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강연의 충격 선언“아빠보다 어려요!” 호강연은 자신이 반한 남자를 나쁘게 말하는 걸 용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빠보다 잘 생겼어요!”“너……”진북후는 콧바람에 수염마저 홀랑 뒤집어져서, “나보다 어리든 잘 생겼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중늙은인데, 올해 46이야, 넌 이제 고작 17이고, 너보다 무려 30살이나 더 많다고.”“29살이에요!” 호강연이 고쳐서 말했다.“29살이면 아버지벌 하고도 한참 남아, 할아버지도 될 수 있는 나이라고.” 진북후는 화가 나서 심근경색이 올 지경이다. “안돼, 그 얘기는 다시는 꺼내지도 마.”“황제 아니면 결혼 안 해요.” 호강연은 한마디를 살짝 던졌다.“혼인은 부모가 명하고 중매인이 말을 넣는 것이니, 네가 나설 생각 하지도 마라.”“누가 그래요?” 호강연이 한사코 부정했다.“네가 방금 그랬어.” 진북후는 있는 힘껏 탁자를 치고 두 눈을 왕방울만 하게 부릅뜨는데 안에 이글이글 불꽃이 타오른다.호강연도 탁자를 치고 눈을 부라리며, “전 그런 헛소리 지껄인 적 없거든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주인이에요, 제가 누구한테 시집을 가든 제가 결정하는 거지, 아버지가 말한다고 끝이 아니에요, 어쨌든 폐하가 아니면 누구한테도 시집 안가요.”“이 망할 놈의 자식이!” 진북후가 손을 들어 따귀를 때리려고 했다.호강연은 자기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때려봐요, 때려봐. 그러면 바로 엄마 영전 앞에 목을 매고 다들 보게 할 테니까.”“네가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진북후가 거칠게 손을 내려놓았지만 말투는 상당히 약해졌다.“어디 해봐요 해봐, 내가 하나 못하나!” 호강연은 막 나가는 성격으로 아예 감출 마음이 없다.진북후는 발을 쿵쿵 구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호강연의 할머니에게 도움을 구하는데. “어머니, 뭐라고 좀 해주세요.”노마님도 상당히 놀라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는지라, “연이야, 어쩌다가 폐하께 시집을 가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냐? 잘 생기고 능력이 출중한 데다 마음씨도 빼어난 젊은 사람이 얼마나 많
당황한 진북후진북후는 자신의 딸을 보며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이번에 경성에 돌아오며 그가 결심한 것은 호씨 집안이 당연히 누려야 할 영예를 쟁취하는 것이었다.진북후는 황제가 진북에서 자신이 거둔 업적을 중시하는 것을 알고 위풍당당하게 돌아와 오늘 궁에서도 전대미문으로 황제에게 억지를 부리는 간이 배밖에 나온 짓을 했으며, 비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계속 우기면 분명 이길 거란 것을 알고 있다.그래서 출궁해서 진북후부로 돌아오는 길에도 뜻만 있으면 반드시 이룰 것이란 생각에 가슴이 웅장했다.그런데 이게 웬 말이냐고. 발톱을 감춘 호랑이가, 발톱을 드러내고 몇 번 포효해보지도 못했는데 바로 자기 딸한테 한 방 먹어서 꼼짝 못하게 되었다.이게 뭐야? 진북후가 일부러 콧대 높은 분위기를 만들어서 황제가 애가 탔는데, 결국 황제가 호강연을 가지고 진북후의 애를 태우게 된 거 잖아?이건 진북후 인생에 찬물을 확 끼얹어 투지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것이다.진북후는 황제보다 고작 한 살 많은데, 황제의 장인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맙소사, 받아들일 수 없다.하지만 서럽게 울면서도 여전히 맹렬하게 타오르는 분노로 가득한 딸 얼굴을 생각하면 진북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심지어 딸은 진북후에게 최후 통첩까지 했다. 만약 황제가 딸을 원하지 않으면 딸은 바로 출가해서 비구니가 될 것이다.이게 뭐야? 진북후가 딸을 황제에게 바치는 것도 모자라, 비굴하게 황제더러 자신의 딸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라는 거야? “안돼, 차라리 비구니가 되는 편이 입궁하는 것보다 나아.” 진북후가 매정하게 마음먹기로 했다.호강연은 결심했다는 듯 아버지에게: “결국 그러시다면 내일 절 명월암으로 데려가 주세요, 날 설득할 생각하지 마세요, 전 마음을 이미 정했으니까 아무도 설득 못해요.”말을 마치고 호강연은 눈물을 훔치며 돌아갔다.진북후는 멍하니 아무 생각도 못하고 노모를 바라봤다.노마님이 손을 놓는데 그녀라고 무슨 방법이 있을까? 어찌 되었든 호강연을 좋아
호소장군의 명쾌한 답그런데 호소장군은 덤덤하게, “폐하께 시집 보내는 게 어때 서요? 그게 강연이가 마음속으로 바라마지 않는 일이고 폐하도 노친네는 아니잖아요, 아직 젊고 독보적으로 귀티 나고 위엄이 넘치고 보기엔 30대 정도로 밖에 안 보여요.”“애비가 고작 황제보다 한 살 어려.” 진북후 성을 냈다.호소장군이 흠칫 하며, 아버지를 자세히 보고 쯧쯧 혀를 차며: “정말 입니까? 맙소사, 아버지는 60은 되 보이는데 어떻게 폐하와 한 살차이밖에 안 나죠, 열 몇 살은 더 들어 보이는데?”“진북의 바람이 심하고 아비는 나라를 위해 고심하다 젊은 나이에 이렇게 된 것이지.” 진북후가 펄쩍 뛰었다.비록 남자는 외모를 중시하지 않지만 영웅의 기개는 늙지 않아서, 진북후는 40이 넘었어도 마음도 있고 힘도 있고 처첩을 얼마든지 거느리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폐하께서도 매일 국사로 여념이 없으실 텐데요? 이건 아무래도 바탕의 문제 같지 말입니다.” 노소장군이 갑자기 근심스런 얼굴로 뚫어지게 진북후를 보며, “아버지, 소자 아버지의 친아들입니까?”“너 지금 무슨 소리야?” 진북후가 손바닥을 허공에 내리쳤으나 부딪히는 게 없고, “너와 네 동생은 나와 네 어미의 소생이지.”“그게 슬픈 겁니다. 앞으로 제가 아버지 닮을 까봐 격정이에요, 사십에 60살같이 겉늙어 버리다니.”진북후가 열 받아서 흥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 아들과 입씨름은 됐다. 부자가 예전엔 서로 죽이 잘 맞아서 이렇게 농담처럼 주고받았지만 오늘은 너무 고민이 돼서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호소장군도 진지하게: “아버지 근심하실 게 뭐가 있습니까? 비가 되는 게 나쁠 게 뭐가 있어요? 동생의 성격과 무공을 봐선 궁에서 누가 동생을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폐하는 아버지때문에 라도 동생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지만, 그 애송이 녀석은 젊은 혈기를 부리고 동생의 거친 성격에 경솔할 게 분명하니 둘이 같이 지내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 대서 도리어 아버지가 걱정하지 않을 날이 없을 겁니다.”진북후가
원경릉을 찾아온 호강연목여태감 찻물을 가지고 들어왔다가 다시 물러났다.명원제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그럼 자네는 영애의 혼사에 대해 바라는 게 있는가?”진북후는 침을 꿀꺽 삼키고 명원제의 얼굴을 봤다.저 얼굴엔 왜 주름이 별로 없지? 이목구비가 어떻게 저렇게 잘 생겼어? 친왕이 전부 황제를 닮았으니 하나하나 재주가 뛰어나고 단정한 거군, 진북후가 젊은 시절에 황제를 본 적이 있는데 경성에서도 1,2위를 다툴 정도로 잘 생긴 얼굴이었다.진짜 사람 나름이고, 압도적이다.“응?” 명원제가 차가운 눈빛을 반짝이며 날카롭게, “왜 멍하니 있어?”진북후는 얼른 정색하며, 오늘 반드시 이 일을 정리해야 하는 걸 알았기에 탄식하며: “사실 신이 딸의 생각을 오해했습니다. 딸은 초왕 전하에게 시집가고 싶은 게 아니었습니다.”“어? 그럼 누구와 혼인하고 싶다는 건가? 누가 마음에 들었지?” 명원제가 마음이 크게 놓이며, 보아하니 진북후의 본심은 원씨나 다섯째를 괴롭히고 싶었던 게 아니었구나. 그냥 딸바보 였군.진북후는 한동안 우물쭈물거리며, 명원제가 기다리다 열이 받을 즈음에 비로소 모기만한 소리로: “딸이 입궁하여 폐하의 시중을 들고자 합니다!”명원제가 진북후 얼굴에 차 한 모금을 뿜고 말았다.진북후가 가볍게 닦아 내더니 또박또박: “폐하 크신 은혜 감사하옵니다!”진북후는 마지막으로 깊고 부드러운 눈으로 사위를 한 번 쳐다보고 물러났다.진북후가 입궁해서 큰 일을 치르는 그때, 호강연은 할머니와 초왕부에 가서 초왕비에게 구해준 은혜에 답례하고 있었다.초왕부에서 불법으로 이틀을 머물고 있던 원경릉은 결코 호씨 집안의 아가씨가 직접 쳐들어 오리라고 상상도 못했다.만아가 잘못 듣고 호 아가씨가 온다고 하는 게 아닌지 생각할 정도였다.원경릉이 초스피드로 화장을 하는데 각종 연지분을 얼굴에 찍어 바르려고 섞었지만 사실 바르지 않아도 그럭저럭 괜찮고 또 씻을 생각하니 귀찮았다.옆에서 엎드려 쉬고 있던 남의 매 대신 맞아주는 우문호가: “안 바르는 게 더
이상한 호강연원경릉이 호강연을 보니 말할 수 없은 이상하고 어색한 마음이 들었다.호강연의 눈은……태후의 눈빛과 비슷하게 다정하고 자애로웠다.“고마워요.” 원경릉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호강연이: “임신에 도움이 되는 약을 가져왔어요, 아이에게 줄 작은 장난감도 준비했고요, 좋아하셨으면 좋겠네요.”호강연이 말을 하며 일어나 직접 가져온 선물을 깠다.원경릉이 보니 귀한 보약에 장난감까지, 원경릉이 약간 놀란 건 딸랑이와 천으로 만든 공을 제외하고 나머지 장난감은 모두 무기였다.진 채찍, 비수, 암기가 들어있는 상자, 피리, 그런데 이 피리는 은밀한 기관을 감춘 것 같다.과연 호강연이 피리를 들고 3번째 구멍을 막고 ‘삐’불자 은침이 날아가 문짝에 딱 꽂혔다.원경릉이 입을 딱 벌리고 아무 말도 못했다.“별로 예요?” 호강연이 말했다.“좋아요, 좋아해요.” 원경릉이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보니, 또 자상한 어머니처럼 바라보는데 온화함이 눈에서 뚝뚝 흘렀다.다음 상황은 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호강연이 노마님 역에 완전 몰입한듯 연기하며 원경릉의 손을 잡고 이걸 주의해라, 저걸 주의해라, 이걸 먹어라, 저거 먹으면 안된다. 원경릉은 마치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처럼 원래 뽐냈던 고자세가 다 움츠러들며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네, 알겠어요 하고 있다.그 사이 희상궁이 약과를 가져와서 여러 접시에 나눠 손님께 권하는데, 원경릉이 산사약과를 집자 호강연이 원경릉의 손목을 잡으며 잔소리하길: “임산부는 산사를 먹으면 안돼요?”의사인 원경릉이 영문을 몰라서: “왜요?”“산사에는 막힌 기를 뚫고 어혈을 푸는 효능이 있어 임산부에게는 맞지 않아요.” 호강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런 상식도 몰랐어요? 이거 사람을 오라고 해서 시중을 들게 해야겠어요. 왕비마마께서 이러시면 제가 안심이 안돼요.”원경릉이 거의 두려운 눈빛으로 호강연을 보고 다시 희상궁을 봤다.희상궁도 갈피를 못 잡는 건 마찬가
염탐꾼 희상궁원경릉이 왕야에게 돌아가, 호강연의 오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얘기했다.그리고 조심스러우면서도 대담한 추측을 내놓았는데, “호아가씨가 설마 아바마마께 반한 건 아니겠지? 난 왜 그녀에게서 어르신 말투가 느껴졌지? 게다가 호아가씨가 오늘이 아니면 나에게 절하기 어렵다고 했어, 그럴 가능성은 없을까?”우문호가 다 듣고, 기분이 나쁘고 질투의 눈빛은 감추기 어려워, “무슨 눈빛이라고? 나는 마음에 안 들면서 아바마마 그 꼰대가 좋다고, 멋진 남자를 만난 적이 없군, 남자 보는 눈이 없네.”원경릉이 눈살을 찌푸리며, “아쉬워? 가서 얘기해 줄까?”우문호가 손을 내저으며, “됐어, 옆구리 찔러서 절 받기 싫어, 호아가씨에게 살 길을 열어준 셈 치지.”원경릉이 침대에 앉아: “이건 그냥 내 추측이야. 사실은 아니고 그냥, 난 원래 호아가씨가 교만하고 제멋대로 일거라고 생각했거든, 오늘 만나보니 그렇지 않았어, 겉모습만 보고 떠도는 소문은 가짜구나 싶어.”“호아가씨는 어릴 때부터 진북에서 자랐어, 소문이 경성까지 들어오는데 천리길이 떨어졌으니 차이가 나도 이상할 건 없지.” 우문호는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높다며 마음 속으로 자기도 모르게 좋아했다.“안되겠어, 희상궁을 시켜 좀 알아보라고 해야지.” 원경릉이 말했다.우문호는 원경릉이 나가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서 노래를 흥얼거렸다.희상궁이 우문호의 명패를 들고 입궁했는데, 명목은 태상황에게 초왕비의 상태를 보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태상황 쪽은 별다른 정보를 탐문하지 않았다.희상궁은 목여태감을 찾아갔다.목여태감이 희상궁을 한쪽으로 끌고가서 목소리를 낮춰: “모르겠어요, 오늘 진북후가 가고 폐하께서 계속 안 나오시고 내가 들어가서 시중들며 보니 안색이 아주 어둡고 때때로 고함소리가 들리는데 고함소리가 애처롭고, 때때로 물건을 던지는데 상소문이고 벼루고 전부 던져서 콰당콰당 하는데, 심지어 냉정언 대인이 왔는데도 보지 않으시고 누구한테 화를 내시는 건지 모르겠어요.”“진북후가 뭐라고 했는데
호강연의 결심희상궁은 굳게 마음을 먹고 출궁했다.이 때 명원제는 목여태감에게 들어오라고 하더니 어두운 낯빛으로: “방금 널 불렀는데 어째서 자리에 없었느냐? 어딜 갔었어?”목여태감이 지금은 폐하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사실대로 고하며, “폐하께 아룁니다. 희상궁이 입궁하여 문안하기로 소인이 감히 들어오라 하지는 못하고 밖에서 몇 마디 나누었고, 희상궁이 폐하의 안부를 여쭈었습니다.”명원제의 눈이 음흉해 지며, “희상궁이 문안을? 궁에 들어가서 상황을 살펴보라는 사주를 받았나 보지?”명원제는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답답한 게, 원래는 다섯째의 후궁이 될 사람이 지금 자신의 비가 되려 하다니 참으로 돌고 돌아 명원제가 다섯째의 짐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목여태감이 사실대로 말할 엄두를 못 내고 대신 은근히: “하지만 희상궁은 다른 것을 물었습니다, 입궁해서 태상황 폐하께 왕비마마의 상태를 보고하는 김에 와서 문안 드리는 거라 했습니다.”명원제가 짜증을 내며: “나가, 썩 꺼져!”목여태감이 허리를 숙이고 물러나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명원제는 아직 흔들리고 있는 휘장을 보는 미간에 내 천(川)자가 깊이 패인다.명원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 것이 그 꼬맹이 녀석이 왜 궁에 들어오려고 하는 걸까?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아닌 게 확실한 게, 외모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명원제가 어디 가서 뒤지는 사람은 아니다.하지만 분명한 건 그 꼬맹이에겐 더 나은 선택이 있다는 사실이다.이리 저리 생각해 봐도 그 녀석이 바보 멍청이 같고 명원제 자신의 마음을 모르겠다. 그래서 직접 호강연과 얘기해 보기로 했다. 선배로서 황제라는 신분으로 인생에는 선택할 수 있는 많은 길이 있고, 아버지와 집안 사람을 걱정시켜서는 안되며 가장 중요한 건 황제를 근심하고 번뇌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려주리라.명원제는 어명을 내려 호강연에게 들라 했다.호강연이 어명을 듣고 족히 10초는 멍하니 있었다.호강연의 얼굴이 조금씩 발그스레해
호강연과 황제의 만남호강연은 대략 향 하나가 탈 정도 시간을 마음을 다잡는데 보내고 겨우 마차에 올랐다.입궁하는 길 따그닥따그닥 말굽소리보다 쿵쿵거리는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가 더 컸다.호강연은 손수건을 꼭 쥐고 최대한 즐거운 상상을 하며 마음을 가볍게 하고 싶었지만 머리 속에 뭐가 생각 날 리가 있나? 온통 잘생기고 위엄 넘치는 그 얼굴로 가득하다.호강연은 상궁의 믿음직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한숨을 내쉬며: “상궁,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야, 내 나약함으로 망쳐버릴 수는 없어.”상궁이 가볍게 호강연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렇다면 아가씨 조금만 더 용기를 내세요. 폐하께 아가씨 마음속의 얘기를 하게요.”호강연은 자신의 손가락을 꽉 쥐고, 더 꽉 쥐었다. 그렇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다.자신의 미래는 자신이 쟁취하는 것이다.두툼한 노란 벽돌담에 금빛 찬란한 유리 기와, 부귀와 권위가 흘러 넘치는 짙은 붉은색 궁문, 돌계단을 밟을 때 호강연은 자신의 어릴 때 꾸었던 꿈에 한발짝 다가서고 있음을 느꼈다.그녀의 마음은 어느새 굳건해 지기 시작했다.호강연은 어서방 문 앞에 다다르자 다시 한번 깊이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들고 목여태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호강연이 사뿐사뿐 반짝거리는 하얀 돌판을 걸어가는데, 신발코에 진주가 치마 끝에 가려 보였다 가려졌다 하며 한걸음 한걸음 9년간 사모하던 사람에게로 다가갔다.걸음을 멈추고 꿇어 앉아, “호강연 폐하를 뵙습니다.”명원제는 낮게 꿇은 자세를 보고 마음이 안돼서 흘끔 보고: “됐다. 일어나거라.”“감사합니다. 폐하!” 호강연이 손수건을 쥐고 일어나 손을 가지런히 했지만 황제를 보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명원제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 꼬맹이와 얘기하는 게 태상황과 얘기하는 것보다 스트레스가 크다고 생각하며, “네 아버지가 네 결혼 문제로 오늘 입궁했었다. 짐이 생각하기에 네 아버지가 노고가 크고, 너도 어릴 때부터 자라는 것을 봐온 지……”호강연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부리부리
현대로 돌아가 가족과 한자리에 모이니 모두 즐거워 보였다. 원경릉은 집안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아이들을 데리고 휘종제와 건종 태자를 알현하러 갔다.휘종제와 건종 태자도 매우 기뻐했는데, 특히 아이들이 유학하러 와서 앞으로 여기서 산다는 얘기에, 휘종제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앞으로 아이들에게 드는 모든 비용은 전부 자기들이 대고 방학에 북당으로 보내고, 개학 때 맞이하는 것도 자기들이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외갓집엔 모두 출근하는 분들 뿐이라 불편할 거라는 것이었다.원경릉은 일단 감사드리고 북당에서 가져온 술과 검, 궁에서 가져온 흙 한 줌과 돌 하나를 꺼내놓았다. 이건 우문호가 준비한 것으로 고향을 오래 떠나 있는 사람은 고향의 흙과 돌이 그리운 법이라고 했다.휘종제와 건종 태자가 흙과 돌을 보더니 손에 들곤 통곡하기 시작했다.원경릉이 두 사람을 위로한 뒤, 그들은 슬퍼하며 ‘언제 한 번 가볼까, 딱 한 번 보더라도, 아무도 만날 수 없어도 좋을 텐데.’라고 한탄했다.“긴 세월 고향 강산을 꿈에도 잊지 못했으나 돌아갈 수는 없었네..”원경릉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이 시큰해졌다. 휘종제와 건종 태자의 슬픔을 원경릉은 아주 잘 아는 것이 자신도 전에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단지 그들이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원경릉도 뭐라고 단정내리기 어려웠다. 어쨌든 이건 안풍 친왕이 진행한 일로 정말 돌아가고 싶으면 아마도 안풍 친왕이 준비해 줄 수 있었다. 북당으로 돌아가면 안풍 친왕에게 상황을 봐서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입학 준비를 마친 뒤, 원경릉은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아이들과 떨어지기 싫었지만, 아이들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충만했기에 그녀와 헤어지는 걸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원경릉은 그 점이 씁쓸했다.아이들이 크면 놔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얘들은 아직 다 안 컸잖아.돌아가기 전에 원경릉은 양여혜에게 만나자고 했는데 양여혜가 기화를 데리고 올 줄 몰랐다.원경릉은 기화를 보자 머리가 아픈 게, 기화는 또
‘이제 어머니가 계시니 술 먹으면 몸 상한다고 말해? 예전에는 왜 말 안 했어?’다행히 누군가 같이 마셔주는 사람이 있었다. 회왕은 벼슬에 오른 뒤로 술을 조금 하기 시작했는데, 많이는 안 마시고 한두 잔만 마실뿐, 석 잔째면 아내를 보러 집에 갔다.즐겁게 박원과 소홍천을 보낸 우문호와 원경릉은 만두와 아이들을 유학 보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비록 환타와 칠성이는 아직 어려서 2년 정도 더 남아있었지만, 유치원 다니고 싶다고 소리를 지르며,형들이랑 꼭 같이 가겠다고 하도 고집을 부려 원경릉과 우문호는 골치가 아파졌다.그나마 우문호에게 약간 위로가 된 건 딸만큼은 곁에 있다는 사실로, 칠성이와 환타가 하도 졸라대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가가, 다 가.”아이들은 기뻐했으나 눈 늑대와 호랑이도 여전히 성깔을 부리며 따라가겠다며 소란을 피웠다.현대에서 어떻게 호랑이와 눈 늑대를 키울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였다. 게다가 이 동물들은 아주 영민해서 사람 일을 이해해, 꼬마 주인들이 이번에 가면 열흘 보름이 아니라 몇 년 있다가 온다는 걸 알고 아무리 혼을 내도 말을 안 들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만두가 이리저리 구슬려서, 동물들에게 자기들에겐 여름방학, 겨울 방학이 있고 학기 중에도 쉬는 날이 있어서 1년에 합치면 적어도 4개월은 이쪽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적어도 1년에 절반 가까이는 같이 있는 거라고 위로하자 겨우 잠잠해졌다. 비록 시공간은 떨어져 있어도 같이 자라기를 원할 것이다. 유학을 가는 일이기 때문에 원경릉이 직접 따라가서 진학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이 일은 전에 현대에서 언급한 적이 있어, 로양이 아이들에게 호적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물론 아이들을 호적에 올리려면 원경릉 부부도 호적에 올려야 하는 것이, 아이들을 오빠 이름 아래 입적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이 일은 로양이 원만하게 처리해 원경릉 가족 모두 호적을 가지게 되었다.게다가 원래 집을 사뒀기 때문에, 부근 학군에 진학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원경릉은 다섯
대오가 경성으로 돌아올 때 홍엽도 원숭이와 같이 돌아왔는데, 그도 풍도성에서 힘을 보탰다. 사실 홍엽이 안 가도 안풍 친왕이 모든 걸 다 준비해 둬서, 안풍 친왕 능력이면 안지여 정도 상대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이리 나리 일행은 경성에 도착해, 우선 집으로 돌아가 공주와 천행이를 보고 가족이 함께 밥을 먹은 뒤 입궁해서 경과를 보고했다.사적인 원한은 한두 마디로,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지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으며 아직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남은 건 정사를 논하는 것이었다.“어머니와 같이 풍도성에서 보름 정도 지내며 기본적인 민심을 파악했는데, 천문 세가는 백성들 사이에서 아직 명망이 높아 보입니다. 풍도성 백성들은 사실 세금이 너무 많고 경제가 번영한 성과가 전부 안지여 수중에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어 안지여의 통치에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풍도성을 접수한 것에 백성들 대부분은 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천하태평이냐 하면 그럴 순 없는 것이, 일부는 성주가 자기들의 황제라 여기고, 조정이 풍도성을 접수한 것이 풍도성이 침략당했다고 여겨 나중에 약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부를 임명하실 때 신중하셔야 할 것입니다.”우문호가 말했다. “흠, 큰할아버지께서 천거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박원이라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그러자 이리 나리의 눈빛이 빛났다. “제 아버지가 추천한 사람이니 전 찬성입니다!”“아버지?” 우문호가 의아해하며 이리 나리를 쳐다봤다. ‘안풍 친왕비가 사부님이면 안풍 친왕은 사부의 남편 아닌가? 어떻게 아버지가 되지? 사부님의 배우자니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지 않나?’“흠, 안풍 친왕은 제 아버지십니다!” 이리 나리는 더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어쨌든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 부른 적 없지만, 마음속에서만큼은 진정한 아버지였다.“하하하!” 우문호도 그저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이리 나리가 퇴청할 때 우문호가 이리 나리를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무
“우선 박원이랑 소홍천 의사부터 물어보자. 억지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동안 그들이 날 많이 도와줬으니 전부 원하는 대로 하자고.” 우문호가 말했다.“그러자!” 원경릉이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저녁 애들 데리고 어머님께 가서 수라를 들려면 빨리움직여야 해. 꾸물대면 늦을거야.”그러자 우문호도 계란이를 안고 일어섰다. “그래, 우리 황조모한테 가서 맘마 먹자.”우문호가 나가서 부르자 아이들이 달려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수라를 들러 황태후 전으로 갔다.황태후는 원래 우문호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식사 자리에 아이들이 있어서 기다렸다가 저녁을 다 먹은 뒤 우문호와 아이들이 나가서 놀고, 원경릉이 황태후와 얘기를 나눌 때 말을 꺼냈다.“천행이가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부마를 풍도성으로 보낼 수가 있지.. 공주가 얼마나 괴로웠을까.”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공주는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서, 이리 나리께서 풍도성에 가는 걸 지지하셨는걸요.”“말은 그렇게 해도, 출산 후에 여자 곁엔 남편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이것도 단지 우리 가족끼리 하는 얘기일 뿐이고, 조정 일을 내가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노릇이지.”황태후는 이리 나리가 풍도성으로 간 진정한 목적을 전혀 몰랐으며, 단순히 어지러운 형국을 정리하러 갔다고만 알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공주를 아끼는 마음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어마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이리 나리는 이미 돌아오는 중이래요.” 원경릉이 위로하자 황태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잘됐네!”온 가족이 별빛을 받으며 천천히 소월궁을 거닐었다.계란이는 아빠 품에서 잠이 들었고, 아이들은 놀다 지쳐서 아빠 엄마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으며, 목여 태감이 궁인 둘을 데리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가운데, 궁 안은 인적이 드물어 밤이 되자 상당히 고요했다.“어마마마께서 공주를 아끼셔서, 이리 나리가 하필 이때 풍도성에 보냈냐고 하셨어.” 원경릉이 말했다.“날 원망하셨어?” 우문호는 품에 있는 아이가 깰
늑대파 사람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소여쌍은 여전히 미친사람처럼 웃어대기만 했다.이리봉청은 그들이 끌려 나가는 것을 보자, 눈앞에 안지여가 자신을 데리고 소여쌍의 침대 앞으로 가서 소여쌍의 그 악랄한 말을 듣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리여리하고 아름답던 그녀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게 꿈처럼 느껴졌다.풍도성을 접수한 뒤 안풍 친왕은 관리들을 새롭게 임명했고, 더 이상 성주 같은 것을 두지 않고 조정과 이부에 적합한 인사를 선발해 풍도성 지부로 앉힐 것을 요청했다. 풍도성은 더 이상 이전의 독립 자치 지역이 아닌, 다른 주나 현과 마찬가지로 조정에 귀속되어 통일서 있게 다스리게 되었다.더불어 안풍 친왕은 별도로 서신을 써서 황제인 우문호에게 보냈는데, 풍도성을 추천하지만, 이건어디까지나 건의와 추천이니 황제가 생각하는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안풍 친왕의 추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동시에 안지여의 잔당들이 계속 나타났다.안풍 친왕이 이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 호랑이와 눈 늑대, 회색 늑대까지 출동시킨 건 바로 모든 세력을 강화하고, 신속하게 진압해 풍도성을 조정에 복귀시키고 보름 만에 비적을 토벌하며 기본적인 숙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박원은 잔당의 남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안풍 친왕의 영패를 가지고 부근에 5천 명의 군사를 파견시켜 풍도성을 지켰다. 이리 나리는 자금을 지원해 천문 세가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전 무덤은 안지여가 고른 곳으로 폐허에 가까워, 그는 천문 세가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았다.풍도성에 온지 거의 한 달가량 될 때쯤, 대군은 경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돌아가기 전에 미색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보러 갔다가, 돼지우리에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로소 맺혀 있던 한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미색은 이리 나리와 어머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두 사람은 이미 안지여가 누군지 잊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리봉청에게 있어 모든 건 지나가지 않았고, 36년 전 일은 여전히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어머니,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어요?” 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어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리봉청이 다시 되묻자 이리 나리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처분하라고 하면 전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이리봉청은 알았다며 대답만 했다가, 다시 30분쯤 걷다가 정자에 앉아 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난 안 죽일 거야.”이리 나리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또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야.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사실 며칠 동안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인간을 백번이라도 죽이겠지만, 난 그럴 수 없더구나. 아들아, 게다가 오늘 천문 세가 대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더욱 마음을 굳혔단다.”이리봉청이 일어나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원래 온통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이였다. 그들의 웃던 광경이 눈앞에 비치는가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천문 세가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멸문지화를 당했고, 가엾게도 그 중엔 아이들이 많아서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이리봉청의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자와 소여쌍을 밖에 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해. 죽게 두지 말고 계속 살려둬. 36년은 더 살면서 이 세상의 고생을 모두 겪어야,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고 억울한 망자들도 안식에 들지!”이리 나리는 온몸으로 그 마음이 느껴져,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네, 전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안지여와 소여쌍은 버려졌다. 짧은 며칠 사이에 안지여는 의기양양하던 성주에서 시궁창 쥐로 변해, 사람들이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