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이 단신의를 배웅하려 하던 그때, 단신의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인신매매단에 잡혀갔으니 그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어. 뭐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불행 중 다행이지 뭐.”하지만 송석석의 생각은 달랐다.서우가 약과를 장군부로 배달했다면 그녀는 직접 서우를 집까지 데려다주었을 테고 어쩌면 그날 밤 저택에 하룻밤 묵었을지도 모른다.서경의 밀정들이 저택을 공격했을 때 그녀가 있었다면 모두를 지켜낼 수 있다 장담은 할 순 없어도 멸문지화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그래서 송석석은 그들이 더욱 증오스러웠다.‘뿌리채 뽑아버려야 해.’단신의가 문을 나선 뒤 송석석은 바로 마차를 준비하라 명했다. 일단 서우를 데리고 황제와 태후를 알현한 뒤 공부로 갈 생각이었다.또한 송석석은 옷을 새로 지으라고 명했다.키가 얼마 자라지 않아 전에 입던 옷을 입을 순 있었지만 몇 벌 남지 않아서였다.장례를 치를 때 거의 다 태워버리고 가끔씩 그리울 때 꺼내보려고 남겨둔 옷가지 몇 벌뿐이었으니 말이다.살짝 짧긴 했지만 좋은 옷을 입으니 혈색이 더 좋아보였다.얼굴에 자잘한 상처는 이미 나은 뒤고 전에 있던 옷까지 입으니 마치 2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하지만, 착각은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이라는 걸 송석석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서우의 손을 잡은 채 송석석은 천천히 문을 나섰다.다리를 저는 터라 조금만 빨리 걸으면 넘어질까 송석석은 특별히 발걸음을 멈추었다.황제는 태후궁에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눈물을 글썽이던 태후가 서우에게 손을 젓고 여기까지 오는 사이 다리병이 도진 서우는 고통을 참으며 한쪽 다리로 폴짝폴짝 뛰어갔다.참지 못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태후는 서우를 부축해 자신의 곁에 앉히더니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어휴, 마른 것 좀 봐. 그동안 고생이 얼마나 많았느냐.”그런 태후를 보며 서우는 괜찮다는 듯 손을 젓고 고개를 돌렸다.그 모습에 황제 역시 연민이 일어 격려의 말과 함께 선물을 하사했다.황제는 흐
출궁한 뒤 송석석은 서우와 함께 공부로 향했다.이미 저녁이라 공가의 남정네들도 이미 집으로 돌아왔을 시간이었다.마차 안, 서우가 송석석의 손바닥 위에 글씨를 적어냈다.“외할아버지네 댁으로 가는 겁니까?”이에 송석석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외할아버지네 집으로 가는 거다. 보고 싶으냐?”“네!”고개를 끄덕인 서우는 손바닥 위에 글씨를 적곤 곧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공씨 가문 사람들이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 역시 들었기 때문이었다.워낙 민감한 나이라 행여나 가족들이 그를 버린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그런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송석석이 말했다.“서우야, 걱정하지 마.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숙부들도 다 널 그리워하셔. 그저 네가 정말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드신 것뿐이야. 네 얼굴을 보면 분명 기뻐하실 거야.”이에 송석석의 팔에 기댄 서우는 고개를 번쩍 들고 뭐라고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벙긋거렸지만 결국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절름발이에 벙어리가 됐다고 실망하시면 어떡하지?’잠깐 고민하던 서우가 송석석의 손바닥에 이렇게 적었다.“절 싫어하진 않으실까요?”그 말에 콧등이 시큰해진 송석석은 서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를 건넸다.“바보야. 당연히 기뻐하시지. 왜 널 싫어하시겠어. 괜한 생각하지 마. 분명 널 반갑게 맞이하실 거야.”하지만 2년 동안 수많은 괄시와 폭력에 시달려온 서우에게 이미 자신감은 사라진 뒤였다.‘게다가 내가 돌아온 걸 믿지 않으시니까... 내가 거지로 있었다는 걸 싫어하면 어떡하지...’이런 생각 때문인지 공부 앞에 도착한 뒤에도 서우는 마차에서 내리길 거부하며 송석석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그러자 송석석은 설명을 이어갔다.“서우야, 겁 먹지 마. 전에 너희 외숙부랑도 얘기했는데 여전히 널 그리워하고 계셔.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고. 정말이야.”그럼에도 서우는 고개를 젓더니 자신의 다리와 목을 가리키며 속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그
이런 오해를 하는 게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솔직히 섭섭하한 송석석이었다.사여묵에게서 온 서신을 받자마자 송석석은 영주로 달려갔었다.가는 내내 괜한 기대를 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래도 직접 얼굴은 한 번 보고 싶었던 게 그녀의 마음이었다.그런데 왜 얼굴 한 번 보려하지 않는 건지 싶어 괜히 욱한 송석석은 발을 걷어내 서우를 안아 공양 앞에 섰다.“그래도 얼굴 한 번 볼 수는 있지 않습니까? 오는 내내 서우는 제 손바닥에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게 두렵다고 했었습니다. 그런 서우를 전 그럴 일은 없다고 위로했고요.”비록 송석석의 태도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공양은 무의식적으로 아이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시선이 닿는 순간, 공양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고 숨이 먿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닮았어... 너무 닮았어. 많이 마르긴 했지만 정말 너무 닮았어.’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공양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서우야?”어느새 서러움의 눈물이 얼굴을 잔뜩 적신 서우가 버둥거리며 송석석의 품안에서 내려오려 했다.송석석을 서우를 내려놓자 그는 손을 뻗어 공양을 향해 손바닥을 세 번 마주치는 동작을 하더니 손가락 두 개로 모양을 그리곤 고개를 푹 떨어트리고 어깨가 떨릴 정도로 울기 시작했다.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공양은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었다.‘우리 둘만 아는 동작이야...’사고 나기 한 달 전, 공양은 부인과 함께 송씨 가문으로 향해 여동생과 서우를 보러 갔었다.그때 서우는 그동안 공부한 내용을 자랑하듯 보여주었고 공양은 글씨를 잘 썼다는 칭찬과 함께 손바닥을 부딪히며 이렇게 약속했었다.“더 열심히 공부하여 스승의 칭찬을 받으면 방단주에서 온 벼루를 선물로 주마.”스승에게서 단주의 벼루가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는 서우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하지만 경조부 일이 바빠 공양은 이 작은 약속을 잊고 말았고 사고가 난 뒤론 그 약속이 가시처럼 그의 가슴에 콕 박히고 말았었다.어떻게 하면 마음이
모두가 달려들어 인중과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뒤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공가 노부인이 다시 눈물을 지었다.“하늘도 무심하시지. 저 어린 아이에게 어찌 그런 시련을 내리신단 말이냐. 송씨 가문은 평생 이 나라를 위해 헌신했거늘, 어찌 이리 비참하단 말이냐. 하늘도 무심하시지.”그 말에 송석석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해 그녀는 부랴부랴 밖으로 도망쳤다.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요즘따라 막을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리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서우는 마지막에서야 태부인의 방으로 향했다.미리 호심완을 먹어서인지 다행히 태부인은 정신을 잃진 않았으나 서우가 벙어리에 절름발이가 되었다는 말에 역시나 쉼없이 눈물을 흘렸다.“우리 착한 손주가 왜 이렇게 됐는냐.”직접 기른 손녀를 잃은 것도 속상한데 그 아이를 꼭 닮은 서우마저 이꼴이 되어 돌아왔으니 가슴을 칼로 베는 듯했다.반나절 정도 지난 뒤에야 다들 눈물을 거두고 나름 차분해진 상태로 정청에 앉았다.부축을 받아 나온 태부인까지 모이자 송석석은 그동안 있었던 자초지종을 전부 밝혔다.서우가 송석석에게 줄 약과를 사러 갔다 그 사고를 면했다는 소식에 다들 2년간 받았던 고초만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지만 적어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다행스러움을 느꼈다.송석석을 감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공부 일가는 인신 매매범에 대한 증오도 감추지 않았다.물론 송석석의 생각은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한편, 어느새 감정을 추스른 공양이 중독 상태와 다리 부상에 대해 물었고 송석석은 단신의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독은 시간이 걸리지만 매일 해독약을 마시고 침까지 맞으면 해독할 수 있을 거랍니다. 중독석인 있는 새목단 역시 서우가 스스로 금단 현상을 이겨내 생각보다 치료가 쉬울 것으로보 이고요. 아마 1년 정도면 다시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잠깐 망설이던 송석석이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다리 부상은... 뼈가 잘못 이어붙은 탓에 다시 부러트리고 정골을 받아야 한답니다. 고통스러운 과정이지만 단신의님의 의
노부인은 말끝을 흐렸지만 다들 혜태비가 아이를 차갑게 대할까 걱정하고 있는 것임을 다들 눈치챘다.최근 2년 동안 공씨 가문은 여러 연회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지만 바깥 일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특히 송석석 주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선 특히 더 관심을 두었지만 그저 자세히 본인에게 묻지 않은 것뿐이었다.그랬기에 다들 혜태비가 새로 맞이할 며느리를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서우까지 함께 간다면 더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이에 송석석이 말했다.“그 어떤 상황이든 서우를 우선으로 둘 겁니다. 혜태비가 서우를 용납할 수 없다면 함께 국공부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께 약속드리겠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서우가 서러움을 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하지만 그녀의 보장에도 다들 완전히 안심하진 못했다.두 번째 혼인인데다 시어머니의 반대가 있었던 혼인이니 지내는 나날이 즐거울 리가 없다.비록 지금은 북명왕이 송석석과 서우의 편이라지만 어머니와 부인 사이에서 시달리다 보면 결국 인내심이 바닥날 것이라 생각했다.공씨 가문 둘째인 공찬이 말했다.“사실 서우는 공씨 가문 저택에 지내는 게 나을 것 같구나. 여긴 보살펴줄 사람도 많지 않느냐. 유명한 스승이라면 우리도 충분히 모실 수 있어.”공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한참 흥분하다 역시 이성을 되찾은 태부인의 생각은 달랐다. 마음 같아서야 귀하게 되찾은 서우를 곁에서 한치라도 떨어트리고 싶지 않았지만 한평생 온갖 풍파를 겪어온 그녀였기에 인생은 멀리 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서우를 꼭 끌어안고 있는 태부인의 검은색 옷은 마치 새끼를 날개속으로 숨긴 암탉과도 같았다.“서우는 언젠가 국공의 작위를 물려받아야 할 아이다. 송씨 가문에 남은 남자아이라곤 서우뿐이지. 우리 공씨 가문에서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서우가 왕야님 곁에서 자란다면 곁에서 보는 것, 듣는 것, 만나는 사람들 자체가 달라질 거다. 그건 우리
다음 날, 공부에서는 서우가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보내왔다.또한 모든 부인들이 서우에게 줄 옷이며 신발을 짓기 위해 전부 바느질을 다시 시작했다는 소식 역시 들려왔다.공부에서는 실제 행동으로 서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고 있었고 서우도 외가에서 그를 아껴주자 꽤 안심한 듯한 모습이었다.단신의 역시 맥을 다시 짚어보겠다며 직접 국공부에 방문했다.사실 그의 의술이라면 어제 진료만으로 충분했지만 국공부의 얼마 남지 않은 핏줄이기에 더 신중을 기하고 싶어서였다.단신의가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묵연이 장대성과 함께 국공부에 들렀다.“서우 얼굴 한 번 보고 싶어서 온 것이다.”서우 역시 사여묵의 방문에 기뻐하며 공양이 준 벼루를 그에게 보여주더니 통 크게 하나쯤은 선물로 줄 수 있다고 말했다.웃으며 벼루를 받은 사여묵은 서우에게 글씨를 쓰는 법을 한동안 가르치다 송석석과 함께 방을 나섰다.송석석 앞에서 것던 그가 손에 든 물건을 보여주며 웃었다.“내게 단주의 자운연을 선물로 주다니. 통이 아주 크군.”하인에게 차를 내오라 분부한 송석석 역시 미소를 지었다.“숙부에게서 받은 보물을 내준 것이니 아껴쓰십시오.”“공가 쪽에서도 많이 기뻐하더냐?”자리에 앉은 사여묵이 벼루를 옆에 내려놓고 물었다.어제 일을 떠올린 송석석이 대답했다.“처음에는 믿지 않는 눈치였으나 실제로 얼굴을 보고난 뒤에는 다들 기뻐하셨죠.”“공가 사람들은 정이 깊은 사람이나 고집스러운 게 흠이지.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그럴 리가요.”미소 짓던 송석석은 사여묵이 또 벼루를 만지작거리는 걸 보곤 매산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오는 내내 서우에게 정신이 팔려 자초지종을 제대로 묻지 않은 걸 떠올린 송석석이 입을 열었다.“왕야님, 매산에 가셨을 때 사부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처음에는 좀 망설였다만 내 사부님의 말에 곧 응하셨다.”“왕야님의 사부님이요?”송석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제 사부님이 왕야님 사부님 말씀을 들으셨단 말입니까? 왕야님 사부님이
“사제님?”순간 표정이 어두워진 사여묵이 고개를 홱 돌렸다.“사실 난 만종문의 제자라고 볼 수도 없다. 사부님께서 난 만종문과 상관없이 따로 거둔 제자라고 하셨어.”하지만 송석석은 생글거리며 눈을 반짝였다.“사제님, 그 말은 거짓말인 것 같네요. 사숙께서도 결국 만종문 사람입니다. 그분의 제자인 사제님 역시 만종문 사람인 것이죠. 사제께서는 언제 입문하신 겁니까?”하지만 사여묵은 여전히 억지 미소와 함께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다.“서우를 데리고 송태공에게 간다고 했었지? 언제쯤 가볼 생각이야?”한편, 송석석은 여전히 턱을 괸 채 사여묵을 바라보고 있었다.“내일 가볼 생각입니다, 사제님.”구체적으로 뭐라 할 수는 없었지만 사여묵이 같은 사문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는 송석석이었다.“...”사여묵은 그런 그녀를 살짝 흘겨보았다.“내가 너보다 나이도 더 많거늘.”“네, 맞습니다. 사제님이 저보다 나이가 더 많으시지요.”송석석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그래서 지금까진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였어. 해마다 매산으로 갔던 것도 사숙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라니. 그것도 나보다 더 후배였다니. 하긴 남강에 있었을 때야 장수들 앞에서 나한테 사저라고 할 수 없었겠지. 또 전장에선 병사와 장수의 관계만 있을 뿐이니까.’하지만 사여묵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분명 그가 무예도 더 뛰어나고 나이도 더 많은데 왜 본인이 사제란 말인가?‘게다가 사부님께서 난 만종문 출신이 아니라 개인적인 제자일 뿐이라고 하셨단 말이다.’하지만 송석석의 환한 미소를 보고 있자니 매산에서의 그 붉은 옷을 입었던 소녀를 보는 듯해 결국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로 다짐하는 사여묵이었다.“밖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거라.”하지만 체면까지 버릴 순 없었다.지아비가 되어서 부인의 사제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했다.뜻대로 되자 송석석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눈가에 찍힌 점이 유난히 도드라졌고 그 아름다운 미소에 사여묵은 시선을 돌릴 수 없을 정도였다
사여묵은 북명군의 대장군이다. 비록 지금은 전란이 없어 진성에 머문다하나 북명군의 주둔지도 이 근처라 처리해야 할 업무도 많고 시시때때로 병사들 훈련까지 시켜야 하는데 대리사경 일까지 맡긴다니 말도 안 된다 싶었다.‘게다가 대리사는 형옥과 중요한 사건의 사형 재심을 맡는 곳이야. 문서 작업이 주인 기관인데 왕야님께선 무인이시잖아. 그것도 모자라 현갑위 지휘사 일까지 맡기다니. 문직, 무직도 모자라 북명군 대장군까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겠네.’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사여묵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호부의 병권은 이미 다시 회수되었어. 지금의 북명군은 왕표가 관리하고 있지.”‘왕표?’송석석도 그를 알고 있었다. 평서백인 그는 전에도 군에서는 나름 명성이 자자했으나 일전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뒤로는 더는 전장에 오를 수 없는 몸이 되어 조부의 작위를 이어받아 은거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었다.그렇게 평서백부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황제의 중용을 받으니 놀라웠다.‘그런데 왜 하필 장애가 있는 장수를 북명군 대장군으로 임명한 것일까? 왜 하필 지금 대장군을 교체한 것일까? 왕야님은 공을 세우고 돌아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병부를 제출했다 해도 북명군 대장군 직위는 그냥 둘 수 있는 거 아닌가?’곰곰히 생각하던 송석석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폐하께서 왕야님을 견제하시는 겁니까?”그러자 사여묵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견제가 아니라... 향후 이상한 유언비어 때문에 우리 형제 사이의 우애가 상할까 걱정이 되셔서지.”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송석석은 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왜 저랑 혼인하시는 겁니까? 폐하께서 왕야님을 견제하신다면 저와 혼인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그녀는 송국공부의 딸이자 본인 역시 군공을 세우고 군심을 얻은 장군이기도 하다. 북명군도 현갑군도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전에 통솔했던 송씨 가문 병사들까지 모두 그녀에겐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병권을 스스로 내놓았다는
이틀 동안 돌아본 후, 수란키가 송석석에게 말했다. "귀국에 단신의라는 신의가 계십니다. 그분이 만든 단설환의 한 가지 재료인 설연화가 귀국에서 생산량이 매우 적다고 알고있습니다. 남강에 있기는 하지만, 설산 정상에 자생하고 있어 채집하기 매우 어려우며, 또한 드뭅니다. 하지만 저희 쪽에서는 설연화가 그리 희귀한 것이 아닙니다. 고산지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요. 그가 사용하는 설연화는 모두 서경 약장수에게 몰래 사서 쓰는 것으로, 가격이 매우 비쌉니다. 그 가격으로 단설환을 팔면, 한 알을 팔아서 한 알을 잃는 셈입니다."송석석은 단설환이 부족한 이유가 일부 약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 백부는 구체적으로 어떤 약재가 부족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서경과 상국은 그동안 무역을 하지 않았고, 특히 약재는 더 조심스럽게 다뤄졌기 때문에 그가 서경 사람에게 약재를 산 것을 비밀로 한 이유가 이해가 됐다.수란키와 원신제는 한 마음으로 이렇게 세세하게 조사를 진행했으며, 두 나라 간에 상호 교역을 이루려는 계획이 이미 있었을 것이다. 안풍친왕을 불러들인 것도 이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단설환은 생명 구제용 약이라, 만약 약재만 부족하지 않다면 평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어 실로 민생에 큰 이익이 된다. 송석석은 그들이 지나쳤던 약재 시장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럼 왜 약재 시장에서는 설연화를 본 적이 없죠?" 수란키가 웃으며 답했다. "그건 당연합니다. 우리 서경에서 설연화가 많이 자생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희귀한 재료입니다.고산지대를 올라가야만 채집할 수 있기에 위험하기도 하지요. 게다가 약효가 뛰어나지 않습니까. 심장을 강하게 하고 통증을 멈추는 효과가 있어, 시장에서 거래되는 법이 없습니다. 송대감께서 믿지 못하신다면, 제가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설연화 한 바구니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것을 상국으로 가져가서 단신의께 검증받으시면 됩니다."그는 말을 마친 후 시 사람을 시켜 설연화 한 바구니를 가
그가 앉은 자리는 북당이 이번 협상에서 취한 입장을 대표했다.그는 중립의 위치에 있었다. 송석석은 다시 한 번 국가가 강성한 것이 정말 좋다며 감탄했다. 협상의 처음 부분은 조금 지루했다. 양쪽 모두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강조하였고, 양쪽의 역관들이 그것을 전달하며, 모두 역사적 문제를 강조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양보를 한다면 계속해서 양보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따라서 첫 번째 협상에서는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데 그쳤다. 다음 날, 바로 두 번째 협상이 시작되었다. 역시 초반에는 전날처럼 양쪽에서 강조하는 말들이 오갔다.그러다가 잠시 후, 안풍친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렇게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두 나라의 국경 문제는 이미 수십 년간 지속되어 왔고, 이것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국경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본왕은 두 나라가 서로 친선을 맺고, 서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 두 나라가 더 이상 분쟁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며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안풍친왕은 한 장의 목록을 꺼냈다. 그 목록에는 양국의 상품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곡물, 가축, 비단, 직물, 수공예품, 찻잎, 모피, 도자기, 종이, 벼루, 각자의 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약초, 향료, 청염, 철광, 옥석 광물 등이 있었다. 양쪽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처음의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막대한 이익 앞에서, 어떤 일들은 협상이 가능했다. 협상이 되지 않으면 잠시 미룰 수도 있었다. 수년간의 전쟁은 두 국가의 국고를 이미 소진시켰기에 양쪽 모두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북당의 발전 경험에 따르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것은 뒤처진 생각이며, 농업과 상업을 동시에 중시하는 것이 살길이었다. 상업세 또한 매우 높았다. 안풍친왕의 이 목록 덕분에 두 나라는 국경
하지만 송석석은 서경의 종친과 관리들이 북당이 협상에 개입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람이 역력했다.놀란 마음이 지나고 나자, 그들은 기쁨과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북당이 협상에 참여하는 것이 서경을 위한 든든한 지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송석석은 이 장면을 보며 오히려 안심을 했다. 정말 그렇다면 원신제가 미리 그들에게 이를 알려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협상에 참여하는 관리들에게는 알렸어야 하는데, 그녀가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이제야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서로 양보하는 방향으로 가길 원했지만, 궁정의 문무 백관들 중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신복하는 북당 안풍친왕을 초대한 것이었다.이렇게 보니, 어제 원신제가 그녀와 시만자를 궁으로 부른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처음에 말했던 그런 것들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여성의 과거 시험을 예로 든 것은, 그녀의 많은 결정들이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여기까지 분석을 마친 송석석은 점점 더 낙관적이게 되었다.궁중 연회가 끝난 후, 북당 사람들은 대접을 받으며 떠났다. 그들은 그 한 끼를 제외하고는 의견을 거의 내비치지 않았으며, 단지 짧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다.그들이 떠난 후, 상국의 사절단도 일어나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모두가 돌아가서 협상 준비를 해야 했다. 수란키가 제공한 일정을 따르면, 이틀 후부터 협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황궁 별관에 돌아가자, 이덕회는 모두를 모아 앉히고 논의했다.사실상 또 다른 진부한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양보를 해야 한다면, 모두가 지도 위에서 함께 논의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황제가 이미 양보의 한계를 설정해 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양보를 하게 되면 돌아가기도 어렵고, 역사적인 죄인이 될 수도 있었다.그래서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그저 지도만 바라보며 각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는 모두 입맛이 그다지 좋지 않기 마련인지라, 많은 음식들이 한 입 먹고 나면 다시 치워지곤 한다.하지만 북당의 사람들은 정말 음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요리가 나와도 모두 다 먹어버렸으며, 가득 채운 술잔도 순식간에 비웠다. 그들을 시중드는 궁인들도 꽤 힘들었을 것이었다.시만자는 그들이 춘만루에서 먹었던 그 한 끼를 떠올렸다. 그때도 남은 음식이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이 비워졌었다.그녀는 송석석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식사 소리 외에는 아무 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그러나 그들은 눈짓만으로도 서로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시만자는 북당 사람들이 이곳에 등장한 것이 협상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했고, 송석석도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중재자로 온 것인지, 아니면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만약 중재자라면 협상 또한 오래 걸리지 않고 조약을 체결할 수 있을 테니 더 좋을 것이었다.하지만 만약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이라면 협상은 공방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북당이 그들의 방패가 된다면 상국이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 틀림 없으니 말이다.이덕회와 홍려사경 등 상국의 사절단들은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의 그 기쁨을 잃은 대신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눈앞의 음식도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었기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먹었다.이 궁중 연회는 그들이 참석했던 연회 중 가장 이상한 연회였을 것이다. 마치 폭풍이 다가오는 듯한 무서운 고요함이 느껴졌다.궁중에서 준비한 요리는 총 32가지였다. 그러나 각 요리의 양은 매우 적었으며, 궁인들은 음식을 하나씩 들고 들어와서는 다시 하나씩 치워갔다.누군가 술잔을 들고 싶어했지만, 역시 원신제와 마찬가지로 한 번 쓱 훑어본 후, 술잔을 비우고 다시 내려놓고는 식사를 계속했다.마침내 32가지 요리가 모두 올라갔
다음날, 궁중 연회는 신시에 시작되었고, 여전히 수란키가 직접 그들을 맞아 궁으로 안내해주었다.예상했던 대로 즉위식은 이미 끝난 상태였고, 이번 연회의 주요 목적은 국경선의 협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에 들어간 후에도 다른 나라의 사절단을 보지 못했다.궁 안은 황실의 측근과 문무 백관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은 상국의 사절단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친근한 분위기도 없었다.이런 자리에서는 역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대화의 주제가 그리 넓지 않아, 서로 간단한 인사 정도만 나눌 뿐이었다.다른 나라의 사절단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입석할 때 원신제가 상국의 사절단에게 말했다."오늘 북당에서 귀빈들이 오십니다. 곧 도착할 것인데, 여러분이 그들과 바로 친해질 것이라 믿습니다."이덕회는 즉시 흥분하며 말했다. "북당의 귀빈이라 하셨습니까? 어떤 분이 오시는지요?"그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왕이장이 가져온 임양운의 육안총과 포차는 모두 북당에서 개량된 것이었고, 임양운 선생이 북당에서 배운 적이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상국의 병부상서로서 그는 정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북당은 상국이 항상 배우고자 했던 본보기였다. 그들의 첨단 무기와 치국책은 상국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물론 국가의 상황이 다르기에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을 테지만, 대화를 깊이 나누면 분명히 얻을 것이 있을 것이었다.원신제는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연회는 지루하고 피곤했지만, 북당의 귀빈이 온다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때, 한 외침이 들렸다.“북당 안풍친왕과 왕비께서 도착하셨습니다!"이덕회는 놀라서 입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송석석도 사부로부터 안풍친왕의 호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부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했다. 생각치도 못하게 오늘 그를 만날 수 있으니 그녀도 말할 수 없이 기뻤다.반면, 만두와 몽동이 그들은 비교적 담담했
원신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씁쓸한 게 한 가지 더 있네. 지금까지 짐은 장공주의 신분으로 여인에게도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높이 외쳤지. 하지만 황제가 된 지금, 어쩔 수 없이 각 세력들의 이익을 고려해줘야 하고 그자들이 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네. 짐은 이제 고려한 일이 더 많아졌어. 가끔은 속에 천불이 나서 반대파 세력들의 가슴에 칼을 꽂고 싶기도 하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송석석이 대꾸했다.“사실 한 나라의 황제나 대신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결국 최종 목적은 같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그렇듯 다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나라에 영원히 전란이 일어나지 않고 창성해야 폐하께서 원하시는 개혁을 진행하셨을 때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현재 가장 중요한 건 폐하의 자리부터 굳건히 지키시는 겁니다.”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원신제는 송석석의 말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현재까지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고 각 세력들의 제지도 심하기에 이 국면을 해결하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황제의 자리도 흔들리고 있는 지금, 원신제가 개혁까지 고집하려는 건 더욱 위험한 일이었기에, 미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만자 또한 송석석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사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는 건 아닙니다. 강경하게 상대방과 맞서 싸우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는 가장 현명하지 못한 하책입니다. 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기 쉽지 않은데 천 년이나 넘게 지속된 규정을 바꾸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폐하께서 관념의 씨앗을 심으시면 언젠가 누군가가 폐하께서 남긴 발자국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입니다.”잠시 머뭇거리던 시만자는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저와 석석도 매산에서 무술을 공부할 때 그랬습니다. 다들 저희를 비웃고 하찮게 여겼지만 저희는 결국 실력으로 그자들을 한 명씩 쓰러트렸습니다. 구호만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실력이
서경의 황궁은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어둠이 깃든 고요한 밤에는 기 장엄함이 더욱 돋보였다.첫 번째 궁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마차는 궁 안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궁 안 곳곳에는 커다란 나무들 위에는 등불이 잔뜩 걸려 있어 대낮처럼 밝았으며, 누군가가 몰래 나무 위에 숨어있는다고 해도 너무 밝아서 바로 들킬 정도였다.수란키는 앞장서서 걷다가 한 궁전 밖에 도착했는데, 궁녀 두 명이 다가와 수란키와 서경 언어로 몇 마디 나누다가 고개를 돌려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수란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송 대감님, 만자 낭자, 폐하께서 두 분에게 궁전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두 궁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휘황찬란한 궁전 내부에는 커다란 조각 기둥이 양측에 세워져 있었으며 그 모습은 압박감이 넘쳤다.원신제는 용상에 앉아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지만 얼굴에는 피로함이 가득해 보였다.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인사를 올렸고 원신제는 그들에게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그리고는 송석석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짐은 송 대감이 사절단과 함께 이곳으로 온다고 하여 며칠 전부터 계속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네.”송석석은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인도 너무 기뻤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신 걸 감축드립니다.”송석석은 원신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원신제에게서 냉옥 장공주의 모습이 보였고 예전과 크게 변한 건 없었으며 여전히 피로해 보이고 여전히 진중하고 엄숙했다.냉옥 장공주에게 있어서 황제의 역할이든 실권을 손에 쥔 장공주 역할이든 똑같이 신경 쓸 일이 많을 것이다.“원하는 바를 이루느라 많이 힘들었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 일처리는 훨씬 쉬워졌네.”원신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조금 뒤, 궁녀들이 서경 특색이 돋보이는 다과들을 내왔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조금 전에 저녁 식사를 했기에 배가 고프지
서경 수도에 도착했을 땐 8월 13일이었기에, 송석석 일행이 떠난 지 한 달은 족히 넘은 상황이었다. 점심이 되자,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어졌다.진왕은 마차 안에 몸을 웅크려 누운 채 입성에 진입했다. 하지만 마지막 자객들은 머릿수도 많고 기세도 등등해, 서경 지대에 들어서고 나서도 송석석 일행은 총 일곱 번이나 습격을 당했다. 현갑군은 대부분 부상을 당했고 시만자마저 어깨가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신경까지 다치지는 않았다.진왕이 이렇게까지 크게 논란 건, 자객에게 습격을 당할 당시, 그는 변소 안에 있었다.일을 마치고 변소를 나선 순간, 갑자기 나타난 자객이 검으로 진왕의 가슴을 베었고 그 검을 진왕의 가슴에 꽂으려던 순간, 송석석이 제때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한 발 빠르게 자객의 가슴에 꽂았다.하지만, 이내 자객의 머리채를 뒤로 확 잡아당긴 덕분에 진왕은 무사할 수 있었다.그는 가슴팍이 조금 베인 게 전부였지만 큰 중상을 입은 것 마냥 밤새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수도에 도착하자 수란키가 관원들을 데리고 성문 앞에 서서 진왕을 반겼다. 수란키는 이제 서경의 승상이 되었다.한눈에 송석석을 알아본 수란키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송 장군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기품이 넘치시네요.”송석석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인사를 하며 상대방을 힐끗 살폈다. 솔직히 조금 전에 수란키를 알아보지 못했다.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백발인 데다가 수염도 허옇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쳤고 남강 전장에서 봤을 때보다 되레 활기가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남강 전장에서 봤던 수란키는 온몸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고 엄숙한 그는 삶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저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승상께서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오시고.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송석석이 웃으면서 말하자 수란키가 호탕하게 웃었다.“너
한편, 크게 놀란 진왕은 태의를 불러 심신을 안정할 수 있는 약을 처방받았다.송석석이 찾아갔을 때, 진왕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덜덜 떨리는 입술로 송석석에게 자객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송석석이 진왕에게 자객이 도망쳤다고 얘기하고 나서야 그는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사실 진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자객이 도망쳤다고 진작 얘기했지만 진왕은 믿지 않았다. 이제 송석석에게서 듣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된 것이다.송석석은 진왕에게 몸조리 잘 하라고 당부한 뒤 방을 나섰다.이와 동시에, 이덕회는 나머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병부 상서인 이덕회는 지금까지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전부 겪어 보기도 했고 또한 왕비와 현갑군을 믿었기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한편, 매산 출신 몇 명은 한데 모여 전에 성릉관에서 만났던 검은 복장 차림의 무리들을 의심하고 있었다.어쩌면 그자들이 바로 자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이 의심을 가장 먼저 제기한 건 바로 시만자였다. 그는 그 무리들이 갑자기 사라진 게 너무 수상했고 비밀 경로를 통해 계획적으로 도망친 거라고 확신했다.더군다나 조금 전 자객들도 전부 검은색 옷차림이었기에, 비록 머릿수가 조금 차이 나긴 했지만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일부 사람들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성릉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동했던 건 아마 우리한테 손을 쓰려고 그랬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성릉관에서 우리를 죽이면 쉽게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단 포기한 거야.”시만자는 분석할수록 자신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돌려 송석석에게 물었다.“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아?”송석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자들은 아니야. 정확히 얘기하자면 조금 전 자객들은 그자들보다 무술 실력이 확연히 떨어져. 그자들은 성릉관에서도 자유롭게 나타났다가 사라졌어. 그렇게 보면 네 의심이 성립되지 않다는 거지. 그자들은 성릉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