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나가 마련해 준 집은 병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집들은 대부분 오래된 탓에 성유리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발에 묻은 피는 이미 닦아냈지만 피가 사라진 자리에 드러난 길고 깊은 상처는 마치 다른 감정 없이 벌어진 입처럼 보였다. 성유리는 어처구니없게도 빨간 상처 자국이 마치 웃고 있는 입 같아서 섬뜩했다. 겨우겨우 그녀가 탄 엘리베이터가 5층에 도착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성유리는 상처를 간단히 소독한 뒤 하늘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긴 치마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숨길 수 없었다. 특히 하늘이가 찾고 싶어 하던 작은 사자 인형을 찾으려고 몇 번이고 방을 오가며 헤매는 모습은 더더욱 다친 사람인 것이 티가 났다. 세 번째로 상자를 열었을 때도 인형이 보이지 않자 성유리는 점점 불안해졌고 찾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좌절하기도 했다. 결국 쇼핑 앱을 열어 같은 인형을 새로 사려고 했지만 화면을 본 순간 멍해졌다. 그 인형은 이미 단종되어 더 이상 구매할 수 없었던 것이다.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유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건가?”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박한빈이 서 있었다. 사하나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하늘이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를 따라온 이유는 대체 뭘까?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성유리는 박한빈의 눈빛 속에 담긴 조롱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박한빈은 어지러운 집 안 풍경을 보며 미간을 약간 찌푸리기까지 했다. 그의 기억 속 성유리는 어떤 집에서 살더라도 항상 집안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있는 공간은 항상 정돈된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정리되지 못한 수많은 상자들뿐이었다. 심지어 일부 상자는 그녀가 찾던 물건을 꺼내려다 열어 둔 상태라 더욱 어수선해 보였다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에 박한빈은 살짝 당황한 듯 표정이 굳어졌고 안색마저 어두워졌다. 바로 그때, 성유리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인형을 찾던 동작을 멈춘 성유리는 손을 쭉 뻗어 휴대폰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때, 박한빈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성유리의 휴대폰은 그의 힘에 밀려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떨어진 휴대폰 화면에는 발신자 이름이 또렷하게 보였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사하나였다. 박한빈의 입가에는 또다시 조롱 섞인 미소가 드리워지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는 사하나 씨랑 꽤 친해졌나 보네?”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 네가 사는 이 집도 사하나 씨가 마련해 준 거겠지? 지금 네가 이렇게 초라하게 살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난 네가 날 떠난 뒤 더 좋은 남자를 만나 멋지게 살 줄 알았어.” 그는 성유리를 비웃으며 계속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엔 연예인이랑 엮였었다며? 그런데 네가 팬들에게 둘러싸여 모욕당할 때는 그 연예인이 아무 말도 안 했더라? 참 안됐다.” 박한빈의 조롱은 끝이 없었고 그의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조금의 슬픈 감정도 없었다. 박한빈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슨 감정이라도 읽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성유리는 그저 조용히 서 있다가 그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말씀 끝나셨어요? 다 끝났으면 제 손 좀 놔줘요.” 그녀의 냉정한 반응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을 쥔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성유리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제 대답에서 뭘 얻고 싶은 거죠? 제가 울면서 잘못했다고 당신을 떠난 걸 후회한다고 말하길 원하세요?” “그렇게 해서 박한빈 씨가 얻고 싶은 게 뭔데요?” “박한빈 씨, 당신은 지금 충분히 성공했잖아요.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사실 아닌가요? 그런데 왜 이런 감정
성유리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사하나는 그녀의 다리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하늘이 앞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 먼저 말을 걸었다. “하늘이 방금 깨어났는데 언니가 안 보이니까 너무 투정을 부려서 제가 언니한테 전화했어요.” “봤어. 근데 그때는 내가 좀 바빠서 전화를 못 받았네.”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대답해 주며 하늘이의 침대맡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왜 그래? 우리 하늘이 엄마가 보고 싶었어?” 하늘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유리의 손을 바라봤다. “내 사자 인형은?” 방금까지 울었던 건지 하늘이의 눈은 조금 붉어져 있었고 목소리는 쉰 상태였다. 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꽉 깨물며 대답해 줬다. “미안해. 하늘아, 엄마가 사자 인형을 못 찾았어. 대신 엄마가 새로 하나 사 줄게. 그래도 괜찮을까?” “새로 산 게 예전 거랑 똑같아요?” 하늘이의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하늘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근데 저는 예전 그 사자 인형이 좋은데.” “알아. 엄마도... 다 알아.” 성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다시 가서 꼭 찾아볼게. 괜찮지? 걱정하지 마. 사자 인형은 그냥 숨바꼭질하는 거야. 엄마가 꼭 찾아줄게. 알았지?” 하늘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난 엄마 믿어.” 성유리는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제 밥 먹을 준비하자. 하늘이는 뭐 먹고 싶어? 엄마가 사다 줄게.” “엄마가 만든 만둣국 먹고 싶어요.” “알겠어. 지금 사 올게. 여기서 기다려줘. 대신 이모랑 같이 잘 놀고 있을래?”하늘이는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안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사하나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붙잡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다리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별일 아니야. 그냥 어디에 좀 부딪혀서 조금 아픈 것뿐이지.”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병원에서는 아무 말 없던 하늘이가 병원을 나서자마자 폴짝폴짝 뛰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뛰어다니면서도 성유리의 손을 놓지 않았고 가끔 뒤를 돌아보며 밝게 웃기까지 했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늘 뭐 먹고 싶어?” “엄마가 간장 베이스로 만든 닭 날개 먹고 싶어요.” “그래. 그럼 엄마랑 같이 마트 가서 재료 사자. 어때?” 하늘이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마트 가서 카트도 탈래요.” 성유리는 흔쾌히 허락했다.최근 하늘이가 살이 많이 빠져서 그런지 쇼핑카트에 앉아 있어도 성유리에게는 전혀 무리 되지 않았다. 마트의 밝은 조명 아래 하늘이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 성유리는 마음이 놓였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하늘이었다. “엄마! 저거 사고 싶어!” 하늘이는 오랜만에 이렇게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 나와서인지 잔뜩 흥분했고 작은 다리를 흔들며 쇼핑카트를 이리저리 움직이려 했다. 성유리는 조미료의 제조 일자를 확인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쇼핑카트가 그녀 손에서 벗어나 앞으로 미끄러져 갔다. 아이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자 성유리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잡으려 했지만 이미 카트는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갔다. “꺅!” 그때, 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마트 안을 울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성유리는 급히 쇼핑카트를 잡아당기며 연신 사과했다. “제가 아이를 잘 보지 못했네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여성은 화가 난 듯했지만 사람들이 많은 장소라서인지 억지로 화를 삭이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아이 데리고 나왔으면 조심해야죠!” “맞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성유리는 허리를 공손하게 숙이며 사과했다. 하늘이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달았는지 여자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박한빈의 차가운 말과 태도는 성유리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과거에도 수없이 박한빈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똑같이 이렇게 강압적으로 사과를 요구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한 이제는 그 일이 하늘이에게까지 반복되고 있었다. 성유리는 화가 나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지만 최대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이미 사과했습니다. 아직도 불만이 있으신가요?” 박한빈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잘못한 건 당신이 아니잖아요.” “제가 아이 엄마로서 대신 사과하는 게 잘못된 건가요?” “평생 아이 대신 잘못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지금 저를 훈계하시는 건가요? 제가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까지 당신에게 배울 필요 없지 않나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박한빈 옆에 있던 여자가 결국 태도를 바꾸며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박한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훈계라니? 그럴 자격도 없죠. 전 그냥 아이에게 잘못했으면 스스로 인정하라는 걸 가르치려는 것뿐입니다.” 성유리는 그의 말을 듣고 갑자기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아마도 애 아빠가 일찍 죽어서 아무도 이런 걸 가르쳐주지 못했나 봐요.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제가 잘 가르칠 테니.” 그녀는 말을 끝내고 하늘이를 데리고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성유리, 너 지금 저주하는 거야?” 잔뜩 격앙된 박한빈의 목소리에 옆에 있던 여자는 물론 하늘이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손 놔요.” 성유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지만 박한빈은 전혀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그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려고 했고 그 모습을 본 하늘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외쳤다. “우리 엄마 놔줘요!” 하늘이는 망설임 없이 쇼핑카트 안에서 일어나 박한빈의 팔을 붙잡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나... 나는 힘도 안 줬는데.” 여자는 넋이 나간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박한빈은 재빨리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 박한빈이 뒤늦게 성유리를 따라 마트를 나섰지만 그녀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거리에 있는 표지판을 힐끔 쳐다보고는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 “어디 가요? 박한빈 씨!” 여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박한빈은 듣는 체도 안 했다. 이내 박한빈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응급실에서도 성유리와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마음이 급해진 박한빈은 지나가는 간호사 한 명을 붙들고는 물었다. “여기 방금 어떤 여자가 아이와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두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인데 코피가 나고 있을 겁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는 이렇게 생겼고요.” 박한빈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잠금 화면에 있는 성유리의 사진을 간호사에게 보여줬다. “아, 그 백혈병 아이 말씀이시구나. 방금 바로 황 의사님이 계신 방으로 갔어요. 지금쯤 아마...” “뭐라고요?” 박한빈은 간호사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물었다. 그의 안색은 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고 목소리마저 떨렸다. 간호사는 그런 박한빈의 모습에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나 박한빈은 끈질기게 물었다. “그 여자아이가... 무슨 병이라고요?” “백혈병이요. 전에도 그것 때문에 계속 입원해 있다가 오늘 겨우 퇴원한 거로 알고 있는데...” 박한빈의 머릿속은 간호사의 한 마디에 새하얘졌다. ... 성유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병원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를 제외하고도 성유리는 자기 몸에서 나는 피비린내도 맡아버렸다. 하늘이가 성유리의 몸에 축 늘어져 병원에 온 바람에 그녀의 옷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어린아이는 백혈병 때문에 혈액을 응고하는 능력이 평범한 사람과는 현저히 떨어지기에 꼭 조심해야 한다고 의사는 신신당부했
사하나 또한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침에 금방 퇴원했잖아요. 근데 왜...” 사하나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성유리의 빨개진 두 눈을 발견하고는 억지로 말을 삼켰다. “내 잘못이야.”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늘이를 데리고 마트로 가지 말았어야 해. 그 사람들이랑 다투지도 말았어야 했어. 만약 내가 그때...” 성유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주먹을 어찌나 세게 잡고 있었는지 손톱은 이미 살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사하나는 얼른 성유리의 다친 손을 꼭 잡아주며 위로했다.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언니 잘못이 아니잖아요. 누구보다 더 하늘이를 사랑하고 아이를 보호하려는 사람이 언니라는 것도 제가 제일 잘 알고요.” 성유리는 침묵했다. 위로를 건네려던 사하나는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아, 깼어?” 그 순간, 성유리는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눈빛에 생기가 돌더니 하늘이의 두 손을 잡으며 물었다. “깼어? 아직도 아파?” 하늘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이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니 성유리는 하늘이가 억지로 고통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져 눈시울마저 붉어진 성유리에게 하늘이가 갑자기 말했다. “엄마.” 성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왜 그래?” “그 남자가... 아빠야?” 나지막한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사하나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오늘 그 사람 만나셨어요?” 성유리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지만 사하나는 이미 답을 들은 것 같았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하나가 펄쩍 뛰며 성유리이게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하늘이는 그 사람 때문에 사고를 당한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래요? 그 사람은?” “이제 그만 말해.” 성유리가 사하나를 진정시
박한빈은 마침 하늘이가 있는 병실 밖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사하나는 조롱하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박 대표님 아니신가? 설마 마트에서 한 일도 부족하다고 느껴서 여기까지 와서 교육자 흉내를 내시려고 그러는 건가요?”박한빈은 사하나의 말을 무시하고 성유리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할 말이 있어.”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사하나가 끼어들었다. “당신 뭐야? 무슨 자격으로 유리 언니한테 그런 말투로 말하는데?” 그러나 박한빈은 여전히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자신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는 박한빈의 태도는 사하나로 하여금 표정이 더 굳어지게 만들었다. 화가 나 무언가 더 말하려던 사하나를 가로막던 성유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이 좀 봐줘.” 사하나는 성유리의 말에 이를 악물고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는 그녀 옆을 지나쳤고 박한빈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병실 밖으로 걸어갔다. 반면, 박한빈은 병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손바닥만큼 작고 창백했고 수액이 꽂혀 있는 마른 손에는 혈관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뒤를 따라나섰다. 성유리는 병실 밖 의자에 앉아 있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이마와 귀 옆으로 흘러내린 잔머리가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박한빈은 그녀가 정말 많이 야위었음을 깨달았다. 성유리에게서는 병약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을 때의 초췌한 모습은 표절 문제로 동분서주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때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길 바랐다. 세간의 폭풍 같은 여론을 자신이 충분히 잠재울 수 있었고 책임감 없는 남자조차도 자신이 손봐서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사라지면 그의 팬들도 잠잠해질 터였다. 그래서 박한빈은 그저 그녀가 자신에게 한 마디라도 약한 소리를 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후
“저 아직 밥도 못 먹었는데 같이 가서 식사 하시겠습니까?”박한빈이 묻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그러나 미처 대답할 틈도 없이 박한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윤도준은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박한빈이 멀리서 가볍게 손짓을 한 뒤 그대로 성유리를 차에 태웠다.이 차는 어제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어제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차체는 마을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온통 흙탕물로 뒤덮여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차가 한참을 달린 뒤에야 성유리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엄마가 알게 되면 어떡해요!”“걱정 마십시오. 혹시 유리 씨한테 화를 내면 제가 가서 설명할 테니까.”“아마 엄마는 분명 당신을 때릴 거예요.”박한빈은 여전히 운전대를 잡은 채 성유리를 슬쩍 바라보았다.“왜요? 걱정되십니까?”“당연히 그건 아니에요.”성유리는 즉각 반박하더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박한빈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당신...”놀란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가만히 있으세요. 지금 저 운전 중이니까.”“게다가 손에 아직 상처가 있습니다.”그 말에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췄다.고개를 숙여 보니 그의 흰 셔츠 아래로 여러 겹의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리고 그 아래로 스며 나온 붉은 피가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아직 안 나았어요?”성유리는 무심결에 눈썹을 찌푸렸다.“걱정 마십시오. 안 아픕니다.”박한빈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런 그를 한참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결국 손을 거두었다.그러나 박한빈의 손이 닿아 있는 곳에서부터 이상한 감각이 퍼졌다.마치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성유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하더니 결국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박한빈이 성유리를 읍내로 데려간 것은 단순히 밥을 먹고 장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그녀를 병원에 데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그는 성유리가 자
할머니는 마을에서 작은 땅을 갖고 있었다.예전에는 옥수수를 심었지만 몇 년 전 이웃 마을에서 계약 농사를 제안하면서 딸기로 바꿨다.그러니 지금은 딸기 씨앗을 심을 시기였다.아침부터 소란을 피운 할머니를 성유리는 억지로 집에서 쉬게 하고 자신이 대신 밭일을 맡았다.일 자체는 힘들지 않았지만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다 보니 금세 피로가 몰려왔다.쪼그려 앉아 씨앗을 심던 성유리가 잠시 눈을 감고 쉬려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지금 뭐 하십니까?”고개를 들어보니 박한빈이 찌푸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성유리는 순간 얼어붙었고 이내 허둥지둥 그의 손을 밀어냈다.그리고는 황급히 몇 걸음 물러나 박한빈과의 거리를 벌린 후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저... 근데 왜 여기 계세요?”박한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절 무서워하시는 겁니까?”“아... 아니에요!”성유리는 서둘러 부정했다.마치 그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며 말이다.“다만... 엄마가 당신이랑 같이 있는 걸 싫어해요.”한참을 망설이다가 성유리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엄마가 화낼 거예요.”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성유리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왜죠? 그쪽 어머니는 제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나 봅니다?”“네.”“하지만 유리 씨는 제가 나쁜 놈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요?”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을 따르는 겁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의 질문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지, 아니면 그냥 혼란스러운 건지 알 수 없지만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게다가 유리 씨가 말하지 않으면 어머니는 모를 텐데 말이죠.”“그럼... 그건 속이는 거잖아요.”“속이는 게 아닙니다. 그냥 말하지 않는 것뿐이지.”성유리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박한빈 또한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여기
박한빈은 많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환경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더구나, 이번에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창문 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누군가를 쫓아내고 있었다.이미 백발이 성성했지만 기운만큼은 넘쳤다.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몰아내는 동안, 마을 안팎 사람들이 소란에 놀라 몰려들었고 할머니는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까지 싸잡아 한바탕 호통을 쳤다.그 뒤에는 성유리가 조용히 서 있었다.마치 어미 닭에게 보호받는 병아리처럼.주변을 궁금한 듯 둘러보면서도 절대 할머니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박한빈이 그 장면을 바라보던 순간, 성유리도 마침 그의 시선을 느낀 듯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움찔하더니 황급히 고개를 돌려 할머니의 손을 붙잡았다.소동이 한참 이어진 끝에, 할머니는 성유리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쾅!그 문이 닫히는 소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컸다.그러고 나서야, 할머니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겁먹지 마라. 저런 놈이 뭐라고!”“우리 딸처럼 좋은 아가씨가 결혼할 상대를 못 찾을 것 같아? 걱정 마. 엄마가 더 좋은 사람 골라줄 테니!”“엄마... 사실 저는 결혼 서두를 생각 없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말했다.“그건 안 돼!”할머니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단칼에 잘랐다.“여자는 크면 시집가야 하는 법이야.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으면 어쩌자는 거냐?”“게다가 내가 지금은 네 곁을 지켜주지만 언젠가는 나도 떠나야 한다. 그때 네가 혼자 남으면 누가 널 지켜주겠어?”엄마의 말에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밖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야?”아직 화가 덜 풀린 할머니는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하지만 문밖의 사람은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안녕하세요.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이번엔 또 누구야?”할머니는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단정한 흰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
그 목소리에 성유리는 황급히 돌아섰는데 마치 얼굴에 ‘당황’이라는 글자를 적어 놓은 듯했다.할머니는 가느다란 눈을 좁히며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다녀온 거야?”“저... 밖에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서 좀 보고 오느라...”“고양이?”할머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이 마을에 고양이 몇 마리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해?”성유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행히 할머니도 깊이 따지지는 않았다.“얼른 자라.”그저 짧은 말만 남긴 채, 제 방으로 돌아갔다.성유리도 조용히 뒤따라 방으로 향했다.그녀의 방 창문은 길 건너편 박한빈이 머무는 집과 마주 보고 있었다.그곳의 창문에는 어제 새롭게 창호지를 발라놓아 이제 더 이상 구멍이 나 있지 않았다.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노란빛 조명은 성유리의 방 조명과 똑같은 따뜻한 색이었다.성유리는 그 창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누워 잠을 청했다.그렇게 밤이 지나갔다.할머니는 원래 잠이 적었기에 해가 뜨기도 전에 괭이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성유리는 침구를 정리한 후 부엌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계란을 깨려고 고개를 숙인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는 분명 할머니의 것이 아니었다.성유리는 순간 긴장했다.그래서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고 문밖으로 나섰다.그러나 마주한 사람을 보고는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아주머니, 어쩐 일이세요?”“너희 어머니 계시니? 볼 일이 있어서 왔어.”여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아마 밭에 계실 거예요. 불러올까요?”“그래, 다녀와.”여자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그러더니 성유리를 한 번 훑어보곤,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렸다.하지만 성유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별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마침 그 순간, 할머니가 밭에서 돌아오고 있었다.두 사람은 길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그러다 에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흠, 듣고 보니 꽤 재미있을 것 같군.”“그럼 이 일은 네게 맡길게.”“뭐라고?”“너도 알다시피 난 이미 죽은 사람이야. 그리고 사씨 가문 쪽도...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내가 직접 손을 대긴 어려워.”“예전부터 네가 한국 시장에 들어가고 싶어 했잖아? 지금이 바로 기회 아닌가?”에릭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박한빈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이 마을 사람들은 일찍 잠드는 편이었다.지금은 사방이 조용했기에 그 작은 소리조차 유난히 또렷하게 들려왔다.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내려놓고 물었다.“누구십니까?”아직도 업무 모드였던 탓에 목소리에는 저절로 냉기가 서려 있었다.그랬더니 문밖에서 들리던 노크 소리가 멈췄다.하지만 대답은 없었다.불안해진 박한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연정우 씨가 또 사람을 보낸 걸까?’그는 반사적으로 방 안을 둘러보며 무기로 쓸 만한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그러나 바로 그때, 문밖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저예요.”박한빈은 순간 멍해졌다.그리고는 에릭이 뭐라고 하는지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대로 전화를 끊고 문 쪽으로 향했다.느슨하게 걸린 낡은 나무문을 밀어 열자 문 앞에는 성유리가 서 있었다.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면 한 그릇이 들려 있었고 발치에는 따뜻한 물이 담긴 주전자도 놓여 있었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성유리가 조심스레 물었다.어딘가 머뭇거리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는 이내 시선을 떨구며 덧붙였다.“저... 저녁을 드셨는지 몰라서요. 그리고 여기 불 때는 곳도 없길래... 그냥 면을 좀 끓였어요. 따뜻한 물도요.”박한빈은 그녀가 들고 있는 그릇을 바라보았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둔탁하게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박한빈이 문득 물었다.“제가 누구인지 아십니까?”성유리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마을에서는 신호가 잘 잡히지 않았다.윤도준이 일부러 사람들을 데려와 집을 정리해 준 덕분에 겨우 머물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신호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다행히 박한빈은 집 안 구석구석을 돌며 신호가 잡히는 곳을 찾아냈고 마침내 에릭과의 통화를 연결할 수 있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에릭은 비꼬듯이 물었다.“난 또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네?”“실망시켜서 미안한데 난 아주 잘 살아 있었어.”박한빈이 대답했다.“난 안 좋아.”에릭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지금 회사 쪽에서 어떤 난리가 났는지 알아? 전부 나한테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고! 이제야 확실히 알겠어. 네가 전에 말했던 불편해서 직접 나서지 못한다는 말, 결국 다 핑계였잖아. 나보고 대신 뒤집어쓰라는 거였지?”“일이 끝나면 내 몫의 이익 절반을 넘기지.”박한빈이 제시한 그 금액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하지만 돈은 이미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나 다름없었다.그들이 하는 일에서 중요한 건 오직 짜릿함이었다.애초에 한 번에 일을 끝낼 수도 있었다.에릭은 심지어 축하 파티에서 마실 술까지 이미 골라 두었었다.그런데 갑자기 박한빈이이 모든 걸 멈추라고 했다.그 순간, 에릭은 마치 새벽녘 힘차게 울 준비를 하던 수탉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목을 눌린 듯한 기분이었다.숨이 막히고 무엇보다 기분이 몹시 나빴다.그때 박한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만약 네가 파티장에서 사고 치지만 않았어도 내가 너를 급하게 건지러 가지 않았어도, 성유리는 애초에 위험에 빠지지 않았을 거야.”“뭐야? 지금 나한테 책임이라도 묻겠다는 거냐?”“책임을 묻겠다는 건 아냐. 다만 우리나라엔 이런 말이 있지. 한 방울의 은혜에도 샘물처럼 보답하라는 말.”“너...”“됐고, 본론부터 들어가자.”박한빈이 그의 말을 뚝 끊어버렸다.“성유리를 찾았어.”“오, 그건 축하할 일이네.”그러나 에릭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기쁨도 담겨 있지 않았다.오히려 실망한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그도 누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저희 또 만났네요.”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여기 사는 겁니까?”성유리는 묻는 남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여기 삽니다.”박한빈의 대답에 성유리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네. 오늘 막 이사 왔거든요.”“아...”성유리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어딘가 찜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런데 이 집, 꽤 오래됐어요. 비라도 오면 새는 곳이 있을지도 몰라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이상했다. 정작 상대방의 이름조차 모르는 데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도 박한빈이 이곳에 산다는 말에 뭔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이 집과 그 남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그럼 그는 어디에 살아야 할까?성유리는 스스로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할머니는 박한한이 성유리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 순간, 할머니의 표정이 확 변했다.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휘두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이 망할 놈아! 감히 내 딸한테 손을 대?”“어서 손 안 놔! 당장 안 놓으라고!”박한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성유리가 먼저 할머니를 꼭 끌어안았다.“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엄마, 진정하세요. 그냥 얘기 좀 나누고 있었던 것뿐이니까.”할머니는 조금 전까지 윤도준을 쫓아 몇 바퀴나 뛰었는지 이미 숨이 가빠져 있었다.그런데도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박한빈을 보는 시선엔 노골적인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마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엄마, 우리 들어가서 밥 먹어요.”성유리가 부드럽게 말했다.할머니가 아직 노려보는 와중에도 성유리는 서둘러 상황을 정리했다.“그쪽도 오늘 새로 이사 온 이웃이에요.”그 말에 할머니의 주의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성유리의 엄마라고 주장하는 할머니는 박한빈을 다시 한번 훑어보더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
“설아?”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성유리는 정신을 차렸다.“네. 엄마, 왜 그러세요?”“그건 내가 물어볼 말이지.”할머니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성유리의 밥그릇을 탁탁 두들겼다.“밥 먹는데 무슨 넋을 놓고 앉아 있어?”성유리가 그 말에 재빨리 고개를 숙여 밥을 먹기 시작했다.그럼에도 할머니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오늘 일에 대해 생각하는 거지? 그 경찰들 다 헛소리 지껄이는 거야.”“어쨌든 결혼 날짜는 이미 정해졌으니 결혼식은 먼저 치러. 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 만큼 결혼하자마자 빨리 애 낳아. 내가 돌봐줄 수 있게.”“제가 누구랑 결혼해요?”성유리가 물었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복섭이지! 예물도 이미 받았는데 뭘 더 바라?”할머니의 언성이 높아지며 이마에 주름이 깊어졌다.그 모습을 본 성유리가 재빨리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아니, 그냥... 물어본 거예요.”“네가 지금 행복에 겨워서 정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예전에 다 정해진 일 아니었니? 게다가 너랑 복섭이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데 결혼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어?”“제가 우섭이랑 오래 사귀었어요?”“그럼! 너희 어릴 때부터 함께 목욕도 했잖아. 몇 년이 아니라 2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거야!”할머니의 말이 끝나가도 성유리는 아무런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가 애써 기억을 더듬으려는 순간, 머리가 격렬하게 아파지기 시작했다.고통을 무릅쓰고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밖에서 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마을 길이 고르지 못해 차체가 격하게 흔들리며 지나가더니 성유리와 할머니가 앉아 있는 식탁 앞으로 먼지가 고스란히 날려왔다.그러자 할머니의 얼굴이 확 붉어졌고 젓가락까지 내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눈이 안 달렸냐! 밥 먹는데 먼지를 날리다니! 망할 놈의 새끼들아!”시간이 지나도 그칠 줄 모르는 할머니의 욕설은 매 한 마디가 다 아주 더러운 말들이었다.마을 누구나 아는 할머니의 억척스러움은
“할머니, 보세요. 이게 바로 박한빈 씨의 아내 사진인데 여성분이랑...”“무슨 사진? 저 남자 아내가 생긴 거랑 우리 설이랑은 무슨 상관인데? 이 애는 내 딸이야!”“알겠습니다만 의혹이 제기된 이상 검사 한번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DNA 검사라도...”“DNA는 무슨 DNA! 너희들 다 미친 거 아냐? 내 딸이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왜 남의 아내가 되냐고? 설아, 따라와!”할머니는 성유리의 손을 단호히 잡아끌며 몸을 돌렸다. 윤도준이 막 말을 걸려는 순간 박한빈이 오히려 그를 제지했다.“박한빈 씨, 이건...”“저 사람들 사는 마을이 어딥니까?”박한빈이 한없이 차가운 태도로 물었다.“네?”“저 사람들이 사는 마을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습니다.”...세상에 닮은 사람이 둘 있는 건 흔한 일이란 말을 누구나 했다. 하지만 박한빈은 확신했다. 자신이 틀릴 리 없다는 것을.그녀의 눈동자 깊이 스민 습관, 손가락을 깨무는 버릇까지 모든 게 36일 전 사라진 아내와 일치했다.사실 그는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갈 수도 있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만 한다면 설령 그녀가 저항해도 가장 가까운 신분으로 법적 조치가 가능했다.그러나 박한빈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이 선택을 하기까지 결정했던 순간은 성유리가 노파의 품으로 달려가 엄마라고 부르는 모습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성유리가 어린 시절 엄마에게서 느끼지 못한 가족의 온기를 이 할머니에게서 찾고 있음을.병상에 누워 생명이 사라져가는 엄마와 달리 옆에서 챙겨주는 노파의 따스함이 지금 성유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이다.만약 강제로 성유리를 데려간다면 그녀가 무조건 자신을 혐오하고 증오할 것이라고 믿었다.게다가 성유리를 데려간 사람들 또한 잘해주는 것 같았고 그녀 스스로도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가짜라고 한들 동년의 아쉬움과 공허한 마음 한구석을 채워주고 있으니 박한빈은 어쩌면 성유리에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당연하게도 염우섭이라는 남자의 존재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