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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도 소용없어
빌어도 소용없어
Penulis: 온설

1 화

Penulis: 온설
“환자분은 자궁 내막이 너무 얇고 출혈도 있어서 반드시 입원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유산할 위험이 큽니다.”

“아니요, 입원 안 해요.”

연지수는 잠깐 망설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입원하지 않는다고?

의사가 놀란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포니테일을 묶은 그녀를 본 순간 이해가 된다는 듯 진단서를 내밀었다.

“그럼 치료를 포기한다고 사인하세요. 저는 분명히 입원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병원 탓하면 안 됩니다.”

연지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술을 깨물며 입원 포기 동의서에 사인했다.

그녀는 공손히 인사한 후 의사 사무실을 나섰다. 그 순간 야유에 찬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요즘 대학생들은 너무 막 나간다니까. 벌써 몇 번째 유산일지 누가 알겠어?”

연지수는 벽을 짚고 의사 사무실 문 앞에 서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 겨우 병원 밖으로 걸어 나와 택시를 잡았는데 하늘에서 별안간 천둥이 내리쳤다.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고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녀는 양산을 들고 최대한 넘어지지 말자고 걸음을 늦추었다.

하지만 양산을 펴는 순간 바람에 날려 갔고 그녀까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대표님, 저기 사모님이...”

기사 주민재가 급브레이크를 밟고 바닥에 넘어진 연지수를 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뒷좌석에 앉은 배도현은 고귀한 기운을 내뿜으며 연지수를 흘겨봤는데 비에 쫄딱 젖어서 나름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쌀쌀맞게 대답했다.

“상관 마세요.”

주민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사모님인데...”

“아영이가 급히 병원에 가봐야 하니 얼른 운전해요!”

“그래도 대표님...”

“기사 일 관두고 싶어요? 그럼 꺼지든가!”

“괜찮아. 병원 거의 다 왔어.”

주민재는 괴로운 마음을 뒤로하고 하는 수 없이 클랙슨을 눌렀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연지수는 차가 떠나갈 때 허겁지겁 피하느라 옆으로 굴러갔다.

마이바흐가 도로를 질주했고 그녀의 얼굴에 빗물이 잔뜩 튀었다.

숫자 4로 도배한 저 번호판을 모를 리가 있을까? 남편 배도현이 양동생 배아영의 행운 숫자가 4라면서 고른 번호판인 것을...

이따금 배를 쿡쿡 찌를 듯한 고통이 전해졌고 뜨거운 무언가가 온몸에 퍼져 흘렀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연지수는 배를 움켜쥐고 간신히 앞으로 기어갔다. 행여나 배도현이 봐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어갔다.

그 시각 마이바흐가 병원 입구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연지수가 얼굴에 희열을 띄었다.

“도현 씨, 나 좀 살려줘요. 우리 아이 살려줘요...”

다만 그녀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버렸고 문이 열리자마자 배도현이 품에 배아영을 안고 허둥지둥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 선생님, 제 동생이 심장이 아프대요. 얼른 이리로 와주세요.”

연지수는 겨우 올렸던 손을 툭 떨어트렸다. 기대에 찬 그녀의 마음도 바닥을 치고 빗물에 씻겨서 냉랭하게 휩쓸려갔다.

“여기 누가 쓰러졌어요. 피도 엄청 많이 흘렸다고요. 얼른 도와주세요!”

연지수가 결국 기절했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바로 앞에 잘생긴 외모의 배도현이 보였다.

“도현 씨.”

이 남자가 옆에 있을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아무리 쌀쌀맞은 태도라 해도 그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연지수는 겨우 일어나 앉으며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미처 닿기도 전에 매정하게 내팽개쳐졌다.

“임신했어?”

배도현이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알고 있었네요.”

그녀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내 아이를 가졌는데 또 일부러 지우려고 해? 차라리 확 죽어버리지 그랬냐?”

그는 연지수를 침대에서 확 잡아당기고는 죽일 듯이 노려봤다.

침대 모서리에 허리를 부딪친 그녀는 기쁨도 잠시, 파르르 떨리는 눈빛으로 얼른 해명했다.

“도현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일부러 숨긴 게 아니라...”

“아니면 뭐?”

배도현이 바짝 다가오더니 그녀의 목을 조르고 음침한 기운을 내뿜었다.

“살인자 딸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아이를 낳아? 너희 집안에서 아영이한테 빚진 거, 우리 집안에 빚진 거 죽었다가 깨어나도 못 갚아. 알아듣겠어?”

연지수는 목도 아프고 복통까지 호소하며 숨이 턱턱 막혔다.

다만 이런 나날에 진작 적응한지라 고통이 한계를 넘으면 무덤덤해질 따름이었다.

그녀는 수척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퀭한 눈빛은 일말의 희망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현 씨 말이 맞아요. 나 같은 게 죽는다고 달라질 건 없죠.”

더는 숨이 쉬어지질 않고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그녀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날 죽여요. 그럼 모든 게 끝나잖아요.”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죽음을 맞이했다.

커다란 눈물방울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려 배도현의 팔을 축축이 적셨다.

뜨거운 눈물에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이 든 건지 대뜸 그녀를 밀쳐버렸다. 너무 세게 내동댕이친 나머지 연지수가 침대에 가차 없이 쓰러졌다.

“죽고 싶어? 내가 쉽게 죽여줄 것 같아? 천만에! 죽지 못해 사는 게 어떤 건지 톡톡히 가르쳐줄 거야!”

흩날리는 긴 머리가 그녀의 눈 앞을 가리고 마치 미래까지 새까맣게 가려버린 것만 같았다.

이 남자가 이리 쉽게 놓아줄 리 없지.

한참 후 배도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도 없는데 넌 살아서 뭐해?”

아이가 또 죽었다고 한다...

연지수는 손이 파르르 떨리고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입을 벌렸지만 딱히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울고 싶지만 눈물이 메말랐고 누가 목을 조르듯 숨이 막혔다.

온몸을 움츠리고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반복적인 임신과 뒤이은 유산, 희망에서 슬픔까지 무한 반복이었다.

그녀는 이제 지칠 대로 지쳤다.

배씨 일가에 진 빚은 다음 생에 갚아야 할 듯싶다.

“17번 병실 환자분, 약 바꾸셔야죠... 여기요! 여기 환자분이 자살했어요!”

약을 바꾸러 온 간호사는 빨갛게 물든 그녀의 손목을 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연지수는 곧장 응급실에 실려 갔고 다시 눈을 뜨자 짙은 소독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자살이라니? 아이가 없으면 또 생길 테지만 지수 씨가 죽으면 남아있는 부모님은 어쩌시라는 거예요?”

그녀를 구해준 의사는 마침 그녀의 진찰을 맡은 의사였다. 목숨이 소중한 줄 모르고 자살 시도를 하는 그 모습에 의사가 버럭 화를 냈다.

한편 연지수는 퀭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슬픔에 젖어 들었다.

‘내가 아직도 살아있다니...’

“부모님 안 계세요.”

이제 그녀를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8년 전 그 일로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는 아빠를 잃었고 또한 그 바람에 배씨 일가와 배아영을 해친 대역죄인으로 거듭났다.

‘나 같은 사람은 사랑받을 자격 없어!’

“그럼 남편은요? 전화번호 불러봐요. 이 지경이 됐는데 누군가는 돌봐줘야 할 거 아니에요?”

연지수는 배도현의 전화번호를 불렀다.

통화연결음이 울리자 그녀는 은근 기대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받아줄 것 같아서.

다만 줄곧 연결음만 울렸고 이제 막 전화를 끊으려 할 때 마침내 배도현이 전화를 받았다.

“연지수 씨 남편분 되시죠? 지수 씨가 방금 자살 시도를 해서 이제 겨우 수술을 마치고...”

“죽었나요?”

배도현이 차분하게 묻자 의사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

“뭐라고요?”

“죽으면 말해요. 시신 확인하러 갈 테니.”

충격에 휩싸인 의사가 다짜고짜 전화기에 들이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연지수의 얼굴에 띈 미소도 싸늘한 어둠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럴 줄 알았어.’

“선생님은 저를 그냥 내버려 두셨어야 했어요.”

이제 더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

연지수는 손을 들고 돌돌 감싼 붕대를 찢었다.

화들짝 놀란 의사가 허겁지겁 그녀를 말렸다.

“미쳤어요? 그까짓 남자 때문에 죽을 작정이에요? 이런 개자식은 뻥 차버리면 그만이지 뭣 하러 나쁜 생각만 하는 거냐고요?”

연지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가 죄인이에요. 나 때문에 두 사람이나 죽었거든요. 이 빚은 평생 갚을 수 없어요.”

의사는 더 이상 못 말리겠던지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다.

“그럼 배 속의 아이는 어쩔 건데요? 같이 죽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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