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평공주 앞에서 잘못을 시인한 원경릉원경릉은 할 수 없이 눈 딱 감고 낙평공주와 마주했다.낙평공주는 냉랭하게 원경릉을 쳐다보고, “듣자 하니 초왕비가 와서 여섯째의 병을 치료한다는데 초왕비에게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 주변에서는 모르지만 나는 잘 알고 있지요. 내 집에서 저질렀던 그 일에 대해 아직 따진 적이 없죠. 초왕비는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회왕부에 와서 허장성세를 떨며 속임수를 쓰는 겁니까.”원경릉은 낙평공주의 분노를 너무도 이해한다.자신의 생일 잔치는 친구와 지인을 불러 축하하는 자리라, 원래는 상당히 체면을 차리는 자리로 식사를 하거나 연극을 보는게 정상인데, 낙평공주는 자신이 부른 연극배우들보다 정후부 부녀가 그렇게 연기가 출중할 줄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황실의 체통에 먹칠을 했을 뿐 아니라, 그런 비열하고 상스러운 일에 낙평공주가 이용당했다는 사실이 가장 끔찍했다. 그녀의 명예가 일순간에 금이 가고 말았다.악의 축인 원경릉은 방금 기왕비에게 하듯 그렇게 당당할 수 없었다. 주명취에게 배운 걸 바로 써먹어 속 눈썹을 내리깔고 애처롭고 불쌍한 모습으로 작게: “아바마마께서 교지를 내리셨습니다.”“네가 지금 아바마마의 이름을 들먹이며 나를 위협하려는 것이냐?” 낙평공주가 눈썹을 치켜세웠다.“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원경릉은 얼른 손을 내젓고 위축된 모습으로, “사실 저도 아바마마께서 왜 이런 교지를 내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낙평공주는 본래 한바탕 쏘아붙이려고 했으나, 막상 그녀의 불쌍한 모습을 보니 울화가 도리어 수그러들었다.하지만 기왕비는 이때다 싶어,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만은 없어 힘껏 낙평공주를 도왔다.기왕비가 웃으며 앞으로 나와 위로하는 얼굴로, “초왕비, 치료에 관해 공주와 얘기를 나누면 되겠군요, 오늘 초왕비가 나와 노비마마께서 병을 치료하는 규칙을 모른다고 질책했잖아요, 공주는 식견이 넓으니 잘 이해하실 거예요. 초왕비가 공주에게 얘기를 해 드리는 편이 좋겠어요. 공주의 마음 속 의혹도 가시도록 말이죠
원경릉과의 키스를 반추하느라 넋이 나간 우문호특히 노비는 진심으로 감동한 눈치다.원경릉은 거하게 욕을 먹을 상황이었으나 결국 어째서인지 모두의 용서와 양해를 얻었다.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듯한 그런 용서와 양해였다. 주명취는 먼 곳에 서서 조용히 원경릉의 말을 듣고 있었다.주명취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극도로 요동치고 있었다.원경릉, 진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앞으로 원경릉이 회왕부에 있어도 아무도 그녀를 흘겨보며 수근거리지 않을 것이다.우문호는 키스 뒤 바로 관아로 갔다.마차에서 우문호는 찬찬히 키스를 다시 음미하는데 생각만 해도 전신에 힘이 빠지고 뼈까지 다 녹아버리는 것 같다.우문호는 오늘은 종일 키스를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관아가 바빠도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니다. 한 무더기의 일을 처리하고 수많은 안건을 확인하느라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띵 해져서 눈을 감고 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쉬고 있는데 오늘 회왕부에서의 그 일이 또 떠오른다.가슴이 쿵쾅거리고 심장이 요동치니 마음이 자꾸 콩밭으로 간다.“왕야, 왕야…”우문호는 번쩍 눈을 뜨며 탁자를 쾅 치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소리치며, “왕야가 동네북이야 왜 자꾸 불러, 나 좀 쉬면 안돼?”보좌관이 당황해서 한걸음 물러서며 한쪽에 찌그러져 있는 서일을 째려보며 눈빛으로 묻길, 누가 왕야 기분 상하게 한 거야?서일도 황당한 게 방금까지 계속 서서 자고 있느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고!우문호는 한마디 화를 내더니 냉정을 되찾고 보좌관을 쳐다보며: “무슨 일이야? 얘기해!”하아, 보좌관의 얼굴은 푸석푸석하다. 눈 호강을 시켜주는 원경릉의 보드라운 얼굴에 비할 수가 있을까? 계란처럼 탱탱한 얼굴은 꾹 누르면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이 있다.보좌관이 보고하길: “취작 거리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일가족 4명중 생후 일주일 된 영아를 제외한 3명이 죽은…..왕야, 지금 웃고 계십니까?”보좌관은 오싹한 기분으로 우문호를 바라보는데 우문호는
우문호가 사건의 세부 사항을 묻고 난 후, 포도대장과 아역(衙役)의 보고를 기다렸다. 시체 부검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잠깐 사이에 벌써 날이 저물었다. 그가 경조부를 떠날 때는 이미 술시(戌時)가 지난 시간이었다. 그는 서둘러 회왕부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원경릉과 낙평공주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공주댁 사건 이후, 삼황 누이(三皇姐)가 원경릉을 그닥 좋게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둘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낙평공주는 자신과 원경릉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는 우문호를 보면서 웃어 보였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다섯째 안색이 어두워보이는데 어디 아픈겐가?”낙평공주가 물었다. 우문호는 원경릉을 힐끗 보았다. 원경릉은 어색한 모습으로 찻잔을 들고는 그에게 슬그머니 눈짓을 보냈다. 우문호는 그런 원경릉을 보고 웃음이 터져나왔다.“삼황 누이, 관아에 일이 많아서 좀 피곤해서 그런가봅니다.”“피곤하다고요? 그럼 왕비와 빨리 댁으로 돌아가시게.” 낙평공주가 말했다.“그래도 여섯째는 보고 가야죠.”우문호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리는데 낙평공주가 그를 말렸다.“지금은 들어가지말게나. 방금 잠에 들었습니다.”낙평공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원경릉을 보았다.“본궁은 처음에 부황이 원경릉을 시켜 여섯째의 병을 치료하게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오늘보니 부황이 옳은 결정을 하신 것 같아. 기침도 적었고, 지금까지 피를 토한 적도 없으니, 상황이 호전된 것 같네.” 라고 낙평공주가 말했다.이 말을 들은 우문호는 그제서야 삼황 누이가 원경릉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는지 이해가 갔다.“삼황 누이. 그럼 저희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우문호가 낙평공주를 보고 말했다.“가보게. 내일 아침엔 일찍 오시게나.”우문호와 원경릉은 밖으로 나왔다. 원경릉은 희상궁에게 회왕부에 남아 회왕이 약을 먹는 것을 지켜보라고 했다. 그녀는 회왕이 약을 먹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다른 사람이 약 먹는 것을 방해할까 두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발정이라도 난 것일까?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나를 조금이나마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 걸까?원경릉의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갑자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우문호는 그녀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보고 심장이 바닥으로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긴장되는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의 힘이 어찌나 세던지 원경릉이 손을 빼며 꽥 소리를 질렀다.“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아팠느냐?” 그가 원경릉을 보며 물었다.원경릉은 자신에 무릎에 손을 올리고 난처한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조금 아팠어.” 라고 말했다.“지금도 아파?”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니야 지금은 괜찮아.” 원경릉이 고개를 저었다.“아…… 응.” 우문호는 그녀의 무릎에 올려진 가느다란 손을 한번 쳐다보며 다시 잡을까 말까 망설였다.손을 잡고 싶어 몇 번이나 움찔거렸지만, 결국 용기가 나지 않아 포기했다.‘서일은 오늘 어찌 이리 평온하게 마차를 모는 것일까? 전에는 이리저리 흔들려 원경릉이 나에게 기대기도 했는데 말야.’우문호가 속으로 서일을 욕하고 있는데 갑자기 원경릉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피곤해서 조금만 기댈 게.”원경릉이 조용하게 그에게 속삭였다.기댄 그녀의 머리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는 곧게 허리를 펴고 앉아 그녀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어 끌어당겼다. “이러면 좀 더 편하지 않아?” 우문호가 조용히 말했다.“응.” 원경릉이 대답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온몸을 그의 품속으로 묻었다.우문호는 갑자기 숨이 가빠져 고개를 푹 숙였다. 원경릉은 고개를 숙인 우문호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아 심장이 가빠졌다. 그는 그녀를 꼭 껴안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야 “원경릉?”하고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원경릉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고 숨을 헐떡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 “원경릉!”“응!”그러자 갑자기 우문호가 다가와 입을 맞췄다. 그렇게 몇 분이 지
서일은 주눅 든 모습으로 왕부로 들어가더니 회계방으로 문방사보(文房四寶)를 찾으러 갔다. 회계방을 지키는 선생은 서일의 사촌동생이었는데, 서일이 느닷없이 들어와서는 선지(宣纸) 1000장이 필요하다고 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렇게나 많이? 그럼 창고에서 가져와야 하는데, 탕대인(汤大人)에게 열쇠를 받아서 직접 가져가세요.”서일은 하는 수없이 탕양을 찾으러 갔다.탕양은 장부를 꺼내 기록을 하던 중에 서일이 들어와 선지 1000장을 가져가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그렇게나 많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많은 종이를 어디에다가 쓰게?” 탕양이 물었다.“탕어른, 저 좀 도와주세요.” 서일이 울상이 되었다.“무슨 일이야?” 탕양은 서일의 낯선 모습에 당황했다.“왕야께서 저에게 ‘예의염치’라는 네 글자를 천 번 베껴 쓰라고 벌주셨습니다. 예의는 쓸 수 있는데, 염치는 어떻게 씁니까?”이 말을 들은 탕양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이상하다. 자네야 염치가 없으니, 염치를 쓰라고 하신 건 그렇다 치고, 왕야께서 예의를 쓰라고 하셨다고? 자네 왕야께 예의 없이 행동했나?”“지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이렇게 불쌍한 저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놀리기나 하고! 앞으로 저도 탕어른을 도와주지 않을 겁니다!” 서일이 발을 동동 구르며 탕양에게 소리쳤다.“자네가 나를 언제 도와줬어?” 탕양이 웃었다.“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겁니다!” 서일이 말했다.탕양은 웃으며 창고 열쇠를 들었다. “어서 창고에 선지를 가지러 가자. 가는 길에 왜 왕야께서 그런 벌을 내렸는지 나에게 알려줘야 해.” 탕양이 웃으며 말했다.“마차가 왕부에 도착했으니, 장막을 걷고 왕야와 왕비께 내리라고 했습니다. 근데 마차 안이 더웠는지 두 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땀을 한 바가지를 흘리고 있지 뭡니까? 그리고 왕비의 옷 앞섶이 열려있길래 슬쩍 눈이 갔는데, 왕야가 욕을 하시지 뭡니까!”창고로 가는 길에 그는 탕양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이 말을 들은 탕양은 발걸음을 멈추고는 넋이
소월각에 도착하니 시중을 드는 청색 옷을 입은 서너 명의 시녀들이 있었다. 그들의 나이는 열다섯 살 내지 열여덟 살 정도로 보였으며 청순한 얼굴에 행동거지가 얌전한 것이 대갓집의 계집종의 소양을 띄고 있었다. 그들 몇은 원경릉에게 깍듯하게 대했으며 그녀가 식사를 하는 내내 옆에서 세심하게 시중을 들었다.원경릉은 우문호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폈는데 그들 사이에 묘한 기류라거나, 계집종을 귀여워하거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녀들의 눈빛에도 우문호를 향한 경외심뿐 다른 느낌은 없었다. 원경릉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자리 시중을 드는 여인이건 첩이건 다른 여자들과 한 명의 사내를 나누어 가질 바엔 차라리 갖지 않는 편이 낫다. 우문호는 소월각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원경릉이 시녀들을 뚫어져라 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풉’하고 소리를 냈다. 원경릉은 어리둥절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뭐가 웃깁니까?”우문호는 그녀의 하얗고 깨끗한 얼굴을 보았다. 이마에 작은 분홍색 흉터, 맑은 눈가, 들쑥날쑥하지만 빽빽한 속눈썹, 핏기를 머금은 붉은 입술, 그녀는 마치 활짝 피어있는 장미꽃 같았다.그는 지금 당장 원경릉을 번쩍 들어 올려 침대 위로 내동댕이치고 싶었다.원경릉은 불타오르는 우문호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숙이고 수저를 들었다. 그녀는 속으로 계속 그 문제를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이 우문호를 저렇게 만든 것일까?잠시 후,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사실대로 말해, 내가 어장(御杖)을 가지고 있어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지? 내가 어장으로 너를 내리칠까 봐?”우문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수저를 들어 탕을 한술 떴다. 목구멍에서 넘어갈랑 말랑한 탕을 겨우 삼키며 그는 방 안의 시녀들을 모두 내보낸 후 원경릉의 눈을 직시했다. 원경릉은 바짝 긴장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우문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내
원경릉은 온몸이 굳은 채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였다. 우문호의 뜨거운 눈동자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의 입술이 온기를 머금고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녀는 온몸이 나른해지며 눈을 감았다.“오늘 밤은 소월각에서 어때?”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원경릉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밀어냈다.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좀 혼란스러워서.”말은 마친 후 원경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어찌나 마음이 급했는지 단숨에 아주 멀리까지 뛰어갔다. 오래간만에 달리기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허리를 굽히고 두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이게 무슨 일일까? 이 둘은 원래 만나기만 하면 싸우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핑크빛 기류가 흐르는 사이로 발전하다니? 우문호가 원경릉을 좋아한다고? 그럴 리가 있나? 그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죽이고 싶어 이를 부득부득 갈지 않았는가?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다!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원하는 게 무엇일까? 돈? 돈은 우문호가 원경릉보다 많을 텐데. 지위? 우문호의 신분이 원경릉보다 높은데……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왕비, 괜찮으십니까?” 뒤에서 탕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경릉은 깜짝 놀라 휙 뒤를 돌아보니, 흰옷을 입은 훤칠한 모습의 탕양이 보였다.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탕양님. 저를 심장마비로 죽이려고 하십니까?” 라고 말했다.“왕비, 제가 무례했습니다!” 탕양이 미소를 지으며 “그런데 왕비님은 원래 이렇게 잘 놀라지 않으셨잖아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물었다.원경릉이 어찌 탕양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겠는가?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별일 아닙니다. 밥을 많이 먹어서 소화시킬 겸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탕양님의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지 뭡니까.”라고 말했다.“그렇군요. 근데 왕비 고민이 있으면 저에게 털어놓으십시오. 제가 비록 이래 보여도 알고 있는 게 많습니다.”탕양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원경릉을 쳐다보았다.당당한
기라가 우문호의 말을 듣고 한걸음 다가와 몸을 숙이고 “왕야. 소인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했다.우문호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손을 뻗어 볼을 꼬집었다.“왕야!”기라(綺羅)가 놀라서 멍해졌다.“가보거라.”우문호가 손을 휘휘 저었다.보기엔 다 똑같은 얼굴인데 왜 원경릉의 볼은 꼬집었을 때 느낌이 다른 걸까?기라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왕야 잠이 오지 않으신다면, 소인이 잠향을 피워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그래라.”우문호는 자꾸 떠오르는 원경릉의 모습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기라가 피운 잠향에 그는 점점 의식이 흐려지고 잠이 몰려왔다.몽롱한 기운이 감도는데 원경릉이 살금살금 들어와 침상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 잠이 안 와. 나랑 같이 좀 걷자!”원경릉이 조용히 말했다.우문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원경릉의 손을 잡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는 그녀의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보고 마음이 쓰였다.고요한 밤, 귓가엔 벌레들의 울음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이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정원엔 길모퉁이마다 걸려 있는 양각 풍등(羊角風燈)의 불빛이 사방에 흩뿌려져있었다.두 사람은 호숫가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밤바람에 겹겹이 일렁이는 호수 표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문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왜 아까 도망갔느냐?” 우문호는 작게 읊조리며 “너는 본왕을 보고 한 번도 마음이 동요된 적 없느냐?”라고 물었다.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당연히 있지. 널 좋아해.”“그런데 왜 도망갔어?” 그의 입술이 그녀의 뺨을 스치더니 이윽고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원경릉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의 앞에 서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비녀를 뽑고 긴 머리를 늘어뜨렸다. 밤바람에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위로 흩날렸다.그녀가 손으로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저고리의 깃을 내리자 희고 수려한 어깨가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움푹 파진 쇄골이 드러났다.우문호의 숨이 빠르게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