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10분도 안 되어 처치를 마치고 곱게 싸매졌다.고다정은 남은 약 가루를 보며 다친 경호원들이 더 있을 거라는 생각에 구남준을 불러 분부했다.“여기 외상 치료용 약 가루가 좀 있는데 다른 부상자한테 가져가서 쓰고 간단히 싸매라고 하세요.”“그럼 제가 걔들 대신해서 작은 사모님께 고맙다고 인사를 드려야겠네요.”구남준은 약봉지를 손에 들고 고마운 눈으로 고다정을 쳐다봤다.고다정은 어설프게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미안해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저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지. 저들이 아니었으면 방금 제가 저기서 도망쳐 나올 수도 없었을 거예요.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하고 제멋대로 굴었어요. 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얼른 약 가져가세요.”이 말에 구남준은 고다정이 자책에 빠졌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녀를 위로할 겨를이 없어 그는 소담한테 눈길을 보내고는 약을 가지고 부상당한 경호원들한테로 걸어갔다.구남준이 보내는 눈빛 신호를 받은 소담은 기분이 저조하여 어깨를 축 떨어뜨린 고다정을 보며 어떤 위로를 건넬까, 고민하다 말을 꺼냈다.“작은 사모님, 자책할 필요 없습니다, 대표님한테 일이 생겨 걱정되어 찾아 나서는 건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그저 그들이 이렇게 나올 줄 예측 못한 것뿐입니다. 상처만 난 것도 너무 다행입니다. 저희가 예전에 임무 수행할 때 죽는 건 아주 자주 보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우리 같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애써 자신을 위로하려는 그녀의 마음을 고다정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고다정은 고개를 저으며 자기는 괜찮다고 대답했다.그때 구남준이 굳은 표정으로 밖에서 들어왔다.“작은 사모님, 당장 여기를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왜요?”고다정은 어리둥절해하며 그를 바라봤다.그녀는 이곳이 당분간 꽤 안전해 보였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그들을 구조할 사람들이 도착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소담과 화영도 의문을 품고 구남준을 쳐다봤다.구남준은 휴대전화를 그녀들
그들이 어디 있는지 가늠은 안 됐지만 다행히 구남준의 휴대전화에는 GPS 기능이 있었다.그가 보낸 위치 좌표에 근거해 여명호는 한 시간 뒤에 사람들을 데리고 달려왔다.와보니 고다정 옆에는 소담과 구남준을 포함해 총 다섯 명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꼴이 모두 하나같이 엉망진창이었다.여명호는 이런 상황에 표정이 굳어졌다.어젯밤에 어떤 격전이 벌어졌을지 안 보고도 눈앞에 훤했다.고다정과 구남준은 그를 보고 끝내 한숨을 돌렸다.특히 고다정은 전에 그와의 불쾌했던 대화를 상기할 새도 없이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에게 조급하게 물었다.“여명호 씨, 사람 몇 명 데리고 왔어요? 사람 좀 보내서 제 호위팀을 찾아볼 수 없나요? 어제 제가 도피할 수 있는 시간을 좀 벌어보겠다고 뒤에서 엄호를 맡다가 다른 쪽으로 놈들을 유인했을 거예요.”“사람은 제가 대신 찾아볼 수 있지만, 조건이 있어요. 지금 당장 귀국하도록 하세요. 여기 남아서 더 민폐 끼치지 말고요.”여명호의 말은 얄짤없고 무례했다.고다정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이때 곁에서 지켜보던 구남준은 고다정이 화났을까 봐 얼른 나서서 대신 해명했다. “작은 사모님, 오해하지 마세요. 여명호 씨가 말은 이렇게 해도 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주요 세력이 국내에 있다 보니 국내에서 사모님을 더 잘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돌아가라 한 거예요. 그럴 뿐만 아니라 국내는 여기보다 상대적으로 규제가 심해서 더 안전합니다. 그들이 뭘 하려고 해도 여기보다 더 신중히 움직여야 할 것이고요.”그의 말에 고다정은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의 제안에 동의한 건 아니었다.그녀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여준재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이곳을 떠난다면 그녀는 불안해서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제 안전 때문에 그러는 걸 알아요. 하지만 난 준재 씨가 걱정돼서 안 되겠어요. 제발 날 여기 있게 하면 안 돼요? 약속드릴게요. 앞으로 모든 것에 당신 말을 따를게요. 문밖에 나가지 말라면 절대 안 나갈게요!”고다정은 남아
돌아가는 것에 동의한 고다정은 구남준한테 잊지 않고 부탁했다.“준재 씨 찾으면 반드시 저한테 즉시 알려줘요. 될 수 있으면 준재 씨가 저한테 직접 연락을 줬으면 좋겠어요.”“안심하세요, 작은 사모님. 대표님한테 소식 있으면 첫 번째로 알려드리겠습니다.”구남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했다.그리하여 30분 뒤, 고다정은 귀국하는 헬기에 올랐다.하늘 위로 점점 날아올라 작은 점 하나로 변해버린 그 헬기를 바라보며 구남준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여명호는 그런 모습을 깨고소하게 보다가 불쾌해하는 얼굴로 콧방귀를 꼈다.“내가 진작 얘기했잖아요. 저 여자 데려오지 말라고. 골칫덩어리야, 아주.”“이 여자, 저 여자가 뭡니까? 호칭 똑바로 해요, 저분은 작은 사모님이에요. 당신, 요 며칠 새에 작은 사모님한테 너무 무례했어요!”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구남준은 여명호한테 못마땅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고다정을 위해 몇 마디 변호했다.“그리고 작은 사모님이 대표님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인데, 자꾸 이런 태도로 작은 사모님을 대하면 당신이 대표님과 아무리 형, 아우 하는 사이래도 대표님이 가만 놔두지 않을 거예요.”“흥, 보스는 이깟 일로 날 뭐라 하지 않아.”여명호는 그의 말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하지만 그는 나중에 이 일로 여준재에 의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여명호를 더는 설득할 생각이 없어 구남준은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심각한 표정으로 어젯밤에 있었던 일에 관해 얘기를 꺼냈다.“어제 우리가 여기 도착해서 만난 사람이라고는 비올라 씨와 당신밖에 없는데, 그동안 소식이 새 나간 거면 우리 중에 첩자가 있는 게 분명해요.”그는 말끝으로 가며 점점 차가운 눈빛으로 변했다. 말하는 포스에 위엄이 실려있었다.이때 여명호의 얼굴에도 살기가 흘러넘쳤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잇새로 말을 뱉었다.“전에 한번 대청소를 했는데 아직 덜 걸러진 모양이에요. 내가 돌아
계속하여 앞으로 뛰어가는 집사를 보며 고다정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황에 바짝 긴장했던 정신 줄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 같았다.좀 시간이 지난 후, 그녀가 씻고 욕실에서 나오는데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작은 사모님, 몸에 상처를 좀 봐 드리려고 제가 의사 선생님을 모셔 왔습니다.”“들어오세요.”고다정은 머리를 말리던 타월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그러자마자 집사가 의사를 데리고 방에 들어왔다. 뜻밖에도 의사는 그녀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진 선생님, 선생님이 어떻게 오셨어요?”“제가 방금 병원에서 듣기로 제란원에 진찰이 필요하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자진해 왔어요. 준재는요?”진현준은 말하는 동안 방안을 둘러보며 여준재를 찾았다.그의 모습을 보니 여준재한테 일이 생긴 것을 모르고 있는 눈치라, 고다정은 아무렇게나 둘러댔다.“준재 씨는 아직 해외에 있어요.”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진현준은 다짜고짜 캐물었다.“고 선생님, 준재가 해외에서 일 생긴 거 아니죠?”“......”고다정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그녀가 보인 반응에 대충 감 잡은 진현준은 잠시 고민하다 온화하게 입을 열었다.“말하기 불편하면 하지 않아도 돼요. 좀 이상해서 물어본 거예요. YS그룹에 이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준재가 얼굴을 전혀 비추지 않는 게.”“아... 그렇군요. 고마워요, 진 선생님. 그런데 준재 씨 지금 상황은 제가 좀 말씀드리기 곤란해요. 이해해 주세요.”고다정은 눈빛으로 고마움을 표했다.그러자 진현준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화제를 돌렸다.“아까 집사님한테서 들었는데, 고 선생님이 다쳐서 피를 많이 흘렸다면서요. 그런데 왜 지금 봐서는 괜찮은 거 같은데요?”“저는 괜찮고, 다른 사람의 피에요. 제가 피가 잔뜩 묻은 모습으로 나타나서 집사님이 오해하신 것 같아요. 너무 놀라 저한테 물을 새도 없이 급하게 병원에 호출했나 봐요.”이 이야기가 나오자 고다정은 또다시 실소를 금치 못했다.그러고 나서
해외에는 구남준도 있지만, 다른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과연 열성을 다해 여준재를 찾아줄 건지에 대해 심해영은 의문을 품었다.근심이 내리지 않는 그녀의 안색을 보고 여진성은 아내가 걱정하는 것이 뭔지 알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들이 준재를 따르는 이상 우리는 그들을 믿어줘야 해요. 당신, 준재 안목을 못 믿는 거예요?”“누가 준재를 못 믿는대요?!”심해영은 무의식적으로 반박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이내 남편의 뜻을 이해하고 뭐라 말하려고 했다가 그저 입을 다물기로 했다.아들을 믿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함께 고스란히 흘려보낸 세월만큼이나 남편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 두터웠기 때문이다.고다정은 심해영이 더 말을 안 하자 조금 전의 화제가 일단락되었단 걸 알고, 그제야 회사가 부딪힌 문제에 관해 얘기를 꺼냈다.“제가 돌아올 때 남준 씨가 그룹에 문제가 생겼다고 저한테 돌아와서 회사를 안정시키는 데 힘 써보지 않겠냐고 하던데, 혹시 어떤 상황인지 아버님께서 말씀 좀 해주실 수 있나요?”여진성은 흔쾌히 고다정이 알고 싶어하는 회사 사정에 대해 대략 설명했다.그는 여기 오기 전에 이미 구남준한테서 연락을 받았다. 고다정이 너무 쓸데없는 잡생각이 들지 않도록 회사에서 일을 좀 맡아 하게 해달라고 구남준이 요청했다. 고다정의 체내에 있는 독소도 아직 제거를 못했는데 여준재의 부재에 대해 심려가 너무 깊으면 발작을 또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말이다.그 사실을 고다정은 모르고 있었다.그녀는 여진성의 설명을 듣고 눈동자가 충격으로 흔들렸다.YS그룹의 핵심 자료들과 대외비로 관리되고 있는 프로젝트 관련 문서들이 한꺼번에 유출이 됐다니. 그 손실을 따지면 천문학적 수준이었다.고다정의 마음을 알아채고 여진성은 도리어 그녀를 위로했다.“매우 심각한 상황이긴 하였지만 그동안에 거의 처리되어 안정을 찾은 셈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처리가 돼요? 진짜 그 사람들한테 6조 원을 줬단 말씀이신가요?”고다정은 흠칫 놀랐다가 의문스레 여진성을
예상했던 대로, 고다정이 돌아오니 별장 안의 분위기는 더없이 신나고 가벼워졌다.두 아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기뻐서 날뛰었다.“엄마, 끝내 돌아왔네요. 그동안 너무 보고 싶었어요.”“엄마도 보고 싶고 아빠도 보고 싶어요. 아참, 아빠는요? 아빠는 왜 안 보여요?”하준이는 문밖을 내다보며 여준재의 그림자라도 있는지 살폈다.고다정은 짐짓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아빠는 해외에서 아직 일이 채 끝나지 않아서 오지 못했어. 하지만 너희들한테 주라고 선물을 보내왔지.”사실 이 선물들은 그녀와 여준재가 그전에 유럽 여행을 할 때 미리 사 둔 것들이었다. 하윤이는 별생각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선물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하지만 하준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의혹에 찬 눈길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고다정을 바라봤다.“엄마, 아빠가 정말 일이 있어서 외국에 있는 거 맞아요? 무슨 일인데 국내에 있는 회사보다 더 중요해요?”이 말에 고다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개를 숙여 하준의 똘망똘망한 눈동자와 마주치니 저도 몰래 당황스러워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눈길을 피하면 이 영특한 아이가 꼭 낌새를 차릴 거라는 걸 알고 억지로 시선을 고정하며 침착해 보이는 말투로 물음에 대답했다.“당연히 중요하지. 그리고 회사는 할아버지가 계시잖아. 그래서 아빠는 따로 볼일을 보시는 거야... 됐어, 너도 얼른 가서 선물이나 뜯어봐, 네 동생처럼. 이제 젖을 금방 뗀 애가 왜 이렇게 애어른 행세니.”“아빠 엄마가 항상 시름이 안 놓이게 하니까 그렇죠.”하준은 코를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고다정은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울지도 웃지도 못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하준이는 돌아서서 선물을 고르러 갔다.그제서야 틈이 생긴 고다정은 외할머니 곁에 가서 그녀가 없는 동안 별일 없었는지 물었다.“너희들이 집에 없는 동안 우린 다 잘 지냈어. 은미랑 준재 어머니가 자주 보러오기도 했고. 별일 없었으니까 걱정 말거라.”강말숙은 자애
이틀 동안, 고다정은 집에서 두 아이와 외할머니를 모셨다. 이 또한 한편으로는 국내 상황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었다.그러던 중, 임은미가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두 사람은 잠시 담화를 나눈 뒤 고다정은 임은미의 배를 보며 물었다.“아이는...”“없어졌어. 네가 떠난 지 보름 만에 나는 이 아이를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임은미는 덤덤하게 이 일을 꺼냈다. 고다정은 그런 그녀를 보며 마음이 아파졌다.고다정은 임은미의 성격으로 그때 당시 이렇게 평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안타까워했다.“미안해, 이렇게 큰일을 겪을 때 나는 네 곁에 없었네.”“아니야. 너도 중요한 일이 있었잖아. 뭘 사과까지 해. 그리고 너도 채성휘에게 나를 돌바달라고 부탁했잖아.”임은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고다정도 머리를 끄덕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없는 동안 임은미와 채성휘가 어떻게 지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너랑 채 선생님은...”“아무 사이도 아니야.”고다정이 무엇을 묻고 싶은지 눈치챘던 임은미는 급하게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말이다.고다정은 아쉬워하는 척하면서 넘어갔다.“그렇구나. 아쉽네! 나는 두 사람이 잘 됐으면 했는데.”“내가 어떤 남자를 찾던 무조건 성휘 씨는 아니야.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너무 많아. 내 이상형이랑 너무 거리가 멀어. 내가 그에게 시집간다면 그야말로 내 고생길이 열리는 거야.”임은미는 채성휘가 마음에 안 드는지 계속 투덜거렸다. 그때 고다정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임은미는 분명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하는 것 같았다.만약 정말 관심이 없다면 이렇게 많은 단점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잘 지내는 것 같으니 마음이 놓이네.”고다정은 빙그레 웃으며 임은미를 바라봤다. 그러자 임은미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되물었다.“어딜 봐서 우리가 잘 지내는 것 같아?”“그런 게 아니라면 어떻게 채 선생님의 단점을 그렇게 많이 알 수 있
김창석과 채성휘는 그 말을 듣자 몹시 걱정하였다.“저도 외국에 아는 사람이 좀 있는데 제가 사람을 시켜서 찾아보라고 할까요?”“아니면 제가 스승님에게 사람을 보내 찾아달라고 할까요?”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고다정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이 일은 결국 여준재와 관련된 일이기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김창석과 채성휘도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라고 했다. 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이어 특효약에 관해 이야기했다.“전에 주신 아이디어에 따라 기술적인 난제를 모두 풀었어요. 이제 곧 제작에 들어갈 겁니다. 마침 고 선생님이 돌아오셨으니 우리 함께 손을 잡으면 빨리 특효약을 출시시킬 수 있을 겁니다.”채성휘는 기대 가득 찬 눈빛으로 고다정을 보며 말했다. 그는 특효약 출시를 엄청나게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의 환자들도 싼 가격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더는 비싼 약값 때문에 치료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다정도 그런 채성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다만 지금 그녀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고다정은 여준재를 대신해 회사를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여진성과도 회사에 가서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었다.그래서 결국 고다정은 미안한 표정으로 채성휘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앞으로 조금 더 신경 써줘야 할 것 같네요. 준재 씨가 돌아오지 않았고 YS그룹쪽도 지금 많이 어수선해요. 준재 씨를 도와 회사를 지키고 싶습니다. 실험실 쪽은 두 분이 계셔서 제가 정말 든든해요. 다만 제가 없어서 진도가 느려질 수는 있지만 회사 일을 잘 처리하고 야근을 해가면서라도 진도를 따라잡을게요.”“괜찮아요. YS그룹쪽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입니다. 고 선생님, 먼저 가서 처리하세요.채성휘가 넓은 야량으로 이해하자 고다정은 무척 고마웠다. 오히려 김창석에게서 수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고다정이 이 기간에 별장 쪽 실험실에 갈 수 없다면 그는 아마 사람들에게 손을 쓰라고 알릴 것이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