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 안에는 성유리의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유리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하늘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한편 하늘이는 그림책을 집중해서 읽고 있었다. 최근에 살이 빠진 탓에 커다란 눈이 더 두드러졌고 창백한 피부 때문에 마치 인형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성유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인기척을 들은 하늘이는 고개를 들어 입구를 쓱 쳐다보았다. 병실 안으로 들어서는 사하나를 보자마자 하늘이는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모!” 평소 같았으면 사하나는 활기차게 반응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박한빈의 차가운 반응이 그녀를 너무나도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의 일, 그리고 성유리가 자신에게 털어놓았던 자세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때 성유리가 박한빈을 떠난 이유에 대해 사람들은 그녀가 “가라앉는 배”인 그를 서둘러 떠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박한빈이 성유리를 원망하는 것도 어쩌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늘이는 그의 친딸 아닌가? 사하나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냉정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그러던 그녀는 곧 하늘이와 성유리가 겪어온 일들과 성유리가 출산과 산후조리 때 겪었던 고통들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자신이 옆에 없었다면 성유리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 모든 걸 박한빈은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아예 관심조차 없었던 걸까? 이제 와서 친딸인 하늘이가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는데도 박한빈은 여전히 무관심한 걸까? 수많은 의문들과 이해가지 않는 박한빈의 행동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모!” 하늘이의 밝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그제야 사하나는 정신을 차리고 하늘이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이상하게 여긴 하늘이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성유리 또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하나를 보고 있었다. 성유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사하나는 서둘러 미소를 지으며 대
사하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러나 그 침묵만으로도 성유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성유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음, 잘됐네.” “뭐가요?” 사하나는 이미 나있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드러내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성유리가 박한빈에 관한 주제로 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성유리가 이렇게 애써 담담한 척하는 모습을 보니 사하나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그 사람을 어디서 만났는지 알아요? 그 사람이 맞선을 보려고 했다고요! 그리고는 나한테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말했어요. 언니가 생각해 봐도 너무 냉정하지 않나요?” 사하나는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결국 이보다 적합한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괜찮아요.” 사하나는 시무룩해 보이는 성유리를 보고는 금세 손까지 내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 쓰레기는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생각해요. 걱정 마세요. 저희는 앞으로 더 좋은 남자를 만날 거니까.” 성유리는 살짝 웃어 보이며 하늘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건 하늘이가 평범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거야. 그 외의 모든 건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사하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그래요. 언니 말이 맞아요. 반드시 그렇게 될 거고요.” ... 사하나의 말 덕분에 성유리는 이제 박한빈에게 전화를 걸 필요가 없어졌다. 그러디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의 태도를 사하나를 통해 들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녀가 직접 박한빈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다면 지금처럼 담담하게 있을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된 것이 더 좋았을 수도 있다. 성유리는 이제 박한빈과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를 다시 만날 이유도 다시 얽힐 필요도 없어졌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당신은...” “아까 경찰 부르셨다고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거죠? 제가 대신 한 번 전화를 걸어볼까요? CCTV 자료도 요청해 볼 겸.” “아니요! 됐습니다. 오늘 제 재수가 없는 거로 치죠.” 남자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휙 돌려 떠나가 버렸다. 서훈은 떠나가는 운전자를 굳이 막지 않고 조용히 휴대폰을 꺼내 남자의 차량 번호판을 찍었다. 그 후, 그는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성유리 씨, 괜찮으세요? 병원에 모셔다드릴까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성유리는 간단히 대답하고는 곧바로 앞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종아리의 통증은 여전히 느껴졌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절뚝거리며 사람들의 시야에서 애써 벗어났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도착하자 약국에 들러 간단히 상처를 처치할 물품을 샀다. “이거 뭐에 긁히셨길래 그러신 거예요? 파상풍 주사 맞아야 할 수도 있는데요.” 약사는 피가 줄줄 흐르는 그녀의 다리를 보며 말했다. “상처가 꽤 심한데요.” “괜찮아요. 우선 소독약하고 거즈만 주세요. 나중에 병원 가서 주사 맞을게요.” 성유리가 연신 괜찮다고 말하자 약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필요한 물품을 빠르게 계산해 주었다. 약을 받은 성유리가 약국을 나서려는 순간, 약사는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마치 성유리가 그곳을 더럽혔을까 봐 걱정하는 듯한 눈치였다.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재촉했고 문을 열고 나가는 그때, 성유리는 저 멀리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에 발걸음을 뚝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는 박한빈이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차에 기댄 채로 있었고 저무는 햇살이 가로수 사이로 비쳐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빛은 그의 뚜렷하고 강인한 이목구비를 더 뚜렷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여전히 뛰어난 외모였다. 지금의 그는 마치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 같아 보였고 성유리는 자세히 보지 않아도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과거 박한빈의
사하나가 마련해 준 집은 병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집들은 대부분 오래된 탓에 성유리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발에 묻은 피는 이미 닦아냈지만 피가 사라진 자리에 드러난 길고 깊은 상처는 마치 다른 감정 없이 벌어진 입처럼 보였다. 성유리는 어처구니없게도 빨간 상처 자국이 마치 웃고 있는 입 같아서 섬뜩했다. 겨우겨우 그녀가 탄 엘리베이터가 5층에 도착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성유리는 상처를 간단히 소독한 뒤 하늘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긴 치마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숨길 수 없었다. 특히 하늘이가 찾고 싶어 하던 작은 사자 인형을 찾으려고 몇 번이고 방을 오가며 헤매는 모습은 더더욱 다친 사람인 것이 티가 났다. 세 번째로 상자를 열었을 때도 인형이 보이지 않자 성유리는 점점 불안해졌고 찾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좌절하기도 했다. 결국 쇼핑 앱을 열어 같은 인형을 새로 사려고 했지만 화면을 본 순간 멍해졌다. 그 인형은 이미 단종되어 더 이상 구매할 수 없었던 것이다.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유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건가?” 뒤를 돌아보자 거기엔 박한빈이 서 있었다. 사하나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하늘이의 생사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를 따라온 이유는 대체 뭘까?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성유리는 박한빈의 눈빛 속에 담긴 조롱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박한빈은 어지러운 집 안 풍경을 보며 미간을 약간 찌푸리기까지 했다. 그의 기억 속 성유리는 어떤 집에서 살더라도 항상 집안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있는 공간은 항상 정돈된 테이블과 소파가 있었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정리되지 못한 수많은 상자들뿐이었다. 심지어 일부 상자는 그녀가 찾던 물건을 꺼내려다 열어 둔 상태라 더욱 어수선해 보였다
자신을 쫓아내려는 말에 박한빈은 살짝 당황한 듯 표정이 굳어졌고 안색마저 어두워졌다. 바로 그때, 성유리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인형을 찾던 동작을 멈춘 성유리는 손을 쭉 뻗어 휴대폰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때, 박한빈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성유리의 휴대폰은 그의 힘에 밀려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떨어진 휴대폰 화면에는 발신자 이름이 또렷하게 보였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사하나였다. 박한빈의 입가에는 또다시 조롱 섞인 미소가 드리워지더니 입을 열었다. “이제는 사하나 씨랑 꽤 친해졌나 보네?”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 네가 사는 이 집도 사하나 씨가 마련해 준 거겠지? 지금 네가 이렇게 초라하게 살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난 네가 날 떠난 뒤 더 좋은 남자를 만나 멋지게 살 줄 알았어.” 그는 성유리를 비웃으며 계속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엔 연예인이랑 엮였었다며? 그런데 네가 팬들에게 둘러싸여 모욕당할 때는 그 연예인이 아무 말도 안 했더라? 참 안됐다.” 박한빈의 조롱은 끝이 없었고 그의 눈빛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성유리는 그의 말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조금의 슬픈 감정도 없었다. 박한빈은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슨 감정이라도 읽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성유리는 그저 조용히 서 있다가 그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더니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말씀 끝나셨어요? 다 끝났으면 제 손 좀 놔줘요.” 그녀의 냉정한 반응에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을 쥔 힘은 더욱 강해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성유리는 문득 웃음을 터뜨렸다. “제 대답에서 뭘 얻고 싶은 거죠? 제가 울면서 잘못했다고 당신을 떠난 걸 후회한다고 말하길 원하세요?” “그렇게 해서 박한빈 씨가 얻고 싶은 게 뭔데요?” “박한빈 씨, 당신은 지금 충분히 성공했잖아요.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사실 아닌가요? 그런데 왜 이런 감정
성유리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사하나는 그녀의 다리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하늘이 앞이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 먼저 말을 걸었다. “하늘이 방금 깨어났는데 언니가 안 보이니까 너무 투정을 부려서 제가 언니한테 전화했어요.” “봤어. 근데 그때는 내가 좀 바빠서 전화를 못 받았네.” 성유리는 사하나의 말에 대답해 주며 하늘이의 침대맡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왜 그래? 우리 하늘이 엄마가 보고 싶었어?” 하늘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성유리의 손을 바라봤다. “내 사자 인형은?” 방금까지 울었던 건지 하늘이의 눈은 조금 붉어져 있었고 목소리는 쉰 상태였다. 성유리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꽉 깨물며 대답해 줬다. “미안해. 하늘아, 엄마가 사자 인형을 못 찾았어. 대신 엄마가 새로 하나 사 줄게. 그래도 괜찮을까?” “새로 산 게 예전 거랑 똑같아요?” 하늘이의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하늘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근데 저는 예전 그 사자 인형이 좋은데.” “알아. 엄마도... 다 알아.” 성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다시 가서 꼭 찾아볼게. 괜찮지? 걱정하지 마. 사자 인형은 그냥 숨바꼭질하는 거야. 엄마가 꼭 찾아줄게. 알았지?” 하늘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난 엄마 믿어.” 성유리는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제 밥 먹을 준비하자. 하늘이는 뭐 먹고 싶어? 엄마가 사다 줄게.” “엄마가 만든 만둣국 먹고 싶어요.” “알겠어. 지금 사 올게. 여기서 기다려줘. 대신 이모랑 같이 잘 놀고 있을래?”하늘이는 고분고분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성유리는 안심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순간, 사하나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붙잡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다리는...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별일 아니야. 그냥 어디에 좀 부딪혀서 조금 아픈 것뿐이지.” 성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병원에서는 아무 말 없던 하늘이가 병원을 나서자마자 폴짝폴짝 뛰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뛰어다니면서도 성유리의 손을 놓지 않았고 가끔 뒤를 돌아보며 밝게 웃기까지 했다. 성유리는 그런 하늘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늘 뭐 먹고 싶어?” “엄마가 간장 베이스로 만든 닭 날개 먹고 싶어요.” “그래. 그럼 엄마랑 같이 마트 가서 재료 사자. 어때?” 하늘이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마트 가서 카트도 탈래요.” 성유리는 흔쾌히 허락했다.최근 하늘이가 살이 많이 빠져서 그런지 쇼핑카트에 앉아 있어도 성유리에게는 전혀 무리 되지 않았다. 마트의 밝은 조명 아래 하늘이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 성유리는 마음이 놓였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하늘이었다. “엄마! 저거 사고 싶어!” 하늘이는 오랜만에 이렇게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에 나와서인지 잔뜩 흥분했고 작은 다리를 흔들며 쇼핑카트를 이리저리 움직이려 했다. 성유리는 조미료의 제조 일자를 확인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쇼핑카트가 그녀 손에서 벗어나 앞으로 미끄러져 갔다. 아이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자 성유리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잡으려 했지만 이미 카트는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갔다. “꺅!” 그때, 한 여자의 비명 소리가 마트 안을 울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성유리는 급히 쇼핑카트를 잡아당기며 연신 사과했다. “제가 아이를 잘 보지 못했네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여성은 화가 난 듯했지만 사람들이 많은 장소라서인지 억지로 화를 삭이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아이 데리고 나왔으면 조심해야죠!” “맞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성유리는 허리를 공손하게 숙이며 사과했다. 하늘이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달았는지 여자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박한빈의 차가운 말과 태도는 성유리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과거에도 수없이 박한빈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똑같이 이렇게 강압적으로 사과를 요구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한 이제는 그 일이 하늘이에게까지 반복되고 있었다. 성유리는 화가 나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지만 최대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말했다. “이미 사과했습니다. 아직도 불만이 있으신가요?” 박한빈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잘못한 건 당신이 아니잖아요.” “제가 아이 엄마로서 대신 사과하는 게 잘못된 건가요?” “평생 아이 대신 잘못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지금 저를 훈계하시는 건가요? 제가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는지까지 당신에게 배울 필요 없지 않나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자 박한빈 옆에 있던 여자가 결국 태도를 바꾸며 그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박한빈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훈계라니? 그럴 자격도 없죠. 전 그냥 아이에게 잘못했으면 스스로 인정하라는 걸 가르치려는 것뿐입니다.” 성유리는 그의 말을 듣고 갑자기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럼 아마도 애 아빠가 일찍 죽어서 아무도 이런 걸 가르쳐주지 못했나 봐요. 걱정 마세요. 앞으로는 제가 잘 가르칠 테니.” 그녀는 말을 끝내고 하늘이를 데리고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박한빈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성유리, 너 지금 저주하는 거야?” 잔뜩 격앙된 박한빈의 목소리에 옆에 있던 여자는 물론 하늘이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손 놔요.” 성유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지만 박한빈은 전혀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그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려고 했고 그 모습을 본 하늘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외쳤다. “우리 엄마 놔줘요!” 하늘이는 망설임 없이 쇼핑카트 안에서 일어나 박한빈의 팔을 붙잡고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
성유리의 손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예전에도 박한빈에게 손을 댄 적이 있긴 했지만 온전히 박한빈을 향한 악감정 때문에 힘껏 내리친 적은 없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성유리는 온 힘을 실어 박한빈의 뺨을 쳤다.성유리의 손길에 박한빈의 뺨은 빠른 속도로 붉어졌다.그런 박한빈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성유리가 그를 밀어내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두 사람 이미 찾았어.”그 말에 성유리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물었다.“그게 정말이야?”“응.”“두 사람 지금 어디 있는데? 하늘이는 괜찮대? 지금 어디 있는 거야?”성유리는 박한빈의 앞으로 달려가며 두서없이 말을 내뱉었다.“왜 나 만나러 안 왔대? 설마 내가 찾으러 안 가서 화났대? 너 뭐 숨기는 거 있지?”“그 두 사람 지금 병원에 있대. 눈사태 날 때 산속 동굴로 피신해서 목숨은 건졌지만 동굴 입구가 거의 막혀 있어서 구조대가 진입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나 봐. 어쨌든 지금 구조돼서 응급실로 실려 갔어.”박한빈은 성유리의 어깨를 꽉 감싼 채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차분하고도 느린 말투에서 어떻게든 성유리를 진정시켜 보려는 정성이 느껴졌다.성유리는 박한빈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아직도 의식은 없다는 거지?”“그래.”“목숨에 아무 문제 없는 건 맞고?”박한빈은 성유리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대답했다.“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줄 거야.”“하늘이 보러 가고 싶어.”성유리의 모습은 조금 전보다 어느 정도 진정된 것 같았지만 잔뜩 쉰 목에서는 여전히 거친 소리가 났다.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박한빈이 말했다.“지금 상태가 별로 안 좋은 것 같으니까 내일 가는 게 좋겠어.”“난 지금 당장 보러 가고 싶다고!”방금까지만 해도 진정된 것 같았던 성유리는 다시 폭발하듯 소리를 지르며 박한빈을 밀어냈다.그녀가 문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박한빈이 다시 한번 성유리를 붙잡았다.“알겠으니까 내가 데려다줄게.”“나 혼자 갈 수 있어.”“어느 병원인지는
성유리는 박한빈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의사를 마주한 순간, 박한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바로 알 수 있었던 그녀는 본능적으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하지만 박한빈은 이미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성유리의 동공이 겁에 질린 듯 순간적으로 수축하더니 더는 생각하지도 않고 곧장 박한빈을 밀치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부림쳤다.하지만 성유리는 박한빈의 손아귀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 박한빈 한 사람도 못 당해내던 성유리가 많은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결국, 그녀는 강제로 침대 위에 눕혀졌고 의사는 그녀에게 투여할 진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이거 놔! 박한빈, 이거 놓으라니까! 내가 뭘 하든 너랑 대체 무슨 상관인데? 당장 이 손 놓으라고!”성유리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외쳤다.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는 뭔가를 뚫고 나갈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곧이어 의사가 준비한 진정제의 바늘이 망설임 없이 성유리의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이 개자식아! 박한빈, 넌 진짜 더럽게 이기적인 새끼야! 내가 하늘이 찾고 싶다는데, 하늘이 찾겠다는데 그걸 네가 무슨 자격으로 막아... 네가 너무 역겨워... 역겨워서 미칠 것 같다고!”성유리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곧이어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약해지더니 몸부림치던 힘도 사라져만 갔다.그렇게 성유리를 잡고 있던 사람들의 손길도 사라졌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그녀를 침대 위로 누르고 있었다.성유리의 말을 듣고 있던 박한빈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래, 마음껏 역겨워해.”“난 그냥... 네가 살아있어만 주면 돼.”살아있어만 달라고?성유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만에 하나 정말 성하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성유리에게는 이 세상을 살아갈 이유도, 의미도 없었다.이 모든 게 다 자신의 실수처럼 느껴졌다.이 모든 일이 다 자신의 잘못 같았다.지금 성유리는 그저 성하늘을 찾고 싶을 뿐이었다.그런데 박한빈은 대체 왜
성유리는 어딘가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마음의 준비라뇨? 무슨 마음의 준비요? 저는 한빈 씨가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는데요.”“아, 맞다. 하나한테 전화 해봐야겠어요. 하나가 지금 하늘이랑 같이 있을 거예요. 분명히 하나는 하늘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거라고요.”“한빈 씨는 모르겠죠, 하늘이가 착해 보여도 얼마나 장난꾸러기인지.”“하늘이, 금방 걸음마 뗐을 때부터 여기저기 숨는 걸 좋아했어요. 어느 날에는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가 있었는데,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방을 한참이나 뒤졌어요. 결국, 경찰까지 부르고 나서야 침대 밑에 숨어 있던 애를 찾아냈죠.”“그래도 우리 하늘이 정말 착한 아이예요. 제가 그때 너무 놀랐다는 건 아는 건지, 그 후부터는 다시 저 걱정 안 시켰거든요.”“하늘이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정말 약했어요. 자주 아팠고, 열이 날 때는 제가 밤새 끌어안아 줘야 했어요.”“저는 그렇게 하늘이를 계속 안아줬죠. 품에 안겼던 하늘이는 아주 작고 소중했어요. 물론 엄청 피곤했는데, 그래도 저는 너무 좋았어요. 저랑 피가 섞인 아이였고, 제가 아이의 세상이었으니까요.”“하지만 하늘이는 몰랐을 거예요. 제 세상도 하늘이였다는 걸. 저는 정말 하늘이 없으면 못 살아요...”성유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그녀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연락처를 뒤졌다.성유리는 사하나의 연락처를 찾고 있었다.그녀는 사하나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떨려오는 손에 사하나의 연락처를 찾을 수 없었다.“왜 이러지? 하나 번호가 안 나와요.”성유리가 박한빈에게 물었다.“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하나도 하늘이한테는 엄마랑 다름없는 존재거든요. 계속 연락했었는데, 왜 없지? 한빈 씨...”성유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힘을 실어 꽉 끌어안는 박한빈의 손길에 성유리는 숨쉬기조차 힘들었다.그런데도 성유리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그녀는 그저 멍하니
성유리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새하얀 눈뿐이었다.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러던 중, 성하늘의 목소리가 들렸다.“엄마, 나 여기 있어. 빨리 나 찾아봐!”즐거운 듯한 아이의 목소리가 성유리의 이성을 돌려놨다.맞다... 성유리는 성하늘을 찾아야 했다.하지만 성하늘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성유리는 성하늘과 함께 수도 없이 숨바꼭질하며 놀았다.참을성이 부족하던 성하늘은 숨어 있다가도 몰래 나와 힐끔힐끔 성유리를 살펴보곤 했다.성유리 역시 매번 어디에 숨어 있을지 뻔했던 성하늘을 일부러 모른 척하며 과장된 몸짓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아이의 행방을 묻곤 했다.그럴 때면 성하늘은 즐거운 듯한 웃음을 지었다. 성유리가 “어렵게” 성하늘을 찾아내면 아이는 자신을 못 찾았던 엄마를 바보라며 놀리곤 했다.하지만 이번엔 놀이가 아니었다. 성하늘이 정말 보이지 않았다.성유리는 계속해서 성하늘의 이름을 불렀다.분명 성하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그녀의 귀를 맴돌고 있었다.“엄마, 빨리 나 찾아보라니까!”“하늘아, 어딨니? 장난 그만 치고 나와. 엄마가 정말 널 못 찾겠어서 그래!”성유리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하지만 성하늘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성유리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하늘아! 들리니? 하늘아!”하지만 그런 성유리의 말에 대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건 그저 새하얗기만 한 눈뿐이었다.그 새하얀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던 성유리는 순간적으로 병원을 떠올렸다.성하늘이 병에 걸렸을 때, 성유리는 하얀 천장과 벽을 보며 홀로 간절히 기도하곤 했다.성유리는 그때마다 맹세했다. 성하늘이 다시 건강을 되찾기만 한다면 항상 아이의 곁에 있어 줄 것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하지만 성하늘은 다시 자취를 감췄다.“하늘아...”성유리는 끊임없이 몸부림치다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에 보이는 희미한 노란 빛이 그녀를 혼란스
여자의 말에 끝나기도 전에 곁에 있던 그녀의 남편이 여자를 세게 끌어당겼다.그제야 여자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아이고, 내가 또 말실수했네. 너무 걱정 마요, 하늘이 분명 괜찮을 테니까.”하지만 지금 성유리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지금도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눈사태로 발이 묶인 사람들이라면 밖에서 자신들을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을지 모를 리 없었다. 별일 없었다면 지금쯤 연락이 왔어야 했다.하지만 여태껏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감감무소식이었다.사하나의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있었다.감정 없이 차가운 음성 알림이 반복될 때마다 성유리는 점점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어떻게 정신을 잃지도 않고 버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눈사태가 멈추자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했다.직원들이 다급히 구조대에게 달려가 상황을 설명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성유리는 곧장 그들의 뒤를 따랐다.“사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하지만 성유리는 빠르게 제지당했다.“언제 다시 눈사태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사모님께선...”“제 친구랑 딸이 저쪽에 있어요.”성유리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쉬어 거칠어져 있었고 거친 목소리 안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제발 저도 같이 가게 해주세요.”사실 성유리는 아까부터 최대한 본인의 감정을 있는 힘껏 억누르고 있었다.그녀는 어떻게든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안 그랬으면 눈사태가 일어난 순간, 사람들이 말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달려나갔을 것이다.이곳에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것만으로 그녀는 자신의 인내심을 최대로 발휘한 상태였다.성유리는 여전히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 보면 사하나와 성하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그리고 마침내 성유리를 만난 두 사람이 모든 게 다 장난이었다는 가벼운 말을 해주기만 바랐다.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게 아니었다.지금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이대
성유리는 여전히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녀가 따라가 본다고 해도 별 소용 없었으니 그저 가만히 두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카페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관광객이 거의 없었던 탓에 카페도 한산했다.성유리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시간을 확인하며 하늘만 계속해서 바라보았다.하늘에는 여전히 어두운 먹구름이 가득했다.그런 하늘을 바라보며 성유리의 걱정은 깊어져만 갔다.그녀는 성하늘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에 대한 자책을 멈출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돌아오면 성하늘이 아무리 떼를 써도 바로 호텔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성유리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멀리서 “쿵”하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그 소리에 성유리의 손이 저절로 떨렸다.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도 그 소리에 일제히 밖으로 나가 보았다.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진 성유리도 사람들 틈에 끼어 함께 밖으로 달려나갔다.그들이 있는 곳은 산 정상에 가까운 위치였다.눈을 구경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던 만큼 반대편의 설산에서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내려오는 눈이 한눈에 들어왔다.그 광경은 시각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고 솔직히 말하면 공포감까지 불러일으켰다.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으며 혼란에 빠진 채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다.직원들은 눈사태가 여기까지 오지는 않을 거라는 말로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 빨리 대피할 것을 권유했다.하지만 성유리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그녀는 다급히 직원을 팔을 덥석 붙잡고 물었다.“저쪽... 설마 스키장인가요?”“네. 그래도 전문 인력들이 있어서 미리 사람들 대피시켰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그렇게 말하는 직원의 표정도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성유리는 곧장 몸을 돌려 사하나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하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전화기가 꺼져있다는 자동응답뿐이었다.극도의 불안함에 성유리의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들을 바라보았지만 그쪽도
성유리는 그녀의 말에 그저 가벼운 미소만 지어 보였다.그때, 남자아이가 성하늘이 손을 잡고 다가왔다.“엄마, 동생이랑 참새 찾으러 가고 싶어.”“이 녀석이, 갑자기 무슨 참새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지금 참새가 어디 있는데?”“있어! 어제도 봤거든!”“없어, 네가 잘못 본 거겠지.”“진짜 있다니까. 못 믿겠으면 내가 지금 가서 보여줄게!”두 사람은 그렇게 말싸움을 시작했다. 결국, 여자가 남자아이의 귀를 잡아당겨 아이를 호텔 안으로 끌고 들어가며 싸움이 일단락됐다.성유리는 그런 모자의 모습을 보며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그녀는 성하늘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다 놀았어? 우리도 이제 돌아갈까?”성하늘이 고개를 저었다.“난 조금만 더 기다려 볼래.”“뭘 기다리는데?”“아줌마가 오늘 나 데리고 스키 타러 간다고 했거든.”시간을 확인해 보던 성유리가 말했다.“아줌마도 이 시간에 돌아오기는 힘들 거야. 우리 먼저 들어가서 낮잠 좀 자고 있을까?”“싫어, 난 여기서 기다릴래. 아줌마가 예전부터 약속했단 말이야.”성하늘은 고집을 부리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장갑 낀 손가락으로 계속해서 눈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그런 아이의 모습에 성유리가 몇 마디 더 꺼내려던 그때,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보다 귀가 더 밝았던 성하늘은 곧바로 그 엔진소리가 사하나의 차라는 것을 눈치채고 벌떡 일어나 외쳤다.“아줌마!”“나 왔어.”사하나가 차에서 내려 성하늘을 안아 올리더니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며 물었다.“아줌마 안 늦었지?”“조금 늦었네요.”성하늘이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그래도 괜찮아요. 아줌마가 와 줘서 기분이 좋거든요. 우리 이제 스키 타러 가는 거예요?”“당연하지! 내가 왜 왔겠어?”“신난다!”성하늘은 한껏 두껍게 껴입은 몸으로 콩콩 뛰다가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그런 아이를 성유리가 재빨리 잡아주었다.성하늘은 민망한 듯 웃으며 사하나에게 물었다.“아줌마, 우리 언제 출발할 거예요?”“지금 바로
사실 경운시에도 눈이 내리긴 한다.하지만 지리적인 이유와 날씨 문제로 눈이 내린다고 해도 가벼운 눈만 내릴 뿐, 성하늘이 원하는 그런 두껍게 쌓이는 눈은 내린 적이 없었다. 아이가 원하는 눈은 온 세상을 덮을 정도로 많이 내려 눈사람을 만들 수 있는 그런 큰 눈이었다.작년에는 사하나가 성하늘을 데리고 큰 눈을 보기 위해 해외여행까지 가자는 제안을 한 적도 있었다.아쉽게도 그때는 성하늘이 너무 어렸던 탓에 성유리가 먼저 거절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자기만의 사고방식이 생긴 성하늘은 곧장 사하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아이는 뒤늦게 성유리의 존재가 떠올랐는지 곧장 고개를 돌려 애처로운 눈빛으로 성유리를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우리 갈 거지?”아이의 표정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성유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같이 가자.”“앗싸!”한껏 흥분한 성하늘은 폴짝폴짝 뛰며 사하나에게 출발 날짜를 물어보았다.한술 더 떠서 아이는 자신의 저금통을 꺼내며 장갑과 모자를 사겠다며 설쳐댔다.사하나는 이번 달 말에 출발하기로 했지만 바빠진 일정 탓에 연말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그때는 한빛시가 가장 추워질 시기였고 도시 전체가 새하얀 눈에 뒤덮일 한겨울이었다.성유리는 혹시라도 성하늘이 그곳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되었지만 아이는 계속해서 아무 문제 없을 거라며 성유리에게 애원했다.“엄마, 우리 제발 가자. 제발! 나 말 잘 들을게!”성하늘의 간곡한 부탁에 성유리는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그녀들이 도착하던 날, 날씨는 아주 화장했다.택시 기사마저 한빛시의 날씨가 가장 좋은 날이라고 말할 정도였다.내리쬐는 햇볕은 따스했고 도로변에 앉아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도 보였다.사람들의 붉은 코트와 집 앞에 걸려있는 노란 옥수수는 이 도시만의 독특한 풍경 같아 보였다. 그동안 사진이나 그림으로만 보던 장면들이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지자 성유리도 모든 것을 아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정겨운 풍경이긴 했지만 그녀들이 머물 곳은
오히려 사하나는 연정우의 일로 성유리에게 사과를 했다.“제가 상황파악도 제대로 못 하고 억지로 엮어주려고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거예요. 솔직히 저도 연정우가 그런 사람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사하나는 한껏 찌푸린 얼굴로 변명해보았지만 성유리는 그녀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성유리의 눈빛에 사하나는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며 조심스레 물었다.“언니... 혹시 제 탓하는 건 아니죠?”“내가 네 탓을 왜 해?”성유리가 웃기다는 듯 말했다.“이게 너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그래도... 그때 제가 부추기지만 않았다면...”“난 어른이잖아. 이런 기본적인 판단능력도 없으면 나중에 무슨 결정을 내리든 다 다른 사람 탓이나 하게?”성유리가 별수 없다는 듯 말했다.“게다가 나도 그때는 연정우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 뒤늦게 둘이 안 맞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뿐이고.”“안 맞는 게 아니라, 연정우가 언니한테 안 어울리는 거죠!”사하나가 곧장 대답했다.“언니 그거 알아요? 요즘 박한빈 버린 여자가 연정우한테 차였다고 소문 돌고 있던데요.”“그 새끼 완전 미친놈 아니에요? 박한빈한테 사업으로 밀리니까 그딴 식으로 물어뜯는 거잖아요. 싸울 거면 자기들끼리 싸우든지, 왜 언니까지 끌어들인대요? 언니가 뭘 잘못했다고!”사하나는 말할수록 점점 화가 치미는지 언성을 높였다.성유리는 그런 사하나의 모습에 오히려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물이나 좀 마시고 진정하지 그래?”사하나는 태연한 성유리의 모습에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성유리는 그저 가만히 서서 사하나의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사하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유리를 빤히 쳐다보았다.그 시선에 어딘가 머쓱해진 성유리가 물었다.“왜 그래?”“언니는 화도 안 나요?”사하나가 물었다.“왜 화가 나야 하는데?”“그러니까... 연정우가 언니를 그런 식으로 대했던 것도 그렇고, 사람들이 함부로 떠들어 대는 것도 그렇고, 화가 나야 하잖아요.”사하나의 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