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좀 받고 올게.”온이샘이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차우미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녀는 낡은 건물이 줄지은 거리를 조금 앞장서서 걸었다. 오랜 시간 비바람을 견딘 건물은 색이 바래고 세월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길가 양쪽에 벚나무가 줄지어 있었는데 나무에도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가지가 풍성하게 뻗어나간 나무는 해마다 벚꽃철이 되면 풍성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다.번화가와는 거리가 먼 이곳은 길가 노점에서 각종 생필품과 지역 특산물을 팔고 있었다. 점주 대부분이 연세가 지긋한 노인이었으며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풍경이었다.돌아온 뒤로 이렇게 느긋하게 거리를 걸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곳은 3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고 여전히 그녀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하지만 이곳이 주는 느낌은 그녀에게 조금 새로웠다. 아마 세월이 흘러 그녀가 성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차우미는 구석구석을 자세히 둘러보며 이곳의 모든 것을 차분하게 느꼈다.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눈 안에 들어온 그림자가 그녀의 상념을 멈추게 했다.운동복 차림에 가방을 멘 십대 소년이 입에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소년은 자기보다 키가 작은 남자 아이의 멱살을 잡더니 그 소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는 소년은 차우미도 아는 얼굴이었다.그녀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소년은 외삼촌네 아들 준혁이었다.3년 만에 처음 보는 아이는 키가 훤칠하게 컸고 이목구비도 더 입체적으로 자랐다.그녀가 결혼식을 올리던 해에 소년은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있어서 식에 참석하지는 못했다.나중에 엄마한테 들은 바로는 아이는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원하던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들었다.3년이 지났으니 이제 수능을 앞두고 있을 것이다.그런데 반항심이 가득한 아이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어렸을 때부터 준혁이는 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비록 외삼촌 내외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부부
“그래. 넌 돌아가서 푹 쉬고 의사가 당부했던 말 잊지 말고 지켜. 시간 나면 또 보러 올게.”“그럴 필요 없어. 나 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 했는데 자꾸 그러면 내가 미안해지잖아.”차우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나중에 시간 나면 내가 한번 선배 보러 갈게.”살짝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온이샘은 자신을 보러 온다는 그녀의 말에 심장이 철렁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나를 보러 온다고 말한 건가?’그가 오매불망 꿈에서 그리던 상황이었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당황했다.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정말이야?”차우미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지. 어서 가서 일 봐. 서흔 씨 기다리겠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로 연락해.”“그래.”온이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섰다.대화를 끝내고 차우미가 뒤를 돌아봤을 때, 소년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온이샘은 차우미의 집으로 가서 그녀의 부모님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인자한 부모님은 지역 특산물을 잔뜩 싸서 그의 차에 넣어주었다.온이샘이 극구 사양하자 차우미가 말했다.“선배, 받아 둬. 두고 간식처럼 먹으면 맛있어. 부모님께도 가져다드려.”그녀가 그렇게 얘기하는데 안 받을 수는 없었다.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다음에는 우리 고향 특산물 가져올 테니까 먹어봐. 엄마는 강원도 분이신데 강원도 음식도 맛있어.”차우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하선주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그럼 먼저 가볼게요. 두 분도 어서 들어가세요.”차에 오른 온이샘은 하선주 부부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 뒤, 웃는 얼굴로 차우미를 바라보았다.차우미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배웅해 주었다. 그는 천천히 시동을 걸고 아쉬운 마음으로 아파트를 벗어났다.백미러로 점점 작아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우미도 천천히 나를 받아들이고
차동수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차우미와 하선주는 먼저 앞장서서 걸었다.하선주가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어?”차우미가 말했다.“준혁이 걔 요즘 어떻게 지내나 해서.”“준혁이?”하선주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되짚었다.“나도 한동안 못 봤는데 아마 지금쯤 수능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몇 달 전 추석이었던 것 같아.”“준혁이 걔 키가 엄청 컸어. 네 외삼촌보다 더 크더라. 얼굴도 잘생겨서 얼마나 예쁨을 받는지 몰라.”준혁이 얘기가 나오자 하선주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우리가 그때 그랬거든. 조금만 더 크면 여자 여럿 울리겠다고.”하선주의 말을 통해 들은 준혁이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하지만 오늘 봤던 준혁이의 모습은 그들이 기억하는 모습과 전혀 달랐다.차우미는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잠겼다.“아마 대학 입시 끝나면 안평을 떠날 것 같아. 네 외숙모 얘기 들어보니까 준혁이 걔 청주대학을 지망하는 것 같더라고.”“청주대학?”차우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청주대학은 국내 명문대학 중 한 곳으로 오랜 역사와 수많은 인재를 양성해낸 것으로 유명했다.청주대학에 입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준혁이 정도로 머리가 좋은 아이라면 어쩌면 희망이 있었다.하지만 어렸을 때 준혁이가 지망하던 곳은 차우미가 다녔던 대학교였다.하선주는 말이 없어진 딸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너도 놀랐지? 우리도 전혀 예상치 못했어.”“어릴 때 준혁이는 네가 다니던 대학에 간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잖아. 그런데 갑자기 생각이 바뀌더니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더라. 지금 전교 1등이라고 들었어.”엄마의 말을 들으니 차우미는 걱정이 조금은 가라앉았다.“줄곧 전교 1등이었어?”“그래.”“3년 동안 거의 1등을 놓치지 않았을걸. 네 외숙모가 매번 준혁이 얘기할 때마다 얼마나 자랑하는지 몰라.”“애가 참하고 성실해. 손이 안 가는 아이라니까. 요즘 애들에 비하면 네
그녀의 상황은 진작에 진정국에게 얘기했는데 지금 연락이 왔다는 건 그녀가 꼭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했다.차우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손이 제대로 낫지도 않았는데 거길 안 가는 게 낫지 않을까?”차동수가 말했다.“나도 그렇게 말하기는 했는데 그냥 밥 먹는 자리라고 괜찮다고 하셨어. 그쪽에서 너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했나 봐. 네 상황을 얘기했는데도 괜찮다고 꼭 만나고 싶다고 하신다더라.”“물론 네가 가고 싶지 않으면 내가 아저씨한테 잘 얘기할게.”차동수는 딸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차우미는 지금 거절하면 박물관 이미지에도 안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밥만 먹는 자리라고 했으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갈게.”주최측에서는 이번 전시회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조각사들의 집까지 차를 보냈다.차우미는 간단하게 화장을 하고 차에 올랐다.“우미 씨, 손 다쳤다던데 지금은 좀 어때?”박물관에서 일한지 가장 오래된 선배 박종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평소에도 차우미를 살뜰히 챙기는 선배였고 차우미에게는 스승과도 같은 사람이었다.차우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딱지가 앉았으니 천천히 아물 거예요. 일주일 정도 지나면 괜찮을 것 같아요.”“어디 봐봐.”박종웅은 핸드폰 불빛으로 그녀의 손 상태를 살펴보았다. 손바닥 대부분이 화상으로 피딱지가 앉아 있어서 보기만 해도 안쓰러웠다.박종욱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뼈는 괜찮아?”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뼈는 멀쩡해요.”“그럼 다행이고. 우리 같은 사람은 뼈 다치면 귀찮아져. 최근에는 일도 하지 말고 상처 치료에 집중하는 게 좋겠어. 물도 묻히지 말고. 피딱지가 떨어지면 괜찮을 거야.”“걱정 마세요. 저 괜찮아요.”“그래.”박종욱은 최근 그녀가 없는 사이 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작품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업무는 많이 밀려 있었고 주문 의뢰와 인터뷰, 복구 작업도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차우
날은 어느새 어두워지고 밝은 보름달이 하늘에 걸렸다. 환한 가로등 불빛과 별하늘이 어우러져 조용한 안평 도심도 번화 도시처럼 반짝이고 있었다.오두막은 번화가를 조금 벗어난 교외의 명승지에 지어졌다. 고대의 왕궁을 모티브로 한 인테리어는 수많은 여행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해마다 안평에 여행 오는 손님들이 자주 찾는 맛집이었다.게다가 음식도 맛있다고 소문 나서 수많은 인플루언서들이 다녀간 뒤로 안평을 대표하는 명승지가 되었다.차우미와 나상준이 처음 만난 곳이 이곳이었다. 이곳을 기점으로 그들은 결혼까지 가게 되었다.3년이 지난 지금 이곳을 다시 찾아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녀는 3년 전과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그에게 미련이 남은 게 아니라 이곳에서 다시 나상준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짙은 회색 정장을 차려 입은 그의 모습은 그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뒷모습이었다.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라인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그는 나무 아래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바람이 불어와 그의 앞머리가 살짝 아래로 드리웠다.주변의 형형색색의 복고풍 가로등과 그의 모습은 조화를 이루어 마치 영화 속 풍경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차우미는 3년 전 그와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밤이었고 이런 아련한 풍경이었던 것 같았다.“벌써 도착했어? 자, 같이 안으로 들어가자.”다른 차를 타고 온 박물관 조각사들이 다가와서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그들은 전부 이 업계에서 최소 몇십 년을 일한 노장들이었다.담당자가 다가와서 조각사들을 안으로 안내했다.박종욱은 차우미가 멍 때리고 있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우미 씨, 빨리 들어가지 않고 뭐 해?”차우미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서 들어가요.”비록 나상준이 무슨 이유로 여기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고 왜 하필 이 시간에 그녀와 마주쳤는지도 알 길이 없지만 단순한 우연으로 생각하기로 했다.차우미는
“비서한테 연락 받았는데 그쪽에서 다 도착했다고 하더라고. 넌 어디야? 도착했어?”“내가 괜히 바쁜 사람 불러낸 건 아닌지 모르겠네.”수화기 너머로 자애로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상준은 멀어지는 가녀린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담담히 말했다.“도착했어요.”“정말? 내가 괜한 약속을 잡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 바쁘면 억지로 자리 지킬 필요 없어. 언제든 돌아가도 돼. 다음에는 이런 부탁 안 할 거야.”“아니에요. 이번 이벤트 저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래. 네가 공예에 관심 있는 줄은 몰랐는데. 잘됐네. 네가 있으니 이번 이벤트 잘될 것 같아.”“문 앞이야? 내가 비서 내보낼게.”“아니요. 이미 들어왔어요.”“그래.”전화를 끊은 뒤, 나상준은 떠들썩한 소리가 사라진 복도 끝 쪽을 잠깐 바라보았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서 3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는 걸음을 옮겨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담당자는 차우미 일행을 룸으로 안내했다.족히 스무 명은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룸이었다.주최측 인원들은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담당자가 진정국을 바라보며 소개했다.“이분은 하 교수님이십니다.”진정국은 곧바로 하 교수라는 노인에게 악수를 청했다.“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평 박물관 관장 진정국입니다. 하 교수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반가워요. 다들 편하게 앉아요.”하 교수는 푸근한 인상을 가진 70대 노인이었다.차우미가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으려는데 하 교수가 입을 열었다.“저분이 박물관 최연소 여자 조각사인가 봐요?”오기 전에 이미 안평 박물관에 대해 조사를 끝냈기에 차우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진정국이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제 친구의 외동딸인데 어려서부터 제 친구를 따라 목공예를 익혔죠. 타고난 재능이 남달라서 나이는 어려도 이 일을 몇십 년 동안 해온 선배들 못지 않아요.”말을 마친 진정국은 차우미를 향해 손짓했다.“우미야,
문은 반쯤 열려 있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은 문밖으로 쏠렸다.하지만 상대는 바로 들어오지 않고 조용히 허락을 기다렸다.차우미가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그리고 문밖에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이 사람이 여긴 어쩐 일이지?’남자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차우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리가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조금 전에 정원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그냥 우연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와 마주친 건 정말 예상 밖이었다.나상준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는 그녀의 청순한 얼굴을 잠깐 바라보고 하 교수에게 다가갔다.“아까 전화했을 때 다 왔다고 해서 바로 들어올 줄 알았는데 좀 늦었네?”하 교수는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나상준은 다가가서 하 교수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오랜만이네요, 아저씨.”“마침 잘 왔어. 여기 앉아.”하 교수가 나상준에게 옆자리를 권했고 진정국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나상준에게 쏠려 있었다.다른 직원은 몰라도 진정국은 나상준을 기억하고 있었다.차우미가 결혼하던 날 식에 참석했었기에 그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왔지만 나상준처럼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재는 흔치 않았다.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 부류였다.태생이 큰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게 나상준이었다.그래서 차우미와 두 사람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어쨌거나 진정국은 3년이 지난 오늘도 한눈에 나상준을 알아보았다.이 자리에 나온 다른 선배들도 3년 전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었다.기억력이 별로 안 좋은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일부는 보자마자 나상준을 알아봤다.사람들 모두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는 나상준과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차우미를 번갈아 보았다.여기 오기 전까지는 차우미가 이혼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또 아닌 것 같기도 했다.선배들의 생각을 전혀 모르
어른의 말을 절대 끊는 법이 없는 나상준이었기에 하 교수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나상준에게로 쏠리고 차우미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상준이 말했다.“저와 우미 결혼할 때 아저씨도 왔었잖아요.”차우미도 당황하고 자리에 있던 하 교수도 당황했다.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가관이었다.갑자기 방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해가 갈 듯하면서도 이해가 잘 안 가는 상황이었다.차우미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상준을 바라보았다.그녀의 기억에 결혼식에서 하 교수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하 교수는 차우미와 나상준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보자마자 마음에 들더라니 예전에 한번 만난 적 있었구나! 내가 요즘 자꾸 기억이 깜빡깜빡해. 나도 늙은 거지….”하 교수가 한숨을 내쉬는 사이 나상준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차우미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었다.“당신도 잊었어?”차우미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칠흑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에게 뭐라도 말해야 하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그의 질문에 뭔가 문제가 있는데 꼭 집어 뭐가 문제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이런, 우미도 작품에만 열중하느라 깜빡했나 보네. 이 얘기는 그만하고 이미 다 아는 사이이니까 소개는 생략하자. 앉아, 앉아.”하 교수의 말에 나상준은 그의 옆자리에 앉았고 차우미는 어디로 가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 가만히 서 있었다.지금 박종욱의 옆에 앉으려니 뭔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이혼한 사이인데 그와 옆자리에 앉고 싶지도 않았다.나상준은 마치 그들이 이혼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그제야 차우미는 어디가 문제인지 깨달았다.그는 아직 대외적으로 그들이 이혼한 사실을 공표하지 않은 것이다.차우미는 저도 모르게 다시 나상준에게로 시선이 갔다. 그는 외투를 벗어 종업원에게 건네고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차분하고 대범한 표정으로 하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
시간은 어느새 9시가 되어 태양이 점점 더 뜨거워졌는데 양산이 차우미의 머리 위를 가리는 순간 햇빛과 단절되어 약간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이건 양산의 공로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온이샘의 공로였다.온이샘은 차우미의 아주 가까운 곳에 서 있었는데 여름 바람이 살살 불면서 그의 몸에서 풍기는 치자꽃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감쌌다.차우미가 웃으며 말했다.“나는 괜찮아.”“그냥 해.”온이샘은 양산 손잡이를 꼭 잡고 차우미를 바라보았는데 새하얀 피부에 버들잎 같은 눈썹을 보자마자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양산은 태양의 뜨거움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햇빛도 막아서 차우미 눈 밑에 있는 다크서클마저 잘 보였다.온이샘이 마음아파하며 물었다.“어젯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어?”“왜?”차우미는 온이샘의 난데없는 질문에 의아했다.온이샘은 그녀의 다크서클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눈 아래에 다크서클이 심해서 잠을 잘 자지 못한 것 같아.”차우미도 아침에 씻고 거울을 볼 때 봤었다.그녀는 밤에 늦게 자고 수면 시간이 짧기만 하면 다음 날에 곧바로 다크서클이 나왔는데 컨디션이 좋으면 그나마 조금은 괜찮았었다.지금 컨디션도 좋고 졸리지도 않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온이샘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차우미는 눈을 만지며 말했다.“어젯밤에 늦게 자서 그래. 혜지 씨가 관강동 별장에 예은이 데리러 왔는데 그때가 밤 10시였거든, 그리고 상준 씨와 얘기를 조금 하느라 호텔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12시가 넘은 시간이었어.”차우미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속이지 않고 온이샘에게 이야기했다.온이샘은 그녀가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속이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녀의 선명한 눈빛을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했다.온이샘의 눈에는 온통 차우미로 가득 찼다.“그럼, 아침 먹고 호텔로 데려다 줄 거니까 한잠 자. 점심때 되면 연락할 테니 같이 식사하고 오후에 안평으로 가자.”온이샘은 차우미의 일이 끝나서 이제 나상준과 더 이상 엮일 일이 없으니 마음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조금 전에 호텔 앞에서 봤던 표정인데 그때는 햇빛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차 안이어서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이 그대로 눈에 보였다.순간 온이샘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조여왔는데 마치 뭔가 안 좋은 일이 발생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잡았는데 얼굴에 가득하던 미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차우미는 고개를 저으며 눈웃음을 지었다.“선배, 여기서 일은 다 끝났어?”차우미는 아무것도 생각한 적이 없다는 듯 표정을 회복했다.온이샘은 차우미의 안색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는데 조금 전의 표정이 보이지 않자 억지로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말했다.“응, 어젯밤까지 다 처리했어.”온이샘은 정말 일했다는 것을 강조하듯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그의 대답은 차우미가 미리 예상했었는데 그녀는 온이샘이 정말로 일이 있었고 자기를 속이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그때 차우미는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앞을 바라보며 웃었다.“선배, 우리 어디 가서 아침 먹는 거야?”온이샘은 차우미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편안함을 들었다.그는 차우미에게 무슨 일이 있지만 별로 심각한 것 같지 않아 한시름 놓았다.“무후문으로 갈 건데 혹시 들어봤어?”차우미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거기가 옛날 건물들이 있는 곳이지?”온이샘은 차우미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무후문은 청주에서 오래된 건물들이 많은 거리에 있는데 이 도시에서 3년 동안 생활한 차우미가 모를 리가 없었다.무후문은 소문이 많이 나서 청주에 여행 오는 사람들 거의 모두 반드시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다.외부에서 여행으로 잠깐 오는 사람들도 아는 곳을 청주에서 생활했던 차우미가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하지만 온이샘은 자기가 지금 차우미를 데리고 가려는 그곳은 절대 모를 거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거기는 아주 외진 곳이기 때문이다.온이샘이 흐뭇해하며 웃었다.“거기는 아침 먹기에 조금 불편해. 내가 지금 가려는 곳은 그 옆
온이샘은 차우미 앞에 부드럽게 차를 멈추고 문을 열고 나왔다.자기 앞에 서 있는 차우미를 바라보며 그는 진정으로 차우미가 자기 손이 닿는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온이샘은 빠른 걸음으로 차우미의 앞으로 갔는데 그녀는 그를 보는 순간 잠깐 멍해 있었다.햇빛이 강렬한 관계로 그녀는 눈을 찌푸려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온이샘도 차우미의 이런 표정은 처음으로 보았는데 조금은 귀엽고, 또 조금은 매혹적이었다.온이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차우미의 귀에 들어갔는데 그제야 눈썹을 흠칫하며 온이샘이 자기 앞에서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눈으로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차우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선배, 아침 먹었어? 안 먹었으면 내가 살게.”차우미가 그를 보자마자 첫마디가 그에게 아침 사준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온이샘이 웃는 것을 본 차우미는 왜 웃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본 온이샘은 더 크게 웃었다.그러다가 헛기침하며 웃음을 꾹 참았는데 입꼬리는 여전히 참지 못하고 치켜올라갔다.“우미야, 여기는 청주이니 내가 살게.”그의 진지한 표정에 차우미가 웃었다.“알았어. 안평으로 돌아가면 내가 살게.”“약속한 거야?”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지.”“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거니까 아침 사주기로 한 거 까먹으면 안 돼.”온이샘은 특별히 차우미가 이번에 아침을 사주기로 한 것과 기존에 밥 사기로 한 것을 구분해서 강조했다.전에 약속한 것과 지금 약속한 것을 반드시 별도로 해야 했는데 같이 있을 수 있는 차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차우미가 대답했다.“알았어.”“가자. 내가 먹어 본 중에서 아침을 제일 잘하는 집이 있는데 거기로 가자.”“좋아.”온이샘은 조수석의 차 문을 열어주었고 차우미가 올라타자, 본인도 즉시 운전석에 타고 출발했는데 교통 체증은 여전했다.“오래 기다렸어?”교통 체증 때문에 천천히 달리는 차에서 차
나상준이 만약 아무 일도 없으면 자기와 같이 안평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차우미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메시지를 보냈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흰색 BMW 차 한 대가 멈춰 섰다.차가 브레이크 밟는 소리를 내며 앞에 멈춰서자, 차우미는 고개를 들었는데 운전석의 문이 열리며 흰색 셔츠에 회색 캐주얼 바지를 입은 온이샘이 내려왔다.시간은 8시가 넘어서 햇빛이 적당하여 너무 덥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몸 전체를 짱짱하게 따뜻하게 내리 비춰주었다.온이샘이 차에서 내리자 밝은 햇빛이 즉시 그를 감쌌는데 얼굴도 더욱 맑고 우아해졌다. 그는 햇빛 때문에 눈을 지그시 뜨더니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미소를 아끼지 않으며 차우미를 보고 있었다.그건 만족의 눈빛이었다.차우미는 온이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사람으로서 가장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진심이라고 하는 데 진심은 분명히 통하게 된다.차우미는 온이샘이 자기를 대하는 것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여가현이 노골적으로 얘기한 이후로는 그 마음이 더 잘 보였다.온이샘은 차우미를 각별히 챙기고 돌봐주었는데 모든 면에서 온이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온이샘은 연인으로도 남편으로도 너무나 좋은 사람이다.처음에 차우미는 그냥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피치 못 할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에 이제 더 이상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온이샘은 남자로서 훌륭하고 심지어 나상준보다도 더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차우미는 만약 이혼한 경력만 없었으면 아무 고민 없이 온이샘과 함께했겠지만, 본인의 상황이 온이샘 인생에 흠집이 될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는 본인은 자격이 없기에 온이샘은 자기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왜 그래?”온이샘은 주차장을 나오자마자 차우미의 호텔을 향해 달렸는데 아마 평생 처음으로 이렇게 빨리 운전했을 것이다.청주의 7~8시는 모두가 출근하는 시간이기에 자전거, 스쿠터, 자동차로 이동하는 사람들로 붐볐다.어쩔
휴대폰 화면에 나상준의 이름이 나타났다.온이샘이 아닌 것을 보고 차우미는 잠깐 멈칫했다가 메시지를 클릭했다.[일 끝나면 연락해.]너무 간결한 한 마디였지만 뜻은 분명했는데 동시에 차우미의 머릿속에는 나상준이 어젯밤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일 끝나면 연락해. 너랑 같이 안평으로 갈 거니까.”어제저녁부터 나상준은 차우미와 같이 안평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녀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미룬 것이다.차우미는 나상준이 정말로 일이 있고 타임이 맞아서 같이 안평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그냥 쉽게 미루니까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어젯밤에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가 순식간에 차에 올라타면서 대화가 끊어져 버렸다.그 후 집중해서 운전하느라 그 일은 완전히 잊었다.지금 차우미는 나상준의 메시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건가?’차우미는 나상준과 같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답변했다.[오늘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거야?]메시지를 보내고 차우미는 나상준이 메시지를 보낸 시간을 보고 엘리베이터로 갔다.그녀는 아까 연락한 시간에서 20분 정도 지났기에 온이샘이 이제 곧 도착할 것 같아서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같은 시각, 관강동 별장에서 나상준은 차우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그는 어젯밤에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방금 집에 왔는데 샤워하고 식사를 한 다음 곧바로 다시 회사로 나가야 했다.나상준이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물소리가 들렸는데 침대 머릿장에 올려놓은 휴대폰에서 그때 메시지 도착 음이 울렸다.휴대폰은 짧게 두 번 울리고 곧바로 침실에 정적이 흘렀다.별장 전체가 차우미와 나예은이 떠나면서 고요함은 더욱 짙어졌다.욕실의 물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려도 별장 내의 고요함과 차가운 느낌은 가려지지 않았다.나상준은 시원하게 씻고 머리를 닦으며 나와서 곧바로 머릿장으로 가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화면이 켜지면서 읽지 않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발신자 이름을 보고 그는
순간 여가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차우미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어쩐지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차우미는 여가현의 목소리에서 슬픔과 무력함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가현아, 난 괜찮아. 이혼을 결심했을 때 남은 생을 살면서 다시 결혼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어. 원래는 선배와 잘 지내면서 연애도 해보고 나중에 천천히 결혼 생각도 해보려고 했어. 이샘 선배와 같은 좋은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선배가 좋으면 좋을수록 내가 너무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것 같아. 선배는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래서 계속 이렇게 선배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오늘 선배한테 확실하게 얘기하고 더 좋은 여자를 만나라고 할 거야. 그리고 나는 당분간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일에 매진하고 결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할 거야.”어떤 일들은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다.산도 보기에는 가까워 보여도 정작 가려면 엄청 멀듯이 말이다.온이샘은 차우미에게 바로 그런 가까이에 있는 같지만 사실상 멀고 먼 곳에 있는 존재인 것 같다.여가현은 크게 벌렸던 입을 다물며 속상해했다.“우미야, 나도 지금 세상이 이혼한 여자한테 불공평하다는 거 알아. 현재로서 세상 사람들의 그런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그런데 나는 이혼을 한 사람도 자기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샘 선배가 너를 지켜줄 거라는 것도 믿어. 너도 이샘 선배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거 인정하잖아. 더 중요한 건 이샘 선배의 마음속에서 너의 자리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다는 거야.”차우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현아,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얻지 못한 것은 언제나 좋아 보이는데 정작 얻고 나면 달라질 거라고. 너 그거 알아? 그날 나상준과 같이 예은이를 데리고 식당에 갔는데 선배가 밖에서 우리를 만났을 때의 표정을 보며 재혼이라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 왜냐하면 아무리 이전의
여가현은 서류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사인을 하려다가 차우미의 말을 듣고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할 말이라는 건 뭐야? 무슨 뜻이야? 해야 할 말이 뭔데? 그러니까 네 말은 이샘 선배가 고백하기 전에 네가 먼저 거절하겠다는 거야?”역시 차우미와 함께 자란 사람으로서 차우미의 간단하게 한 말에서 그 의도를 알아챘다.차우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응.”탁!여가현이 펜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두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거절한다고? 왜? 이틀 동안 나상준 씨가 또 무슨 말로 너를 꼬셨는데 이샘 선배를 거절한다는 거야? 차우미, 제발 멍청한 짓 하지 마!”여가현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차우미는 여가현의 반응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이어서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큰 목소리에 차우미는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뒀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현의 다급한 목소리는 여전히 잘 들렸다.여가현이 말을 다 하고 잠깐 숨을 쉬는 사이에 차우미가 휴대폰을 가까이 가져다 진지하게 말했다.“가현아, 일단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봐.”휴대폰으로 차우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니, 여가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핏줄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애써 참고 심호흡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그래, 우선 진정하자.’차우미는 휴대폰 건너편이 조용해지고 거친 호흡 소리가 들리자, 여가현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속해서 말했다.“가현아, 상준 씨랑 상관없이 나도 오랫동안 생각했어. 얼마 전에 선배의 어머니와 가족들도 만난 적이 있는데 너무 좋은 분들이었어. 이번에 청주에 와서 선배 어머니를 또 뵀었는데 너무너무 좋은 분이셔. 상준 씨의 어머니보다도 엄청 좋았어. 그분도 나를 예쁘게 봐주셨고 나도 선배 어머니가 너무 좋았는데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이혼했고 선배의 가족과 배경은 너도 잘 알다시피 그런
차우미는 스카이빌리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에 거기에서 호텔까지 거리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온이샘이 스카이빌리지에서 출발하는지를 확인하지 않아서 그냥 마음 놓고 짐을 준비했다.그녀가 모든 짐을 챙겼을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익숙한 전화벨 소리에 차우미는 캐리어를 한편에 놓고 손잡이를 거둔 다음 휴대폰을 들었다.휴대폰에서 여가현이라는 아주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차우미는 온이샘이 도착했다는 전화인 줄 알았는데 여가현인 것을 보고 조금 놀라면서 전화를 받았다.“가현아, 무슨 일이야?.”“이틀 동안 괜찮았어? 나상준 씨가 괴롭히지 않았어? 너 다친 데 없지? 그 아이를 돌봐주는 건 이제 끝난 거야?”휴대폰 건너편에서 서류 넘기는 소리와 함께 여가현의 말소리가 들렸는데 그녀는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차우미는 그제야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알아채고 웃으며 말했다.“월요일인데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어?”월요일은 모두에게 바쁜 날이다.“흠! 사실은 어제 너에게 전화하려다가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참았어. 어차피 나상준 씨도 나씨 가문과 차씨 가문의 관계 때문에 감히 너를 어떻게 하지 못할 테니까. 만약 나상준 씨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다면 내가 직접 나씨 가문의 어르신을 찾아갈 거야. 그분은 자기 집안 사람이라고 감싸주는 분이 아니니까.”여가현의 말에 차우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나상준은 이미 여가현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서 믿음이라고 전혀 없었다.차우미는 통유리창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아니야. 괴롭히거나 다치게 한 것 없어. 이틀 동안 나와 같이 나예은과 아주 잘 놀아 줬어. 상준 씨가 예은이을 얼마나 예뻐하는지 몰라.”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면 차우미도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틀 동안의 나상준은 전에 전혀 본 적이 없던 다른 사람이었다.“쳇! 그 아이는 나씨 가문의 아이니 당연히 친절하게 잘해주겠지. 그런데 너는 다르잖아. 너는 이제 나상준 씨의 전처일 뿐이잖아.”차우미는 입술을 살짝
차우미는 온이샘에게 할 일이 끝났다고 아주 간단하게 메시지를 보냈었다.온이샘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온이샘이 오늘 시간이 되는 것 같아서 대화창을 누르고 답변했다.[호텔에 있어.]윙윙.휴대폰 진동소리였는데 또 온이샘의 메시지가 왔다.[알았어. 호텔에서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온이샘이 오겠다는 말에 차우미는 깜짝 놀랐다.‘선배가 여기로 온다고?’차우미는 고개를 들고 창밖의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나온 지 한참이 지났고 청주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여 북적거리기 시작했다.차우미는 창밖의 밝은 햇살을 바라보며 눈을 살짝 찌그리더니 다시 온이샘이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그녀는 워낙 온이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짐을 정리한 다음 아침 먹으러 가려고 했다.그런데 온이샘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답변을 보내고 호텔까지 온다고 할 줄을 몰랐다.차우미가 답장을 보냈다.[알았어.]메시지를 보내고 차우미는 짐을 정리하면서 온이샘을 기다리기로 했다.스카이빌리지에서 온이샘은 7시에 강서흔의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강서흔이 이른 아침에 온이샘에게 전화를 한 것은 그가 청주에 아직 있으면 만나서 차우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강서흔의 말투에서 조금 다급하고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았다.온이샘은 강서흔이 정말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아직 청주에 있다고 했는데 현재 차우미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어서 언제 만날지는 나중에 다시 알려주겠다고 했다.온이샘은 강서흔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차우미와 식사하기로 한 것까지 모두 말했다.그런데 온이샘의 말을 듣고 강서흔은 더 다급해졌다.‘기다리면 어떡해? 주동적으로 연락해야지.’온이샘의 성격은 온화하고 횡포하지 않기에 차우미를 좋아하더라도 항상 차우미를 존중하고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강서흔은 그런 온이샘을 답답해하며 오늘 무조건 만나야 하니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확정되면 알려달라고 했다.그는 이런 일은 얼굴 보고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