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님 어서 들고 가십시오. 정말 보기 드문 귀한 비취입니다. 이 비취는 소요후(逍遙侯)가 이틀 전에 입궁해 태상황님께 선물한 비취로서 태상황님께서 비취를 받고 나서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허나 자신의 몫은 남기지 않고 왕비님께 드리는 겁니다.”상선이 말했다.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큰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고민되는 듯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냐? 필요 없으면 그냥 두고 나가거라!”태상황이 답답하다는 듯 화를 냈다.원경릉은 한 손으로 나무 상자를 낚아채더니“손자며느리 나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몸을 굽혀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귀한 비취임을 알기에 부담스러워 거절할까 고민도 했지만, 그녀는 태상황이 자신을 생각해 주는 마음을 져버릴 수는 없었다.그녀는 상자를 손에 쥐고는 건곤전을 나와 명원제를 찾아갔다.명원제가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놀라서 “이건 소요후가 태상황님에게 준 비취가 아니냐? 이걸 왜? 이걸 다 너에게 주신 거냐?”라고 물었다.“예 맞아요, 부황께서도 갖고 싶으신가요? 저도 받은 것이지만 생색 좀 낼게요. 여기요!”원경릉은 위풍당당한 표정으로 나무 상자에 든 비취를 내밀었다.명원제는 손을 저으며 “태상황님께서 너에게 준 물건이니 잘 가지고 있어라. 짐은 이런 돌에 관심이 없다. 보아하니 태상황님께서 너를 매우 아끼시는 것 같구나.”라고 말했다.‘태상황께서 제일 좋아하는 보석이 비취 아닌가……. 소요후에게 비취를 받자마자 급히 상선을 시켜 잘 보관하게 두시길래 뭘 하시려나 했더니……. 이 귀한 걸 원경릉에게 주다니? 보아하니 태상황님께서 이 아이를 보통 예뻐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태상황님의 뜻은……’명원제는 곰곰이 생각했다.자신을 불러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명원제를 보고 원경릉은 멋쩍은 듯 서있었다.“여섯째의 병세가 어떻느냐? 말해보거라.” 명원제가 그녀에게 물었다.원경릉은 회왕의 치료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명원제는 그동안 사람을 시켜 회왕부의 소식을 들었지만, 이렇게 원경릉
“나가보거라. 오늘 짐이 말한 것은 다섯째와 잘 의논해 보거라.” 명원제가 말했다.원경릉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명원제의 말을 곱씹을수록 그녀의 마음속엔 의심의 싹이 올라왔다.그날 저녁, 원경릉과 우문호는 부부로서 침전에서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명원제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분석하기 시작했다.“부황은 왜 내가 자식을 낳는데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원경릉이 물었다.우문호는 그녀를 두 팔로 안고서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돌돌 말았다.“왜 그런 것 같은데?”“부황이 너를 태자로 책봉하려는 거 아니야?” 원경릉이 추측했다.우문호는 고개를 저으며 “그럴 리 없어. 부황께서는 올해 내게 실망도 많이 하셨고, 나에겐 늘 냉담하신거 너도 잘 알잖아.”라고 말했다.“그 공주부 사건은 나 때문에 그런 거잖아……. 그 사건 이전엔 부황께서 너를 중시하지 않았어?”“음……. 태자로 책봉되려면, 장남이거나 황후가 낳은 아들이어야 해.”우문호가 말했다.“현비가 낳은게 뭐 어때서?”원경릉이 물었다.우문호는 빙그레 웃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너는 내가 어질고 선한 재목이라고 생각해?”“아니!” 원경릉은 그의 말을 단칼에 부인했다. “선한건 모르겠고! 네 충성심과 용맹함은 내가 인정하지!”우문호는 두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고는 생각했다.‘정말 부황이 나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태자가 되고 싶어?”원경릉이 물었다.우문호는 웃으며 “싫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태자가 되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라고 말했다.원경릉은 침상에 엎드려 팔꿈치에 턱을 괴고 그를 보았다.“내 생각엔 말이야, 부황께서 태상황님의 마음을 캐고 계신 것 같아. 아무래도 태상황님께서는 너를 많이 아끼시잖아. 게다가 초왕비인 내가 태상황님의 마음을 얻기도 했고…….”이 말을 들은 우문호가 그녀를 쳐다보며 “그럼 네 말은 부황이 나를 태자로 책봉하려는 게, 어쩔 수 없이 태상황의 뜻에 순종해서
“그건 너 혼자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건 우리와 아이가 연이 닿아야 하는 거야.”그가 장막을 치자, 바람에 촛불이 꺼졌다.“오늘은 좀 쉬면 안 될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원경릉이 우문호에게 말했다.“쉬는 건 죽어서 쉬면 돼.”우문호는 그녀가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달려들었다.침전이 한순간에 달아올랐다.다음 날, 손왕 부부가 초왕부를 방문했다. 우문호는 일을 마치고 돌아와 손왕과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원경릉은 손왕비와 뜰에서 산책하고 있었다.손왕비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근심이 있는 것 같았다.“손왕비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원경릉이 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두드리며 손왕비를 쳐다보았다.“별일 아닙니다.”손왕비가 그녀를 보며“그나저나 허리는 괜찮습니까? 왜 두드립니까?”라고 물었다.“괜찮습니다.”원경릉은 손을 거두며 대답했다.손왕비는 원경릉이 왜 그런지 알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아, 지금 좋을 때죠. 저도 다 겪어봤습니다.”“손왕비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그저 피곤할 뿐입니다!”원경릉이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어휴, 알겠어요!”손왕비는 손가락을 뻗어 앞에 있는 돌의자를 가리켰다.“저기 앉죠! 힘드니 좀 쉽시다.”원경릉은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자리에 앉자 손왕비는 갑자기 원경릉에게 “듣자 하니, 초왕비가 다섯째가 주명양(周明陽)과 혼인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던데.”라고 말했다.“예, 제가 들이지 말라고 했습니다.”손왕비는 깜짝 놀라서 “감히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손왕비는 제손으로 직접 손왕의 첩을 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래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제 부군(夫君)을 다른 여인과 나눠가져야 합니까?”“다 그렇게 합니다.”손왕비가 조용히 말했다.“아무리 그래도 저는 싫습니다.”“초왕비가 싫다고 하는 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초왕비가 나서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다섯째의 첩을 준비할 것입니다. 차리리 부인인 내가 직접 고르는 게 낫지!”“그
“허나 지금은 초왕비가 너무 좋습니다. 비록 내가 초왕비 말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초왕비가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손왕비가 웃으며 말했다.원경릉은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손왕 내외를 배웅한 후, 우문호는 원경릉을 데리고 회왕부로 향했다. 원경릉은 늘 그래왔듯 회왕의 상태를 확인하고 약을 주고 안부 인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왔다.“우리 바깥으로 구경나가자!” 원경릉은 이곳에 온 뒤, 한 번도 바깥 구경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다. 우문호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가로이 걸었다.녹주와 서일이 그들의 뒤를 느릿느릿 따라왔다.원경릉은 북당(北唐)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이렇게 밖에 나와보니 북당은 번화했던 시기임에 틀림없다. 그 둘은 길모퉁이 구멍가게부터 시작해서 정미소, 보석가게, 비단가게, 의관을 파는 곳, 심지어 수의를 파는 가게까지 들여다보았다. 녹주는 왕비가 제정신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하다 하다 죽은 사람의 옷을 파는 곳까지 들여다보다니!하지만 원경릉은 처음으로 밖에 나와 실제 북당 사람도 보고 구경을 하는 것이 매우 기뻤다. 수의를 만드는 곳에 들르니 겉과는 다르게 안에는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원경릉이 하나를 집어 가격을 보니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는 비싼 가격이었다.“이렇게 팔면 누가 사? 평범한 사람은 살 엄두도 안 나겠어!”“이건 부자들한테만 파는 거야. 살아있을 때 못해준걸 죽어서라도 해주려고 하는거지.”이 말을 듣고 원경릉이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비싼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경중(京中)은 정말 번화하구나. 가난해 보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우문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거리에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은 모두 부유한 집안의 사람들이야.”“아 그래? 그럼 다른 곳으로 가보자.”“가지 마, 이 근처나 걷다가 들어가자.”“나는 다른 곳도 가볼래!”원경릉이 말했다.그러자 서일이 원경릉에게 “왕비님, 이곳이 경중에서 가장 번화한 곳입니다. 여기 외에는 구경할 만
우문호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그래?” 그녀가 물었다.우문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냥 기운이 없는 것 같아.”사실 우문호는 황실의 사람으로서 백성들이 잘 보살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하지만 그의 역량은 아직 이에 미치지 못했다. 원경릉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눈빛에서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그의 진심이 느껴져 안타까웠다.길의 끝에는 의료관이 있었다. 그 입구에는 줄이 길게 서있었으며, 누추한 옷차림으로 거리에 드러누워있는 환자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그들이 풍기는 악취 때문에 파리들이 들끓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 다른 의료관으로 가면 되잖아.”원경릉이 물었다.서일은 웃으며 “왕비님, 다른 의료관을 이들이 감히 어떻게 갑니까.”라고 말했다.“감히라니? 정부에서…… 운영하는 그런 의료관이 없나?”“있어, 혜민서의(惠民署醫)라고.”우문호가 답했다.“혜민서의도 비싸?”“경중에는 혜민서의가 딱 두 곳밖에 없어. 운 좋으면 서너 달, 어떤 이들은 진료를 받기 위해 1년도 줄을 서서 기다린다.”우문호의 말에 원경릉은 깜짝 놀랐다.“혜민서의가 두 곳밖에 없다고? 경도(京都)가 이러게 큰데 두 곳에서 이 많은 환자를 어떻게 처리해?”“경중에는 시내 곳곳에 개인 의료관이 있어. 하지만 비싸서 일반 사람들은 못 가지.”우문호가 말했다.“도대체 무슨 이유로 조정(朝廷)에서는 의료관을 더 세우지 않는 거야?”“의사가 없다.”우문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인파 속을 빠져나와 그녀에게 천천히 설명했다.“어렵게 의술을 배웠으니 다들 직접 의료관을 차려 큰돈을 벌고 싶어 하지, 누가 혜민서의에서 돈 없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싶어 하겠는가?”“그럼 중병을 앓고 있어서 밖에서 줄도 못 서고, 돈이 없어서 의료관도 못 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일이 원경릉을 보며 “어쩔 수 없죠. 민간요법이라도 해보고, 안되면 죽는 수밖에 없죠.”라고 말했다.서일의 말을 들은 그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도
“조모님의 건강은 어때?”원경릉이 동생에게 물었다.“그냥 여전하시지,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았습니다.”원경병이 말했다.“이틀 후에 조모님을 뵈러 가야겠다.”자매는 마차에 올라탔다. “왕비님 어디로 가십니까?” 마부가 물었다.원경릉은 녹주를 바라보며 “녹주, 어제 우리가 갔던 곳은 어디였죠?”라고 물었다.“흥평거리입니다.”녹주가 대답했다.“흥평거리로 갑시다.” 원경릉이 마부에게 말했다.마차는 청석판으로 된 길을 지나 왕부거리를 빠져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추었다.“왕비님, 도착했습니다.”마부가 말했다.원경릉은 장막을 걷고 밖을 보았다. ‘내가 행선지를 잘 못 말했구나…….’거리에는 부유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원경릉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거리에 가려고 했는데, 자신이 행선지를 잘 못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언니, 여기 연지를 파는 가게가 있습니까? 저 오늘 탕진할겁니다!”원경병이 원경릉의 손을 이끌었다. 원경릉은 하는 수없이 동생과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원경병은 오랜만에 외출인지 들떠 보였다.자매는 향훈(香薰)을 파는 가게에 들러 향훈 몇 개를 사고 화장품 가게로 향했다. 그곳에 들어가니 주명취와 두 명의 소녀가 연지를 고르고 있었다. 그들은 뒤에는 나이가 지긋한 노복(僕婦)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이 굉장히 위엄 있어 보였다.주명취는 가게에 들어오는 원경릉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미소를 지으며“초왕비, 여기서 뵙네요!”라고 인사를 했다.“그러게요. 제왕비” 원경릉이 답했다.주명취가 초왕비라고 부르는 소리에 옆에 있던 두 소녀가 모두 고개를 들어 원경릉을 보았다. 주명취의 왼쪽에 서있던 소녀는 백합이 수놓인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옥으로 된 비녀를 꽂고 있는 소녀는 피부가 도화지처럼 하얗고, 입술을 붉은 장미와 같은 것이 멀리서 봐도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왔다.오른쪽에 있는 소녀는 걸친 옷이나 장신구가 왼쪽에 있는 소녀보다는 고급스럽지는 못 했지만, 야
원경병 성격에 뺨을 맞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 쳤다 이거지? 내가 오늘 널 찢어발길것이야!”원경병이 고함을 치며 주명봉의 뺨을 후려갈겼다. 주명봉이 반격하려고 하자 주명취의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당장 멈추거라!”주명봉은 큰 언니의 호령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은 쳤지만,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원경병을 노려보았다.주명취는 원경병을 째려보더니 시선을 옮겨 원경릉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초왕비, 우리 둘은 동서지간으로 한 집안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초왕비께서는 부디 제 동생의 말을 흘려들어주세요. 초왕비도 장녀로서 동생이 이런 소란을 피우면 알아서 제지를 해주셨어야죠. 보아하니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 같은데 오늘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나면 그거야말로 큰일 아니겠습니까?”주명취의 교활함에 원경릉은 치가 떨렸다.“제왕비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왕비의 동생이 먼저 초왕비인 나를 모욕하고, 제 누이동생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나서서 훈계를 하고 싶지만, 저 아이는 제왕비의 배다른 동생이니 내가 뭐라 훈계할 수가 없네요. 제왕비가 저와 제 동생을 대신해서 저 아이를 잘 훈계해 주시지요.”주명취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습니다. 초왕비께서도 누이동생 관리를 잘 하셔야겠습니다. 본심은 착하나 자칫 잘못해 소문이라도 돌면 혼삿길이 막힐까 걱정입니다.”이 말을 들은 원경병이 참지 못하고 나서려고 하자 원경릉이 그녀를 가로막았다.“제왕비, 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듯싶네요. 제왕비같은 사람도 좋은 집안으로 시집가지 않았습니까? 제 누이동생이 제왕비보다는 잘난 것 같으니, 제왕비께서는 배다른 동생이나 신경 쓰시지요.”이 말을 들은 주명취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초왕비는 어쩜 그리 저를 미워하십니까.”“제가요? 방금 제왕비께서 우리는 한 집안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 말이 귀에 거슬리더라도 가족이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세요.” 원경릉은 부드러운 얼굴로 주명취를 보았다.이 상황을 지켜보단
“밖에 나가자고 한 게 누군데, 지갑도 안 가지고 나옵니까?” 원경병이 화를 냈다.원경릉이 화장품 가게 주인을 보며 “외상 되나요……?” 라고 물었다.“예, 예, 당연히 됩니다. 초왕비 맞으시죠? 얼마든 외상으로 해드리겠습니다.”가게 주인이 두 손을 삭삭 비벼가며 원경릉에게 말했다.이 말을 들은 원경병은 신이 나서 연지 두 개와 눈썹먹을 집어 들었다. 가게에서 나온 원경릉은 마차를 타고 어제 우문호와 갔던 허름한 거리를 찾아갔다. 민생은 그녀가 관여할 바가 아니나, 열악한 의료를 보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녀는 생로병사는 누구나 겪게 되는 것이기에 나라가 잘 굴러가려면 의료의 기강이 잘 잡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우문호가 말하길, 의학을 배운 후에 모두 돈이 되는 개인 의료관을 차린다고 하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먼저 자신과 그 가족이 잘 먹고 잘 살아야 남을 돌볼 여유가 생긴다. 그렇다면 조정에도 현대(现代)처럼 전문적으로 의학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을 두고 매년 각지로 의사를 보내면 되지 않을까?하지만 조정에서 돈을 들여 교육 기관을 운영하지 않을 것이다. 교육 기관을 만들려면 건물을 짓고, 의학을 가르칠 교수를 구하는데 큰돈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기껏 돈을 들여서 의학을 가르쳐 놨더니 졸업 후에 혜민서의에 가기 싫다고 하면? 지금까지 들인 공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의학이라는 어려운 학문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아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분명 있을 것이다. 의학을 배우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유한 집의 자제들이다. 의학을 배우려면 돈도 시간도 많이 들기 때문에, 평범한 집안에서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만약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도 의학을 배울 수 있다면?’순간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린 거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의학이 한줄기의 빛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의학을 배우기 전에 일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
한편, 안왕과 위왕은 이미 명월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기에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몸 전체가 먼지투성이였다.하지만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바로 궁에 들어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혼 연회가 예정보다 앞당겨 열리게 되었다고 했다.그들은 의아해하며 금나라가 막무가내라고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혼례라더니, 이제는 정혼식이라 하고, 심지어 약속했던 날도 지키지 않고 앞당겼으니 말이다.혼사라는 중대사가 이렇게 어린아이 장난처럼 진행될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신부가 북당 사람이니, 그들은 신부의 친정과도 마찬가지였기에 금나라의 일정을 따르며, 금나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것이 맞았다. 다른 나라 사절들이 함께 있었기에, 그들은 무관의 신분으로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친구를 사귀고 주변 무역 문제를 논의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다섯째가 특별히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른 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국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상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라고 말했었다. 장사는 대화로 시작되는 일이니,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면 결국 성사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비록 처음에 다섯째의 이런 태도가 약간 뻔뻔하다고 느꼈었지만, 지난 10여년간 나라 경제가 눈에 띄게 번영했다는 사실을 차마 부인할 수는 없었다.다섯째의 말처럼 경제를 앞서게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한 덕분에, 돈이 끊임없이 북당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들이 다른 나라 신하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황제가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안왕과 위왕은 금나라의 황제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 젊은 황제는 올해 열여덟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라 들었다. 어린 나이에 유명한 진국왕을 몰락시켰으니, 얼마나 대단한 결단력과 꾀를 가졌을까?내시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밝은 황금빛 용포를 입은 젊은 황제가 시위에게 둘러싸여 등장했다.혼례복이 아닌 용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나 혼례를 올리는 것은 아닌 듯했다
세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그 중, 택란은 베일을 쓴 채 궁에서 준비한 마차에 올랐다.때마침 불이 하나둘씩 밝혀질 시간이라, 거리는 무척 떠들썩했다. 금나라 수도의 번화함은 약도성이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통행금지가 없어, 백성들이 밤늦게까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택란은 마차의 가림막을 살짝 들어 올려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장사에 열중하는 상인들, 주루나 주막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상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이런 활기 넘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그러고는 순간 어린 황제를 본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3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3년 사이에 자신도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 말이다. 키도 훤칠해졌고 이제 얼굴도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 한층 성숙하고 침착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도성이 지난 몇 년간 겪어온 일들이 많았기에 당연히 성숙해질 수밖에 없었다.한편, 금나라 황궁에서는 이미 정혼 연회의 준비를 마쳤으나, 중요한 두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안왕과 위왕이었다.북당의 두 친왕이 도착해야만 연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한편, 경천 황제는 내내 택란을 만나고 싶어 했다.지난 3년 동안, 그는 그녀와 재회할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3년간 간절히 바랐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들떴지만, 첫 만남은 너무도 중요했다.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생생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그는 사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조정을 되찾아 그녀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물론 지금 그녀는 아직 어리기에, 혼담을 논하기엔 이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생각이 훨씬 개방적이었고,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장 큰 행복이라 여겼기에 의식 자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그래도 아버지의 아쉬움을 덜어주기 위해 현대에서 한 번, 즉위 후에 또 한 번 의식을 치렀다.주 아가씨는 객사로 돌아오자마자, 객사 일꾼에게 소식을 물었다.그러자 일꾼은 황제가 곧 혼례를 올린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멈칫했다.“혼례요? 정혼 아니었습니까?”“정혼? 정혼이라니? 그럼 이미 혼사를 올릴 나이가 되었는데, 어찌 바로 혼례를 하지 않다는 것이냐?”“그건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정혼한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미래의 황후가 북당 사람이 맞느냐?”일꾼이 말했다.“예. 북당 출신의 아가씨라고 합니다. 게다가 황제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들었습니다.“택란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경천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말 은인의 언니라는 말을 믿다니 말이다.설사 그렇다고 해도 굳이 그녀와 혼례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혼사를 어찌 장난처럼 다룰 수 있단 말인가?택란은 경천 황제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저 정치적인 판단에서만큼은 어리석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택란은 원래 이틀 정도만 량주를 둘러본 뒤 바로 궁으로 들어가 알현할 생각이었지만, 아직 혼례 날짜가 다가오지 않았으니 며칠 더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궁으로 들어가 정체를 드러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녀가 생명의 은인인 것을 알아차리면, 정혼식을 진행할지 말지 애매해질 것이기에, 택란은 며칠 동안 객사에 머물며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펴보는 한편, 참고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그렇게 살펴보던 중, 주 아가씨가 정보를 알아보러 나갔다가 안왕과 위왕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칠 동안 다른 나라 사절들은 계속 장관에 묵고 있었는데, 택란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삼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 무렵 장관으로 갔다.그런데 도착하고 나서야 그들이 이미 황
량주는 금나라의 수도가 된 이후 지난 2년간 크게 발전했다. 또한,금나라와 북당이 우호적인 교류를 시작하면서, 북당 변방 도성의 백성들도 장사를 위해 많이 찾아왔다.이전에 택란도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 위해 금나라에 왔었다. 하지만 그때의 량주는 지금처럼 북당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택란은 객사에 머문 뒤 주 아가씨와 냉명여를 데리고 거리로 나가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폈다.여기도 어쨌든 금나라의 수도 아닌가!진국왕은 물러나기 전까지 나라를 잘 다스렸고, 특히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야망이 지나친 탓에 늘 약도성을 되찾겠다고 욕심을 부렸다.그리고 동시에 북막을 두려워하기도 했다.경천이 즉위한 후, 광산 자원 개발 외에도, 그는 농경지와 산지를 개간하려고 노력했다. 금나라의 서북부에는 농사에 적합한 땅이 있었지만,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북당의 다른 도성을 본받아 사람들을 개간지로 보내고 그들에게 이익을 나누어주었다.나라가 상승세일 때, 그 분위기는 눈에 띄기 마련이다. 백성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택란은 경천이 황제로서 매우 적합하다고 느꼈기에, 그가 이끄는 금나라는 분명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발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기에,그가 광산을 함께 개발하자는 제안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았다.택란은 이내 자신감을 얻었다. 궁에 들어가 알현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량주 백성들이 북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과거, 약도성과 량주의 관계는 다소 안 좋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나라가 약도성에 사람을 침투시켜 많은 폭동을 일으켰기에, 약도성 백성들도 그들을 매우 싫어했다.그렇기에 지난 2년간의 교류를 통해, 택란은 그들의 원한이 천천히 사라지기만을 바란 것이었다.이제 북당 쪽은 문제가 없으니, 량주 백성들의 생각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택란은 물건을 사면서 점포 주인과 상인들에게 북당 약도성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곤 했다.그 중,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