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정은 두려움에 떨며 조건을 제시해 자신을 풀어달라고 협상하고 싶었다.하지만 입이 막혀있는지라 웅웅거리는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두 남성은 그 소리를 듣더니 거칠게 중얼거렸다.“이 년도 깡다구가 대단하네, 의뢰인 요구만 없었으면 당장 해버리고 싶어 죽겠어.”“함부로 하지 마, 의뢰인도 다 생각이 있겠지. 괜히 계획을 망가뜨려서 나까지 돈을 잃게 하지 마.”다른 남성이 경고했다.첫 남자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답했다.“걱정하지 마, 나도 선은 지키는 사람이니까. 정 안되면 일이 끝나고 떨어진 콩고물이나 다시 먹으러 와야지 뭐.”그러면서 손을 들어 고다정의 뺨을 톡톡 건드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앙큼한 년, 지금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힘 좀 아껴두라고, 그래야 조금 있다 마음껏 소리 지르지!”고다정은 얼굴에 느껴지는 불쾌한 감촉이 상당히 역겨웠고 마음속은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그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 남자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낼 수 있었다...한 편, 여준재는 이미 클럽을 떠나 제란원으로 돌아왔지만 집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그는 고다정과 아이들이 쉬러 간 줄 알고 별다른 생각 없이 방으로 올라갔다.하지만 고다정의 방을 지나칠 때 방문이 열려있음을 발견했고 뭐에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여준재는 역시 고다정이 아이들 쪽에 간 것으로 생각했다.하지만 아이들 방에는 두 녀석이 바닥에서 레고를 놀고 있었을 뿐 고다정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두 녀석은 여준재가 돌아온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물었다.“삼촌, 왜 오셨어요?”“아닌데, 삼촌 술에 취하셨다면서요?”하윤이가 무언가 잘못됐음을 발견하고 작은 얼굴을 찡그렸다.여준재는 그 말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누가 말해준 거야?내가 취했다고. 그리고 엄마는 어디 있어?”준재의 질문에 하준이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직원이라는 사람이 엄마에게 전화했어요. 삼촌이 술에 취했다고 엄마보고 데리러 오라고 했어요.”“언제 있은 일인데?”여준재의 낯
“이런 쌍년이 감히 날 찬 거야? 그래 지금 바로 덮쳐줄게!”남자는 깊은 수치심을 느끼고는 다시 고다정을 덮치며 손을 뻗어 다정의 옷을 찢으려 했다.고다정은 두려움이 고조에 달하며 눈가에는 눈물이 차올랐다.묶여있는 와중에도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며 발길질을 하고 팔을 휘둘렀다.이 때문에 이 남자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했다.옆에 있던 세 남자는 상황을 보더니 크게 박장대소하며 놀렸다.“약해 빠져서는, 안 되면 비켜, 우리가 할게.”그 말에 머리끝까지 분노와 수치심을 느낀 남자는 고다정이 자신의 친구들 앞에서 체면을 다 깎아버렸다고 생각했다.“당연히 처리할 수 있지!”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소리를 지르더니 고다정의 묶인 손을 꽉 잡고 있는 힘껏 당겨 고다정을 침대에서 번쩍 들었다.이 동작으로 고다정의 손목에 묶인 끈이 살짝 헐렁해짐을 느꼈다.고다정은 남자를 제지할 수가 없어 그가 코앞까지 자신을 번쩍 드는 것을 바라만 봤다. 마음속으로는 역겨움과 절망이 요동치고 있었다.남자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탓인지 그의 몸에서 풍기는 알코올과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순간 그녀는 참지 못해 헛구역질해댔고 운 좋게도 이로 인해 입에 물려있던 천이 입 밖으로 뱉어졌다.그녀는 뱃속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을 상관할 틈도 없이 바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허, 밖에 널 구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고다정을 잡은 남자가 차갑게 웃으며 손을 뻗어 다정의 턱을 움켜쥐더니 음흉하게 웃었다.“오늘 밤 아무도 널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 고분고분 말을 들으면 오빠들이 부드럽게 해줄게. 아니면 널 죽을 때까지 망가뜨릴 수도 있어.”그 말에 고다정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그녀는 살기등등하게 눈앞의 남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꿈도 꾸지 마!”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숙여 있는 힘껏 남자의 배를 들이밀었고 휘청거리는 틈을 타 다시 힘껏 발길질했다.다정은 운이 좋았는지 바로 가장 중요한 급소를 걷어찼고 바로 남자의 고통스러운 비명
거친 말을 내뱉으며 남자는 또다시 고다정에게 발길질을 해댔다.고다정은 반항할 방법조차 없어 머리를 감싸 쥔 채 몸을 웅크리고 몸에 가해지는 압력을 최소화해야 했다.한순간 아픔을 못 이겨 혼절할 뻔했지만, 자신이 이대로 정신을 잃다간 이 남자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알 수 없었다.그녀는 최선을 다해 눈을 부릅뜨고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바로 그때, 다른 두 명의 남자가 고다정이 땅에 엎드린 채 미동도 없는 것을 보더니 후환이 두려운 듯 말했다.“그만해, 이러다 죽겠어. 난 시체를 강간하고 싶진 않거든.”말하며 두 사람이 남자를 제지했다.남자도 힘이 들었는지 구타를 멈추고는 말리던 친구들의 손을 제치고 침대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말했다.“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해 봐. 죽지 않았으면 다시 침대에 던져 놔, 계속 놀아줘야지.”“인제야 생사를 걱정하는 거야? 알면서도 그렇게 무서운 기세로 때린 거야?”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 명이 다가가 고다정의 상황을 살펴보려 했다.고다정은 혼절한 것이 아니라 바닥에 누운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구타당한 곳들이 너무 아파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내려 했다.방문은 절대 열 수가 없었고 남은 것은 창문밖에 없었지만, 이곳이 몇 층인지 알 길이 없었다.하지만 몇 층이 됐든 죽더라도 이 사람들에게 몸이 더럽혀질 수는 없었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시 가까이 다가오자 순식간에 눈빛이 어두워지며 독기를 뿜어댔다.“어이, 죽은 거야? 말 좀 해 봐.”다가오던 남자는 발로 살짝 고다정을 건드렸다.고다정은 숨을 참고 움직이지 않았다.남자는 상황을 보더니 눈썹을 찌푸리고 몸을 숙여 고다정을 뒤집어 눕힐 생각이었다.그가 손을 뻗자마자 이변이 발생했다.고다정이 순식간에 남자를 공격한 것이다.그녀는 남은 힘을 쥐어짜내 남자를 쓰러트린 후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창문을 향해 뛰어갔다.이와 동시에 여준재도 고다정의 행적을 찾아냈다.그는 굳은 얼굴로 C
큰 형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다정을 침대로 안아 옮기려 했다.바로 그때 큰 형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옮기지 마, 침대에 피 묻히지 말고 그대로 바닥에서 갖고 놀아. 강간하는 기분이라도 들 수 있잖아.”말미에 큰 형은 변태같이 낄낄 웃어대고는 바로 이어 남자에게 분부했다.“저 여자 옷부터 벗겨.”“역시 형이 놀 줄 알아.”남자는 명을 받들고는 손을 뻗어 고다정의 옷을 잡으려 했다.바로 그때, 굉음이 울리더니 밖에서 누군가의 발길질에 굳게 닫힌 방문이 뜯어지더니 아슬아슬하게 문짝에 걸려있었다.방문 앞에는 여준재와 구남준이 서 있었다.그들은 방 안의 광경을 쳐다보더니 단숨에 낯빛이 어두워졌다.특히 고다정이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있고 옆에는 피가 낭자한 것을 본 여준재는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더니 온몸으로 살기를 뿜어내고 있어 보는 사람을 두렵게 했다.“죽어 이 새끼들아!”여준재는 이를 꽉 깨물고 주먹을 말아쥔 채 방으로 뛰어 들어와 고다정의 옆에 서 있던 남자를 단번에 차버렸다.남자는 발길질에 온몸이 붕 뜨더니 그대로 벽에 부딪혔고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이어 바닥에서 두어 번 버덩이더니 온몸으로 전해지는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혼절했다.그제야 큰 형과 나머지 사람들 모두 정신을 차리고 여준재에게 물었다.“어디서 온 사람들이야?”여준재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바닥에 쪼그린 채 떨리는 두 손으로 고다정을 품에 안았다.“고다정...”“...”고다정은 여준재의 품에서 미동도 없었다.여준재는 굳은 얼굴로 다정을 벌떡 안아 든 채 몸을 돌려 남준에게 명했다.“차 대기시켜, 병원으로 갈 거야. 신수 어르신도 병원으로 와달라고 부탁해줘.”“알겠습니다.”남준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돌렸다.빠르게 모든 것을 전달한 후 여준재를 향해 보고했다.“대표님, 차는 이미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신수 어르신도 오고 계신답니다.”여준재는 그 말에 고다정을 안아 들고 밖으로 나가버렸다.방 안의
그 말에 긴장하고 있던 여준재가 드디어 마음을 놓았다.신수 노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다정의 몸에 난 상처가 심각한 건 사실이야. 머리에는 가벼운 뇌진탕을 입었고 외상도 있어. 외상이 깊지 않아 다행이지만. 요 며칠 상처에 물이 닿지 않게 조심해 줘, 상처를 만지지도 말고. 몸에 난 상처는 대부분이 멍인데 허벅지가 제일 심각해, 가벼운 골절이 있어.”말을 마치자 여준재는 가슴이 아픈 듯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알겠습니다. 오늘 밤 신세 많이 졌어요.”준재는 목소리가 갈라진 채 감사 인사를 전했다.신수 노인은 고개를 젓더니 괜찮다는 뜻을 전하며 여준재에게 입원 수속을 진행하라고 귀띔했다.반 시간 정도 지났을까, 고다정이 병실에 입원했다.여준재는 그녀의 곁에서 다정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신수 노인은 그 모습을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희 두 사람 무슨 일이야, 먼저 너한테 일이 생기더니 이젠 다정이한테 화가 옮겨갔어. 무슨 저주라도 받은 거야?”“제가 소홀한 탓이에요.”여준재가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그렇게 조심한다고 했는데 누군가 그의 신분을 도용해 고다정을 불러낼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신수 노인은 가만히 듣더니 이 사건이 여준재를 향한 개인적인 원한과 관련 있음을 알고는 더 이상의 말은 아꼈다.같은 시각, 구남준이 잡고 있던 남자들은 경찰서로 소환됐다.그들도 청렴한 비즈니스맨들이었기에 별다른 형은 받지 않았다.뒤늦게 남준이 심문 결과를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병실에 도착한 후 깨어나지 못하는 고다정을 바라보며 걱정했다.“고 선생님은 괜찮으신가요?”“큰 문제는 없대.”여준재가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사건은 어떻게 처리했어?”남준은 조사한 상황을 자세하게 전달했다.“그 사람들을 경찰서로 데리고 갔습니다. 경찰의 심문에 의하면 클럽 직원이 룸으로 데려갔고 다들 특이한 패티쉬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말을 꺼내면서도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조심스럽게 여준
고다정은 확 몸을 일으켰다가 순식간에 강한 어지럼증이 몰려왔다.황급히 옆에 놓인 테이블을 잡고 나서야 겨우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그때 여준재가 밖에서 아침을 들고 오다 고다정이 어두운 안색으로 침대맡에 앉아있는 것을 보더니 다급히 다가와 부축했다.“언제 일어났어요?”“저...”갑자기 나타난 여준재에 고다정은 일시에 무엇이라 대답하면 좋을지 몰랐다.자신이 범해졌는지 확인하려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고다정의 걱정스러운 눈동자를 보아냈는지 여준재는 그녀를 침대맡에 기대게 한 후 천천히 설명해줬다.“걱정 마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어젯밤 다행히 제때 구하러 갔거든요.”그 말에 고다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 해도 어젯밤 발생한 사건을 생각하기만 해도 두려움이 밀려왔다.여준재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그 뒤에 무슨 일이 발생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특히 어젯밤 도움을 청할 곳도 없이 죽고 싶어도 용기가 없었던 자신을 생각하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여준재는 눈앞의 여인이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소리 없이 흐느끼는 모습에 가슴이 쥐어뜯긴 듯 아려왔다.그는 손을 뻗어 다정을 품에 안은 채 속삭였다.“괜찮아요, 무서워하지 마요.”동시에 부드럽게 다정의 등을 토닥였다.고다정은 그의 옷을 꼭 잡은 채 여준재 특유의 향기를 맡으며 억지로 참고 있던 감정이 한순간에 터져버렸다.“다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 때문이야, 당신이 아니었으면 어제 속아서 나갈 일도 없었다고요!”“어젯밤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알아요?”“아무리 도망치려고 애써도 문은 열리지도 않고, 차라리 뛰어내려 죽을 생각까지 했어요!”다정의 투정에 여준재는 그녀를 꽉 품에 안은 채 숨을 쉬는 것조차 가슴이 아려왔다.특히 고다정의 마지막 한마디에 두려움이 몰려왔다.“안돼요! 자살 같은 소리는 하지 말아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다정 씨 목숨만 생각해요, 남은 일은 나에게 맡겨주고요. 다정 씨 복수는 제가 해줄게요.”“하지만, 그 사람들한테 더럽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준재가 그만하라는 손짓과 함께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눈짓했다.남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나갔고 여준재는 그제야 서서히 다정의 손을 놓아줬다.하지만 이 행동으로 인해 이미 깊게 잠들었던 고다정이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눈앞의 여인이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여준재는 마음이 쓰여 다급하게 위로했다.“얼른 자요, 어디도 안 가요.”고다정은 아직 잠에서 덜 깼는지 그 말에 비몽사몽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을 감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남준은 문밖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며 돌아가야 할지 남아서 계속 보고해야 할지 고민했다. 더군다나 그가 말하려는 일은 꽤 긴박한 사건이었다.여준재 역시 문밖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구남준을 발견했다. 늘 눈치 빠르게 행동하던 남준이었기에 기다리고 있다는 건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을 것임을 알아챈 여준재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대표님?”“작게 얘기해.”여준재는 주의를 주더니 화제를 돌려 물었다. “무슨 일인데?”남준은 다급히 소리를 낮춘 채 답했다.“어젯밤 경찰서에 데려간 사람들, 오늘 소송하겠다고 변호사를 선임했더라고요. 거기에다 본인들도 사기당했다고, 고 선생님이...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고요.”아가씨라는 말은 감히 내뱉지 못한 채 말끝을 흐렸다. 그런 사람이라는 말에도 여준재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여준재는 남준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채 목소리를 낮추고 계속 물었다.“그리고?”“그리고, 다정 씨를 고의상해죄로 고소하겠다고 합니다.”남준은 말을 꺼내며 마음속으로는 다정에게 감탄했다. 혼자서도 살길을 찾아 나선 데다 세 명의 취객에게 중상을 입혀놨으니 말이다.여준재는 그 말을 듣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고소하고 싶으면 우리도 맞고소하면 돼. 마침 제대로 대가를 치르게 해줘야지!”그 말에 남준이 몸을 움찔하더니 마음속으로 여준재의 무서움을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측은하게 느껴졌다.가만히 판결이나 기다릴 것이지 굳이 대표님의
이런 생각에 심해영은 웃으며 하준이를 바라봤다.“할머니가 왜 너희들을 속이겠어. 진짜로 엄마랑 삼촌 부탁으로 너희들을 데리러 온 거야. 못 믿겠으면 엄마한테 전화해 봐.”심해영은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 눈썰미 빠른 녀석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역시 여씨 집안 아이라 그런지 제 아비 어릴 때와 똑같이 똘똘해 보였다.하준이는 심해영의 진지한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진짜로 너무 깊게 생각한 것일까? 그래도 엄마에게 진실을 물어보고 싶었다.“그럼 제가 전화해볼게요.”말하며 책가방에서 스마트 워치를 꺼냈다.전화는 빠르게 연결됐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엄마가 아닌 준재 삼촌의 목소리였다.“삼촌, 왜 삼촌이 받아요, 우리 엄마는요?”“엄마는 쉬고 계셔. 무슨 일이야?”여준재가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물었다. 머리를 다쳐서인지 점심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다정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하준이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어제 엄마랑 삼촌 모두 돌아오지 않아서요. 평소 같으면 엄마가 어딜 갈 때마다 저희에게 알려줬었는데 이번에는 아무 말도 없어서 걱정돼서요. 물어보려고 전화했어요.”하준이는 말을 끝내고는 잠시 멈췄다.여준재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하준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삼촌, 우리 속이지 말아요. 진짜로 엄마랑 같이 있는 거예요?”“당연하지. 엄마랑 같이 있어. 못 믿겠으면 엄마를 깨워줄게.”말하며 여준재는 진짜로 고다정을 깨웠다.다정은 비몽사몽 한 채로 뭐라 대답하고는 다시 잠에 빠졌다.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하준이는 들었는지 마음의 짐을 그제야 내려놓으며 말했다.“알겠어요, 삼촌. 깨우지 말아요, 우리 엄마 푹 쉬게 놔두세요.”여준재는 알겠다고 답하고는 몇 마디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엄마랑 삼촌이 며칠 뒤에나 들어갈 것 같으니까. 그동안 할머니 말 잘 듣고 있어야 해. 알겠지?”“알겠어요.”하준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심해영은 빙그레 웃으며 하준이를 바라봤다.“어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