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대작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 드라마는 촬영 당시부터 철저히 현장을 봉쇄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몰래 시도한 촬영이 완전히 막히지는 않았다. 박한빈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파란 천막 근처에 몸을 숙이고 카메라로 촬영장을 겨냥하고 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본 박한빈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고 원래 그는 촬영장 안으로 바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비록 영상 산업이 그의 회사의 주요 사업은 아니지만 그는 그동안 크고 작은 영화와 드라마 투자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박한빈의 신분상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문득 그는 자신이 안으로 들어갈 명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누군가가 왜 왔는지를 물으면 그저 심심해서 와봤다는 핑계를 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박한빈은 발걸음을 뚝 멈춘 채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던 중, 그는 그 여자의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는 대상이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카메라 렌즈는 오히려 다른 방향, 즉 휴식을 취하기 위해 준비된 천막 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 천막 안에는 많은 스태프들이 있었고 주위는 정돈되지 않은 장비들로 어수선했다. 하지만 거리가 멀었음에도 그는 그곳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안경을 쓰고 있었고 옆 사람과 무언가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아이가 종이와 펜을 들고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와 아이는 자신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기에 박한빈은 아무 걱정 없이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벽 구석에서 조용히 자라는 식물이 되어 오랜 그늘 속에서 갈망하던 햇살과 이슬을 처음으로 맛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그 “햇살”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그때, 박한빈은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었다. “천한 여자! 염치도 없는 천한 년에다 저런 애까지!”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
그 여자는 박한빈의 말을 듣고 상황을 이해한 듯 비웃으며 말했다. “알겠네. 당신이 저 천한 년의 친구인가 보지?” 박한빈은 변호사와 통화하던 중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목소리는 뚝 끊겼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여자는 계속해서 빈정거리며 박한빈을 조롱했다. “아니지, 친구가 아니라 새로 사귄 남자인가? 참 대단하네. 어떻게 그 많은 남자들을 동시에 농락할 수 있지? 나도 알거든, 뭐 유명한 여신 만화작가라더니 다 허상이지. 분명 뒤에서는 당신 같은 남자들이나 떠받쳐 주는 걸 거야!” 그러면서 그녀는 박한빈을 위아래로 쭉 훑어보았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그녀는 화려한 물건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고 그 바람에 박한빈의 옷차림과 손목에 차고 있는 고급 시계가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더욱 확신을 가졌고 박한빈에게 갑자기 존댓말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 저 여자 스폰서 맞죠? 그런데 그거 알아요? 저 여자는 매일 촬영장에서 내 오빠랑 엮이고 있다고요. 게다가 애까지 있어요. 누구 씨앗인지도 모르는 그 애 말이죠. 당신이 고작 저런 여자를 위해 돈을 쓰고 있다고요. 기분 더럽지 않아요?” 여자는 계속해서 험한 말을 쏟아냈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여자는 점점 흥분하며 박한빈을 설득하며 성유리를 “매장”해 버리자고 했다. 그녀를 완전히 끝장내자고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 변호사가 현장에 도착했다. 박한빈은 변호사를 발견하고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은 건 알아서 잘 맡아주세요.” 그러면서 그녀의 카메라에서 메모리 카드를 빼냈다. 여자는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달려들어 따지려고 했지만 변호사가 그녀를 막아섰다.“안녕하세요. 저는 박 대표님의 변호사입니다. 문제 있으시면 저와 말씀 나누시죠.” ...그날, 박한빈은 결국 촬영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온 그는 메모리 카드를 꺼내 사진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사진 속
“선생님, 큰일 났어요.” 전화가 걸려 올 때까지 성유리는 호텔에서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미 대본은 거의 수정을 마친 상태였기에 성유리는 하늘이와 함께 집에 돌아가 살기로 결정을 내렸다. 비록 2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호텔에서 머물렀지만 짐은 생각보다 많았고 성유리는 이사센터에 도움을 요청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성유리는 조금 멍해진 채로 물었다. “왜 그래요?” “뉴스 안 보셨어요?” “무슨 뉴스요?” “허유라 알아요?” 성유리는 그때까지도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지 못했었다. 통화를 하던 상대는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바로 말을 이어갔다. “빨리 뉴스 확인하세요. 전에 선생님이랑 같은 회사에 다녔다고 주장하는 사람인데 지금 선생님이 쓰신 [안개가 걷힌 뒤] 그 만화가 자기 작품이라고 우겨요. 자기 작품인데 회사가 선생님을 알리기 위해 자기한테서 뺏어갔다고 하면서요. 게다가 자기는 회사에서 잘리기까지 했대요. 난리가 났는데 못 보셨어요?” 상대는 빠르게 말을 이어갔고 성유리가 뭐라 반응할 틈도 주지 않은 채 바로 통화를 끝내버렸다. 성유리는 멍하니 서 있다 천천히 핸드폰을 열어 뉴스를 확인했고 상대의 말대로 인터넷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 1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성유리는 얼굴 하나 믿고 나대는 거라고. 무조건 다른 사람들 덕을 봤다니까?] [여신 만화 작가는 무슨! 남이 쓴 작품 베끼기나 하는 주제에.] [이런 저질스러운 만화도 베껴? 낯이 얼마나 두꺼운 거야?] [소문으로는 성유리 뒤에 돈이 엄청 많은 스폰서가 있다던데?] [게다가 현장에서 남자 배우들을 계속 꼬신대. 늙은 여우 주제에 왜 저런대?]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댓글은 수도 없이 많았고 성유리는 댓글들을 확인하며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하늘이는 옆에서 조용히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기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성유리를 발견한 하늘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말을 마친 상대는 바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성유리는 핸드폰을 손에 꽉 쥔 채 낯빛은 점점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하늘이는 그때까지도 얌전히 성유리의 옆에 앉아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성유리는 깊은 한숨을 내뱉고 나서야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하늘이를 보며 말했다. “하늘아, 우리 집에 못 갈 것 같아.” “왜요? 우리 집에 안 가요?” 성유리의 말에 하늘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고 삐친 듯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계속 물었다. “엄마가 오늘 집에 간다고 했잖아요. 나 집에 갈래! 가서 민준 오빠랑 놀 거야.” “미안해, 하늘아. 엄마가 잘못했어.” 성유리는 떼를 쓰는 하늘이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며 달랬다. “근데 지금 일이 좀 생겨서 어쩔 수 없어. 여기서 며칠만 더 있자. 엄마가 약속할게. 일이 다 해결되면 바로 집으로 가자.” 하늘이는 대답이 없었다. 성유리는 지금 아이의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제작사와 이우빈 회사 쪽에서는 성유리에게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 따졌고 빨리 해결하라고 보챘다. 또 어떤 사람은 이우빈과 성유리가 현장에서 같이 있던 사진을 터뜨리면서 두 사람은 촬영을 핑계로 밀회를 즐겼다고 주장했다. 만약 성유리가 솔로였다면 이우빈의 팬들은 불같이 화를 내지 않았겠지만 성유리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이우빈의 회사로 찾아가 난동을 부렸다. 커다란 광장에서는 성유리를 욕하고 저주하는 목소리가 울려 펴졌고 이렇게 된 이상 성유리가 지금 만화를 베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성유리가 결백하다고 해도 죄를 지은 죄인이 될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이우빈은 이미 잠적했고 제작사는 계속 헛돈을 쓰며 현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이번 드라마가 방영을 못 하게 된다면 그 모든 비용은 다 성유리가 책임져야 했다. 그 돈은 아마 성유리가 예상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큰돈일 것이다. 성유리는 부득불 다른
성유리는 새벽에 집으로 돌아갔다. 하늘이는 깊은 밤이라 이미 성유리의 어깨에 기대 잠에 들어 있었는데 너무 지쳤는지 호흡이 거칠어졌다. 성유리는 한손으로 잠든 아이를 부축한 채 다른 한 손으론 문을 열려고 애를 썼다. 집으로 들어선 성유리는 다른 일을 할 새도 없이 먼저 하늘이를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아이한테 이불을 덮어주고 문을 닫고 나서야 성유리는 거실로 돌아갔다. 옆에 있는 조명은 켜져 있었고 그 옆에는 나가기 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책장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책장 안에는 성유리가 그려놓은 만화 작품과 미래에 대해 세워놓은 계획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모든 것은 마치 성유리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업계에서 그들은 겉으로 보기엔 아주 높게 평가받는 것 같지만 사실 제일 밑바닥에 깔린 사람이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홍보나 영업, 다른 사람과 손잡고 일하기 위해 상의하는 일 또한 회사에서 하니 성유리는 그저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매일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성유리고 피곤해서 코피까지 흘리면서도 대본을 수정하는 사람 역시 성유리였다. 그리고 나중에 대중들에게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욕을 먹는 사람 또한 성유리다. 직접 그린 만화가 정말 어렵게 드라마로 제작이 되었고 쉽지 않았지만 현장으로 나가 직접 참여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이름을 알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게 되었다. 성유리는 이런 자신의 모습이 갑자기 너무 우스워 보였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성유리는 그 감정들을 꾹꾹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은 전에 뜬 눈으로 보낸 그 밤들과 다를 점이 없었다. 피로에 찌든 몸으로 침대에 누웠지만 전혀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성유리는 눈을 번쩍 떴다. 그 전날부터 호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고 게다가 어떤 사람은 방문 틈으로 물건을 집어넣기도 했다. 협박 편지와 성유리를 저주하는
성유리는 병원을 싫어한다. 이곳에서는 항상 소독약 냄새가 났고 여전히 이따금 슬프고 절망적인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간호사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하늘이의 혈관은 매우 얇아서 지금 몇 바늘을 꿰매야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아이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꾹 참았다.그러나 하늘이도 어린아이일 뿐인지라 울음을 참을 수 없었고 성유리에게 아프다고 떼를 부렸다. 성유리는 아파하는 아이를 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늘이의 다른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때,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주삿바늘이 성공적으로 들어갔고 코를 훌쩍거리던 하늘이도 지쳤는지 눈을 감았다. “자.” 성유리는 손을 쭉 뻗어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엄마 여기 있어.” 하늘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떴다. 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왜 그래?” “엄마, 안 울 거지?” 아이의 물음에 성유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 방금 조금 아팠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으니 걱정 마.” 하늘이는 성유리가 자신을 걱정할까 봐 괜찮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성유리는 아이 앞에서 항상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아이의 말을 듣고 나니 더는 웃음을 지을 수가 없었다. 행여나 울음이 터져 나올까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의 모습을 본 하늘이는 안도의 표정을 짓더니 다시 눈을 감았고 성유리는 여전히 아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반대편에 있는 수액에 고정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더 큰 수액 병을 맞자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뭔가를 잃을까 봐 두려운 듯 시선을 떼고 싶지 않았다. 사하나가 들어왔을 때, 그녀가 본 모습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더니 성유리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언니, 좀 쉬세요. 제가 여기서 지켜볼게요.”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하나는
하늘이의 수속은 빠르게 처리되었다. 비행기가 금성시에 착륙하는 와중에도 성유리는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필경 그때 금성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평생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고 다짐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찾은 금성은 별로 달라진 점이 없어 보였다. 예전처럼 화려하기 그지없었고 주위엔 높은 건물들과 늦은 시간이지만 지나가는 행인들이 많이 보였다. 성유리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금성은 그녀로 하여금 제일 속상하게 한 도시이자 도망치듯 떠난 도시였다. 하지만 하늘이의 입장에서 보면 금성은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고향이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아주 좋은 하늘이는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바깥에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사씨 가문의 기사였고 사하나는 조수석에 자리를 잡았다. 조용히 앞만 쳐다보던 사하나는 고개를 휙 돌려 성유리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언니, 혹시... 그분한테 전화했어요?” 저번에 사하나가 말을 한번 꺼냈을 때 성유리는 바로 거절하지 않았었다. 그저 곧 연락을 해보겠다는 말로 상황을 무마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직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 같았고 박한빈에게 연락하는 일을 미루고 또 미루고 있었다. 사하나는 좀처럼 전화를 하지 못하는 성유리를 대신해 자기가 직접 연락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두 사람 일이니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 필경 박한빈이 연락이 없다고 해도 하늘이의 친아버지는 박한빈이었고 친어머니는 성유리였으니까. 병원에 도착한 하늘이는 당일 바로 입원수속을 할 수 있었다. 사하나는 병원 주위에 성유리를 위한 집 한 채를 마련해 두었고 그녀더러 자주 집으로 돌아가 쉬라고 말해줬다. 성유리는 사하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환하게 웃어 보였지만 사하나는 그녀가 하늘이를 챙기기 위해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집에 먼저 뽀얗게 쌓이겠네.’ 병원에서 모든 절차를 마친 사하나는 차에 올라타 사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 성유리와 함께 있어 주고 싶었지만
“아니야!” 류수미는 쏘아붙이는 사하나의 말에 너무 급한 나머지 손을 쭉 뻗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는 자신의 말을 끝까지 이어가려 했다. “이번에 소개받은 사람은 바로 지화그룹의 박 대표야!” 사하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행동을 멈췄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류수미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자신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내려간 뒤에서야 사하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누구라고요? 지화그룹에는 두 명이 있잖아요. 둘 중 어떤 박 대표 말씀이세요?” “지금 지화그룹에 박한빈 대표 빼고 대표가 또 있긴 해?” 류수미는 좀처럼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은 사하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알려줬다. “박세빈 그 사람을 몇 년 전에 박한빈이 해외로 보냈잖아. 경험을 쌓으라고 보내긴 했지만 사실상 포기나 다름없었지.” “그래서 말인데 그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야. 어쩜 친형제한테도 그럴 수 있어? 네 아버지가 그 사람을...” “잠깐만요.” 대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려 하자 사하나는 서둘러 류수미의 말을 뚝 끊었다. “아까 그 얘기로 돌아가요. 박한빈 씨가 저랑 맞선을 본다고요?” “맞아. 그 사람 조건 어때?” “미치셨어요?” 사하나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면 박세빈 씨가 미쳤나요? 저랑 유리 언니가 어떤 사이인지 모르는 건가요?” “그러니까 내가 이 얘길 빨리하는 거지. 네가 보기엔 이거 심각한 문제 아니야?” 류수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사하나에게 되물었고 그 말에 사하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해졌다. “그래서 넌 갈 거야 안 갈 거야?” 류수미가 다시 물었다. “당연히...” 사하나는 단호히 거절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가 맞선을 본다는 건 분명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거 아닌가요?” “누가 알겠어? 어쩌면 네가 첫 번째일지도 모르지.” “네? 그러니까 지금 박한빈 씨가 맞선을 보면서 새로운 결
오히려 사하나는 연정우의 일로 성유리에게 사과를 했다.“제가 상황파악도 제대로 못 하고 억지로 엮어주려고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솔직히 저도 연정우가 그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사하나는 한껏 찌푸린 얼굴로 변명해보았지만 성유리는 그녀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성유리의 눈빛에 사하나는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물었다.“언니... 혹시 제 탓하는 건 아니죠?”“내가 네 탓을 왜 해?”성유리가 웃기다는 듯 말했다.“이게 너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그래도... 그때 제가 부추기지만 않았다면...”“난 어른이잖아. 이런 기본적인 판단능력도 없으면 나중에 무슨 결정을 내리든 다 다른 사람 탓이나 하게?”성유리가 별수 없다는 듯 말했다.“게다가 나도 그때는 연정우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뒤늦게 둘이 안 맞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뿐이고.”“안 맞는 게 아니라, 연정우가 언니한테 안 어울리는 거죠!”사하나가 곧장 대답했다.“언니 그거 알아요? 요즘 박한빈 버린 여자가 연정우한테 차였다고 소문 돌고 있던데요.”“그 새끼 완전 미친놈 아니에요? 박한빈한테 사업으로 밀리니까 그딴 식으로 물어뜯는 거잖아요. 싸울 거면 자기들끼리 싸우든지, 왜 언니까지 끌어들인대요? 언니가 뭘 잘못했다고!”사하나는 말할수록 점점 화가 치미는지 언성을 높였다.성유리는 그런 사하나의 모습에 오히려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물이나 좀 마시고 진정하지 그래?”사하나는 태연한 성유리의 모습에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성유리는 그저 가만히 서서 사하나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사하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유리를 빤히 쳐다보았다.그 시선에 어딘가 머쓱해진 성유리가 물었다.“왜 그래?”“언니는 화도 안 나요?”사하나가 물었다.“왜 화가 나야 하는데?”“그러니까... 연정우가 언니를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도 그렇고,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도 그렇고, 화가 나야 하잖아요.”사하나의 앞에
문이 열리는 순간, 성유리는 박한빈의 몸에서 풍겨오는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그녀는 곧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문손잡이를 꽉 잡은 채 몸으로 문을 막았다.“대체 여긴 왜 찾아온 거예요?”때는 해가 완전히 저물어 버린 캄캄한 밤이었다.같은 층에는 성유리네 말고도 세 가구가 더 거주 중이었다. 이웃들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기는 싫었던 탓에 성유리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문을 열라며 난동을 부리던 박한빈은 정말 문이 열리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그저 그윽한 눈으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잠시 박한빈과 눈을 맞추고 있던 성유리는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할 말 없으면 이만 돌아가요.”말을 끝낸 그녀는 문을 닫으려 했지만 이내 박한빈의 손에 의해 가로막혀 버렸다.“이렇게까지 날 피하고 싶은 거야?”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물었다.“옆집으로 이사 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도망치듯 이사를 가버리는 건데?”“성유리, 너 정말 매정하다. 어떻게 나한테 단 한 번의 기회조차... 안 주는 건데?”한참이나 박한빈을 가만히 바라보던 성유리가 대답했다.“대표님, 제발 대표님의 인생을 사세요.”“저도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게다가 대표님 같은 조건과 위치라면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요. 굳이 저한테 이렇게 집착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여자들이 줄을 선다고...”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넌 정말 그 여자들이 날 진심으로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만약 내가...”“애초에 접근할 기회도 안 주면서, 진심일지 아닐지 어떻게 확신하는데요?”성유리가 박한빈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더군다나, 지금 저랑 그 여자들이 다를 게 뭔데요?”“박한빈 씨, 저는 이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적어도 그 여자들은 돈 때문에라도 한빈 씨를 사랑하겠지만 저는 이제 그럴 수도 없어요.”“한빈 씨 사업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럼 가장 치명적인 투자가 어떤 건지도 잘
“감사합니다.”성유리는 결재서류를 받아들고 사인하며 말했다.“우리 남편 들어오면 담배라도 한 갑 사 오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쉬운 대로 몇만 원 더 드릴 테니까 돌아가시는 길에 뭐라도 사드세요.”“아뇨, 괜찮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직원들은 극구 사양하는 척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성유리가 건네주는 현금을 받았다.성유리는 직원들이 떠나자마자 곧장 상자 속에 있던 신발을 현관에 놓고는 남자 옷까지 몇 벌 더 꺼내 베란다에 걸어두었다.“엄마, 우리 이제 여기서 사는 거야?”성하늘이 물었다.“맞아.”“그럼 우리가 원래 살던 집은 어떻게 됐어?”“방 뺐어. 이제 여기가 우리 집이야.”“그럼... 난 이제 승민이 오빠 못 만나는 거야?”“아니야, 여기서 얼마 멀지도 않으니까 나중에 하늘이가 유치원 들어가면 또 만날 수 있을 거야.”그제야 성하늘은 안심한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성유리는 하루 종일 짐 정리를 하느라 저녁도 차리지 못했다.그래도 성하늘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였다.성유리가 저녁을 직접 차리지 못한다면 배달 음식으로 먹게 되는 것은 밖에서 파는 정크푸드였기 때문이다.새로운 환경으로 옮겨서인지 성하늘은 밤이 되어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한참이나 뒤척이다가 겨우 눈을 감았다.아이가 잠든 줄 알았던 성유리는 남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깊은 잠에 빠져있던 줄만 알았던 성하늘이 눈을 떴다.“그럼 난 이제 그 사람도 못 보는 거야?”“그 사람이 누군데?”성유리가 무심코 물었다.하지만 성하늘은 그녀의 질문에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침대 곁에 서 있던 성유리는 한참이나 지나서야 아이가 얘기한 ‘그 사람’이 박한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성유리는 아이에게 무슨 말이든 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눈을 질끈 감은 성하늘은 정말로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결국, 그녀는 잠든 아이를 두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성유리는 얼마 전에 받았던 커미션의
박한빈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평소 성유리와 아이의 외출 시간은 오전과 초저녁으로 나뉘었다.보통 오전 11시쯤이면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돌아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잠깐의 낮잠을 자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하지만 오늘은 왜인지 모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박한빈은 앞집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꼈다.그는 그 소리가 곧바로 문을 열었다.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낯선 남자 무리였다.박한빈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남자들이 깜짝 놀라 박한빈을 돌아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그쪽은 누구신데요?”“지금 뭐 하시는 거냐고요?”박한빈은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전선 고치러 오신 거예요? 무슨 전선 하나 고치는 데 이렇게 많이 몰려와요?”“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저희는 이 집으로 이사 온 건데요.”남자들 중 한 명이 대답했다.그 말에 박한빈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이사요?”“네, 이사 왔어요.”남자는 대답을 하면서도 다시 문 앞에 적힌 번호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5동 904호, 맞는데요.”그 말과 함께 남자는 이미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들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그저 자신의 집 현관 앞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가장 행복해야 할 놀이공원에서 모두에게 버림받은 아이라도 된 듯, 믿기 힘든 감정과 함께 몰려온 혼란스러운 감정이 쓰나미처럼 박한빈을 덮쳐왔다.박한빈은 천천히 집안으로 돌아왔다.모니터에는 여전히 알아보기도 힘든 다양한 데이터 수치들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평소 작은 움직임 하나로 박한빈을 흥분시키던 데이터였지만 지금은 아무리 날뛰어도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던 박한빈은 이내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성유리가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가운데에 있어야 할 벽이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안방과 서재가 하나로 합쳐져 있었고 그 덕에 작은 방과 거실이 넓어졌다.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성하늘은 성유리에게 안기자마자 그녀의 어깨 위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다. 아이는 지금 자신이 어디로 와 있는지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침구는 다 깨끗한데, 더 필요한 거 있어?”방 문 앞에 서 있던 박한빈이 물었다.“필요 없어요, 고마워요.”“너... 씻고 나서 잠옷으로 갈아입을 거야?”박한빈의 말에 성유리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반응에 박한빈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미안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럼... 잘 자. 나는 앞방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불러.”말을 마친 그는 곧장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성유리는 그런 박한빈의 뒤를 곧바로 따라나섰다.그때까지만 해도 박한빈은 성유리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건 줄로 알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성유리는 매정하게 방 문을 닫았다.뒤이어 문을 잠그는 듯한 소리까지 들려왔다.박한빈은 걸음을 멈추고 참았던 웃음을 피식 터뜨렸다.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성유리는 여전히 순진하기 그지없었다.아무리 문을 잠근다고 해도 이곳은 박한빈의 집이었고, 집주인인 그에게 스페어 키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하지만 박한빈 역시 성유리에게 허튼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지금이 적절한 때가 아닌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지금 이대로도 박한빈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수없이 박한빈은 거부했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난 진전이나 다름없었으니까.박한빈은 계속 걸음을 옮겨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서재의 컴퓨터 책상 위에는 수많은 자료들이 쌓여 있었지만 박한빈은 그 자료들을 확인해 볼 의지도 없다는 듯 곧바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그날 밤, 박한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은 잠에 들었다.쓸데없는 꿈을 꾸지도 않았고,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았다.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CCTV는 내가 설치한 거야.”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재빨리 말했다.“저걸 설치한 이유는 너희의 안전을 위해서야. 오늘 밤처럼, 내가 없었으면...”“대표님이 굳이 이사 안 왔으면 저 사람이 우리 모녀의 삶에 등장하는 일도 없었겠죠.”성유리가 그의 말을 끊고 말했다.그 말에 박한빈이 잠시 멍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설마 이것도 내 잘못이라는 거야?”“그럼 아니에요?”성유리가 되물었다.“저 사람, 대표님이 부른 사람들이잖아요.”“난 그냥 이삿짐센터를 불렀을 뿐이야. 거기서 어떤 사람을 보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대표님이었잖아요. 대표님만 굳이 이사 안 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걸요.”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무슨 일이 생기든 모든 책임을 다 박한빈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었고 박한빈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가 아무리 반박하고 변명해보려 해도 아무 소용없었다.성유리도 더는 박한빈은 신경 쓰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하지만 성유리가 뒤늦게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다.전선이 여전히 끊긴 상태가 집 안은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다는 점이다.성유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결국, 그녀는 성하늘을 안고 다시 밖으로 나와야 했다.박한빈은 여전히 앞집 문 앞에 서 있었다.그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이 모든 일을 예상했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조금 전과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마치 성유리가 곤란해지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이 시간에 업체 부르긴 힘들 거야.”박한빈이 말했다.성유리는 그의 말에 아무 대꾸로 하지 않은 채 성하늘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이미 한 시간 동안이나 시달리며 잘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탓에 성하늘의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이는 한 손으로 성유리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계속해서 눈을 비비적대고 있었다.“이 늦은 시간에 애 데리고 어딜 가려는
그 광경에 성유리의 낯빛이 곧바로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박한빈의 손에 들려있던 열쇠를 빼앗듯 가져갔다.“너...”성유리는 설마 훔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한빈은 성유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곧장 입을 열었다.“아까 네가 밖에서 물건 꺼내다가 떨어뜨린 거야. 그걸 내가 주운 거고.”“그럼 왜 진작 안 줬는데요?”“네가 말할 틈을 안 줬잖아.”박한빈은 조금 억울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게다가 애가 그렇게 급하다는데, 병이라도 나면 안 되잖아.”박한빈의 말은 나름대로 그럴듯하게 들렸다.잠시 할 말을 잃은 성유리는 가만히 박한빈을 노려보다가 성하늘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주스... 안 마실 거야?”박한빈이 뒤에서 물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단 한 번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박한빈이 일부러 이런 짓을 한다는 것쯤은 성유리도 눈치챘다. 그런 게 아니었다면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열쇠부터 건넸을 것이다.이런저런 생각에 열이 올랐던 건지 문을 닫던 성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런 엄마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성하늘이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하늘이가 잘못한 거야?”이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가 다급히 사과했다.“아니야, 그런 거. 엄마가 실수로 문을 너무 세게 닫아서 그래. 엄마 화 안 났어.”성하늘은 그렇게 성유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로 성유리는 집까지 찾아와 준 업체 직원에게 오랫동안 상황 설명을 해줘야 했고, 먼 길 달려온 그에게 교통비까지 물어주고 나서야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그렇게 박한빈을 향한 성유리의 원망이 한층 더 추가됐다.그때까지만 해도 성유리는 그저 지나가면 끝일 작은 해프닝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자기 전, 샤워를 준비하던 그때, 머리 위에서 전등이 갑자기 깜빡이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집안 전체가 어둠에 휩싸여 버렸다.침대 위에서 놀고 있던 성하늘 역시 깜짝 놀
“잠깐만요.”엘리베이터 문밖에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성유리도 곧바로 열림 버튼을 눌러줬을 터였다.하지만 지금 성유리는 여느 때와 달리 고개를 푹 숙인 채 미친 듯이 닫힘 버튼만 연속으로 눌러대고 있었다.그런데도 엘리베이터 밖의 사람보다 한발 늦고 말았다. 문이 천천히 닫히려던 그 순간, 남자가 닫히려는 문을 손으로 잡았던 탓이다.닫히려던 문이 다시 열렸다.성유리의 입술은 열려버린 엘리베이터 문과는 반대로 꽉 다물어졌다.남자는 분명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왔음에도 성유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성유리는 그런 남자의 인사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성하늘을 데리고 옆으로 물러섰다.그녀는 마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남자를 무서운 바이러스라도 되는 양 취급하며 최대한 그와 멀어지려 했다.하지만 남자는 그런 모녀를 보면서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점점 올라가는 숫자판만 바라보고 있었다.곧이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성유리와 성하늘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현관 앞으로 도착한 성유리는 열쇠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적였다.그녀는 그제야 뒤늦게 자신의 열쇠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성하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는 대충 아이의 말에 대답해준 후 더욱 다급한 손길로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찾아보아도 가방 안에 있어야 할 그 열쇠들이 보이지 않았다.“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다니까.”시간이 꽤 걸리자 성하늘의 목소리도 더욱 다급해져 더 끌었다가는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들렸다.성유리가 아이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려던 그때, 모녀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집에서 해결할래?”그 소리에 가방을 뒤적이던 성유리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지만 아이는 여전히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박한빈은 더 고민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곧장 성하늘을 안아 들어 자신의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성유리는 다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이게 지금 무슨 짓
서훈은 박한빈의 비서실장으로서 평소 박한빈과 거의 붙어 다니는 사이였다. 그런 서훈을 시켜 짐을 옮기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뻔할 뻔 자였다.역시 예상했던 대로 성유리는 집 안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셔츠 하나만 걸친 채 소매를 걷어 올린 남자의 소매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그의 머리카락은 어느 정도 흐트러져 있었지만 오히려 그 허술함이 남자의 생기를 더 돋보이게 해주었다.성유리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박한빈은 그 상태로 한참이나 성유리와 눈을 마주치다가 입을 열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우연이라니?성유리는 당장이라도 박한빈의 얼굴이 뭔가를 집어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이런 상황을 보고도 박한빈의 말을 믿을 사람은 바보가 아닌 이상 존재할 리 없었다.성유리는 박한빈은 더 상대하지도 않은 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하늘이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성하늘 역시 당연하게도 박한빈을 알아보았다.아이는 유심히 박한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는 순간, 성하늘은 곧장 성유리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엄마,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나도 몰라.”성유리의 대답은 아이의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니었다. 성하늘은 곧장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난 저 사람 진짜 싫어. 자꾸 거머리처럼 달라붙잖아.”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곧장 휴대폰을 꺼내 근처의 임대 정보를 확인하며 이사 갈 만한 집이 있는지 찾아보았다.이사가 번거롭긴 했지만 이미 이 동네에 익숙해진 성유리에게는 별 큰 문제도 아니었다.적어도 그녀는 자신만 이사하면 박한빈이 계속 따라붙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마음에 드는 집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오전 시간이 다 지나도록 웹사이트는 찾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집 창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구조가 너무 별로였고, 동네가 너무 낡았다.무엇보다 성하늘이 이미 이곳에서 사귄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