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도망치듯 떠나는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병실로 돌아갔다. 사하나는 병상 옆에 앉아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비록 손가락으로 열심히 화면을 넘기고 있었지만 그다지 집중한 모습은 아니었다. 성유리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왔어요?”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얘기했어요? 그 나쁜 새...” “그 사람은 하늘이가 아팠던 걸 몰랐다고 했어.”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으며 대답했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사하나는 놀란 듯 멍해졌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사하나는 마치 누군가 자신의 약점을 건드린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돼요! 그 사람이 모를 리가 없는데... 박한빈 씨가 직접 저한테 말했어요. 언니가 그런 선택을 한 거라고 했고 심지어 다른 여자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겠다고도...” 사하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유리는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더니 하늘이를 곁눈질하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사하나는 자신이 지금 극도로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 인간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니까요! 언니 선택이라면서 다른 여자랑 아이를 가지겠다고...” “그만해.” 사하나가 계속 얘기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평소완 다른 성유리의 모습에 사하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과거에 알았던 몰랐든 이제 상황은 이렇게 됐잖아. 그리고 박한빈 씨는 이미 해외 전문가한테 연락을 한 것 같아. 나한테 그들이 내일 도착한다고 했어.” “언니가 동의한 거예요?” “응.” “왜요?” 사하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가 소개한 의료진 팀을 못 믿어서 그랬어요?” “그건 아니야.” “그럼 왜요? 왜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이나 있어서?” “나는 하늘이를 박한빈 씨와의 자존심 싸움에 이용하고 싶지 않
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다음날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말한 의료진 팀은 약속대로 도착해 하늘이를 맡고 있던 의사들과 간단한 회의를 마친 뒤,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늘이 엄마인 성유리는 전에 검사를 받았지만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지 못했고 지금은 박한빈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만약 박한빈의 결과도 부적합이라고 한다면 성유리의 세상은 무너질 것이다. 그녀는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기도 싫었고 이틀이 지나도록 박한빈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의 이런 태도는 성유리로 하여금 빠르게 박한빈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만들었다. 의료진을 동원하고 검사를 받는 것 또한 그저 아버지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는 의도 말이다. 하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잘 됐다는 듯 시름을 놓았다. 다른 일이랑은 상관이 없어 보이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필경 전에 사하나도 아이는 부모 사이를 잇는 끈과 같다는 말을 해줬기 때문이다. 만약 하늘이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진즉에 연락이 끊겼을 것이다. 그때 사하나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두려웠다. 다들 제일 아팠던 기억이 제일 오래 남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 당시 사하나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 성유리는 이제야 더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가 다시 입원한 지 4일이 흐른 날, 누군가가 병문안을 왔다. 그는 바로 연정우. 성유리는 이미 오랫동안 연정우와 만난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아마 성유리의 어느 한 사인회였을 것이다. 연정우는 그날 특별 초청된 게스트로 사인회에 참석했는데 이유는 바로 성유리와 협업한 출판사에 그가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사인회에서 만났지만 별다른 교류도 없이 업무에만 몰두했고 다 끝이 나서도 함께 밥 한 끼 먹지도 않았다. 성유리가 나중에서야 연정우가 학교 교수직을 포기하고는 업계에 발을 들였다는
성유리는 간병인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뒤돌아 연정우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우리 지금... 1년 만에 만난 거 아니야?” 연정우가 말했다. “그땐 너도 출산한 지 얼마 안 됐었고 나도 바쁘고 너도 바빴잖아. 그래서 너랑 제대로 말도 못 나눴네.” 병원 정원에는 마침 햇살을 만끽하러 나온 환자들로 꽉 차 있었다. 연정우와 성유리는 정자에 앉아 있었는데 몹시 여유로워 보였다. 성유리는 문득 연정우에게서 박한빈의 모습을 발견했다. 하지만 기억 속 늘 다정하고 착하던 연정우가 이런 태도로 자신에게 말하자 성유리는 너무 이상했다. “응.” 그녀는 한참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 장성그룹 세웠어. 너도 알지?” 연정우가 또다시 말을 걸었다. “응. 기사 봤어. 회사 되게 잘되는 것 같더라? 축하해.” 성유리의 대답에 연정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고마워.” “아, 네가 모를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어.” 그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필경 그가 돌아갔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으니까. 전에 많이 존경하던 화가이자 몇 번 만났을 때도 늘 잘 대해주던 어르신의 부고 소식은 성유리를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연정우는 그녀의 이런 반응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병을 잘 통제하고 있었어. 근데 너도 알잖아. 할아버지는 늘 자신감이 넘치던 사람이었다는 걸.” “만약 계속 그 상태로 살아계셨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건데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들었나 봐.” “자기 몸에 입혀져 있는 기저귀와 엉망진창이 돼버린 침대도 발견했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나 보지. 간병인이 잠깐 방심했을 때 바로 뛰어내리셨어.” 연정우는 마치 자신에게 벌어진 비극이 아닌 것처럼 아주 담담히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전해줬다. 하지만 성유리는 잘 안다. 연정우가 할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지를 말이다. 만약 할아버지의 명성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
연정우는 지금 웃고는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그의 눈빛엔 지금 냉철함과 날카로움 뿐만 남아있는 듯했다. 성유리는 그 눈빛에 당황했지만 이내 진정하며 입을 땠다.“넌 아닐 거야.” “응?” “넌 유효정 씨랑 결혼하고 싶지 않았잖아. 근데 전에 그 사람은 납치와 상해치사죄로 벌을 받았고. 그러니까 네 목표는 이뤄졌지. 굳이 네가 유씨 가문을 신고할 필요가 없지 않아? 그래서 난 너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 성유리는 아주 냉정하고 침착하게 분석했고 연정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더욱 환하게 웃더니 물었다. “난 지금 기뻐해야 되는 건가? 네가 나를 이렇게 잘 알아주고 믿어줘서?” 자신이 지금 연정우를 믿은 건지 성유리 본인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녀는 그저 연정우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정말 연정우가 신고한 것이 아니라면 누구일까? “박한빈 씨야.” 성유리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연정우가 바로 답을 알려줬다. 연정우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웃어 보이더니 계속 말했다. “전에 내가 너한테 했던 말 기억해?” “나도 알고 있었어. 유효정 씨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유씨 가문에서는 그 사건을 덮었을 거야. 하지만 그 일에 네가 연루됐다면 일은 달라지지. 박한빈 씨는 당연하게도 절대 그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너 대신 복수를 한 거지.” 성유리는 침묵했다. “넌 감동도 안 받아?” 연정우가 물었다. “왜 감동받아야 하는데?” “당연히 그 남자가 너를 위해 이런 복수를 한 거랑 너를 많이 아낀다는 것에 감동해야지.” 연정우가 계속 말했다. “그때 박한빈 씨에게도 일이 되게 많았을 거야. 그럼에도 네 일에 신경 쓰고 있었던 거고. 박한빈 씨는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오늘 하고 싶다던 말이 이거야?” 성유리의 물음에 연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내가 말하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 연정우의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네가 하고 싶었던 말이지?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말을 마친 성유리는 그대로 돌아서서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연정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더니 물었다. “그래서 넌 결국 박한빈 씨를 선택한 거야? 그런데 너 그거 알아? 그는 곧 결혼할 사람이야.” ... 성유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늘이가 있는 병실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는 병실 밖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옆에는 항상 들고 다니는 노트북 가방이 놓여 있었다. 그는 태블릿을 들고 서류를 보고 있었는데 진지하고도 엄숙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치 방금 어딘가에서 급히 온 것처럼 보이는 그는 평소 항상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도 약간 흐트러져 있었고 옷에도 약간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원래 태블릿 화면만 보고 있던 그는 성유리가 그를 바라보는 순간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약 십 미터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VIP 병동 복도는 지나치게 고요했다. 고요한 나머지 성유리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잠깐 망설이던 성유리는 그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왔어?” 박한빈이 태블릿을 닫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성유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그 태도에 박한빈은 살짝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성유리가 먼저 물었다.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일 없으면 오면 안 되나?” 박한빈의 목소리에 성유리는 순간 멈칫했다. “그냥 궁금해서 물은 거예요. 며칠 전에는 계속 안 오셨잖아요?” “출장 다녀왔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지만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성유리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넌 계속 날 기다렸던 거야?” 성유리는 자신의 말을 들은 그가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내렸는지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박한빈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하늘이의 목소리는 아주 날카로웠다. 박한빈은 물론, 성유리조차 하늘이가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었다. 성유리는 순간 멈칫하며 아이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했다. “하늘아, 너...” “난 저 사람 보기 싫어. 엄마, 저 사람 나가게 해. 나가게 하란 말이야!” 하늘이는 떼를 쓰며 성유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작디작은 아이의 손등에는 아직도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는데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바늘이 당겨지며 피가 거꾸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유리는 하늘이가 다칠까 봐 재빨리 아이의 손을 눌러 진정시키며 달랬다. “알았어. 보지 마. 하늘아, 괜찮으니까 진정해.” 말을 마친 성유리는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살짝 바라보았고 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성유리는 그에게 상처 주지 않게 에둘러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지만 예상과 달리 박한빈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스스로 뒤돌아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하늘이는 조금씩 진정되었지만 여전히 성유리의 팔을 꼭 붙들고 놓으려 하지 않았다. “괜찮아졌어?” 성유리는 부드러운 말투로 아이에게 물었다. “하늘이가 보기 싫으면 안 보면 돼. 걱정하지 마. 엄마가 여기 있잖아.” 하늘이는 고개를 들어 성유리를 바라보더니 한참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 하늘이가 왜 그 사람을 보기 싫은지 엄마에게 말해줄 수 있어?” 성유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하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성유리는 아이가 먼저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며 더 묻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하늘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 사람도 하늘이를 싫어하니까.” 그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란 듯 멈칫했다. 그리고 하늘이의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하늘이가 먼저 말을 이었다. “나도 알고 있어. 그 사람은 하늘이를 싫어해. 그래서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잖아. 저번에도 하늘이를 붙잡고 억지로 사과하게 했잖아.” “그건 아니야. 하늘아.” 성
성유리는 하늘이의 기분을 맞춰주려 애를 썼고 덕분에 아이는 이내 즐거워하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퇴원하면 하고 싶은 일들을 차례차례 성유리에게 말해줬고 그녀는 옆에 앉아 아이의 말을 경청해줬다.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건네줄 때에도 하늘이는 떼도 안 쓰고 순순히 약을 복용했고 부작용 때문에 힘든지 침대에 누워 성유리의 손을 꽉 붙잡았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의 어깨를 다정하게 어루만져주며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녀의 자세는 어딘가 이상했지만 아이가 너무 편해하니 바꾸지도 않았다. 하늘이는 병원 병실에 있는 것이 너무 안정감이 없는 건지 눈을 떠서도, 눈을 감을 때도 성유리가 안 보이면 극도로 불안해했다. 그래서 성유리는 저려오는 다리와 팔을 애써 주무르며 하늘이 곁을 지켜야 했고 아이가 깊은 잠에 들어서야 천천히 팔을 뺐다. “성유리 씨.” 간병인은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 하늘이가 잠에 든 후, 성유리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밖에 어떤 사람이 계속 앉아 있던데 아시는 분이에요?” 성유리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곧 애써 부정했다. 필경 박한빈이 어떤 사람인지 성유리는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방금 전, 하늘이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박한빈은 화가 나 바로 병원을 떠났다고 성유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병실 밖을 나가보니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성유리가 돌아왔을 때에도 그 의자에 앉아 있던 그였지만 현재는 태블릿도 보지 않은 채로 멍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망설이다 박한빈에게로 다가가며 먼저 말했다. “죄송해요.” 성유리의 목소리에 박한빈은 고개를 번쩍 들었고 눈빛은 마치 왜 사과를 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하늘이가 요즘... 불안정해요. 일부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하려던 말을 이어갔고 그는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갑자기 물었다. “연정우 씨도 하늘이를 만났어?” 성유리는 왜 박
박한빈의 말을 성유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박한빈에게 물었다. “박한빈 씨, 지금 이게 무슨 뜻이죠?” “들은 대로.” 박한빈은 콧방귀를 뀌며 대답을 이어갔다. “아이한테 이름 지어준 거 확인했어. 네 성을 따른 것에 나도 반박하지는 않을게. 근데 아무리 네 성을 따랐다 해도 걔는 결국 내 아이야.” “하늘이가 다른 남자한테 아빠라고 부르는 꼴을 난 절대 봐주지 않을 거고.” “당연히 너도 아직은 젊으니까 재혼하겠다고 해도 말리지 않을게. 그렇지만 하늘이까지 데리고 결혼은 하지 마. 절대로 안 되니까. 알겠어?” 박한빈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잘 아는 박한빈은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돌렸고 곧 꽉 쥔 성유리의 두 주먹을 발견했다. 어찌나 힘을 세게 주고 있는지 그녀는 지금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박한빈은 성유리가 곧 노발대발 화를 내며 자신에게 험한 말을 내뱉을 줄 알았지만 성유리는 손에 힘을 풀더니 미소까지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이네요.”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하늘이는 아무것도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어떻게 애 말을 철석같이 믿으세요?” “오늘 정우랑 만난 건 사실이지만 저희는 2년 동안 어떠한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제 와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수 있겠어요?” “다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신경 쓸 겨를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하는 모든 걱정들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이게 아닌데?’ 박한빈이 생각한 성유리의 반응은 절대 이게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화를 내야 한다. 꼭 박한빈과 심하게 다투고 불만을 토로해야 한다. 하지만 왜 지금 성유리는 이리도 평온하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박한빈은 성유리의 말을 듣고 나서도 전혀 안심되거나 기쁘지 않았다. 그때, 문득 박한빈은 자신이 전에 어디서 봤던 문장이 떠올랐다. 사람은 자신이
성유리의 손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예전에도 박한빈에게 손을 댄 적이 있긴 했지만 온전히 박한빈을 향한 악감정 때문에 힘껏 내리친 적은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성유리는 온 힘을 실어 박한빈의 뺨을 쳤다.성유리의 손길에 박한빈의 뺨은 빠른 속도로 붉어졌다.그런 박한빈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성유리가 그를 밀어내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두 사람 이미 찾았어.”그 말에 성유리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그게 정말이야?”“응.”“두 사람 지금 어디 있는데? 하늘이는 괜찮대? 지금 어디 있는 거야?”성유리는 박한빈의 앞으로 달려가며 두서없이 말을 내뱉었다.“왜 나 만나러 안 왔대? 설마 내가 찾으러 안 가서 화났대? 너 뭐 숨기는 거 있지?”“그 두 사람 지금 병원에 있대. 눈사태 날 때 산속 동굴로 피신해서 목숨은 건졌지만 동굴 입구가 거의 막혀 있어서 구조대가 진입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나 봐. 어쨌든 지금 구조돼서 응급실로 실려 갔어.”박한빈은 성유리의 어깨를 꽉 감싼 채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차분하고도 느린 말투에서 어떻게든 성유리를 진정시켜 보려는 정성이 느껴졌다.성유리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아직도 의식은 없다는 거지?”“그래.”“목숨에 아무 문제 없는 건 맞고?”박한빈은 성유리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대답했다.“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줄 거야.”“하늘이 보러 가고 싶어.”성유리의 모습은 조금 전보다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았지만 잔뜩 쉰 목에서는 여전히 거친 소리가 났다.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박한빈이 말했다.“지금 상태가 별로 안 좋은 것 같으니까 내일 가는 게 좋겠어.”“난 지금 당장 보러 가고 싶다고!”방금까지만 해도 진정된 것 같았던 성유리는 다시 폭발하듯 소리를 지르며 박한빈을 밀어냈다.그녀가 문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박한빈이 다시 한번 성유리를 붙잡았다.“알겠으니까 내가 데려다줄게.”“나 혼자 갈 수 있어.”“어느 병원인지는
성유리는 박한빈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의사를 마주한 순간, 박한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바로 알 수 있었던 그녀는 본능적으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박한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성유리의 동공이 겁에 질린 듯 순간적으로 수축하더니 더는 생각하지도 않고 곧장 박한빈을 밀치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부림쳤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아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 박한빈 한 사람도 못 당해내던 성유리가 많은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결국, 그녀는 강제로 침대 위에 눕혀졌고 의사는 그녀에게 투여할 진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이거 놔! 박한빈, 이거 놓으라니까! 내가 뭘 하든 너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당장 이 손 놓으라고!”성유리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외쳤다.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는 뭔가를 뚫고 나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곧이어 의사가 준비한 진정제의 바늘이 망설임 없이 성유리의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이 개자식아! 박한빈, 넌 진짜 더럽게 이기적인 새끼야! 내가 하늘이 찾고 싶다는데, 하늘이 찾겠다는데 그걸 네가 무슨 자격으로 막아... 네가 너무 역겨워... 역겨워서 미칠 것 같다고!”성유리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곧이어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약해지더니 몸부림치던 힘도 사라져만 갔다.그렇게 성유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의 손길도 사라졌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그녀를 침대 위로 누르고 있었다.성유리의 말을 듣고 있던 박한빈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래, 마음껏 역겨워해.”“난 그냥... 네가 살아있어만 주면 돼.”살아있어만 달라고?성유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만에 하나 정말 성하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성유리에게는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도, 의미도 없었다.이 모든 게 다 자신의 실수처럼 느껴졌다.이 모든 일이 다 자신의 잘못 같았다.지금 성유리는 그저 성하늘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그런데 박한빈은 대체 왜
성유리는 어딘가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마음의 준비라뇨? 무슨 마음의 준비요? 저는 한빈 씨가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는데요.”“아, 맞다. 하나한테 전화 해봐야겠어요. 하나가 지금 하늘이랑 같이 있을 거예요. 분명히 하나는 하늘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요.”“한빈 씨는 모르겠죠, 하늘이가 착해 보여도 얼마나 장난꾸러기인지.”“하늘이, 금방 걸음마 뗐을 때부터 여기저기 숨는 걸 좋아했어요. 어느 날에는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가 있었는데,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방을 한참이나 뒤졌어요. 결국, 경찰까지 부르고 나서야 침대 밑에 숨어 있던 애를 찾아냈죠.”“그래도 우리 하늘이 정말 착한 아이예요. 제가 그때 너무 놀랐다는 건 아는 건지, 그 후부터는 다시 저 걱정 안 시켰거든요.”“하늘이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정말 약했어요. 자주 아팠고, 열이 날 때는 제가 밤새 끌어안아 줘야 했어요.”“저는 그렇게 하늘이를 계속 안아줬죠. 품에 안겼던 하늘이는 아주 작고 소중했어요. 물론 엄청 피곤했는데, 그래도 저는 너무 좋았어요. 저랑 피가 섞인 아이였고, 제가 아이의 세상이었으니까요.”“하지만 하늘이는 몰랐을 거예요. 제 세상도 하늘이였다는 걸. 저는 정말 하늘이 없으면 못 살아요...”성유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그녀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연락처를 뒤졌다.성유리는 사하나의 연락처를 찾고 있었다.그녀는 사하나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떨려오는 손에 사하나의 연락처를 찾을 수 없었다.“왜 이러지? 하나 번호가 안 나와요.”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물었다.“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하나도 하늘이한테는 엄마랑 다름없는 존재거든요. 계속 연락했었는데, 왜 없지? 한빈 씨...”성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힘을 실어 꽉 끌어안는 박한빈의 손길에 성유리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그런데도 성유리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저 멍하니
성유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새하얀 눈뿐이었다.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러던 중, 성하늘의 목소리가 들렸다.“엄마, 나 여기 있어. 빨리 나 찾아봐!”즐거운 듯한 아이의 목소리가 성유리의 이성을 돌려놨다.맞다... 성유리는 성하늘을 찾아야 했다.하지만 성하늘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성유리는 성하늘과 함께 수도 없이 숨바꼭질하며 놀았다.참을성이 부족하던 성하늘은 숨어 있다가도 몰래 나와 힐끔힐끔 성유리를 살펴보곤 했다.성유리 역시 매번 어디에 숨어 있을지 뻔했던 성하늘을 일부러 모른 척하며 과장된 몸짓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이의 행방을 묻곤 했다.그럴 때면 성하늘은 즐거운 듯한 웃음을 지었다. 성유리가 “어렵게” 성하늘을 찾아내면 아이는 자신을 못 찾았던 엄마를 바보라며 놀리곤 했다.하지만 이번엔 놀이가 아니었다. 성하늘이 정말 보이지 않았다.성유리는 계속해서 성하늘의 이름을 불렀다.분명 성하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그녀의 귀를 맴돌고 있었다.“엄마, 빨리 나 찾아보라니까!”“하늘아, 어딨니? 장난 그만 치고 나와. 엄마가 정말 널 못 찾겠어서 그래!”성유리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성하늘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성유리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하늘아! 들리니? 하늘아!”하지만 그런 성유리의 말에 대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건 그저 새하얗기만 한 눈뿐이었다.그 새하얀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병원을 떠올렸다.성하늘이 병에 걸렸을 때, 성유리는 하얀 천장과 벽을 보며 홀로 간절히 기도하곤 했다.성유리는 그때마다 맹세했다. 성하늘이 다시 건강을 되찾기만 한다면 항상 아이의 곁에 있어 줄 것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하지만 성하늘은 다시 자취를 감췄다.“하늘아...”성유리는 끊임없이 몸부림치다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보이는 희미한 노란 빛이 그녀를 혼란스
여자의 말에 끝나기도 전에 곁에 있던 그녀의 남편이 여자를 세게 끌어당겼다.그제야 여자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아이고, 내가 또 말실수했네. 너무 걱정 마요, 하늘이 분명 괜찮을 테니까.”하지만 지금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지금도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눈사태로 발이 묶인 사람들이라면 밖에서 자신들을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을지 모를 리 없었다. 별일 없었다면 지금쯤 연락이 왔어야 했다.하지만 여태껏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감감무소식이었다.사하나의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있었다.감정 없이 차가운 음성 알림이 반복될 때마다 성유리는 점점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어떻게 정신을 잃지도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눈사태가 멈추자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했다.직원들이 다급히 구조대에게 달려가 상황을 설명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곧장 그들의 뒤를 따랐다.“사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하지만 성유리는 빠르게 제지당했다.“언제 다시 눈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사모님께선...”“제 친구랑 딸이 저쪽에 있어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쉬어 거칠어져 있었고 거친 목소리 안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제발 저도 같이 가게 해주세요.”사실 성유리는 아까부터 최대한 본인의 감정을 있는 힘껏 억누르고 있었다.그녀는 어떻게든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안 그랬으면 눈사태가 일어난 순간, 사람들이 말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달려나갔을 것이다.이곳에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것만으로 그녀는 자신의 인내심을 최대로 발휘한 상태였다.성유리는 여전히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 보면 사하나와 성하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그리고 마침내 성유리를 만난 두 사람이 모든 게 다 장난이었다는 가벼운 말을 해주기만 바랐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게 아니었다.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이대
성유리는 여전히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녀가 따라가 본다고 해도 별 소용 없었으니 그저 가만히 두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카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관광객이 거의 없었던 탓에 카페도 한산했다.성유리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시간을 확인하며 하늘만 계속해서 바라보았다.하늘에는 여전히 어두운 먹구름이 가득했다.그런 하늘을 바라보며 성유리의 걱정은 깊어져만 갔다.그녀는 성하늘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에 대한 자책을 멈출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돌아오면 성하늘이 아무리 떼를 써도 바로 호텔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멀리서 “쿵”하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에 성유리의 손이 저절로 떨렸다.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도 그 소리에 일제히 밖으로 나가 보았다.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진 성유리도 사람들 틈에 끼어 함께 밖으로 달려나갔다.그들이 있는 곳은 산 정상에 가까운 위치였다.눈을 구경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던 만큼 반대편의 설산에서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내려오는 눈이 한눈에 들어왔다.그 광경은 시각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고 솔직히 말하면 공포감까지 불러일으켰다.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으며 혼란에 빠진 채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다.직원들은 눈사태가 여기까지 오지는 않을 거라는 말로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빨리 대피할 것을 권유했다.하지만 성유리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그녀는 다급히 직원을 팔을 덥석 붙잡고 물었다.“저쪽... 설마 스키장인가요?”“네. 그래도 전문 인력들이 있어서 미리 사람들 대피시켰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그렇게 말하는 직원의 표정도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성유리는 곧장 몸을 돌려 사하나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하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자동응답뿐이었다.극도의 불안함에 성유리의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들을 바라보았지만 그쪽도
성유리는 그녀의 말에 그저 가벼운 미소만 지어 보였다.그때, 남자아이가 성하늘이 손을 잡고 다가왔다.“엄마, 동생이랑 참새 찾으러 가고 싶어.”“이 녀석이, 갑자기 무슨 참새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지금 참새가 어디 있는데?”“있어! 어제도 봤거든!”“없어, 네가 잘못 본 거겠지.”“진짜 있다니까. 못 믿겠으면 내가 지금 가서 보여줄게!”두 사람은 그렇게 말싸움을 시작했다. 결국, 여자가 남자아이의 귀를 잡아당겨 아이를 호텔 안으로 끌고 들어가며 싸움이 일단락됐다.성유리는 그런 모자의 모습을 보며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성하늘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다 놀았어? 우리도 이제 돌아갈까?”성하늘이 고개를 저었다.“난 조금만 더 기다려 볼래.”“뭘 기다리는데?”“아줌마가 오늘 나 데리고 스키 타러 간다고 했거든.”시간을 확인해 보던 성유리가 말했다.“아줌마도 이 시간에 돌아오기는 힘들 거야. 우리 먼저 들어가서 낮잠 좀 자고 있을까?”“싫어, 난 여기서 기다릴래. 아줌마가 예전부터 약속했단 말이야.”성하늘은 고집을 부리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장갑 낀 손가락으로 계속해서 눈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그런 아이의 모습에 성유리가 몇 마디 더 꺼내려던 그때,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보다 귀가 더 밝았던 성하늘은 곧바로 그 엔진소리가 사하나의 차라는 것을 눈치채고 벌떡 일어나 외쳤다.“아줌마!”“나 왔어.”사하나가 차에서 내려 성하늘을 안아 올리더니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며 물었다.“아줌마 안 늦었지?”“조금 늦었네요.”성하늘이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그래도 괜찮아요. 아줌마가 와 줘서 기분이 좋거든요. 우리 이제 스키 타러 가는 거예요?”“당연하지! 내가 왜 왔겠어?”“신난다!”성하늘은 한껏 두껍게 껴입은 몸으로 콩콩 뛰다가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그런 아이를 성유리가 재빨리 잡아주었다.성하늘은 민망한 듯 웃으며 사하나에게 물었다.“아줌마, 우리 언제 출발할 거예요?”“지금 바로
사실 경운시에도 눈이 내리긴 한다.하지만 지리적인 이유와 날씨 문제로 눈이 내린다고 해도 가벼운 눈만 내릴 뿐, 성하늘이 원하는 그런 두껍게 쌓이는 눈은 내린 적이 없었다. 아이가 원하는 눈은 온 세상을 덮을 정도로 많이 내려 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 그런 큰 눈이었다.작년에는 사하나가 성하늘을 데리고 큰 눈을 보기 위해 해외여행까지 가자는 제안을 한 적도 있었다.아쉽게도 그때는 성하늘이 너무 어렸던 탓에 성유리가 먼저 거절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자기만의 사고방식이 생긴 성하늘은 곧장 사하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아이는 뒤늦게 성유리의 존재가 떠올랐는지 곧장 고개를 돌려 애처로운 눈빛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우리 갈 거지?”아이의 표정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성유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같이 가자.”“앗싸!”한껏 흥분한 성하늘은 폴짝폴짝 뛰며 사하나에게 출발 날짜를 물어보았다.한술 더 떠서 아이는 자신의 저금통을 꺼내며 장갑과 모자를 사겠다며 설쳐댔다.사하나는 이번 달 말에 출발하기로 했지만 바빠진 일정 탓에 연말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그때는 한빛시가 가장 추워질 시기였고 도시 전체가 새하얀 눈에 뒤덮일 한겨울이었다.성유리는 혹시라도 성하늘이 그곳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되었지만 아이는 계속해서 아무 문제 없을 거라며 성유리에게 애원했다.“엄마, 우리 제발 가자. 제발! 나 말 잘 들을게!”성하늘의 간곡한 부탁에 성유리는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들이 도착하던 날, 날씨는 아주 화장했다.택시 기사마저 한빛시의 날씨가 가장 좋은 날이라고 말할 정도였다.내리쬐는 햇볕은 따스했고 도로변에 앉아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도 보였다.사람들의 붉은 코트와 집 앞에 걸려있는 노란 옥수수는 이 도시만의 독특한 풍경 같아 보였다. 그동안 사진이나 그림으로만 보던 장면들이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지자 성유리도 모든 것을 아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정겨운 풍경이긴 했지만 그녀들이 머물 곳은
오히려 사하나는 연정우의 일로 성유리에게 사과를 했다.“제가 상황파악도 제대로 못 하고 억지로 엮어주려고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솔직히 저도 연정우가 그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사하나는 한껏 찌푸린 얼굴로 변명해보았지만 성유리는 그녀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성유리의 눈빛에 사하나는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물었다.“언니... 혹시 제 탓하는 건 아니죠?”“내가 네 탓을 왜 해?”성유리가 웃기다는 듯 말했다.“이게 너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그래도... 그때 제가 부추기지만 않았다면...”“난 어른이잖아. 이런 기본적인 판단능력도 없으면 나중에 무슨 결정을 내리든 다 다른 사람 탓이나 하게?”성유리가 별수 없다는 듯 말했다.“게다가 나도 그때는 연정우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뒤늦게 둘이 안 맞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뿐이고.”“안 맞는 게 아니라, 연정우가 언니한테 안 어울리는 거죠!”사하나가 곧장 대답했다.“언니 그거 알아요? 요즘 박한빈 버린 여자가 연정우한테 차였다고 소문 돌고 있던데요.”“그 새끼 완전 미친놈 아니에요? 박한빈한테 사업으로 밀리니까 그딴 식으로 물어뜯는 거잖아요. 싸울 거면 자기들끼리 싸우든지, 왜 언니까지 끌어들인대요? 언니가 뭘 잘못했다고!”사하나는 말할수록 점점 화가 치미는지 언성을 높였다.성유리는 그런 사하나의 모습에 오히려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물이나 좀 마시고 진정하지 그래?”사하나는 태연한 성유리의 모습에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성유리는 그저 가만히 서서 사하나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사하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유리를 빤히 쳐다보았다.그 시선에 어딘가 머쓱해진 성유리가 물었다.“왜 그래?”“언니는 화도 안 나요?”사하나가 물었다.“왜 화가 나야 하는데?”“그러니까... 연정우가 언니를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도 그렇고,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도 그렇고, 화가 나야 하잖아요.”사하나의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