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휼 배급소 상황원경병은 주명양의 적수가 못됐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자 원경병은 이내 무너져서 시선을 피하며 씩씩거리길: “주씨 집안엔 멀쩡한 사람이 하나도 없네.”주씨 집안엔 멀쩡한 사람이 없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게 원경병이 주명양을 증오하는 이유는 아니었다.원경병이 주명양을 증오하는 이유는 주명양이 안하무인으로 사람을 무시해서다.그리고 주명양은 그럴 만한 미모와 집안이기도 하다.원경병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주명양의 원하는 대로 거침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질투했다.마침내 호빵이 도착했다.취사병이 큰 소리로, “죽을 나눠주겠습니다. 차례로 줄을 서세요.”아무도 줄을 서지 않았다.모든 사람이 일제히 따끈따끈하게 막 가져온 고기 호빵을 향해 달려들었다. 호빵은 김이 모락모락 나고 고기 냄새가 진동하는데, 며칠을 굶은 데다 아침부터 점심이 되도록 기다린 허기진 백성들이 줄이고 나발이고 설 리가 있겠는가?호빵을 하나라도 더 빼앗아서 위장에 집어넣기 바빴다.주명취가 사람들이 취사병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보고, 나와서 몇 마디 하며 백성을 위로하고자 했다.분명 주명취가 올 때 모두가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고 이것이 민심의 향방이며 백성들이 주명취를 존경하고 경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당연히 주명취가 하는 말을 듣길 원할 것이다.주명취는 호빵 앞을 막아 서서 말을 하려고 하는데 떠밀려서 발이 삐끗하는 바람에 바닥에 쓰러졌다.“무엄하다!” 시위가 제왕비가 떠밀려서 쓰러진 것을 보고 황급히 달려와 제왕비를 민 사람을 한 손으로 끌어내고 끼어들어가는데 그 사람이 기우뚱하더니 뒤로 넘어지면서 찜기에 층층이 쌓인 호빵을 넘어뜨려 전부 바닥에 쏟아버렸다.“죽 배급을 잠시 멈춰. 죽 배급을 잠깐 멈추라고!” 시위가 취사병에게 소리치는데 이미 백성들이 한데 뒤죽박죽이 돼서 통제가 불가능했다.백성들은 배가 등가죽에 붙어 뭐 먹을 게 없나 눈이 등잔만한데, 호빵이 바닥에 떨어져 있고 배급도 잠시 중단한다는 소리에 참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
위독한 홍등 군주와 사람을 구하는 둘순식간에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수문장이 큰 소리로 호령하며 달려가, “어서, 어서 가서 도와라.”배급소가 무너진 것 자체는 심각하지 않지만, 거기엔 큰 솥 몇개에 뜨거운 죽이 있고 불도 아직 다 꺼진 상태가 아닌 게 문제였다.원경릉도 정신없이 같이 달려가며 손을 소매 안에 넣고 약상자를 꺼냈다.배급처 앞까지 달려와 약상자를 열어보니 대부분 지혈 거즈와 소독약, 몇 가지 응급약품이다.성문에는 사병 하나만 남겨두고 전부 와서 사람을 구했다.배급소 천막에 대략 오십 여명이 깔려 있는데 안으로 달려들어가고 싶었지만 못 들어간 사람들이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바로 수문장과 사람을 구하는 일에 참여했다.제일 먼저 구출해 낸 사람은 역시 주명취였다.왜냐면 소동이 일어날 때 주명취는 무의식 중에 달아나 배급소가 무너지던 순간 거의 바깥까지 도망쳐 나와서 한 발자국만 더 나오면 완전히 벗어날 참이었다.주명취의 상처는 심각하지 않고 그저 턱을 한 줄 크게 긁혔을 뿐이나 놀라서 넋이 나가 있었다.원경릉은 주명취에게 가서 지혈하고 소독해서 붕대를 감아주는 모든 동작이 2분 안에 다 끝냈지만, 주명취는 아직도 정신이 멍한 상태로 원경릉이 재빨리 다음 사람을 처치하는 것을 지켜봤다.처음 구해낸 사람은 대체로 경상이 많아서 병사들은 의원을 부르러 가고 경조부와 순찰 어사에게 알렸다.원경릉이 막 환자 한 명을 처치하자마자 수문장과 다른 병사 하나가 소녀 한 명을 들쳐 업고 오는데, 소녀는 전신이 피투성이로 머리와 손은 힘없이 늘어져 있고 숨은 곧 넘어 갈듯 깔딱거렸다.원경릉이 한 눈에 알아보고 벌떡 일어나, “어머, 홍등 군주예요. 죽었나요?”원경릉은 한 손으로 급히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고 수문장에게: “어서 내려놓으세요.”수문장이 당황해 손발이 오그라드는데, 이 홍등 군주는 소요공이 불면 꺼질 세라 금지옥엽으로 아끼는 손녀였기 때문이다.홍등 군주는 발견 당시 그저 눈만 크게 뜰 수 있을 뿐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
다친 주명양과 주명취우문호가 연속으로 안에서 사람을 몇 명 구출해 내고 배급처도 서둘러 치워지는 가운데 환자도 거의 처치가 끝나갔다.마지막으로 우문호가 한 사람을 안고 나왔는데 올리브색 옷이 찢어지고 더러워지고 머리가 풀어져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채로 얼굴을 덮고 있다.원래 그녀를 안고 나와 내려놓으면 그만이다.하지만 주 대부인이 깜짝 놀라 소리치며, “왕야, 이렇게 소녀를 안으시면 정절이 더럽혀집니다, 어서 내려놓으세요.”주 대부인은 상처를 입지 않은 유일한 행운의 소유자로, 배급소 천막에 깔린 사람은 전부 다쳤고 중상자도 몇이나 있는데 오직 그녀 혼자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다.주 대부인이 그저 평소처럼 말했으면 들은 사람도 많지 않고 모두 바빠서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주 대부인도 지나치게 놀란 상태라 날카롭게 소리치는 바람에 모두의 주목을 끌고 말았다.원경릉도 쳐다 봤다.우문호의 머릿속에 ‘꽝’하고 일년 전 공주부에서의 장면이 갑자기 떠올랐다.우문호는 두 손에 힘이 빠지며 주명양이 그대로 우문호의 손에서 떨어져 내렸다.주명양은 죽은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긴 머리만 바람에 날리며 아름답고도 창백한 얼굴을 드러냈다.우문호가 원경릉을 발견했는데, 그녀의 전신과 두 손과 얼굴에 피 칠갑을 하고 있다.우문호는 성큼성큼 걸어가 원경릉의 손에 무엇을 들고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끌어안으며, “어디 다쳤어? 심해?”원경릉은 고막이 터질 지경이다.“환자 치료하고 있어요, 내려 놔요!” 원경릉이 큰소리를 냈다.우문호는 그제서야 원경릉의 전신에 튄 것은 다른 사람의 피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마음이 놓였다.: “어, 하던 일 계속해. 난 다른 일 처리해야 해서, 조심해야 되는 거 알지?”주 대부인이 달려와 우문호를 막고, “왕야, 아이 상처를 치료하게 의원을 불러줘요, 애가 혼절했어요.”마침 혜민서의 의원이 와서 우문호는 한 손으로 의원 한 명을 끌어와, “가서 주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 상처를 좀 봐 드려.”말을 마치고, 사라졌다.주명양
제왕비와 꼬마 거지원경릉이 꼬마 거지의 상처를 닦아내는데 와서, 촉새처럼 나불나불 자신을 방해하는 제왕을 보고 근엄한 얼굴로, “만약 제왕비가 걱정되면 어서 입궁해서 어의에게 보이세요.”“우선 그녀부터 좀 봐줘요, 배를 다쳤을까 걱정입니다.” 제왕은 걱정이 되는 지 뒤를 돌아 멍한 눈빛의 주명취를 쳐다본다.주명취는 지금처럼 이렇게 정신이 쏙 빠지는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그리고 솔직히 어디를 다쳤는지도 모르겠다.원경릉이 고개를 돌려 주명취를 보고 담담하게: “전 산부인과 전문의가 아니라 그쪽은 잘 몰라요, 저 방해하지 마세요.”주명취는 이제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냉랭하게 제왕을 흘깃 보고, “난 괜찮아요, 왕야 제발 다른 말씀 하지 마세요.”그러나 주명취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아바마마께서는 이번에 반드시 책임을 추궁하실 텐데 만약 자신이 임신 했다면?이번 달 달거리가 며칠이나 늦어졌고 지난 이틀 일부러 고모를 만나러 입궁해서 겸사겸사 어의에게 맥을 짚었다.어의 말이 회임일 수도 있으나 아닌 것도 같다고 했다. 날짜가 너무 밭아서 정확히 진단을 내리기 어려우니 며칠 있다가 다시 맥을 짚기로 했다.주명취의 호흡이 갑자기 빨라졌다.만약 정말 회임 했다면 아바마마는 결단코 그녀에게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원경릉은 제왕 부부를 상관하지 않고 계속 꼬마 거지의 상처를 치료했다.꼬마 거지는 땅바닥에 누워 얼굴은 비록 아픈 표정이지만 만족하고 있었다.호빵 두개를 주워서 한 입에 하나씩 배속에 싹 쓸어 넣었기 때문이다.꼬마 거지는 이렇게 배가 불렀던 적이 없었다.“아프니?” 원경릉이 상처에서 나무 가시를 뽑아내니 옆에 뜨거운 죽에 덴 화상이 넓게 있다. 더럽고 찢어진 바짓가랑이를 들어올리자 허벅지부터 무릎까지 죽에 덴 화상이 보인다.화상은 매우 아프다.꼬마 거지는 고개를 흔들고 호기심과 두려움의 눈빛으로 원경릉을 쳐다봤다.원경릉이 상처를 처치하고 화상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제왕이 이 장면을 보고 냉소를
원경병과 구사의 재회꼬마 거지는 그제서야 그녀가 초왕비인 것을 알고 놀라서 달달 떨었다. 원경릉이 자가같은 거지를 위해 상처를 치료하다니, 어찌할 바를 몰라 몸을 잔뜩 웅크렸다.원경릉이 눈을 부라리며, “움직이지 마!”꼬마 거지는 돌멩이처럼 꼼짝 못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거지는 감히 원경릉을 다시 쳐다보지 못하고, 어디에 눈을 둘지 몰라 허둥지둥하면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좋아,내일 초왕부에 와서 날 찾아, 다시 약을 줄 테니까.” 원경릉이 그 아이의 바짓가랑이를 내려주었지만 사실 그런다고 가려지지도 않을 만큼 낡았다.꼬마 거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네, 고마……감사합니다 왕비마마.”원경릉은 녀석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약을 좀 더 쥐어 주며: ‘이 약은 하루에 한 번만 먹는 거야. 5일치고, 이 두 알은 해열제로 열이 난다고 느껴지면 바로 한 알 먹어. 알겠지?”빡빡 머리 꼬마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는데 까맣고 앙상한 손이 마른 가지 같다.원경릉은 약을 주고 다른 환자를 치료하러 갔다.치료를 마친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와중에 소요후부(逍遙侯府)에서 사람이 도착했고, 예친왕도 직접 왕비와 홍등 군주를 마중 나왔다.예친왕비는 다가와서 원경릉과 인사를 나누지 않았지만, 원경릉에게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홍등을 살려준 것에 감사했다.현장은 슬슬 통제가 가능한 상태로 바뀌어 갔다.우문호의 엄명으로 관련 없는 사람은 바로 철수했다.이 무관한 사람 속에 원경릉이 포함되었다.“나는……” 원경릉은 논리로 싸우려 했다.우문호는 직접 한 팔로 원경릉을 안아 마차에 태우고 원경병과 녹주에게: “왕비를 데리고 초왕부로 돌아가라, 물 마시고 밥 먹는 걸 지켜볼 것.”“아냐, 난 아직 갈 수……” 원경릉이 가리개를 젖혔다. 약상자에 아직 약이 있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닌가.“조용히 해!” 우문호가 가리개를 내렸다.“그래요 형부. 멋져요!” 원경병은 정말 두려웠다. 언니가 진짜 미쳐서 계속 안으로 뛰어 들어가다
주명취를 감싸는 주재상원경병이 도대체 뭐라고? 구사는 자기가 뭐에 씌어서 원경병한테 반했을 뿐, 다행히 아직 어머니께 말씀 드리지 않았다.구사는 연약하고 어린 자신의 마음을 탓하며 툴툴거렸다.원경병은 어리둥절해서 이 사람 왜 이러지? ‘누구시냐’고 물어도 답이 없고, 화가 난 듯 가버리다니 왜? 물어보면 안되는 거였나?원경릉이 묻길: “구사 왜 그러지? 좀 화 나 보이는데.”원경병이 의아해하며, “구사? 저 사람이 구사야? 어전 시위국장인?”“부국장이지, 둘이 만난 적 있잖아. 전에 네가 초왕부에 왔을 때, 구사도 왔었는데.”원경병이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확실히 만난적이 있다.하지만 당시는 마음이 혼란하고 초조해서 정신이 없었는데 어떻게 기억 하겠어?그나저나 이 사람도 속이 좁아 터진 게 고작 자기가 누군지 기억 좀 못했다고 성질까지 내고 그래?보아하니 남자들은 하나같이 똑같다. 자기가 대단한 줄 알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길 알아야 한다고 착각하니 말이다.마차가 초왕부에 돌아와 원경릉은 녹주와 상궁이 주시하는 가운데 밥을 먹고 잠을 잤다.초왕부의 용도는 돼지를 키우는 것으로, 원경릉은 지금 우문호가 키우는 금지옥돈이다.성밖의 일은 우문호가 기본 상황을 통제한 후 입궁해 명원제에게 보고했다.마침 주재상도 어서방에 있어 주명취가 거행한 죽 배급 행사에 문제가 일어났음을 듣고 안색이 대번에 바뀌었다.명원제가: “우선 다친 사람을 잘 처리하고 일의 진상을 분명히 조사해 도리대로 행하거라.”우문호가: “예.”우문호가 나가자 주재상도 따라 나왔다.“왕야!” 주재상과 우문호가 함께 걸으며,“재상께서 무슨 일이신지?” 우문호가 물었다.주재상이 가볍게 탄식하며, “이런 일이 생겨 저도 화가 납니다. 제왕비는 일을 어찌 이리 사리에 맞지 않게 처리하는지 원.”우문호가: “뜻밖에 통제가 어려웠습니다. 자비심으로 한 일이라도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했는데, 이번은 돌발 상황으로 주요 원인은 시간통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인듯 합니다. 너무 이른
제왕부에 온 우문호그래서 주명취를 구명하는 외형을 취하지만 실은 제왕을 위해서다.주재상……은 제왕이 태자의 자리를 쟁탈하도록 지원하는 걸까?그런 속내가 있다고 해도 주재상이 자신의 외손을 돕는 것은 도의적으로 당연한 일이다.하지만 이렇게 일찍 입장을 드러내고 침착함을 잃은 건 주재상의 평소 모습이 아니다.게다가 아바마마의 면전에서 자신을 따라 나온 것과, 배신이란 이름으로 협박하는 건 급해서가 아닐까?우문호가 주재상에게: “재상께서는 안심하시지요. 이 일은 반드시 공평하게 해결될 것입니다.”말을 마치고 우문호는 예를 취하고 먼저 떠났다.일은 명확해 졌다. 길게 조사할 필요 없다.경조부 사람이 현장의 성문 수문장에게 물어서 알아냈고, 또 일부 백성을 뽑아 사정청취를 했으며, 예친왕비와 양부인이 모두 현장에 계셨기 때문에 전체 사정을 이해하는 데는 조금도 어려움이 없었다.마지막으로 주명취에게 가서 물어봐야 한다.우문호는 본래 직접 가고 싶지 않았지만 주명취의 신분이 제왕비고 제왕이 아내를 지나치게 싸고도는 애처가라 다른 사람을 보내면 몇 마디 묻지도 못하고 쫓겨날 게 뻔했다. 그래서 우문호는 서일을 데리고 직접 제왕부에 갔 다.제왕부에 도착하자 제왕이 직접 나와서 맞는데 얼굴에 걱정 근심이 가득하다.“명취가 돌아온 뒤로 계속 방에 틀어박혀 마음에 상처를 입었는지 울고만 있어요. 결국 자신이 백성들과 거지를 해쳤다고. 원래는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었던 건데 결과적으로 그들을 다치고 고생시켰다며. 내가 아무리 권해도 명취가 말을 안 듣고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 해요. 형 마침 잘 왔어요. 형 얘긴 들을 거예요. 내 대신 말 좀 해줘요.”서일이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며 제왕의 말을 듣고 피를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서일같이 머리가 좀 모자란 사람도 이 일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알고 왕야가 조사하러 왔는데, 제왕은 고작 왕야에게 부탁하는 게 사고를 친 장본인을 위로하는 거라니.제왕, 당신은 도대체 단순한 건가요 아니면 멍청한 겁
주명취를 사정 청취하는 우문호제왕은 목을 움츠리고 얼굴이 흙빛이 돼서, “형은 왜 그렇게 살벌하게 말해?”우문호는 인내심이 바닥나서, 호통치며: “갈 거야 말 거야?”“우선 냉정하게, 명취 놀라게 하지 말고!” 제왕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천천히 앞으로 길을 안내했다.우문호는 심호흡을 하고 비로소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였다.제왕이 다시: “전에 성문 밖에 사건때, 다섯째 형수가 명취를 호수에 민 적이 없고 오히려 명취가 형수를 밀어서 죽이려 했다고 누명을 씌웠어. 형, 돌아가서 형수한테 얘기 좀 해줘. 형수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 일은 추궁하지 않는 거라고.”우문호는 큰 걸음으로 앞으로 가서 하인을 하나 불러 세워, “가서 제왕비에게 편청으로 오시라고 해라. 내가 제왕비에게 묻을 말이 있다고.”하인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제왕을 바라보자 제왕은 하는 수없이: “가거라!”하인은 명을 받들고 갔다.우문호는 제왕을 상관하지 않고 서일과 편청으로 가서 기다렸다.제왕이 따라 오면서 잊지 않고 하소연하며, “형, 이 일은 형이 잘 좀 처리해줘. 내가 명취를 감싸는데 형이 안 봐주면서, 형이 형수를 감싸는 건 사리에 안 맞지. 안 그래?”서일은 우문호의 얼굴이 완전 시커멓게 변한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왕야 말씀을 좀 삼가시지요. 우선 이 일을 처리하신 후 다시 말씀하시는 것은 어떠실 까요?”제왕은 서일을 힐끔 보니 서일이 제왕에게 경고하는 눈빛을 던지며 슬쩍 손가락으로 우문호를 가르쳤다.제왕은 그래도 역시 우문호를 경외하기에, 불만이지만 감히 다시 입을 놀리지는 않았다.편청에서 좀 기다리자 주명취가 시녀를 데리고 왔다.턱에 난 상처를 싸매고 비단 치마는 폭이 넓은데 허리는 꽉 조여서 여리여리 하고 여성스럽다.시녀가 부축해서 들어오는데 초췌한 표정에 눈가가 붉다.우문호를 보고 말을 잇지 못하고 눈가가 다시 붉어지더니 흐느끼며: “호오빠 왔어요?”우문호는 주명취를 보고, “상처는 좀 좋아졌어?”주명취는 조용히: “별일 아닌 걸요.”“또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
한편, 안왕과 위왕은 이미 명월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기에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몸 전체가 먼지투성이였다.하지만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바로 궁에 들어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혼 연회가 예정보다 앞당겨 열리게 되었다고 했다.그들은 의아해하며 금나라가 막무가내라고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혼례라더니, 이제는 정혼식이라 하고, 심지어 약속했던 날도 지키지 않고 앞당겼으니 말이다.혼사라는 중대사가 이렇게 어린아이 장난처럼 진행될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신부가 북당 사람이니, 그들은 신부의 친정과도 마찬가지였기에 금나라의 일정을 따르며, 금나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것이 맞았다. 다른 나라 사절들이 함께 있었기에, 그들은 무관의 신분으로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친구를 사귀고 주변 무역 문제를 논의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다섯째가 특별히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른 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국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상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라고 말했었다. 장사는 대화로 시작되는 일이니,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면 결국 성사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비록 처음에 다섯째의 이런 태도가 약간 뻔뻔하다고 느꼈었지만, 지난 10여년간 나라 경제가 눈에 띄게 번영했다는 사실을 차마 부인할 수는 없었다.다섯째의 말처럼 경제를 앞서게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한 덕분에, 돈이 끊임없이 북당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들이 다른 나라 신하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황제가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안왕과 위왕은 금나라의 황제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 젊은 황제는 올해 열여덟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라 들었다. 어린 나이에 유명한 진국왕을 몰락시켰으니, 얼마나 대단한 결단력과 꾀를 가졌을까?내시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밝은 황금빛 용포를 입은 젊은 황제가 시위에게 둘러싸여 등장했다.혼례복이 아닌 용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나 혼례를 올리는 것은 아닌 듯했다
세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그 중, 택란은 베일을 쓴 채 궁에서 준비한 마차에 올랐다.때마침 불이 하나둘씩 밝혀질 시간이라, 거리는 무척 떠들썩했다. 금나라 수도의 번화함은 약도성이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통행금지가 없어, 백성들이 밤늦게까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택란은 마차의 가림막을 살짝 들어 올려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장사에 열중하는 상인들, 주루나 주막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상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이런 활기 넘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그러고는 순간 어린 황제를 본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3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3년 사이에 자신도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 말이다. 키도 훤칠해졌고 이제 얼굴도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 한층 성숙하고 침착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도성이 지난 몇 년간 겪어온 일들이 많았기에 당연히 성숙해질 수밖에 없었다.한편, 금나라 황궁에서는 이미 정혼 연회의 준비를 마쳤으나, 중요한 두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안왕과 위왕이었다.북당의 두 친왕이 도착해야만 연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한편, 경천 황제는 내내 택란을 만나고 싶어 했다.지난 3년 동안, 그는 그녀와 재회할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3년간 간절히 바랐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들떴지만, 첫 만남은 너무도 중요했다.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생생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그는 사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조정을 되찾아 그녀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물론 지금 그녀는 아직 어리기에, 혼담을 논하기엔 이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생각이 훨씬 개방적이었고,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장 큰 행복이라 여겼기에 의식 자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그래도 아버지의 아쉬움을 덜어주기 위해 현대에서 한 번, 즉위 후에 또 한 번 의식을 치렀다.주 아가씨는 객사로 돌아오자마자, 객사 일꾼에게 소식을 물었다.그러자 일꾼은 황제가 곧 혼례를 올린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멈칫했다.“혼례요? 정혼 아니었습니까?”“정혼? 정혼이라니? 그럼 이미 혼사를 올릴 나이가 되었는데, 어찌 바로 혼례를 하지 않다는 것이냐?”“그건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정혼한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미래의 황후가 북당 사람이 맞느냐?”일꾼이 말했다.“예. 북당 출신의 아가씨라고 합니다. 게다가 황제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들었습니다.“택란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경천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말 은인의 언니라는 말을 믿다니 말이다.설사 그렇다고 해도 굳이 그녀와 혼례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혼사를 어찌 장난처럼 다룰 수 있단 말인가?택란은 경천 황제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저 정치적인 판단에서만큼은 어리석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택란은 원래 이틀 정도만 량주를 둘러본 뒤 바로 궁으로 들어가 알현할 생각이었지만, 아직 혼례 날짜가 다가오지 않았으니 며칠 더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궁으로 들어가 정체를 드러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녀가 생명의 은인인 것을 알아차리면, 정혼식을 진행할지 말지 애매해질 것이기에, 택란은 며칠 동안 객사에 머물며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펴보는 한편, 참고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그렇게 살펴보던 중, 주 아가씨가 정보를 알아보러 나갔다가 안왕과 위왕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칠 동안 다른 나라 사절들은 계속 장관에 묵고 있었는데, 택란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삼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 무렵 장관으로 갔다.그런데 도착하고 나서야 그들이 이미 황
량주는 금나라의 수도가 된 이후 지난 2년간 크게 발전했다. 또한,금나라와 북당이 우호적인 교류를 시작하면서, 북당 변방 도성의 백성들도 장사를 위해 많이 찾아왔다.이전에 택란도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 위해 금나라에 왔었다. 하지만 그때의 량주는 지금처럼 북당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택란은 객사에 머문 뒤 주 아가씨와 냉명여를 데리고 거리로 나가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폈다.여기도 어쨌든 금나라의 수도 아닌가!진국왕은 물러나기 전까지 나라를 잘 다스렸고, 특히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야망이 지나친 탓에 늘 약도성을 되찾겠다고 욕심을 부렸다.그리고 동시에 북막을 두려워하기도 했다.경천이 즉위한 후, 광산 자원 개발 외에도, 그는 농경지와 산지를 개간하려고 노력했다. 금나라의 서북부에는 농사에 적합한 땅이 있었지만,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북당의 다른 도성을 본받아 사람들을 개간지로 보내고 그들에게 이익을 나누어주었다.나라가 상승세일 때, 그 분위기는 눈에 띄기 마련이다. 백성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택란은 경천이 황제로서 매우 적합하다고 느꼈기에, 그가 이끄는 금나라는 분명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발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기에,그가 광산을 함께 개발하자는 제안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았다.택란은 이내 자신감을 얻었다. 궁에 들어가 알현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량주 백성들이 북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과거, 약도성과 량주의 관계는 다소 안 좋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나라가 약도성에 사람을 침투시켜 많은 폭동을 일으켰기에, 약도성 백성들도 그들을 매우 싫어했다.그렇기에 지난 2년간의 교류를 통해, 택란은 그들의 원한이 천천히 사라지기만을 바란 것이었다.이제 북당 쪽은 문제가 없으니, 량주 백성들의 생각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택란은 물건을 사면서 점포 주인과 상인들에게 북당 약도성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곤 했다.그 중,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