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나는 힘도 안 줬는데.” 여자는 넋이 나간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박한빈은 재빨리 성유리의 뒤를 따라갔다. 박한빈이 뒤늦게 성유리를 따라 마트를 나섰지만 그녀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거리에 있는 표지판을 힐끔 쳐다보고는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 “어디 가요? 박한빈 씨!” 여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박한빈은 듣는 체도 안 했다. 이내 박한빈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응급실에서도 성유리와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마음이 급해진 박한빈은 지나가는 간호사 한 명을 붙들고는 물었다. “여기 방금 어떤 여자가 아이와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두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인데 코피가 나고 있을 겁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는 이렇게 생겼고요.” 박한빈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잠금 화면에 있는 성유리의 사진을 간호사에게 보여줬다. “아, 그 백혈병 아이 말씀이시구나. 방금 바로 황 의사님이 계신 방으로 갔어요. 지금쯤 아마...” “뭐라고요?” 박한빈은 간호사의 말을 뚝 끊어버리며 물었다. 그의 안색은 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고 목소리마저 떨렸다. 간호사는 그런 박한빈의 모습에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나 박한빈은 끈질기게 물었다. “그 여자아이가... 무슨 병이라고요?” “백혈병이요. 전에도 그것 때문에 계속 입원해 있다가 오늘 겨우 퇴원한 거로 알고 있는데...” 박한빈의 머릿속은 간호사의 한 마디에 새하얘졌다. ... 성유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병원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를 제외하고도 성유리는 자기 몸에서 나는 피비린내도 맡아버렸다. 하늘이가 성유리의 몸에 축 늘어져 병원에 온 바람에 그녀의 옷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어린아이는 백혈병 때문에 혈액을 응고하는 능력이 평범한 사람과는 현저히 떨어지기에 꼭 조심해야 한다고 의사는 신신당부했
사하나 또한 빠르게 병원에 도착했다. “무슨 일이에요? 아침에 금방 퇴원했잖아요. 근데 왜...” 사하나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성유리의 빨개진 두 눈을 발견하고는 억지로 말을 삼켰다. “내 잘못이야.” 성유리가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늘이를 데리고 마트로 가지 말았어야 해. 그 사람들이랑 다투지도 말았어야 했어. 만약 내가 그때...” 성유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주먹을 어찌나 세게 잡고 있었는지 손톱은 이미 살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사하나는 얼른 성유리의 다친 손을 꼭 잡아주며 위로했다.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언니 잘못이 아니잖아요. 누구보다 더 하늘이를 사랑하고 아이를 보호하려는 사람이 언니라는 것도 제가 제일 잘 알고요.” 성유리는 침묵했다. 위로를 건네려던 사하나는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아, 깼어?” 그 순간, 성유리는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눈빛에 생기가 돌더니 하늘이의 두 손을 잡으며 물었다. “깼어? 아직도 아파?” 하늘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이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으니 성유리는 하늘이가 억지로 고통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파져 눈시울마저 붉어진 성유리에게 하늘이가 갑자기 말했다. “엄마.” 성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왜 그래?” “그 남자가... 아빠야?” 나지막한 하늘이의 목소리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사하나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오늘 그 사람 만나셨어요?” 성유리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지만 사하나는 이미 답을 들은 것 같았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하나가 펄쩍 뛰며 성유리이게 따지듯 묻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하늘이는 그 사람 때문에 사고를 당한 거예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래요? 그 사람은?” “이제 그만 말해.” 성유리가 사하나를 진정시
박한빈은 마침 하늘이가 있는 병실 밖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을 마주한 사하나는 조롱하듯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박 대표님 아니신가? 설마 마트에서 한 일도 부족하다고 느껴서 여기까지 와서 교육자 흉내를 내시려고 그러는 건가요?”박한빈은 사하나의 말을 무시하고 성유리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할 말이 있어.” 성유리가 대답하기도 전에 사하나가 끼어들었다. “당신 뭐야? 무슨 자격으로 유리 언니한테 그런 말투로 말하는데?” 그러나 박한빈은 여전히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자신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는 박한빈의 태도는 사하나로 하여금 표정이 더 굳어지게 만들었다. 화가 나 무언가 더 말하려던 사하나를 가로막던 성유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이 좀 봐줘.” 사하나는 성유리의 말에 이를 악물고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유리는 그녀 옆을 지나쳤고 박한빈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채 병실 밖으로 걸어갔다. 반면, 박한빈은 병상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은 손바닥만큼 작고 창백했고 수액이 꽂혀 있는 마른 손에는 혈관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박한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성유리의 뒤를 따라나섰다. 성유리는 병실 밖 의자에 앉아 있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이마와 귀 옆으로 흘러내린 잔머리가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박한빈은 그녀가 정말 많이 야위었음을 깨달았다. 성유리에게서는 병약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봤을 때의 초췌한 모습은 표절 문제로 동분서주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때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길 바랐다. 세간의 폭풍 같은 여론을 자신이 충분히 잠재울 수 있었고 책임감 없는 남자조차도 자신이 손봐서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사라지면 그의 팬들도 잠잠해질 터였다. 그래서 박한빈은 그저 그녀가 자신에게 한 마디라도 약한 소리를 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만약 그녀가 후
죄송하다는 성유리의 한 마디에 박한빈은 고작 그 네 글자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무슨 대답이라도 해주려고 입을 움찔거렸지만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사과하는 거야?” “오늘 오후에 하늘이가 당신들에게 사과했어야 했어요.” 성유리는 고개를 떨군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잘못한 일에는 사과를 해야 하죠. 만약 그때 사과했다면 뒤에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엄마로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에요. 그래서 박한빈 씨에게 사과하는 거예요.” “그리고 오후에 제가 당신에게 했던 말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땐 너무 다급했거든요. 부디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해요.” 성유리가 말을 끝냈지만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했다. “아, 그리고 의료진 관련해서도 정말 감사해요. 저 그게...” “됐어.” 성유리가 말을 이어가려 하자 박한빈이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이빨을 꽉 깨물고 있는 박한빈의 표정에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부러 이렇게 말해서 나를 더 힘들게 하려는 거냐고!”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지금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이가 아픈 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그래. 지난 2년간 내가 너희 생활에 신경 쓰지 않았던 건 맞아. 하지만 그건 네가 선택한 거 아니었어?” “처음 네가 내 곁을 떠나겠다고 고집했던 것도 너였잖아! 버려진 사람은 나야! 그런데 나더러 뭘 더 어쩌란 거야? 눈치 없이 매달리기라도 했어야 했어?” “오늘 일도 마찬가지야. 네가 아이가 아프다는 걸 미리 말했으면 내가 이렇게 했겠어? 내가 뭐로 보이는데? 그래도 내 핏줄인데!” 박한빈은 분노와 억울함이 뒤섞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성유리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는 스스로도
성유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도망치듯 떠나는 박한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병실로 돌아갔다. 사하나는 병상 옆에 앉아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고 있었다. 비록 손가락으로 열심히 화면을 넘기고 있었지만 그다지 집중한 모습은 아니었다. 성유리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왔어요?” 성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얘기했어요? 그 나쁜 새...” “그 사람은 하늘이가 아팠던 걸 몰랐다고 했어.” 성유리가 사하나의 말을 뚝 끊으며 대답했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사하나는 놀란 듯 멍해졌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뜻이죠?”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사하나는 마치 누군가 자신의 약점을 건드린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도 안 돼요! 그 사람이 모를 리가 없는데... 박한빈 씨가 직접 저한테 말했어요. 언니가 그런 선택을 한 거라고 했고 심지어 다른 여자랑 결혼해서 아이를 낳겠다고도...” 사하나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성유리는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더니 하늘이를 곁눈질하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제야 사하나는 자신이 지금 극도로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 인간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니까요! 언니 선택이라면서 다른 여자랑 아이를 가지겠다고...” “그만해.” 사하나가 계속 얘기하려는 순간, 성유리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평소완 다른 성유리의 모습에 사하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과거에 알았던 몰랐든 이제 상황은 이렇게 됐잖아. 그리고 박한빈 씨는 이미 해외 전문가한테 연락을 한 것 같아. 나한테 그들이 내일 도착한다고 했어.” “언니가 동의한 거예요?” “응.” “왜요?” 사하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가 소개한 의료진 팀을 못 믿어서 그랬어요?” “그건 아니야.” “그럼 왜요? 왜 그의 도움을 받아야 하죠? 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이나 있어서?” “나는 하늘이를 박한빈 씨와의 자존심 싸움에 이용하고 싶지 않
성유리의 예상과는 달리 박한빈은 다음날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말한 의료진 팀은 약속대로 도착해 하늘이를 맡고 있던 의사들과 간단한 회의를 마친 뒤,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늘이 엄마인 성유리는 전에 검사를 받았지만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지 못했고 지금은 박한빈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만약 박한빈의 결과도 부적합이라고 한다면 성유리의 세상은 무너질 것이다. 그녀는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기도 싫었고 이틀이 지나도록 박한빈은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의 이런 태도는 성유리로 하여금 빠르게 박한빈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만들었다. 의료진을 동원하고 검사를 받는 것 또한 그저 아버지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는 의도 말이다. 하지만 성유리는 오히려 잘 됐다는 듯 시름을 놓았다. 다른 일이랑은 상관이 없어 보이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필경 전에 사하나도 아이는 부모 사이를 잇는 끈과 같다는 말을 해줬기 때문이다. 만약 하늘이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진즉에 연락이 끊겼을 것이다. 그때 사하나의 말을 듣는 순간, 성유리는 두려웠다. 다들 제일 아팠던 기억이 제일 오래 남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 당시 사하나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 성유리는 이제야 더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가 다시 입원한 지 4일이 흐른 날, 누군가가 병문안을 왔다. 그는 바로 연정우. 성유리는 이미 오랫동안 연정우와 만난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건 아마 성유리의 어느 한 사인회였을 것이다. 연정우는 그날 특별 초청된 게스트로 사인회에 참석했는데 이유는 바로 성유리와 협업한 출판사에 그가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사인회에서 만났지만 별다른 교류도 없이 업무에만 몰두했고 다 끝이 나서도 함께 밥 한 끼 먹지도 않았다. 성유리가 나중에서야 연정우가 학교 교수직을 포기하고는 업계에 발을 들였다는
성유리는 간병인과 짧은 대화를 나누고는 뒤돌아 연정우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우리 지금... 1년 만에 만난 거 아니야?” 연정우가 말했다. “그땐 너도 출산한 지 얼마 안 됐었고 나도 바쁘고 너도 바빴잖아. 그래서 너랑 제대로 말도 못 나눴네.” 병원 정원에는 마침 햇살을 만끽하러 나온 환자들로 꽉 차 있었다. 연정우와 성유리는 정자에 앉아 있었는데 몹시 여유로워 보였다. 성유리는 문득 연정우에게서 박한빈의 모습을 발견했다. 하지만 기억 속 늘 다정하고 착하던 연정우가 이런 태도로 자신에게 말하자 성유리는 너무 이상했다. “응.” 그녀는 한참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 장성그룹 세웠어. 너도 알지?” 연정우가 또다시 말을 걸었다. “응. 기사 봤어. 회사 되게 잘되는 것 같더라? 축하해.” 성유리의 대답에 연정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고마워.” “아, 네가 모를 것 같아서 알려주는 건데...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어.” 그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필경 그가 돌아갔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으니까. 전에 많이 존경하던 화가이자 몇 번 만났을 때도 늘 잘 대해주던 어르신의 부고 소식은 성유리를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연정우는 그녀의 이런 반응에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병을 잘 통제하고 있었어. 근데 너도 알잖아. 할아버지는 늘 자신감이 넘치던 사람이었다는 걸.” “만약 계속 그 상태로 살아계셨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건데 어느 날 갑자기 정신이 들었나 봐.” “자기 몸에 입혀져 있는 기저귀와 엉망진창이 돼버린 침대도 발견했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나 보지. 간병인이 잠깐 방심했을 때 바로 뛰어내리셨어.” 연정우는 마치 자신에게 벌어진 비극이 아닌 것처럼 아주 담담히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전해줬다. 하지만 성유리는 잘 안다. 연정우가 할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는지를 말이다. 만약 할아버지의 명성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
연정우는 지금 웃고는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그의 눈빛엔 지금 냉철함과 날카로움 뿐만 남아있는 듯했다. 성유리는 그 눈빛에 당황했지만 이내 진정하며 입을 땠다.“넌 아닐 거야.” “응?” “넌 유효정 씨랑 결혼하고 싶지 않았잖아. 근데 전에 그 사람은 납치와 상해치사죄로 벌을 받았고. 그러니까 네 목표는 이뤄졌지. 굳이 네가 유씨 가문을 신고할 필요가 없지 않아? 그래서 난 너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 성유리는 아주 냉정하고 침착하게 분석했고 연정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더욱 환하게 웃더니 물었다. “난 지금 기뻐해야 되는 건가? 네가 나를 이렇게 잘 알아주고 믿어줘서?” 자신이 지금 연정우를 믿은 건지 성유리 본인도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녀는 그저 연정우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정말 연정우가 신고한 것이 아니라면 누구일까? “박한빈 씨야.” 성유리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연정우가 바로 답을 알려줬다. 연정우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웃어 보이더니 계속 말했다. “전에 내가 너한테 했던 말 기억해?” “나도 알고 있었어. 유효정 씨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유씨 가문에서는 그 사건을 덮었을 거야. 하지만 그 일에 네가 연루됐다면 일은 달라지지. 박한빈 씨는 당연하게도 절대 그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조금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너 대신 복수를 한 거지.” 성유리는 침묵했다. “넌 감동도 안 받아?” 연정우가 물었다. “왜 감동받아야 하는데?” “당연히 그 남자가 너를 위해 이런 복수를 한 거랑 너를 많이 아낀다는 것에 감동해야지.” 연정우가 계속 말했다. “그때 박한빈 씨에게도 일이 되게 많았을 거야. 그럼에도 네 일에 신경 쓰고 있었던 거고. 박한빈 씨는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오늘 하고 싶다던 말이 이거야?” 성유리의 물음에 연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내가 말하고
박한빈은 잠시 성유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성유리는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정말 자신이 아는 남편인지 의심스러워졌다.그들은 한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기에 그가 성유리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건 당연했다.그래서 그동안 성유리가 박한빈에게 자연스럽게 친밀감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그에게 가까이 가고자 했던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박한빈은 그녀의 감정을 눈치챈 듯, 천천히 물었다.“어머니랑 떨어지기 싫으신 거죠?”성유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박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걱정 마십시오, 저는 지금 당장 유리 씨를 데려가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금성 쪽에 아직 처리할 일이 있어서... 거기 일이 끝나고 나서야 돌아갈 수 있죠.”“그리고 유리 씨 어머니는... 나중에 저희가 돌아갈 때 같이 모시고 가면 되니까 걱정 마십시오. 당신을 구해준 것에 대해서 아주 잘 보답할 테니까.”잠시 정적이 흐른 후, 박한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하지만 유리 씨는 어머니라는 분의 말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안 됩니다. 당신은 이미 제 아내잖습니까. 만약 유리 씨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면 그건 바람이고 저한테는 무책임한 겁니다.”성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박한빈은 성유리가 대답하지 않는 걸 보더니 점점 더 불만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듣고 계시는 거죠?”성유리는 박한빈과 눈을 맞춘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유리 씨는 이제 어머니라는 분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아셨습니까?”“뭐를요?”“당연히 당신은 결혼 못 한다는 얘기죠. 상대방이 누구든 상관없으니 결혼하면 안 됩니다.”“알겠어요.”성유리는 처음에는 이 얘기가 끝난 줄 알았지만, 박한빈이 다시 물었다.“그럼 저와 유리 씨가 무슨 사이인지는 어머니한테 뭐라고 설명할 겁니까?”“저희는... 무슨 사이죠?”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유리 씨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방금 제가 한 말은 듣지도
박한빈은 원래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낼 생각이 없었다.의사가 말했듯이 혈종이 가라앉으면 성유리가 스스로 그 일을 떠올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래서 박한빈은 성유리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기억을 못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그는 짧은 시간 이곳에 있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유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이 늘 원하던 모성애를 느꼈을 것이다.그리고 그들 사이의 관계는...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결혼이었다. 성유리의 나이가 적당해지면서 바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고 첫 키스도 웨딩 촬영 중에 했다.그래서 박한빈은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그 모든 걸 잊었다면 다시 ‘구애’하는 것 또한 나쁘지 않겠다고.그때는 그들이 함께하지 않았던 연애라는 과정을 보충할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박한빈이 이미 성유리를 찾았는데 만약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면 그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그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지 않을 것이다.박한빈의 말이 끝난 후, 성유리는 그가 예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영화에서 기억을 잃은 사람이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 보통은 머리가 아프다고 하지 않던가.그런데 성유리는 전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그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박한빈을 쳐다보고 있었다.박한빈은 행여나 성유리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까 걱정되어 계속 말을 이어갔다.“당신 배에 약 5cm 정도 되는 상처 자국이 있을 겁니다. 그건 하늘이를 낳을 때 생긴 거죠.”“왼쪽 허벅지 안쪽에 빨간 점이 있고 허리 쪽에도...”박한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유리가 갑자기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의 목소리가 멈췄다.박한빈이 더 이상 말을 못 한다는 것을 확인한 후, 성유리는 이를 악문 채로 물었다.“그걸... 박한빈 씨가 어떻게 아세요?”“당신은 제 아내입니다. 그러니 유리 씨 몸에 제가 모르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박한빈은 오히려 태연하게 되물었고
성유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박한빈이 갑자기 물었다.“왜 안 갔습니까?”“뭐라고요?”“왜 병원에 안 갔냐고 물었습니다. 집에서 결혼할 준비라도 하고 있는 겁니까?”박한빈은 말하며 한 걸음 가까이 성유리에게로 다가갔다.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성유리의 몸에서 뭔가를 끌어내려는 듯했고 그녀는 순간 멈칫했지만 금세 대답했다.“저... 저한테 꼭 가야 한다는 말 안 하셨잖아요?”“성유리 씨는 저를 돌봐준다고 했잖습니까.”“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그건 박한빈 씨 혼자 결론 내린 거예요.”성유리는 바로 반박했다.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고 박한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저는 당신을 돌봐줄 사람이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해요.”“뭐라고요?”“박한빈 씨 곁에... 예전에도 분명히 여자들이 많았겠죠?”성유리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전 제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 그 여자들과 다르니까... 만약 박한빈 씨가 그냥 장난치려는 거라면 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지 마세요.”성유리의 목소리에는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눈가는 조금 붉어져 있었고 목이 떨리며 뭔가를 삼키려고 애쓰는 듯한 모습이었다.박한빈은 잠시 그런 성유리를 지켜보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전에는 성유리가 그냥 화가 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돌아와서 잘 달래면 될 거라 여겼었다.하지만 방금 그녀와 표현숙의 대화를 듣고 나니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때 성유리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그날 ‘숙련된’ 기술로 그녀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 걸 깨달았다.성유리는 입으로는 자신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손은 박한빈을 밀어내지 않고 있었다.게다가 눈가는 점점 더 붉어지고 있었다.박한빈은 성유리를 잠시 바라본 후, 물었다.“그래서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아니요!”성유리는 아무 생각 없이 부인했다.그리고 빠르게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그 사람은 원래 계속 소리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근처 이웃들을 다 불러 모을 기세였다. 그러나 박한빈은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소리를 지르는 여인은 박한빈을 ‘도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래는 불안해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박한빈이 그녀를 쳐다볼 때 눈동자에는 냉기가 돌고 있었다.그 눈빛은 여인의 입에서 나올 말까지 삼켜버리게 만들었다. 그때, 표현숙이 물건을 들고나왔다.할머니는 박한빈을 보자마자 안색이 바로 어두워졌다.“이 개자식, 또 왔어? 정말 죽고 싶은 거구나. 그래, 지금 당장 너를 지옥에 보내주지.”말하면서 표현숙은 박한빈에게 위험해 보이는 도구를 들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마치 예전처럼.하지만 이번에는 박한빈이 표현숙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그때만 해도 박한빈의 한 손에는 아직 붕대가 감겨 있었다.그렇지만 한 손만으로도 표현숙의 손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강한 힘에 할머니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때 성유리도 안에서 나왔고 박한빈을 보자 그녀도 잠시 멈칫했다.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다가갔다.“엄마, 물건 먼저 내려놔요.”“안 돼! 이 자식이 분명히 너를 괴롭히려고 했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있어. 엄마가 널 지켜줄게.”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리고 박한빈을 다시 쓱 쳐다보았다.그리고 박한빈은 아무 말 없이 표현숙의 손을 밀쳐냈다.그의 힘은 결코 약하지 않았기에 표현숙은 밀려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얼마나 사납고 강한 사람인지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렇게 당하는 건 처음이었다.표현숙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고 계속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성유리가 그녀를 막아섰다.“엄마, 이제 그만하시고 들어가세요.”“안 돼.”표현숙은 바로 단호하게 대답했다.“내가 들어가면 너는 어쩌려고?”“저분은 저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성유리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저는 괜찮아요. 그리고 우리 집 바로 맞은편에 있잖아요.
“응, 아빠가 약속할게.”박한빈은 이 호칭에 원래 낯설고 어색함을 느꼈었다.하지만 이 순간, 그 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왔다.그리고 자신의 목소리에 담긴 부드러움을 정작 본인은 깨닫지 못했다.그렇게 확답을 듣자 하늘이는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박한빈은 핸드폰을 내려놓고도 오랫동안 멍하니 있었다.그리고 정신을 차린 순간 그의 입가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이미 여름의 끝자락이었지만 오늘따라 날씨가 유난히도 맑고 화창하게 느껴졌다....그러나 이 행복한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다음 날, 성유리는 병원에 오지 않았다.그뿐만이 아니었다.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록 그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박한빈은 의사의 만류도 무시한 채 강제로 퇴원 절차를 밟았다.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가 없이 운행하는 개인 차량을 빌려 바로 마을로 돌아왔다.그리고 단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은 채, 곧장 성유리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향했다.집 앞에 다다르자마자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난 유씨네 그 총각이 괜찮다고 본다니까. 대학생이잖아. 지금은 월급이 좀 적다고 해도 집도 있다잖아? 너희는 먹고사는 것만 해결하면 되지. 돈이 그렇게 중요해?”순간, 박한빈의 표정이 굳었다.마치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그대로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었다.행복감?지금 느껴지는 것은 오직 냉기뿐이었다.‘이 노파가 성유리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낼 생각인 건가?’‘정말 미쳤나? 성유리가 진짜 자기 딸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자기를 어머니라고 불러준다고 해서 진짜 친정엄마라도 된 줄 아는 거 아니야?’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박한빈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 했다.그러나 애써 발걸음을 뚝 멈췄다.성유리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그러나, 그가 들은 것은 침묵뿐이었다.그래서 더욱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그러던 중, 할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박한빈의 퇴원 신청은 결국 반려되었다.사실, 이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심지어 현 서장까지 직접 병원을 찾아와 박한빈을 철저히 돌보라고 특별히 당부했을 정도였다.그렇다면 병원 측에서 조금이라도 허술한 태도를 보일 리가 없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병원에 머무르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무엇보다 이곳의 인터넷 신호가 확연히 더 좋았다.마을에서는 신호가 불안정해 연결이 자주 끊겼지만 여기서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통신이 가능했다.물론, 금성 쪽의 일은 이미 에릭에게 맡긴 상태였다.그러나 에릭은 가끔 선을 넘는 행동을 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직접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무엇보다 성유리에게 자신이 사씨 가문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날 밤, 그녀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그러나 사씨 가문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최근 사씨 가문이 연정우를 대하는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있었다.박한빈은 마치 연정우가 그들에게 어떤 주술이라도 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아니, 아니면 그들이 스스로 정신을 놓아버린 것일지도.아무리 생각해도 수십 년간 상업 전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쉽게 자신의 가문을 타인에게 넘길 수 있는가?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씨 가문의 문제일 뿐이었다.박한빈에게 세상의 이치는 간단했다.자신의 편이 아니면, 곧 적일 뿐.그리고 적에게는 결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다만, 이 모든 일을 성유리만은 모르게 해야 했다.어차피 사씨 가문은 스스로 파멸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니 그들이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현재 박한빈의 ‘사망 소식’은 이미 금성 전역에 퍼진 상태였다.핸드폰을 꺼내 사이트에 들어가자마자 지화 그룹의 주가가 폭락한 기사가 한눈에 들어왔다.그리고 이어지는 수많은 온라인 뉴스들.박한빈은 그것들을 가볍게 훑어본 후 망설이다 하늘이에게 전화를 걸었다.“집에서
성유리의 옷 속으로 파고든 박한빈의 손은 그녀의 허리선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이런 동작은 이미 수백, 수천 번도 더 반복했던 익숙한 일이었다.박한빈은 그녀의 몸에 대해서는 본인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할 정도였다.그러나 정작 깊은 감정이 차오른 순간, 박한빈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말았다.성유리는 더 이상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그녀가 그에게 특별한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단지 남아 있는 감정의 잔재일 뿐이었다.일종의 습관, 무의식적인 반응 같은 것이었다.하지만 그 습관 속에 지금과 같은 친밀함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박한빈의 손길이 특정한 곳을 스쳤을 때 성유리는 마치 털이 곤두선 고양이처럼 눈을 크게 뜨고 경직되었다.그리고 박한빈을 세차게 밀어냈고 심지어 있는 힘껏 따귀까지 때렸다.그것이야말로 기억을 잃은 성유리의 진짜 본능적인 반응이었다.손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손바닥이 부딪히는 소리는 조용한 병실 안에서 유독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그러나 박한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성유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분노도, 원망도 없었다.오히려 어딘가 미련이 남은 듯한 미묘한 감정이 스쳤다.반면,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옷깃을 단단히 쥐었다.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찾아냈다.“박한빈 씨, 왜 그런 거예요?”목소리는 분명하게 떨렸고 눈가도 붉어지고 있었다.성유리의 반응은 예상보다도 훨씬 격하다는 걸 깨달은 박한빈은 순간 멈칫했다.그러나 곧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이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섰다.마치 겁에 질린 토끼처럼.박한빈은 잠시 멈춰 서더니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걱정 마십시오. 더는 건드리지 않을 테니까.”그럼에도 성유리는 여전히 그를 믿지 못하는 눈빛이었다.“진짜예요.”결국 박한빈이 이런 말을 덧붙였다.“방금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습관이었습니다.”그 순간, 성유리의 표
“박한빈 씨? 약 바꿀 시간이에요.”의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들어 박한빈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고 손을 들었다 놨다 하며 입만 뻥끗거렸다.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고 변명을 하고 싶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잔뜩 당황한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하지만 의사는 방금 본 장면이 꽤 흥미로웠는지 씩 웃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방해했네요.”할 일을 마친 의사는 바로 방을 떠나버렸고 성유리는 그 모습에 얼굴이 더욱 화끈 달아올랐다.의사를 쫓아가려고 발을 내딛는 찰나, 박한빈이 또다시 성유리의 손목을 잡았다.“놔요... 당장.”성유리는 원래 박한빈을 꾸짖으려 했다. 왜냐하면 아까 전까지 긴장된 상태로 키스를 니눴기에 목소리가 잠겨버려 힘들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스스로도 왜 지금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가만히 얼어붙었고 얼굴과 귀까지 빨개졌다.성유리의 두 귀는 담방이라도 피가 흐를 듯 붉어졌고 그 모습은 박한빈의 눈에 그대로 보였다.“싫습니다.”그는 일부러 성유리를 놀리려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저기요!”성유리는 화가 나긴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앙다문 채 박한빈을 가만히 주시했다.“아프십니까?”그 순간, 박한빈이 갑자기 물었다.“네?”“그렇게 물고 계시면 안 아프시냐고요.”박한빈은 손을 쭉 뻗어 성유리의 입술을 살짝 어루만졌다.그의 행동에 깜짝 놀란 성유리는 그제야 자신의 입술에서 피가 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하지만 아예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고 혓바닥에서 나는 피비린내도 사라진 것 같았다.박한빈이 말하고 나서야 성유리는 손을 들어 입술에 맺힌 피를 닦아내려고 했다.그러나 박한빈이 먼저 막아섰다.“제가 하겠습니다.”성유리는 자신의 착각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박한빈의 목소리가 잠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박한빈은 이미 피를 닦아주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래서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저 화장실 가고 싶습니다.”박한빈이 웃으며 말했다.“네?”성유리는 조금 당황했지만 빠르게 몸을 비켜주었다. 하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고 성유리는 그런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그때, 박한빈이 웃으며 물었다,“지금 손이 다쳤잖습니까. 밥 먹는 것도 힘든데 제가 혼자 화장실 갈 수 있을 것 같아요?”그 말에 성유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무슨 뜻이에요?”박한빈은 손을 내밀어 묻는 성유리의 손을 잡았다.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살짝 거칠었다."도와줘요."성유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안... 안 돼요.”말을 하면서 성유리는 잡힌 손을 빼려고 노력했다.하지만 한 손에 밖에 힘을 주고 있었지만 여전히 박한빈의 힘은 그대로였다.그는 손을 놓지 않았고 오히려 손가락이 성유리의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손바닥이 완전히 닿게 만들었다.그 뜨겁고 건조한 체온에 성유리의 얼굴은 금세 후끈 달아올랐다. 마치 이 순간, 성유리가 잡고 있는 것이 박한빈의 손이 아닌 것처럼.“박한빈 씨, 이거 놔요!”성유리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고 눈물이 날 듯한 표정이 되었다.박한빈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방금 저를 돌본다고 했잖습니까. 이제 저를 도와주지 않으실 겁니까?”“제...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는데요? 언제 제가 한빈 씨를 돌본다고 했죠?”“죽도 가져다주시고 직접 먹여도 주셨는데 이게 돌보는 거 아닙니까?”“전...”성유리는 더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박한빈이 그녀의 몸을 갑자기 확 끌어당겼다.그대로 몇 걸음 앞으로 넘어진 성유리는 박한빈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되었다.다행히도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에 있는 붕대를 보고 바로 자신의 손을 침대 난간에 짚어 버티며 겨우 떨어지지 않았다.그 순간, 두 사람의 거리는 더 이상 멀지 않았고 많이 좁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