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의 고민제왕은 원경릉의 뒷모습을 보며 여전히 분노인지 모욕감인지 모를 감정을 느꼈다.제왕은 가지 않고 다섯째 형이 돌아오길 기다리기로 했다. 형에게 일러 바쳐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탕양이 사람을 시켜 차를 가져왔다가 제왕이 여전히 분통을 터트리며 있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제왕 전하, 왕바마마께서 방금 하신 말씀은 참으로 금과옥조와 같으니 조금이라도 들어주세요, 왕비께서는 전하를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나를 위해서? 말도 안돼는 소리 마라!” 제왕이 ‘흥’코웃음을 치며, “형은 아직 안 돌아왔나?”탕양이 고개를 젓고 나갔다.제왕이 맑은 차를 한 모금 마셨으나 머릿속이 복잡해 차 맛을 전혀 모르겠다.이상한 느낌이 스멀스멀 퍼졌다.제왕은 원경릉의 말을 믿지 않는다. 한 마디도 믿을 수 없다.그런데 왜 명취는 맹세하지 않은 거지?원경릉과 다툴 필요조차 못 느꼈음에 틀림없다. 저런 포악하고 야만적인 여자와는 따지지 않는게 맞다.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드는 건 왜 일까?명취가 제왕을 정말 단순히 이용만 하거나 속이는 걸까?그러나 명취는 제왕에게 잘한다. 부드럽고 현명하고 왕비가 갖추어야 할 모습 그 자체다.제왕은 결혼하고 1년간을 차례로 떠올려보았다. 제왕에 대한 주명취의 태도는 어느 하나 가릴 것 없이 완벽했다.아내가 할 일도 모두 해낼 뿐 아니라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제왕은 그래도 불만이 있나?불만은 없다. 단지 주명취에게 조금만 더 열정이 있다면, 부드러운 눈빛 말고 각종 정서가 담긴 눈빛 예를 들면 화났을 땐 분노, 즐거울 땐 희열의 눈빛, 질투할 땐……질투? 주명취는 거의 질투하지 않았는데 어마마마가 후궁을 들이겠다는 얘기를 했을 때도 온화하고 현숙하게 듣고 있을 뿐이었다.제왕의 마음이 일순간에 혼란스러워졌다.우문호가 돌아와서 탕양으로부터 제왕이 기다리고 있고 왕비에게 맞았다는 얘기를 들었다.우문호는 이 말을 듣고 동정을 표시했지만 마음 속으론 ‘쌤통’이라고 생각했다.일곱째 이 녀석은 사실
주명취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우문호우문호가 잠시 어리둥절했다. 머리에 똥만 들었는 줄 알았는데, 한 대 맞더니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나?우문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결국 난 주명취와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핵심은 내가 아니라 주명취한테 있어.”“왜?” 제왕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주명취는 나한테 시집오지 않을 테니까.” 우문호가 담담하게 말했다.“왜?” 제왕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둘은 처음부터 죽마고우였다.우문호가 웃으며 담담하게: “무슨 왜가 이렇게 많아?”제왕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으며, “명취가 형한테 시집가고 싶지 않다니, 형이 나보다 태자로 책봉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인 거야?”우문호의 눈빛이 순간 예리 해지며, “그걸 왜 물어?”“못된 형수가 그렇게 말했어.” 제왕이 조금 상심한듯, 아니 실은 꽤 상심해서 말했다.“넌 그 말 믿어?” 우문호가 반문했다.제왕은 잠시 침묵하더니, “말도 안돼!”“말도 안되는 일을 넌 왜 고민하고 있어?”제왕은 침울한 모습으로, 자기도 모르겠다.나쁜 형수의 말은 당연히 믿을 게 못된다.형수의 말은 다 거짓말이다.“호수에 빠진 일에 대해 형은 나쁜 형수 말을 믿어?” 제왕이 다시 물었다.우문호는 조금 참을 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 단번에 이렇게 첨예하고 심각한 인격 문제를 한꺼번에 들이밀면 정말이지 어떻게 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형, 동생은 형이 진실을 말해 주길 원해.” 제왕이 심호흡을 하고, “어떤 충격이든 지금은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우문호가 제왕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믿어.”“왜?” 제왕의 마음이 뭔가로 갈가리 찢기는 듯 쓰리고 아팠다.우문호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제왕에게, “그날 일 아직 기억하니?”제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해, 그때 우리가 달려갔을 때 명취는 의식을 잃고 나쁜 형수의 비녀에 찔려 있었지. 형수가 진짜 사람을 해치려고 마음 먹었다는 걸 딱 봐도 알 수 있었어.”“왜 사람을 해치려 했다고 생각해? 주명취를 이미 호수에 밀어 넣었는데, 설
우문호가 콧노래를 부르며 소월각(嘯月閣)으로 돌아왔다. 등불 아래에서 책을 보던 원경릉은 우문호의 콧노래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들었다.“동생은 갔어?”원경릉이 물었다.“갔어!”우문호는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을 보고 “칠국지(七國志)? 이런 건 봐서 뭐해?”라고 물었다.원경릉은 책을 한쪽으로 밀며 “북당 이외에 어떤 나라가 있는지 알고 싶어.”라고 말했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우문호가 외투를 벗는 것을 도왔다.“동생…… 괜찮아?”“많이 다친건 아닌 것 같은데, 적지 않게 충격받은 것 같아.”외투를 벗은 우문호가 원경릉을 끌어당겼다.“내가 참지 못하고 손이 먼저 나가버렸어.”원경릉이 말했다.“잘 때렸어. 맞아도 싸지. 괜히 신경 쓰지 마.” 우문호가 그녀를 위로했다. “신경 쓰는 거 아니야. 내가 한 행동에는 일말에 후회도 없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거지? 뇌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도저히 이해가 안가.”말을 마친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우문호는 소름이 돋았다.“왜 그래?”우문호가 물었다.“내가 잊을 뻔했네. 실은 너랑 제왕이랑 별 차이 없잖아.”원경릉이 퉁명스럽게 말했다.“내가 걔랑 어떻게 같아?” 우문호가 열변을 토했다.“뭐가 달라? 너도 그 계집애한테 푹 빠졌었잖아!”원경릉은 속에서 천 불이 끓었다.우문호는 치솟은 그녀의 눈썹을 매만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내가 그 여자한테 속아서 그랬다고 밖에 할 말이 없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참 바보 같았다. 어릴 적 누구나 한 번쯤 저지르는 멍청한 일 하나쯤은 있잖아?”“언제 정신을 차린 건데?”원경릉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혹시 회왕부에서 내가 물에 빠졌을 때야?”라고 물었다.우문호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 그보다 훨씬 전이야.”라고 말했다.“그럼 어떤 사건을 계기로 정신을 차린 거야?”“사건 때문이 아니야, 그저 느낌이 그랬다. 그녀가 일곱째와 혼인을 한다고 했을 때, 그녀는 가식이 아닌 진
우문호는 원경릉의 옷을 입혀주고는 문쪽을 보며 화를 버럭 냈다.“안 꺼져?”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그 앞에는 손으로 눈을 가린 서일이 서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가락 사이를 벌려 원경릉과 우문호가 모두 옷을 입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서일은 화난 우문호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 몸이 굳었다.“무슨 일이야?” 우문호가 노발대발하며 그를 노려보았다.“왕야, 제왕님께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일은 정중하게 보고했다.원경릉은 놀라서 “제왕 금방 가지 않았어?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야?”라고 물었다.“암살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서일이 말했다.“암살?” 우문호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그는 지금 어떠한가?”라고 물었다.“많이 다치지는 않아서, 이미 제왕부로 돌아갔다고 합니다.”서일이 말했다.“자객은 잡았어?”우문호는 외투를 입으며 “말을 준비해라!”라고 외쳤다.“나랑 같이 가.”원경릉이 말했다.“아니야, 너무 늦었어. 넌 나오지 마. 제왕이 많이 다치지는 않았다고 하니, 내가 빨리 갔다가 올게.”우문호가 원경릉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제왕은 왕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암살을 당할 뻔했다.자객은 한 명뿐이었다. 당시 제왕의 옆엔 호위 무사 한 명과 마부 한 명이 있었다. 다행히 호위가 무술 실력이 좋아 자객을 물리쳤지만, 제왕은 부상을 입고 마차도 파손되었다. 제왕부의 마부가 초왕부로 들어와 마차를 빌려달라고 하자, 탕양과 서일이 제왕이 암살을 당할 뻔한 사실을 알고 급히 가서 상황을 살폈다. 탕양은 제왕의 상처 부위를 지혈한 뒤, 왕부로 데려다주었고, 서일은 이 사실을 우문호에게 보고했다.우문호는 말을 재촉해 제왕부로 갔다.그는 제왕이 많이 다치지 않은 것은 알았지만, 초왕부 근처에서 암살을 시도한 것을 미루어보아 자객이 초왕부를 모함하려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3개월 내에 연속으로 친왕 세명과 왕비 하나가 암살을 당할 뻔했다. 당초 그가 암살 위협을 당했을 때, 부황은 그가 스스로 자해를
제왕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무슨 일이 있거든, 내 앞에서 말하거라. 내가 죽는다고 해도 나를 속이려고 하지 마라.”라고 말했다.주명취는 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헛소리십니까? 어의도 가벼운 상처라고 한 마당에……. 헛소리 그만하시고 어의 말 잘 듣고 치료 잘 받고 계세요. 제가 초왕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제왕은 한순간에 바뀌는 주명취의 표정을 보고 문득 원경릉이 했던 말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주명취는 고작 저런 가벼운 찰과상으로 징징거리는 제왕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내가 이런 한심한 인간에게 시집을 오다니.’주명취는 우문호에게“왕야, 이리로.”라고 하며 자리를 옮겼다.우문호는 주명취를 따라 가며 뒤를 돌아 제왕을 보고 “금방 갔다가 올게.”라고 말했다.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습니다.”라고 말했다.주명취와 우문호는 접객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닫으려고 했다.“문은 닫을 필요 없어.”우문호가 말했다. 주명취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한번 슥 보더니 가시 돋친 목소리로 “왜? 내가 너를 덮치기라도 할까 봐? 예전에 원경릉이 공주부에서 너한테 했던 것처럼?”라고 말했다.우문호는 호포를 펄럭이며 자리에 앉았다.“생각도 참, 나는 그저 너도 나도 이미 혼인을 했으니 이런 불필요한 행동으로 오해를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우문호가 말했다.“오해?” 주명취가 차가운 표정으로 “언제부터 너랑 나의 사이가 오해가 된 거야? 원경릉을 사랑하다니, 너의 변한 마음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아픈 줄 알아?”라고 말했다.우문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본왕에게 그렇게 말을 하는 저의가 뭐야? 이런 말이라면 본왕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라고 말했다.“원경릉의 어떤 점이 네 마음을 움직인 거야? 너 그 여자가 얼마나 비겁하고 비열한지 알아?” 주명취는 밖에서 누가 자신의 말을 듣든 말든 제왕부의 모든 사람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에 걱
우문호는 주명취와 대화를 마치고 싶었다. 그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담담한 눈빛으로 주명취를 보았다. “너는 본왕을 여기로 데리고 와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주명취는 그를 노려보더니 눈물을 흘렸다.“더 이상 할 말 없어. 그저 제왕이 초왕부 근처에서 암살을 당할 뻔했으니, 네가 이 사건에 연루될까 걱정돼서 그랬을 뿐인데…….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할지는 몰랐어. 넌 나를 슬프게 해. 가 봐. 이제 더 이상 제왕부에 오지 말아 줘.”우문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니, 제왕부에는 와야지. 일곱째가 여기 있잖아.”라고 말했다.말을 마친 우문호는 뒷짐을 지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우람한 뒷모습을 보니 적어도 150Kg은 되는 것 같았다. 주명취는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닦았다. 눈물은 닦으면 닦을수록 더 많이 흘렀다. 그녀는 심장이 바늘에 찔린 듯 아팠다. 그녀는 우문호가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주명취는 줄곧 우문호가 자신을 제외하고 다른 여자를 마음에 담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왜 원경릉인 것이냐? 왜 그렇게 몰상식하고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그런 여자를 택한 것일까? 그녀를 안지 얼마나 됐다고? 바보같이 그 여자를 믿다니!’“왕야! 방금 제왕비가 한 말이 너무 소름 끼칩니다.” 밖에서 그 둘의 대화를 들은 서일은 혀를 찼다.“닥쳐라!”우문호는 차갑게 소리쳤다.“예!” 서일이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우문호는 제왕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상처를 다 치료한 상태였다. 탕양은 제왕의 옆을 지키다가 우문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소인이 물어봤습니다. 보아하니 상황이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제왕은 방금 전에 자신을 공격하던 자객의 모습이 떠올라 화가 치밀었다.“다섯째 형님, 자객을 반드시 찾아주셔야 합니다.”우문호는 자리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안심해. 내가 조사해 볼 테니, 근데 지금은 좀 어때?”제왕은 괴로운 듯 “아픕니다!”라고 말했다.“고작 그 정도도 못
우문호는 서일의 머리를 두 대 쥐어박은 후에 말을 타고 왕부로 돌아왔다.원경릉은 안절부절못해 잠도 자지 않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녹주가 왕야가 돌아왔다고 하자마자 그녀가 밖으로 나와 그를 맞이했다.우문호는 오랜만에 밤중에 말을 타고 달리니 기분이 좋아져서, 탕양에게 제왕부의 정황을 묻지 않았다. 말에서 내린 우문호는 탕양을 집으로 불렀다.“얼마나 다쳤어? 심각해?”원경릉이 다급히 물었다.우문호는 그녀를 끌어당기며 “별로 심각하지 않던데, 두 군데 정도 작은 상처가 있었어. 검 끝에 찔린 것 같아.”라고 말했다.“망할 자객!” 원경릉은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제왕이 걱정되기보다는, 제왕이 그녀에게 얻어맞은 후에 초왕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암살을 당할 뻔한 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우문호는 탕양에게 “제왕부의 상황을 말해보거라.”라고 말했다.“왕야의 시위(侍衛)와 마부에게 물었더니, 검은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 자객이 골목 어귀의 모퉁이에서 나타났는데, 무공이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차가 뒤집히는 바람에 그 틈에 자객이 제왕을 공격했고 시위가 자객을 때리자 자객이 도망 갔다고 했습니다.” 탕양이 말했다.탕양의 말을 들은 원경릉은 이상함을 감지했다.“무공이 별로인데, 달리는 마차를 뒤집어 왕을 공격한다고? 제왕은 무공 실력이 좋잖아요? 그리고 시위는?”원경릉의 말이 끝나자 탕양과 우문호의 눈이 마주쳤다.“그래서?” 원경릉은 우문호를 보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라고 물었다.“자객의 무공 실력이 좋지 않아 일곱째를 못 죽인 게 아니야. 자객은 일곱째에게 경상을 입혀 암살당할 뻔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일곱째와 성문의 일이 연결시키려고 했어. 성문 사건을 조사한 뒤 누군가 일부러 소란을 피운 것이라면? 이 모든 일은……”우문호가 말했다.“제왕비의 잘못도 아니고, 사고는 더욱 아닐거야. 누군가가 제왕부를 음해하려고 하는 거야.”원경릉이 답했다.우문호는 그녀의 말을 감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보다시피, 이
“솔직하게 말해봐.” 원경릉의 눈빛이 반짝였다.“그 여자가 뭐라고 했어?” 원경릉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두 손으로 목을 감은 채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우문호는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성을 잃을 뻔했지만, 탕양이 당시에 한 말이 떠올랐다.‘여자에게는 사실의 절반만 말해야 한다.’“그 여자가 네가 예전에 저지른 일을 언급하며 너를 비겁하고 비열하다고 하길래, 내가 화가 나서 반박했다. 너는 선량하고 대범하고 현명하다고, 오점을 찾을 수 없는 너를 함부로 욕하다니 내가 어찌 그냥 넘어가겠어? 내가 한바탕 쏘아붙였다. 그리고 이 사건은 내가 공정하게 조사할 것이니 나쁜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다.”“정말 그렇게 말했다고?”원경릉은 웃으며 그를 쳐다보며 “그렇게 말하니까 걔가 뭐래?”라고 물었다.“화를 내더니 앞으로 제왕부에 오지 말라고 하더라.”원경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말? 거짓말이지?”라고 물었다.우문호는 손을 들고 맹세했다. “거짓말이 아니다. 만약 거짓 말이라면……”그녀가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그는 깜짝 놀라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응? 만약 그렇다면?” 원경릉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우문호는 이를 악 물었다.“네 방에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않겠다.”그의 입술이 원경릉의 입술에 포개졌다. 원경릉은 그를 밀치며 “잠깐만, 내가 뭐 좀 가져와야 할 게 있어.”라고 말했다.“뭘 가져와? 이따가 해!” 그녀는 다시 그녀의 하얀 목에 얼굴을 묻었다.“안돼, 지금 가져와야 해! 기다려 내가 옷 벗고 기다릴게.”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요염하게 웃었다.우문호는 어쩔 수 없이 일어서며 “뭘 가져와?”라고 말했다.원경릉은 문을 열고 캄캄한 정원을 가리키며 “저기 밖에 너의 염낭을 두고 왔어 가져와줘.”라고 말했다.“너 정말!” 우문호는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그가 나가자 그녀는 문을 닫고 문고리를 걸었다.우문호는 화가 나서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다.“원경릉! 또 이렇게
추선의 방에서 나온 원경릉은 청우헌으로 가서 세 거두와 이야기를 나누고 혈압까지 재주었다.그녀는 그들의 말에서 추선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추선으로, 왕비의 옛 시녀였다. 그러나 가장 힘든 시절에 추선은 왕비와 왕부를 떠나지 않았고, 줄곧 평남왕 우문극을 돌봐왔다고 했다.그리고 그 두 명의 첩인 운 마마와 몽 마마는 실제로 왕비의 첩이라고 했다. 대체 왜 왕비의 첩이 되었는지 명확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두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녀들은 이미 왕비의 첩으로 불렸다.세 거두는 추선의 병세를 물었다. 원경릉이 악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자 충격을 받았다.현대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그들은 ‘악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들의 얼굴에 한순간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아, 원경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왕비의 시녀라 하셨는데, 잘 아시는 것입니까?”무상황이 말했다.“숙왕부에서는 누구의 시녀인지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매미도 시녀를 그만두고, 모두와 함께 고생했다. 평생 혼인도 하지 않고.”“매미요?”“네가 말하는 추선이다.”원경릉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추선의 이름을 매미로 부르는 것도 어찌 보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추선이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숙왕부 전체에 퍼졌고, 많은 사람이 원경릉에게 그녀의 병세를 물었다.원경릉은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그렇게 침통한 표정을 짓는 것도, 누군가를 이렇게 걱정하는 모습도 처음 보았다. 평소 그들은 늘 차가운 태도를 보였고, 유일하게 열정을 보일 때는 식사 시간뿐이었으니 말이다.그날, 원경릉은 숙왕부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숙왕부의 식사 방식은 한 사람이 큰 사발 하나씩 받는 것이었다. 이날 집안사람들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아, 남긴 음식이 가득했다.이런 일은 전례가 없었다.원경릉은 이로부터 추선이 그들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소요공에 따르면, 과거 추선은 적성루에서 음식을 배분하는 일을 맡았다고 했다. 고기를 얼마나 줄
“이전에 무슨 큰 병을 앓았습니까?”원경릉이 물었다.“폐결핵이었네. 의원을 불러 치료했지만, 몇 년 동안 건강이 계속 좋지 않았네.”왕비가 대답했다.“치료했던 의원의 능력이 뛰어났겠습니다. 누구였습니까?”“주진이요.”왕비가 말했다.주진의 이름을 들으니, 원경릉은 그녀가 왕비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자라는 것을 확신했다.원경릉은 초능력을 사용해 노파의 폐 상태를 감지했다. 결절과 섬유화가 있었고, 심지어 종양으로 의심되는 덩어리도 발견했다. 나이가 많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고, 우선 약물을 통해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그저 악성이 아니길 바라며 기도할 뿐이었다.우선 링거를 놓고 산소를 공급하며, 스테로이드를 사용해 기관지를 확장해 그녀가 조금 더 편하게 호흡할 수 있도록 했다.약물을 사용하자 노파의 안색이 서서히 나아졌고, 호흡도 훨씬 수월해졌다.그러자 노파가 감사의 말을 전했다.“이렇게 숨을 쉬어본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두 명의 나이 든 여성이 방을 드나들었다. 다들 원경릉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왕비가 그녀들을 소개해주었다.“모두 수년간 나와 함께해온 사람들이네.”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덧붙였다.“내 첩들이네.”그러자 원경릉은 자신이 잘못 들은건 아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첩인지 아니면 왕의 첩인지 궁금했지만, 차마 질문하기엔 입이 쉽게 열어지지가 않았다.잠시 후, 원경릉이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그럼, 이분은요?”“날 처음 모신 사람이네. 이름은 추선이야. 수십 년 동안 대부분 평남왕부에서 평남왕을 돌보며 지냈네.”왕비가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원경릉은 이해했다. 그들은 정말 이곳에 정착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예전에 함께 지내던 사람들을 하나씩 데려와 함께 여생을 보내려는 것이었다.젊은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이니, 나이가 들어도 서로 곁에 머물고 싶어 했다.왕비는 원경릉과 함께 밖으로 나와 진지하게 말했다.“심각하다는 건
다섯째는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아이가 혼인을 올리지 않고 곁에 머무는 건 분명 기쁜 일이었고 효심이 있는 일이었지만 평생 결혼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외로울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만약 자기와 원경릉이 저세상으로 떠난다면, 그녀가 혼자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싶었다.그렇다고 해서 혼사를 허락하자니, 세상에 과연 걸맞은 사내가 있을지 걱정되었다.택란을 그녀보다 못 한 사내에게 보내는 건 그녀에게 너무 큰 희생이다.다섯째가 갈등하는 것 같자 원경릉이 웃으며 그를 다독였다.“택란은 이제 여덟 살이네. 너무 앞서 생각하지 마오.”다섯째가 그녀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자네는 모르네.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흘러가네. 벌써 여덟 살이니, 7년만 지나면 성인이 되오.”그는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흘렀으면 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두는 게 좋소. 너무 멀리 내다봐도 소용없네.”원경릉은 그의 손을 잡고 살며시 깍지를 꼈다.“아이도 운명과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언젠가 자네만큼 훌륭한 남자를 만난다면, 그와 혼사를 해도 나쁠 게 없지 않겠소?”“그런 남자는 있을 리 없소!”우문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이런 칭찬해도 우문호는 여전히 복잡해 보였기에, 원경릉은 자신이 그를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 후회했다. 하지만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리 없었다.택란이 태어난 날부터 우문호에게는 새로운 적이 생겼다. 바로 택란과 혼인할 상대였다.그 적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몰랐지만, 그는 여전히 미워하고 있었다.더구나 금나라의 어린 황제가 혼사를 직접 언급했으니, 이제 그 적은 실체가 생겼고, 이에 따라 그는 한동안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그 후 며칠간 택란은 매우 순진하고 착하게 행동했다. 아버지가 시간이 날 때마다 곁에 머물며 대화를 나누고, 놀고,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아부하는 법을 터득해, 다섯째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더 이상 화낼 수 없게 했다.다
”이제 화가 풀린 것이오?”원경릉이 웃으며 물었다.“화 풀렸네. 하지만 금나라의 어린 황제는 조심해야 하오. 어린 자식이, 정말 너무하오!”우문호는 선물을 하나 열었다. 안에는 알록달록한 도자기로 만든 정교한 인형이 있었는데, 머리카락까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는 미소를 멈출 수 없었다.“이 도자기 인형, 정말 우리 딸을 닮았구나. 예쁘오!”“내가 산 것이오!”원경릉이 질투라도 난듯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산 것이니 더 좋소. 아주 좋아!”우문호는 선물을 하나씩 열어보며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몇 개를 연 후에야 그는 약도성의 상황을 묻기 시작했다.원경릉은 자리에 앉아 약도성에서 있었던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특히 택란이 약도성에서 보여준 대처 방법에 대해 상세히 말했다.그러자 우문호가 매우 놀라며 말했다.“택란이 지진을 예측하고 백성들을 대피시켰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오. 정말 대단하네. 원 선생, 난 택란이 약도성에서 놀기만 했을 줄 알았네. 몰래 이런 큰일을 해내다니.”“택란과 경단은 모두 자네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오. 자네가 걱정하지 않도록 말이네. 그래서 자네한테 말하지 않았던 거고. 이게 택란이 자네를 더 사랑한다는 이유요. 자네를 평생 아끼며 짐을 덜어주고 싶어 하오.”우문호는 그녀의 손을 놓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원 선생,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소.”원경릉은 그의 팔을 감싸 안으며 웃으며 말했다.“그래, 우시오. 우리 큰 아기 울어도 괜찮네!”우문호는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자네가 날 ‘큰 아기’라고 부르니 눈물이 갑자기 멈추네요.”“그럼 울지 말고 어서 앉으시오. 약도성 백성들이 택란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말해주겠소.”원경릉이 그의 팔을 잡아 의자에 앉히고는, 약도성에서 한 달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우문호는 그녀의 이야기에 몰입하며 감동하였다. 특히 약도성 백성들이 택란을 존경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믿기 어려워했
우문호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확 어두워지며 깜짝 놀랐다.“청혼? 누가 청혼을 한 것이오? 미친 것이오? 겨우 여덟 살인데!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런 짓을……”그는 너무 충격을 받아 분노가 치밀었다. 겨우 여덟 살인 딸을 누군가 눈독을 들이고, 심지어 청혼까지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는 그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반드시 혼쭐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원경릉이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미 택란의 비밀을 다 털어놨으니, 이제 더 이상 나한테 화내면 안 되오.”“말하시오. 용서할 테니 더 말하시오!”우문호는 더 이상 원경릉에게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심하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고, 복잡한 감정만이 뒤섞여 답답할 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들도 모두 사라지고, 이 터무니없는 사건이 더 중요해졌다.원경릉은 택란이 금나라에 가서 10만 냥을 얻은 전말을 설명했다. 특히 금나라의 어린 황제가 그녀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털어놓았다. 단 한 글자도 숨기지 않고 진실만 말했다.우문호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그건 너무 대담하잖소! 금나라에서 10만 냥을 빼앗았다니? 어찌 이야기가 이렇게 익숙한 것이오? 그래, 기화요! 어찌 스승이 이런 짓을 가르친 것이오? 그리고 그 금나라의 어린 황제는 이제 몇 살이오? 듣자 하니 겨우 열 살이라고……”“열셋이오. 금나라의 진국왕이 그의 권력을 누르려, 일부러 열 살이라고 소문낸 것이오.”우문호는 벌떡 일어나 뒷짐을 지고 방을 빙빙 돌며 어쩔줄 몰라했다. “열다섯이라도 안 되네! 금나라가 북당의 경성에서 얼마나 먼지 알고 있소? 아이가 그곳에 시집가면 1년에 한 번도 못 돌아올 것이네. 북당의 진국 공주를 부인으로 삼겠다니? 허망 된 꿈이요! 꿈!”“아이들의 농일 뿐이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네.”원경릉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농담이라도 안 되네. 황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귀한 딸을 부인으로 삼겠다니? 이런 녀석은 앞
목여 태감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문호에게 말했다.“폐하, 공주를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공주께서는 단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한 것 뿐입니다.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안왕과 위왕도 그곳에 있었고,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잖습니까?”우문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택란이 자네에게는 과자 한 조각을 주었지만, 나한테는 안 주더군.”택란은 그 말을 듣고 재빨리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아버지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환심을 사려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드셔 보세요. 이건 그렇게 달지 않은 생강 과자인데, 정말 맛있습니다!”생강 과자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딸의 귀엽고 앙증맞은 얼굴을 보니 어떻게 밀쳐낼 수 있겠는가? 화가 난 상태였지만 결국 한입 물었고 생강과 설탕의 맛이 입안에 퍼졌고, 딸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니 얼굴에 굳었던 표정이 풀어졌다.“나도 먹고 싶은데.”원경릉이 가볍게 웃으며 그의 옆에 앉아 턱을 괴고 물었다.“다섯째야, 맛있느냐?”우문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무시했다. 그녀가 스스로 만든 규정을 어겼으니, 좋은 표정을 지을 마음이 없었다.원경릉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택란아, 나한테도 한 조각 줘 보거라!”택란은 다시 과자 한 조각을 가져와 엄마의 입가에 가져다주며 더 큰 죄책감을 느꼈다. 이번엔 자신의 엄마까지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원경릉은 과자를 먹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정말 맛있구나. 다 먹었으니 나가서 좀 자거라. 돌아오는 길에 제대로 못 잤으니.”“예!”택란은 얌전히 대답하고 나머지 과자를 빨리 먹어 치운 뒤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를 한 번 안아주었다.“아바마마, 저 먼저 자러 가겠습니다. 깨고 나면 다리 주물러 드릴게요!”우문호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 어서 가거라.”택란은 목여 태감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한 번 돌아보며 아버지가 너무 오래 화를 내지 않기를 바랐다.원경릉은 문을 닫고 탁자 옆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란이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다. 우문호는 소월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목여 태감이 계속해서 설득했다. 그는 공주가 아직 어리니,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며, 그저 택란이 다른 어린아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목여 태감은 혹시라도 황제가 공주를 꾸짖을까 봐 걱정되어 공주를 감쌌다. 그의 약한 마음은 그런 걸 감당하지 못했다.마침내 택란과 원경릉이 도착했다.우문호는 작은딸이 원경릉의 뒤에 숨어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원경릉이 딸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가봐라,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택란은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우문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자기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바마마, 저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우문호는 딸의 손을 잡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는 눈빛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약도성에 얼마나 있었느냐?”택란은 거짓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솔직히 대답했다.“지난번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온 후 바로 약도성으로 갔어요.”우문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모두가 알고 있었으면서, 나만 속였단 말이냐?”택란은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를 껴안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우문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원경릉이 다가가 말했다.“아이가 자네 선물을 많이 샀소. 한번 보시게.”“필요 없소!”우문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딸을 뿌리칠 마음은 없지만, 그는 여전히 속았다는 사실에 너무 힘들었다.원경릉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서로 비밀이 없기로 약속했건만, 그 약속이 깨진 것 같아 화가 났다.원경릉은 그의 표정을 보고 더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깨달았다.오는 길 내내 택란만 걱정하며 우문호에게 딸을 변호해 주려 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를 속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한 일을 이야기하며 원경릉을 기쁘게 했다.다섯째는 이전에 다섯 개의 성을 위해 적어도 30년이나 50년의 계획이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20년이 채 되지 않아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가 국경 방어뿐만 아니라 조정에 세금을 납부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보였다. 아이들이 현대의 경험을 참고하며 지내는 것이 다섯째의 큰 걱정을 해결해 준 것이었다. 약도성은 이번 지진으로 국고의 돈과 주변 주현의 자원을 사용했다. 북당과 약도성의 백성들의 마음이 끈끈히 묶여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중증 환자들이 회복된 후, 원경릉은 택란과 함께 경성으로 돌아갔다.출발하기 전에 비둘기를 통해 다섯째에게 소식을 전하며 심리적 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이렇게 하면 다섯째가 택란을 보았을 때 마음을 가라앉혀 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택란은 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슬퍼할까 봐 사실 마음속으로 몹시 두려웠다.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그녀또한 잘 알고 있었다.돌아가던 중 택란은 아버지에게 줄 선물을 사자고 제안했다. 원경릉은 딸의 강한 생존 본능에 웃음을 터뜨렸다. 딸이 아버지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니, 다섯째가 딸을 그렇게 아끼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님을 느꼈다.“너희 아버지께서는 특별한 취미가 없으시고, 그저 술 한잔하는 걸 좋아하시니까 좋은 술 몇 병 사 가는건 어떠냐?”그러자 원경릉이 먼저 제안했다.“좋습니다! 사요! 많이 사서 마차에 싣고 가겠습니다!”택란이 급히 대답하자 원경릉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섯째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자상한데도 아이들이 그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물론 이는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이고 사랑이지만 말이다.경성에서 우문호는 원경릉의 서신을 받자마자 열어보았다. 편지를 읽는 순간 그는 멍해졌다.“계란이가 약도성에 갔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 그렇게 얌전하던 딸아이가 몰래 약도성에 갔을 리가 없어.”더구나, 셋째와 넷째는
약도성의 건물 대부분이 무너져 백성들은 임시로 지은 오두막과 초가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폐허로 변한 도성은 눈에 보이는 곳마다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원경릉은 마음속 깊이 안타까움을 느꼈다.택란의 뜻으로 중증 환자들은 모두 저택으로 옮겨졌다. 원경릉은 계란이의 결정이 매우 옳다고 생각했다. 중증 환자들은 그녀와 몇몇 의원이 책임지고 돌보았고, 나머지 의원은 경증 치료를 맡았다.택란은 엄마 곁에 머물며 환자를 돌보는 것을 도왔는데, 기본적인 의술을 알고 있어서 소독과 붕대 감는 일을 도왔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통증이 심해 참기 어려웠고, 진통제를 먹이거나 진통 주사를 놓았다. 택란도 주사를 놓을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쉬지 않고 바쁜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본 환자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그들은 궁에서 자신들의 생사를 진정으로 걱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황후마저 직접 왔으니, 예전의 대립과 적대감은 유치한 웃음거리로 느껴졌다.저녁 무렵,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왔지만,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없이 서로 포옹한 뒤 다시 각자 사람들을 구하러 나섰다.백성 중 자발적으로 음식을 만들고 약을 끓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저택 내 물자는 부족했으나 주변의 도움이 끊이질 않았다. 호명은 사람들을 조직해 식량과 의복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의 약도성엔 인간의 이기심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했다.황후가 직접 약도성에 온 덕분에 서북 지역의 신하들도 직접 의원과 물자를 이끌고 약도성에 와서 돕기 시작했다.약도성은 전례 없는 관심을 받았고, 이는 약도성 백성들이 다섯 도시 중 가장 빠르게 조정을 인정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구하고 재난 이전의 상태로 빠르게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다.재난이 발생한 지 반달이 지나면서 발견된 것은 모두 희생자뿐이었다. 인원을 파악한 후 한곳에 모아 장례를 치렀다.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5만여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 숫자는 매우 끔찍했지만, 택란의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