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아, 수호 씨 어젯밤 나 도와주고 돌아가려 했는데 집에 들어가지 못해 내가 하룻밤 있으라고 했어.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난 오해하지 않았는데 왜 설명해?”형수가 웃으며 말하자 애교 누나는 찔린 듯 얼굴을 붉혔다.형수도 애교 누나를 너무 놀리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식사는 됐어. 수호 씨, 여기서 이미 먹기 시작했으니 마저 먹고 와요. 애교야, 이따 식사 다하고 우리 쇼핑 가자. 점심은 밖에서 먹고. 우리 남편이 오늘 점심 사주겠다고 뭐 먹고 싶은지 생각해 두래.”“아, 알았어.”애교 누나는 온 신경이 다른 데 팔린 듯 멍하니 대답했다.말을 마친 형수가 허리를 흔들며 떠나자 애교 누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잔뜩 긴장한 애교 누나를 보니 왠지 웃음이 나고 귀여웠다.분명 아무 일도 없었는데 이렇게 부끄러워하다니.지금 이런 시대에 이렇게 단순한 여자가 아직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심지어 내가 살던 시골의 여자애들도 요즘에는 야릇한 방송을 하는데 말이다.나는 애교 누나와 다시 식탁 앞에 앉았다.“애교 누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우선 밥부터 먹어요. 배가 불러야 쇼핑할 힘도 생기죠.”“그래요.”애교 누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식사가 끝나자 나는 자발적으로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누나는 가서 화장해요. 여자들은 밖에 나가기 전 준비 오래 하잖아요.”심지어 다정하게 누나를 배려해 줬다.이건 내가 매너 있는 척 굴려는 게 아니라 현실을 아는 거다.나는 애교 누나가 예쁘게 치장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내 눈도 따라서 호강하니까.사람을 좋아하면 꽃을 가꾸는 것처럼 정성을 쏟아 부어야 한다.정성껏 가꿀수록 예쁘게 만개할 테니까.“수호 씨, 어떤 옷이 예쁜 것 같아요?”애교 누나는 선택 장애가 있는지 한참 동안 고르다가 끝내 나한테 의견을 물었다.내가 보기에 두 벌 다 비슷한데 말이다. 주요하게 애교 누나는 몸매가 예뻐 뭘 입든
“애교 누나, 너무 예뻐요. 뒷모습만 봐도 반할 것 같아요.”나는 애교 누나의 머리카락을 빼주며 참지 못하고 감탄했다.그랬더니 애교 누나는 화가 난 듯 투덜거렸다.“아무 짓 안 할 거라면서 뭐예요? 당장 나가요!”“애교 누나, 전 진심으로 칭찬한 건데. 절대 희롱하려는 거 아니에요.”나는 억울한 듯 설명했다.“여자들도 예쁜 꽃 보면 감탄하잖아요. 그거랑 같아요.”“정, 정말이에요? 나 속이는 거 아니죠?”“제가 왜 누나를 속여요? 제가 누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면 이렇게 조심스럽게 눈치 보겠어요? 당장 덮쳤지.”“흥, 속으로는 온갖 꿍꿍이를 다 품었으면서 그저 행동으로 옮길 담이 없는 건 아니고요?”물론 사실이지만 나는 절대 인정할 수 없었기에 오히려 당당하게 거짓말했다.“애교 누나, 누나 마음속에 제가 이렇게 저질이었어요?”“저질은 아니고, 그냥 남자들은 다 똑같잖아요.”“저는 다른 남자들이랑 다르다면요?”“어디가 다른데요?”“저는 누나를 좋아하지 어떻게 해볼 생각은 없어요.”애교 누나는 갑자기 뒤돌아 나를 봤다.“그럼 아침에 그건 뭐예요?”‘젠장, 설마 들킨 건 아니겠지?’나는 순간 당황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아침에 있은 일은 저를 탓하면 안 되죠. 그건 누나가 저를 만져서 반응이 온 거고, 그것 때문에 참을 수 없어서...”“그만해요.”애교 누나는 본능적으로 내 입을 막았다.누나의 나른하고 부드러운 손이 느껴지자 내 마음은 다시 두근댔다.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고생스럽게 쌓은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테니까.애교 누나는 자기 행동이 너무 야릇하다고 생각됐는지 황급히 손을 움츠렸다.“아침에 있은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요. 수호 씨 형과 형수한테도. 알겠죠?”나는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애교 누나가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갑자기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수호 씨는 얼굴도 잘생기고 몸매도 좋은데, 왜 이렇게 어리바리해요? 솔직히 말해 봐요, 대학교 다닐 때 정말 여자 친구 사
보아하니 어제의 일이 떠오른 것 같았다.“지퍼 다 잠갔어요? 얼른 잠가요.”애교 누나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이내 화제를 돌렸다.하지만 나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따져 물었다.“애교 누나, 왜 대답을 회피해요?”“왜 그런 질문을 해요? 너무 사적인 일이잖아요.”“누나도 방금 물어봤잖아요.”“그게 어떻게 같아요?”“뭐가 달라요?”‘다 사적인 질문 아닌가?’내 말에 애교 누나는 얼굴이 점점 더 빨개졌다.“아무튼 달라요. 더 이상 묻지 마요. 안 그러면 화낼 거예요.”“그래요. 안 물어볼게요. 나중에 친해지면 다시 물어볼게요.”나는 헤실거리며 대답했다.어젯밤 일과 아까의 대화로 나는 애교 누나와 많이 가까워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때문에 이렇게 시답지 않은 농담도 할 수 있고.“가까워져도 물어보지 마요.”“그래요. 안 물어볼게요. 하지만 저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누나는 욕구가 있으면 어떻게 해결해요?”애교 누나는 그 말에 화가 난 듯 나에게 주먹을 휘둘렀다.물론 내가 원하는 걸 보지는 못했지만 애교 누나와 티격태격 장난을 치니 어느새 내 기분도 좋아졌다.곧이어 나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 남은 설거지를 했고, 거의 다 끝날 때쯤, 애교 누나도 준비를 마치고 방에서 나왔다.“애교 누나, 저 돌아가서 옷 갈아입고 올게요.”나는 곧장 형수네 집으로 갔다.형수는 몸에 딱 붙는 옷을 입었는데, 완벽한 콜라병 몸매에 나는 하마터면 코피를 터뜨릴 뻔했다.마침 화장하고 있던 형수는 내가 집에 돌아오자 웃으며 물었다.“어젯밤 어땠어요?”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형수의 앞에 있으니 나는 채 익지 않은 풋사과가 된 기분이었다.“별거 없었어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지만 관계는 그래도 많이 가까워졌어요.”내가 사실대로 대답하자 형수는 나에게로 다가와 나를 소파에 앉혔다.형수의 부드러운 손과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가슴에 나는 반응하고 말았다.무슨 상황이지?애교 누나 앞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형수 앞에서는 이렇지?나는 형수
나는 얼른 소파에서 일어났다.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형한테 이상함을 들킬까 봐 나는 형의 눈을 마주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수호야, 이거 집 열쇠야. 너도 하나 갖고 있어. 내가 생각이 짧았어. 우리 집에서 지내는 사람한테 열쇠도 안 줘서 집에 못 들어오게 했으니.”형의 말에 나는 죄책감이 더해졌다.형이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고 나를 친동생처럼 대해주는데.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아마 이 세상 수많은 친형제도 이 정도로 관계가 좋지는 않을 거다.그런데 나는 감히 형수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하다니.‘난 정말 죽어야 해!’“왜 그래? 안색이 안 좋은데?”형은 내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자 걱정하는 듯 물었다.이에 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어제 제대로 휴식을 못 해서 그래.”“애교 씨는 괜찮아? 네 형수 말 들어보니까 어제 갑자기 아팠다면서?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던데.”형수는 형한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때문에 나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별일 아니었어요. 이미 괜찮아졌고요.”“그렇다면 다행이고. 얼른 가서 준비해. 같이 나가서 쇼핑하고 식사하자.”말을 마친 형은 내 손에 열쇠를 쥐어 주며 뒤돌아 화장실로 들어갔다.본인의 옷을 정리하는 형을 보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아까 반응이 빨랐으니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형한테 발각되고 말았을 거다.내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쉴 때 갑자기 나른한 몸이 터치했다.고개를 돌려 보니 형수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내 뒤에 서 있었다.심지어 너무 가까이 서 있었다. 그리고 아까 일부러 몸으로 내 몸을 터치한 듯했다.나는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렇다고 감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이미 형수한테 절대 갖지 말아야 할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고, 형한테 미안한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나한테 경고했으니.때문에 나는 뒤로 물러 물러나며 형수와 거리를 유지했다.“형수님.”“왜요? 무서워요? 내가 도와주길 바란 거 아
“내가 수호 씨 선물로 산 거예요. 맞는지 입어 봐요.”형수는 팔짱을 낀 채 내 방문 앞에 기대 웃으며 말했다.딱 봐도 엄청 비싸 보이는 양복 같은데, 이런 걸 턱 사주다니.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이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그러자 형수도 뒤돌아 내 방에서 나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옷을 양복으로 갈아입었다.이건 내 인생 첫 양복이다.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놀라울 정도였다. ‘나한테 양복이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옷 잘 어울리네요.”형수는 말하면서 나를 도와 넥타이를 매주었다.그 모습에 나는 형한테 들키기라도 할까 두려워 당황한 마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어찌 됐든 나도 이미 성인 남성인데 형수가 옷도 정리해 주고 넥타이도 매주는 걸 형이 발견하면 너무 난처한 상황일 테니.“그만 봐요. 수호 씨 형은 침실에서 업무 처리하고 있어요.”형수는 내 걱정을 눈치챈 듯 낮은 소리로 말했다.“형수님, 앞으로 우리 거리를 지켜요. 형이 볼까 봐 두려워요.”나는 용기를 내어 내 생각을 말했다.그랬더니 형수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난 괜찮아요. 수호 씨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문제지만.”나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형수의 말이 맞다.형수는 내 담력을 키워주려고 일부러 야릇한 행동을 한다지만, 나는 형수한테 제대로 홀렸으니.‘형수는 자제할 수 있다지만, 나는 정말 자제할 수 있을까?’의심이 들었지만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할 수 있어요. 그래도 제 의지가 강하다고 자부하거든요.”“그래요? 그럼 여긴 왜 커졌는데요?”형수는 시선을 내리깐 채 내 그곳을 바라봤다.그 순간 나는 너무 난감해 다급히 허리를 숙여 그곳을 막았다.“헉, 이게 왜 이렇지? 아까까지는 괜찮았는데.”“내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렇게 된 걸 보면, 그동안 넘 참아서 그럴 거예요. 형수로서 마음이 아프네요. 얼른 힘내서 애교를 손에 넣어야 할 텐데. 그러면 여자의 맛도 느껴볼 수 있을 텐데.”형수의 말이 너무 노골적이라 그걸 듣는 것
“수호야, 소개할게. 이분은 왕 사장님이셔. 나와 네 형수의 친구이자 애교 씨 남편.”형은 웃으며 나에게 소개해 주더니 말을 이었다.“수호야, 정민 형은 처음이지? 얼른 술 따라 봐.”나는 불편했지만 분위기를 망칠 수 없었기에 술병을 들고 왕정민의 잔에 술을 부었다.“정민 형님, 한 잔 올리겠습니다.”왕정민은 내 술을 받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형과 형수한테서 들었는데 한의학을 전공했던 수재였다면서? 강북 한의원에서 인턴으로 일할 생각 있나?”그건 당연한 거였다.강북 한의원은 강북에 있는 유일한 한의원이니.아마 한의학을 전공한 학생이라면 모두 그곳에 인턴으로 들어가는 게 꿈일 거다.내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왕정민이 말했다.“내가 도와주지.”그 말에 형이 옆에서 다급히 말했다.“수호야, 얼른 정민 형한테 고맙다고 인사하지 않고 뭐해?”“고마워요, 정민 형.”왕정민은 웃으며 내가 따른 술을 마셨다.그때 애교 누나가 옆에서 물었다.“그런데 자기, 왜 여기 있는지 아직 대답하지 않았잖아.”“이 근처에 미팅하러 왔다가 동성한테 여기서 식사한다는 소리를 들었거든. 그래서 와 봤어. 그런데 이따가 가봐야 해. 여보, 미안해. 오늘도 같이 있어 줄 수 없어.”애교 누나의 얼굴에는 이내 실망감이 드리웠다.“뭐? 같이 식사할 시간도 없어?”“내가 싫어서 가려는 게 아니라 일이 너무 바빠. 당신도 알잖아. 우리 회사 요즘 상승 단계에 있는 거. 내가 직접 나서야 할 일이 너무 많아. 하지만 하나는 약속할게. 이번 일 끝내면 돌아가서 당신 곁에 있어 줄게.”왕정민이 여자를 달래는 데에는 참 도가 튼 것 같았다.말 몇 마디로 애교 누나를 기쁘게 하다니.그런 면에서 이 남자가 참 존경스러웠다.나는 이런 능력이 없는데 말이다.매번 여자들과 대화하는 것도 조심조심.‘하, 이렇게 비교하니 짜증 나네.’내가 속으로 감탄하고 있을 때 형수가 발로 나를 찼다.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형수를 봤더니 눈빛으로 나한테 뭔가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애교 누나는 금세 당황해했다.그도 그럴 게, 자기가 어젯밤 다른 남자를 집에 들였다는 걸 남편에게 들킬까 봐 무서웠으니까.“괜, 괜찮아, 자기야. 우리 얼른 주문하자.”애교 누나는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그 때문에 순간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애원의 눈빛으로 형수를 바라봤다.그랬더니 형수는 나에게 계속하라는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나는 더 이상 할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그런데 갑자기 형수가 발을 들어 내 다리를 문질렀다.이윽고 문자 한 통이 또 도착했다.[직접적으로 하지 못하겠으면 나처럼 이렇게 건드려 봐요.]나는 형수의 희롱에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애교 누나를 어떻게 유혹해야 할지 생각해야 했으니 너무 어려웠다.‘뭔 놈의 여자 꼬시기가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어려워?’하지만 형수의 말 대로 왕정민이 나를 관찰하고 있으니 서둘러야 했다.결국 나는 할 수 없이 형수님을 따라 하기로 했다.내 발이 애교 누나의 다리를 문지르는 순간, 애교 누나의 몸음 뻣뻣하게 물었다.이윽고 눈빛으로 나한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다.‘에잇 몰라, 죽으면 죽었지. 이젠 물러날 곳도 없어.’나는 겁을 먹고 움츠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대담하게 행동했다.그때 애교 누나가 갑자기 다리를 닫으며 내 발을 다리 사이에 꼈다.그 바람에 너무 아파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여보, 나 사이다 먹고 싶은데 종업원한테 대신 말해줄 수 있어?”다행히 왕정민이 제때 끼어든 덕에 내 발은 구조될 수 있었다.애교 누나는 남편의 말에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바로 갔다 올게.”애교 누나는 그 말을 남긴 채 이내 떠나갔다.그러자 룸 안에는 나, 왕정민, 형과 형수 네 명이 남았다.그때 형이 다급히 물었다.“정민아, 수호 괜찮았어?”왕정민은 나를 훑어보며 평가를 내렸다.“괜찮았어. 생긴 건 잘 생겼지만 겁이 좀 많네.”“그건 어쩔 수 없어. 어릴 때부터 착하게 커온 애라 여자 친구도 사귄 적 없거든. 그런 일은 더더욱 없고. 그
나는 속이 메쓱거리고 불편했다.‘아내랑 이혼하면서 왜 이런 말까지 나한테 하지? 아내를 대체 뭐로 생각하는 거야? 장난감?’하지만 아무리 속이 뒤틀리고 불편해도 나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 없었다.오히려 현실에 타협한 채 고개 숙여야 했다.그도 그럴 게, 왕정민이 높은 자리에 있고, 사람들한테 존경받는 존재니까.“열심히 해 봐. 좋은 소식 기대할게.”왕정민은 직원을 격려하듯 나를 격려했다.그때 애교 누나가 밖에서 들어왔다.애교 누나는 방금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터라 여전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무슨 얘기 하길래 그렇게 기분 좋아 보여?”왕정민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수호한테 당신에 대한 얘기 좀 했지.”“무슨 얘기?”“우리 마누라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마누라니까 앞으로 마누라 찾으려면 당신을 표준으로 삼으라고.”애교 누나는 이내 얼굴을 붉혔다.“왜 그런 얘기를 하고 그래? 부끄럽게?”“부끄러울 거 뭐 있어? 수호는 우리 동생인데 노하우 좀 전수해야 하지 않겠어?”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깔깔 웃어댔다.하지만 나는 도저히 들을 수 없어 코를 박고 술만 마셔댔다.한 잔, 두 잔...내가 쉴 새 없이 마셔대자 애교 누나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물었다.“수호 씨, 왜 그래요? 왜 그렇게 많이 마셔요?”“술 처음 마셔서 조절 못 했나 봐.”애교 누나의 눈에는 의아함이 스쳐 지났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왕정민의 곁에 앉았다.왕정민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남아서 함께 식사했다.그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형은 왕정민과 함께 계속 대화를 이어갔다.식사를 마치자 왕정민은 일이 있다며 형더러 우리를 집에 바래다주라고 했다.“이제 막 돌아왔으면서 벌써 가려고? 집에서 이틀 정도 머물다 가지.”애교 누나가 아쉬운 듯 붙잡자, 왕정민은 애교 누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중요한 사업이라 내가 직접 가야 해. 몇억짜리 사업인데 당신도 내가 놓치는 거 싫잖아. 이 사업만 성사되면
현성과 민우는 내가 혼자인 게 시름이 놓이지 않고 걱정되어 돌아온 거엿다.무엇보다 내가 이번에 건드린 사람은 임천호다. 바로 그 S시 전체를 주름잡고 수많은 용병을 거느리고 있는 효웅이라 불리는 남자 말이다.우리는 그런 사람을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봤지 현실에서 만난 적이 없다.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우리 같은 새내기한테 그런 사람은 닿을 수도 없고 두려운 존재다.하지만 현성과 민우는 두려워하지 않고 내 곁에 있기로 했다.이건 단지 감동이라는 단어로 형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목숨을 나눈 우정과도 같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천수백 마디로도 우리의 우정을 표현할 수 없었으니까.나는 방 두 개를 현성과 민우에게 내어주고 혼자 거실에 누워 속으로 감탄했다.이 순간 흥분과 감동, 두려움과 무서움이 한데 섞여 내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하지만 이렇듯 신맛이 났다 단맛이 났다 쓴맛이 났다 매운맛이 나는 이런 과정이 바로 성장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우리 셋은 함께 천수당에 출근했다.나는 되도록 얼굴을 비추지 않으려고 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러다가 10시가 넘었을 때쯤 윤미화가 서윤기의 행방을 찾았다며 전화해 왔다.“어디 있는데요?”[샹젤리호텔. 내가 지금 마침 그곳에 가봐야 하니까 먼저 가서 확인해 볼게.]그 말을 들으니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뭐 하러 가는데요?”[고객이 거기서 기다려. 설마 내가 수호 씨랑 같이 가고 싶어서 일부러 이런다고 생각했어?]나는 순간 머쓱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그래요. 그럼 부탁할게요. 오해한 건 미안해요.”나는 윤미화를 단단히 오해했다는 걸 자각하고 다급히 사과했다.그러자 윤미화가 웃으며 말했다.[말만으로 미안하다면 다야? 실제 행동을 보여줘야지.]“사장님, 우리 한 식구 아니었어요? 뭐 하러 조목조목 다 따져요? 거리감 들게.”[누가 한 식구라는 거야?]“아니에요? 우리 탐정 사무소는 한 가족 아
“하지만 우리 언니 병 반드시 고쳐야 해.”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뒤돌아섰다.그러자 서지예는 다급히 나를 막아섰다.“뭐 하자는 거지?”“지예 씨 언니는 마음에 병이 있어요. 제가 심리 의사도 아니고 어떻게 무조건 낫게 한다고 장담하겠어요?”이건 너무 무리한 요구다.서지예도 자신의 요구가 좀 지나치다는 걸 알았는지 한발 물러섰다.“그럼 우리 언니랑 대화 많이 하면서 설득해 봐. 더 이상 죽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이제야 말이 되네요.”하지만 이것도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다.나는 한의학을 전공했지 심리학을 전공한 게 아니다. 더욱이 심리학 의사도 아니라 어떻게 서나연을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서지예는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떠나기 전에 특별히 몸에 좋은 약재를 몇 가지 사갔다.그렇게 하루를 바삐 보내다 보니 어느덧 저녁 7시가 넘었다.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는 온종일 의미 없는 일만 한 것 같다. 다행히 민우와 현성은 뭐라 하지 않았지만.그날 저녁, 우리 셋은 함께 식사하며 S시에 다녀온 일을 얘기했다.그때를 떠올리니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임천호 때문에 몇천만 원 손해 본 것도 모자라 앞으로 다른 사람한테까지 영향이 미칠지 모르겠어.”그 말에 현성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무서울 게 뭐 있어? 분명 해결 방법이 있을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우리랑 같이 이겨내면 되지.”민우도 내 어깨를 두드렸다.“걱정하지 마. 우리는 너랑 같이 일하기로 했으니 절대 널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두 사람의 감동적인 말에 나는 갑자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하지만 민우와 현성이 옆에 있으니 확실히 마음이 편해졌다.“너희밖에 없다. 자, 짠하자.”우리 셋은 함께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그러던 그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내가 가게에 있으면 임천호는 절대 우리 가게를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앞으로 난 가게 나가는 횟수를 줄일 테니까
“마음 가는 대로 얘기해도 내용이 있을 거 아니야. 어떤 내용으로 대화했는데?”서지예는 끈질기게 추궁했다.하지만 한참을 생각해도 나는 그날 대화 내용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별것도 아닌 얘기를 내가 어떻게 기억해요?”결국 마음이 조급해진 서지예는 무의식적으로 내 팔을 잡아당겼다.“잘 좀 생각해 봐. 나한테는 중요한 거란 말이야. 우리 언니 평소 남들과 얘기 안 해. 내가 뭘 물어보면 대답도 안 한다고.”“그런데 길게 대화했다는 건 진짜 놀라운 일이야. 정수호, 아니면 네가 우리 언니 좀 봐줄래?”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서씨 가문이 S시에서 어떤 가문인데요. 돈 있고 권력 있는 집안에서 설마 의사 하나 찾지 못하겠어요? 날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라면 포기해요.”나는 흙탕물 싸움에 끼어들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게다가 임천호가 만약 그 일을 알게 되면 더 골치 아파질 거다.그때 서지예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우리 언니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두고 볼 거야? 의사라며? 사람 살리는 게 의사의 본분 아니야?”“전 의사지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모두 구해줄 수는 없잖아요.”나는 이내 반박했다.그러자 서지예가 나를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그런데 이미 알면서 구하지 않으면 의사 자격 없는 거지.”“지예 씨도 의사면서 왜 본인이 구하지 않아요?”‘그리고 말은 왜 또 이렇게 듣기 거북하게 한담?’서지예는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었다.“내가 할 수 있으면 이렇게 널 찾아와서 입 아프게 설득하겠어?”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서지예는 이내 말을 이었다.“우리 언니를 치료해주면 내가 큰 고객 많이 소개해 줄게.”만약 서지예가 돈을 준다고 했으면 난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큰 고객을 소개해 준다고 하니 내 마음은 결국 흔들리고 말았다.물고기를 주기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내가 필요한 건 인맥이지 눈앞에 보이는 돈이 아니었다.서지예는 서씨 가문 둘째 딸이고
나는 속으로 오늘 왜 이토록 재수 없는지 한탄했지만 결국 서지예를 따라나섰다.밖에 나오자마자 서지예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봤다.“너 S시에 다녀왔어?”“네.”“뭐 하러 갔는데?”“돈 받으러 갔어요.”“거짓말. S시에서 우리 언니 만났잖아.”“지예 씨 언니를 만난 거랑 돈 받으러 간 거랑 모순되지 않잖아요.”나는 사실을 말했지만 서지예는 나를 믿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를 뚫어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봤다.“흥. 누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우리 언니에 대해 조사하러 갔겠지.”나는 너무 억울해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제가 왜 지예 씨 언니를 조사해요? 저랑 무슨 상관이라고요.”“너랑은 상관없지만 소여정과 상관있잖아. 솔직히 말해, 소여정이 우리 언니를 조사하라고 했지?”서지예의 엉뚱한 생각에 나는 화가 나 헛웃음이 나왔다.“증거 있어요? 소여정 씨가 저더러 지예 씨 언니 조사하라고 한 증거 있냐고요? 있으면 꺼내고 없으면 좀 가요.”나는 상대 체면도 고려하지 않고 축객령을 내렸다.그러자 서지예는 이를 갈며 나를 노려봤다.“나도 증거가 없으니까 따지러 왔잖아. 하지만 증거를 찾으면 그땐 죽을 줄 알아.”“우리 언니가 임천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나 해? 소여정이 자기를 조사하라고 했다는 걸 언니가 알면 죽으려고 할 거야.”서예지는 어찌나 걱정됐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서예지가 언니의 안위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서나연의 상태를 떠올리니 확실히 안타까웠다. 귀하게 자랐을 부잣집 아가씨가 남자 하나 때문에 죽으려고 하다니.그때를 떠올리니 내 태도도 서서히 누그러졌다.“임천호는 지예 씨 언니를 사랑하지 않아요. 동생이면 언니가 그런 남자 때문에 죽으려고 하는 걸 내버려두지 말고 포기하게 설득해야죠.”“말이 쉽지. 너 같은 사람은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 없지? 너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봐, 놓겠다고 쉽게 놓아지나.”서예지는 여전히 언니 편을 들었다.역시나 친자매 아니랄까
서윤기의 행방을 찾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인지한 나는 윤미화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탐정 사무소로 향했다.윤미화는 강북에 돌아온 뒤로 계속 잠을 보충하다가 내가 찾아오니 그제야 나른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심지어 옷도 갈아입지 않고 얇은 잠옷 바람에 나를 맞이하는 윤미화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윤 사장님, 이미지 좀 생각하면 안 돼요?”윤미화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다른 애들 다 일하러 나갔어. 여기 수호 씨뿐이야. 전에 못 봤던 것도 아닌데, 조심할 게 뭐 있어?”“그래도 조심해야죠. 사장님이잖아요.”나는 여전히 귀띔했다.그제야 윤미화는 대충 외투를 몸에 걸쳤다.“그래. 알았어.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야?”“저 대신 사람 좀 조사해 줘요.”나는 곧바로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그 말에 윤미화는 눈이 커다래졌다.“뭐야? 나 사장이야. 직원이 사장한테 일 시킨다고?”“돈 낼게요.”“누가 돈 달래? 안 해. 얼른 나가.”윤미화는 손을 휘휘 저었다.이에 나는 싱긋 웃으며 윤미화 곁에 앉았다.“윤 사장님 이렇게 인정머리 없는 분 아니잖아요. 항상 말만 독하게 하지 마음은 누구보다 여린 거 알아요. 제발 도와줘요. 이 사람 저한테 정말 중요해요.”“흥. 난 돈에 매수당할 사람 아니야. 돈으로 날 매수하려 했다면 날 정말 얕잡아봤어.”나는 다급히 물었다.“그럼 뭘 원하는데요? 뭐든 말해요. 할 수 있는 거면 무조건 할게요.”“다리 좀 두드려 봐. 다리 아파.”“네.”나는 얼른 윤미화의 다리를 두드렸다.“이 정도 강도면 괜찮아요?”윤미화는 눈을 감고 빙그레 웃으며 마사지를 즐겼다.“좋네. 딱 좋아. 역시 한의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다르네.”“그럼 아까 일은...”“아, 다리가 또 아프네.”나는 윤미화가 일부러 이런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리를 두드렸다.그러자 윤미화는 아예 나를 시종 취급하면서 차를 따르게 했다가 음식을 사 오게 했다가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시켰다.그렇게 약 2시간
하지만 난 윤지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윤지은의 집에서 나온 뒤, 나는 곧장 천수당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가는 도중 익숙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서윤기였다.서윤기가 강북에 돌아왔다.전에 경진당 사장 조천석은 진동성한테서 산 의서를 다시 서윤기한테 팔았다고 했던 적이 있다.그 뒤로 나는 서윤기한테 연락해 만나자고 했지만 서윤기는 일이 있다며 나중에 강북에 돌아오면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그리고 오늘 서윤기를 바로 만난 거다.나는 서윤기를 나쁜 쪽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정말 요즘 너무 바빠 나한테 연락할 시간이 없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먼저 전화를 걸었다.서윤기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나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서 사장님, 요즘 뭐 하세요?”[뭘 하긴요. 약재상이니 당연히 약재 사업하느라 바쁘죠.]“그러면 어디 계세요? 강북에 돌아왔나요?”[아니요. 아직 Y시에 있어요.]서윤기의 말을 들은 순간 내 마음은 나락으로 떨어졌다.분명 강북에 돌아왔으면서 나한테는 아직 Y시에 있다고 거짓말이라니.만약 서윤기가 강북에 돌아왔는데 요즘 바쁘다고 하면 나는 별생각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런 거짓말을 하니 내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바로 서윤기가 나를 속이고 있다고.‘하지만 왜 나를 속이지?’‘설마 의서를 나한테 팔지 않으려고?’그건 아마 아닐 거다. 내가 전화에서 의서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으니까.그렇다는 건 분명 다른 일이 있다는 거다.전에 서윤기가 나를 찾아와 같이 손잡자고 제안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그러니 서윤기가 지금 나한테 보이는 살가운 태도는 사실 모두 가식이다.사람은 역시나 겉만 봐서는 안 된다.그래도 서윤기가 착하고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모두 내 바람이었다.나는 속으로 냉소를 삼키며 서윤기의 거짓말을 까발렸다.“그래요? 그런데 방금 북원로에서 사장님을 봤는데요.”“하하. 그래요? 잘못 본 건 아니고요?”서윤기는 여전히
냄새를 조금 맡아보던 윤지은은 여전히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다.“안돼. 이거 냄새 너무 심해서 못 참겠어.”“그러면 코 막고 눈 감고 한꺼번에 마셔요.”나는 어린아이 달래듯 윤지은을 어르고 달랬지만 윤지은은 끝까지 한약을 거부했다.결국 나는 의자를 꺼내 위에 앉으며 최후의 수단을 썼다.“지은 씨가 안 마시면 저 안 가요. 누가 이기나 해 봐요.”“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나 환자야. 의사가 환자를 그렇게 대하면 어떡해?”“환자가 말도 안 듣고 협조도 안 해주는데 어떡해요? 지은 씨 같은 환자가 있으면 난 바로 치료 방법 바꿔요.”한의학적 치료 방법은 고작해야 한약과 침술 그리고 마사지다.때문에 윤지은이 계속 한약을 거부하면 나는 침을 놓을 수밖에 없다.침을 맞는다는 생각에 윤지은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다만 대체 무슨 상상을 했기에 이토록 부끄러워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윤지은은 갑자기 그릇을 빼앗아 가더니 코를 막고 한약을 깨끗이 비웠다.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싫다고 생떼를 부렸는데 왜 갑자기 순순히 먹는 거지?’하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약을 먹었으면 된 거니까.“됐어요. 얼른 휴식해요.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나는 그릇과 수저를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그때 윤지은도 따라 일어나며 몸을 비틀거렸다. 워낙 감기 기운이 심한 탓에 윤지은은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나는 얼른 수저를 내려놓고 윤지은을 부축했다.“방까지 부축해 줄까요?”“부축 안 해줄 생각이었어? 나 혼자 방에 들여보낼 생각이었나 봐? 내 상태를 봐. 이 상태로 나 혼자 방까지 갈 수나 있을까?”역시 윤지은의 입은 독사보다 더 독했다.나는 윤지은의 팔을 덥석 잡았다.“알았어요. 지은 씨는 부잣집 아가씨니까, 지은 씨 말이 다 맞아요. 자, 들어가요.”나는 윤지은을 방까지 부축했다.하지만 오랜만에 와 보는 윤지은의 방에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때문에 나는 윤지
나는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별 수 있어요? 제가 워낙 오지랖이 넓거든요. 지은 씨가 아픈 걸 아는데 내버려두는 건 의사로서 도리가 아니잖아요.”“그래서, 지금 그것 때문에 온 거야?”내 말에 윤지은은 살짝 실망했다.그런 윤지은의 마음을 내가 알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난 여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우리 그래도 친구 정도는 되잖아요. 친구 사이에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윤지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그때 나는 여전히 뻔뻔하게 말했다.“직접 할래요? 아니면 내가 해줄까요?”윤지은은 나를 매섭게 노려봤다.“내 상태를 봐. 이런데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아?”“그럼 조금 비켜줄래요. 들어갈게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몸을 틀어 자리를 내주었다.식재료를 들고 주방으로 향하는 나를 본 윤지은은 그제야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렸다.보살핌을 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다.아무리 윤지은처럼 강한 사람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나는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며 물었다.“지은 씨는 지금 위장이 약할 테니 따뜻한 죽과 야채 샐러드 만들어 줄게요. 괜찮죠?”윤지은은 상관없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마음대로 해. 어차피 입맛 없어.”“입맛 없으니까 더 먹어야 하는 거예요. 안 먹으면 어떻게 나아요?”한결 부드러워진 윤지은의 말투에 내 마음도 따라서 편해졌다.나는 얼른 윤지은을 위해 따뜻한 죽과 야채 샐러드를 만들고 한약을 끓이기 시작했다.식사 준비를 마친 나는 모든 음식을 식탁 위에 세팅한 뒤 윤지은을 불렀다.“윤지은 아가씨, 다이닝룸으로 자리 옮기실게요.”윤지은은 나를 매섭게 째려봤다.“제대로 말해!”“지은 씨가 화낼까 봐 이러는 거잖아요. 화 다 풀렸으면 얼른 가서 식사해요.”윤지은은 다이닝룸으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사실 윤지은은 입맛이 없었지만 내가 바삐 돌아다니며 준비한 걸 봐서 결국 숟가락을 들었다.“오후에 가게 나가?
[응.]윤지은은 차갑게 대답했다.나는 한 편으로 화도 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갑자기 왜 카톡을 삭제해요?”[삭제하든 말든 내 마음이지. 그것도 네 동의를 받아야 해?]윤지은은 차갑게 되물었다.그 말에 나는 더 어리둥절했다.“적어도 이유란 게 있어야 하잖아요. 이유가 뭔데요? 나한테 사형 선고를 내릴 거면 이유라도 알고 죽게 해줘요.”나는 뭐가 됐든 이유를 꼭 알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찝찝해서 견딜 수 없으니까.하지만 윤지은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이유는 없어. 이제 할 말없지? 끊을게.]윤지은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곧바로 전화를 끊지 않았다. 윤지은 성격에 정말 기분이 안 좋았다면 아무 말없이 바로 전화를 끊었을 텐데, 이렇게 기다린다는 건 나한테 기회를 준다는 뜻이었다.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윤지은이 내 카톡을 삭제했다는 일만 가득해 이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너무 막무가내로 구는 윤지은에게 화도 났다.“사람 참 뜬금없네요. 선물을 줬는데 싫다고 한 건 본인이면서 갑자기 연락처는 왜 삭제해요? 제가 그렇게 싫으면 아예 차단해요.”[너...]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말로 내 연락처를 차단했다.나는 윤지은의 속내를 도무지 읽을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심지어 음식을 해주려던 기분마저 사라져 버렸다.한편. 윤지은은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자마자 내 연락처를 차단해 버렸다.이번에 윤지은은 화난 게 아니라 실망하고 속상했다.윤지은은 아픈 사람을 상대로 그런 말까지 하는 내가 너무 양심 없다고 생각했다.사람은 아플 때 취약해진다고, 지금의 윤지은도 극도로 취약하고 예민했다. 심지어 너무 서러워 저도 모르게 눈물이 눈시울을 적셨다.윤지은은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얼굴도 예뻤으며 때 묻지 않고 자기애가 강했다. 하지만 처음 만난 남자 여준휘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윤지은이 온 마음을 다 바쳐 희생했는데도 여준휘는 항상 윤지은에게 더 뜯어낼 게 없나 계산기를 두드리기 바빴다.이에 워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