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교 누나가 나를 당장 쫓아버리지 않고 오히려 남아서 아침을 먹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누나가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내가 다급히 식탁 앞에 앉아 애교 누나는 얼굴을 붉히며 나를 봤다.“먼저 가서 세수부터 해요.”“그래요. 바로 하고 올게요.”나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얼른 화장실로 달려가 세수했다.애교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랐다.애교도 이러는 게 맞는지 모른다. 그저 수호가 어제 저를 구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으니, 생명의 은인을 밥도 안 먹여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이건 그저 어제의 빚을 갚는 것뿐이야.’그 외의 것은 애교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나는 이내 세수를 다 하고 돌아왔다.애교 누나는 내 앞에 수저와 그릇을 놔주고, 나에게 반찬을 짚어 주었다.나는 애교 누나가 나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고 생각했지만 애교 누나는 또다시 벽을 쳤다.“난 수호 씨 형수 친구예요. 앞으로 나한테 그런 생각은 하지 마요. 알았죠?”나는 또다시 실망했다.나한테 생각을 바꾼 게 아니었다니.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밥을 먹었다.그러자 애교 누나가 젓가락으로 내 밥그릇을 두드렸다.“말하고 있잖아요. 듣고 있어요?”나는 어디서 나온 배짱인지 화가 난 듯 툭 내뱉었다.“못 들었어요. 듣고 싶지도 않고.”“왜 그래요? 스무 살도 훌쩍 넘은 사내가 어쩜 어린애처럼 굴어요?”“저는 누나가 내 여자가 됐으면 좋겠으니까요.”내가 대담하게 말하자 애교 누나는 이번에 화내는 대쉬 차근차근 설명했다.“수호 씨, 수호 씨는 아직 어려서 사랑이 뭔지 몰라요. 결혼은 훨씬 더 이후의 일일 거고. 아직 여자 만난 적 없어서 여자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뿐이에요.”“누가 그래요? 제가 여자를 만나본 적 없는 건 맞지만 남자가 돼서 여자한테 책임져야 한다는 건 알아요. 누나 남편은 반년 동안 집에 돌아오지도 않았잖아요. 그러면 문제 있는 거예요. 저는 누나가 바보처럼 기다리는 게 싫어요.”
“애교 누나, 너무 속상해하지 마요. 사실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어요.”나는 애교 누나의 보수적인 생각을 바꾸려고 계속 설득했다.애교 누나가 스스로 생각을 바꿔야 나한테가 기회가 주어지니까.지금의 애교 누나는 너무 보수적이라 공략하기 어렵다.“혼자 있는 게 뭐가 좋아요? 외롭고 고독하고, 뭐든 혼자 해야 하고 대화할 사람도 없다고요. 게다가 분명 결혼했는데 이러는 건 과부와 뭐가 달라요?”나는 애교 누나가 지금의 생활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이러면 나야 좋지.’애교 누나가 생활에 불만을 가질수록 나한테 기회가 많아지니까.나는 슬그머니 애교 누나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애교 누나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뭔지, 손을 빼지는 않았다.그러자 나는 더 대담하게 누나의 손을 꽉 잡으며 흥분해서 말했다.“그럼 제가 앞으로 누나 곁에 있을게요. 그러면 외롭지 않잖아요”“같이 있으면 있는 거지, 왜 손을 잡고 그래요? 이거 놔요.”애교 누나는 당황한 듯 얼른 내 손을 쳐냈다.물론 한순간이지만 그래도 애교 누나의 손을 잡았다는 것에 나는 기분이 좋았다.게다가 애교 누나가 예전처럼 나를 싫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으니.나는 이내 젓가락을 휘저으며 그릇 하나를 비웠다.“더 줄까요? 더 담아줄게요.”“네. 이렇게 작은 그릇에 열 번도 더 먹을 수 있어요.”“잘 먹네요. 젊어서 그런가? 좋네요.”나는 형수가 늘 하던 식으로 일부러 장난쳤다.“어디 젊기만 해요? 튼실하기도 한데. 제 팔 봐요. 다 근육이에요.”그리고 말하면서 일부러 몸매를 자랑하는 듯 애교 누나에게 근육을 보여줬다.나도 내 몸매가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자부한다.젊고 튼튼하고 또 남성미가 넘친다고.그래서인지 애교 누나도 나를 보더니 얼굴을 붉혔다.“앞, 앞으로 다시는 이러지 마요.”이윽고 이 말을 하고는 그릇을 챙겨 뒤돌아섰다.한편, 애교는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뭐 하는 거야? 수호 씨 몸매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만
“태연아, 수호 씨 어젯밤 나 도와주고 돌아가려 했는데 집에 들어가지 못해 내가 하룻밤 있으라고 했어.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난 오해하지 않았는데 왜 설명해?”형수가 웃으며 말하자 애교 누나는 찔린 듯 얼굴을 붉혔다.형수도 애교 누나를 너무 놀리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식사는 됐어. 수호 씨, 여기서 이미 먹기 시작했으니 마저 먹고 와요. 애교야, 이따 식사 다하고 우리 쇼핑 가자. 점심은 밖에서 먹고. 우리 남편이 오늘 점심 사주겠다고 뭐 먹고 싶은지 생각해 두래.”“아, 알았어.”애교 누나는 온 신경이 다른 데 팔린 듯 멍하니 대답했다.말을 마친 형수가 허리를 흔들며 떠나자 애교 누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잔뜩 긴장한 애교 누나를 보니 왠지 웃음이 나고 귀여웠다.분명 아무 일도 없었는데 이렇게 부끄러워하다니.지금 이런 시대에 이렇게 단순한 여자가 아직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심지어 내가 살던 시골의 여자애들도 요즘에는 야릇한 방송을 하는데 말이다.나는 애교 누나와 다시 식탁 앞에 앉았다.“애교 누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우선 밥부터 먹어요. 배가 불러야 쇼핑할 힘도 생기죠.”“그래요.”애교 누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식사가 끝나자 나는 자발적으로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누나는 가서 화장해요. 여자들은 밖에 나가기 전 준비 오래 하잖아요.”심지어 다정하게 누나를 배려해 줬다.이건 내가 매너 있는 척 굴려는 게 아니라 현실을 아는 거다.나는 애교 누나가 예쁘게 치장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내 눈도 따라서 호강하니까.사람을 좋아하면 꽃을 가꾸는 것처럼 정성을 쏟아 부어야 한다.정성껏 가꿀수록 예쁘게 만개할 테니까.“수호 씨, 어떤 옷이 예쁜 것 같아요?”애교 누나는 선택 장애가 있는지 한참 동안 고르다가 끝내 나한테 의견을 물었다.내가 보기에 두 벌 다 비슷한데 말이다. 주요하게 애교 누나는 몸매가 예뻐 뭘 입든
“애교 누나, 너무 예뻐요. 뒷모습만 봐도 반할 것 같아요.”나는 애교 누나의 머리카락을 빼주며 참지 못하고 감탄했다.그랬더니 애교 누나는 화가 난 듯 투덜거렸다.“아무 짓 안 할 거라면서 뭐예요? 당장 나가요!”“애교 누나, 전 진심으로 칭찬한 건데. 절대 희롱하려는 거 아니에요.”나는 억울한 듯 설명했다.“여자들도 예쁜 꽃 보면 감탄하잖아요. 그거랑 같아요.”“정, 정말이에요? 나 속이는 거 아니죠?”“제가 왜 누나를 속여요? 제가 누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면 이렇게 조심스럽게 눈치 보겠어요? 당장 덮쳤지.”“흥, 속으로는 온갖 꿍꿍이를 다 품었으면서 그저 행동으로 옮길 담이 없는 건 아니고요?”물론 사실이지만 나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거짓말했다.“애교 누나, 누나 마음속에 제가 이렇게 저질이었어요?”“저질은 아니고, 그냥 남자들은 다 똑같잖아요.”“저는 다른 남자들이랑 다르다면요?”“어디가 다른데요?”“저는 누나를 좋아하지 어떻게 해볼 생각은 없어요.”애교 누나는 갑자기 뒤돌아 나를 봤다.“그럼 아침에 그건 뭐예요?”‘젠장,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나는 순간 당황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아침에 있은 일은 저를 탓하면 안 되죠. 그건 누나가 저를 만져서 반응이 온 거고, 그것 때문에 참을 수 없어서...”“그만해요.”애교 누나는 본능적으로 내 입을 막았다.누나의 나른하고 부드러운 손이 느껴지자 내 마음은 다시 두근댔다.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고생스럽게 쌓은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테니까.애교 누나는 자기 행동이 너무 야릇하다고 생각됐는지 황급히 손을 움츠렸다.“아침에 있은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요. 수호 씨 형과 형수한테도. 알겠죠?”나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애교 누나가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수호 씨는 얼굴도 잘생기고 몸매도 좋은데, 왜 이렇게 어리바리해요? 솔직히 말해 봐요, 대학교 다닐 때 정말 여자 친구 사
보아하니 어제의 일이 떠오른 것 같았다.“지퍼 다 잠갔어요? 얼른 잠가요.”애교 누나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이내 화제를 돌렸다.하지만 나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따져 물었다.“애교 누나, 왜 대답을 회피해요?”“왜 그런 질문을 해요? 너무 사적인 일이잖아요.”“누나도 방금 물어봤잖아요.”“그게 어떻게 같아요?”“뭐가 달라요?”‘다 사적인 질문 아닌가?’내 말에 애교 누나는 얼굴이 점점 더 빨개졌다.“아무튼 달라요. 더 이상 묻지 마요. 안 그러면 화낼 거예요.”“그래요. 안 물어볼게요. 나중에 친해지면 다시 물어볼게요.”나는 헤실거리며 대답했다.어젯밤 일과 아까의 대화로 나는 애교 누나와 많이 가까워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때문에 이렇게 시답지 않은 농담도 할 수 있고.“가까워져도 물어보지 마요.”“그래요. 안 물어볼게요. 하지만 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누나는 욕구가 있으면 어떻게 해결해요?”애교 누나는 그 말에 화가 난 듯 나에게 주먹을 휘둘렀다.물론 내가 원하는 걸 보지는 못했지만 애교 누나와 티격태격 장난을 치니 어느새 내 기분도 좋아졌다.곧이어 나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 남은 설거지를 했고, 거의 다 끝날 때쯤, 애교 누나도 준비를 마치고 방에서 나왔다.“애교 누나, 저 돌아가서 옷 갈아입고 올게요.”나는 곧장 형수네 집으로 갔다.형수는 몸에 딱 붙는 옷을 입었는데, 완벽한 콜라병 몸매에 나는 하마터면 코피를 터뜨릴 뻔했다.마침 화장하고 있던 형수는 내가 집에 돌아오자 웃으며 물었다.“어젯밤 어땠어요?”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형수의 앞에 있으니 나는 채 익지 않은 풋사과가 된 기분이었다.“별거 없었어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지만 관계는 그래도 많이 가까워졌어요.”내가 사실대로 대답하자 형수는 나에게로 다가와 나를 소파에 앉혔다.형수의 부드러운 손과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가슴에 나는 반응하고 말았다.무슨 상황이지?애교 누나 앞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형수 앞에서는 이렇지?나는 형수
나는 얼른 소파에서 일어났다.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형한테 이상함을 들킬까 봐 나는 형의 눈을 마주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수호야, 이거 집 열쇠야. 너도 하나 갖고 있어. 내가 생각이 짧았어. 우리 집에서 지내는 사람한테 열쇠도 안 줘서 집에 못 들어오게 했으니.”형의 말에 나는 죄책감이 더해졌다.형이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고 나를 친동생처럼 대해주는데.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아마 이 세상 수많은 친형제도 이 정도로 관계가 좋지는 않을 거다.그런데 나는 감히 형수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하다니.‘난 정말 죽어야 해!’“왜 그래? 안색이 안 좋은데?”형은 내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자 걱정하는 듯 물었다.이에 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어제 제대로 휴식을 못 해서 그래.”“애교 씨는 괜찮아? 네 형수 말 들어보니까 어제 갑자기 아팠다면서?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던데.”형수는 형한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때문에 나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별일 아니었어요. 이미 괜찮아졌고요.”“그렇다면 다행이고. 얼른 가서 준비해. 같이 나가서 쇼핑하고 식사하자.”말을 마친 형은 내 손에 열쇠를 쥐어 주며 뒤돌아 화장실로 들어갔다.본인의 옷을 정리하는 형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아까 반응이 빨랐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형한테 발각되고 말았을 거다.내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쉴 때 갑자기 나른한 몸이 터치했다.고개를 돌려 보니 형수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내 뒤에 서 있었다.심지어 너무 가까이 서 있었다. 그리고 아까 일부러 몸으로 내 몸을 터치한 듯했다.나는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렇다고 감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이미 형수한테 절대 갖지 말아야 할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고, 형한테 미안한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나한테 경고했으니.때문에 나는 뒤로 물러 물러나며 형수와 거리를 유지했다.“형수님.”“왜요? 무서워요? 내가 도와주길 바란 거 아
“내가 수호 씨 선물로 산 거예요. 맞는지 입어 봐요.”형수는 팔짱을 낀 채 내 방문 앞에 기대 웃으며 말했다.딱 봐도 엄청 비싸 보이는 양복 같은데, 이런 걸 턱 사주다니.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이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그러자 형수도 뒤돌아 내 방에서 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옷을 양복으로 갈아입었다.이건 내 인생 첫 양복이다.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놀라울 정도였다. ‘나한테 양복이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옷 잘 어울리네요.”형수는 말하면서 나를 도와 넥타이를 매주었다.그 모습에 나는 형한테 들키기라도 할까 두려워 당황한 마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어찌 됐든 나도 이미 성인 남성인데 형수가 옷도 정리해 주고 넥타이도 매주는 걸 형이 발견하면 너무 난처한 상황일 테니.“그만 봐요. 수호 씨 형은 침실에서 업무 처리하고 있어요.”형수는 내 걱정을 눈치챈 듯 낮은 소리로 말했다.“형수님, 앞으로 우리 거리를 지켜요. 형이 볼까 봐 두려워요.”나는 용기를 내어 내 생각을 말했다.그랬더니 형수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난 괜찮아요. 수호 씨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문제지만.”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형수의 말이 맞다.형수는 내 담력을 키워주려고 일부러 야릇한 행동을 한다지만, 나는 형수한테 제대로 홀렸으니.‘형수는 자제할 수 있다지만, 나는 정말 자제할 수 있을까?’의심이 들었지만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할 수 있어요. 그래도 제 의지가 강하다고 자부하거든요.”“그래요? 그럼 여긴 왜 커졌는데요?”형수는 시선을 내리깐 채 내 그곳을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너무 난감해 다급히 허리를 숙여 그곳을 막았다.“헉, 이게 왜 이렇지? 아까까지는 괜찮았는데.”“내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렇게 된 걸 보면, 그동안 넘 참아서 그럴 거예요. 형수로서 마음이 아프네요. 얼른 힘내서 애교를 손에 넣어야 할 텐데. 그러면 여자의 맛도 느껴볼 수 있을 텐데.”형수의 말이 너무 노골적이라 그걸 듣는 것
“수호야, 소개할게. 이분은 왕 사장님이셔. 나와 네 형수의 친구이자 애교 씨 남편.”형은 웃으며 나에게 소개해 주더니 말을 이었다.“수호야, 정민 형은 처음이지? 얼른 술 따라 봐.”나는 불편했지만 분위기를 망칠 수 없었기에 술병을 들고 왕정민의 잔에 술을 부었다.“정민 형님, 한 잔 올리겠습니다.”왕정민은 내 술을 받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형과 형수한테서 들었는데 한의학을 전공했던 수재였다면서? 강북 한의원에서 인턴으로 일할 생각 있나?”그건 당연한 거였다.강북 한의원은 강북에 있는 유일한 한의원이니.아마 한의학을 전공한 학생이라면 모두 그곳에 인턴으로 들어가는 게 꿈일 거다.내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왕정민이 말했다.“내가 도와주지.”그 말에 형이 옆에서 다급히 말했다.“수호야, 얼른 정민 형한테 고맙다고 인사하지 않고 뭐해?”“고마워요, 정민 형.”왕정민은 웃으며 내가 따른 술을 마셨다.그때 애교 누나가 옆에서 물었다.“그런데 자기, 왜 여기 있는지 아직 대답하지 않았잖아.”“이 근처에 미팅하러 왔다가 동성한테 여기서 식사한다는 소리를 들었거든. 그래서 와 봤어. 그런데 이따가 가봐야 해. 여보, 미안해. 오늘도 같이 있어 줄 수 없어.”애교 누나의 얼굴에는 이내 실망감이 드리웠다.“뭐? 같이 식사할 시간도 없어?”“내가 싫어서 가려는 게 아니라 일이 너무 바빠. 당신도 알잖아. 우리 회사 요즘 상승 단계에 있는 거. 내가 직접 나서야 할 일이 너무 많아. 하지만 하나는 약속할게. 이번 일 끝내면 돌아가서 당신 곁에 있어 줄게.”왕정민이 여자를 달래는 데에는 참 도가 튼 것 같았다.말 몇 마디로 애교 누나를 기쁘게 하다니.그런 면에서 이 남자가 참 존경스러웠다.나는 이런 능력이 없는데 말이다.매번 여자들과 대화하는 것도 조심조심.‘하, 이렇게 비교하니 짜증 나네.’내가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때 형수가 발로 나를 찼다.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형수를 봤더니 눈빛으로 나한테 뭔가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나는 속으로 몰래 웃었다.‘재밌네. 설마 내가 곧 죽는다고 생각한 건가?’‘뼈를 다친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설마 그렇게 쉽게 죽겠어?’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여전히 주선영의 말에 대답했다.“그럼 ‘더 호스트’ 줄거리 이야기 해줄래?”“아, 그건...”“왜? 싫어? 싫으면 됐어. 아쉬움을 안고 떠나가지 뭐.”나는 나 자신한테 감탄했다.‘누구를 닮았는지 연기 참 잘하네.’내 대답에 주선영은 다급하게 말했다.“알았어요. 할게요. 오래전에 아주 아주 잘생긴 호스트가 있었는데 부잣집 사모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어요...”‘뭔가 좀 이상한데?’“선영아, 내가 말한 ‘더 호스트’는 그 호스트가 아니야.’‘어떻게 생각이 그쪽으로 튈 수 있지? 존경스럽다니까.’“네? 제가 잘못 들었어요. 전 호스트라는 줄 알았어요.”주선영은 순식간에 목덜미까지 빨개지더니 어쩔 줄 몰라 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단순한 줄로만 알았는데, 호스트는 어떻게 알고 이야기까지 해주는 거야? 설마...”“헛소리하지 마세요. 아니거든요.”주선영은 얼굴을 더 붉히며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다.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농담이야. 너처럼 단순한 애가 호스트바에 갔을 리가 없지.”“제, 제가 정말 호스트바에 가본 적이 있다면 저를 안 좋게 볼 거예요?”“그 말은 정말 가본 적 있다는 뜻이야?”주선영은 요즘 확실히 이상했다. 사실 민우도 며칠 전 나한테 얘기했던 적이 있다. 주선영이 옷 스타일이 확 바뀌더니 가끔은 밤늦게 술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적 있다고.주선영은 애교 누나 사촌 동생이다. 비록 우연히 같이 살게 되었지만, 나한테는 주선영을 잘 돌볼 의무가 있었다.주선영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내 눈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나는 주선영의 팔을 덥석 잡고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주선영. 솔직하게 말해. 너 설마 호스트바에 간 적 있어? 요즘 술 마신 적도 있지?”주선영은 내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차에 올라탄 나는 오늘 일이 있어 사모님 댁에 가지 못한다고 전화로 얘기했다. 그러고는 곧장 월세방으로 향했다.내 모습을 본 민우는 너무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수호야, 너 무슨 일 있었어?”“선배, 왜 이래요?’인기척에 깨어난 주선영도 피범벅이 된 나를 보고 놀랐는지 눈물을 터뜨렸다.“임천호 경호원한테 칼빵 맞았어. 하지만 내가 확인해 본 바로는 괜찮아. 뼈를 다친 건 아니야. 민우야, 내 방에 구급상자 있으니까 네가 나 좀 도와줘.”민우는 곧바로 내 방에 들어가 구급상자를 가져오더니 신속히 내 상처를 치료했다.그나마 다행인 건, 칼이 뼈까지 찌른 게 아니고 살만 찢은 거라 며칠 휴식하면 나을 수 있었다. 발목 역시 살짝 삔 거라 며칠 휴식하면 바로 회복할 수 있었다.오히려 정태곤이 나 때문에 고자가 될 뻔해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남은 평생 남자로서의 행복을 잃을 수 있었다.그렇게 따지고 보면 내가 정태곤을 이긴 셈이었다. 그걸 생각하니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다시는 날 등신 취급하나 보자.’“선배, 이렇게 다쳤으면서 웃음이 나와요?”옆에서 민우를 도와주던 주선영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아프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자랑스러웠고 성취감이 들었다.“괜찮아. 별거 아니야.”나는 이제야 학창 시절 깡패들과 어울려 다니며 센 척하던 남자애들 마음이 이해됐다. 순진하고 풋풋한 여자애들한테 이렇게 남자들의 이런 마초적인 모습이 큰 매력으로 다가가기 때문이다.이 순간 나도 그걸 약간 실감했다.특히 나를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주선영을 보니 은근히 만족감이 들었다.오늘의 내 모습은 비록 소여정 같은 여자한테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주선영처럼 순진한 어린애한테는 무척 대단해 보일 거다.나는 주선영의 눈빛을 은근히 즐겼다. 나를 우러러보는 눈빛도, 걱정하는 눈빛도 모두.주선영이 이토록 예쁘고 귀엽게 느껴지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나는
“죽든 말든 상관없어, 하지만 귀신이 되어서라도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나는 이를 악문 채로 어깨에 찔렸던 칼을 뽑았다. 정태곤은 그 순간 멍해졌다. 아마도 내가 아직 버티고 있을 줄 몰랐던 모양이다.나는 정태곤이 넋을 잃은 사이, 놈의 머리를 내 머리로 박아버렸다. 다음 순간 정태곤의 코에서 코피가 흘러내렸다.정태곤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면서 꽉 잡고 있던 발을 놔주었고 칼도 떨어뜨렸다.이 방법이 효과가 있어 나는 또 머리로 정태곤을 들이받았다.정태곤은 이미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버렸다. 보아하니 코뼈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상태도 좋지만은 않았다. 나는 이마와 팔, 그리고 발목까지 아팠다.하지만 나는 사냥 본능이 깨어난 맹수처럼 눈앞의 놈을 갈가리 찢어발길 생각뿐이었다.내가 연속적으로 머리를 박아대자 정태곤은 끝내 나를 밀어냈다. 그는 피범벅이 된 제 얼굴을 닦아내며 나를 노려봤다.“뒤지려고!”정태곤은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으면서 허리를 숙여 칼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나는 정태곤보다 빨리 달려가 칼을 발로 차버렸다.내가 칼을 차버린 모습에 화가 난 정태곤은 피범벅이 된 얼굴을 신경 쓸 새도 없이 주먹을 그러쥔 채로 나한테 덮쳐 들었다.어두운 등불 아래에서 정태곤이 피범벅이 된 채 사람을 죽일 것처럼 달려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섬뜩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설레고 흥분되었다.나도 정태곤을 반격할 힘도 없이 몰아붙였으니, 내가 완전히 쓸모가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나는 순간 미치기라도 했는지 큰 소리로 웃으며 정태곤과 몸싸움을 벌였다.나는 한동안 내 힘을 폭증할 수 있는 혈 자리를 눌렀다.그 덕에 한동안은 정태곤과 비등비등한 수준으로 치고받았다.하지만 정태곤이 비겁하게 내가 다친 곳만 골라서 차는 바람에 너무 아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개자식, 감히 이런 비겁한 수를 써? 누구는 뭐 못 할 줄 알고?’놈이 내 상처만 노린다면 나는 또 놈의 거시기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다 결국 나는 또다시 정태곤의
“나 몰아세우지 마. 나를 몰아세우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정태곤이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면 나도 절대 놓아줄 수 없었다. 그대로 풀어주면 오히려 나한테는 후환을 남기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정태곤이 갑자기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경멸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그래? 뭐 나를 죽이기라도 하려고?”나는 허리를 살짝 숙이고 있고 정태곤은 꼿꼿이 세우고 서 있는 터라, 놈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은 마치 버러지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놈의 눈에 나는 버러지와 다름없었다. 그것도 아주 귀찮고 짜증 나는 버러지. 때문에 오늘 나를 살려둘지라도 언젠가는 죽일 거다.나는 정태곤의 태도에서 놈이 나를 언젠가 죽일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그 사실을 안 순간 나는 몹시 당황했다. 때문에 다시 곰곰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태곤이 만약 내 협상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놈을 고자로 만들어야 하나 하고.“해 봐. 기회 줄 테니까 나를 죽여 봐.”정태곤의 말은 나에게는 적나라한 조롱이나 다름없었다. 정태곤은 나한테 기회를 줘도 내가 저를 죽이지 못 할 거라고 확신했다.그 순간 내 마음속에는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나는 결국 손을 떼고 정태곤처럼 꼿꼿이 허리를 폈다.나는 내가 진짜 그렇게 보잘것없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내가 버러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남이 할 수 있는 일을 나라고 왜 못 하겠나 하는 오기마저 생겼다.‘솔직히 따지고 보면 내가 정태곤보다 부족한 게 뭔데? 똑같이 팔 두 개, 다리 두 개 달린 사람인데, 내가 왜 정태곤보다 못해?’순간 내 안에 있던 불복하는 정신이 정태곤에 의해 자극되었다.정태곤은 내가 손을 놓은 순간 다시 날카로운 눈빛을 내뿜더니 당장이라도 나를 덮치려는 하이에나처럼 굴었다. 마치 나한테 달려들어 나를 갈가리 찢어놓을 것처럼.정태곤은 허리를 숙여 칼을 집어 들더니 그것으로 차를 두드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그 순간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태곤은 안 그
정태곤은 이를 악문 채 빨갛게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너 뒤졌어!”“난 죽더라도 네 놈을 끌고 죽을 거야.”나는 두려움이 뭔지 완전히 잊어버렸다. 두려움이 극에 달할 때는 오히려 두려움이 사라지는 모양이었다.나는 정태곤의 가운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그러자 정태곤은 끝내 비명을 질렀다.“아!”꽉 잡은 것만으로는 부족한 듯해, 나는 힘을 주어 세게 꼬집었다.이곳은 남자한테 가장 중요하고 치명적인 곳이다. 나도 내 능력이 부족한 걸 알기에 이런 방법으로 놈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정태곤은 갑자기 내 머리채를 잡았다. 그 순간 두피가 찢겨 나가는 듯했다.“놔!”정태곤은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면서 내 머리채를 얼마나 잡아당겼는지 내 얼굴 피부마저 위로 당겨졌다.하지만 나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고 더 힘을 꽉 주었다.나는 이 순간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혼자 고립된 것도 모자라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내 머릿속에는 단지 너무 추하게만 죽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물론 살 수 있다면 땡큐겠지만. 나와 정태곤은 그대로 한참을 대치했다. 그러다가 정태곤이 끝내 참지 못하고 먼저 조건을 내걸었다.“그 손 놓으면 너 그냥 보내줄게.”나는 놈이 먼저 협상해 올 줄은 몰랐다. 이번 승리는 나한테 너무 뜻밖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오히려 이를 악문 채 버럭 소리쳤다.“싫어.”정태곤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바라봤다.“이 자식이,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어?”“놓든 안 놓든 난 어차피 죽을 건데, 내가 왜 놔야 해? 난 죽더라도 네놈을 고자로 만들고 죽을 거야.”나는 나사 풀린 놈처럼 정태곤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정태곤은 발버둥 쳤지만 움직일수록 고통이 전해져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는 지금 나한테 완전히 휘둘리고 있다는 걸 알고 다시 협상해 왔다.“오늘 밤은 안 죽일게.”“꺼져!”“정수호, 젠장. 내 한계에 도전하지 마.”정태곤은 또다시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칼을 쥐고 있던 내 손은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렸다.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를 악물고 말했다.“그렇다면 앞으로 치료해 주지 않으면 될 거 아니야. 왜 꼭 죽이려 드는 건데?”“네놈이 거슬리니까.”나는 그 이유에 너무 놀라 멍해졌다.‘사람이 거슬린다고 죽이려 든다고?’‘고작 임천호의 개인 정태곤도 사람 목숨을 벌레 보듯 하는데, 임천호는 어떨까?’나는 더 이상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순간 이게 임천호도 묵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그렇다는 건 소여정이 나를 다시 찾아온 순간, 내 목숨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는 뜻이다. 다만 그동안은 내가 소여정과 접촉하지 않아 죽일 이유가 없었을 뿐.하지만 오늘, 내가 소여정의 몸에 손을 대는 걸 정태곤이 직접 봤으니 죽일 이유는 충분해졌다.나는 놀랍게도 소여정을 원망하는 대신 불쌍한 내 운명을 탓했다.그동안 소여정을 피하면서 선을 넘지 않으려고 그렇게 최선을 다했건만, 저승사자는 끝내 나를 찾아왔다.결국 나와 소여정은 같은 사람이었다. 모두 자기 운명을 제 마음대로 좌우지하지 못하는 사람.“다시 한번 말할게. 칼 이리 내.”정태곤은 손을 내밀며 차갑게 말했다.그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대담한 질문을 내던졌다.“날 어떻게 죽일 건데?”“토막 내서.”정태곤은 소름 끼치는 대답을 했다.‘나를 토막 내겠다면서 칼을 내놓으라고?’나는 벌레가 아니라 가만히 죽기만을 기다릴 수 없었다.나는 정태곤의 얼굴을 빤하 바라봤다.예전 같았다면 정태곤의 얼굴을 보기 두려워했을 거다. 특히 정태곤의 두 눈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오싹했으니까.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놈의 두 눈을 빤히 쳐다봤다.나는 내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죽는 걸 두려워하던 나약한 나를 이겨냈다.나는 이를 악문 채로 버럭 소리쳤다.“싫어!”정태곤은 내 대답에 살짝 놀란 듯했다. 내가 저한테 감히 이렇게 높은 소리로 말할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내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러면 네 사지를 하나하
정태곤은 매섭고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등신. 고작 한 대 맞은 거로 못 견디겠어? 이런 주제에 여정 아가씨 눈길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정태곤은 워낙 변태 같은 놈이라 이 상황에 살려달라고 빌면 더 심하게 괴롭힐 게 분명했다.게다가 이 상황에서 믿을 건 오직 나 자신뿐이었다.그동안 일부러 소여정을 피한 건 임천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내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닥칠 미래는 결국 닥치고 말았다.이건 나더러 재난을 겪어 보라는 운명의 장난 같았다.피할 수 없다면 마주하는 수밖에. 나는 그동안 찌질하고 겁 많았던 게 아니다. 그저 번거로운 일에 연루되기 싫었을 뿐이지. 하지만 진짜 일이 닥치면 나도 등을 곧게 펴고 용감히 맞설 수 있다.나는 손을 꽉 그러쥐고 정태곤이 방심한 틈을 타 놈의 관자놀이를 세게 가격했다.관자놀이는 머리 중에서 가장 취약한 혈 자리다. 심지어 한 번에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물론 내 실력으로 정태곤을 일격에 죽일 순 없었지만, 적어도 방금 당한 걸 그대로 돌려주었다.관자놀이를 맞은 정태곤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잠깐 의식을 잃었다.나는 그 틈에 정태곤의 칼을 빼앗아 신속히 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정태곤의 속도가 나보다 훨씬 빠른 걸 알기에 도망치면 잡힐 게 뻔했으니까.나는 그저 두 손으로 칼을 꼭 쥔 채 싸늘한 눈빛으로 정태곤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먼저 공격해 정태곤을 죽여야 하나 생각했다.하지만 사람을 살려야 하는 손으로 사람을 죽이자니 도무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정태곤은 머리를 문지르며 차에서 내렸다. 놈의 눈은 이미 빨갛게 핏발이 서 있었다. 심지어 나를 보는 눈빛은 더 날카롭고 독기가 차 넘쳤다.“감히 나를 때려? 등신 주제에 감히 나를? 칼 이리 내.”정태곤은 명령조로 말했다. 놈의 눈에 나는 반항도 못 하는 벌레인 듯했다. 그가 칼을 내놓으라고 명령하면 군말 없이 내놓을 정도로 나약한. 그러면 놈은
“너 솔직하게 말해. 대체 무슨 일이야?”소여정은 절대 아무 일 없이 약속을 잡고 커피나 마시며 수다를 떨 사람이 아니다.이건 마치 일부러 회포를 풀면서 뒷일을 맡기는 것만 같았다.여러 가지 추측이 머리를 내밀어 윤지은은 너무 초조했다.윤지은은 소여정한테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비록 평소에 소여정을 경멸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소여정한테 일이 생기는 건 절대 바라지 않는다.다만 두 사람 모두 고집이 세 먼저 고개를 숙이고 살갑게 말하는 사람이 없을 뿐이었다.“나한테 무슨 일이 있다고 그래? 나 임천호 애 낳을 생각이야. 애가 생기고 내 지위가 안정되면 앞으로의 생활도 분명 점점 좋아질 거야.”소여정은 말하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그 모습은 윤지은의 눈에 일부러 찔리는 마음을 숨기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윤지은은 너무 불안했지만 소여정이 끝까지 사실을 털어놓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한편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나는 퇴근하자마자 사장님의 차를 몰고 사장님 집에 돌아갈 준비를 했다.하지만 차에 오른 순간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그게 뭔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어 생각을 뒤로한 채 시동을 걸었다.차가 한참 동안 달렸을 때, 내 목덜미에 갑자기 차가운 칼날이 닿았다.그 순간 나는 흠칫 놀라 얼어붙었다.곧이어 정태곤의 싸늘한 말소리가 들려왔다.“길옆에 차 세워.”나는 고개를 숙여 칼을 확인했다. 강철로 만들어진 칼이라 제대로 찌르면 뼈까지 부러질 수 있었다.‘이런 칼을 내 목에 겨누다니, 정말 날 죽일 작정인가?’나는 아까부터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자세히 확인하지 않은 게 못내 후회되었다.그때 만약 도망쳤더라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나는 마지못해 차를 길가에 세웠다.“뭐 하자는 거야?”나는 가슴이 벌렁거렸지만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정태곤은 한 손으로 내 목을 잡고 칼을 쥔 다른 손을 내 목에 눌렀다. 그 순간 칼날이 피부를 찢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져 나는 다급히 귀띔했다.“조심해. 이러
바쁜 업무를 모두 끝낸 뒤에야 나는 윤지은이 당부한 일이 생각났다.윤지은이 일부러 이런 방식으로 나를 겁주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친해진 사이인지라 부탁하는 걸 안 도울 수는 없었다.하지만 나는 윤지은한테 전화해 불만을 토로했다.“일을 부탁하고 싶으면 나한테 말하면 될 것이지 왜 서예지 씨와 동준 형님을 보내 겁을 줘요? 직접 부탁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어요?”윤지은이 평소에 하도 도도하게 굴어 나는 그녀의 기를 죽이고 싶었다.하지만 윤지은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왜? 내가 겁만 주는 것 같아? 내가 정말 양동준더러 수호 씨를 어떻게 하라고 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나는 피식 웃었다.“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지은 씨는 원래 안 그럴 거잖아요.”[그럼 지금 당장 양동준더러 네 팔 부러뜨리라고 할까?]“그러면 재미없죠. 우리 이미 친한 사이인데, 좀 좋게 좋게 얘기할 수는 없어요?”[없어.]‘윤지은, 내가 언젠간 너를 내 앞에 무릎 꿇고 빌게 할 거야.’[다른 용건 있어? 없으면 끊을게.]윤지은은 내가 마치 본인한테 돈이라도 빚진 것처럼 찬 바람이 쌩쌩 부는 태도였다.나도 더 이상 빈정대는 말을 들어주기 싫어 전화를 끊어버렸다.나는 나중에 따로 방법을 대 윤해철과 만날 생각이었다. 윤해철의 몸을 치료해 주면 다른 사람이 옆에서 부추기지 않아도 윤해철이 직접 아내를 집에 데려오려고 안달복달할 테니까....카페 안.윤지은은 차가운 얼굴로 소여정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천천히 내려놨다.“야심한 밤에 왜 불러내고 그래?”소여정은 싱긋 웃으며 제 앞에 있는 친구를 바라봤다.“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해? 친구끼리 마주 앉아 수다 떨면서 커피 한잔하는 것도 안 돼?”그 말을 들은 윤지은의 눈은 휘둥그레졌다.“너랑 내가? 수다를 떨며 커피를 마신다고? 너 무슨 생각 하는 거야?”“안돼? 학교 다닐 때 우리 사이가 제일 좋았잖아. 같은 이불 덮고 자기도 하고.”소여정의 말은 사실이었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