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을 내려놓은 양훈은 여전히 재생되고 있는 동영상을 바라보다가 전화를 걸었다. "차우미에게 사람을 붙여.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 보고해.""예."나상준도 전화를 끊었다.그의 손가락이 전보다 좀 더 하얗게 변해 있었다.그의 눈동자는 어두운 밤과 어우러져 더 짙게 빛났다. 등불은 여전히 눈부시게 빛났지만 끝없는 심연에 결코 환하게 비칠 수 없었다.한참 동안 그는 눈을 감았다.어두운 밤, 고요한 적막이 가득 뒤덮였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고요하고 조용하게 지나갔다....회성의 밤은 열기로 가득 찼다.차우미는 온이샘과 함께 L 거리에 도착했다. 온이샘이 말한 먹자골목은 L 거리였다. 하성우가 차우미를 데리고 왔던 곳이다. 다만 거리가 워낙 넓었던 탓에 지난번에는 먹자골목에 오지 못했다. 당시 하성우는 먹자골목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와서 먹자고 했다.결국 그들 일행 중 대다수는 고령인들로 고염도 음식이나, 당도가 높은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성우는 이곳은 젊은이들에게 적합한 장소라고 말해줬다.하성우의 말에 차우미는 나중에 여가현과 이곳에 오면 좋을 것 같다고 여겼다. 그런데 오늘 온이샘과 오게 될 줄 몰랐다.그들이 왔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지난번에 왔던 사람들보다 훨씬 많았다.사람들로 거리가 가득 찼지만 짙은 불꽃 연기가 거리를 가득 메워 후끈하게 했다.먹자골목은 다양한 음식들의 향이 가득 메우고 있었고 사람들의 식욕을 돋웠다. 차우미는 가리는 것 없이 아주 잘 먹었다. 좋아하는 먹거리도 많았으나 위가 작아 많이 먹지 못했다. 여가현과 있을 때도 두 사람은 함께 1인분을 먹을 정도였다. 다만 차우미는 몇 입, 여가현은 남은 전부를 먹었다.다양한 것을 적당하게 먹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그러나 온이샘과 하나를 나눠 먹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작은 점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지글지글 익고 있는 야채 육전을 바라보던 온이샘이 2인분을 주문했다. 차우미
"1인분 두 그릇에 나눠서 담아주세요."온이샘이 사장에게 말했다.차우미가 고개를 돌려 온이샘을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두 사람이 하나를 나눠 먹으면 온이샘이 배불리 먹지 못할 수 있었다.차우미가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 "나 많이 못 먹어."온이샘은 그녀의 말뜻을 알아 들었다."사장님 말씀대로 여기 먹을 것 많잖아. 나도 한 가지만 너무 많이 먹으면 다른 것 못 먹잖아."차우미는 사실 온이샘이 먹는 양이 적을까 봐 걱정했으나 온이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우리 나눠 먹자."사장은 두 사람의 표정과 대화 분위기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육전을 깔끔하게 자른 뒤 두 그릇에 나눠 담아 온이샘에게 건넸다. "뜨거우니 남성분이 들어주세요.""여성분은 손을 아껴야죠."온이샘은 사장의 매우 깊은 눈빛을 알아차리고 미소 지었다. "네."그는 상자를 받아 들었다. 사장은 작은 꼬챙이를 꽂으며 차우미에게 말했다. "여성분이 먼저 드세요. 뜨거운 걸 드셔야죠."차우미는 사장의 말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차우미는 사장 옆의 중년 여인을 보았다. 중년 여인은 바삐 재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발이 매우 재빠른 사람이었다. 중년 여성은 차우미와 온이샘을 바라보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저희 집 양반이 괜한 소리를 한 거니 신경 쓰지 말아요."차우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두 사람은 줄곧 밖에서 장사했는지, 기름 연기에 그을려져 있었고 얼굴에도 기름기가 가득했다. 피부도 거칠었다.그러나 그들의 미소는 아무런 악의가 없었고 서로 소중하게 여겼다.차우미는 두 사람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고 발걸음을 옮겼다.행복은 돈에서 오는 게 아니다, 마음을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있다.그녀는 노점상 부부의 얼굴에서 행복을 보았다. 비록 부자가 아니지만, 그들은 지금의 생활에 충분히 행복함을 느끼고 있다.그녀가 동경하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같았다.온이샘은 차우미의 변화를 눈치채고 그녀를 보았다. "왜 그래?"
너무 늦은 시간까지 돌아다니면 좋지 않았다.차우미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게다가 내일 할 일도 있었기에 더 돌아다닐 수 없었다.호텔 앞에 택시가 멈춰 섰고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온이샘이 입을 열었다. "어제 너희 부모님 만나러 갔는데..."온이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우미의 휴대폰이 울렸다.온이샘이 하던 말을 멈추었다.차우미는 온이샘의 말을 들으며 걷다가 휴대폰이 울리자 발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가방에서 꺼냈다.회성에서 걸려온 전화다. 차우미가 잠시 고민하더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차우미 씨 휴대폰 맞나요?""네. 그런데 누구...""안녕하세요, 회양 강변 경찰서입니다. 오늘 폭행 사건으로 신고하셨잖아요."차우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네, 조사하셨어요?"온이샘은 말없이 그녀의 곁에 서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온이샘의 시선이 차우미에게 꽂혔다.그녀는 경찰서에 있을 때처럼 진지한 표정이었다. 웃음기조차 보이지 않았다.온이샘은 단번에 누가 전화를 걸어왔는지 짐작했다."상대 측 변호사가 피해 보상금을 제시했습니다. 사과 대신 보상금을 내겠다는데, 시간 되실 때 경찰서로 와서 합의 보는 게 어떻습니까?""이 일은 두 분께서 직접 협상이든 합의를 보는 게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경찰의 말에 차우미는 예상한 듯 물었다. "내일 점심에 가도 될까요?""네.""네, 그럼 내일 점심에 갈게요."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휴대폰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경찰서에서 연락 온 거야?"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변호사가 와서 피해 보상금을 제시했다네. 사과는 안 하겠다고 한대, 그래서 내일 합의해야 할 것 같아." 온이샘이 미간을 찌푸렸다. 주혜민이 어떤 성격인지 단번에 파악되었다. 그때 주혜민의 오만한 태도가 그녀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돈을 주더라도 사과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자기가 일부러 상해한 것을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온
"내일 경찰서에 가서 합의금 받을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눈매가 평화로웠고 어떤 원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결과를 예상한 듯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온이샘은 눈앞의 평온하고 담담한 그녀를 바라보며 안도했다.차우미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미꾸라지 한 마리 잡으려고 어장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손해 보는 일을 할 수 없었다.경찰에 신고한 이유는 단지 보여주는 거다.인과응보가 있다고, 잘못한 일이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기회였다.주혜민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온이샘이 미소 지었다.후퇴한다고 패배를 인정하는 게 아니다. 이건 차우미가 원하는 결과다. 그게 전부였다."그래, 언제 갈 거야?""내일 점심."온이샘이 미소 지었다. "나도 같이 가."차우미가 온이샘을 바라보았다. "그래."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타고 온이샘은 전에 못다 한 말을 계속했다. "어제 너희 부모님께 갔거든. 내가 회성에 간다고 했더니 너한테 챙겨줄 게 있다면서 이것저것 챙겨주더라."차우미는 살짝 의아했다. 온이샘이 여기 오기 전에 그녀의 부모님을 뵈러 갔을 줄 몰랐다. "두 분 아무 일 없지?"온이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두 분 다 건강하셔. 널 보고 싶어 하더라, 네가 혼자 밖에 있으니까 걱정하셨어."차우미는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스스로 나 하나는 잘 돌볼 수 있어."차우미의 부모님은 그녀가 결혼하든, 이혼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 눈에는 차우미가 여전히 아이처럼 보였다. 세상의 부모들은 대부분 그러할 것이다. 자녀가 아무리 커도 혼자 밖에 있으면 부모는 안심할 수 없다.온이샘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따듯하게 말했다. "네가 회성에 처음이기도 하고, 혼자 오니까 마음을 놓을 수 없으셨나 봐."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차우미가 온이샘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말했다. "고마워, 선배."온이샘이 매우 세심
드디어 발이 완쾌했고 그녀는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한다.그래서 점심과 저녁에만 시간을 뺄 수 있었다.온이샘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나 신경 쓰지 마. 낮에 혼자 돌아다니면 돼. 네가 시간 될 때 같이 돌아다니자.""응."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온이샘이 점심때 정리한 물건을 꺼냈다. "이 안에 든 건 네 옷이야. 네가 회성에 이렇게 오래 머물 줄은 몰랐다면서 여러 벌 챙겨줬어." 차우미가 가방을 들고 안에 있는 옷가지를 확인했다. 두 세 벌 되었다.그녀는 여기 올 때 세 벌 정도의 옷을 가져왔다. 호텔 드라이클리닝 서비스가 있어서 매일 그녀의 옷을 세탁해 저녁에 갖다 준다.속옷 같은 것은 그녀 스스로 세탁했다. 발을 다쳤지만 간단한 세탁은 가능했다.그래서 몇 벌의 옷을 돌려가며 입었다.온이샘이 이렇게 옷을 가져온 덕분에 앞으로 입을 옷이 충분했다.온이샘이 다른 쇼핑백을 꺼냈다. "이건 네가 좋아하는 거야. 여기서 살 수 없을까 봐, 혹시나 먹고 싶은 게 있을까 봐 챙겨주셨어." 차우미는 쇼핑백에 담겨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간식들이다. 회성에서 팔지 않는 것들이다.차우미는 안에서 떡 한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손바닥 크기의 반타원형 떡 일곱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그녀는 한 개를 꺼내 온이샘에게 건넸다. "선배, 이거 먹어봐. 내가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건데, 선배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온이샘은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다. 유난히 좋아하는 것도, 유난히 싫어하는 것도 없었다.그는 차우미가 자기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그녀가 좋아하는 건, 그도 좋아한다."응."그는 한 입 베어 물었다.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이 부드러웠다. 전에는 먹어본 적이 없는 맛이었다.차우미는 그가 씹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때?"온이샘은 전에 먹었던 떡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매우 특별한 맛이다. 이질적인 느낌이 들게 했다.사랑하는 마음처럼, 달달하면서도 짭조름한 게..온이샘은 차우미가
차우미는 온이샘의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미소 지었다.차우미는 수면 시간을 놓친 것을 감지하고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나머지 떡을 다시 상자에 넣은 뒤, 쇼핑백 안의 다른 간식들 몇 가지를 온이샘에게 건넸다."선배 이거 먹어봐.""다 맛있어, 선배도 먹어."온이샘은 진지하게 자기 간식을 나누어주는 차우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나누어준다면 온이샘은 일찌감치 거절했을 것이다.그러나 차우미의 작은 행동에도 빠르게 뛰어대는 심장을 그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뜨거운 열기가 가슴을 가득 채웠고 온이샘은 거절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럼 거절 안 한다?""응, 맘껏 먹어."차우미는 쇼핑백을 다시 바르게 고쳐 잡은 뒤, 온이샘과 작별 인사를 고했다.그러나 온이샘이 한 수 빨랐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했다. "방문 앞까지 데려다 줄게."자연스레 그녀의 손에 있던 쇼핑백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가자."차우미는 당황했다. 온이샘의 동작이 너무 빨랐다. 그녀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온이샘은 이미 앞에 가 있었다.차우미는 얼른 그를 따라갔다. "선배 됐어. 내가 들게. 선배는 얼른 쉬어."온이샘의 손에서 다시 쇼핑백을 가져오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온이샘이 놓지 않는 바람에 두 사람의 손이 서로 닿았다.두 사람 모두 멍해졌다.차우미가 황급히 손을 뗐다. "선배, 나 혼자..."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바탕 듣기 좋은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이샘의 휴대폰이다.온이샘이 눈살을 찌푸렸다.차우미가 얼른 말했다. "선배, 전화받아. 내 방 바로 위층이잖아, 혼자 갈게.""진짜 안 데려다 줘도 돼."온이샘의 손에서 쇼핑백을 가져오는 차우미다.기어코 혼자 가겠다고 하는 그녀다.만약 휴대폰이 울리지 않았다면 온이샘은 차우미를 방문 앞까지 바래다줬을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울린 휴대폰 때문에 차우미는 혼자 방으로 가게 되었다. "그럼 도착해서 문자 보내 줘."호텔이긴 했지만
"그래, 최대한 서둘러. 엄마가 너무 걱정돼서..." 진문숙은 뒷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온이샘도 엄마가 끝내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번이 마지막으로 뵙는 것일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외할머니는 이미 80세 고령이셨고 뇌졸중이라는 큰 병을 버티지 못할 수도 있었다.온이샘이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진정해. 내가 지금 갈 테니까... 그리고 외할머니 무사하실 거야.""그래! 무사하실 거야! 엄마도 그렇게 믿어!"진문숙과 통화를 끝낸 온이샘은 영소시로 가는 가장 빠른 티켓을 예약했다. 신분증과 중요한 서류들만 간단히 챙긴 채 바로 호텔을 나섰다. 짐을 챙기지 않은 채 몸만 영소시로 간다.만약 외할머니가 고비를 넘기면 그는 내일 아침 일찍 돌아올 작정이다.그러나 불상사가 생기면 내일 문자로 차우미에게 상황을 알리려 했다.온이샘은 빠르게 호텔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기사님, 공항으로 가주세요. 급해요.""네."곧 기사가 차를 출발했다.온이샘은 뒷좌석에 앉아 손에 휴대폰을 꼭 쥐었다. 눈 앞에서 호텔이 빠르게 사라졌다.차우미에게 연락하려다가 잠시 떠나는 것일 수도 있기에 결국 그녀에게 문자를 남기지 않았다.일단 영소시로 가서 상황을 살펴본 뒤 다시 연락할 참이다.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빛이 그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했다. 온이샘의 얼굴이 어둡게 깔렸다.한편, 방으로 돌아온 차우미는 온이샘에게 문자를 보냈다.곧 온이샘이 답장했다.[그래, 일찍 쉬어.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 만약 내가 전화 못 받으면 문자라도 남겨.]차우미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채 알겠다고 답장한 뒤 들고온 쇼핑백의 짐을 챙겨 파우더룸으로 걸어갔다.발목에서 은근한 통증이 전해왔다.그녀는 옷을 걸치고 가죽 소파에 앉아 바지를 걷어 올려 발목을 살펴보았다.발목이 약간 부은 것 같았다. 낮에 주혜민에게 밀려 뒤로 넘어지면서 발목이 살짝 삔 것 같았다.황급히 발을 보호하려 했으나 주혜민이 너무 갑작스레 두 번이나 공격
전화가 연결되었고 수화기 너머로 무언가 딱딱한 것이 벗겨지는 소리가 들렸다.차우미는 여가현이 무언가를 먹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직 안 잤어?"무언가를 바삭바삭하게 씹는 여가현이다. 결국, 차우미가 먼저 물었다. "뭐 먹는 거야?""아, 땅콩. 오늘 저녁을 하도 많이 먹어서 나가서 걷는데, 마침 땅콩을 팔더라고. 그래서 좀 샀어."차우미가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먹고도 또 들어가나 보다?""아니, 소화할 겸 산책하러 갔는데 마침 거기서 땅콩을 팔고 있잖아."여가현은 땅콩을 먹으면서 계속해서 말했다.오래간만에 이렇게 수다를 떨며 먹는 모습을 본다. 보통 여가현은 일과 식사를 병행했다.차우미가 검게 변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전화했어?"지금 11시가 거의 되어갔다. 별일 없으면 차우미는 씻고 자려 했다.내일도 일정이 빡빡했다."아, 별거 아니야. 난 그냥 너랑 선배 어떤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오늘 어땠어?"여가현이 이런 질문을 한 게 놀랍지도 않은 지 차우미는 태연했다.사실 오후에 두 사람이 통화할 때부터 여가현이 했던 질문이다. 그녀와 온이샘 사이를 누구보다 궁금해했다."좋았어.""뭐가 좋았는데?""…"차우미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짚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할 일을 끝냈는지 이제는 다른 사람일까지 관여하는 여가현 때문에 차우미가 난감한 듯 말했다."가현아, 지금 11시야.""11시? 고작 11시밖에 안 됐어? 나 오늘 12시 전에 일 끝낸 거네!"여가현의 놀란 소리가 들려왔다. 차우미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너 오늘 12시 전에 일 끝냈어.""근데 난 11시가 되도록 씻지도 못했어.""왜 아직도 씻지 못했는데?"여가현이 뒤따라 말했다. "선배랑 데이트했어? 솔직해 말해봐, 둘이 지금 어떤 상태야?" "더 깊어진 거야?""이샘 선배가 일부러 너 만나려고 회성간 것 좀 봐. 너 설마 모른다고 할 건 아니지?"차우미는 통화를 끝내고 싶었다. 지금 확실히 늦은 시간이
차우미가 원하지 않는다는 건 나상준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냥 모르는 체하고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차우미는 어찌 됐든 나상준과 이혼한 이후 서로의 생각이 다른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부분은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차우미가 뭐라고 할 수는 없다.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했으니, 그때도 아마 바쁠 거라고 생각하면서 차우미는 편안하게 생각하기로 했다.차우미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탑승 시간인 것을 보고 잠시 휴식하면서 업무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휴식 구는 점차 조용해지더니 나중에는 적막이 퍼졌다.나상준은 휴대폰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는 차우미를 보았는데 무언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눈빛이었다.‘무슨 생각하는 거지?’그런 그녀의 모습은 회성 회의실에서 일할 때와 같았다.나상준은 차우미를 바라보다고 다시 휴대폰으로 안평의 관광 명소들을 검색했다.그는 자기와 멀어지려고 하는 차우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시간은 어느덧 5시가 되어 나상준과 차우미는 비행기에 탑승했다.좌석에 앉아서 안전벨트를 하더니 차우미는 휴대폰을 꺼내 온이샘에게 탑승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곧바로 온이샘이 답장을 보냈다.[알았어. 나도 지금 탑승하고 있어.]퍼스트 클래스는 이코노미석보다 조금 더 일찍 탑승한 것이다.차우미는 온이샘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다시 시간을 보더니 이어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하늘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청주는 안평보다 더 일찍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이제야 차우미의 마음은 조금 편안해졌다.청주에 있는 며칠 동안은 몇 년인 것처럼 오래 느껴져서 빨리 돌아가고 싶었는데 이제 비행기에 탑승하고 나니 정말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차우미는 고향에 돌아가서 다시는 여기로 오지 않고 평범한 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녀는 몸의 긴장을 풀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고 얼굴에는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갑자기 무슨 물건이 그녀의 몸 위에 떨어져서 놀라며 내려다
“예은이가 안평에 가본 적이 없어서 여름 방학이 되면 안평으로 놀러 갈 생각이야. 그런데 안평은 나도 잘 몰라.”나상준이 나예은과 같이 놀자고 한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이고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차우미는 나예은의 말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어찌 됐든 조금 전에 그녀는 약속하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나상준의 말에 차우미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벌렸다.나상준은 안평 사람이 아닌 청주 사람이고 또 일 때문에 여기저기 다니기에 안평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알고 있다. 그는 청주 이외의 다른 도시에서 오래 있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나예은과 같이 놀려면 어느 도시든 모두 가능한데 왜 하필 안평으로 가려고 하고 또 차우미까지 함께 하자고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사실 차우미는 그들과 놀지 않고 일을 하고 싶었다.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차우미는 워낙 회성에서 일을 끝내고 또 나예은과의 약속을 이행한 다음에는 나상준과 더 이상 엮이는 일이 없을 줄 알았다.그런데 지금은 또 이렇게 같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러 가고 있고 그것도 부족해서 나예은과 같이 놀자고 한다.차우미는 나상준과 왕래를 하지 않는 것이 언제면 가능할지 막막했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찡그렸다.나상준은 그녀의 표정 변화를 똑똑히 지켜보다가 말했다.“지금부터 서두를 거 없으니,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그가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고 여유를 주자, 차우미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나상준은 말을 마치고 차우미를 보고 있던 시선도 거두고는 휴대폰으로 일을 하려는 것 같았다.차우미는 그의 행동을 바라보다가 말했다.“아직 예은이의 여름 방학까지 한 달 정도 남았다고는 하지만 나 이번에 회성에서의 일이 금방 끝났고 또 휴가까지 썼기에 앞으로는 매우 바쁠 거여서 그때는 시간이 안 돼. 정말로 예은이와 같이 안평으로 가게 되면 내가 전문 투어 가이드를 소개해 줄 거니까 예은이와 같이 놀러 다녀.”비록 나상준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차우미는 아예 지금 미
차우미는 라운지 안으로 들어가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나상준이 통화하는 것을 보고 시선을 거두고 원래 앉았던 1인 소파에 앉았다.나상준은 시종일관 차분한 차우미의 표정을 보다가 별다른 생각없이 말했다.“그래, 큰아빠 시간이 될 때 전화할게.”“네, 알겠어요. 큰아빠 전화 기다릴게요.”나예은은 나상준과 차우미와 함께 놀 수만 있다면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기에 나상준의 말을 듣고 엄청나게 기뻐했다.차우미는 나상준이 누구와 통화하는지 몰랐지만 업무상의 일이라고 생각할 뿐 나예은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그러다가 나상준의 입에서 큰아빠라는 세 글자를 듣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고 나상준을 바라봤다.나상준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큰엄마도 같이 있는데 얘기할래?”나예은은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큰엄마와 같이 계세요?”사실 예전에 나예은은 나상준이 아닌 차우미에게만 계속 전화했었다. 그런데 이틀 동안 같이 지낸 보람으로 처음 차우미가 아닌 나상준에게 전화한 것이다.때마침 나상준이 차우미와 함께 있다고 하니 나예은 순식간에 행복과 기쁨이 가득했다.서혜지가 나예은의 옆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예상치 못한 일에 눈썹을 치켜올렸다.‘두 사람이 같이 있다고?’나상준은 휴대폰에서 들려오는 격동의 앳된 목소리를 듣고 차우미의 의아한 눈빛을 보며 말했다.“응, 같이 있어. 전화 바꿔줄게.”“네.”나상준이 휴대폰을 차우미에게 건넸는데, 그녀가 아직 놀라 있을 때 휴대폰이 눈앞에 왔다.차우미는 잠깐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받아서 귀에 가져다 댔다.휴대폰은 나상준의 체온이 담겨 있는 듯 따뜻했다.“예은아.”“큰엄마, 깜짝 놀랐죠. 예은이 이번에는 큰아빠에게 전화했어요. 하하하...”차우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예은은 어찌나 기뻤는지 호탕하게 웃었다.나예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예은도 같이 웃었다.“그래, 큰엄마도 깜짝 놀랐어.”나예은과의 약속한 일을 이미 완성했기 때문에 차우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
차우미는 잠깐 멈칫하더니 휴대폰을 꺼내서 확인했다.휴대폰 화면에 신규 메시지가 뜨자 차우미는 하선주인 줄 알았는데 발신자는 온이샘이었다.그녀는 메시지를 클릭했다.[우미야, 탑승하면 나에게 메시지 보내줄 수 있어?]차우미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응, 알았어.]그러자 온이샘으로부터 또 잽싸게 미소를 짓고 있는 이모티콘이 왔다.차우미는 이모티콘을 보는 순간 조금 전에 대기실에서 온이샘이 휴대폰으로 좌석 업그레이드를 할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여 달력을 한참 동안 확인하다가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라운지 안으로 들어갔다.어떤 일은 애매모호하면 안 되고 정확해야 했기에 안평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시간을 내서 온이샘과 만나 확실하게 얘기할 생각이었다.라운지 휴식 구에서 나상준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줄곧 라운지 밖의 복도를 바라보며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했다.“아주버님, 지금 바빠요?”서혜지의 목소리는 예의를 갖추었지만 조금은 긴장하고 조심스러웠다.나상준이 말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바쁜가 하는 물음에는 답변하지 않고 무슨 일인지부터 물었다. 아마도 상황에 따라서 다를 모양이다.그러자 서혜지가 서둘러 말했다.“다른 건 아니고요. 지금 예은이를 픽업했는데 예은이가 아주버님과 할 얘기가 있대요. 혹시 바쁘신데 폐를 끼치는 거 아닐까 해서 문의드리는 거예요.”나상준이 말했다.“안 바빠요.”서혜지는 예상했던 대답인 듯 즉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예은이 바꿀게요.”“그래요.”나예은은 아주 조용하게 베이비시트에 앉아 있었는데 커다란 두 눈을 굴리면서 서혜지를 바라보며 나상준과 통화시켜 주기를 기다렸다.나예은은 나상준과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서혜지를 만나자마자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서혜지가 자기를 바꿔주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나예은은 기쁜 나머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서혜지 쪽으로 자그마한 손을 내밀어 휴대폰을 받으려고 했다.서혜지는 조급해하는 나예은의 표정에 미소를 지
하선주는 이제 차우미 옆자리에는 온이샘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온이샘은 하선주에게 특히 좋은 인상을 남겨서 온이샘에 대해 매우 만족하고 좋아했다.차우미는 워낙 하선주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하선주가 눈치채자, 그냥 자연스럽게 대답하려고 했다.그런데 하선주가 갑자기 온이샘을 얘기할 줄은 몰랐다.차우미가 웃으며 말했다.“선배가 아니라 상준 씨랑 같이 가.”“나상준?”하선주의 미간이 순식간에 찌푸려졌고 얼굴도 일그러졌다. 마치 눈 깜짝할 사이에 맑은 하늘에 먹장구름이 낀 것 같았다.“나상준은 왜 너와 같이 있어? 둘이 뭘 하는 거야? 그런데 왜 안평으로 오는 거야? 나씨 가문에 무슨 일 있어?”하선주의 불만이 섞인 말투와 함께 질문들이 쏟아졌다.나상준과 온이샘에 대한 하선주의 태도는 하늘과 땅이었다.이런 하선주의 반응을 차우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할아버지와 할머니 뵈러 오는 거야.”“...”표정이 굳어진 하선주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우미의 말 한 마디에 무슨 일인지 알아챘다.분명 나씨 가문의 이혜정이 나상준에게 직접 가서 사과하라고 명령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나씨 가문 이혜정의 일 처리는 오늘날 젊은이들은 비교할 수도 없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선주는 마음이 불쾌했다.차우미는 하선주가 비록 말하지 않지만 듣고 있다는 걸 알고 계속해서 말했다.“엄마, 나씨 가문과 차씨 가문의 관계 때문이라도 상준 씨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오는 건 정상적인 일이야. 그러니 화내지 마.”“내가 왜 화를 내? 그리고 화를 낼 필요도 없어. 그냥 안 보면 되지.”하선주가 불쾌함을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걸 듣고 차우미는 웃었다.“엄마, 이제 다 지난 일이야. 우리 이혼한 지도 벌써 몇 달 지났잖아. 상준 씨도 나도 이제 모두 각자의 삶이 있으니 두 가문은 예전대로 서로 왕래하면서 지내면 돼.”차우미의 아무렇지 않아하는 말을 듣고 있던 하선주는 순간 바늘에 찔린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어렸을 때부터 말도 잘
“짐은 저 주세요.”나상준의 아무런 감정도, 온도도 없는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들렸는데 봄날 같은 분위기가 순식간에 깨졌다.온이샘은 시선을 살짝 돌려 나상준을 보았는데 나상준도 아무런 흔들림 없는 깊은 눈동자 온이샘을 보고 있었다.나상준은 지금 아주 담담하게 온이샘이 반드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차우미의 캐리어는 이제 나상준에게 넘겨줘야 했기에 온이샘은 캐리어를 잡았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가 바로 풀고 나상준에게 넘겼다.차우미가 말했다.“내가 하면 돼.”그녀가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지만 이미 늦었다.차우미가 손을 뻗었을 때 골격이 분명한 손이 이미 캐리어를 잡고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나상준이 차우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가자.”차우미는 허공에 있는 손을 거두며 캐리어를 잡은 나상준의 손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온이샘을 향해 말했다.“선배, 우리 안평에서 봐.”온이샘도 부드러운 미소로 대답했다.“그래, 안평에서 보자.”그리고 차우미는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온이샘은 그 자리에 서서 가냘픈 몸매가 자신의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키 크고 분위기가 차가운 남자도 보이자,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차우미가 다른 남자와 함께 가는 모습을 보니 마치 다른 남자와 함께 그를 멀리 떠나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온이샘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억지로 이성을 회복했다.그는 온평에 가서 차우미를 만나면 마음속의 말을 모두 할 건데 그녀만 좋다면 온이샘은 두려운 것이 없었다.차우미와 나상준은 대기실을 떠나 VIP 라운지로 갔는데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서둘러 비행기를 탈 필요가 없었다.때문에 두 사람은 라운지의 휴식 구에 가서 앉았다.그러자 직원이 차와 디저트를 가져왔고 차우미는 휴대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하더니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나상준을 보며 말했다.“나가서 전화하고 올게.”나상준은 여전히 간단하게 알았다고 했다.차우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
하얀 셔츠, 연한 캐주얼 바지, 뼛속에서부터 뿜어 나오는 좋은 가정 교양과 준수하고 우아한 얼굴은 대기실의 밝은 조명을 받아 더욱더 환하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나상준은 눈동자를 살짝 움직이더니 서두르지 않고 평온한 속도로 걸어갔다.“다 됐어?”모두가 한곳에 모여 발걸음을 멈추자마자 온이샘이 먼저 말했다.차우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응. 선배 이제 캐리어는 나 줘.”온이샘이 뭔지 몰라 흠칫하더니 말했다.“괜찮아. 내가 들게.”“그게 아니라, 선배, 우리 탑승구가 달라.”온이샘 얼굴에 있던 부드러운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탑승구가 다르다고?’그는 머릿속으로 차우미가 나타나던 방향을 생각하더니 그제야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를 깨달았다.사실 온이샘은 비행기 탈 때 보통 퍼스트 클래스가 아닌 이코노미석을 타고 다녔다.가끔 중요하거나 급한 일이 있을 때만 퍼스트 클래스를 선택할 뿐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코노미석이 익숙했기에 오늘도 습관적으로 티켓팅을 할 때 이코노미석을 예약한 것이다.하지만 나상준은 달랐다. 그는 지위와 신분 때문에 매번 퍼스트 클래스를 타야 했는데 따라서 차우미도 그와 함께 다닐 때마다 자연스럽게 퍼스트 클래스를 탔다.그런데 온이샘은 오늘 티켓을 예매할 때 이 부분을 놓친 것이다.온이샘은 잠깐 생각하더니 곧바로 말했다.“잠깐만, 나도 좌석 업그레이드하면 돼.”말을 마치고 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서 좌석 업그레이드를 시도했다.온이샘은 차우미가 이코노미석인 줄 알고 있었는데 만약 차우미가 퍼스트 클래스인 줄 알았다면 진작에 퍼스트 클래스를 샀을 것이다.조금 전에 차우미는 온이샘의 표정을 보고 있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온이샘이 먼저 말을 하는 바람에 차우미는 하려던 말을 하지 못했다.지금 온이샘의 행동을 보며 차우미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온이샘의 선택을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 생각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상준은 차우미 옆
여가현과 통화를 마친 온이샘의 눈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거기에는 굳은 의지도 담겨 있었다.여가현의 말을 듣고 그는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다. 원래 차우미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었는데 지금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나상준이 차우미 옆에 있다고 해도 이제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그 순간 가슴속으로부터 무한한 힘이 솟구쳤는데 온이샘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차우미가 자신을 인정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같은 시각, 공항 로비에서 나상준은 곧장 VIP 게이트로 향했는데 차우미는 처음에 아무 생각 없이 따라 가다가 가는 방향이 VIP 게이트인 것을 보고 무언가 떠올렸다.온이샘이 구매한 항공권은 퍼스트 클래스가 아닌 이코노미석이어서 그녀에게 보낸 사진도 일반 대기실이지 VIP 라운지가 아니었다.차우미는 그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멈추고 옆에 있는 나상준을 불렀다.“상준 씨.”나상준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발 폭이 차우미보다 컸지만, 앞에서 걷지 않고 차우미의 속도를 맞춰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차우미가 발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고 그도 멈추고 대답했다.“응.”차우미가 말했다.“선배는 이코노미석이어서 일반 대기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조금 전에 보내온 사진에서 봤는데 일반 탑승구였어. 상준 씨는 먼저 VIP 라운지에 가 있어. 나는 선배한테 가서 캐리어를 가지고 갈게.”VIP 라운지와 일반 탑승구가 다르기에 나상준은 그녀와 같이 갈 필요가 없었다.“그럴 필요 없어.”“응?”“같이 가자.”말을 마치고 나상준은 먼저 출발했다.차우미는 깜짝 놀랐다가 서둘러 그를 쫓아가며 말했다.“같이 안 가도 돼. 먼저 라운지에 가서 휴식도 하고 일도 해. 나랑 다니며 시간 낭비하지 말고.”나상준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그러자 차우미도 따라서 발걸음을 멈추고 나상준을 바라봤다.나상준은 차우미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도 같이 가면 안 돼?”차우미는 당황하며 말했다.“아니, 그런 건 아닌데. 나는 그냥...”“
온이샘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알았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서흔이에게 전화해.”“그래.”그들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여가현이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강서흔에게 건네자, 강서흔이 곧바로 물었다.“어때? 잘 된 거야?”여가현은 강서흔의 금방이라도 신랑이 되고 싶어 하는 간절한 표정을 보고 물 한 컵을 가져다 마시며 말했다.“뭐가 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강서흔의 흥분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왜 아직이야? 너무 느린 거 아니야? 나였다면 진작에...”말이 끝나기 전에 강서흔은 즉시 멈추고 조심스럽게 여가현을 바라보았다.여가현은 물컵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며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물었다.“진작에 뭐?”여가현의 헛기침 소리에 강서흔은 순간 가슴이 섬뜩했는데 그녀의 웃는 듯 웃지 않는 듯한 표정은 너무 무서웠다.강서흔은 무의식적으로 장난이라는 듯 웃으며 주제를 바꾸려고 했지만 여가현이 꼼짝하지 않고 자기를 바라보는 눈빛에 즉시 생각을 접고 몸을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속삭였다.“나였다면 진작에 덮쳤을 거라고. 나는 네가 동의를 하든 안 하든 무조건 너와 함께할 거야.”여가현은 웃었다.“우미가 나인 줄 알아? 미리 말하는데 우미는 절대 나처럼 양보하고 굽히지 않을 거야. 나상준 씨 어머니도 비록 좋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우미를 괴롭히지는 못했어. 우미와 나상준의 이혼도 나상준 씨 어머니와는 아무 관련이 없이 오로지 우미의 뜻이었어. 우미가 한 번 결정하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거야. 마찬가지로 우미는 한 번 이혼한 사람을 절대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는 거야. 때문에 절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선택할 거야.”강서흔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두 사람이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여가현의 기분은 늘 변덕스러웠다.예를 들어 조금 전에 온이샘과 통화할 때는 태도가 좋더니 지금 강서흔을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사실 여가현의 마음에 여전히 불만이 있었는데 수년간 쌓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