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병원을 싫어한다. 이곳에서는 항상 소독약 냄새가 났고 여전히 이따금 슬프고 절망적인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간호사는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하늘이의 혈관은 매우 얇아서 지금 몇 바늘을 꿰매야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아이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꾹 참았다.그러나 하늘이도 어린아이일 뿐인지라 울음을 참을 수 없었고 성유리에게 아프다고 떼를 부렸다. 성유리는 아파하는 아이를 보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늘이의 다른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때,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주삿바늘이 성공적으로 들어갔고 코를 훌쩍거리던 하늘이도 지쳤는지 눈을 감았다. “자.” 성유리는 손을 쭉 뻗어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엄마 여기 있어.” 하늘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떴다. 성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왜 그래?” “엄마, 안 울 거지?” 아이의 물음에 성유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 방금 조금 아팠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으니 걱정 마.” 하늘이는 성유리가 자신을 걱정할까 봐 괜찮다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성유리는 아이 앞에서 항상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아이의 말을 듣고 나니 더는 웃음을 지을 수가 없었다. 행여나 울음이 터져 나올까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의 모습을 본 하늘이는 안도의 표정을 짓더니 다시 눈을 감았고 성유리는 여전히 아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반대편에 있는 수액에 고정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더 큰 수액 병을 맞자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뭔가를 잃을까 봐 두려운 듯 시선을 떼고 싶지 않았다. 사하나가 들어왔을 때, 그녀가 본 모습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더니 성유리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언니, 좀 쉬세요. 제가 여기서 지켜볼게요.”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하나는
하늘이의 수속은 빠르게 처리되었다. 비행기가 금성시에 착륙하는 와중에도 성유리는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필경 그때 금성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평생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고 다짐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찾은 금성은 별로 달라진 점이 없어 보였다. 예전처럼 화려하기 그지없었고 주위엔 높은 건물들과 늦은 시간이지만 지나가는 행인들이 많이 보였다. 성유리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금성은 그녀로 하여금 제일 속상하게 한 도시이자 도망치듯 떠난 도시였다. 하지만 하늘이의 입장에서 보면 금성은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고향이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아주 좋은 하늘이는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바깥에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사씨 가문의 기사였고 사하나는 조수석에 자리를 잡았다. 조용히 앞만 쳐다보던 사하나는 고개를 휙 돌려 성유리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언니, 혹시... 그분한테 전화했어요?” 저번에 사하나가 말을 한번 꺼냈을 때 성유리는 바로 거절하지 않았었다. 그저 곧 연락을 해보겠다는 말로 상황을 무마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성유리는 아직까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 같았고 박한빈에게 연락하는 일을 미루고 또 미루고 있었다. 사하나는 좀처럼 전화를 하지 못하는 성유리를 대신해 자기가 직접 연락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두 사람 일이니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 필경 박한빈이 연락이 없다고 해도 하늘이의 친아버지는 박한빈이었고 친어머니는 성유리였으니까. 병원에 도착한 하늘이는 당일 바로 입원수속을 할 수 있었다. 사하나는 병원 주위에 성유리를 위한 집 한 채를 마련해 두었고 그녀더러 자주 집으로 돌아가 쉬라고 말해줬다. 성유리는 사하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환하게 웃어 보였지만 사하나는 그녀가 하늘이를 챙기기 위해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집에 먼저 뽀얗게 쌓이겠네.’ 병원에서 모든 절차를 마친 사하나는 차에 올라타 사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 성유리와 함께 있어 주고 싶었지만
“아니야!” 류수미는 쏘아붙이는 사하나의 말에 너무 급한 나머지 손을 쭉 뻗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는 자신의 말을 끝까지 이어가려 했다. “이번에 소개받은 사람은 바로 지화그룹의 박 대표야!” 사하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행동을 멈췄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류수미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자신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이 내려간 뒤에서야 사하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누구라고요? 지화그룹에는 두 명이 있잖아요. 둘 중 어떤 박 대표 말씀이세요?” “지금 지화그룹에 박한빈 대표 빼고 대표가 또 있긴 해?” 류수미는 좀처럼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은 사하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알려줬다. “박세빈 그 사람을 몇 년 전에 박한빈이 해외로 보냈잖아. 경험을 쌓으라고 보내긴 했지만 사실상 포기나 다름없었지.” “그래서 말인데 그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야. 어쩜 친형제한테도 그럴 수 있어? 네 아버지가 그 사람을...” “잠깐만요.” 대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려 하자 사하나는 서둘러 류수미의 말을 뚝 끊었다. “아까 그 얘기로 돌아가요. 박한빈 씨가 저랑 맞선을 본다고요?” “맞아. 그 사람 조건 어때?” “미치셨어요?” 사하나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면 박세빈 씨가 미쳤나요? 저랑 유리 언니가 어떤 사이인지 모르는 건가요?” “그러니까 내가 이 얘길 빨리하는 거지. 네가 보기엔 이거 심각한 문제 아니야?” 류수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사하나에게 되물었고 그 말에 사하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해졌다. “그래서 넌 갈 거야 안 갈 거야?” 류수미가 다시 물었다. “당연히...” 사하나는 단호히 거절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가 맞선을 본다는 건 분명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는 거 아닌가요?” “누가 알겠어? 어쩌면 네가 첫 번째일지도 모르지.” “네? 그러니까 지금 박한빈 씨가 맞선을 보면서 새로운 결
하룻밤이 지나가자 사하나는 한결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녀는 이번 일이 박한빈의 계략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설령 진짜 결혼을 생각한다 해도 금성에 이렇게 많은 명문가 출신의 아가씨들 중 왜 하필 자신을 선택했을까?그는 분명히 자신과 성유리의 관계를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혹시 일부러 그런 건 아닐까?’ 일부러 자신과 맞선을 보고 이 사실을 성유리에게 알리려는 의도, 그녀를 질투하게 하고 괴롭게 만들려는 계산일 수도 있다. 사하나는 생각할수록 박한빈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느껴졌다.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녀의 분노는 어느새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사하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세심하게 단장한 후 약속 장소인 카페로 향했다.그러나 카페에서 박한빈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자신이 그를 과대평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박한빈은 그녀를 보더니 많이 놀란 듯해 보였다. 분명 박한빈은 여기서 그녀를 만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마 자신과 맞선을 볼 사람이 사하나라는 것을 아예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렇게 사하나가 전날 밤 머릿속에서 그렸던 모든 시나리오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사하나의 계획과는 달리 박한빈은 진짜로 결혼을 하려는 거였다. 그녀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박한빈을 뚫여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 만약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사하나는 이미 수백 번 박한빈을 찔렀을 것이다. “사하나 씨.” 박한빈은 매우 태연하게 그녀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 만나는 사람이 당신일 줄은 몰랐습니다.” “오? 그럼 누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사하나는 박한빈을 비웃듯 물었다. 그러나 박한빈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물었다. “근데 사하나 씨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던 것 같군요. 그렇죠?”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요?” 그녀의 대답에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말했다. “당신은 성유리의 친구죠. 그러니까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그럼 이만.” 그는 말을 마치자
병실 안에는 성유리의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유리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하늘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한편 하늘이는 그림책을 집중해서 읽고 있었다. 최근에 살이 빠진 탓에 커다란 눈이 더 두드러졌고 창백한 피부 때문에 마치 인형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유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기척을 들은 하늘이는 고개를 들어 입구를 쓱 쳐다보았다. 병실 안으로 들어서는 사하나를 보자마자 하늘이는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모!” 평소 같았으면 사하나는 활기차게 반응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박한빈의 차가운 반응이 그녀를 너무나도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의 일, 그리고 성유리가 자신에게 털어놓았던 자세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때 성유리가 박한빈을 떠난 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그녀가 “가라앉는 배”인 그를 서둘러 떠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박한빈이 성유리를 원망하는 것도 어쩌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늘이는 그의 친딸 아닌가? 사하나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냉정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그러던 그녀는 곧 하늘이와 성유리가 겪어온 일들과 성유리가 출산과 산후조리 때 겪었던 고통들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자신이 옆에 없었다면 성유리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 모든 걸 박한빈은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아예 관심조차 없었던 걸까? 이제 와서 친딸인 하늘이가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는데도 박한빈은 여전히 무관심한 걸까? 수많은 의문들과 이해가지 않는 박한빈의 행동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모!” 하늘이의 밝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그제야 사하나는 정신을 차리고 하늘이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이상하게 여긴 하늘이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성유리 또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하나를 보고 있었다. 성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사하나는 서둘러 미소를 지으며 대
사하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 침묵만으로도 성유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성유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음, 잘됐네.” “뭐가요?” 사하나는 이미 나있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드러내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성유리가 박한빈에 관한 주제로 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성유리가 이렇게 애써 담담한 척하는 모습을 보니 사하나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그 사람을 어디서 만났는지 알아요? 그 사람이 맞선을 보려고 했다고요! 그리고는 나한테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말했어요. 언니가 생각해 봐도 너무 냉정하지 않나요?” 사하나는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결국 이보다 적합한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괜찮아요.” 사하나는 시무룩해 보이는 성유리를 보고는 금세 손까지 내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 쓰레기는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생각해요. 걱정 마세요. 저희는 앞으로 더 좋은 남자를 만날 거니까.” 성유리는 살짝 웃어 보이며 하늘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하늘이가 평범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거야. 그 외의 모든 건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사하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그래요. 언니 말이 맞아요. 반드시 그렇게 될 거고요.” ... 사하나의 말 덕분에 성유리는 이제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디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의 태도를 사하나를 통해 들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녀가 직접 박한빈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면 지금처럼 담담하게 있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된 것이 더 좋았을 수도 있다. 성유리는 이제 박한빈과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를 다시 만날 이유도 다시 얽힐 필요도 없어졌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당신은...” “아까 경찰 부르셨다고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거죠? 제가 대신 한 번 전화를 걸어볼까요? CCTV 자료도 요청해 볼 겸.” “아니요! 됐습니다. 오늘 제 재수가 없는 거로 치죠.” 남자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휙 돌려 떠나가 버렸다. 서훈은 떠나가는 운전자를 굳이 막지 않고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남자의 차량 번호판을 찍었다. 그 후, 그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성유리 씨, 괜찮으세요? 병원에 모셔다드릴까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성유리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곧바로 앞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종아리의 통증은 여전히 느껴졌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절뚝거리며 사람들의 시야에서 애써 벗어났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도착하자 약국에 들러 간단히 상처를 처치할 물품을 샀다. “이거 뭐에 긁히셨길래 그러신 거예요? 파상풍 주사 맞아야 할 수도 있는데요.” 약사는 피가 줄줄 흐르는 그녀의 다리를 보며 말했다. “상처가 꽤 심한데요.” “괜찮아요. 우선 소독약하고 거즈만 주세요. 나중에 병원 가서 주사 맞을게요.” 성유리가 연신 괜찮다고 말하자 약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필요한 물품을 빠르게 계산해 주었다. 약을 받은 성유리가 약국을 나서려는 순간, 약사는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마치 성유리가 그곳을 더럽혔을까 봐 걱정하는 듯한 눈치였다.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재촉했고 문을 열고 나가는 그때, 성유리는 저 멀리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에 발걸음을 뚝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는 박한빈이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차에 기댄 채로 있었고 저무는 햇살이 가로수 사이로 비쳐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빛은 그의 뚜렷하고 강인한 이목구비를 더 뚜렷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여전히 뛰어난 외모였다. 지금의 그는 마치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 같아 보였고 성유리는 자세히 보지 않아도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과거 박한빈의
사하나가 마련해 준 집은 병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집들은 대부분 오래된 탓에 성유리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발에 묻은 피는 이미 닦아냈지만 피가 사라진 자리에 드러난 길고 깊은 상처는 마치 다른 감정 없이 벌어진 입처럼 보였다. 성유리는 어처구니없게도 빨간 상처 자국이 마치 웃고 있는 입 같아서 섬뜩했다. 겨우겨우 그녀가 탄 엘리베이터가 5층에 도착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성유리는 상처를 간단히 소독한 뒤 하늘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긴 치마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숨길 수 없었다. 특히 하늘이가 찾고 싶어 하던 작은 사자 인형을 찾으려고 몇 번이고 방을 오가며 헤매는 모습은 더더욱 다친 사람인 것이 티가 났다. 세 번째로 상자를 열었을 때도 인형이 보이지 않자 성유리는 점점 불안해졌고 찾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좌절하기도 했다. 결국 쇼핑 앱을 열어 같은 인형을 새로 사려고 했지만 화면을 본 순간 멍해졌다. 그 인형은 이미 단종되어 더 이상 구매할 수 없었던 것이다.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유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건가?”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박한빈이 서 있었다. 사하나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하늘이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를 따라온 이유는 대체 뭘까?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성유리는 박한빈의 눈빛 속에 담긴 조롱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박한빈은 어지러운 집 안 풍경을 보며 미간을 약간 찌푸리기까지 했다. 그의 기억 속 성유리는 어떤 집에서 살더라도 항상 집안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있는 공간은 항상 정돈된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정리되지 못한 수많은 상자들뿐이었다. 심지어 일부 상자는 그녀가 찾던 물건을 꺼내려다 열어 둔 상태라 더욱 어수선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
성유리는 처음엔 물밀듯 밀려오는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다.하지만 박한빈이 그녀 앞에 국 한 그릇을 내려놓으며 손을 뻗는 순간, 풍겨온 성유정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그래서 성유리는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그녀는 입을 틀어막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사실 성유리는 저녁도 거의 먹지 못했기에 토할 것도 없는 빈속에서 나오는 건 위액뿐이었다.세면대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던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너무 힘을 준 탓에 세면대를 짚고 있는 손이 창백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문밖에서 가사도우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러자 도우미가 문을 두드리다 옆에 있는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설마 무슨 일 생긴 거 아니겠지?”“임신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심하게 입덧을 해? 앞으로 어쩌려고.”“그러게 말이야.”“근데 뭐... 이해는 가지. 복 많은 도련님의 아기를 가지려면 그만한 고생은 해야 하지 않겠어?”그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딱 성유리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일부러 비꼰 건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도우미들도 눈이 있으니 이 집에서 성유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당연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집안 어르신인 김난희가 성유리를 싫어하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고 김서영 역시 그저 고인이 된 남편의 뜻을 따라 돌봐주는 척하는 것뿐이라는 것을.박한빈, 그는 아예 성유리를 아내라고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고 그에게 성유리는 한낱 ‘도구’에 가까웠다.그 사실이 너무도 명확하게 떠오르자 성유리는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너무 굳어 있어서 한참이나 애써도 겨우 떨리는 듯 올라갈 뿐, 미소라고 볼 수도 없었다.거울 속에 비친 성유리의 모습에서 제일 잘 보이는 건 붉게 충혈된 눈동자였다.그러나 눈물은 흐르지는 않았다.왜냐하면 성유리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눈물이라는 건 자신을 아끼는 사람 앞
그때의 성유리는 진심으로 감동했고 더없이 행복했다.그 순간만큼은 박한빈의 모든 무심함과 냉랭함을 다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의 성유리는 알게 됐다.자신이 박한빈에겐 그저 하나의 장난감이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처럼 하찮은 존재였다는 걸.성유리가 처음으로 받은 단 하나의 선물, 그건 결국 성유정이 필요 없다고 내버린 사은품일 뿐이었다.박한빈의 아내는 성유리다.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일상에 관심을 가져준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성유리의 생각을 진심으로 존중해준 적이 없었다.그러니 성유리가 팔찌를 들고 박한빈에게 보여줬을 때 그렇게 놀란 눈빛을 보였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그건 성유리가 박한빈의 얼굴에서 본 몇 안 되는 감정의 변화였다.기뻐하는 성유리를 보며 박한빈은 속으로 비웃었을 것이다.이 여자 참 어이없을 정도로 순진하다고, 이 정도 선물에 저렇게 감격하는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박한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그저 그런 사소한 물건 하나면 성유리는 감동해서 눈물을 흘릴 테니까.그녀의 감정과 진심은 박한빈에게 그렇게나 값싸고 하찮은 존재였다....성유정은 돌아오긴 했지만 저녁 식사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자신의 물건을 놓고 가서 잠깐 들른 것뿐이라며 떠났고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박한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성유리 옆자리에 앉았다.박씨 저택의 주방은 매우 컸다.식사를 하는 사람은 네 명뿐이었지만 여전히 지름 2미터 가까이 되는 원형 테이블을 사용했다.성유리는 자신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박한빈이 평소보다 더 가까이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너무 가까워서 박한빈의 향수 냄새가 또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그 향은 성유리에게도 익숙한 냄새였다.왜냐하면 그것은 조금 전 성유정이 박한빈을 껴안으며 남긴 향기였으니까.고개를 숙였을 때 성유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텅 빈 손목뿐이었다.그 위에 끼고 있던 팔찌는 이미 그녀가 스스로 끊어내 버린 상태였다
방안의 보석을 다 둘러본 뒤, 김서영은 저녁 준비 상황을 보러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성유리는 화장실에 들렀다.손을 씻고 나오는 순간 조금 전 먼저 떠났던 성유정이 다시 돌아와 있는 걸 보게 됐다.지금 그녀는 정원에 서 있었는데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박한빈이었다.성유정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비록 성유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작게 떨리는 어깨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박한빈은 성유리 쪽을 등지고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표정이나 반응은 볼 수 없었다.그런데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그 장면은 어쩐지 너무 자연스럽고 심지어 눈이 아릴 정도로 잘 어울렸다.성유리는 이제 그만 보고 얼른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마치 스스로를 학대하듯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그리고 이내 성유정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성유정이 팔을 뻗어 박한빈을 끌어안으려는 순간 성유리는 더 이상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그녀는 마치 도둑처럼 급히 몸을 돌렸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사모님, 어디 안 좋으세요?”가사도우미가 가장 먼저 성유리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성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목소리를 냈다.“괜찮아요.”“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몸이 불편하신가요?”“아니에요. 그냥... 급히 움직였더니 좀 숨이 차네요. 조금만 쉬면 괜찮을 거예요.”도우미가 또 뭔가 말하려던 그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그 순간, 성유리의 몸이 바짝 굳었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성유정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성큼성큼 걸어와 성유리의 손을 꼭 잡았다.“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갑자기 들은 소식이라 순간 좀 당황했나 봐.”“언니가 임신했다니... 나 진심으로 너무 기뻐. 언니랑 형부, 꼭 행복해야 해.”성유정의 연기는 늘 어릴 때부터 완벽했다.지금 이 순간, 그녀의 얼굴
성유정은 박한빈과 성유리의 결혼은 그저 잠깐의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확신했었다.시간이 지나 어머니가 자신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게 되면 성유리와 이혼하고 결국 자신 곁으로 돌아올 거라고.그런데 지금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성유리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은 진짜 믿고 싶지가 않았다.그들이 정말 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장면을 떠올리자 성유정은 소리 지르고 싶을 만큼 미쳐버릴 것 같았다.아무리 애써 눌러도 눈가는 빨갛게 물들고 목소리는 떨렸으며 얼굴에는 힘들게 억누른 감정이 일그러진 채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오랫동안 보고 있다 결국 조용히 입을 열었다.“고마워.”그때, 성유정이 김난희에게 얼버무리듯 말했다.“할머니, 저... 생각해 보니 급한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볼게요.”이 자리에 성유정은 더는 머물 수 없었다.그래서 김난희에게도 짧게 인사만 남긴 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쟤 왜 저래?”김난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러곤 성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어쨌든 지금 너한테 가장 중요한 건 아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는 꼭 지켜야 해, 알겠니?”말투엔 여전히 집안 어르신의 권위가 잔뜩 실려 있었는데 마치 아이를 낳는 것이 성유리에게 내려진 대단한 영광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하지만 성유리는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몇 번 꾹 참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김서영이 곧 화제를 돌렸다.“며칠 전에 새로 들인 보석이 있는데 같이 올라가서 좀 볼래?”성유리는 김서영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임신 초기 석 달이 제일 중요해.”계단을 오르며 김서영이 말했다.“원래는 조용히 넘기려 했는데 이젠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밀로 하는 것도 의미가 없겠더라.”“네 일도... 요즘은 좀 줄이는 게 좋겠어. 내가 사람 몇 명 골라서 보낼게. 하루 세 끼 챙겨주고 매일 태아 심장박동이랑 혈압 체크도 해줄
“유정이 왔니?”성유정은 밥을 얻어먹으러 왔다고 말했지만 김난희는 그래도 너무 반가운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그리고 성유정 또한 자연스레 김난희의 팔짱을 꼈는데 그 모습이 꼭 진짜 손녀처럼 친밀해 보였다.그러다 성유정은 성유리도 자리에 있는 걸 발견하곤 먼저 인사를 건넸다.“언니도 와 있었네?”성유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아, 맞다. 오늘이 음력설이지.”성유정은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요즘 졸업 준비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걸 깜빡했네.”“별일도 아닌데 잘 왔다. 저녁 같이 먹자.”김난희가 성유정의 말에 바로 대답했고 그녀도 군말 없이 수긍했다.그러다 성유리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는 걸 본 성유정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가 보려고 했다.하지만 그보다 먼저 김난희가 성유정을 잡아끌며 말했다.“조심해라. 너희 언니 지금 아주 귀하신 몸이시다.”그 말은 진심인지 빈정거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성유정은 순간 멈칫하며 무심코 물었다.“왜요?”김서영이 입술을 다물고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김난희가 먼저 나섰다.“어이구, 바보야! 왜겠니? 당연히 네 언니가 임신했으니까 그렇지.”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유정의 얼굴에 띠고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던 성유정은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임신? 임신했다고? 언니가... 진짜 임신한 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한빈 오빠는 분명 언니를 좋아하지 않았잖아. 엄마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거 아니었어? 두 사람의 결혼은 명목뿐인 관계라고... 분명히 언니가 그때 인정했었는데?’수많은 생각이 들어 머릿속은 복답했지만 성유정의 시선은 성유리에게 고정돼 있었다.‘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거잖아!’성유정은 가슴 깊숙한 곳을 누군가 날카로운 칼로 찌른 것처럼 아팠고 숨이 막힐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그래서 성유리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표정 관리를 할 틈도 없이 그 눈빛엔 마치 성유리를 갈기
오늘 밤 박한빈은 꽤 일찍 집에 돌아왔다.성유리가 저녁을 먹으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평소와 달리 박한빈이 집에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하지만 박한빈은 태연하게 그녀를 불렀다.“밥 먹자.”그제야 성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결혼한 이후, 두 사람이 이렇게 같이 저녁을 먹는 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물론 매달 한 번씩 박씨 저택에 돌아갈 때면 그들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그렇지만 성유리가 말하는 건 지금처럼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비록 아침에 성유정이 그녀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지만 지금 박한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성유리는 참 기뻤다.그녀가 바라는 건 사실 정말 많지 않았다.이렇게 박한빈의 곁에 앉아 있을 수 있고 박한빈이 자신을 위해 작은 자리를 내어주며 조금이나마 함께 있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그래서 성유리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저녁을 먹었고 결국 기다리다 못한 박한빈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일이 좀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넌 천천히 먹고 있어.”그 말을 끝으로 박한빈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는 성유리에게 대답하거나 반응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그대로 자리를 떠나버렸다.홀로 남겨진 성유리는 그대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박한빈은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왔다.그리고 이내 작은 상자를 성유리 앞에 내려놓았다.“선물.”예상치 못한 상황에 성유리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지금 성유리의 눈은 반짝였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유리의 반응이 너무 컸던 탓인지 박한빈의 눈빛도 순간 흔들렸다.“저... 주시는 거예요?”성유리가 묻고 나서야 박한빈이 정신을 차린 듯 짧게 대답했다.“응.”“고마워요.”성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매도 부드럽게 휘어졌다.원래도 예쁘고 화사했던 얼굴이 그 순간 더욱 생기 넘치게 변했다.박한빈은 너무 아름다운 성유리의 모습을 보며 무의식중에 눈을 가늘게 떴다.그와 눈이 마주치는
“언니!”모든 일이 끝난 후, 성유리가 저택을 떠나려 할 때 성유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성유정은 성유리의 손을 잡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엄마는 언니가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 방법이 조금 틀렸을 수도 있지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성유리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성유정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 언니랑 한빈 오빠... 아니, 형부 쪽은 내가 잘 설득해 볼게. 둘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잖아. 형부는 원래 언니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었으니까 이런 일은 서두를 필요 없어. 그렇지?”성유정은 정말 진심인 듯 보였지만 그 말속에 성유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박한빈이 자신에게 감정이 없다는 것을 계속 들먹였다.하지만 성유리는 굳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성유정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마워.”“나는 언니 동생이니까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성유정은 성유리의 팔짱을 끼며 계속 말했다.“오늘 별일 없지? 우리 둘이 쇼핑이라도 할까?”“아니, 몸이 좀 안 좋아서 쉬고 싶어.”“그렇구나. 원래는 언니랑 가면 형부랑 안 가려고 했는데...”성유정은 끼고 있던 목걸이를 보여주며 말했다.“이거 봐. 형부가 지난번에 사준 건데 2주도 안 돼서 고장 났어. 그래서 오늘 매장에 가서 제대로 얘기해야 돼.”성유리는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성유정에게 물었다.“그걸 왜 나한테 말해?”“언니랑 형부는 부부 사이잖아. 그럼 매장 사람들도 언니를 알 거야. 그리고 형부 카드도 언니한테 있는 거 아니야?”“나한테 없어.”성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고 성유정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자 실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구나. 그럼 난 먼저 가볼게.”성유리는 더 이상 성유정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차가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비로소 꽉 쥐고 있던 두 주먹을 풀었는데 손바닥에는 이미 손톱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 자국이 언제 남았는
성유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성유리를 한번 쓱 쳐다보았다.그 눈빛은 겉으로 보기엔 평온해 보였지만 성유리의 눈엔 조금은 도발적인 눈빛으로 보였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의 의미를 잘 알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성유정이 나타난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짧은 시간이었지만 윤청하와 점점 서먹해졌기 때문이다. 필경 수년간 엄마로서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애정을 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래서 성유정이 등장하자 성유리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성유리는 성유정의 눈빛을 무시하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성유정은 눈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방금 전 장면이 마음에 남았는지 식사 중에도 윤청하에게 계속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물어봤다.“그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거야.”윤청하는 태연하게 대답했고 성유리는 그녀가 이 사실을 성유정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그러나 식사를 마친 후 윤청하는 성유리에게 한약 한 그릇을 준비해 주었다.“이건 네 몸을 위한 거야.”윤청하가 계속 말했다.“내가 특별히 좋은 것만 넣었어.”성유리는 윤청하가 부엌에서 뭔가를 바삐 준비하던 이유가 바로 이 한약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그리고 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물밀듯 밀려왔다.감동을 받은 걸까? 어쩌면 오랜만에 느껴본 모성애 때문에 멍해졌을 수도 있지만 성유리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이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윤청하가 원하는 것은 그저 성유리의 뱃속 아이가 성씨 가문과 박씨 가문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뿐이었다.“저는...”성유리는 거절하려 했지만 윤청하가 그녀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그냥 내 말 들어. 너 지금 너무 말랐어. 임신...”윤청하는 더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성유정의 눈치를 본 후 빠르게 말을 바꿨다.“그건 쉬운 일이 아니야. 먼저 네 몸을 잘 챙기고 난 다음에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해야지.”성유리는 그 한약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 약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