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했던 대로, 고다정이 돌아오니 별장 안의 분위기는 더없이 신나고 가벼워졌다.두 아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기뻐서 날뛰었다.“엄마, 끝내 돌아왔네요.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어요.”“엄마도 보고 싶고 아빠도 보고 싶어요. 아참, 아빠는요? 아빠는 왜 안 보여요?”하준이는 문밖을 내다보며 여준재의 그림자라도 있는지 살폈다.고다정은 짐짓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아빠는 해외에서 아직 일이 채 끝나지 않아서 오지 못했어. 하지만 너희들한테 주라고 선물을 보내왔지.”사실 이 선물들은 그녀와 여준재가 그전에 유럽 여행을 할 때 미리 사 둔 것들이었다. 하윤이는 별생각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선물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하지만 하준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의혹에 찬 눈길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고다정을 바라봤다.“엄마, 아빠가 정말 일이 있어서 외국에 있는 거 맞아요? 무슨 일인데 국내에 있는 회사보다 더 중요해요?”이 말에 고다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개를 숙여 하준의 똘망똘망한 눈동자와 마주치니 저도 몰래 당황스러워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눈길을 피하면 이 영특한 아이가 꼭 낌새를 차릴 거라는 걸 알고 억지로 시선을 고정하며 침착해 보이는 말투로 물음에 대답했다.“당연히 중요하지. 그리고 회사는 할아버지가 계시잖아. 그래서 아빠는 따로 볼일을 보시는 거야... 됐어, 너도 얼른 가서 선물이나 뜯어봐, 네 동생처럼. 이제 젖을 금방 뗀 애가 왜 이렇게 애어른 행세니.”“아빠 엄마가 항상 시름이 안 놓이게 하니까 그렇죠.”하준은 코를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고다정은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울지도 웃지도 못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하준이는 돌아서서 선물을 고르러 갔다.그제서야 틈이 생긴 고다정은 외할머니 곁에 가서 그녀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는지 물었다.“너희들이 집에 없는 동안 우린 다 잘 지냈어. 은미랑 준재 어머니가 자주 보러오기도 했고. 별일 없었으니까 걱정 말거라.”강말숙은 자애
이틀 동안, 고다정은 집에서 두 아이와 외할머니를 모셨다. 이 또한 한편으로는 국내 상황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었다.그러던 중, 임은미가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두 사람은 잠시 담화를 나눈 뒤 고다정은 임은미의 배를 보며 물었다.“아이는...”“없어졌어. 네가 떠난 지 보름 만에 나는 이 아이를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임은미는 덤덤하게 이 일을 꺼냈다. 고다정은 그런 그녀를 보며 마음이 아파졌다.고다정은 임은미의 성격으로 그때 당시 이렇게 평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안타까워했다.“미안해, 이렇게 큰일을 겪을 때 나는 네 곁에 없었네.”“아니야. 너도 중요한 일이 있었잖아. 뭘 사과까지 해. 그리고 너도 채성휘에게 나를 돌바달라고 부탁했잖아.”임은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고다정도 머리를 끄덕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없는 동안 임은미와 채성휘가 어떻게 지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너랑 채 선생님은...”“아무 사이도 아니야.”고다정이 무엇을 묻고 싶은지 눈치챘던 임은미는 급하게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말이다.고다정은 아쉬워하는 척하면서 넘어갔다.“그렇구나. 아쉽네! 나는 두 사람이 잘 됐으면 했는데.”“내가 어떤 남자를 찾던 무조건 성휘 씨는 아니야.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너무 많아. 내 이상형이랑 너무 거리가 멀어. 내가 그에게 시집간다면 그야말로 내 고생길이 열리는 거야.”임은미는 채성휘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 투덜거렸다. 그때 고다정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임은미는 분명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하는 것 같았다.만약 정말 관심이 없다면 이렇게 많은 단점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잘 지내는 것 같으니 마음이 놓이네.”고다정은 빙그레 웃으며 임은미를 바라봤다. 그러자 임은미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되물었다.“어딜 봐서 우리가 잘 지내는 것 같아?”“그런 게 아니라면 어떻게 채 선생님의 단점을 그렇게 많이 알 수 있
김창석과 채성휘는 그 말을 듣자 몹시 걱정하였다.“저도 외국에 아는 사람이 좀 있는데 제가 사람을 시켜서 찾아보라고 할까요?”“아니면 제가 스승님에게 사람을 보내 찾아달라고 할까요?”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고다정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이 일은 결국 여준재와 관련된 일이기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김창석과 채성휘도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라고 했다. 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이어 특효약에 관해 이야기했다.“전에 주신 아이디어에 따라 기술적인 난제를 모두 풀었어요. 이제 곧 제작에 들어갈 겁니다. 마침 고 선생님이 돌아오셨으니 우리 함께 손을 잡으면 빨리 특효약을 출시시킬 수 있을 겁니다.”채성휘는 기대 가득 찬 눈빛으로 고다정을 보며 말했다. 그는 특효약 출시를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의 환자들도 싼 가격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더는 비싼 약값 때문에 치료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다정도 그런 채성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다만 지금 그녀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고다정은 여준재를 대신해 회사를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여진성과도 회사에 가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었다.그래서 결국 고다정은 미안한 표정으로 채성휘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앞으로 조금 더 신경 써줘야 할 것 같네요. 준재 씨가 돌아오지 않았고 YS그룹쪽도 지금 많이 어수선해요. 준재 씨를 도와 회사를 지키고 싶습니다. 실험실 쪽은 두 분이 계셔서 제가 정말 든든해요. 다만 제가 없어서 진도가 느려질 수는 있지만 회사 일을 잘 처리하고 야근을 해가면서라도 진도를 따라잡을게요.”“괜찮아요. YS그룹쪽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입니다. 고 선생님, 먼저 가서 처리하세요.채성휘가 넓은 야량으로 이해하자 고다정은 무척 고마웠다. 오히려 김창석에게서 수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고다정이 이 기간에 별장 쪽 실험실에 갈 수 없다면 그는 아마 사람들에게 손을 쓰라고 알릴 것이
넓은 회의실에는 YS그룹 고위층들로 꽉 찼다. 그들은 여진성이 고다정을 데리고 들어오자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언짢아했다.비록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그들은 마지못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회장님, 작은 사모님. 오셨습니까”여진성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다들 다정이를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소개하지 않을게요. 다정 씨, 저쪽에 앉으세요.”말을 마치자 여진성은 멀지 않은 빈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진성은 고개를 끄덕이고 노트를 들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은 여진성이 곧 어떤 계획을 발표할지 모두 눈치를 챘다.그리고 곧이어 그 추측 또한 진실로 입증되었다.여진성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오늘 회의의 주제를 짚으며 말했다.“오늘 회의는 업무 외에 다른 한 가지 일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오늘부로 고다정 씨가 회사 사업부를 인수하고 사업부의 모든 기획을 책임질 거예요. 혹시 반대의견 있는 분?”이 말이 나오자 모두 갸우뚱하며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은 회장님이 이런 결정을 한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전 사업부 책임자에게 치명적인 단점은 없었으나 업무 태도가 성실하지 않았다. 그리고 회사 기물 유출 문제까지 더해져 여진성은 당연히 중요한 부서를 외부인 손에 넣으려고 하지 않았다.고다정은 여씨 가문의 며느리로서 여진성의 신뢰를 듬뿍 받고 있다.회의는 한 시간 반 정도 열렸다. 고다정이 빼곡히 필기한 노트를 들고 사람들을 따라 회의실을 떠나려고 할 때 여진성이 그녀를 불렀다.“네, 회장님.”고다정은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하며 호칭을 써갔다. 그러자 여진성은 고다정을 더 흐뭇하게 쳐다보면서 만족해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보면 낙하산으로 사업부를 인수하게 되었는데 방금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지만, 불만 있는 사람이 무조건 있을 거예요. 그래서 다정 씨를 귀찮게 할 수도 있죠. 만약 도가 지나치거나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저랑 말하세요.”“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하루빨리 회사에서 자리를 잡
여명호의 말을 듣던 여준재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여명호가 나쁜 마음을 품고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계획이 흐트러져서 여준재의 처지가 위험해질까 봐 한 말이었다. 필경 여준재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보통 재벌 집이 아니라 수백 년의 역사를 빛낸 진정한 명문이었다.하지만 누군가가 고다정의 뒷담화하면 여준재는 마음이 불편했다.“명호야!”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여명호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여준재는 차갑게 여명호를 노려보며 말했다.“다정 씨는 내 와이프야. 네가 그 사람을 평가할 처지는 아니지 않아? 이런 말을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아!”자기 보스가 잘난 체하는 권다정을 이렇게 아끼는 걸 보자 여명호는 기분이 언짢았다. 하지만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알겠습니다. 다시 안 그럴게요.”구남준은 흐뭇해하면서 이 모습을 바라봤다. 여명호가 여준재의 의형제라는 명분으로 고다정에게 무례한 것도 모자라 험담까지 했다. 인제야 여준재에게 혼 혼난 것을 보자 구남준은 속으로 기뻐했다.여명호가 잘못을 인정하자 여준재도 너그럽게 받아주고 더는 따지지 않았다. 그리고 미간을 펴며 말했다.“부윤솔 어르신 쪽은 어떻게 됐어?”이 일의 배후에는 여준재뿐만 아니라 부윤솔도 함께 있었다. 부윤솔은 이런 은둔 가문 사람들이 나라에서 주는 최고급 대우를 받으면서 나라 이익을 해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부씨 가문에서 따라 하려고 하지 않자 그들은 연합해서 부씨 가문을 괴롭혔다!여준재와 부윤솔이 은둔 가문 세력과 싸우고 있을 때 일주일 동안 잠잠해 있던 고다정에게 갑자기 일이 생겼다.이날, 고다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야근했다. 저녁 무렵 낯선 전화가 걸려 왔다. 그녀는 스팸 전화인 줄 알고 받기 싫었다. 하지만 전화가 끊기려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 한 줄기 빛이 스쳐 갔다. 혹시 여준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다정은 수신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 준재 씨?”고다정은 핸드폰을 꼭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
여진성을 적절히 배치한 후 고다정은 직원을 시켜 자기가 프로젝트팀에 두고 온 핸드백을 가져오게 했다.핸드백에는 그녀가 가지고 다니는 약봉지와 은침이 들어있다.잠시 후 핸드백이 그녀의 손에 도착했다.그녀가 침을 놓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혼수상태이던 여진성이 서서히 깨어났다.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그는 방에 가득 모인 사람들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야단쳤다.“다들 여기를 둘러싸고 뭐 해요? 한가해요? 회사 일은 다 해결했어요?”“여 회장님, 이분들도 회장님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니까 야단치지 마세요. 잊으셨나요? 방금 쓰러지셨잖아요.”고다정이 급히 다른 사람들 대신 설명했다.그제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여진성은 미안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여러분 미안해요. 방금은 정신이 흐리멍덩해서.”“괜찮습니다. 회장님이 무사해서 다행입니다.”“회장님이 괜찮으시다면 저희는 일 보러 가겠습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세요. 다시는 과로로 쓰러지시면 안 됩니다. 대표님이 돌아오지 않으셨는데, 회장님이 회사를 지키셔야죠.”“그러게요, 회장님, 휴식에 신경을 쓰세요.”사람들은 여진성이 또 쓰러질까 봐 충고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저도 모르게 조바심 냈다.회사에 이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대표님은 왜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면 할수록 그런 것 같았다.고다정은 이들의 생각을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임원들을 보낸 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휴게실에 남아 여진성을 돌보았다.그녀와 함께 남은 여진성의 비서는 그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몹시 불안해했다.“작은 사모님, 회장님을 병원으로 모시지 않아도 될까요?”“걱정되시면 병원 가서 검사해 보는 것도 좋죠.”고다정은 자기가 검사했을 때 문제가 없었으니 반드시 문제가 없다고 뻐기지 않았다.한의학과 서의학은 어쨌든 서로 다른 두 가지 체계다.그녀의 말을 들은 비서는 잠깐 생각하더니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여진성이 이를 거절했다.“내 몸은 내가 알아. 별문제 없으니까 병원 가지
고다정이 소담에게 유능한 해커를 찾으라고 지시한 후 여진성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여 회장님, 무슨 일이세요?”여진성은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방금 받은 소식인데, 30분 후 이사회를 개최한대요. 준재도 이사회 일원인데 지금 여기 없으니 다정 씨가 준재 대신 회의에 참석해 줬으면 해요.”“그래도 될까요?”고다정은 좀 의아했다.여준재와 약혼은 했지만 아직 결혼은 안 했는데 이사회 같은 회사 핵심 회의에 그녀가 참석한다면 불만을 사지 않을까?물론 여진성도 고다정의 생각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그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왜 안 돼요? 다정 씨가 아직 준재와 결혼하지 않았지만 아버님도 허락한 혼사예요. 두 사람 사이 애정만 문제가 없으면 결혼은 정해진 일이에요.”이토록 긍정적인 말을 들은 고다정은 얼굴에 감동의 빛이 어렸다. 그때 더 감동적인 말이 들려왔다.“그리고 또 한 가지, 준재가 원래 결혼식을 올릴 때 알려주려고 한 건데, 다정 씨가 이 문제에 신경을 쓰니 준재 대신 먼저 말해줄게요. 그때 하준이, 하윤이를 가문에 입적시킬 때 다정 씨 이름도 여씨 가문의 족보에 올렸어요. 즉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을 뿐, 다정 씨는 이미 우리 여씨 가문의 며느리예요.”“그러니까 안심하고 나랑 같이 이사회에 참석해요. 누가 감히 의문을 제기하면 내가 막아줄 거예요.”여진성의 말속에는 구석구석 고다정을 아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이 시각 그녀는 정말 감동했다.여준재가 그렇게 일찍 그녀 이름을 여씨 가문의 족보에 올렸을 줄은 몰랐다.그러나 감동은 감동이고, 그녀는 현실 문제를 무시할 수 없었다.“회장님께서 회사에 돌아오실 건가요? 몸이 견딜 수 있으세요?”고다정은 이사회가 그리 빨리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좀 걱정됐다.그리고 회의에서 일부 이사들이 고약한 말을 할 것이다.준재가 이사회의 일부 늙다리들이 본분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한 적도 있다.여진성은 고다정의 걱정을 알기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말아요
이 말이 나오자, 모든 사람이 논쟁을 멈추고 잇달아 방금 말한 사람을 바라보았다.여진성과 고다정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주시했다.그 사람은 이렇게 많은 사람의 시선, 특히 회장님의 무섭고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제가 이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아? 무슨 이유요?”여진성이 어떤 기분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그 사람은 이를 악물더니 말했다.“이전에 유출된 핵심 자료는 말할 것도 없고, 이번에 유출된 자료 중 몇 가지 수치는 회장님만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자료를 우리 중 누군가가 유출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잇달아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잠시 후 문득 깨달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그들은 정말 그렇다고 느끼고 잇달아 맞장구치기 시작했다.“회장님, 제 생각에는 조 이사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는 범인을 찾지 못했고 어디서 유출됐는지도 몰라 흐지부지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한 단서가 있습니다. 저는 회장님 주변 사람들을 자세히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않고 이런 일이 다시 한번 반복되면 정말 회사의 근간이 흔들릴 것입니다.”“그러게요. 두 번 자료 유출로 입은 손실이 지난해 1년 수익에 맞먹습니다.”“회장님께서 회사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점점 말투가 격해지는 사람들을 보며 여진성은 안색이 어두워졌다.솔직히 그는 자료가 자기 손에서 유출됐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누굴까? 누가 나를 배신했을까?’아무리 분노가 치밀어올라도 현재 상황에서 딴생각할 겨를이 없다.그는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앉아있는 이사들을 한번 빙 둘러보고 나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제가 확실하게 조사해서 여러분께 결론을 내놓겠습니다.”그런데 그가 말하기 바쁘게 반대 의견이 나왔다.“회장님은 이 조사에서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회장님의 측근이 회사 기밀을 유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