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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화

Author: 온설
배도현은 이를 박박 갈았다.

“아주 잘해! 계속해봐 어디.”

운전석에 탄 김형곤은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외부인으로서 계속 남아야 할지 바로 출발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할 때 연지수가 그를 도와줬다.

“출발해요, 집사님. 할아버지 기다리실라.”

배동욱을 언급하니 배도현도 그제야 잠잠해졌다.

다만 그의 눈빛은 연지수의 등에 꽂히기라도 한 듯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도 등골이 오싹했지만 끝까지 뒷좌석에 앉고 싶진 않았다.

‘보고 싶으면 보라지 뭐. 어차피 난 죄인이라 아무 죄명이나 다 뒤집어씌워도 상관없어. 미워하는 게 뭐 대수라고.’

비좁은 공간에 이상하리만큼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들리는 건 서로의 숨소리뿐이었다.

연지수는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즐비하게 늘어진 건물과 낯선 이 도시를 구경했다.

20여 년을 살아온 고향인데 누구 때문에 이토록 낯설어지다니.

씁쓸한 기분이 온몸을 퍼져 흘렀다. 단단해진 줄 알았던 심장도 어느새 물러터져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가 어깨를 파르르 떨자 배도현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혹시 우는 거야?’

다만 곧장 이 추측을 지웠다.

그녀처럼 독한 여자는 그해 그 큰일을 겪었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렸고 아이를 잃었을 때도 자살로 책임을 회피하는데 지금 울 리가 있을까?

가는 길 내내 아무런 대화가 없었고 김형곤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는 액셀을 꾹 밟고 가장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얼른 배씨 저택에 도착해서 이 난감한 경지를 벗어나야 하니까.

도착하자마자 김형곤이 가장 먼저 차에서 뛰어내렸다.

“대표님, 사모님, 저는 일단 어르신께 보고드리러 갈게요.”

그는 긴 한숨을 내쉬고 거의 도망치듯 달아갔다.

문득 차 안에 연지수와 배도현 두 사람만 남았다.

그녀가 차 문을 열고 내리려고 했지만 어느새 안으로 잠겨서 꿈쩍하지 않았다. 별안간 배도현이 긴 다리를 내뻗으며 뒷좌석에서부터 운전석으로 몸을 옮겼다.

음침한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니 연지수의 마음이 심란해졌지만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배도현은 한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째려봤다.

“아영이 왜 괴롭혔어?”

‘배아영 때문이구나. 어쩐지 내가 그렇게 싫으면서 가까이 오더라니.’

“그래서 속상해요?”

연지수가 야유 조로 되물었다.

이 남자의 눈빛은 차분하던 데로부터 분노가 들끓었고 이에 연지수는 계속 비난을 퍼부었다.

“속상하면 얼른 결혼해서 당당하게 아껴주면 되죠. 암지에서 꽁냥거리는 건 외도밖에 못 돼요. 대표님이 그토록 아끼는 여자인데 내연녀로 만들 수 있나요?”

배도현은 겉으론 차분해 보여도 이미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그녀의 턱을 꽉 잡아당겼다.

턱의 고통이 머리까지 전해졌지만 연지수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뭐야? 벌써 화났어?’

아니나 다를까 배아영은 그에게 이토록 소중한 존재가 돼버렸다.

“더러운 생각 집어치워!”

야유를 당한 배도현은 실소를 터트리며 그녀의 턱을 더 세게 잡아당겼다.

“아영이는 단지 동생이야. 우리 사이 결백하다고.”

“그래요? 도현 씨는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아영 씨는요?”

연지수가 되물으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든 나랑 상관없어요. 어차피 사인만 하면 우린 곧 이혼하고 남남일 테니까.”

“천만에!”

배도현이 언성을 높이고 그녀를 집어삼킬 듯이 노려봤다. 마치 그녀의 영혼까지 빨아들이려는 것처럼 음침한 눈빛으로 째려봤다...

“아영이 아빠는 죽었고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의식불명 상태야. 부모가 진 빚은 네가 갚아야지. 두 사람 목숨이야. 평생을 바쳐도 못 갚아 넌!”

강인했던 연지수의 마음이 이 순간 와르르 무너졌다.

깊게 파묻어둔 기억이 유리 조각처럼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다. 연지수는 어두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아니요, 이제 다 갚았어요.”

이 말은 배도현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알리는 말이다.

뱃속의 두 아이는 배아영의 손에서 죽어 나갔으니 그녀도 이제 더는 배씨 일가에 빚진 게 없다.

배도현을 향한 피로 물든 이 사랑은 번마다 그에게 능멸을 당하면서 한치의 미련도 없이 단념하게 되었다.

말을 마친 연지수는 단호했던 눈빛이 생기를 다 잃고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별안간 당혹스러워진 배도현이 그녀의 턱을 놓아주었다.

“안돼! 넌 내 여자야. 내 허락 없이 어디도 못 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내 거란 말이야! 이번 생에 오직 내 여자로 살아야 해!”

그는 연지수를 조수석에 짓누르고 거칠게 입술을 벌리더니 키스를 퍼부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연지수는 화들짝 놀랐다. 마구 몸부림치면서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힘으론 당최 상대가 안 됐다.

차오르는 굴욕감에 그녀는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악착같이 발악하다가 비명과 함께 배도현이 몸을 떼어내고 입에 흥건한 핏물을 닦으며 그녀를 노려봤다.

“넌 오직 내 여자여야만 해... 그래야만 한다고!”

이 한마디를 남긴 채 남자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연지수는 조수석에 앉아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좀 전에 배도현의 태도를 되새기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서 깊은 한숨만 몰아쉬었다. 그녀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눈물을 쓱 닦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차에서 내렸다.

할아버지의 컨디션이 안 좋으니 이 슬픔은 묻어둬야 한다. 괜히 어르신까지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진 않았다.

배도현이 차에서 나간 지 한참 돼서 둘 사이에 간격이 벌어진 줄 알았더니 이 남자가 글쎄 대문 앞에서 우두커니 기다렸다.

“같이 가.”

배도현은 그녀를 흘겨보며 늘씬한 손을 내밀었다.

다만 연지수는 보는 척도 안 하고 스쳐 지나갔다.

“할아버지 편찮으셔. 우리가 티격태격하는 걸 보면 기분까지 영향받으실 거야.”

그의 말을 듣자 연지수는 마지못해 걸음을 멈췄다.

배도현도 그녀가 할아버지만큼은 몹시 걱정한다는 걸 잘 알기에 선뜻 앞으로 나아갔다. 연지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짜고짜 방 안에 들어서는 이 남자...

손끝에서 차가운 기운이 전해졌고 심지어 깍지를 끼려고 하자 연지수는 재빨리 피했다. 하지만 배도현이 더 세게 잡아당겼다.

“나라고 이러고 싶은 줄 알아? 할아버지께 보여드리기 위해서야.”

연지수는 마침내 손을 풀고 밀려오는 짜증을 억누르며 나란히 안으로 들어갔다.

김형곤이 안방에서 나오며 다정하게 손을 잡은 두 사람을 보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오셨어요? 어르신 금방 깨셨으니 어서 들어가 보세요.”

안으로 걸음을 내디딘 순간 기침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연지수는 얼른 배도현의 손을 뿌리치고 배동욱에게 달려가 등을 두드려주었다.

손이 텅 빈 배도현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여 손끝으로 그녀의 온기를 느꼈다.

할아버지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이 남자의 머릿속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할아버지께 잘 보이려고 갖은 애를 쓰네!’

좀 전까지 손을 뿌리쳤던 실망감은 곧이어 짜증과 혐오로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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