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비와 제왕비가 보낸 선물이 도착하였다.기왕비는 비취로 만든 관음(觀音) 보살 조각상을 보냈다. 조각상은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웠으며 값도 꽤 나가 보였다. 기왕비는 최상품의 조각상을 구하려다 살림 밑천이 거덜 날 뻔했다. 사실 중등품의 조각상을 선물했어도 원경릉은 구별하지 못했을 테지만,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왕비는 무리해서라도 최상품을 준비했다.이에 비해 제왕비인 주명취가 보낸 선물은 초라했다.선물 상자를 열어보니 인삼 두 뿌리에 당귀 몇 개뿐이었다. 주명취는 실리를 따지는 사람이다. 그녀는 원경릉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원경릉이 임신한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서지간에 아무것도 선물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게 티가 나니까 대충 구색에 맞게 준비를 했다. 주명취는 어차피 선물한 약재도 초왕비가 먹지 않을 것이기에 질 좋은 약재를 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기상궁은 관음보살을 들어다가 잘 보이는 곳에 옮겨 두고, 마른 걸레로 닦다가 보살의 등에 금이 간 것을 발견했다. 금이 간 부분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비취의 무늬라고 여기기 십상이었다. 무릇 불상조각은 완전무결해야 한다. ‘금이 간 관음을 보낸 이유가 뭘까?’기상궁은 화가 나서 희상궁에게 말했다. “이 일을 왕비님이 신경쓰지 않게 왕야께 말하는 게 좋겠네.” 희상궁이 말했다.“기왕비가 우리 왕비님을 너무 업신여기는 거 아니야? 저주를 하다니! 음흉해!”기상궁이 화를 냈다.기상궁은 평소에 상전을 비난하는 말을 잘 하지 않는데, 이번 일에는 화가 많이 났는지 계속해서 기왕비의 욕을 했다. 두 상궁 모두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관음에 흠집이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왕비의 방안에 두었다면……’기상궁과 희상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희상궁도 이번 일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기왕비의 잘못을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녀는 관음을 받자마자 금이 간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게 한이였다. “일단 거기에 두자고.” 희상궁이 말했다.우문호
내딛는 한 걸음에 생사가 달라지고, 뱉는 말 한마디에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워진다. 우문호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기왕비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굳은 표정을 숨겼다.우문호가 안으로 들어오자 기왕비는 병을 핑계로 침상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다섯째 왔습니까.”우문호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몸조리하시는데 이렇게 찾아와서 송구합니다. 본왕이 형수님께 여쭐 게 있어서요. 형수님 부디 솔직하게 답해 주십시오”“괜찮습니다. 곧 죽을 사람이 숨길게 뭐가 있겠습니까.”우문호는 금이 간 관음보살 조각상을 선물해놓고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기왕비를 보니 피가 거꾸로 솟았다. “형수님, 낙담하긴 아직 이릅니다. 병에 걸렸다고 다 죽는 건 아니니까요. 제시간에 약 챙겨 먹고, 어의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이삼 년은 거뜬히 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가시 돋친 우문호의 말에 기왕비는 화가 나서 손에 쥐고 있던 백자(白瓷)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한순간에 창백해져 뼈가 도드라져 보였다.우문호는 사적인 감정을 숨기고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유후궁이 큰형수에 핍박을 못 이겨 자결했다는 익명의 제보를 받았습니다.”“내가 무슨 이유로 그랬겠습니까?” “제보에 따르면 아이를 낳을 수 없어진 형수께서 유후궁이 아들을 낳을까 봐 걱정했고, 유후궁을 죽이면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 유후궁의 약점을 잡아 스스로 죽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이 말을 듣고 기왕비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숨을 고르더니 미소를 지으며 우문호를 보았다.“다섯째는 그런 엉터리 소문을 믿는 겁니까?”“제보가 들어온 이상 본왕은 진위를 밝혀야 합니다. 형수께서 부인을 하신다면 이는 무고(诬告)이니 조사를 철저히 해야겠죠.”“조사를 한다고요?” 기왕비가 차갑게 웃었다.기왕비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조사가 시작되면…… 설령 무고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항간에는 그녀가 유후궁을 협박해
우문호는 어린 시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네가 옮겼다는 관음보살은 어떻게 생겼느냐? 색깔은 무슨 색이고?”“어…… 그게……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옥 백색이었던 것 같습니다……”어린 시녀는 덜덜 떨며 그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우문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기왕비를 보았다.“형수님께서는 본왕을 바보로 아시는 겁니까?”기왕비의 동공이 흔들렸다.“다섯째,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사건 조사를 계속해야겠다는 뜻입니다.”기왕비는 싸늘한 눈빛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천천히 폈다.“제상궁! 네 죄를 네가 알 테다!” 기왕비가 호통을 쳤다.어린 시녀를 때리던 상궁이 창백해진 얼굴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제상궁은 기왕비가 혼인할 때 데리고 온 상궁으로 기왕비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기왕비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한 사람이다. “들어오거라!”우문호는 기왕비의 변명은 듣기 싫다는 듯 밖에 있는 호위를 불렀다.“예! 부르셨습니까!”“여기 제상궁을 끌고 가, 곤장 삼십 대를 치거라!”우문호가 말했다.기왕비는 침통한 표정으로 제상궁을 보더니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우문호는 피도 눈물도 없는 표정으로 기왕비를 보았다.기왕비는 처량하게 웃으며 “미천한 상궁이 벌인 일로 이렇게 화를 내실 필요가 있으십니까?”라고 말했다.“입장을 바꿔서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우문호가 한숨을 내쉬었다.기왕비는 그를 노려보며 고개를 저었다.“왕야께서 이렇게 여자들 문제에 관심이 많으신지 몰랐네요. 하지만 여자들끼리 싸움에 남자는 끼지 않는 것이 좋죠. 이렇게 끼어드신다면 속 좁다고 욕먹습니다.”우문호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기왕비를 노려보았다.“형수께서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으니, 저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앞으로 제 부인의 손 끝하나라도 건드리신다면 본왕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여자들의 싸움이요? 싸우고 싶다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제가 응수해 드리겠습니다.”이 말을 듣고 기왕비가 크게 웃더
제상궁은 눈물을 훔치며 기왕비를 보았다.“왕비 쇤네 때문에 슬퍼하지 마세요. 몸이라도 상하실까 걱정입니다. 쇤네는 괜찮습니다.”기왕비는 분노와 슬픔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 치욕은 반드시 복수할 거야.”제상궁은 한숨을 내쉬며 “초왕이 이런 사사로운 작은 일로 이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습니다. 몇 마디 주의로 끝날 줄 알았는데…… 왕비님 초왕을 조심하세요. 그는 왕비님의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유후궁에 대한 것도 알고 있으니 지금은 조용히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지금 그는 태자가 될 줄 알고 저렇게 기세가 등등한 것이지. 만약 뱃속에 그 아이가 없어진다면 과연 지금처럼 오만방자하게 굴 수 있을까?” 기왕비가 차갑게 말했다.“왕비. 이 일에 손을 떼시는 게 좋겠습니다. 궁에는 보는 눈이 많습니다. 만약 잘못된다면 변명의 여지조차 주어지지 않을 겁니다.” 놀란 제상궁이 기왕비를 말렸다.“걱정 마.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않을 거야. 듣자 하니 원경릉이 자금탕을 먹어서 태아가 불안전하다던데, 이때를 틈 타 그녀를 화나게 하거나, 놀라게 한다면 태아는 금방 떨어질 것이야.”“맞습니다.” 제상궁이 음흉하게 말했다.그 시각 초왕부.왕부로 돌아온 우문호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이를 본 탕양은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왕야. 기왕비는 음흉하고 악독한 사람이니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본왕이 기왕비를 건드린 것도 아닌데, 소란을 피울 이유가 있겠는가? 그리고 상태를 보아하니 원경릉이 아이를 순산하는 것도 못 보고 갈 것 같더구먼…… 제 코가 석자인데 누굴 신경 쓸 겨를이 있겠느냐?”우문호의 말을 들은 탕양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원경릉은 이번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계속 구역질만 해댔다.‘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도 이렇게 괴로웠으려나? 만약 그랬다면 정말 죄송스럽구나……. 엄마에게 은혜도 갚지 못하고 이곳으로 오다니……’그녀는 입덧이 심해서 며칠 동안 음식은 입에 갖다
눈물을 흘리는 원경릉을 보자 우문호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우문호, 나 집에 가고 싶어.” 원경릉은 그만 울음을 떠트리고 말았다.그녀는 집이 그리웠다. 엄마가 정성껏 만들어 준 음식, 외손주를 위해 하나하나 소중하게 고른 손바닥만 한 옷과 양말, 엄마의 정겨운 잔소리…… 그 모든 것이 그리웠다.그녀는 문득 시공간 속에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알까?’우문호는 그녀가 조모를 그리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눈물을 닦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래, 그래. 내가 녹주한테 말해서 조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할게. 조모님께 부탁해서 여기 있다 가시라고 할게. 어때?”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더욱 서럽게 울었다.우문호는 원경릉이 왜 이렇게 우는지 영문을 몰랐다. 그는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며 마음이 괴로웠다. 그때 희상궁이 깜짝 놀란 얼굴로 들어왔다. “왕야! 태상황님께서 오셨습니다!”“뭐?” 우문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진짭니다! 밖에 사람들이 와있으니 희상궁보고 먼저 나가보라고 하겠습니다.”기상궁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맙소사, 태상황이 얼마 만에 궁 밖으로 나오신 거지? 태상황이 초왕비를 보러 나온 건가?원경릉은 울음을 그치고 우문호를 마주 보았다. ‘이거…… 실화냐? 태상황님이 오셨다고?’황후와 현비는 몰라도 태상황님이 오실 리가 없었다. “평상복을 입으셨어?” 우문호가 물었다.“아니요. 의장을 입고 오셨습니다.”“나 나갔다가 올게.”우문호가 원경릉에게 말했다.그는 쏜살같이 뛰어나갔다. 밖에 나가니 의장을 입은 태상황과 상선이 함께 걸어오는 것이 보였고, 그 뒤에는 의경들과 수많은 궁인들이 줄줄이 서있었다. “황조부님을 뵙니다.” 우문호가 고개를 숙이고 정중히 인사를 했다.태상황은 검은 반룡포에 관을 썼고, 깔끔하게 수염을 민 모습이 왠지 모르게 활기차 보였다. 그의 걸음걸이는 사뿐하고 가벼운 것이 오랫동안 병에 시달리던 사람 같지 않았다.
태상황은 최근 2년 동안 애가 탔다. 병든 여섯째, 장님인 여덟째,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아홉째, 그리고 나머지 친왕들은 모두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조급했다. 그는 매번 명원제 앞에서 증손자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효자인 명원제도 태상황의 재촉에 덩달아 마음이 조급해졌다.그리하여 정세를 읽은 조정의 신하들은 친왕들 중에 누가 아들을 낳아서 태자가 될 것인가를 추측했다.“이리 가져오거라!” 태상황이 상선에게 말했다.상선은 뒤에 서있던 궁인에게 식합(食盒)을 가져오라고 하더니 그것을 희상궁에게 전해주었다.“이것은 태상황님께서 왕비에게 하사하는 것이니, 상궁이 왕비께 드리세요.”희상궁은 두 손으로 식합을 받아들며“왕비는 지금 먹는 대로 토하고 있어서……”라고 말했다.“가져가거라. 한 입을 먹어도 두 입을 먹어도 상관없다. 태상황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가거라.”상선이 말했다.희상궁은 식합을 들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잠시 후 뒷걸음질로 물러났다.희상궁이 식합을 들고 들어오자 원경릉이 “태상황님께서는 가셨어요?” 라고 물었다.“아직입니다. 지금 밖에 계시는데, 태상황님께서 식합을 주셨으니 한술이라도 드세요.”원경릉은 얼굴을 찌푸리며 “못 먹겠는데……”라고 말했다.희상궁이 식합 뚜껑을 열자 안에는 희멀건 국이 있었다. 무언가 둥둥 떠있었고, 야자 향기가 났다. 희상궁은 수저에 국을 조금 덜어 그녀의 입에 가져갔다.“설탕물인가요? 세상에, 이런 건 못 먹는데” 원경릉의 미간이 한순간에 찌푸렸다. “숟가락에 혀라도 대보세요.”“이렇게 대충 먹어도 되는 건가요?”“입이라도 댔으니 어르신의 마음은 받으신 겁니다.” 희상궁이 웃으며 말했다.원경릉은 수저를 집어 핥더니 멍한 표정으로 희상궁을 보았다.“어? 이거 달지 않네요?”그녀는 침상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고 앉아서 식합 안에 국을 들이 마셨다. 희상궁은 그녀가 토를 할까 봐 걱정되어 급히 타구(痰盂)를 들고 왔다.원경릉은 가슴을
원경릉이 가마를 타고 오는 것을 본 태상황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쟤는 뭣 하러 여길 온 거야?”원경릉은 의장을 입은 태상황을 보고 놀랐다.‘나를 보러 오신다고, 저렇게 옷을 입고 온 건가?’우문호는 빠른 걸음으로 나가 원경릉을 안아들었다. 어의가 그녀의 상태를 보고 한 걸음도 땅에 발을 딛지 못하게 했기에 지금까지 목욕이든 식사를 하든 우문호가 안아서 이동했다. 원경릉은 과잉보호를 받는 느낌을 견딜 수 없어 그의 팔을 두드리며 “내려줘 내가 걸어갈게. 라고 말했다.“어의가 넌 걷는 것도 조심하랬어.” 그는 그녀를 의자 위에 앉히며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착각하지 마. 내가 왕부에 없을 때 맘대로 걸어 다니는 거 내가 다 알고 있어.”라고 말했다.“이렇게 움직이지 않다가는 걷는 법도 까먹겠다.”원경릉이 투덜거리며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태상황을 보며 “황조부 그렇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다.태상황은 그녀를 슬쩍 보더니 고개를 돌려 우문호를 보았다.“나가기 전에 침상에 묶어두면 되지 않느냐? 말을 듣지 않으면 매를 들어 다스리거라.”태상황이 말했다.“예, 기억해두겠습니다.”우문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씩 웃었다.원경릉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태상황을 보았다.“임신했다고 너무 안 움직여도 태아에게 좋지 않아요. 제가 제 몸은 더 잘 압니다! 그리고 전 의사라고요!”“아무리 뛰어난 의술을 가졌더라도 자신의 병은 자신이 고치지 못하는 법이지. 맞다! 국은 잘 마셨느냐?”국 얘기가 나오자 그녀의 눈에서 빛이 났다.“예!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안에는 제비집이랑 야자가 들어있는 것 같던데, 맞습니까?”“뭐가 들었던 좋은 것만 담았습니다. 먹으면 속도 편하고, 태아에게도 좋습니다.” 상선이 웃으며 말했다.원경릉이 맛있게 먹었다는 말에 우문호는 깜짝 놀랐다.“황조부, 국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어떻게 만드는 겁니까?”“그 정도 먹었으면 됐다. 너무 많이 먹어서도 안 좋아. 그럼 이만 난 셋째 얼굴 좀 보러 가야겠다.” 태상황이 느
“응, 확실히 좋아졌어. 토할 것 같지도 않고, 야자가 들어있는 것 같던데. 여기서도 야자를 구할 수 있나? 아무튼 속이 아주 편해.”경도는 북쪽에 위치해 있고, 지금은 가을이라 야자가 생산되는 곳이 없을 텐데…… 혹시 야자를 어디에 숨겨두고 있는 건가?“궁에는 없는 게 없다. 남방에서 생산되는 야자를 받기만 하면 되는걸? 태상황의 귀영위는 대단하다.”“귀영위?”“응 귀영위는 태상황 재위 때 성립된 곳으로 민간과 백관 사이를 살피며 소식을 캐거나 전했는데, 부황이 재위하자 귀영위는 태상황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하게 됐지.”원경릉은 건곤전에서 봤던 검은 옷을 입은 시위들이 생각이 났다. “말이 심부름꾼이지, 내 생각엔 태상황님이 소식에 밝은 것을 보니 귀영위들이 아직도 세상의 모든 소식을 캐고 있는 것 같아.” 원경릉이 말했다.“그렇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지, 어차피 조정에는 태상황님을 수 없어.” 우문호가 답했다.원경릉은 방금 우문호가 한 말은 희상궁에게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희상궁은 태상황의 곁에서 여러 해 시중을 들었으니, 아마도 그녀는 귀영위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내가 줄곧 너한테 숨기고 있었던 일이 있는데…….” 우문호가 원경릉을 보며 말했다.“말해! 나 오늘 기분 좋으니까, 첩을 얻거나 여자에 관한 일 빼고는 다 용서해 줄게.”“첩을 얻는 일은 아니지만, 여자에 관한 일은 맞다.”“주명취?” 원경릉이 우문호를 노려보았다.“주명취가 누구야? 모르는 사람이다.” 우문호가 어깨를 으쓱했다.원경릉은 그의 팔짱을 끼며 “잘 빠져나가는군”이라고 말했다.“주명취가 누구더라? 아! 제왕비를 말하는 거구나? 그 여자에 관한 일은 아니고, 기왕비에 관한 일이다.”“왜? 무슨 일 있어?”“그저께 기왕비가 관음보살을 선물로 보냈잖아.”“어. 예쁘던데? 귀한 물건이라고 휘상궁이 잘 보관한다고 가져갔어.”“그 조각상 등 쪽에 금이 가 있었어.” 우문호는 말을 하다가 화가 치밀었다.“금 갔어? 아까워라…….”원경릉을 실망한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