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곳의 분위기는 매우 어색해졌다. 머리가 상대적으로 둔한 혜태비조차도 알아차릴 만큼. 그녀가 먼저 일어서며 말했다."며칠 전에 석석이가 저를 위해 진귀한 꽃을 많이 심었으니 모두들 가서 봅시다. 그리고 담장 쪽에 삼각매가 피었는데 정말 예쁩니다. 지금 보지 않으면 시들 거예요."송석석도 앞으로 나가 입을 열었다."맞습니다. 꽃구경을 즐기지 않아 연극을 보고싶으시거든 저를 따라 오시면 됩니다."그녀는 먼저 가서 혜 태비를 부축하고 내려온 다음 오씨의 팔을 잡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함께 꽃구경 하러 갑시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얘기를 많이 나누는게 좋겠습니다."오씨는 다소 넋이 나가있었다. 그녀는 무엇때문에 왕청여가 전북망에게 시집갔는지, 그리고 전북망에게 시집간 사람이 오늘 대체 왜 이곳에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씨 가문이 그녀를 보내준 건 그녀가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지만 전북망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오씨는 지금 파리를 먹은 것마냥 속이 좋지 않았다.그녀의 아들, 방시원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왕청여가 찾은 사람이 방시원보다 훌륭한 사람은 아닐 수는 있어도 전북망처럼 좋지 않은 사람이어서는 안 됐다.장공주는 이 변고가 매우 불쾌했다. 원래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혜 태비를 약올릴 생각이었다. 혜 태비가 질투하면서도 억지로 참는 모습이 재밌었기 때문에 계속 보고 싶었다. 방씨 가문 사람들의 출현에 혜 태비를 자극해 손주를 보고싶게 만드는 그녀의 계획은 전부 틀어졌으나 그녀는 분명히 혜 태비의 눈에 어린 질투심을 보았다. 만약 기회를 찾아 사람을 시켜 혜 태비를 자극한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사여묵에게 측비를 들이라고 할 것이다.전소환은 그렇게 장공주를 따라 꽃구경을 갔다. 하지만 만약 이곳에서 왕을 만나지 않는다면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기에 그녀는 계속 두리번 거리면 찾았다. 어젯밤 송석석과의 내기에서 진 시만자는 오늘 부중의 시녀처럼 변장을 했다. 그러나 사람을 모시지는 않겠다고 말했기
이 말을 들은 송석석이 입을 열었다."왕씨 가문은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전북망이 어떤 사람이든 평서백부가 있는 한, 왕청여의 속을 썩이지는 않을 겁니다."그녀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다른 사람은 상관하지 마시고 부인께서 잘 지내시면 됩니다. 지금은 한 가족이 아니니까요. 왕청여는 앞으로 죽어도 방시원과 함께 묻히지 않을 겁니다. 놓아준 이상 그녀가 누구와 혼인을 하든 모두 그녀의 일이옵니다. 그 결과가 좋든 나쁘든 모두 그녀가 책임져야 하지요."오씨는 이 말을 듣자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듯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역시 네 말이 일리가 있구나. 내가 확실히 쓸데없는 일에 참견한 것 같군."그녀는 사실 송석석과 잘 알지 못했다. 송석석이 어렸을 때 몇번 만났을뿐. 후에 송석석이 매산에서 돌아온 후 두 가족도 왕래가 있었지만 그때는 송씨 부인과 왕래 했을 뿐, 송석석과는 기껏해야 안부를 묻는 사이었다.그러나 아들을 잃은 오씨는 기둥 무너진 집과도 같았다. 송석석을 보면 자신의 아들이 전에 송국공의 휘하에 있었고, 또 소 대장군의 휘하에 있었다는 것이 떠올라 너무 친근하게만 느껴졌다.말하는 사이에 한 시녀가 다가왔다."노부인, 저희 마님께서 뵙자고 하시옵니다."이 시녀는 왕표 부인인 최씨의 시녀 추연이었다. 방 부인은 그녀를 잘 알고 있었기에 곧이어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저희 마님께서 단지 옛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사옵니다."그러자 방 부인이 오씨를 바라보며 물었다."만나시겠습니까?"오씨는 최씨가 진정한 참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인정 있는 사람이었기에 믿음이 저절로 갔다. "그래. 한 번 만나보자."그녀는 송석석의 손을 놓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네가 방금 전에 했던 말들 전부 기억해두었으니 너무 걱정말거라."송석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밖으로 나가게 했다. 연극을 하는 징과 북소리가 매우 시끄러워 그들의 대화를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옆에 앉은 사람을 제외하고는.물론 이 점을
최 씨가 한숨을 내쉬었다.“이번에도 초대하지 않았는데 기어코 따라온 겁니다. 방씨 가문에 시집가고 아드님이 돌아간 후 모든 지참금을 돌려주고, 아드님의 위로금도 주었지요. 게다가 가게 두 군데도 보태줬는데 모두 장군부로 가져갔습니다. 시집갈 때에도 북명왕비와 혼수를 비교하려 했었지요.”“이런 말씀은 원래 드리지 않으려 했으나 그녀 때문에 마음 쓰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보여 드리는 겁니다. 그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시고 본인의 건강부터 먼저 챙겨야 할 것 같습니다. 우울한 모습을 아드님께서 저승에서 내려다본다면 편치 않을 것입니다.”최 씨의 말에 오 씨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녀에게 왕청여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리를 분별할 줄 알고 시부모를 공경할 줄 알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하여 이렇게 변한 것인가? 예전의 모습은 모두 거짓이었나? 아니면 변한 것인가?최 씨는 그저 오 씨를 바라볼 뿐이었다. 목구멍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맴돌았지만 결국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 씨는 씁쓸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그녀는 항상 딸처럼 여겨져 방씨 가문에서 평생 과부로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었지요. 사실 근래에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도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을 겁니다. 그녀에 대한 걱정은 그만하겠습니다. 그녀가 선택한 길이니, 그것이 재앙이든 복이든 모두 스스로가 감당해야겠지요.”최 씨는 몸을 낮추며 예의를 갖췄다.“부디 몸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이제 더 머물다간 숨겨야 할 것들이 금방이라도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오 씨도 너무 가여운 사람이다. 방 부인은 오 씨 곁을 지키고 있을때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최 씨가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지만, 상대가 말하지 않으니 물어볼 수 없었다. 어차피 왕청여의 일이니 묻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오 씨가 방 부인에게 말했다. “그대는 저들과 함께 꽃구경하러 가세요. 저는 여기서 잠시 생각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이곳의
그러자 왕청여가 다급히 말했다.“제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실입니다. 바깥에 떠도는 소문은 진실이 아니고 대부분은 북명왕비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저희 장군부에 오물을 던지도록 한 것도 그녀의 짓입니다.”그러자 오 씨는 몸을 훽하고 돌려버렸다. 다리에 힘이 점점 풀리기 시작했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벼렸다. 왕청여의 말들은 그녀를 큰 충격에 빠뜨리게 했다.최 씨의 말을 들었을 때에도 오 씨는 왕청여가 전북망에게 시집간 것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심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왕청여의 이 말을 듣고 나니 오 씨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찌 전북망 같은 쓰레기를 방시원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급히 돌아간 오 씨는 조카며느리와 방 부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아 혜태비의 생일 연회를 다 망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방 부인은 오 씨를 데리고 극장으로 갔는데, 그 모습을 본 송석석이 다가와 물었다.“몸이 불편하신가요? 얼른 돌아가서 쉬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앞으로 만날 날은 많으니 언제든 다시 오셔도 됩니다.”“왕비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오 씨는 감정이 격해져 있었지만 애써 억누르며 품위를 지키려 했다. “그러면 저와 함께 화청으로 가서 좀 쉬시겠습니까?”“감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왕비께서는 여기 계십시오.” 방 부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손님들이 계신데 왕비께서 자리를 비우시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송석석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그럼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시고 연극부터 즐기세요.” 말을 마친 송석석이 돌아서려는 그때, 멀리 서 있는 왕청여이 보였다. 왕청여는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자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복잡함을 가득했다.송석석은 그들이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이는 두 집안 일이기에 함부로 간섭할 수 없었다. 송석석은 진심으로 방씨 가문이 참석해주기를 바랬기에 초대장을
모든 시선이 전소환에게 집중되었다. 전소환은 무릎이 까지고 이마가 찢어져 있었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하지만 아픔 따위는 그녀에게 그리 중요치 않았다. 꿈에 그리던 그 사람에게 닿을 뻔 했는데 실패한게 더 중요했다. 사여묵이 비록 무장이지만 여색을 좋아하는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쓰러지려는 여자를 무의식적으로라도 붙잡아줄 것이라고 전소환은 굳게 믿었다.그녀가 성공할 것이라 믿었던 그 순간, 마치 무언가에 의해 앞으로 끌어당겨진 듯, 그녀는 바닥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사여묵은 어느새 저만치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도 빨라서, 마치 전혀 움직인 것 같지 않았다.아픔을 참으며 고개를 들은 전소환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곧이어 그녀가 마주한 시선들은 하나같이 한기를 내뿜고 있어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시녀들이 그녀를 일으켰지만 그녀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시녀의 몸에 기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가의 군주를 바라보았지만, 가의 군주는 저 멀리서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 조금도 도와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모두의 눈빛에는 조롱과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이제야 알아보겠네, 그 여인은 장군부의 아가씨 전소환이오.” “확실하오? 장군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요?” “모르겠소, 왕비께서 장군부 사람을 초대하셨을 리는 없지 않소?” “출세하려는 건가? 저 움직임은 분명 장군을 노린 것이 틀림없소. 장군부 사람들은 정말 염치가 없구려.” “참, 어찌 염치가 있겠소? 그들은 이미 염치도 없고 주제도 모르는 자들이오. 그야말로 구제 불능이오.”모두의 안 좋은 시선에 전소환은 그만 눈물을 터뜨렸다. 그녀는 사여묵이 자신을 부축해 주시지 않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급한 마음에, 그녀는 왕청여에게 붙잡고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형수님, 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저를 밀었다고요.”그녀는 변명하려 했다. 하지만 왕청여는
양 마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전소환에게 다가갔다.“노비가 이마에 상처를 치료해 드리겠사옵니다.” 양 마마는 장군부에서 집사로 있었기에 전소환과는 오랜 사이라 할 수 있다.전소환도 이마에 상처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냥 가려고 했다. 비록 피는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이 상태로 연회에 참석하는 것은 실례가 되므로 어쩔 수 없이 양 마마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양 마마는 그녀의 상처를 치료해 주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남의 그릇에 담긴 것은 탐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옵니다.”그 말에 수치를 느낀 전소환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같은 시각, 시만자는 송석석을 찾아갔다. “가의군주가 밀어버렸어. 사전에 계획을 한게 분명해. 아마 전소환을 네 남편의 품에 안기게 해 어쩔 수 없이 아내로 들이게 할려고 했을거야. 하지만 이상한 점은 가의군주는 이 계획의 성공 여부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야.”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송석석이 입을 열었다.“음, 난 덕귀 태비가 본인의 손자와 손녀들을 데리고 와 첩을 들이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이미 무슨 꿍꿍인지 눈치챘어. 그들은 어머님이 질투를 느껴 장국에게 측실을 맞이하라고 부추겨 나와 어머님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거야. 그들은 애초부터 장군의 측실이 되려는 전소환을 도울 생각이 없었지. 북명왕부는 장군부의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들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들은 오로지 장군께 여인의 순결을 망쳐 놓고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악명을 씌우려던 계략이었어.” “그럼, 전소환이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감히 장군을 넘볼 수 있어?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지?” 시만자는 전소환의 행동이 너무나 어리석어 할 말을 잃었다.“오늘 그 난리를 쳤는데 어느 가문에서 그녀를 좋게 보겠어?” 송석석은 여전히 담담한 말투였다.“어리석긴 하지. 가의 군주를 따라 북명왕부에 온 것은 자기 어머니의 지지가 있었을 거야. 전북망의 품계가 낮아졌으니 내가 아는 노부인은 무척이나 초조해하
아니꼬운 시선들이 왕청여에게 날아와 꽂혔고, 왕청여는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다.하지만 아직 그녀가 고대했던 광경을 보지 못했기에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전 시댁 사람들과 마주하더라도, 송석석이 난처해하는 모습은 꼭 보고 싶었다. 이토록 성대한 연회에서 작은 실수 정도는 꼭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 굳게 믿었다. 이어 축배를 올리는 시간이 되었다. 식사 중 축배를 올리는 것은 필수적인 절차이므로, 남자 손님들이 한 명씩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태비님께 축배를 올리러 가세.” 그러자 여자 손님들도 젓가락을 내려놓고, 둥근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축배를 올릴 준비를 했다.북명왕이 앞장섰고 회왕과 목 승상, 안만수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여자 손님들에게 단 하나의 눈길도 주지 않고 오로지 태비를 향해 걸어갔다.“태비 마마께서 복수강녕하시고, 오래도록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머니를 대신해 술을 마시려고 북명왕이 따라온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기뻤던 혜태비가 술잔을 들더니 웃으며 말했다. “좋다! 우리 모두 오래도록 건강하게 자손들과 복을 누리자꾸나.” 나이가 좀 있는 목 승상과 안만수에게는 어울리는 축복이었지만 회왕만은 조금 난감했다.목 승상과 안만수가 먼저 술잔을 비우자 태비도 따라 잔을 비웠고, 그 모습에 회왕은 황급히 술을 들이키고 허리를 굽혀 예의를 갖춘 후 물러났다. 남자 손님들도 세 명씩 다가와 혜태비에게 축배를 올렸고 혜태비는 그렇게 이미 몇 잔을 비운 상태였다. 그때 송석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어머님 대신 후작님과 백작님께 술을 올리겠사옵니다. 오늘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만약 접대에 부족함이 있었다면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송석석이 말한 그들은 평양후와 두 백부의 가주들이다. 평양후는 가의군주의 남편인데, 들어오면서부터 가의 군주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아 가의 군주는 이미 화가 난 상태였다.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녀도 굳이 그를 보고 싶지
왕청여는 벼락 맞은 것 같이 충격을 받았다. 전소환이 계속해서 염치없는 행동을 반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번에는 평양후까지 건드리다니..그리고 중요한 것은 평양후가 단순히 잡아준 것이 아니라, 허리를 감싸안았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무의식적인 반응이었을 것이다. 평양후는 남자 손님이었기에, 전소환이 조금 전 정원에서 벌였던 소동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저 이마에 상처를 입은 채 곧 기절할 것 같은 여인이 쓰러지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은 것이었다. 머리보다 행동이 빨랐기에 결국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를 품에 안게 된 것이다.모두가 휘둥그레지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진 송석석이 말했다. “여봐라, 소환 아가씨께서 몸이 불편하시니 집으로 돌려보내거라.” 평양후부의 노부인은 송석석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전소환을 이대로 두었다가는 상황을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양 마마와 부인 2명이 급히 들어왔다. 그들은 전소환의 팔을 양측에서 부축했다. 실상은 끌어내고 있는 것이었다.정신을 못 차리던 전소환은 막 끌려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몸부림치며 가의 군주를 향해 울부짖었다. “군주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제발 저를 도와주시옵소서..!”그녀의 말에 장내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북명왕을 노린 거야, 아니면 평양후를 노린 거야?” “가의 군주가 돕겠다고 했으니 평양후를 노린 걸 수도 있겠군. 듣기로는 평양후의 첩이 노부인의 친척 조카딸이라는데 그 여인이 장남과 장녀를 낳았는데 지금 또 임신 중이라 하더군. 평양후에게 또 첩을 맞이하게 하려는 건가?” “허나 이건 너무 비열하지 않나? 자신이 군주이니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면 될 텐데 말이야.” “자네들은 평양후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게로군. 이미 친정으로 돌아가 숨어 지낸 지 꽤 되었고, 직접 돌아가기가 꺼려져서 이런 일을 벌였을 것이네.”저저마다 의견이 분분했고 평양후는 이 모든 것을 듣고 있었다.가의 군주는 분노로
말을 타고 저택으로 달려온 송석석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왕비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저택 앞을 지키던 하인 한 명이 그 모습을 보고 큰소리로 외쳤다. 조금 전 시만자가 송석석이 오면 바로 보고를 하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송석석이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나타난 모신신은 송석석을 향해 풀쩍 뛰어올랐고 화들짝 놀란 송석석은 재빨리 모신신을 꽉 끌어안았다.“왜 이제야 왔어! 우리 송 대감! 진짜 너무 보고 싶었어!”신난 모신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송석석은 모신신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손으로 모신신의 볼을 마구 만졌다.“신신아, 너 살이 좀 찐 거 같구나.”송석석을 확 밀어낸 모신신은 입을 삐죽 내밀며 반박했다.“너 진짜 이럴 거야? 어떻게 만나자마자 내 아픈 곳을 그렇게 콕콕 찌르지?!”“아니야, 아니야! 안 뚱뚱해! 딱 보기 좋아, 여전히 예뻐!”송석석이 피식 웃으면서 말하자 모신신은 송석석의 팔짱을 끼고는 안으로 걸어갔다.“네가 완전 뚱뚱한 사람을 아직 못 봐서 그래.”이때, 시만자와 만두가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만두는 살이 찐 건 아니지만 몸매가 전보다 훨씬 건장하고 튼튼해 보였다. 그리고 저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차분해진 모습으로 송석석을 보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왜 이제야 돌아와? 공사가 다망하네.”“만두야!”송석석은 만두의 가슴팍을 툭 치다가 건실한 근육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너 이제 무술 실력도 고수 수준에 도달한 거 아니야?”만두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대답했다.“고수까지는 모르겠는데 전보다는 훨씬 늘었지. 이제 너랑 싸우면 지지 않을 자신 있어.”“오, 그래? 그럼 조만간 제대로 한 번 겨뤄봐야겠네?”송석석이 피식 웃으면서 대꾸하자 모신신이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됐거든. 네가 우리 석석이를 이길 수 있다는 게 말이 돼? 그러다가 강냉이 다 털린다? 무술을 고작 2년 배우고 천하무적이라도 되는 줄 알아? 내가 다 창피하거든.”모신신과 만두는 예전부터 티격태격
조금 뒤, 숙청제는 세 사람을 불러들여 크게 혼을 냈고, 광릉후와 제 상서는 무릎을 꿇은 채 연신 사죄를 했지만 유독 송석석만은 입을 꾹 닫고 있었다.숙청제는 그런 송석석을 보며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너도 전혀 억울한 게 아니다! 넌 제 제사가 남풍관에 자주 오가는 사실을 알고도 짐에게 미리 보고를 하지 않았다.”송석석은 밤새 잠도 못 잔 탓에 피곤했는데, 황제에게 혼까지 나고 있으니 마음속에 불만이 차올라 반문했다. “소인이 폐하께 미리 보고를 했다면 폐하께서 남풍관을 수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까?”“수사할 건 당연히 수사를 해야겠지. 하지만…”숙청제는 언성을 높였지만 바로 말문이 막혔다. 미리 알았다면 몰래 제 제사에게 얘기해줬을 거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더군다나 제 제사가 어젯밤 남풍관에 찾아갈지 확실하지 않는 상황에서 송석석이 남풍관에서 제 제사를 본 적이 있다고 보고를 해도 숙청제는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체포되기 전까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제 제사는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 그런 곳에 갈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신분 지위가 높고 백성들의 존경과 찬양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며 모든 이의 모범인 사람이 어떻게 그런 곳에 갈 리가 있단 말인가!송석석이 미리 이 사실을 보고했다면 숙청제는 송석석을 무고죄로 벌했을 것이었다.송석석은 목청 높여 말을 이어갔다.“이 큰 제씨 가문에 노비와 시녀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무도 제 제사께서 남풍관에 오갔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소인은 그저 수사만 했습니다. 누가 언제 남풍관에 나타날지 소인도 예측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남풍관에 제 제사만 있었던 게 아니라 관원들과 세가 자제들도 많았습니다.”송석석의 말은 다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화가 나 있는 숙청제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아무튼 네 일 처리가 확실하지 못했던 건 사실이야. 그러니 변명할 것도 없어!”“네, 모든 게 소인의 잘못입니다. 소인은 지금 당장 경위부로 돌아가서 제 제사를 풀어
한참 동안 버티고 있던 제 상서는 결국 경위부를 떠났고, 송석석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걷고 있는 제 상서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평소에 기세 등등하던 제 상서의 모습은 사라져.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너무도 비참해 보였다.제 상서 때문에 잠이 완전히 깬 송석석은 감옥을 한 바퀴 더 순찰한 뒤, 필명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사실 대감님께서 이만 댁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소관 혼자서도 잘 지킬 수 있습니다.”“괜찮다. 어차피 이제 곧 날이 밝을 때도 됐어. 경위부 밖에 지키고 있는 세가들이 많아. 그 사람들이 난동을 부리면 네 힘으로는 절대 제지하지 못할 거야.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도 그자들 신분을 외부에 알릴 생각이 없는데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폐하께 상황을 설명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어.”“맞는 말씀이십니다.”필명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다음날 아침, 제 상서와 송석석보다 더욱 이른 시간에 황제를 찾아간 사람은 다름아닌 광릉후였다. 그는 숙청제를 보자마자 무릎을 털썩 꿇곤, 눈물을 뚝뚝 흘리며 구구절절 얘기했다.처음 남풍관을 만든 건 사온이었고 사온이 망한 뒤로 남풍관을 닫으려고 했지만 제 제사의 제안과 설득에 넘어가 남풍관을 이어서 계속 운영하게 되었다고 했다.간단하게 얘기하자면 광릉후는 제 제사를 모함하고 팔아버린 것이다.이런저런 방법을 많이 생각해봤지만 결국 제씨 가문을 원수로 등지는 방법을 선택했다. 사국 정탐조에 대해 깊이 알아본 광릉후는 대신 이 죄를 뒤집어쓸 희생양이 필요했고 제 제사를 끌어내려야만 자신의 가문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그 대가는 제씨 가문과 원수 사이가 되는 것이지만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제 제사는 더 이상 남풍관을 자주 찾는 손님뿐만이 아니라 남풍관을 계속 운영할 수 있었던 장본인이 되었기에 문제의 성질이 바뀌었다.하지만 숙청제는 선황제의 체면을 고려해서라도 이 사건을 조용하게 처리할 것이다.조금 뒤, 제 상서가 궁에 찾아왔을 때 그를 맞이한 건 숙청제의 들끓는 분노였다.숙
결국 곁방에서 나온 제 상서는 정당을 지나가다가 불 앞에 앉아 몸을 녹이고 있던 송석석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 상서는 그녀와 마주하기 싫었지만 마음과 다르게 발길은 이미 송석석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만약 송석석이 이곳을 지키고 있지 않았었다면 제 상서는 강제로 아버지를 데리고 갔을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런 행동으로 황제 폐하께 벌을 받는다고 해도 아버지가 이곳에서 창피를 당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시간도 늦었는데 제 상서께서는 댁으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송석석이 물었고 제 상서는 기가 확 죽은 채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으며 겁이 나서 경위부 문턱을 나설 수가 없었다.밖에 나가면 어떠 상황을 마주하게 될지 감도 잡히지 않고, 너무 두려웠다.오늘밤 경위부에 처음 찾아왔을 때, 제 상서는 송석석과 담판할 준비를 철저하게 했는데 송석석은 이 사건으로 이익을 얻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높은 관직으로 수많은 관원들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제 상서는 평소에 권력과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으며 심지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추태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다.하지만 송석석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황제가 북명왕을 경계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정에 인맥이 있어야 나중에 문제가 터졌을 때 편들어줄 사람이 있을 텐데 송석석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 듯했다.이런저런 생각들이 제 상서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조금 전에 본 아버지의 허연 얼굴과 알록달록한 의상은 계속 생각이 났다. 제 상서는 괴로워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대감님께서는 오늘밤 계속 이곳을 지킬 생각이십니까?”“네, 오늘밤은 계속 이곳에 있을 겁니다.”송석석의 대답에 제 상서는 괜히 그녀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이젠 왕비님께서 댁으로 돌아가셔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송석석은 제 상서를 힐끔 쳐다보며 대답했다.“제가 이곳을 떠나면 누군가가 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옥에 갇힌 자들을 데리고 갈 수도 있습니다.그런 상황이 벌어지기라도 한다면
송석석은 이내 곁방을 나서자, 뒤따르는 양기웅이 문을 굳게 닫았다.그렇게 곁방 안에는 부자 두 사람만 남게 되었고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한 채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먼저 아버지에게 다가간 제 상서는 제 제사 머리에 씌워진 천을 거두려고 했지만 제 제사는 두 손으로 천을 꼭 잡은 채 놓지 않았다.제 상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불과 의상을 아버지 곁에 내려 놓았고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일단 의상부터 갈아입으세요. 전 돌아서서 보지 않을게요.”한참 뒤, 옷을 벗는 소리가 들렸고 제 상서는 갑자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으며 코끝이 찡해진 채 눈물도 글썽였다.이 감정이 서러움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어서 생긴 건지 제 상서 자신조차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제 제사는 아들 앞에서 늘 위엄이 넘치는 모습을 보였었고, 심지어는 사람들의 존경과 찬송을 한 몸에 받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제 제사의 말 한 마디면 문단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기에, 지금 이 모습이 외부에 전해지기로 한다면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한참 뒤, 제 상서가 물었다.“다 갈아입으셨습니까?”제 제사는 아무 대꾸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제 상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제 제사는 이불로 얼굴과 몸을 가린 채 합쳐 놓은 의자에 누워 있었고 그의 옆에는 조금 전까지 입고 있었던 의상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제 상서는 화려한 색감의 의상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결국 꾹 참고 있던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도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자신의 아버지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불을 꽉 잡고 있던 제 제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제 상서는 곁방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제 제사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으며 제 제사도 아들이 무슨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아들마저 지금의 자신을 창피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제 상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의자에 털썩 앉았고 방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
조용하게 지켜보던 송석석이 순방영 경위에게 일단 열 냥을 챙기라고 명했다.“이걸로 일단 모든 사람들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샀다가 나중에 풀려나면 이 사람들끼리 알아서 돈 계산하라고 하면 돼.”송석석은 일부러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들으라고 말했다. 이곳에 잠깐 갇혀 있는 것이니 난동을 부리지 말고 조용하게 버티라는 뜻이다.밤이 깊어지자 송석석은 다시 한번 순찰에 나섰는데, 이번에 본 제 제사는 조금 전보다 더 심하게 떨고 있었다.그러자 주위를 경계하던 양기웅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대감님, 혹시 덮을 것 하나만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 어르신께서 추위에 많이 약하십니다...”송석석은 제 제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제 제사는 이상한 자세로 움츠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온몸이 점점 더 굳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계속 이대로 뒀다가는 동상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송석석은 결국 지시를 내렸다.“여봐라. 이 자를 데리고 가서 따로 가두거라. 이대로 두면 동상으로 사망할 수도 있으니 덮을 것도 하나 내어주거라.”양기웅은 얼른 무릎을 꿇은 채 훌쩍이면서 머리를 조아렸다.“감사합니다!”스스로 일어설 힘도 없는 제 제사는 양기웅 등에 업혀 옥에서 나갔고 이를 지켜보던 나머지 사람들은 불만이 생겼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뒷모습으로 보았을 때 업혀 나간 늙은이는 곧 죽을 사람처럼 보였기에 이곳에서 죽은 사람과 함께 갇혀 있고 싶지는 않았다.경위부는 매우 커 정당 옆에는 곁방도 하나 있었다. 곁방은 평소에 송석석이 쉬는 곳으로 공간은 작지만 아늑하고 따듯했다.송석석은 양기웅과 제 제사를 곁방에 안치한 뒤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의자는 마음껏 사용해도 되지만 침대에 누우면 안 됩니다. 이곳은 제가 평소에 잠깐 휴식을 취하는 공간입니다.”송석석의 말에 양기웅이 사정하기 시작했다.“저희 어르신은 몸이 약해서 밤새 앉아 계실 수 없습니다. 저희 어르신께서 일단 이 침대에 며칠만 신세를 지고 나중에 새것으로 사드리
그러자 찻잔을 손에 들고 있던 송석석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제 상서께서 제게 무엇을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스스로의 힘으로 얻을 수 없는 물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송석석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 상서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자 송석석은 이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얼른 저택으로 돌아가십시오. 오늘밤은 제가 직접 이곳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그럼 왕비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솔직하게 얘기해줄 수 있으시겠습니까?”제 상서가 집요하게 묻자 송석석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전 그저 선황제의 체면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일에 이익 관계가 따르는 건 아닙니다. 아 참, 경위부에서 음식을 공급하지 않으니 저택 하인들을 시켜 음식을 보내오세요. 혹은 저희 경위부에서 음식을 살 수 있게 은화를 남기고 가셔도 됩니다.”제 상서는 여전히 송석석의 속을 알 수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석석은 제씨 가문과 깊은 원한 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서로 그리 우호적이지는 않았기에 이렇게 조건 없이 제씨 가문을 도와준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송석석이 선황제의 체면을 위해 제씨 가문을 돕는 거라고 했지만 제 상서는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대감님, 혹시 제 곁에 능력 있는 자가 생기면 제가 북명왕에게 소개를…”“제 상서,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송석석은 재빨리 제 상서의 말을 끊었고 잠시 고민하던 제 상서는 자신의 몸을 뒤적이다가 은화를 챙겨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저택으로 돌아가서 음식을 준비해오겠다고 얘기한 뒤 떠났다.제 상서가 떠나자마자 시만자가 잔뜩 들뜬 얼굴로 달려왔다.“나 먼저 돌아갈게. 조금 전에 황실에서 말을 전해왔는데 신신과 만두가 곧 도착할 거라고 했어서. 넌 오늘밤 이곳을 지키고 있을 거지? 그럼 나 먼저 갈게?!”그러자 송석석이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그게 정말이야?
비록 갈증이 심했지만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거운 찻물을 보자 제 상서는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송석석이 여학에 관한 화제에 관심이 없어 보이자 제 상서는 이내 다른 얘기를 꺼냈다.“북명왕 곁에 유능한 조력자가 한두 명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제가 실력 있는 사람을 소개해드릴 수도…”제 상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석석이 손을 내두르며 말했다.“제 상서님, 괜히 화제를 돌릴 필요 없으십니다. 현재 이곳에서 제 제사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풍관에서 나오기 전에 제가 천으로 제 제사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옥에서도 천을 쓰고 계시니 염려 마십시오.”단도직입적인 송석석의 말에 제 상서는 순간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으며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다.제 상서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창피해 난감했다.만약 옥에 갇힌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가문 중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자가 누구든 제 상서는 직접 다리를 부러트려 가문에서 쫓아냈을 것이다.잠시 침묵하던 제 상서는 한참 지나고 나서야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대감님, 혹시 제 아버지를 풀어줄 수 있으십니까? 제 아버지는 연세도 높고 건강도 안 좋으셔서 오랫동안 옥살이를 할 수가 없습니다.”“제 상서, 전 황제 폐하의 어명을 받고 남풍관을 조사하고 있는 겁니다. 남풍관 현장에 있었던 자들은 이틀 뒤면 바로 풀려날 것입니다. 조사 목적이 남풍관을 찾은 손님들이 아니라 남풍관에 숨어 지내는 사국 정탐조들이니까요. 제 상서께서 아직 모르고 계실 수도 있는데 남풍관 몇 군데에 사국 사람들이 열 명도 넘게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국 사람들은 전부 사온이 진성에 데리고 와서 남풍관에 몰래 숨긴 자들이죠. 제 상서의 부친께서도 이 사국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제 상서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렸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만약 송석석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이 일은 그저 도덕에 어긋나는 정도로 쉽게 끝나지 못할 것이다.아버지께서 대체 이런 바보
광릉후가 떠난 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제 상서는 이내 부하를 시켜 공주부에게 가서 제수찬을 데리고 오라고 명령했다.하지만 일은 제 상서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며칠 전에 한녕 공주와 함께 강남으로 구경을 떠난 제수찬이 3월 달이 되어서야 돌아올 거라는 말을 전해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그 놈은 맨날 머릿속에 놀고먹는 생각밖에 없어! 제씨 가문 세력 덕분이 아니었으면 그 놈이 한녕 공주와 혼인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아?”제 상서가 씩씩거리면서 테이블을 내리치자 곁에 있던 하인이 제안했다.“대인님, 셋째 어르신과 그 부인께 부탁을 드려보는 건 어떻습니까?”“둘 다 멍청해서 오히려 일을 더 그르칠 수도 있어. 전혀 도움이 안 될 것이야!”제 상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만약 사여묵이 진성에 있다면 제 상서는 남자끼리 잘 얘기해서 부탁을 하기도 쉬웠을 텐데 하필 사여묵이 집을 비운 지금, 여인에게 이런 부탁을 하기엔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그렇다고 이 일을 내일까지 끌 수는 없었기에, 오늘밤 반드시 아버지를 옥에서 빼내야 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그가 추운 경위부 옥에서 오랫동안은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제 상서는 부탁할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섣불리 아무한테나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며 지금까지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 앞에서 티를 낸 적이 없었다.혼인을 하고 자식까지 낳은 제 제사는 늘 엄숙하고 정의로운 사람이었으며 송석석이 소주방을 운영한다고 했을 때에도 크게 비판을 했었다.더군다나 제 제사는 평소에 가문 제자들에게도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늘 경고를 하고 주의를 줬었는데, 본인이 이렇게 큰 사고를 칠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한숨을 푹 내쉰 제 상서는 부하에게 가마를 준비하라고 명령한 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경위부로 향했다.오늘밤 남풍관을 조사했고 많은 사람들을 체포했으니 송석석은 아직 경위부에 남아있을 것이다.경위부에 도착한 제 상서는 가마에서 내렸고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