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어디 가시려고요?”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연지수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망했다, 이제 끝장이야.’야속한 운명을 탓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그 사람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저는 여기 팔려왔어요. 제발 한 번만 아무것도 못 본 척하고 저 좀 도망치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사모님?”순간 익숙하면서도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연지수는 고개를 번쩍 들고 그 사람을 쳐다보더니 충격을 금치 못했다.“기사님!”이때 요란스러운 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왔다.주민재는 주위를 쭉 살펴보더니 연지
지하실 문을 벌컥 차고 들어서니 연지수가 한창 컵라면을 먹으면서 각종 구직 사이트에 이력서를 넣는 중이었다.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미처 마스크도 쓰지 못하고 문 앞에 떡하니 서 있는 배도현을 쳐다보았는데 그 순간 오른쪽 얼굴에 난 지네 같은 흉터가 한눈에 들어왔다.“얼굴이 왜?”배도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혼자 그었어요.”연지수가 홀가분하게 대답했다.그 당시 험악한 궁지에 몰렸을 때 그녀는 과감하게 미모를 포기하고 목숨을 건졌다.지나간 일은 더 이상 되새기고 싶지가 않았다. 되새겨봤자 아무도 그녀
한편 배아영은 라면 국물에 더럽혀진 옷차림으로 서재에 뛰쳐 가서 다짜고짜 고자질해댔다.“흑흑, 오빠... 지수 씨가 나 괴롭혀요.”한창 사색에 잠겨있던 배도현이 그녀를 보더니 얼른 가까이 다가왔다.“지수가 이랬어?”그는 더러워진 배아영의 옷을 보다가 한없이 짙은 표정으로 변했다.“네! 지하실 들어가자마자 라면 국물부터 퍼붓는 거예요. 그래도 원망은 안 해요. 내가 싫어서 그러겠죠 뭐.”“걔가 뭔 자격으로 널 싫어해?”배도현이 되물었다.배아영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계속 속상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내가 여기서 지내는
배도현은 이를 박박 갈았다.“아주 잘해! 계속해봐 어디.”운전석에 탄 김형곤은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외부인으로서 계속 남아야 할지 바로 출발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할 때 연지수가 그를 도와줬다.“출발해요, 집사님. 할아버지 기다리실라.”배동욱을 언급하니 배도현도 그제야 잠잠해졌다.다만 그의 눈빛은 연지수의 등에 꽂히기라도 한 듯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그녀도 등골이 오싹했지만 끝까지 뒷좌석에 앉고 싶진 않았다.‘보고 싶으면 보라지 뭐. 어차피 난 죄인이라 아무 죄명이나 다 뒤집어씌워도 상관없어. 미워하는 게 뭐 대수라
기침이 멎고 나서야 배동욱은 연지수를 돌아봤다.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스치더니 이내 눈물을 글썽거렸다. 배동욱은 연지수의 손을 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수야, 얼굴... 얼굴 왜 그래? 어쩌다 이렇게 됐어?”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흉터를 만지려 했지만 그녀가 아파할까 봐 다시 손을 떨면서 거둬들였다. 눈물이 그의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상처가 이렇게 깊은데 얼마나 아팠을까. 여자애 얼굴에 흉이 져서 어떡해...”배동욱의 걱정에 연지수는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연지수는 앞의 말은 들은 척하지 않고 뒷말만 이어 말했다.“할아버지는 오래오래 건강하실 거예요.”배동욱은 웃으면서 손을 거두었다.“그건 인간이 아니라 요괴지.”그 말에 사람들 모두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웃음이 잦아들자 배동욱은 조금 지친 듯 손자에게 연지수와 함께 나가서 바람을 쐬며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연지수는 배동욱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불을 덮어주고 방을 나섰다.배동욱이 그들의 관계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감정이라는 건 흙이 없는 농작물과 같아서 뿌리가 없이는 자랄 수 없었다.그녀는
“이건 내가 아버님께 드리려고 가져온 거예요.”연지수가 말했다.배도현은 그릇을 들고 삼계탕을 먹었다. 익숙한 맛에 열 살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이 삼계탕은 그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 해줬다. 다시 맛보니 마치 어린아이가 된 듯했다.그해 그는 열 살이었고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기였다.만약 그때 연지수가 없었더라면, 삼계탕이 없었더라면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실타래처럼 얽힌 감정들이 마음을 맴돌았다. 배도현의 두 눈에 담겼던 분노는 사라지고 그 대신 애틋한 감정이 자리 잡았다
“배도현 씨, 여긴 도현 씨랑 아영 씨 방이에요. 여기서 나랑 그 짓거리를 했다는 걸 아영 씨가 알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아니나 다를까 배아영의 얘기에 배도현은 한 걸음 물러섰고 두 눈에 드리웠던 욕망도 조금 사라졌다.연지수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그를 비웃더니 기세를 몰아 계속 말했다.“그렇게 아영 씨를 생각한다면 명분을 줘야죠. 맨날 우리 방에 숨어서 바람을 피우는 건 좀...”그런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복수심을 가득 담은 강압적이고 뜨거운 입맞춤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배도현은 마치 벌을 주듯 짧게 입을
과거의 고통이 마음속에 오랫동안 억눌려 있어 털어놓아도 전혀 시원하지 않았고 그저 모든 것이 의미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배도현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입술을 몇 번 움찔거린 후에야 입을 열었다.“네가 아영이를 싫어하는 거 알아. 응석받이로 자라긴 해도 그런 짓을 저지를 애는 아니야.”‘또 동생을 감싸고 돌 줄 알았어.’연지수가 진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아도 그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녀를 도와주겠다고?배아영은 배도현의 앞에서만큼은 착하고 속이 깊은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그를 마음에 두고 있으니까.그녀는
게다가 조금 전 문 앞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라 마음이 더욱 울적해졌다.“아영이를 질투하는 거야,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그러는 거야?”터무니없는 추궁에 연지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속상했지만 더 이상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마음대로 생각해요.”그 말에 배도현은 마치 불붙은 폭죽처럼 완전히 폭발했다.“이젠 설명조차 하기 싫어? 많이 컸다, 너.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벌써 딴 놈 만날 궁리나 하고. 너한테 이런 속셈도 있다는 걸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귀청이 째질 듯한 고함에 연지수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지금의
배도현은 배동욱을 보러 병실로 갔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연지수가 보였다.그녀는 허리를 숙여 할아버지의 얼굴을 닦으면서 배승진과 얘기를 나눴다.“형수님, 속상하지 않아요?”연지수는 수건을 들고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의 팔을 닦았다.“뭐가?”“형은 배아영만 걱정하고 있잖아요.”사실은 배도현의 마음속에 배아영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연지수야말로 그의 아내인데 존중해주지도 않고 지켜주지도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줘야 할 사랑을 다른 여자에게 주고 있었다.하지만 이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연지수가 상처받을까 봐 꾹 참
그동안 배승진은 두 사람의 감정을 쭉 지켜봐 왔다. 예전에는 나이가 어려 바꿀 수 없어서 그저 안타깝게 지켜봤지만 이젠 다 컸고 어른이 되었다. 형이 줄 수 없는 걸 그가 대신 형수에게 줄 수 있었다.“이 세상에 널린 게 여자야. 네 형처럼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많은 사람이라면 여자들이 엄청 달라붙을걸? 네 형수는 너무 어리석어서 문제야. 됐어. 난 아영이한테 가봐야겠다.”진태범은 말을 마치고 배승진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웃으며 가버렸다. 가면서 지나가는 간호사들에게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오늘 헤어 스타일 괜찮은데요? 립스틱
배도현은 왜 주변 사람들이 그와 배아영의 관계를 오해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아영이는 그냥 내 동생이야.”이 한마디에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대체 어떻게 강조해야 그와 배아영의 관계를 믿을까? 두 사람 사이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데.이젠 덜 무서운지 배도현을 흘겨보면서 여유롭게 말했다.“형은 동생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요.”조금 전 배아영이 강가에서 했던 말과 목숨을 걸고 억지를 부리던 모습이 떠오르자 배도현은 마음이 더욱 답답해졌다.점점 짜증이 밀려와 셔츠 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연지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걱정 가득한 배도현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여 웃음을 터뜨렸다.“왜 웃어?”그녀는 웃음을 거두고 덤덤하게 말했다.“배도현 씨, 내가 아이를 잃고 손목을 그었을 땐 자살이 뭐 대수라면서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죠? 그것도 모자라 몸이 허약한 날 지하실에 던져버리기도 했고요. 근데 아영 씨가 죽으려 하니까 엄청 걱정하네요?”연지수의 낮고 가는 목소리는 마치 쇠바늘처럼 배도현의 마음을 날카롭게 찔렀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조급했던 건 사실이니까.지금 생
“선생님, 빨리요. 제 동생 좀 살려주세요.”흠뻑 젖은 셔츠가 배도현의 몸에 달라붙었다. 온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배아영을 끌어안고 미친 듯이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의사는 환자를 침대에 눕히고는 배도현을 밀어냈다.“보호자분은 밖에서 기다리세요.”배도현이 의사의 손목을 잡고 명령하듯 말했다.“제 동생부터 살려줘요.”“지금 어르신 한 분이 심근경색이 재발해서 응급 처치를 하고 있습니다. 이 환자분도 의료진을 배치해서 치료할 겁니다...”“제 동생부터 살려요. 아직 어리단 말이에요. 먼저
배아영은 반짝이는 두 눈으로 배도현을 빤히 보면서 말했다. 배도현은 좋게 좋게 말하려 했지만 그녀의 말을 다 듣고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를 밀어내고 다시 쳐다보았는데 안타까우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해?”“그런 건 상관 안 해요. 오빠랑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비웃어도 괜찮아요. 오빠가 좋아서 정말 미치겠어요. 나를 배씨 가문으로 데려와서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그러니까 날 버리지 말아요. 네?”배도현은 고개를 저으면서 뒷
배동욱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배아영의 얼굴에 나타났던 미소가 채 번지기도 전에 굳어버렸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배승진을 쳐다보았다.배승진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저 할아버지를 보러 왔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엮이고 말았다.배도현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도 할아버지가 정한 약혼자가 자신일까 봐 걱정했었다.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배동욱에게 향했다.역시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 사람들의 시선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든 여전히 웃으면서 말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