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찾을 테니 당신들은 우선 산에서 내려가세요. 산속은 상당히 추우니 조심하시고요. 그리고 한 분은 맹인이시고, 한 분은 정신이 없어 보이니까 뒤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돌아보지 마시고 가세요.” 경찰은 다른 경찰을 몇 명에게 하산을 돕도록 했다.원경릉은 원래 여기서 그들을 기다릴 생각이었으나 주재상이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새로운 시공간에 왔으므로 낯선 사람을 경계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상태가 비교적 심각해 일단 하산해 주진 등과 연락을 취하고 병원으로 보내 검사를 받은 후 내일이라도 바로 수술을 준비하게 한 뒤 자신은 다시 여기로 돌아와서 수색을 돕자고 결심했다.하지만 주재상은 오히려 하산하고 싶지 않다며 여기서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겠다고 했다.“우리가 이렇게 가면 그들이 돌아와서 우리가 없는 걸 보고 분명 당황할 겁니다. 전 안 가요. 전 여기 남아서 그들을 기다리겠어요.”원경릉이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니 그들도 우리처럼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어쩌면 벌써 찾아서 하산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우리도 얼른 하산해서 그들과 합류하죠.”원경릉은 사실 태상황과 소요공이 걱정됐지만 주재상쪽 상황이 더 위급하다고 판단했다. 수술을 앞둔 사람이라 반드시 모든 지표를 확인하고 수술 가능 여부를 판단할 수술전 검사가 필요했다.그래서 빨리 입원하자고 주재상을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주재상도 산에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는 시간 낭비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빨리 출발하는 게 낫겠다 싶어 원경릉 말을 듣고 함께 하산했다.하산하는 길에 카메라, 휴대전화 등 각종 촬영기재들이 두 사람을 향하고 있어 한밤중이 대낮같이 환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떠드는 소리가 뒤섞여 있어 정신이 없었다. 마침내 잃어버린 엑스트라를 찾았다는 말에 모두가, ‘그런데 무슨 드라마지? 이렇게 예쁜 배우가 고작 엑스트라라고?’라며 수군댔다. 원경릉은 얼떨떨한 게 영문을 모르겠지만 차마 주변 경찰에게는 물을 수가 없었다. 말이 많아지면 결국
한 시간 남짓 걸어 마침내 그들은 산 아래 지휘 본부에 도착했다. 주진과 원경주가 입구에 서 있다가 멀리서 원경릉과 주재상이 오는 것을 보고는 감격에 벅찬 표정으로 달려갔다. 정말 그들이 성공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원경주는 바로 엄마에게 전화해서 울먹였다. “엄마, 찾았어요. 드디어 찾았다고요!”수화기 너머 감격해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원경릉과 주재상이 산에서 나오자 기자들이 다가와 마구 사진을 찍어 대는데 경찰들이 기자를 재빨리 쫓아냈다. 모든 게 다시 고요해지자 원경주가 여동생을 보고 눈시울을 붉히며 감격해 약간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 여긴 바람이 차.”원경릉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그렇게 네 명이 지휘 본부 안으로 들어가자, 경찰이 따라 들어와 로양에게 아직 두 사람은 못 찾았다는 내용을 보고했다. 그러자 로양이 원경릉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같이 넘…. 실종된 거 아니었습니까?”주진은 원경릉이 이 사람을 모를 거란 생각에 얼른 귓속말했다. “이분은 안풍친왕비의 어머니이신 로 국장님으로, 경찰들에게 수색을 명해 실종된 엑스트라…. 그러니까 당신들을 찾으라고 명하신 분이에요.”원경릉이 알아듣고는 감사한 마음에 로양에게 무의식적으로 예를 취하려다가, ‘맞다 여기는 북당이 아니지’라 생각이 들어 얼른 자세를 고쳐 살짝 붉어진 눈으로 로양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희가 산속을 오래 헤맸는데 나가는 길을 못 찾았어요. 저와 다섯째 할아버지는 힘이 달리고 지쳐서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상태라 18째 할아버지와 여섯째 할아버지가 사람을 찾으러 하산하셨는데 결과적으로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로 국장님, 그분들은 길이 익숙지 않은 분들로, 이곳은 잠재적인 위험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계속 사람을 보내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로양은 너그러운 눈빛으로 원경릉을 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옆에 서 있던 양여혜에게 말했다
“안돼요. 우선 병원부터 가야 해요. 당장이라도 수술을 받으셔야 해요.” 원경릉이 주재상을 보며 말했다.주재상이 의혹의 빛을 띠고 한참 망설이다가 물었다. “말씀하신 수술 치료라는 게 도대체 어떤 겁니까? 치료한 뒤에 제가 눈을 다시 쓸 수 있고,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건가요?”주재상은 원래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고, 단지 원경릉을 옆에서 지키고자 온 것이기에 자신의 수술에 대한 문제를 이제서야 제대로 고민하게 된 것이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재상, 안심하셔도 됩니다!” 원경주가 원경릉을 대신해 답하고는 끝에 한 마디 더 보탰다. “저는 당신의 집도의로 유사한 수술을 많이 진행했으며 이번보다 훨씬 복잡한 수술도 다 진행했어요. 성공률이 매우 높으니 걱정하지 마세요.”주재상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전 두려운 게 아니라, 단지….”“단지 태상황 폐하와 소요공이 곁에 계시기를 바라실 뿐이죠?” 원경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오랜 기간 의사 생활을 해 왔기에 곧 큰 수술을 받을 사람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속으로 무엇을 망설이고 어떤 심리적인 의지가 필요한지 말이다.주재상은 부인하지 않고 가만히 한 마디만 더했다. “저는 그저 그들의 평안한 모습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원경릉은 주재상이 두 사람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기에 한 가지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우리 다 기다릴 필요 없이, 제가 우선 재상과 병원에 가고 만약 양 선생님이 두 분을 찾으면 모시고 병원으로 와서 우리와 합류하는 것으로 하는 거예요. 어때요?”주 재상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원경주가 바로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죠.”원경주는 바로 차를 수배해 로양에게 감사 인사와 간단한 설명을 한 뒤 차를 몰고 떠났다.주 재상은 보이지 않아 자신이 타고 있는 차가 어떤 차인지 모르지만, 속도감은 잘 느낄 수 있었기에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이건 도대체 무슨 마차지? 어떻게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지? 이렇게 달리면 하루에 천리라고 가겠어!’이 나라가 북당을
주재상은 실명한 탓에 귀가 예민해져 원경릉과 엄마의 대화를 듣고는 순간 의구심이 들어 자신을부축하고 있던 주진에게 물었다. “태자비 마마께서 말하는 분께서 마마의 사부님이십니까?”주진이 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원경릉 오빠가 대신 말했다. “마마의 부모님이세요. 저는 마마의 오빠고요.”그러자 주재상은 깜짝 놀라 다시 물었다. “그럼 정후께서 이 곳에 계신단 말입니까? 마마의 오라비시면? 원륜문이 아닙니까? 어째서 목소리가 다른가요?”원경주는 약간 멍해졌다. 주재상은 얼굴에 의혹의 빛이 가득한채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은 데리고 왔으면서 아직 제대로 얘기를 안 한 것 같은데? 설마 유괴해서 데려온 건 아니겠지?’라며 생각했다.원경릉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 “일단 들어가서 다시 얘기해요.”…한편, 어떤 병원 응급실에서는 나이 든 엑스트라 두 명이 교통사고로 이송되었다. 같이 온 사람은 울상을 짓고 있는 사람으로 두 사람은 얌전히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응급실에 이송된 뒤 얼마 후 한 간호사가 와서 물었다. “다치신 분 성함은 어떻게 되시죠? 약물 알레르기 있으세요? 앓고 계신 지병이 있으신가요? 최근 어떤 약을 사용하셨죠?”두 사람은 벙찐 채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모르는데요. 우리 차 두 대가 접촉 사고를 내서 병원으로 데리고 온 거예요.”간호사가 미간을 찡그렸다. “경찰은요? 그럼 경찰부터 불러서 조사해야죠.”두 사람이 놀라서 물었다. “아직 경찰에 신고 안 했어요!”간호사가 ‘어머’하며, “경찰에 신고를 안 하고 어떻게 보상 책임을 져요?”라고 답답한 듯 물었다. 두 사람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쭈뼛거리며 말했다. “순간 당황해서 생각을 못했습니다.”“치료만 해주시면 우리는 보험이 없으니 보상 책임을 따질 필요가 없어요. 얼마가 나오면 둘이 나눠 내면 됩니다.”그러자 간호사는 고개를 저었었다. 이렇게 책임감이 부실한 사람들을 대하는 게 일 년에도 여러 차례였기에 치가 떨렸다. “의료비와 약제비는 나누실
“1번!”“1, 다음은요?”“그냥 1번!” 간호사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는데, ‘혹시 이 분들 머리 부딪힌 거 아닌가요?’ 하고 묻는 듯 했다.의사도 역시 우선 검사부터 해봐야 한다는 생각에 태상황에게 물었다. “지니고 계신 돈 있으세요? 두 분 상황이 당분간 생명의 위협은 없으므로 이어지는 검사는 먼저 수납부터 해야 해서요.”“나 있지!” 소요공이 순간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그제서야 응급실에 의사와 간호사들이 전부 안도하며 소요공이 소매 속에서 꺼내는 물건을 바라보았는데… 웬 금덩어리?!“왜 금을 가지고 와? 종이돈은 안 가지고 왔어?” 태상황이 꾸짖었다. “종이돈을 쓸 수 있을지 없을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금은 공용이잖아요!” 소요공이 말했다.의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어르신, 드라마 소품은 넣어두세요. 가족 전화번호를 기억 못 하시겠으면 제가 주임에게 물어볼게요. 일단 검사부터 하고 수납할 수 있는지 봐야겠어요. 사실 두 분 연세에 차 2대에 치이신 거면 상황이 매우 심각한게 정상일텐데 초기 검사결과로는…. 에휴, 됐습니다. 일단 엑스레이 부터 찍으러 가시죠.”의사가 두 사람을 보고 아이러니를 느낀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였다. 이 둘이 처음에 왔을 때는 허리가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고 했는런 지금은 일어나서 다리도 움직일 수 있고 아픈 증상이 없는 것이 오히려 머리에 좀 문제가 있어 보였다. 계속 영문을 모르겠는 말과 영문을 모르겠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주사기를 무는 게 마치 예전 시대에 담뱃대를 무는 모습과도 같았다.의사는 돌아 나가며 간호사에게 계속 그들에게 이름과 집 주소 및 가족 정보를 물어보라고 했다.“어르신” 간호사가 노트를 들고 한숨을 쉬며, 이름, 나이, 집 주소등을 물어보았고, 태상황이 답했다. “과인은 우문호, 52세, 과인은 평생을 황제와 태상황을 역임했다네.”소요공이 킥킥 웃었다. “고작 52세라고? 72세겠지!”태상황이 얼굴을 굳히고는 엄숙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검사실에 보내자 의사가 금을 간호사에게 건네주었다. “잘 뒀다가 나중에 저분들께전해주세요.”간호사도 금을 들어보니 꽤 무거워서 무게를 재자 정말 금 열 돈의 무게와 같았는데 색을 보니 순금 같지는 않았다. ‘요즘은 드라마 소품을 이렇게 진짜 같이 만드나?’간호사가 잠시 생각해 보다가 얘기했다. “주임님께 좀 봐달라고 하죠, 만약 정말 금이면 잃어버리면 큰일이니깐요.”…소요공과 태상황은 CT실에 도착했다. 태상황은 방금 진짜 이름과 신분을 얘기한 것을 생각하고 나중에 문제시되지 않을까 싶어 소요공에게 잔소리해댔다. “저 사람들이 또 물으면 넌 자기 이름이랑 신분 얘기하지 마.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고 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지 않는 틈을 타 우리 몰래 달아나자. 조금이라도 빨리 산으로 돌아가야지. 다들 산에서 얼어 죽었을까 봐 걱정이야.”소요공이 작게 속삭였다. “저 사람들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잖아요. 우리가 꼭 싸워서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그러니까 말이다.. 일단 지켜보자고. 먼저 모험하지 말고. 어쨌든 길도 낯설고 정말 무슨 상황이 생기면 금위위가 없는 상태니까.” “알겠어요. 태자비 마마를 번거롭게 해선 안 되죠, 기억하겠습니다.” 소요공이 말했다.CT실 문이 닫히자 간병인이 두 사람 몸에 금속을 지닌 게 없는지 묻고는 전부 벗으라고 했다.소요공이 ‘알겠다’하고는 소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는데 금 한 덩이, 두 덩이, 세 덩이, 네 덩이, 다섯 덩이.... 수도없이 나왔다. 태상황이 멍하니 보더니 놀라 또 잔소리를 해댔다. “넌 뭘 그렇게 들고 왔어!”“돈이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기 힘들잖아요. 궁에만 오래 계셨는지 바깥세상 현실을 아무것도 모르시네요.제가 금을 좀 가지고 있어야 그나마 먹고 마실 걱정이 없죠.” 소요공이 말했다.CT실 의사와 간호사는 눈이 커지고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거 정말 금이야?’간병인이 빼놓은 금을 잘 보관해 두고 순서대로 들어가게 한 뒤 CT를 찍었는데 무슨 전
주재상이 고분고분 들어가는 것을 보자마자 원경릉은 바로 주진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소식이 있었는지 물었다.주진도 전화를 걸어봤는데 양여혜가 아직 찾지 못했다고 했다. 주진은 원경릉에게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어서 아직 찾고 있는데 산이 너무 커서 아마 한두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원경릉은 조금 걱정이 됐다.CT촬영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릴 필요 없이 병실로 올라갔는데 원 교수는 주 재상을 위해 1인실을 배정해 주었다.주 재상이 온 지 10여 분이 채 되지 않아 원 교수가 보고서를 들고 와서 주 재상과 원경릉에게 얘기했다. “네 추측과 별반 차이 없이 뇌경부에 출혈이 있고 핏덩어리가 신경을 압박해 실명을 일으킨 거야. 지금 아직 신경이 괴사한 흔적은 없지만 시간을 더 끌 경우 좋지 않을 수 있으니, 수술은 빠르면 빠를 수록 좋겠어. 그러니 내일 하도록 하지.”원경주가 CT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아빠. 그럼 이 수술은 제가 하죠. 그리 복잡한 게 아니니깐요.”“좋아, 네게 맡기마!” 그러고는 원 교수가 주재상을 바라봤다. 이 사람이 만두와 우문호에게 듣기로는 북당의 중신이며 재상으로 평생을 북당을 위해 노심초사한 충신이라고 했다. 원 교수는 이런 위대한 인물이 자신의 앞에 있으니 숙연한 마음과 함께 존경심이 들었다.막 몇 마디 인사를 나누려는 찰나 주재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냄새를 맡았어요. 분명히 십팔매입니다. 태자비 마마 어서 나가 보세요. 그들이 찾아왔어요!”원경릉이 듣자마자 막 문을 밀어서 열려고 하는데 간호사 하나가 달려오며 원경주에게 말했다. “원 선생님, 방금 환자 두 분이 응급실에서 왔는데, 56, 57번 베드로 호 선생님께서 원 선생님이 좀 와서 봐주셔야겠다고 하셨습니다. 환자 두 분은 뇌진탕인데 2회 토했고 얌전히 있지를 않고 계속 도망 다니신다고 합니다.”“제가 가서 보죠.” 원경주가 말했다.간호사가 주 재상을 흘끔 보더니 신기해했다. “정말 신기하네요, 56, 5
원경릉은 화들짝 놀랐다. 태상황이 진지하게 청진기를 꽉 쥔 채 주변 의사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자신에게 건네주는 것을 보니 저 청진기는 이 의사에게 빼앗은 모양이었다.원경릉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도망치기도 힘든 상황에 자신을 잊지 않다니. 원경릉은 청진기를 받아 들고, “어떻게 절 위해 이것까지 신경 쓰실 생각을 다 하셨어요?”태상황이 입을 열었다. “여긴 내가 모르는 곳인 데다, 사람들이 다 소복을 입고 있어서 과인이 영 마음이 헛헛했는데 이걸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놓였거든.”소복? 원경릉이 무심코 태상황의 눈이 향한 곳을 따라가 보니 옆에 서 있는 의사와 간호사로, 그들은 흰 가운을 입고 있었다…. ‘아, 이거 심각하게 오해하셨네.’“주 꼬맹이는?” 태상황이 다시 물었다.원경릉은 소요공도 그렇고 둘 다 걱정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얼른 대답했다. “괜찮으시니 걱정하지 마세요. 막 검사 마치고 병실로 오셔서 수술을 기다리시는 중이세요.”“그럼 우리 셋이 같이 있게 해주면 되겠구먼!” 소요공이 얼굴을 들었다.원경릉은 오빠에게, “그렇게 할 수 있어? 저분들 떨어져서 못 지내시거든.”오빠가 말문을 열었다. “좋아, 그렇게 할 게. 재상께서 이 수술이 어떤 건지 이해를 잘 못하셔서 긴장하고 계시더라. 있다가 수술을 위해 이발할 때는 더 긴장하실 수 있는데 친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훨씬 나으실 거야.”원경주가 호 의사에게 얘기했다. “호 선생, 내가 조치하면 되니까 가서 일 봐요!”“그러죠!” 호 의사는 두 노인을 한 번 더 바라보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드라마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저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또 그런 것 같지도 않은 게 호칭이나 대화가 꾸밈이 없었다.병실을 옮기며 두 사람 짐을 챙기던 원경릉은 소요공의 침대에서 봉지 하나를 발견했다. 누런 비닐봉지가 묵직했는데 들려고 하자 옆에 있던 호 의사가 얼른 얘기해 줬다. “이 구리 덩어리 무거워서 바닥을 받치고 들어야지, 안 그러면 봉지 찢어질걸요.”구리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란이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다. 우문호는 소월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목여 태감이 계속해서 설득했다. 그는 공주가 아직 어리니,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며, 그저 택란이 다른 어린아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목여 태감은 혹시라도 황제가 공주를 꾸짖을까 봐 걱정되어 공주를 감쌌다. 그의 약한 마음은 그런 걸 감당하지 못했다.마침내 택란과 원경릉이 도착했다.우문호는 작은딸이 원경릉의 뒤에 숨어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원경릉이 딸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가봐라,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택란은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우문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자기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바마마, 저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우문호는 딸의 손을 잡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는 눈빛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약도성에 얼마나 있었느냐?”택란은 거짓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솔직히 대답했다.“지난번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온 후 바로 약도성으로 갔어요.”우문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모두가 알고 있었으면서, 나만 속였단 말이냐?”택란은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를 껴안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우문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원경릉이 다가가 말했다.“아이가 자네 선물을 많이 샀소. 한번 보시게.”“필요 없소!”우문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딸을 뿌리칠 마음은 없지만, 그는 여전히 속았다는 사실에 너무 힘들었다.원경릉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서로 비밀이 없기로 약속했건만, 그 약속이 깨진 것 같아 화가 났다.원경릉은 그의 표정을 보고 더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깨달았다.오는 길 내내 택란만 걱정하며 우문호에게 딸을 변호해 주려 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를 속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한 일을 이야기하며 원경릉을 기쁘게 했다.다섯째는 이전에 다섯 개의 성을 위해 적어도 30년이나 50년의 계획이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20년이 채 되지 않아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가 국경 방어뿐만 아니라 조정에 세금을 납부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보였다. 아이들이 현대의 경험을 참고하며 지내는 것이 다섯째의 큰 걱정을 해결해 준 것이었다. 약도성은 이번 지진으로 국고의 돈과 주변 주현의 자원을 사용했다. 북당과 약도성의 백성들의 마음이 끈끈히 묶여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중증 환자들이 회복된 후, 원경릉은 택란과 함께 경성으로 돌아갔다.출발하기 전에 비둘기를 통해 다섯째에게 소식을 전하며 심리적 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이렇게 하면 다섯째가 택란을 보았을 때 마음을 가라앉혀 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택란은 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슬퍼할까 봐 사실 마음속으로 몹시 두려웠다.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그녀또한 잘 알고 있었다.돌아가던 중 택란은 아버지에게 줄 선물을 사자고 제안했다. 원경릉은 딸의 강한 생존 본능에 웃음을 터뜨렸다. 딸이 아버지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니, 다섯째가 딸을 그렇게 아끼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님을 느꼈다.“너희 아버지께서는 특별한 취미가 없으시고, 그저 술 한잔하는 걸 좋아하시니까 좋은 술 몇 병 사 가는건 어떠냐?”그러자 원경릉이 먼저 제안했다.“좋습니다! 사요! 많이 사서 마차에 싣고 가겠습니다!”택란이 급히 대답하자 원경릉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섯째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자상한데도 아이들이 그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물론 이는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이고 사랑이지만 말이다.경성에서 우문호는 원경릉의 서신을 받자마자 열어보았다. 편지를 읽는 순간 그는 멍해졌다.“계란이가 약도성에 갔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 그렇게 얌전하던 딸아이가 몰래 약도성에 갔을 리가 없어.”더구나, 셋째와 넷째는
약도성의 건물 대부분이 무너져 백성들은 임시로 지은 오두막과 초가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폐허로 변한 도성은 눈에 보이는 곳마다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원경릉은 마음속 깊이 안타까움을 느꼈다.택란의 뜻으로 중증 환자들은 모두 저택으로 옮겨졌다. 원경릉은 계란이의 결정이 매우 옳다고 생각했다. 중증 환자들은 그녀와 몇몇 의원이 책임지고 돌보았고, 나머지 의원은 경증 치료를 맡았다.택란은 엄마 곁에 머물며 환자를 돌보는 것을 도왔는데, 기본적인 의술을 알고 있어서 소독과 붕대 감는 일을 도왔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통증이 심해 참기 어려웠고, 진통제를 먹이거나 진통 주사를 놓았다. 택란도 주사를 놓을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쉬지 않고 바쁜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본 환자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그들은 궁에서 자신들의 생사를 진정으로 걱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황후마저 직접 왔으니, 예전의 대립과 적대감은 유치한 웃음거리로 느껴졌다.저녁 무렵,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왔지만,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없이 서로 포옹한 뒤 다시 각자 사람들을 구하러 나섰다.백성 중 자발적으로 음식을 만들고 약을 끓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저택 내 물자는 부족했으나 주변의 도움이 끊이질 않았다. 호명은 사람들을 조직해 식량과 의복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의 약도성엔 인간의 이기심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했다.황후가 직접 약도성에 온 덕분에 서북 지역의 신하들도 직접 의원과 물자를 이끌고 약도성에 와서 돕기 시작했다.약도성은 전례 없는 관심을 받았고, 이는 약도성 백성들이 다섯 도시 중 가장 빠르게 조정을 인정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구하고 재난 이전의 상태로 빠르게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다.재난이 발생한 지 반달이 지나면서 발견된 것은 모두 희생자뿐이었다. 인원을 파악한 후 한곳에 모아 장례를 치렀다.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5만여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 숫자는 매우 끔찍했지만, 택란의 사전
북당의 황후가 의원을 이끌고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믿지 않았다. 약도성의 백성들조차 믿을 수 없었고, 감히 믿을 엄두도 없었다.우문택란이 이미 약도성에 왔지만,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에 불과했다. 다들 그저 그녀가 약도성에 놀러 왔고 수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이후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녀의 비범한 능력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약도성의 성주로서 약도성에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초토화되었고, 재건하려면 조정이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북당의 조정이 약도성을 방치하고 자연적으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어도 어쩔 수 없었다. 약도성 백성들은 줄곧 조정을 적대시하였기 때문에, 조정이 이들을 구할 이유가 없었다.그런데 황후가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약도성은 조정이 이렇게까지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지진 발생 열흘째 되던 날, 원경릉 황후가 이끄는 의원들이 약도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낮없이 말을 갈아타며 전력으로 달려왔다. 약도성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하며 황후께서 약도성에 오신다고 얘기를 전했다.사람들의 생각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지진 이전까지만 해도 조정을 적대시하고 북당을 적국으로 여겼던 약도성 백성들이, 이제는 원경릉을 환영하며 열광적으로 맞이했다. 이는 택란이 지진을 미리 알아차린 것과 구조 활동 덕분이었다.원경릉은 백성들의 뜨거운 환영을 예상하지 못했다. 말을 타고 앞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고, 그녀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어머니!”군중 속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경릉은 단번에 딸을 찾아내고 말에서 내려 달려갔다. 택란은 엄마 품에 안기자마자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어머니,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너무 많아요!"택란이 흐느끼며 말했다.원경릉은 딸이 이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원경릉은 딸을 품에 꼭 안
택란은 어릴 적부터 화염을 다루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그녀는 내면의 감정을 철저히 억눌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염을 제어하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스승님을 따른 후, 스승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약점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정의 틈새가 생기면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항상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일을 담담히 대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진심 어린 감정을 흔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녀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꼬마 봉황이 날개를 펼쳐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었다.그들은 수년간 서로를 지지하며 함께 성장해 왔고,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잠시 후, 택란은 다시 구조 현장으로 나갔고, 여전히 평온하고 흔들림 없는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섰다.위왕과 안왕은 어린 조카의 침착함에 깜짝 놀랐다. 겨우 여덟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아이의 천성은 어디로 간 것인가?그들은 택란이 애초에 아이로서의 천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태어난 후, 조금이라도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빠르게 세상을 이해하며, 지혜롭고 노련한 어른처럼 모든 것을 맞서야 했다.사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그녀를 한두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사랑하고 아껴주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기대나 요구가 없었으며, 능력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그녀의 모든 행동을 걱정하고 감시하지 않았다.아버지 앞에서 그녀는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약도성의 일이 안정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번 약도성 방문은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놀이가 아닌 실습이었다. 이곳은 그녀의 의지와 감정을 단련할 수 있는 장소였고, 실제로 그녀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구조 작업은 계속되었고, 지진이 발
한 마을 주민이 눈물을 닦으며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원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오. 조정은 우리를 모조리 죽이길 바라오. 우리가 죽어야 조정은, 이 약도성을 완전히 삼킬 수 있소.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소.”택란은 화가 나서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내가 여기에 왔잖냐! 빨리 계속 파시게!”주민이 그녀를 힐끔 보며 물었다.“웬 꼬마가, 넌 누구냐?”택란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어둠 속이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여기 있는 걸 보고 다들 의아해했다.“약도성의 성주, 우문택란이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뒤, 산사태가 난 지역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작은 몸집이 시선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작아 보였다.황실의 공주라는 말에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공주가 이런 곳에 직접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저택 안에서 잘 보호받고 있어야 할 존재다.그녀는 알 수 없는 힘을 사용해 접근한 곳의 흙을 한 겹씩 옮겨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울부짖는 소리와 구조 요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가 급히 구조 작업에 참여했다.약도성의 지진은 강북부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낡은 집도 무너졌지만,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 약도성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위왕과 안왕은 신속히 구조 병사를 파견했다. 그들은 택란이 약도성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들 여태껏 택란이 스승과 함께 떠났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의 네 오빠들은 바로 병사를 데리고 약도성으로 향했다. 지진 발생 12 시진 후 약도성에는 8천 명 이상의 병사가 합류했다.약도성의 백성은 조정이 지원군을 보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정이 약도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과거에도 가뭄, 메뚜기 떼, 산사태 등의 재난이 일어났지만, 북막조정은 몇 포대의 쌀만 보내며 형식적인 구조를 했을 뿐이다.약도성
지진이 발생하기 전, 호명과 주 아가씨는 약도성 중심부에서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새벽녘은 사람들이 가장 피곤할 시간이다.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백성들은 분노했다. 그중 한 집안은 도축업을 하는 홀아비가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새벽 무렵에야 돼지를 잡고 고기를 나눠주고 돌아와 잠자리에 든 참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잠에서 깨어난 데다 아이까지 깨우니,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옆집 사람은 칼을 들고 나가 저들을 쫓아내면 다시 잘 수 있다고 부추겼다.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상황이라 아들을 방으로 데려다 놓고, 즉시 칼을 들고 나가 주 아가씨와 맞섰다.그가 칼을 휘두르며 집안 식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온 그 순간, 지진이 발생했다. 그들은 자기 집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먼지가 자욱했고, 곁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옆집 역시 무너졌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집 처마 아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깔려 있었다.“아들! 아들아!”홀아비는 그제야 안으로 데려다 놓았던 아들을 떠올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집은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 겨우 세 살밖에 안 되는 아들은,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했다.그는 미친 듯이 벽돌과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주 아가씨와 호명도 서둘러 도왔다.지진은 단 몇 초 만에 일어났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고, 그 결과 무너진 집에 깔린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약도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사방에서 울부짖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평소 조정과 맞서던 이들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해 보였다. 그들의 처절한 울음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다.홀아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다들 함께 벽돌을 치우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도구가 없어서 맨손으로 작업해야 했다. 주 아가씨의 손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흙벽을 밀어내고 벽돌을 옮겼다.반 시진 후, 주 아가씨가 마침내 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는 다리를 크게 다쳐 엉엉 울고 있었다. 홀아
“그럼... 호명, 가십시다!”주 아가씨는 왠지 모르게 택란의 말을 믿었다.호명도 주 아가씨의 말을 듣고 동의했다. 그의 생각은 단순했다. 지진이 생기지 않으면 백성들을 귀찮게 한 정도로 끝날 테지만, 정말 지진이 발생한다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게다가 약도성의 백성들은 조정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더 미움을 사도 중요하지 않다.일행은 즉시 돌아가 병사들을 소집해 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백성에게 넓은 곳으로 대피하라고 알렸다.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난 백성은 역시나 원치 않았다.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병사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성주가 단호하게 명령한 일이었기에, 백성들은 마지못해 끌려 나갔다.그러나 문제는 강제로 밖으로 끌어낸 사람들을 계속 감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떠난 후 많은 백성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게다가 일부 폭도들은 이를 계기로 병사들과 정면으로 맞서며 심각한 충돌을 일으켰다.부분 병사가 백성들이 소란을 피우는 마을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마을은 거의 조정을 적대시하는 곳이었다. 너무 외진 곳이고 여인도 적은 곳이라, 이곳 남자들은 혼사도 치르지 못하고 가난하게 지내고 있었다. 하루 세 끼를 유지하기조차 힘들었고, 금나라의 선동이 더해져 이 지역의 상황은 더욱 악화하였다. 이 몇몇 마을에서 15세 이하의 아이들은 열 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병사들이 징과 북을 울리며 백성을 깨우자, 폭도들이 화를 내며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몸싸움이 벌어졌고, 20여 명의 병사들이 이들에게 압도당해 심하게 얻어맞았다.결국 병사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약도성에서 대피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 약 만 명 정도였다. 대부분 병사가 떠난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조정이 백성을 괴롭힌다고 욕하며 약도성에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이에 주 아가씨가 분노를 참지 못해 말했다.“성주께 말씀드려서 집을 전부 불태워버리자고 해야겠습니다! 정말 너무합니다.”호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녁 무렵, 그들 일행은 출발했다.약도성의 밤은 전혀 활기가 없었다. 해가 지고 나면 거리에서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수년간 치안이 매우 나빴다. 비록 저녁에 병사들이 순찰하고 있지만, 백성들은 이미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덕분에 이번 외출은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약도성이 가난하다 보니, 부유한 이들의 저택만 튼튼할 뿐, 대부분의 집은 돌집이나 흙집, 나무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초가 거의 다져지지 않은 상태여서 지진이 발생한다면, 대부분의 건물이 버틸 수 없을 것이다.택란은 이 점이 걱정되었지만, 아직 지진이라 단언할 수 없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길한 예감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그녀는 꼬마 봉황에게 물어보았고, 꼬마 봉황이 하늘로 날아올라 몇 바퀴를 돌며 주변을 살폈다. 새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것을 본 꼬마 봉황은 택란에게 알렸다. 그녀의 불안감이 점점 더 커졌다.택란은 호명과 주 아가씨에게 자신의 걱정을 털어놓으며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호명과 주 아가씨는 믿지 않았다. 약도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만 지진이 발생하였다.주 아가씨가 말했다.“오늘 밤하늘을 보니 지진운 같은 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걱정하신 것 같습니다.”“지진운은 믿을 수 없소. 강가로 한번 가보시게.”이곳에는 바다가 없고, 산을 따라 흐르는 큰 강만 있었다.다들 풍등을 들고 강가로 향했다.강물의 흐름은 빠르지 않았고, 눈에 띄게 가뭄의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물 높이는 겨울이나 봄에 비해 많이 낮아졌고, 어떤 곳은 강바닥이 드러나 있었다.택란은 풍등을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강물은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아마도 수심이 얕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이곳에 샘물이 있소?”택란이 주 아가씨에게 물었다.“있습니다. 여기서 2리 정도 떨어진 곳에 큰 샘물이 하나 있는데, 근처 주민들이 그곳에서 물을 떠다 마십니다.”“좋소. 가보겠소!”택란이 말했다.일행은 다시 큰 샘물로 향했다. 주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