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궁한 뒤 송석석은 서우와 함께 공부로 향했다.이미 저녁이라 공가의 남정네들도 이미 집으로 돌아왔을 시간이었다.마차 안, 서우가 송석석의 손바닥 위에 글씨를 적어냈다.“외할아버지네 댁으로 가는 겁니까?”이에 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외할아버지네 집으로 가는 거다. 보고 싶으냐?”“네!”고개를 끄덕인 서우는 손바닥 위에 글씨를 적곤 곧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공씨 가문 사람들이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역시 들었기 때문이었다.워낙 민감한 나이라 행여나 가족들이 그를 버린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그런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송석석이 말했다.“서우야, 걱정하지 마.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숙부들도 다 널 그리워하셔. 그저 네가 정말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드신 것뿐이야. 네 얼굴을 보면 분명 기뻐하실 거야.”이에 송석석의 팔에 기댄 서우는 고개를 번쩍 들고 뭐라고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결국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절름발이에 벙어리가 됐다고 실망하시면 어떡하지?’잠깐 고민하던 서우가 송석석의 손바닥에 이렇게 적었다.“절 싫어하진 않으실까요?”그 말에 콧등이 시큰해진 송석석은 서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를 건넸다.“바보야. 당연히 기뻐하시지. 왜 널 싫어하시겠어. 괜한 생각하지 마. 분명 널 반갑게 맞이하실 거야.”하지만 2년 동안 수많은 괄시와 폭력에 시달려온 서우에게 이미 자신감은 사라진 뒤였다.‘게다가 내가 돌아온 걸 믿지 않으시니까... 내가 거지로 있었다는 걸 싫어하면 어떡하지...’이런 생각 때문인지 공부 앞에 도착한 뒤에도 서우는 마차에서 내리길 거부하며 송석석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그러자 송석석은 설명을 이어갔다.“서우야, 겁 먹지 마. 전에 너희 외숙부랑도 얘기했는데 여전히 널 그리워하고 계셔.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고. 정말이야.”그럼에도 서우는 고개를 젓더니 자신의 다리와 목을 가리키며 속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그
이런 오해를 하는 게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솔직히 섭섭하한 송석석이었다.사여묵에게서 온 서신을 받자마자 송석석은 영주로 달려갔었다.가는 내내 괜한 기대를 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래도 직접 얼굴은 한 번 보고 싶었던 게 그녀의 마음이었다.그런데 왜 얼굴 한 번 보려하지 않는 건지 싶어 괜히 욱한 송석석은 발을 걷어내 서우를 안아 공양 앞에 섰다.“그래도 얼굴 한 번 볼 수는 있지 않습니까? 오는 내내 서우는 제 손바닥에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게 두렵다고 했었습니다. 그런 서우를 전 그럴 일은 없다고 위로했고요.”비록 송석석의 태도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공양은 무의식적으로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시선이 닿는 순간, 공양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고 숨이 먿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닮았어... 너무 닮았어. 많이 마르긴 했지만 정말 너무 닮았어.’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공양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서우야?”어느새 서러움의 눈물이 얼굴을 잔뜩 적신 서우가 버둥거리며 송석석의 품안에서 내려오려 했다.송석석을 서우를 내려놓자 그는 손을 뻗어 공양을 향해 손바닥을 세 번 마주치는 동작을 하더니 손가락 두 개로 모양을 그리곤 고개를 푹 떨어트리고 어깨가 떨릴 정도로 울기 시작했다.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공양은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우리 둘만 아는 동작이야...’사고 나기 한 달 전, 공양은 부인과 함께 송씨 가문으로 향해 여동생과 서우를 보러 갔었다.그때 서우는 그동안 공부한 내용을 자랑하듯 보여주었고 공양은 글씨를 잘 썼다는 칭찬과 함께 손바닥을 부딪히며 이렇게 약속했었다.“더 열심히 공부하여 스승의 칭찬을 받으면 방단주에서 온 벼루를 선물로 주마.”스승에게서 단주의 벼루가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는 서우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하지만 경조부 일이 바빠 공양은 이 작은 약속을 잊고 말았고 사고가 난 뒤론 그 약속이 가시처럼 그의 가슴에 콕 박히고 말았었다.어떻게 하면 마음이
모두가 달려들어 인중과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공가 노부인이 다시 눈물을 지었다.“하늘도 무심하시지. 저 어린 아이에게 어찌 그런 시련을 내리신단 말이냐. 송씨 가문은 평생 이 나라를 위해 헌신했거늘, 어찌 이리 비참하단 말이냐. 하늘도 무심하시지.”그 말에 송석석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해 그녀는 부랴부랴 밖으로 도망쳤다.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요즘따라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리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서우는 마지막에서야 태부인의 방으로 향했다.미리 호심완을 먹어서인지 다행히 태부인은 정신을 잃진 않았으나 서우가 벙어리에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말에 역시나 쉼없이 눈물을 흘렸다.“우리 착한 손주가 왜 이렇게 됐는냐.”직접 기른 손녀를 잃은 것도 속상한데 그 아이를 꼭 닮은 서우마저 이꼴이 되어 돌아왔으니 가슴을 칼로 베는 듯했다.반나절 정도 지난 뒤에야 다들 눈물을 거두고 나름 차분해진 상태로 정청에 앉았다.부축을 받아 나온 태부인까지 모이자 송석석은 그동안 있었던 자초지종을 전부 밝혔다.서우가 송석석에게 줄 약과를 사러 갔다 그 사고를 면했다는 소식에 다들 2년간 받았던 고초만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지만 적어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다행스러움을 느꼈다.송석석을 감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공부 일가는 인신 매매범에 대한 증오도 감추지 않았다.물론 송석석의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한편, 어느새 감정을 추스른 공양이 중독 상태와 다리 부상에 대해 물었고 송석석은 단신의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독은 시간이 걸리지만 매일 해독약을 마시고 침까지 맞으면 해독할 수 있을 거랍니다. 중독석인 있는 새목단 역시 서우가 스스로 금단 현상을 이겨내 생각보다 치료가 쉬울 것으로보 이고요. 아마 1년 정도면 다시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잠깐 망설이던 송석석이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다리 부상은... 뼈가 잘못 이어붙은 탓에 다시 부러트리고 정골을 받아야 한답니다.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단신의님의 의
노부인은 말끝을 흐렸지만 다들 혜태비가 아이를 차갑게 대할까 걱정하고 있는 것임을 다들 눈치챘다.최근 2년 동안 공씨 가문은 여러 연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지만 바깥 일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특히 송석석 주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선 특히 더 관심을 두었지만 그저 자세히 본인에게 묻지 않은 것뿐이었다.그랬기에 다들 혜태비가 새로 맞이할 며느리를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서우까지 함께 간다면 더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이에 송석석이 말했다.“그 어떤 상황이든 서우를 우선으로 둘 겁니다. 혜태비가 서우를 용납할 수 없다면 함께 국공부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께 약속드리겠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서우가 서러움을 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하지만 그녀의 보장에도 다들 완전히 안심하진 못했다.두 번째 혼인인데다 시어머니의 반대가 있었던 혼인이니 지내는 나날이 즐거울 리가 없다.비록 지금은 북명왕이 송석석과 서우의 편이라지만 어머니와 부인 사이에서 시달리다 보면 결국 인내심이 바닥날 것이라 생각했다.공씨 가문 둘째인 공찬이 말했다.“사실 서우는 공씨 가문 저택에 지내는 게 나을 것 같구나. 여긴 보살펴줄 사람도 많지 않느냐. 유명한 스승이라면 우리도 충분히 모실 수 있어.”공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한참 흥분하다 역시 이성을 되찾은 태부인의 생각은 달랐다. 마음 같아서야 귀하게 되찾은 서우를 곁에서 한치라도 떨어트리고 싶지 않았지만 한평생 온갖 풍파를 겪어온 그녀였기에 인생은 멀리 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서우를 꼭 끌어안고 있는 태부인의 검은색 옷은 마치 새끼를 날개속으로 숨긴 암탉과도 같았다.“서우는 언젠가 국공의 작위를 물려받아야 할 아이다. 송씨 가문에 남은 남자아이라곤 서우뿐이지. 우리 공씨 가문에서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서우가 왕야님 곁에서 자란다면 곁에서 보는 것, 듣는 것, 만나는 사람들 자체가 달라질 거다. 그건 우리
다음 날, 공부에서는 서우가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보내왔다.또한 모든 부인들이 서우에게 줄 옷이며 신발을 짓기 위해 전부 바느질을 다시 시작했다는 소식 역시 들려왔다.공부에서는 실제 행동으로 서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고 있었고 서우도 외가에서 그를 아껴주자 꽤 안심한 듯한 모습이었다.단신의 역시 맥을 다시 짚어보겠다며 직접 국공부에 방문했다.사실 그의 의술이라면 어제 진료만으로 충분했지만 국공부의 얼마 남지 않은 핏줄이기에 더 신중을 기하고 싶어서였다.단신의가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묵연이 장대성과 함께 국공부에 들렀다.“서우 얼굴 한 번 보고 싶어서 온 것이다.”서우 역시 사여묵의 방문에 기뻐하며 공양이 준 벼루를 그에게 보여주더니 통 크게 하나쯤은 선물로 줄 수 있다고 말했다.웃으며 벼루를 받은 사여묵은 서우에게 글씨를 쓰는 법을 한동안 가르치다 송석석과 함께 방을 나섰다.송석석 앞에서 것던 그가 손에 든 물건을 보여주며 웃었다.“내게 단주의 자운연을 선물로 주다니. 통이 아주 크군.”하인에게 차를 내오라 분부한 송석석 역시 미소를 지었다.“숙부에게서 받은 보물을 내준 것이니 아껴쓰십시오.”“공가 쪽에서도 많이 기뻐하더냐?”자리에 앉은 사여묵이 벼루를 옆에 내려놓고 물었다.어제 일을 떠올린 송석석이 대답했다.“처음에는 믿지 않는 눈치였으나 실제로 얼굴을 보고난 뒤에는 다들 기뻐하셨죠.”“공가 사람들은 정이 깊은 사람이나 고집스러운 게 흠이지.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그럴 리가요.”미소 짓던 송석석은 사여묵이 또 벼루를 만지작거리는 걸 보곤 매산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오는 내내 서우에게 정신이 팔려 자초지종을 제대로 묻지 않은 걸 떠올린 송석석이 입을 열었다.“왕야님, 매산에 가셨을 때 사부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처음에는 좀 망설였다만 내 사부님의 말에 곧 응하셨다.”“왕야님의 사부님이요?”송석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제 사부님이 왕야님 사부님 말씀을 들으셨단 말입니까? 왕야님 사부님이
“사제님?”순간 표정이 어두워진 사여묵이 고개를 홱 돌렸다.“사실 난 만종문의 제자라고 볼 수도 없다. 사부님께서 난 만종문과 상관없이 따로 거둔 제자라고 하셨어.”하지만 송석석은 생글거리며 눈을 반짝였다.“사제님, 그 말은 거짓말인 것 같네요. 사숙께서도 결국 만종문 사람입니다. 그분의 제자인 사제님 역시 만종문 사람인 것이죠. 사제께서는 언제 입문하신 겁니까?”하지만 사여묵은 여전히 억지 미소와 함께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서우를 데리고 송태공에게 간다고 했었지? 언제쯤 가볼 생각이야?”한편, 송석석은 여전히 턱을 괸 채 사여묵을 바라보고 있었다.“내일 가볼 생각입니다, 사제님.”구체적으로 뭐라 할 수는 없었지만 사여묵이 같은 사문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송석석이었다.“...”사여묵은 그런 그녀를 살짝 흘겨보았다.“내가 너보다 나이도 더 많거늘.”“네, 맞습니다. 사제님이 저보다 나이가 더 많으시지요.”송석석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래서 지금까진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였어. 해마다 매산으로 갔던 것도 사숙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라니. 그것도 나보다 더 후배였다니. 하긴 남강에 있었을 때야 장수들 앞에서 나한테 사저라고 할 수 없었겠지. 또 전장에선 병사와 장수의 관계만 있을 뿐이니까.’하지만 사여묵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분명 그가 무예도 더 뛰어나고 나이도 더 많은데 왜 본인이 사제란 말인가?‘게다가 사부님께서 난 만종문 출신이 아니라 개인적인 제자일 뿐이라고 하셨단 말이다.’하지만 송석석의 환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매산에서의 그 붉은 옷을 입었던 소녀를 보는 듯해 결국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로 다짐하는 사여묵이었다.“밖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거라.”하지만 체면까지 버릴 순 없었다.지아비가 되어서 부인의 사제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다.뜻대로 되자 송석석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눈가에 찍힌 점이 유난히 도드라졌고 그 아름다운 미소에 사여묵은 시선을 돌릴 수 없을 정도였다
사여묵은 북명군의 대장군이다. 비록 지금은 전란이 없어 진성에 머문다하나 북명군의 주둔지도 이 근처라 처리해야 할 업무도 많고 시시때때로 병사들 훈련까지 시켜야 하는데 대리사경 일까지 맡긴다니 말도 안 된다 싶었다.‘게다가 대리사는 형옥과 중요한 사건의 사형 재심을 맡는 곳이야. 문서 작업이 주인 기관인데 왕야님께선 무인이시잖아. 그것도 모자라 현갑위 지휘사 일까지 맡기다니. 문직, 무직도 모자라 북명군 대장군까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네.’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사여묵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호부의 병권은 이미 다시 회수되었어. 지금의 북명군은 왕표가 관리하고 있지.”‘왕표?’송석석도 그를 알고 있었다. 평서백인 그는 전에도 군에서는 나름 명성이 자자했으나 일전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뒤로는 더는 전장에 오를 수 없는 몸이 되어 조부의 작위를 이어받아 은거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었다.그렇게 평서백부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황제의 중용을 받으니 놀라웠다.‘그런데 왜 하필 장애가 있는 장수를 북명군 대장군으로 임명한 것일까? 왜 하필 지금 대장군을 교체한 것일까? 왕야님은 공을 세우고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병부를 제출했다 해도 북명군 대장군 직위는 그냥 둘 수 있는 거 아닌가?’곰곰히 생각하던 송석석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폐하께서 왕야님을 견제하시는 겁니까?”그러자 사여묵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견제가 아니라... 향후 이상한 유언비어 때문에 우리 형제 사이의 우애가 상할까 걱정이 되셔서지.”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송석석은 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왜 저랑 혼인하시는 겁니까? 폐하께서 왕야님을 견제하신다면 저와 혼인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그녀는 송국공부의 딸이자 본인 역시 군공을 세우고 군심을 얻은 장군이기도 하다. 북명군도 현갑군도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전에 통솔했던 송씨 가문 병사들까지 모두 그녀에겐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병권을 스스로 내놓았다는
괜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니 대화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 사여묵은 먼저 자리를 떴다.한참을 생각하던 송석석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는 듯하면서도 어리둥절했다.고민에 잠긴 그녀를 바라보던 양 마마가 망설이다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진복이 그녀의 앞을 막아서더니 몰래 고개를 저었다.“도련님께 먹을 것 좀 가져다 드리십시오. 글씨 연습을 한 지 꽤 되셨으니 많이 지치셨을 겁니다.”이에 살짝 한숨을 내쉰 양 마마가 말했다.“네.”주방으로 향하는 양 마마의 뒤를 진복이 따랐다.주방에 도착한 뒤에야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아가씨께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혼례를 올리고 나서 그때 얘기하시죠.”양 마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압니다. 그저 아가씨께서 고민에 잠긴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파 그만.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양 마마는 또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왕야님께서 병권을 포기하셨다는 건 저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가씨를 위해 그렇게 하신 거겠죠. 폐하께서 저희 아가씨를 미끼로 왕야님을 낚으신 겁니다.”“그저 속으로만 알고 있으시오. 다른 사람들한테는 얘기하지 말고.”“그럼요. 이런 말을 어떻게 함부로 한답니까. 그저 왕야님의 마음을 아가씨께서는 전혀 모르시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애초에 왕야님께서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부인께선 끝까지 알리지 않으셨으니.”이에 진복이 미간을 찌푸렸다.“부인께서도 두려우셨던 거죠. 북명왕이 남강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면 그 혼사를 동의하셨을지도 모를 텐데... 결국 고르고 고르다 그런 사내를 골랐을 줄이야.”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타까워 양 마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부인께서 사대부 집안과 문관 가문의 자식을 사위 후보로 삼지 않은 건 아가씨가 보통 양반댁 규수들과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첩을 두는 건 용납하지 못한다는 아가씨의 말에 전북망만 부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영원히 첩을 들이지 않겠다 맹세했었죠. 부인께서도 그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
사여묵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 침대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남강에서 돌아와 병권을 황제께 바친 뒤에도 황제는 여전히 사여묵을 의심하고 경계했지만 사여묵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황제가 의심과 경계를 조금은 풀 수 있도록 사여묵은 지금까지 최대한 언행에 조심했으며 서경과의 담판이 끝나고 나서도 황제 앞에서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였다.나중에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더 이상 황제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황제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사국이 이번에 다시 쳐들어온 건 사국과 손잡은 내국 역적이 남강에 이미 함정을 파 놓았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 것이오. 그래서 사국은 저렇게 겁도 없이 남강을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폐하는 내가 폐하께 대한 위협이 사국 병사들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소.”사여묵이 씁쓸하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자, 송석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황제께서 이런 결정을 하신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사여묵은 송석석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고 조금 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때부터 계속 이렇게 숨막히는 인고를 견뎌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난 무조건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을 놓아준 사여묵은 강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보탰다.“난 당신처럼 용감하게 변할 것이오.”예전에 송석석이 입궁하여 황제께 상황을 보고했을 때 황제는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때 당시 송석석은 마냥 기다리거나 손을 놓은 것이 아니라 홀로 남강까지 찾아갔다.송석석은 그때 자신의 생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한편, 사여묵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바로 뜻을 알아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전 장군님을 응원합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폐하께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다면 전 평소와 같이 진성을 지키고 있을 것이고 만약 폐하께서 죄를 물으신다면 전 북명
사여묵이 방시원을 잘 달래어 돌려보낸 뒤, 염구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다들 감정이 격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남강 땅을 되찾기 위해 그들은 청춘을 다 바쳤는데 이제 또 전쟁이 난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요.”말을 하던 염구진은 고개를 돌려 사여묵을 힐끔 쳐다보았으며 방시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사여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한편, 한참동안 말이 없던 사여묵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잘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소식이 들리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게.”“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사여묵은 다시 연주에 관한 일에 대해 물었다.“연주에서 성문을 봉쇄했다고 들었는데 소식은 끊기지 않은 것이오? 혹시 그쪽에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나? 계획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가?”“아직 확실한 소식은 접하지 못했지만 소인은 모성을 믿습니다. 계획한대로 잘 하고 있을 겁니다.”“그래. 나도 그자를 믿네.”염구진의 대답에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성은 연주 좌부승이었고 연왕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여묵은 바로 사람을 시켜 모성에게 접근했다.총명하고 무술 실력까지 겸비한 모성은 선황제 때부터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성격이 너무 오만했기에 아직까지도 직급은 그저 부승이었다. 평소에 시를 즐겨 쓰는 모성은 시문의 대부분 내용이 세상을 향한 불만 표시였기에 연왕은 모성이 조정에 불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를 곁에 두기로 했다.그렇게 모성은 오랜 세월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 중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모성은 연왕의 반역죄 증좌를 수집하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연주에 남았다.하지만 연왕은 섣불리 움직이지도 않고 핵심 병력의 상황도 모성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에는 모성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기도 했다.때문에 모성은 하상지의 잡일을 처리해주면서 간간이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확실한 증좌가 없는 탓에 모성은 지금까지도 연왕
”소인도 오늘 폐하께 감히 많은 얘기를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폐하께서 오해하실까 봐 왕야를 찾아가지도 못했지요.”이덕회가 대답하자 목 승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잘하셨습니다. 병부는 최대한 사적으로 북명왕을 접촉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면 혹시 병사 감찰대로 폐하께 한 사람을 추천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왕표 그자가 남강 전쟁 원수를 맡기엔 걱정된다면 방시원 장군을 황제께 추천해보십시오.”“하지만 방시원 장군님은 주군 총병이라 남강 전쟁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방 장군을 보낼 바에는 차라리 방천허와 제린에게 전사를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란이 터지고 있는 지금 진성 주군에 대장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이덕회의 말에 목 승상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꾸했다.“도리는 그게 맞지요. 제 말은 폐하께 왕야 한 사람만 추천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더 추천하라는 뜻입니다.”이덕회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소인이 솔직한 성격이라 말을 돌려서 할 줄 모르니 그냥 말하겠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왕야가 가장 적합한 원수인데 어차피 역적은 아직 나라에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아니니까 나중에 목종욱한테 처리하라고 하면 되지요.”“그 어떤 반역자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반역자들은 사국 사람들과도 엮여 있습니다. 사국과 손을 잡았다는 건 그만큼 충분한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지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목 상승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덕회가 대답했다.“승상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소인 북명왕과 함께 내일 다시 궁으로 가서 폐하를 만나 뵙고 내란에 대해서도 의논해보겠습니다.”“그렇게 합시다!”목 승상이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사청엽은 여전히 옥에 갇혀 있었다. 황제가 아직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청엽은 자신이 사형을 면치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이날 저녁, 혼인을 앞둔 방시원이 황실을 찾아왔다. 치석
한편, 목종욱은 최선을 다해 산적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싹을 다 자르진 못했지만 크게 겁을 먹은 산적들이 산 속에 꽁꽁 숨어서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숙청제도 제린이 보낸 소식을 접했고, 사국 대군들이 변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제린은 사국 대군이 25만 명 정도 된다고 보고를 했고 여전히 빅토르가 대군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숙청제는 바로 병부 대신들을 불러 남강에서 사국의 25만 대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지 의견을 물었다.이덕회는 황제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대한 신속하게 전쟁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폐하, 남강은 오랜 시간의 전사와 왜란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남강 땅은 아직 전쟁에 버틸 수 있지만 백성들은 더 이상 전쟁을 견딜 힘이 없습니다. 만약 정말 전쟁이 난다면 확실한 한 방으로 빠르게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메뚜기 떼처럼 매년 한 번씩 이렇게 날뛸 것입니다. 이는 저희 남강 지역의 치안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밖에 없습니다.”“그럼 자네 생각엔 송씨 가문 병사들과 북명군이 적들을 신속하게 물리치지 못할 것 같은가?”숙청제의 물음에 이덕회가 바로 대답했다.“이제 송씨 가문 군대아 북명군을 나눌 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남강 병사들입니다.”이덕회는 숙청제가 남강의 병사들을 모은 게 송씨 가문과 북명왕이라고 생각할까 봐 일부러 강조했지만 숙청제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만약 남강 전쟁이 오래 전에 끝난 전쟁이고 사여묵이 병권을 상납한지 꽤 오래 됐다면 숙청제는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왕표가 군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남강에 있는 병사들이 송씨 가문 군대이든 북명군이든 결국 전부 사여묵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사여묵을 남강에 보낸다는 건 병권을 다시 사여묵에게 쥐여주어야 한다는 뜻이다.현재 연왕도 역모를 일으켰고 황제 자리를 대놓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
숙청제가 사여묵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그건 사국이 네 위엄에 겁을 먹은 것이야. 빅토르가 너를 많이 두려워하는 것 같아.”사여묵은 숙청제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 살짝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황제께서 소인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계신 겁니다. 소인은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없고 빅토르도 소인에게 겁을 먹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전쟁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기 때문입니다.”“네 말대로 전쟁으로 많은 걸 잃었다면 짧은 시간 내에는 원기를 쉽게 회복할 수 없지 않느냐?”“소인이 감히 추측을 해보자면 사국은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절대 저희 남강이 순조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가끔씩 비열한 수법으로 훼방을 놓아야 정상인데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 게 너무 수상합니다.”숙청제가 사여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그럼 네 말은 누군가가 사국과 손잡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냐?”“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사여묵은 전에도 숙청제와 이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한 적이 있었으며 그때 당시 숙청제도 사여묵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숙청제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여묵은 그런 황제를 힐끗 쳐다보고는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꾹 참았다.사실 숙청제도 왕표가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사국을 상대하려면 사여묵을 다시 남강 전장으로 내보내는 게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숙청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그때 당시 겨우 송석석을 이용하여 사여묵에게서 병권을 빼앗았는데 이렇게 쉽게 다시 내놓을 수가 없었으며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는 이상, 숙청제는 절대 사여묵을 전장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때문에 사여묵이 며칠동안 어서방에 남아 숙청제와 이런저런 상의를 해봤지만 숙청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어서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아무도 먼저
그날 밤, 연왕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게 되었다.솔직히 지금 상황은 연왕의 오랜 계획과 차질이 조금 있었다. 지방 지역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심지어 진성에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진성까지 쳐들어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연왕과 무상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일단 병사들을 일정한 수량까지 늘이고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진성 일대로 전이하여 병사들을 안치한 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그땐 사온이 진성에서 계략을 짜고 있을 것이고 많은 세가들의 지지도 받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전에 고부진의 딸들을 세가에 시집 보냈기에 세가들은 지지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나서 적절한 시기만 잘 고르면 반드시 성공한다. 진성에 전란이 일어나고 산적과 유랑민들이 판을 칠 때 연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내로 쳐들어가 바로 궁 전체를 포위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 갑자기 대석촌에 일이 터져 버려 사청엽이 체포된 탓에 연왕은 급하게 병사들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승산이 너무 낮았기에 연왕도 망설였던 것이며 지방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진성까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물론 백성들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수군거리겠지만 대부분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반란과 격문을 그저 우습게 생각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사국에서 남강을 공격한다고 해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고 사국에서 오래 전부터 호시탐탐 야망을 보였기에 황제가 나랏일에 관심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아직 사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패했다는 소식도 없기에 상국 무장이 무능하다는 비판을 하기에도 애매했다.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태평한 상황에서 연주도 꽤 부유한 땅이었기에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때문에 모두 그저 연왕이 언제 잡히는지, 언제 역모죄로 목이 잘릴지를 보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국에는 사국 사람들을 물리친 북명왕이 있기에 다들 역적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으며 되레 연왕이 왜 역모를 일으키
무상이 아니라는 말에 연왕은 회왕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화들짝 놀란 회왕이 변명하려던 그때, 연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회왕일 리는 없어.”회왕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연왕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묘했다.한편, 연왕은 당연히 회왕을 의심할 리가 없었다. 회왕은 무일푼으로 연주로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진성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따내지 못했으며 사온의 비교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었다.회왕이 연주에 온 뒤로 연주 백성들은 회왕을 만나면 겉으로는 왕야라고 부르며 인사를 올리긴 하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를 만만하게 여기고 아니꼽게 생각했다.때문에 회왕은 절대 마총우를 명령하지 못한다.조금씩 차분해진 연왕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다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총우 그자가 귀순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무너트리고 싶어서 일부러 꾸민 짓인가?”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무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마총우가 귀순한 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왕야께서 격문을 보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저희 병력은 대여섯 군데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전의하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는데 조정에서 절대 쉽게 조사해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마총우 그자를 찾아서 귀순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날 일부러 무너트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네. 그럼 그자가 누구일 것 같은가?”연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연왕이 몇 년 동안 끌어 모은 사람들 중에 황제의 친인척과 세도가들도 있지만 친왕은 연왕과 회와 두 사람밖에 없었다.연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상대가 없었다. 연왕의 부하들 중에서 황제의 친인척들이 제일 무능하고 멍청했으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의심되는 상대는 여전히 무상이었다.하지만 역모의 마음을 품은 연왕이 무상을 끌어들이고 나서 지금까지 무상은 강한 충성심을 보였고 심지어 평소에 연왕에게 쓸만한 제안도 가장 많이 하고 계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