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민은 말로는 승낙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다.나중에 남주의 남편과 잘 말해서 먼저 명의 이전 수속은 미루기로.그리고 나중에 수호가 애교를 꼬시는 데 성공하면 그때 자기 패를 꺼내기로.성공 여부는 하늘에 달렸지만 일은 하는 사람에 달렸으니까.여자 달래는 방법은 많다고 여겼다.“여보, 지난번에 우리 결국 하지 못했잖아. 그것 때문에 계속 아쉬웠는데 우리...”왕정민은 애교를 보자 흥분한 나머지 애교의 허리를 감싸안았다.하지만 애교는 구역질이나 왕정민이 저를 터치하는 것조차 싫었다.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 왕정민과 사이가 틀어질 수는 없었기에 결국 핑계를 댔다.“오늘은 안 돼. 그날이라서.”“하필 오늘? 그럼 오늘 밤도 못하는 거잖아?”애교는 왕정민을 째려봤다.“당신은 그런 짓 하려고 온 거야? 안 하면 올 수 없는 거야?”“당연히 아니지. 우리는 부부인데 오랫동안 하지 않았으니 당신 제대로 위로해 주려는 거잖아.”애교는 여전히 화가 난 말투로 말했다.“당신 일 아직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나 할 마음 없어. 오늘 혼자 자, 난 남주랑 잘 거니까.”말을 마친 애교는 바로 뒤돌아 떠나버렸다.왕정민은 손에 남은 애교의 잔향을 맡으며 눈빛이 흐릿해졌다.‘젠장.’예전에 애교와 같이 살 때는 애교에게 별다른 욕구가 느껴지지 않았는데, 밖에서 살며 다른 여자를 만나니 오히려 애교가 더 매력적이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에 왕정민은 떠나가는 애교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이혼하기 전 무조건 애교와 한번 하고 만다고 결심했다.애교가 객실로 오자 남주가 다급히 물었다.“어떻게 됐어?”그러자 애교는 손에 든 카드를 보여 주며 말했다.“카드 한 장 받아냈어. 안에 몇억은 들어 있을 거야.”“오, 의외네. 이렇게 단번에 해결할 줄 몰랐는데. 그럼 이 집은? 명의 넘기겠대?”“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 안 해. 네가 우선 정훈 씨더러 수속 밟으라고 해. 사인 필요할 때 전화로 통보하면 되니까.”“그래, 그렇게 하자. 저 쓰
“뭐?”남주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럴 리 없어, 왕정민이 날 짝사랑한다니?”“예전에 나 결혼할 때 너더러 신부 들러리 서라고 한 거 기억나?”“기억하지.”“너를 들러리로 세우라고 한 게 누구인지 알아?”“설마 그게 왕정민이라는 소리야?”애교는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왕정민이야. 네가 고정훈 씨와 이미 결혼해서 난 너 들러리로 내세우기 싫었어. 그런데 왕정민이 기어코 네가 있는 집 자식이라고 네가 들러리로 서면 자기 체면이 산다고 고집부렸어.”“심지어 자기가 나중에 사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면서. 그때 나는 정말로 왕정민과 잘살아 볼 생각으로 결혼했고, 왕정민 사업이 잘되기를 바랐으니까 너한테 들러리 제안했던 거야.”“그날 얄궂은 사람들이 왕정민더러 너한테 입 맞추라고 부추길 때, 왕정민 얼굴이 얼마나 빨개졌는지 지금도 기억나. 그런데 그때는 왕정민이 너한테 마음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어.”“결혼 초기에 나도 몰랐어, 그런데 한번 왕정민이 술에 취해 실수로 실토했어.”남주는 화가 나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왕정민 이 개자식, 감히 누굴 넘봐? 애초부터 이런 마음 품고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남자구실 못 하게 만드는 건데.”남주는 말하면서 안쓰러운 듯 애교의 손을 잡았다.“애교야, 그동안 모든 걸 알면서 혼자 마음속에 묻고 있느라 힘들었지?”남주는 자기 친구를 너무 잘 알고 있다. 항상 남부터 생각하느라 지기 자신은 손해 보는 스타일이라는 걸.아마 남주를 지켜주려고 혹은 왕정민과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이 사실을 계속 마음속에 묻고 있었을 거다.그리고 왕정민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아마 영원히 마음속에 묻었을 거다.한편으로는 남편과 사랑을 나눠야 하면서 친구한테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있어야 하니, 생각만 해도 괴로운 일이다.사실 애교는 그동안 그래왔다.이건 애교 성격상의 결함이다.사람은 누구나 결함이 있다. 완벽한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애교와 남주는 마침 서로의 결함을 보완해
애교는 남주의 말에 마음이 놓였다.적어도 슬플 때 곁에 남주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꼭 안고 서로에게 온기와 위로를 주었다.그 시각 문 밖.왕정민은 방금 전 애교를 껴안았을 때의 느낌을 되짚으며 근질거리는 마음을 참았다.이렇게 눈앞에 보이는데 만질 수조차 없는 건 너무 고역이었다.하지만 왕정민은 감히 애교를 건드리지 못하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그러고는 옷장에서 애교의 잠옷을 꺼내 냄새를 맡으며 변태 같은 미소를 짓더니 잠옷을 침대에 놓고는 스스로 해결하기 시작했다....다음 날 아침.내가 깨어났을 때 형수는 이미 깨어 있었다.“수호 씨, 깨어났어요? 와서 아침 먹어요.”형수는 어느새 아침을 사 왔다.나는 형수의 도움으로 일어나 앉았지만 어제의 일 때문에 형수를 마주보기 너무 어색했다.하지만 형수는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전처럼 나를 웃으며 대했다.나는 가끔 형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나와 썸 타는 것처럼 야릇하게 굴다가도 또 나를 멀리 밀어버리고.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하지만 형수가 예전처럼 나를 대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너무 기뻤다.우리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의사가 마침 회진하러 왔다.이번에 온 의사 중에도 윤지은이 있었다.여자를 보자마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은은 나를 보며 싸늘하게 말했다.“바지 벗어요. 검사하게.”아침에 온 의사는 어제저녁보다 훨씬 많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바지를 벗으라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어제 검사했잖아요. 그런데 왜 또 검사하죠?”내가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자 지은 역시 싸늘한 말투로 받아 쳤다.“어제 상태가 오늘과 같아요? 본인 그곳이 제대로 설 수 있을지 말지 상관이 없다면 마음대로 해요.”나와 지은이 또 다시 말싸움하자 형수가 다급히 말렸다.“수호 씨, 의사 선생님도 수호 씨 좋으라고 한 소리니 말 좀 아껴요. 내가 도와줄게요.”나는 속으로 매우 언짢았지만 반박할 이유를 찾을
나는 일순 긴장해서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형수는 내 겨드랑이를 몇 번 간지럽히더니 내가 간지럼을 타는 사이 베개를 빼앗아 갔다.형수가 나와 너무 가까이 붙는 바람에 나는 눈만 내리깔아도 형수의 가슴을 볼 수 있었다.심지어 저도 모르게 형수의 가슴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온몸의 피가 들끓었다.하지만 아쉽게도 예전에는 그나마 만질 수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그런데 왜인지 형수가 하지 말라고 할수록 나는 자꾸만 하고 싶어졌다.그것도 병원에서...생각할수록 나는 흥분되면서 가슴이 콕콕 질렸다.그러다 형수의 눈을 똑바로 마주칠 수 없어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형수, 저한테 간병인 붙여줘요.”“간병인은 왜요? 나 평소 할 일이 없기도 하고, 간병인이 나보다 수호 씨를 잘 돌볼 리는 없잖아요.”‘형수가 잘 돌보긴 하지만 한편으로 괴롭기도 해요. 매일 너무 힘들다고요.’특히 형수와 단둘이 있을 때면 나는 참지 못하고 이런저런 야릇한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사람은 음식과 정욕을 떠나 살 수 없다는 게 맞는 말인 듯싶다.“우리는 형수와 도련님 사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하필 그런 곳이 다쳤으니 형수한테 보살핌받는 건 좀 아니라고 봐요.”형수는 마를 빤히 바라봤다.“솔직히 말해요. 내가 수호 씨 요구를 거절해서 보살핌도 받고 싶지 않다는 거죠?”내 마음은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사실 형수 말이 맞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전 그냥 형수 명성에 안 좋을까 봐 그래요.”“나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수호 씨가 왜 무서워해요? 남들은 함부로 떠들라고 해요. 난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나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형수를 돌려보내는 건 물 건너 갔군.’‘됐어, 계속 참지 뭐.’나는 결국 형수가 없는 틈에 혼자 해결했다.오전에 링거를 다 맞자 형수는 나에게 먹고 싶은 것이 없는지 물었고 나는 일부러 병원과 엄청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곳을 말했다. 형수를 멀리 보내
[그쪽 외에 다른 여자가 없다는 걸 증명하는 거잖아요. 다른 여자가 있으면 바로 찾아갔지 뭐 하러 이렇게 고생하겠어요?][그쪽한테 다른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난 그쪽 여자 친구 되겠다고 대답한 적 없는데요.][그럼 고려해 봐요. 그쪽 남자 친구랑은 헤어질 거잖아요.][얼굴도 못 드러내는 겁쟁이가 내 남자 친구가 되겠다고요?][우선 핸드폰으로 연락 주고받으면 되잖아요. 나중에 괜찮다 싶으면 나도 얼굴 비출게요.][이게 재밌어요?][당연하죠. 우리가 사귀는 사이가 되면 은밀한 사진도 주고받을 수 있지 않겠어요? 내가 방금 아주 귀한 사진 보내줬잖아요. 그러니까 나한테 영상 보내줄 수 있어요?]나는 겨우 내 진짜 목적을 내뱉고는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답장을 기다렸다.심지어 그와 동시에 복수했다는 쾌감도 느꼈다.현실 세계에서 이 여자를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인터넷상으로 이기지 못할까?‘감히 나를 쪽팔리게 하고 괴롭혀? 내가 이따가 네 사진으로 어떻게 하나 봐.’곧이어 나는 지은의 답장을 받았다.지은은 아니나 다를까 나한테 영상 하나를 보내줬다.심지어 표지는 유니폼을 입은 여자였다.그런데 다급히 영상을 클릭했지만 영상 속 여자는 지은이 아니었다. 영상도 인터넷에서 찾은 것이었고.이런 영상은 지은한테서 받을 필요도 없다. 나한테도 많으니까.[이봐요, 난 그쪽 영상 원하는 거지. 인터넷에 있는 건 왜 보내요?][우선 제대로 봐요. 다 보고 얘기해요.]지은의 말에 나는 다시 영상을 클릭했다.몇 초 동안 보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가장 중요한 건 영상 뒷부분에 있었다.각종 고난도 동작에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이런 건 왜 보냈어요? 나랑 해보고 싶어요?][맞아요.]‘헐.’나는 너무 흥분해서 펄쩍 뛰어오를 뻔했다.[기꺼이 복무할게요. 그런데 언제 괜찮아요?][당연히 오늘 아니에요?]지은의 말에 나는 내 다리를 내려다보며 한탄했다.‘하필이면 이때 끊어질 건 뭐야?’[오늘 저녁은 안 될
정말 안 되면 오늘 약속 장소로 나갈 생각도 있었다.근데 문제는 내 다리가 불편하다는 거다. 게다가 이 여자가 내 주치의이고, 만약 내 다리를 보고 내가 누구인지 알아내기라도 한다면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게 된다.[더 이상 문자 보내지 마요. 당신 같은 사람 제일 싫으니까. 하고는 싶은데 좋은 남자인 척하는 쓰레기면서.]나는 문자만으로도 지은이 정말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이에 나는 다급히 문자를 남겼다.[그래요, 그럼 오늘 밤 만나요. 지난번 호텔에서. 그러니까 다시 친구 추가 받아줘요.]다음 순간 여자는 바로 내 추가를 수락했고,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오늘 밤 8시, 꼭 나타나요.][그래요. 그때 봐요.]나는 우리의 대화를 보면 마음이 달콤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늘 저녁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오늘 저녁에는 어떻게 위장하지? 정말 머리 아프네.’‘아니면 오늘에 일찍 가서 먼저 침대에 누워있을까? 돌아다니지 않고?’‘안돼. 하다 보면 눈치챌 수 있어.’온종일 생각했지만 나는 여전히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해 초조하고 다급했다.그때 형수가 간식을 사 들고 돌아왔다.“수호 씨가 먹고 싶다던 거 겨우 사 왔어요. 따뜻할 때 먹어요.”하지만 나는 사실 입맛이 하나도 없었다.게다가 아직 방법을 생각해 내지도 못했는데, 형수가 너무 일찍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결국 나는 또 다시 형수에게 요구했다.“형수, 저 지금 선지해장국 먹고 싶은데, 사줄 수 있어요?”형수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이제 막 통닭구이 사 왔는데 선지해장국도 먹고 싶다고요? 다 먹을 수 있어요?”“죄송해요, 저 지금 통닭구이 먹기 싫고 선지해장국 먹고 싶어요.”나는 아예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하지만 형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동의했다.“그래요, 바로 가서 사 올게요.”결국 형수는 또 다시 병실을 나섰다.형수가 떠난 뒤 나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끝내 아무런 수도 떠 오르지 않았다.‘됐어, 그만 생각하자.
나는 속으로 지은이 도착하면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우선 지은을 침대 위로 끌어올 생각부터 했다.그 외의 건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까.백번 양보해서, 만약 발각되더라도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않을 테니 나는 그저 오늘을 즐기려는 생각뿐이었다.내가 침대에 누워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고 있을 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들어와요. 문 안 닫혔으니까.”침대 아래에서 걷는 걸 방지하기 위해 나는 일부러 문을 비스듬히 열어 두었다.문을 열고 들어온 지은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지은의 분위기에 아주 어울렸다.“언제 왔어요?”지은의 질문에 나는 내 목소리를 들킬까 봐 일부러 목소리를 한층 내리깔았다.“20분 정도 돼요. 이리 와요, 얼굴 보게.”지은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내 쪽으로 걸어오자 나는 지은의 손을 덥석 잡아 내 쪽으로 확 끌어당기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뭐가 이렇게 급해요?”지은이 나를 밀어내며 진정시키자 나는 얼른 지은의 얼굴에 입 맞추었다.“며칠 동안 안 했더니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그래도 이렇게까지 서두를 필요 없잖아요. 나 금방 퇴근해서 아직 씻지도 못했다고요.”“씻을 필요 없어요. 이렇게 향기로운데.”나는 한 시 빨리 성욕을 풀고 싶었다.“그래도 안 돼요. 하루 종일 냄새 나는 남자들 틈에 있어 몸에서 냄새나요. 요즘 아주 특이한 환자가 있는데 하필 그곳이 다쳐서 매일 검사해야 했거든요. 그런데 하필 그곳이 말을 안 들어서.”‘젠장, 이거 나 말하는 거 아닌가?’“그 환자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네요, 아는 사람이에요?”“아니요, 그 사람 우리 병원 한의과에 온 인턴인데 온 지 며칠도 안 돼서 나한테 작업 거는 거 있죠.”‘젠장, 나 말하는 거 맞잖아.’나는 지은이 나를 알아볼까 봐 얼른 어두운 쪽으로 끌어당기고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고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기분 나쁜 일 그만 생각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요.”나는 말하면서 점점 손을 이로 움직였다.“정말 내 몸에서 다른 남자 냄새
‘젠장, 이렇게 들켜버렸네. 어떡하지?’나는 다급히 거짓말로 둘러댔다.“아니요, 술 사러 가려는 거예요.”“호텔에 술 있잖아요. 프런트에 전화만 하면 바로 가져올 텐데.’지은이 내 말을 믿지 않고 나를 지나쳐 방안 불을 켜려고 하자 나는 너무 무서워 다급히 모자와 마스크를 썼다.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방안 불이 켜지 방 안이 환해지자 나는 눈이 부셔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그 순간 나는 지은이 나를 의심한다는 걸 눈치챘다.‘당장 이곳을 떠나야 해, 안 그러면 들킬 거야.’나는 곧바로 지은의 꼬투리를 잡았다.“뭐 하는 거예요? 왜 갑자기 불은 켜고 그래요?”지은은 나를 한참 동안 뚫어지게 바라봤다.“나 속이고 있죠? 오늘 밤 새로운 자세로 해보기 위해 나 부른 거 아니죠? 이렇게 급하게 떠나는 이유가 뭐예요? 뭐가 두려워요?”“두려운 거 아니에요. 갑자기 가족 전화를 받아 급히 가봐야 해요.”나는 너무 당황해 아무 말이나 둘러댔다.하지만 지은은 여전히 나를 믿지 않았다. 심지어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 얼굴을 제대로 보이라며 연구했다.벗으면 바로 들킬 건데, 나는 당연히 벗으려 하지 않았다.이 여자가 만약 매번 자기와 카톡으로 야릇한 대화를 주고받는 사람이 현실에서의 정수호라는 걸 알면 아마 내 가죽을 벗기려 들 거다.“나 정말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갈게요.”말을 마친 나는 다급히 절뚝거리며 도망치느라 목발도 호텔에 두고 나왔다.뒤에서 지은이 곧바로 쫓아 나왔지만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는 바람에 바로 전화를 받았고, 나는 그 틈에 도망쳤다.하지만 다리가 불편한 나는 행동이 아주 굼떴다.게다가 목발을 호텔에 두고 나와 지은에게 발각되면 끝장이다.목발에 병원 로고가 붙어 있으니까.지은은 그 로고로 내가 바로 병원 환자라는 걸 알아낼 거다.가뜩이나 영민한 여자라 단서로 내 정체를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다.“하!”나는 호텔 입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배회했다.이대로 가자니 지은이 목발을 발견할 것 같고, 가지 않자니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좋은 일이다.윤지은이 아침을 사 오자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그걸 본 윤지은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건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번 치료 방법이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나는 사모님을 한참 동안 관찰했다.비록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도 사모님은 음식 드실 때 여전히 우아하고 단아했다. 살짝 슬픔을 띄고 있어 살짝 비극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내가 한창 사모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윤지은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나를 쏘아봤다. “짐승!”윤지은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그 욕에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제가 뭘 했다고 짐승이라는 거예요?”“아무튼 짐승 맞아. 이런 상황에서 훔쳐보기나 하고.”윤지은은 나를 째려봤다.난 그저 사모님을 몇 번 본 것뿐인데 나를 짐승 취급하다니, 너무 어이없었다.하지만 이러다 또 싸움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아침을 들고 다른 곳에 가서 배를 채웠다.식사를 마친 뒤 사모님은 자발적으로 나와 윤지은을 찾아왔다.“알고 있는 거 사실대로 다 알려줘요. 난 호섭 씨 사고에 대한 모든 사실이 알고 싶어요.”사모님은 너무 평온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때문에 나는 사모님 상태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사모님, 우선 맥 좀 짚어봐도 될까요?”“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도 알아야. 걱정할 거 없어요. 어젯밤 많이 생각해 봤고, 호섭 씨가 떠난 사실을 받아들였어요.”“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호섭 씨처럼 착한 사람이 남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억울함을 풀어줄 거예요.”“난 강해져야 하고 호섭 씨처럼 용감해져야 해요. 그래야 호섭 씨가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요.”사모님은 애써 슬픔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또 흐느꼈다.그 말을 들으니 나도 코끝이 시큰거리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같은 목표가 생겼다. 바로 진실을 밝히는 것.나는 얼른 마음의
나는 사모님 팔을 힘껏 잡으면서 사모님과 눈을 마주쳤다.“사모님!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사장님이 이런 사모님 보고 편히 가지 못하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내 말이 사모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줬는지, 사모님은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윤지은은 내가 강제로 사모님을 자극했다며 나를 탓했다.“유미 지금 안 그래도 나약한 상태인데, 왜 그런 말을 직접 해?”나는 너무 난감했다.“누구는 뭐 이러고 싶은 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이 계속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 속에 살고 있는데, 계속 이러면 상태가 점점 악화해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모님이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다.나도 사모님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모님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윤지은에게 말했다.“정말 사모님을 돕고 싶다면 모질어야 해요. 이럴 때 마음 약해지면 오히려 해치는 거예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 말에 동의하는지, 내가 치료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나른하게 힘이 쭉 빠진 사모님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사모님이 속사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속상해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 할 일이 있어요.”“사장님 사고 단순 사고가 아니에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사고 낸 거예요. 사모님, 정신 차리고 우리와 함께 진실을 조사해요.”사모님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사모님을 깊은 슬픔에서 꺼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나는 말투를 부드럽게 하며 방금 한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사장님 교통사고에 수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사모님도 사장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시는 거 원하지 않죠? 우리 함께 진실을 알아내 사장님이 억울하게 죽임당하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올랐다.사모님 상태는 살짝 이상해 보였다. 아마도 의식이 혼미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를지도 몰랐다.나는 사모님이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서둘러 사모님 팔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계속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다.“수호 씨, 이거 놔요. 난 남아서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사모님은 마구 버둥대며 소리쳤다.이러다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나는 아예 사모님을 어깨에 두러 업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곧바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벼랑 끝에 서 있는지라 조금만 실수하면 함께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사모님을 손날로 기절시켰다.내가 가드레일 안쪽으로 다시 넘어왔을 때 윤지은의 차가 마침 도착했다.“왜 그래?”윤지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사모님을 차에 앉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지그 정신이 이상해서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요. 방금 사장님이 춥다고 한다면서 옷 주러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요.”윤지은은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계속 이럴 순 없어. 우리가 잠깐은 지켜볼 수 있지만 평생 지켜볼 순 없잖아.”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사모님께 사장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드리는 건 어때요?”“미쳤어? 이번 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또 자극하자고?”윤지은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학 서적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환자가 가족을 잃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치료가 안 된다면 환자한테 희망을 줘야 한대요. 그 희망이 의학에서 말하는 기예요.”“그 기를 가진 환자가 음식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함께 진행하면 서서히 회복할 수 있대요.”“사장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모님과 함께 그 사건을 수사하는 거예요. 아마 사모님도 사장님이 죽은 진실을 알고 싶을 거예요.”
장례식장 안을 모두 뒤져 봤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리 조급하지 않던 내 마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안해졌다.사모님은 현재 몸 상태도 안 좋고 정서도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족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됐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어 나는 문득 사모님 번호를 떠올려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계속 긴 연결음만 들릴 뿐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 연결음이 꺼졌다. 액정을 확인하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사모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나 괜찮으니까 좀 내버려둬요.]사모님 목소리는 매우 우울해 보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듣기 좋았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사모님, 어디 있어요? 너무 걱정돼요.”[혼자 있고 싶어요.]“알아요, 아는데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사모님이 안전하다는 거 확인해야 해요.”전화 건너편에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때 갑자기 차 경적음이 들려왔다.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장례식장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문득 사모님이 있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알려주시면 안 돼요?”사모님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이미 대충 답을 얻은 나는 장례식장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사장님이 사고를 당한 곳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사모님을 찾았냐는 윤지은의 전화를 받은 나는 내 추측을 말했다.“아니요. 사모님 아마도 사장님 사고 난 곳에 있는 것 같아요.”[거긴 왜?]윤지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사장님 죽음이 수상해 직접 조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사장님이 그리웠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저 지금 가는 중이에요.”[그럼 먼저 건너가. 나 이따 바로 갈게.]나는 윤지은과 상의한 뒤 먼저 사장님이 사고 난 곳으로 향했다.사고가 난 곳은 절벽인데, 사모님은 마침 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