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사하나는 그녀의 다리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하늘이 앞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 먼저 말을 걸었다. “하늘이 방금 깨어났는데 언니가 안 보이니까 너무 투정을 부려서 제가 언니한테 전화했어요.” “봤어. 근데 그때는 내가 좀 바빠서 전화를 못 받았네.”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대답해 주며 하늘이의 침대맡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왜 그래? 우리 하늘이 엄마가 보고 싶었어?” 하늘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유리의 손을 바라봤다. “내 사자 인형은?” 방금까지 울었던 건지 하늘이의 눈은 조금 붉어져 있었고 목소리는 쉰 상태였다. 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꽉 깨물며 대답해 줬다. “미안해. 하늘아, 엄마가 사자 인형을 못 찾았어. 대신 엄마가 새로 하나 사 줄게. 그래도 괜찮을까?” “새로 산 게 예전 거랑 똑같아요?” 하늘이의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하늘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근데 저는 예전 그 사자 인형이 좋은데.” “알아. 엄마도... 다 알아.” 성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다시 가서 꼭 찾아볼게. 괜찮지? 걱정하지 마. 사자 인형은 그냥 숨바꼭질하는 거야. 엄마가 꼭 찾아줄게. 알았지?” 하늘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난 엄마 믿어.” 성유리는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제 밥 먹을 준비하자. 하늘이는 뭐 먹고 싶어? 엄마가 사다 줄게.” “엄마가 만든 만둣국 먹고 싶어요.” “알겠어. 지금 사 올게. 여기서 기다려줘. 대신 이모랑 같이 잘 놀고 있을래?”하늘이는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안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사하나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붙잡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다리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별일 아니야. 그냥 어디에 좀 부딪혀서 조금 아픈 것뿐이지.”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병원에서는 아무 말 없던 하늘이가 병원을 나서자마자 폴짝폴짝 뛰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뛰어다니면서도 성유리의 손을 놓지 않았고 가끔 뒤를 돌아보며 밝게 웃기까지 했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늘 뭐 먹고 싶어?” “엄마가 간장 베이스로 만든 닭 날개 먹고 싶어요.” “그래. 그럼 엄마랑 같이 마트 가서 재료 사자. 어때?” 하늘이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마트 가서 카트도 탈래요.” 성유리는 흔쾌히 허락했다.최근 하늘이가 살이 많이 빠져서 그런지 쇼핑카트에 앉아 있어도 성유리에게는 전혀 무리 되지 않았다. 마트의 밝은 조명 아래 하늘이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 성유리는 마음이 놓였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하늘이었다. “엄마! 저거 사고 싶어!” 하늘이는 오랜만에 이렇게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 나와서인지 잔뜩 흥분했고 작은 다리를 흔들며 쇼핑카트를 이리저리 움직이려 했다. 성유리는 조미료의 제조 일자를 확인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쇼핑카트가 그녀 손에서 벗어나 앞으로 미끄러져 갔다. 아이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자 성유리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잡으려 했지만 이미 카트는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갔다. “꺅!” 그때, 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마트 안을 울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성유리는 급히 쇼핑카트를 잡아당기며 연신 사과했다. “제가 아이를 잘 보지 못했네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여성은 화가 난 듯했지만 사람들이 많은 장소라서인지 억지로 화를 삭이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아이 데리고 나왔으면 조심해야죠!” “맞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성유리는 허리를 공손하게 숙이며 사과했다. 하늘이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달았는지 여자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박한빈의 차가운 말과 태도는 성유리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과거에도 수없이 박한빈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똑같이 이렇게 강압적으로 사과를 요구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한 이제는 그 일이 하늘이에게까지 반복되고 있었다. 성유리는 화가 나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지만 최대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이미 사과했습니다. 아직도 불만이 있으신가요?” 박한빈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잘못한 건 당신이 아니잖아요.” “제가 아이 엄마로서 대신 사과하는 게 잘못된 건가요?” “평생 아이 대신 잘못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지금 저를 훈계하시는 건가요? 제가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까지 당신에게 배울 필요 없지 않나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박한빈 옆에 있던 여자가 결국 태도를 바꾸며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박한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훈계라니? 그럴 자격도 없죠. 전 그냥 아이에게 잘못했으면 스스로 인정하라는 걸 가르치려는 것뿐입니다.” 성유리는 그의 말을 듣고 갑자기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아마도 애 아빠가 일찍 죽어서 아무도 이런 걸 가르쳐주지 못했나 봐요.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제가 잘 가르칠 테니.” 그녀는 말을 끝내고 하늘이를 데리고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성유리, 너 지금 저주하는 거야?” 잔뜩 격앙된 박한빈의 목소리에 옆에 있던 여자는 물론 하늘이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손 놔요.” 성유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지만 박한빈은 전혀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그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려고 했고 그 모습을 본 하늘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외쳤다. “우리 엄마 놔줘요!” 하늘이는 망설임 없이 쇼핑카트 안에서 일어나 박한빈의 팔을 붙잡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나... 나는 힘도 안 줬는데.” 여자는 넋이 나간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박한빈은 재빨리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 박한빈이 뒤늦게 성유리를 따라 마트를 나섰지만 그녀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거리에 있는 표지판을 힐끔 쳐다보고는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 “어디 가요? 박한빈 씨!” 여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박한빈은 듣는 체도 안 했다. 이내 박한빈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응급실에서도 성유리와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마음이 급해진 박한빈은 지나가는 간호사 한 명을 붙들고는 물었다. “여기 방금 어떤 여자가 아이와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두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인데 코피가 나고 있을 겁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는 이렇게 생겼고요.” 박한빈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잠금 화면에 있는 성유리의 사진을 간호사에게 보여줬다. “아, 그 백혈병 아이 말씀이시구나. 방금 바로 황 의사님이 계신 방으로 갔어요. 지금쯤 아마...” “뭐라고요?” 박한빈은 간호사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물었다. 그의 안색은 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고 목소리마저 떨렸다. 간호사는 그런 박한빈의 모습에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나 박한빈은 끈질기게 물었다. “그 여자아이가... 무슨 병이라고요?” “백혈병이요. 전에도 그것 때문에 계속 입원해 있다가 오늘 겨우 퇴원한 거로 알고 있는데...” 박한빈의 머릿속은 간호사의 한 마디에 새하얘졌다. ... 성유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병원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를 제외하고도 성유리는 자기 몸에서 나는 피비린내도 맡아버렸다. 하늘이가 성유리의 몸에 축 늘어져 병원에 온 바람에 그녀의 옷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어린아이는 백혈병 때문에 혈액을 응고하는 능력이 평범한 사람과는 현저히 떨어지기에 꼭 조심해야 한다고 의사는 신신당부했
사하나 또한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침에 금방 퇴원했잖아요. 근데 왜...” 사하나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성유리의 빨개진 두 눈을 발견하고는 억지로 말을 삼켰다. “내 잘못이야.”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늘이를 데리고 마트로 가지 말았어야 해. 그 사람들이랑 다투지도 말았어야 했어. 만약 내가 그때...” 성유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주먹을 어찌나 세게 잡고 있었는지 손톱은 이미 살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사하나는 얼른 성유리의 다친 손을 꼭 잡아주며 위로했다.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언니 잘못이 아니잖아요. 누구보다 더 하늘이를 사랑하고 아이를 보호하려는 사람이 언니라는 것도 제가 제일 잘 알고요.” 성유리는 침묵했다. 위로를 건네려던 사하나는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아, 깼어?” 그 순간, 성유리는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눈빛에 생기가 돌더니 하늘이의 두 손을 잡으며 물었다. “깼어? 아직도 아파?” 하늘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이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니 성유리는 하늘이가 억지로 고통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져 눈시울마저 붉어진 성유리에게 하늘이가 갑자기 말했다. “엄마.” 성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왜 그래?” “그 남자가... 아빠야?” 나지막한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사하나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오늘 그 사람 만나셨어요?” 성유리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지만 사하나는 이미 답을 들은 것 같았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하나가 펄쩍 뛰며 성유리이게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하늘이는 그 사람 때문에 사고를 당한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래요? 그 사람은?” “이제 그만 말해.” 성유리가 사하나를 진정시
박한빈은 마침 하늘이가 있는 병실 밖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사하나는 조롱하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박 대표님 아니신가? 설마 마트에서 한 일도 부족하다고 느껴서 여기까지 와서 교육자 흉내를 내시려고 그러는 건가요?”박한빈은 사하나의 말을 무시하고 성유리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할 말이 있어.”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사하나가 끼어들었다. “당신 뭐야? 무슨 자격으로 유리 언니한테 그런 말투로 말하는데?” 그러나 박한빈은 여전히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자신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는 박한빈의 태도는 사하나로 하여금 표정이 더 굳어지게 만들었다. 화가 나 무언가 더 말하려던 사하나를 가로막던 성유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이 좀 봐줘.” 사하나는 성유리의 말에 이를 악물고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는 그녀 옆을 지나쳤고 박한빈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병실 밖으로 걸어갔다. 반면, 박한빈은 병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손바닥만큼 작고 창백했고 수액이 꽂혀 있는 마른 손에는 혈관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뒤를 따라나섰다. 성유리는 병실 밖 의자에 앉아 있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이마와 귀 옆으로 흘러내린 잔머리가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박한빈은 그녀가 정말 많이 야위었음을 깨달았다. 성유리에게서는 병약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을 때의 초췌한 모습은 표절 문제로 동분서주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때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길 바랐다. 세간의 폭풍 같은 여론을 자신이 충분히 잠재울 수 있었고 책임감 없는 남자조차도 자신이 손봐서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사라지면 그의 팬들도 잠잠해질 터였다. 그래서 박한빈은 그저 그녀가 자신에게 한 마디라도 약한 소리를 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후
방 안의 온기가 완전히 가신 것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고, 성유리는 몇 분간 누워 있다가 겨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바닥에 흩어진 옷을 주우려 했다.박한빈은 오늘따라 유난히 거칠었다. 그래서인지 성유리는 한참 동안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몇 번이나 잠옷 단추를 끼우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려 했지만 잘 안되었다.곧이어 박한빈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는 키가 훤칠한 데다가 이목구비까지 뚜렷해서 누가 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방금 샤워를 마친 박한빈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나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그의 복근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성유리가 아직도 방에 있는 것을 발견한 박한빈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성유리는 박한빈의 눈을 피하며 여전히 단추를 잠그려 애쓰고 있었다.“내일이 바로 유정이가 퇴원하는 날이야.”박한빈이 성유리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퇴원 절차를 밟아주고 집에 데려와 줘. 어머님께는 한동안 여기에 머물게 할 거라고 말씀드렸어.”성유리는 단추를 만지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나서 뒤돌아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지금 성유리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2년째 부부로 지내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자, 금성 지화 그룹의 후계자 박한빈이었다.그리고 방금 그가 말한 성유정은 성유리와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었다.다섯 살 때, 성유리는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었고 그렇게 16년 가까이 실종됐었다. 열여섯이 되어서야 성씨 가문에 돌아왔을 때, 성씨 가문에는 이미 또 다른 딸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바로 성유정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동생’이 되었다.아버지는 성유리가 실종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윤청하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비슷한 나이대인 성유정을 입양했었다. 16년이 지나고 성유리가 다시 성씨 집안에 돌아오고 서로를 그리워했던 한 가족이 다시 상봉하게 되었지만, 그 후의 날들은 예상만큼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원유진은 성유정의 오랜 친구이자, 재벌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성유정과 함께 자라며 박한빈과 성유정의 관계를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다.하지만 성유리가 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 현실이었기에 원유진은 성유리에게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성유리가 문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하거나 민망한 기색을 찾아보기 어려웠다.오히려 성유정이 먼저 말을 돌렸다.“언니, 왔어?”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데리러 왔어. 짐은 다 챙긴 거지?”“다 챙겼어. 이제 출발하면 될 것 같아.”성유정은 평소처럼 순종적인 모습을 보였다.하지만 원유진은 조용히 넘어갈 리 없었다. 그녀는 참지 않고 존댓말까지 해가며 비아냥거렸다.“사모님, 박 대표님은 어디 계신가요? 유정이가 퇴원하는데 설마 안 오셨어요?”“출근했어. 바쁜가 봐...”“정말 바쁜 거 맞아? 아니면 누군가가 바가지를 긁어대서 오고 싶어도 못 온 건 아닐지 모르겠네.”원유진의 말이 끝나자, 성유정이 나지막하게 말했다.“유진아, 그만해.”그러나 원유진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뭘 그만해? 듣고 양심에 찔리기라도 했을까 봐?”성유리는 원유진을 가볍게 무시하고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에서 박한빈의 번호를 찾아 원유진에게 내밀었다.“뭐 하는 거야?”성유리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야! 너...”원유진이 화를 내려고 하자, 성유정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언니랑 싸우지 마.”원유진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넌 정말 착한 거니? 아니면 바보인 거니? 성유리는 네 것을 탐내고 채간 사람이야!”성유리는 원유진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정의 짐을 들어 앞장서서 병실에서 나갔다.차에 타자마자 윤청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리야, 유정이 데리러 갔어?”친딸과의 통화였지만 윤청하의 목소리와 말투는 어색했다.“네.”“유정이는 좀 어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규
박한빈은 마침 하늘이가 있는 병실 밖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사하나는 조롱하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박 대표님 아니신가? 설마 마트에서 한 일도 부족하다고 느껴서 여기까지 와서 교육자 흉내를 내시려고 그러는 건가요?”박한빈은 사하나의 말을 무시하고 성유리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할 말이 있어.”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사하나가 끼어들었다. “당신 뭐야? 무슨 자격으로 유리 언니한테 그런 말투로 말하는데?” 그러나 박한빈은 여전히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자신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는 박한빈의 태도는 사하나로 하여금 표정이 더 굳어지게 만들었다. 화가 나 무언가 더 말하려던 사하나를 가로막던 성유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이 좀 봐줘.” 사하나는 성유리의 말에 이를 악물고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는 그녀 옆을 지나쳤고 박한빈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병실 밖으로 걸어갔다. 반면, 박한빈은 병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손바닥만큼 작고 창백했고 수액이 꽂혀 있는 마른 손에는 혈관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뒤를 따라나섰다. 성유리는 병실 밖 의자에 앉아 있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이마와 귀 옆으로 흘러내린 잔머리가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박한빈은 그녀가 정말 많이 야위었음을 깨달았다. 성유리에게서는 병약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을 때의 초췌한 모습은 표절 문제로 동분서주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때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길 바랐다. 세간의 폭풍 같은 여론을 자신이 충분히 잠재울 수 있었고 책임감 없는 남자조차도 자신이 손봐서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사라지면 그의 팬들도 잠잠해질 터였다. 그래서 박한빈은 그저 그녀가 자신에게 한 마디라도 약한 소리를 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후
사하나 또한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침에 금방 퇴원했잖아요. 근데 왜...” 사하나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성유리의 빨개진 두 눈을 발견하고는 억지로 말을 삼켰다. “내 잘못이야.”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늘이를 데리고 마트로 가지 말았어야 해. 그 사람들이랑 다투지도 말았어야 했어. 만약 내가 그때...” 성유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주먹을 어찌나 세게 잡고 있었는지 손톱은 이미 살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사하나는 얼른 성유리의 다친 손을 꼭 잡아주며 위로했다.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언니 잘못이 아니잖아요. 누구보다 더 하늘이를 사랑하고 아이를 보호하려는 사람이 언니라는 것도 제가 제일 잘 알고요.” 성유리는 침묵했다. 위로를 건네려던 사하나는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아, 깼어?” 그 순간, 성유리는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눈빛에 생기가 돌더니 하늘이의 두 손을 잡으며 물었다. “깼어? 아직도 아파?” 하늘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이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니 성유리는 하늘이가 억지로 고통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져 눈시울마저 붉어진 성유리에게 하늘이가 갑자기 말했다. “엄마.” 성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왜 그래?” “그 남자가... 아빠야?” 나지막한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사하나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오늘 그 사람 만나셨어요?” 성유리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지만 사하나는 이미 답을 들은 것 같았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하나가 펄쩍 뛰며 성유리이게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하늘이는 그 사람 때문에 사고를 당한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래요? 그 사람은?” “이제 그만 말해.” 성유리가 사하나를 진정시
“나... 나는 힘도 안 줬는데.” 여자는 넋이 나간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박한빈은 재빨리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 박한빈이 뒤늦게 성유리를 따라 마트를 나섰지만 그녀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거리에 있는 표지판을 힐끔 쳐다보고는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 “어디 가요? 박한빈 씨!” 여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박한빈은 듣는 체도 안 했다. 이내 박한빈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응급실에서도 성유리와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마음이 급해진 박한빈은 지나가는 간호사 한 명을 붙들고는 물었다. “여기 방금 어떤 여자가 아이와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두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인데 코피가 나고 있을 겁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는 이렇게 생겼고요.” 박한빈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잠금 화면에 있는 성유리의 사진을 간호사에게 보여줬다. “아, 그 백혈병 아이 말씀이시구나. 방금 바로 황 의사님이 계신 방으로 갔어요. 지금쯤 아마...” “뭐라고요?” 박한빈은 간호사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물었다. 그의 안색은 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고 목소리마저 떨렸다. 간호사는 그런 박한빈의 모습에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나 박한빈은 끈질기게 물었다. “그 여자아이가... 무슨 병이라고요?” “백혈병이요. 전에도 그것 때문에 계속 입원해 있다가 오늘 겨우 퇴원한 거로 알고 있는데...” 박한빈의 머릿속은 간호사의 한 마디에 새하얘졌다. ... 성유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병원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를 제외하고도 성유리는 자기 몸에서 나는 피비린내도 맡아버렸다. 하늘이가 성유리의 몸에 축 늘어져 병원에 온 바람에 그녀의 옷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어린아이는 백혈병 때문에 혈액을 응고하는 능력이 평범한 사람과는 현저히 떨어지기에 꼭 조심해야 한다고 의사는 신신당부했
박한빈의 차가운 말과 태도는 성유리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과거에도 수없이 박한빈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똑같이 이렇게 강압적으로 사과를 요구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한 이제는 그 일이 하늘이에게까지 반복되고 있었다. 성유리는 화가 나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지만 최대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이미 사과했습니다. 아직도 불만이 있으신가요?” 박한빈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잘못한 건 당신이 아니잖아요.” “제가 아이 엄마로서 대신 사과하는 게 잘못된 건가요?” “평생 아이 대신 잘못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지금 저를 훈계하시는 건가요? 제가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까지 당신에게 배울 필요 없지 않나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박한빈 옆에 있던 여자가 결국 태도를 바꾸며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박한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훈계라니? 그럴 자격도 없죠. 전 그냥 아이에게 잘못했으면 스스로 인정하라는 걸 가르치려는 것뿐입니다.” 성유리는 그의 말을 듣고 갑자기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아마도 애 아빠가 일찍 죽어서 아무도 이런 걸 가르쳐주지 못했나 봐요.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제가 잘 가르칠 테니.” 그녀는 말을 끝내고 하늘이를 데리고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성유리, 너 지금 저주하는 거야?” 잔뜩 격앙된 박한빈의 목소리에 옆에 있던 여자는 물론 하늘이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손 놔요.” 성유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지만 박한빈은 전혀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그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려고 했고 그 모습을 본 하늘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외쳤다. “우리 엄마 놔줘요!” 하늘이는 망설임 없이 쇼핑카트 안에서 일어나 박한빈의 팔을 붙잡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병원에서는 아무 말 없던 하늘이가 병원을 나서자마자 폴짝폴짝 뛰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뛰어다니면서도 성유리의 손을 놓지 않았고 가끔 뒤를 돌아보며 밝게 웃기까지 했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늘 뭐 먹고 싶어?” “엄마가 간장 베이스로 만든 닭 날개 먹고 싶어요.” “그래. 그럼 엄마랑 같이 마트 가서 재료 사자. 어때?” 하늘이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마트 가서 카트도 탈래요.” 성유리는 흔쾌히 허락했다.최근 하늘이가 살이 많이 빠져서 그런지 쇼핑카트에 앉아 있어도 성유리에게는 전혀 무리 되지 않았다. 마트의 밝은 조명 아래 하늘이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 성유리는 마음이 놓였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하늘이었다. “엄마! 저거 사고 싶어!” 하늘이는 오랜만에 이렇게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 나와서인지 잔뜩 흥분했고 작은 다리를 흔들며 쇼핑카트를 이리저리 움직이려 했다. 성유리는 조미료의 제조 일자를 확인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쇼핑카트가 그녀 손에서 벗어나 앞으로 미끄러져 갔다. 아이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자 성유리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잡으려 했지만 이미 카트는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갔다. “꺅!” 그때, 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마트 안을 울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성유리는 급히 쇼핑카트를 잡아당기며 연신 사과했다. “제가 아이를 잘 보지 못했네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여성은 화가 난 듯했지만 사람들이 많은 장소라서인지 억지로 화를 삭이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아이 데리고 나왔으면 조심해야죠!” “맞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성유리는 허리를 공손하게 숙이며 사과했다. 하늘이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달았는지 여자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성유리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사하나는 그녀의 다리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하늘이 앞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 먼저 말을 걸었다. “하늘이 방금 깨어났는데 언니가 안 보이니까 너무 투정을 부려서 제가 언니한테 전화했어요.” “봤어. 근데 그때는 내가 좀 바빠서 전화를 못 받았네.”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대답해 주며 하늘이의 침대맡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왜 그래? 우리 하늘이 엄마가 보고 싶었어?” 하늘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유리의 손을 바라봤다. “내 사자 인형은?” 방금까지 울었던 건지 하늘이의 눈은 조금 붉어져 있었고 목소리는 쉰 상태였다. 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꽉 깨물며 대답해 줬다. “미안해. 하늘아, 엄마가 사자 인형을 못 찾았어. 대신 엄마가 새로 하나 사 줄게. 그래도 괜찮을까?” “새로 산 게 예전 거랑 똑같아요?” 하늘이의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하늘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근데 저는 예전 그 사자 인형이 좋은데.” “알아. 엄마도... 다 알아.” 성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다시 가서 꼭 찾아볼게. 괜찮지? 걱정하지 마. 사자 인형은 그냥 숨바꼭질하는 거야. 엄마가 꼭 찾아줄게. 알았지?” 하늘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난 엄마 믿어.” 성유리는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제 밥 먹을 준비하자. 하늘이는 뭐 먹고 싶어? 엄마가 사다 줄게.” “엄마가 만든 만둣국 먹고 싶어요.” “알겠어. 지금 사 올게. 여기서 기다려줘. 대신 이모랑 같이 잘 놀고 있을래?”하늘이는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안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사하나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붙잡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다리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별일 아니야. 그냥 어디에 좀 부딪혀서 조금 아픈 것뿐이지.”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에 박한빈은 살짝 당황한 듯 표정이 굳어졌고 안색마저 어두워졌다. 바로 그때, 성유리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인형을 찾던 동작을 멈춘 성유리는 손을 쭉 뻗어 휴대폰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때, 박한빈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성유리의 휴대폰은 그의 힘에 밀려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떨어진 휴대폰 화면에는 발신자 이름이 또렷하게 보였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사하나였다. 박한빈의 입가에는 또다시 조롱 섞인 미소가 드리워지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는 사하나 씨랑 꽤 친해졌나 보네?”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 네가 사는 이 집도 사하나 씨가 마련해 준 거겠지? 지금 네가 이렇게 초라하게 살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난 네가 날 떠난 뒤 더 좋은 남자를 만나 멋지게 살 줄 알았어.” 그는 성유리를 비웃으며 계속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엔 연예인이랑 엮였었다며? 그런데 네가 팬들에게 둘러싸여 모욕당할 때는 그 연예인이 아무 말도 안 했더라? 참 안됐다.” 박한빈의 조롱은 끝이 없었고 그의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조금의 슬픈 감정도 없었다. 박한빈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슨 감정이라도 읽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성유리는 그저 조용히 서 있다가 그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말씀 끝나셨어요? 다 끝났으면 제 손 좀 놔줘요.” 그녀의 냉정한 반응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을 쥔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성유리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제 대답에서 뭘 얻고 싶은 거죠? 제가 울면서 잘못했다고 당신을 떠난 걸 후회한다고 말하길 원하세요?” “그렇게 해서 박한빈 씨가 얻고 싶은 게 뭔데요?” “박한빈 씨, 당신은 지금 충분히 성공했잖아요.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사실 아닌가요? 그런데 왜 이런 감정
사하나가 마련해 준 집은 병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집들은 대부분 오래된 탓에 성유리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발에 묻은 피는 이미 닦아냈지만 피가 사라진 자리에 드러난 길고 깊은 상처는 마치 다른 감정 없이 벌어진 입처럼 보였다. 성유리는 어처구니없게도 빨간 상처 자국이 마치 웃고 있는 입 같아서 섬뜩했다. 겨우겨우 그녀가 탄 엘리베이터가 5층에 도착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성유리는 상처를 간단히 소독한 뒤 하늘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긴 치마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숨길 수 없었다. 특히 하늘이가 찾고 싶어 하던 작은 사자 인형을 찾으려고 몇 번이고 방을 오가며 헤매는 모습은 더더욱 다친 사람인 것이 티가 났다. 세 번째로 상자를 열었을 때도 인형이 보이지 않자 성유리는 점점 불안해졌고 찾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좌절하기도 했다. 결국 쇼핑 앱을 열어 같은 인형을 새로 사려고 했지만 화면을 본 순간 멍해졌다. 그 인형은 이미 단종되어 더 이상 구매할 수 없었던 것이다.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유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건가?”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박한빈이 서 있었다. 사하나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하늘이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를 따라온 이유는 대체 뭘까?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성유리는 박한빈의 눈빛 속에 담긴 조롱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박한빈은 어지러운 집 안 풍경을 보며 미간을 약간 찌푸리기까지 했다. 그의 기억 속 성유리는 어떤 집에서 살더라도 항상 집안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있는 공간은 항상 정돈된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정리되지 못한 수많은 상자들뿐이었다. 심지어 일부 상자는 그녀가 찾던 물건을 꺼내려다 열어 둔 상태라 더욱 어수선해 보였다
“당신은...” “아까 경찰 부르셨다고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거죠? 제가 대신 한 번 전화를 걸어볼까요? CCTV 자료도 요청해 볼 겸.” “아니요! 됐습니다. 오늘 제 재수가 없는 거로 치죠.” 남자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휙 돌려 떠나가 버렸다. 서훈은 떠나가는 운전자를 굳이 막지 않고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남자의 차량 번호판을 찍었다. 그 후, 그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성유리 씨, 괜찮으세요? 병원에 모셔다드릴까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성유리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곧바로 앞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종아리의 통증은 여전히 느껴졌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절뚝거리며 사람들의 시야에서 애써 벗어났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도착하자 약국에 들러 간단히 상처를 처치할 물품을 샀다. “이거 뭐에 긁히셨길래 그러신 거예요? 파상풍 주사 맞아야 할 수도 있는데요.” 약사는 피가 줄줄 흐르는 그녀의 다리를 보며 말했다. “상처가 꽤 심한데요.” “괜찮아요. 우선 소독약하고 거즈만 주세요. 나중에 병원 가서 주사 맞을게요.” 성유리가 연신 괜찮다고 말하자 약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필요한 물품을 빠르게 계산해 주었다. 약을 받은 성유리가 약국을 나서려는 순간, 약사는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마치 성유리가 그곳을 더럽혔을까 봐 걱정하는 듯한 눈치였다.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재촉했고 문을 열고 나가는 그때, 성유리는 저 멀리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에 발걸음을 뚝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는 박한빈이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차에 기댄 채로 있었고 저무는 햇살이 가로수 사이로 비쳐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빛은 그의 뚜렷하고 강인한 이목구비를 더 뚜렷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여전히 뛰어난 외모였다. 지금의 그는 마치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 같아 보였고 성유리는 자세히 보지 않아도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과거 박한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