로 돌아갔다. 옆에 있는 조명은 켜져 있었고 그 옆에는 나가기 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책장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책장 안에는 성유리가 그려놓은 만화 작품과 미래에 대해 세워놓은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것은 마치 성유리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업계에서 그들은 겉으로 보기엔 아주 높게 평가받는 것 같지만 사실 제일 밑바닥에 깔린 사람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홍보나 영업, 다른 사람과 손잡고 일하기 위해 상의하는 일 또한 회사에서 하니 성유리는 그저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매일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성유리고 피곤해서 코피까지 흘리면서도 대본을 수정하는 사람 역시 성유리였다. 그리고 나중에 대중들에게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을 먹는 사람 또한 성유리다. 직접 그린 만화가 정말 어렵게 드라마로 제작이 되었고 쉽지 않았지만 현장으로 나가 직접 참여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름을 알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게 되었다. 성유리는 이런 자신의 모습이 갑자기 너무 우스워 보였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성유리는 그 감정들을 꾹꾹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은 전에 뜬 눈으로 보낸 그 밤들과 다를 점이 없었다. 피로에 찌든 몸으로 침대에 누웠지만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성유리는 눈을 번쩍 떴다. 그 전날부터 호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고 게다가 어떤 사람은 방문 틈으로 물건을 집어넣기도 했다. 협박 편지와 성유리를 저주하는
성유리는 병원을 싫어한다. 이곳에서는 항상 소독약 냄새가 났고 여전히 이따금 슬프고 절망적인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간호사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하늘이의 혈관은 매우 얇아서 지금 몇 바늘을 꿰매야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아이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꾹 참았다.그러나 하늘이도 어린아이일 뿐인지라 울음을 참을 수 없었고 성유리에게 아프다고 떼를 부렸다. 성유리는 아파하는 아이를 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늘이의 다른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때,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주삿바늘이 성공적으로 들어갔고 코를 훌쩍거리던 하늘이도 지쳤는지 눈을 감았다. “자.” 성유리는 손을 쭉 뻗어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엄마 여기 있어.” 하늘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떴다. 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왜 그래?” “엄마, 안 울 거지?” 아이의 물음에 성유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 방금 조금 아팠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으니 걱정 마.” 하늘이는 성유리가 자신을 걱정할까 봐 괜찮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성유리는 아이 앞에서 항상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아이의 말을 듣고 나니 더는 웃음을 지을 수가 없었다. 행여나 울음이 터져 나올까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의 모습을 본 하늘이는 안도의 표정을 짓더니 다시 눈을 감았고 성유리는 여전히 아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반대편에 있는 수액에 고정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더 큰 수액 병을 맞자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뭔가를 잃을까 봐 두려운 듯 시선을 떼고 싶지 않았다. 사하나가 들어왔을 때, 그녀가 본 모습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더니 성유리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언니, 좀 쉬세요. 제가 여기서 지켜볼게요.”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하나는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
성유리는 처음엔 물밀듯 밀려오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이 그녀 앞에 국 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손을 뻗는 순간, 풍겨온 성유정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그래서 성유리는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그녀는 입을 틀어막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사실 성유리는 저녁도 거의 먹지 못했기에 토할 것도 없는 빈속에서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세면대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너무 힘을 준 탓에 세면대를 짚고 있는 손이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문밖에서 가사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도우미가 문을 두드리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설마 무슨 일 생긴 거 아니겠지?”“임신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심하게 입덧을 해? 앞으로 어쩌려고.”“그러게 말이야.”“근데 뭐... 이해는 가지. 복 많은 도련님의 아기를 가지려면 그만한 고생은 해야 하지 않겠어?”그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딱 성유리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일부러 비꼰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도우미들도 눈이 있으니 이 집에서 성유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당연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집안 어르신인 김난희가 성유리를 싫어하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김서영 역시 그저 고인이 된 남편의 뜻을 따라 돌봐주는 척하는 것뿐이라는 것을.박한빈, 그는 아예 성유리를 아내라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고 그에게 성유리는 한낱 ‘도구’에 가까웠다.그 사실이 너무도 명확하게 떠오르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너무 굳어 있어서 한참이나 애써도 겨우 떨리는 듯 올라갈 뿐, 미소라고 볼 수도 없었다.거울 속에 비친 성유리의 모습에서 제일 잘 보이는 건 붉게 충혈된 눈동자였다.그러나 눈물은 흐르지는 않았다.왜냐하면 성유리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눈물이라는 건 자신을 아끼는 사람 앞
그때의 성유리는 진심으로 감동했고 더없이 행복했다.그 순간만큼은 박한빈의 모든 무심함과 냉랭함을 다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의 성유리는 알게 됐다.자신이 박한빈에겐 그저 하나의 장난감이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처럼 하찮은 존재였다는 걸.성유리가 처음으로 받은 단 하나의 선물, 그건 결국 성유정이 필요 없다고 내버린 사은품일 뿐이었다.박한빈의 아내는 성유리다.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일상에 관심을 가져준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성유리의 생각을 진심으로 존중해준 적이 없었다.그러니 성유리가 팔찌를 들고 박한빈에게 보여줬을 때 그렇게 놀란 눈빛을 보였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그건 성유리가 박한빈의 얼굴에서 본 몇 안 되는 감정의 변화였다.기뻐하는 성유리를 보며 박한빈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이 여자 참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하다고, 이 정도 선물에 저렇게 감격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박한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그저 그런 사소한 물건 하나면 성유리는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테니까.그녀의 감정과 진심은 박한빈에게 그렇게나 값싸고 하찮은 존재였다....성유정은 돌아오긴 했지만 저녁 식사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자신의 물건을 놓고 가서 잠깐 들른 것뿐이라며 떠났고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박한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 옆자리에 앉았다.박씨 저택의 주방은 매우 컸다.식사를 하는 사람은 네 명뿐이었지만 여전히 지름 2미터 가까이 되는 원형 테이블을 사용했다.성유리는 자신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박한빈이 평소보다 더 가까이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너무 가까워서 박한빈의 향수 냄새가 또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그 향은 성유리에게도 익숙한 냄새였다.왜냐하면 그것은 조금 전 성유정이 박한빈을 껴안으며 남긴 향기였으니까.고개를 숙였을 때 성유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손목뿐이었다.그 위에 끼고 있던 팔찌는 이미 그녀가 스스로 끊어내 버린 상태였다
방안의 보석을 다 둘러본 뒤, 김서영은 저녁 준비 상황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성유리는 화장실에 들렀다.손을 씻고 나오는 순간 조금 전 먼저 떠났던 성유정이 다시 돌아와 있는 걸 보게 됐다.지금 그녀는 정원에 서 있었는데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성유정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비록 성유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작게 떨리는 어깨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박한빈은 성유리 쪽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이나 반응은 볼 수 없었다.그런데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그 장면은 어쩐지 너무 자연스럽고 심지어 눈이 아릴 정도로 잘 어울렸다.성유리는 이제 그만 보고 얼른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마치 스스로를 학대하듯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그리고 이내 성유정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성유정이 팔을 뻗어 박한빈을 끌어안으려는 순간 성유리는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그녀는 마치 도둑처럼 급히 몸을 돌렸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디 안 좋으세요?”가사도우미가 가장 먼저 성유리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성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냈다.“괜찮아요.”“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몸이 불편하신가요?”“아니에요. 그냥... 급히 움직였더니 좀 숨이 차네요. 조금만 쉬면 괜찮을 거예요.”도우미가 또 뭔가 말하려던 그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그 순간, 성유리의 몸이 바짝 굳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정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성큼성큼 걸어와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갑자기 들은 소식이라 순간 좀 당황했나 봐.”“언니가 임신했다니... 나 진심으로 너무 기뻐. 언니랑 형부, 꼭 행복해야 해.”성유정의 연기는 늘 어릴 때부터 완벽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얼굴
성유정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결혼은 그저 잠깐의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확신했었다.시간이 지나 어머니가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성유리와 이혼하고 결국 자신 곁으로 돌아올 거라고.그런데 지금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성유리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은 진짜 믿고 싶지가 않았다.그들이 정말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을 떠올리자 성유정은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미쳐버릴 것 같았다.아무리 애써 눌러도 눈가는 빨갛게 물들고 목소리는 떨렸으며 얼굴에는 힘들게 억누른 감정이 일그러진 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오랫동안 보고 있다 결국 조용히 입을 열었다.“고마워.”그때, 성유정이 김난희에게 얼버무리듯 말했다.“할머니, 저... 생각해 보니 급한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볼게요.”이 자리에 성유정은 더는 머물 수 없었다.그래서 김난희에게도 짧게 인사만 남긴 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쟤 왜 저래?”김난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곤 성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어쨌든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꼭 지켜야 해, 알겠니?”말투엔 여전히 집안 어르신의 권위가 잔뜩 실려 있었는데 마치 아이를 낳는 것이 성유리에게 내려진 대단한 영광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몇 번 꾹 참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김서영이 곧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새로 들인 보석이 있는데 같이 올라가서 좀 볼래?”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임신 초기 석 달이 제일 중요해.”계단을 오르며 김서영이 말했다.“원래는 조용히 넘기려 했는데 이젠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밀로 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더라.”“네 일도... 요즘은 좀 줄이는 게 좋겠어. 내가 사람 몇 명 골라서 보낼게. 하루 세 끼 챙겨주고 매일 태아 심장박동이랑 혈압 체크도 해줄
“유정이 왔니?”성유정은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고 말했지만 김난희는 그래도 너무 반가운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성유정 또한 자연스레 김난희의 팔짱을 꼈는데 그 모습이 꼭 진짜 손녀처럼 친밀해 보였다.그러다 성유정은 성유리도 자리에 있는 걸 발견하곤 먼저 인사를 건넸다.“언니도 와 있었네?”성유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아, 맞다. 오늘이 음력설이지.”성유정은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요즘 졸업 준비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걸 깜빡했네.”“별일도 아닌데 잘 왔다. 저녁 같이 먹자.”김난희가 성유정의 말에 바로 대답했고 그녀도 군말 없이 수긍했다.그러다 성유리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걸 본 성유정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가 보려고 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김난희가 성유정을 잡아끌며 말했다.“조심해라. 너희 언니 지금 아주 귀하신 몸이시다.”그 말은 진심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성유정은 순간 멈칫하며 무심코 물었다.“왜요?”김서영이 입술을 다물고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김난희가 먼저 나섰다.“어이구, 바보야! 왜겠니? 당연히 네 언니가 임신했으니까 그렇지.”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유정의 얼굴에 띠고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던 성유정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임신? 임신했다고? 언니가... 진짜 임신한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한빈 오빠는 분명 언니를 좋아하지 않았잖아. 엄마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거 아니었어? 두 사람의 결혼은 명목뿐인 관계라고... 분명히 언니가 그때 인정했었는데?’수많은 생각이 들어 머릿속은 복답했지만 성유정의 시선은 성유리에게 고정돼 있었다.‘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거잖아!’성유정은 가슴 깊숙한 곳을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찌른 것처럼 아팠고 숨이 막힐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표정 관리를 할 틈도 없이 그 눈빛엔 마치 성유리를 갈기
오늘 밤 박한빈은 꽤 일찍 집에 돌아왔다.성유리가 저녁을 먹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평소와 달리 박한빈이 집에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하지만 박한빈은 태연하게 그녀를 불렀다.“밥 먹자.”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결혼한 이후,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저녁을 먹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매달 한 번씩 박씨 저택에 돌아갈 때면 그들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그렇지만 성유리가 말하는 건 지금처럼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비록 아침에 성유정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지만 지금 박한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참 기뻤다.그녀가 바라는 건 사실 정말 많지 않았다.이렇게 박한빈의 곁에 앉아 있을 수 있고 박한빈이 자신을 위해 작은 자리를 내어주며 조금이나마 함께 있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저녁을 먹었고 결국 기다리다 못한 박한빈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일이 좀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넌 천천히 먹고 있어.”그 말을 끝으로 박한빈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는 성유리에게 대답하거나 반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그대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박한빈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왔다.그리고 이내 작은 상자를 성유리 앞에 내려놓았다.“선물.”예상치 못한 상황에 성유리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지금 성유리의 눈은 반짝였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유리의 반응이 너무 컸던 탓인지 박한빈의 눈빛도 순간 흔들렸다.“저... 주시는 거예요?”성유리가 묻고 나서야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듯 짧게 대답했다.“응.”“고마워요.”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매도 부드럽게 휘어졌다.원래도 예쁘고 화사했던 얼굴이 그 순간 더욱 생기 넘치게 변했다.박한빈은 너무 아름다운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무의식중에 눈을 가늘게 떴다.그와 눈이 마주치는
“언니!”모든 일이 끝난 후, 성유리가 저택을 떠나려 할 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성유정은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엄마는 언니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 방법이 조금 틀렸을 수도 있지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성유리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성유정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 언니랑 한빈 오빠... 아니, 형부 쪽은 내가 잘 설득해 볼게. 둘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잖아. 형부는 원래 언니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었으니까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그렇지?”성유정은 정말 진심인 듯 보였지만 그 말속에 성유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박한빈이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을 계속 들먹였다.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성유정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마워.”“나는 언니 동생이니까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성유정은 성유리의 팔짱을 끼며 계속 말했다.“오늘 별일 없지? 우리 둘이 쇼핑이라도 할까?”“아니, 몸이 좀 안 좋아서 쉬고 싶어.”“그렇구나. 원래는 언니랑 가면 형부랑 안 가려고 했는데...”성유정은 끼고 있던 목걸이를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 형부가 지난번에 사준 건데 2주도 안 돼서 고장 났어. 그래서 오늘 매장에 가서 제대로 얘기해야 돼.”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성유정에게 물었다.“그걸 왜 나한테 말해?”“언니랑 형부는 부부 사이잖아. 그럼 매장 사람들도 언니를 알 거야. 그리고 형부 카드도 언니한테 있는 거 아니야?”“나한테 없어.”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성유정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실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난 먼저 가볼게.”성유리는 더 이상 성유정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비로소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을 풀었는데 손바닥에는 이미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 자국이 언제 남았는
성유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성유리를 한번 쓱 쳐다보았다.그 눈빛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성유리의 눈엔 조금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보였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의 의미를 잘 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성유정이 나타난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윤청하와 점점 서먹해졌기 때문이다. 필경 수년간 엄마로서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성유정이 등장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을 무시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유정은 눈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방금 전 장면이 마음에 남았는지 식사 중에도 윤청하에게 계속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그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야.”윤청하는 태연하게 대답했고 성유리는 그녀가 이 사실을 성유정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한약 한 그릇을 준비해 주었다.“이건 네 몸을 위한 거야.”윤청하가 계속 말했다.“내가 특별히 좋은 것만 넣었어.”성유리는 윤청하가 부엌에서 뭔가를 바삐 준비하던 이유가 바로 이 한약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감동을 받은 걸까? 어쩌면 오랜만에 느껴본 모성애 때문에 멍해졌을 수도 있지만 성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윤청하가 원하는 것은 그저 성유리의 뱃속 아이가 성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저는...”성유리는 거절하려 했지만 윤청하가 그녀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그냥 내 말 들어. 너 지금 너무 말랐어. 임신...”윤청하는 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성유정의 눈치를 본 후 빠르게 말을 바꿨다.“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먼저 네 몸을 잘 챙기고 난 다음에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해야지.”성유리는 그 한약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 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