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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화

Author: 온설
한편 배아영은 라면 국물에 더럽혀진 옷차림으로 서재에 뛰쳐 가서 다짜고짜 고자질해댔다.

“흑흑, 오빠... 지수 씨가 나 괴롭혀요.”

한창 사색에 잠겨있던 배도현이 그녀를 보더니 얼른 가까이 다가왔다.

“지수가 이랬어?”

그는 더러워진 배아영의 옷을 보다가 한없이 짙은 표정으로 변했다.

“네! 지하실 들어가자마자 라면 국물부터 퍼붓는 거예요. 그래도 원망은 안 해요. 내가 싫어서 그러겠죠 뭐.”

“걔가 뭔 자격으로 널 싫어해?”

배도현이 되물었다.

배아영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계속 속상한 척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싫대요. 본인이야말로 이 집안 여주인이라네요.”

배도현의 눈가에 분노가 서서히 차올랐다.

“날 싫어한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 이참에 그냥 갈래요. 배씨 저택에선 할아버지가 날 싫어하고 여기 오면 또 지수 씨가 눈치 주고... 차라리 멀리 떠나버릴래요. 피차 기분 상하지 않게 내가 없어지면 그만이잖아요.”

그녀가 말하면서 문밖을 나서려 하자 배도현이 확 잡아당겼다.

“가긴 어딜 가?”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늘 그랬듯 이 남자의 어깨에 기댔다.

“역시 오빠밖에 없어요. 우리가 남매가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가까이 들이대기도 전에 배도현이 가차 없이 밀쳐냈다.

“옷 다 더러워졌어. 얼른 갈아입어.”

배아영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머리도 국물 범벅이라 오빠가 대신 씻어주면 안 돼요? 제발요...”

착하고 얌전하게 애원하는 모습에 배도현은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이 몇 년간 배도현에게 잘만 먹히는 수법이니까.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 몸을 뒤로 젖히고 오빠의 손길을 느꼈다.

배도현은 그녀의 머리를 깨끗이 감겨주고 말려주기까지 했다. 머릿결이 흩날리며 그녀의 얼굴에 이따금 손이 닿았는데 뜨거운 촉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배아영은 야릇한 미소를 날리며 계속 떠보듯 그의 손을 잡고 아래로 향했다.

“오빠, 대신 지퍼 좀 내려줄래요? 손이 안 닿아서...”

그녀는 웃으면서 배도현을 이끌고 침실에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 배도현은 그녀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배아영이 놀란 눈길로 뒤돌아보았다.

“나 남자야. 어느 정도 거리는 둬야지...”

더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금세 눈치챈 배아영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과 달리 싸늘한 표정을 짓는 이 남자를 바라본 순간 그녀는 가슴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끝까지 불쌍한 척하며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딱 한 번만요. 우리가 친남매인 것도 아니잖아요.”

“배아영!”

문득 배도현이 언성을 높이면서 분노 조로 쏘아붙였다.

3년 전, 연지수가 떠난 후 배아영은 곧장 배씨 저택에서 나왔다.

널찍한 안방이 마음에 든다고 하여 그녀에게 덥석 내주었고 비싼 수입차를 욕심내니 군말 없이 사주었다. 잠이 안 온다고 졸라대면 옆에서 잠들 때까지 토닥여주던 이 남자가, 그녀가 원하는 모든 걸 이뤄주는 이 남자가, 심지어 회사도 일부분 나눠줄 수 있는 이 남자가 매번 옆에 남아달라고 부탁할 때면 가차 없이 거절하고 있다.

동생이라면서, 늘 그렇게 생각한다면서 차갑게 선을 긋는다.

사실 그도 배아영의 속내를 진작 알아챘지만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그에게 배아영은 단지 동생일 뿐, 보살펴주고 아껴주는 동생일 뿐, 아무리 혈연관계가 없어도 선을 넘어선 안 됐다.

무수한 유언비어에 휩싸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배아영은 막론하고 배씨 일가까지 타격을 받을 테니까.

“일찍 쉬어.”

말을 마친 배도현이 침실을 나섰다.

문이 닫힌 순간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 주저앉았다.

흘러내린 긴 머리는 아직 그의 손결이 남아있고 차오르는 실망감이 온 마음을 잠식해버릴 것 같았다.

남매 사이는 단지 시간문제일 줄 알았는데 전부 그녀의 오산이었다.

연지수라는 천한 년이 둘 사이에 끼어있으니까.

그녀가 있는 한 배도현은 절대 당당하게 배아영을 받아줄 리가 없다.

이 남자와 당장이라도 함께 자고 싶지만 ‘여동생’으로서 마음이 성급하면 안 된다. 괜히 부작용만 일으킬 테고 온순하던 이미지가 무너질 것이다.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가서 오빠 침대 옆에 누워 부드럽게 진도를 나아가야 한다.

‘두고 봐. 내가 반드시 해낼 거야.’

책상 앞에 다가온 그녀는 서랍을 열고 이혼합의서를 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착잡한 마음을 억누르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통화가 연결되자 어두웠던 얼굴에 또다시 환한 미소가 번졌다.

...

배아영의 모든 건 연지수와 무관하다.

한편 메일로 받은 면접 통보에 연지수는 희열을 금치 못했다.

고작 30분 만에 디자인 회사 세 곳에서 면접 통보가 왔으니 말이다.

사실 연지수는 어려서부터 아빠가 동양화를 가르쳐주셨고 14살 땐 전국 어린이 그림 대회에서 1등을 수상했으며 16살엔 국제청소년예술제에 초대를 받았다.

아빠의 사고만 아니었어도 그해 시상식에 올랐을 텐데...

나중에 아빠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여기저기 얹혀사는 신세가 되었다. 고모네 댁 차고에서 지내며 매일 밥하고 청소하고 학교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고모에게 생활비로 바쳐야 했다. 우수학생 장학금도 고모가 모조리 뺏어갔다.

그 뒤로 붓을 살 여유가 없어 오직 장작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고 마음에 새겨둔 한성 미대도 끝내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도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등록금을 전액 면제받는 사립 대학을 선택해 계속 공부했고 그 뒤에는... 결혼을 이행해야 해서 마지못해 배도현에게 시집갔다.

지난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치면 칼로 심장을 후벼 파듯 쓰라린 아픔만 남는다.

연지수는 저절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제 그만 어두웠던 과거에서 벗어나 기쁜 마음으로 면접에 임하려고 연노란색 유니폼을 꺼내입었다. 면접 때 단정하게 차려입어야 하는데 그녀에게 내놓을만한 옷이라곤 이 한 벌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죄다 티셔츠에 청바지, 대충 둘러 입기 편한 옷들뿐이니까.

착장을 마친 후 면접에 응하겠다고 귀사에 전화하려던 참인데 가정부가 대뜸 지하실 문을 두드렸다.

“사모님, 김 집사님 오셨어요.”

김형곤은 배씨 저택의 집사이니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그녀를 찾으시는 모양이다.

기쁜 마음으로 달려나간 연지수는 김형곤과 정면으로 마주쳤는데...

“지수 씨.”

그녀의 얼굴에 난 흉터를 본 순간 김형곤의 미소가 그대로 굳었다.

한편 연지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반갑게 맞이했다.

“집사님.”

“얼굴이 왜?”

김형곤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만 그녀는 지나간 아픔을 다시 들춰내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저 찾으세요?”

“네, 매일 지수 씨 얘기만 하세요.”

두 사람은 나란히 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배도현은 어느새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앉아서 고고한 기운을 내뿜으며 등받이에 기댄 이 남자, 연지수는 힐끔 바라보다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에 모든 이가 난감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리 와.”

배도현은 음침한 표정으로 그녀의 등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됐어요.”

“연지수!”

그녀의 거절에 발끈한 배도현이었다.

“말씀하세요,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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