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풍친왕비는 위아래 명품을 빼 입고 목에는 커다란 금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북당에서 돌아와 보상심리로 며칠간 쇼핑을 한 것이였다. 그렇게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행복할 때인데 안풍친왕비의 말에 비보를 전해들은 것처럼 안풍친왕의 세상은 순간 얼어붙었다.안풍친왕비가 싸늘하게 안풍친왕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서 큰 조카와 상의해서 매화장을 우리에게 먼저 빌려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안 된다고 하면 이리율에게 의탁하는 수 밖에 없겠네.”안풍친왕은 그때 순간 은자 백만냥이 떠올라 흥분했다. “괜찮아, 이번에 돌아가면 우린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돼. 은자 백만냥이 있잖아.”안풍친왕비가 비관적으로 말했다. “됐어요, 그 백만냥이 돌아가도 아직 있겠어요? 불가능해요.”이쪽은 근심에 쌓여있는 줄도 모르고 저쪽은 양여혜의 지시에 따라 서교산 속 호수로 갔다.물건을 등에 지고 크고 작은 짐보따리에 원숭이까지 챙긴 일행은 시간의 터널을 지나 경호로 돌아왔다. 북당의 하늘과 북당의 경치를 보고, 북당의 공기를 들이 마셨다. 모두 천상에서 돌아온 기분으로 발이 땅에 닿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현대는 좋다. 하지만 진정한 집은 북당이다.다들 잠시 쉬었다가 짐을 들고 식사하러 도장으로 올라가는데, 호수 수면 위로 다시 두 사람이 올라왔다.“휘형? 형수님?” 태상황이 놀라서 물었다. “두분이 어떻게 돌아오셨죠?”안풍친왕이 자애롭게 태상황을 바라보며 답했다. “여섯째야, 형이 너희와 떨어지기 아쉬워서 돌아왔지. 너희와 계속 있고 싶어서!”“오, 그거 잘됐네요!” 태상황이 감동한 모습이다. 휘형이 최근 갈수록 형다운 모습을 보인다.소요공이 자기 짐을 부려 놓고 껑충껑충 뛰어와 안풍친왕비를 보고 감격했다. “사부님, 역시 절 못 잊어하실 줄 알았어요.”안풍친왕비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응, 그래.”안풍친왕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장에서 웬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안풍친왕 수하의 명장 흑영이였다. “사적인 원한을 갚으려 하니
우문호는 슬슬 궤도에 오른 참이었다.우문호는 딸을 안고 원경릉은 어깨에 원숭이를 올린 채,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데, 뒤에서는 벌써 현대를 그리워하는 소리가 재잘재잘 들려왔다. 맛있는 음식, 자동차, 티비, 심지어 변기까지. 모두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반면 경호쪽 상황은 모두 알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사람이 엄청 많은데다가 가족을 돕자니 옳지 않았고, 이치대로 하자니 효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도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출발했다. 서일은 소요공은 짐이 많은데 자기는 원경릉 엄마가 준 선물만 들고와서 가뿐했기에 선뜻 도와주겠다고 했다.그런데 소요공이 기뻐하지 않으며 오히려 잔소리를 해댔다. “넌 하도 덜렁대서 괜히 쏟을 거 같아. 그리고 하산하면 마차가 있으니 도와줄 필요 없어.”좋은 뜻으로 도와주려고 한 서일은 뻘쭘해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냥 가뿐함을 즐기기로 했다.일행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늑대파 정보망 1급 기밀로 신속하게 경성으로 전해졌다.경성의 황실은 기름솥처럼 들끓었는데 특히 사식이는 너무 기뻤다. 전에 태자비 일행을 보낼 때 탕양이 돌아와 서일도 같이 갔다는 말에 한동안 기가 막히면서도 서일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했었다.일행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이리 나리가 직접 홍엽에게 전하고 그들이 좋은 소식을 가져온다고 귀뜸해 주었다.홍엽도 기뻐하며 태자가 어떻게 수양딸을 데리고 갈 수 있냐며, 이리 나리가 그들이 돌아오고 좋은 소식이 있다는 말에, “당연히 좋은 소식이고 말고요. 수양딸이 돌아오는데.”이리 나리는 놀라움과 기쁨은 직접 보고 느끼는 게 낫지, 미리 말해주면 김이 빠질 게 분명했다. 이리 나리는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홍엽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사실 일행의 귀환 소식에 제일 기쁜 건 사식이가 아니라 훼천이었다. 훼천은 얼른 요부인에게 달려가서 벙글벙글 웃으며 그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말했다. “태자비 마마께서 돌아오신다는군.”요부인은 이미 미색이 보내온 소식을 듣고 알고 있었다. 당황하지 않고, “응
현대 여행객들이 경성 초왕부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모두 열렬한 환영준비에 들어갔다.미색이 사람을 안배해 초왕부에서 기다리게 하고 마침 순왕 부부도 경성에 와서 함께 참석했다.원경릉이 막 문에 들어서자 미색이 달려가 안는데 힘이 장사라 원경릉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다들 원경릉을 끌어안으며 중구난방으로 물어댔다.서일은 어렵사리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와 사탕이를 안고 있는 사식이를 발견하더니, 눈시울이 붉어지며 달려가 아이와 사식이를 안고 울었다. “사식아, 이생에 다시는 너희들을 못 보는 줄 알았어.”사식이는 감동에 찼다가 이 말을 듣고 순간 무릎을 팍 차올리며 성을 냈다. “뭐라는 거예요? 태자비 마마 마중간 거잖아요! 뭘 평생을 못봐요? 쓸데없는 소리 할래요, 진짜!”“진짜로….”“어, 당신 이빨!” 사식이가 기뻐서 서일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이빨 나았네요? 자란 거예요?”서일이 헤벌쭉 웃으며 자랑했다. “자란게 아니라 태자비 마마께서 이를 심어 주셨어. 좋아보여?”서일은 사탕이를 안고 사람들이 신경쓰지 않는 틈에 몰래 사식이 볼에 뽀뽀했다. 그러자 순간 얼굴에 빛이 나며 몰래 사탕을 훔쳐먹은 아이처럼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사식이가 얼굴이 빨개져서 서일을 콩콩 때렸다. “이 장난꾸러기!”하지만 속으로는 ‘성격이 변했나? 전에는 사람이 있으면 손도 제대로 못 잡더니 이제는 사람들 앞에서 뽀뽀를 다해? 간이 부었구만.’ 라고 생각했다. 한참 떠들썩한 뒤에 동서들은 문을 닫고 얘기를 시작했다.손왕비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돌아와서 잘 됐어. 훼천이 이제는 안심할 수 있겠네. 요부인이 자네가 와야 혼례를 올린다고 해서 훼천이 어찌나 조바심을 내던지! 바깥 양반 말에 따르면 걸핏하면 태자 전하를 찾아와서 자네가 언제 돌아오냐고 물어봤대. 근데 이제 소원대로 됐구만. 진짜 믿을 수가 없다니까. 태자비가 돌아오는 걸 가장 학수고대한 게 훼천이었다니!”손왕비가 말을 하며 과장스런 손짓을 보탰다.원경릉은 손왕비가 해괴
이곳에서는 절대적으로 희귀한 물품이기 때문에 특히 파운데이션과 립스틱은 다들 써보더니 엄청 좋다며 기뻐했다원경릉은 기뻐하는 모두를 바라보며 앞으로 현대에 갔다오면 선물을 열심히 사야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모인지 한 시간쯤 됐을 때 우문호가 사람을 보내 원경릉에게 입궁하라고 했다.원경릉은 그제서야 오랜 기간 출타했는데 입궁해서 문안도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그러자 모두 원경릉이 돌아오면 같이 밥을 먹자며 기다리겠다고 했다. 원경릉은 엄청 사랑받는 응석받이처럼 기뻐했다. “제가 지금 이렇게 환영받는 입장이 된 거죠?”“됐거든요, 태자비 마마께서 안 계시면 다들 모일 데가 없어서 그런 거예요.” 미색이 웃으며 말했는데 이 말에 다들 한숨을 쉬었다. 사람은 다 똑같은 사람인데 왜 태자비가 없으면 모일 수 없겠는가. 중심엔 역시 태자비가 있어야 한다.원경릉이 웃으며 밖으로 나가 옷을 갈아입고 희상궁에게 가발을 빗겨달라고 했다. 앞으로 몇 달간 이 가발은 필수불가결이다.우문호도 그쪽에서 머리를 짧게 잘라 지금 묶어서 올릴 수가 없으므로 가발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오히려 세 어르신들은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짧은 머리에 새로운 스타일의 모자를 썼다.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마차를 탔다.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자 우문호는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느려, 마차는 너무 느리다고. 아무리 타도 적응이 안 되네!”현대에서 외출할 때는 차를 탔다. 차가 안 막힐 때는 거의 날아다니는 수준인데 여기 마차는 빠르면 너무 흔들리고 천천히 가면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고 만다.현대를 여행하고 돌아온 후유증이 처음엔 머문 시간이 너무 짧아 없었는데, 이번은 보름이 넘게 있으며 그쪽에 익숙해졌다가 갑자기 또 돌아오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아빠, 다음번엔 제가 자전거를 가져다 드릴게요!” 만두가 자상하게 말했다.“탈 줄 몰라!” 우문호가 머쓱하게 말했다. 자전거를 현대에서 한번 타봤는데 못 타겠다.만두가 말했다. “두발 자전거를 못 타도 세발 자전거는
입궐하자 명원제가 아이들을 보고 너무 기쁜 나머지 한동안 아이들과 얘기를 나누고 나서야 부부에게 태상황과 주재상의 상태가 어떤지 물었다.태상황은 경성으로 돌아와 바로 별장으로 가서 명원제는 아직 태상황한테 문안을 드리지 못했다. 일단 아들과 먼저 마무리 지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어 그걸 마치고 용기를 내서 태상황에게 말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명원제는 손자 손녀들과 잠시 환담을 나눈 후 원경릉에게 말했다. “너는 아이들을 데리고 황귀비에게 문안가거라. 짐은 다섯째와 할 말이 있다.”원경릉은 마침 황귀비를 보고 싶던 참이라 명원제의 분부를 듣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다가,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빼먹을 것을 문앞에서 비로소 떠올리고 얼른 돌아서서 인사를 올렸다.다행히 명원제도 그곳엔 신경쓰지 않다. 머리속엔 온통 다섯째에게 뭐라고 말을 꺼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원경릉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자 명원제는 목여 태감에게 밖에 나가 입구를 지켜달라고 했다. 태자와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뜻이었다.우문호는 이미 짚이는 데가 있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아바마마는 보수적이고 신중한 사람이라 눈 앞에 있어도 자신이 인지하는 범위를 넘어선 일에 대해서는 받아들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서 우문호가 안풍친왕과 현대에 간 것이나 안풍친왕이 아바마마에게 퇴위하도록 밀어붙인 일을 쉽게 말할 수 없었다.명원제가 우문호에게 물었다. “왕강이 상소를 보내 회강 하류 북강현에 제방을 쌓자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우문호가 물었다. “북강현이 혹시 어디입니까?”“괴고묘진의 강단 이라는 곳이야.”우문호가 잠시 생각해보더니 답했다. “소신이 생각하기로는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왕강이 왜 거기에 제방을 쌓자고 했을까요? 괴고묘진은 지대가 가파르고 높습니다. 강바닥이 깊어 물길이 10리를 벗어나지 않고 나뉘어 흘러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지만 목면진은 지세가 낮아 걸핏하면 물난리가 나서 거기에 제방을 세우는 건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사실 목면진 부근에서 강물을 끌어
우문호는 순간 안풍친왕이 자신에게 이 일을 지금 알려준 사실에 약간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전에 몰랐더라면 지금 분명 굉장히 경악하며 펄쩍 뛰었을 것이다.하지만 우문호는 경악한 척을 할 줄 몰랐다. 그저 묵묵히 아바마마를 보며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몰랐다. 하지만 우문호의 이런 반응이 명원제에게는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으로 비쳐져 설득하기 시작했다. “짐도 너무 바로 이 일이 결정된 것을 잘 안다. 분명 당분간 네가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짐이 바로 네게 보위를 넘기는 게 아니라 네게 3개월의 시간을 줄 거야. 짐도 모든 일을 잘 대비해 놓고 널 위해 장애물을 깨끗히 치워 줄 거다.”우문호는 아바마마의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감동과 함께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아바마마도 자신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아바마마께서 아직 이렇게나 젊으시니 급하게 퇴위하실 필요는 없다고 사료됩니다.” 우문호가 말했다. 명원제가 우문호를 그윽하게 바라보더니 눈가에 은은하게 자랑스러움이 넘쳤다. “아바마마는 젊지 않아. 요 몇년 점점 몸이 따라주지 않는구나. 노년에 우둔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 전에 지금이 퇴위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야. 넌 걱정하지 마라. 짐이 퇴위한다고 해도 늘 너를 볼 수 있고 조정 일은 네가 원한다면 짐과 언제든 얘기할 수 있어. 네가 원하지 않으면 짐은 널 믿는다.”명원제가 황제로 있던 10여년 내내 배후에 태상황이 있었다. 비록 자신에게는 태상황이 필요했지만 다섯째는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거라고 명원제는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권력을 완전히 넘겨주는 것이야말로 다섯째에 대한 가장 큰 신뢰였다.명원제는 말을 마치고 가볍게 우문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살짝 촉촉한 눈빛으로 우문호를 바라봤다. “짐은 너를 믿는다. 네가 북당에 전에 없는 번영과 영화, 강성함을 천추 만대에 가져올 것이라 생각한다!”우문호는 콧잔등이 시큰해 지며 서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어 정중하고도 장엄한 표정을 지
청란대가를 지나는데 한 사람이 당나귀를 타고 원경릉의 마차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문호가 마침 가리개를 젖히고 ‘경성의 변화를 못 본지도 오래됐구나’라고 생각하며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는데, 순간 당나귀를 탄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경악하고 말았다. ‘안풍친왕? 어, 현대에서 오픈카를 타고 달리던 품격은 어디가고 여기서는 당나귀를 타는 거지?’ 게다가 안풍친왕가 당나귀가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안풍친왕은 기골이 장대하기에 비실거리는 당나귀를 타고 있으니 왠지 당나귀를 괴롭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큰 할아버지?” 원경릉이 물어봤다. 얼핏 본 게 그런 것 같았다.“응, 분명 입궁하시는 길일 거야.” 우문호가 말했다. 이 길은 궁으로 향하는 길로 매화장의 일은 아바마마와 잘 얘기가 됐는지 모르겠다.초왕부로 돌아오니 냉정언과 홍엽은 아직 오지 않았다. 냉정언은 성 밖에서 일을 보고 있고 홍엽은 형부 관할 사건을 하나 처리하고 있었다. 그 사건은 상당히 괴이해서 형부에서 직접 접수해 며칠을 진행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결국 형부는 냉재상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냉재상이 홍엽을 파견한 것이다.하지만 이미 홍엽에게 연락을 취해 둘 다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때 구사가 한 마디 했다. “괜찮아, 그 사람들은 천천히 오라고 하고 우리 먼저 천륜의 기쁨을 즐기자고, 어차피 아이들 얘기에 두 사람은 할 얘기가 없잖아!”바꿔 말해 공통의 화제가 없다는 것이었다!이제 초왕부는 유치원 학부모 모임이 되었다. 구사는 한 아이의 아버지로 순조롭게 아이를 기른 경험을 가진 자이다. 이 많은 남자들 중 경험이 제일 풍부했으나, 기저귀 갈고 대소변 누이고 밥을 먹이는 것은 잘하지만 교육은 소리지르거나 호통치는 것에 의존하고 있었다.다들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하고 이어지는 화제는 서일의 이빨이었다.제왕까지 얘기에 참여했다. “이거 말하지 않을 수가 없군. 서일이 앞니가 생긴 뒤로 사람이 완전 달라 보이는 것 같다네. 이전보다 똑똑해 보인단 말이지! 제일 중요한 건 이제 보기에 그
그렇게 한 쪽은 술잔이 오가며 형제간의 전우애로 흥청거렸고, 다른 한 쪽에서는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 잡다한 집안 일을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초왕부 하늘은 엷은 구름이 흩어졌다 뭉쳤다 하며 봄날의 습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초여름이 성큼 모퉁이까지 닥쳐있었다.연회를 마치고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이미 해시가 되었을 무렵, 문지기가 와 냉정언과 홍엽이 왔다고 보고했다. 두 사람은 밤 그림자에 감싸며 들어왔다. 다급해 보이는 행색에 먼지가 풀풀 날렸다.우문호와 원경릉이 복도에 서서 맞이했다. 원경릉 어깨에 있던 원숭이는 홍엽이 문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깍깍 울며 초조해 했다.홍엽이 보이자마자 원숭이는 한달음에 홍엽에게 뛰어들어 가슴에 안긴 채 감격해서 울부짖었다.홍엽은 처음에 불빛이 어스름해서 뭔가가 달려오는 걸 보고 개라고 생각했기에 그 개가 바로 자기 얼굴에 뛰어올라 머리를 끌어안아 깜짝놀랐다. 원숭이인줄은 꿈에도 모른 홍엽이 화가 나서 소리쳤다. “어서 내 머리에서 내려와!”홍엽이 원숭이의 꼬리를 잡고 밖으로 내던지려 하자 원숭이가 홍엽의 목을 꽉 붙잡고 슬픔과 기쁨의 눈물을 머금은 채 똘망똘망한 눈으로 홍엽을 바라봤다.그러자 홍엽이 놀라서 천천히 손을 놓고 원숭이를 보더니 순간 얼굴에 경악함은 어디가고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다.비록 이 원숭이가 홍엽의 기억 속의 원숭이가 아니긴 했지만 눈이 마주쳤을 때의 익숙함으로 홍엽은 영혼 깊숙한 곳까지 참을 수 없이 떨려왔다. 홍엽은 어쩔 줄 몰라하며 원경릉을 쳐다봤다. 눈에서 눈물이 뿌옇게 차오르고 한 마디 답을 구했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답이 아닐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원경릉이 다가가서 홍엽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걔예요. 당신이 오래 기다렸던 원숭이가!”홍엽의 입술이 떨리고 눈물이 왈칵 터져나와 눈 앞에 사람도 사물도 구분할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한손으로 원숭이를 안고 똑바로 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눈물이 계속 흘러나와 모든 것을 덮어버려 도무지 자세히 볼 수가 없었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