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호와 원경릉을 키스를 훔쳐본 주명취눈을 돌려보니 반대편 작은 나무 숲에 여인이 하나 서있다.그녀의 얼굴빛은 창백하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눈가엔 눈물이 맺히고 두 주먹을 꽉 쥐고 서있는 모습이 상당히 뻣뻣해 보인다.주명취다.거리를 두고 눈빛이 마주쳤다.증오와 질투가 미친듯이 뒤엉켜 있다.주명취는 증오로 원경릉은 민망함으로. 이 일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어서는 안되는 거였다.게다가 이 사람은 주명취다.주명취가 결국 천천히 걸어왔다.그녀의 눈물이 모두 삼켜버렸는지 얼굴에 있던 질투와 증오의 빛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주명취는 원경릉 앞에서 서서, 친절한 미소를 띠고, “실수로 보게 된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적이 가시를 세우지만 강철 칼 인들 겁날까, 원경릉은 당연하다고 느꼈다.하지만 지금 이 미소는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다.원경릉이: “저는 신경 안 쓰는데, 신경 쓰이세요?”주명취의 미소는 한층 사람을 미혹 시키며, “제가 왜 신경을 쓰겠어요? 전 기뻐요. 호 오빠가 드디어 행복을 찾았네요.”이렇게까지 위장을 해도 원경릉은 조금도 믿지 않았다.하지만 여전히 공손하게 , “고맙습니다!주명취와 어떤 충돌도 일으켜서는 안된다. 치료기간 동안 주명취가 앙심을 품거나 음모를 꾸미고 방해하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주명취는 깊은 원망의 눈빛으로, “사실 마음으론 상당부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있어요, 하지만 현실은 전 이미 제왕과 결혼했으니, 이전 일은 잊는게 맞아요. 전부 잊어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전에 했던 말이 맞아요. 자기가 선택한 길은 아무리 어려워도 이를 악물고 걸어가야 해요.”말을 마치고 주명취는 원경릉에게 절하며, “물에 빠진 일은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예를 갖춰 사과하더니 원경릉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서 가버렸다.원경릉은 어안이 벙벙했다. 갑자기 이렇게 온화하게 변하다니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하지만, 됐다. 주명취가 원경릉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낙평공주 앞에서 잘못을 시인한 원경릉원경릉은 할 수 없이 눈 딱 감고 낙평공주와 마주했다.낙평공주는 냉랭하게 원경릉을 쳐다보고, “듣자 하니 초왕비가 와서 여섯째의 병을 치료한다는데 초왕비에게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 주변에서는 모르지만 나는 잘 알고 있지요. 내 집에서 저질렀던 그 일에 대해 아직 따진 적이 없죠. 초왕비는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회왕부에 와서 허장성세를 떨며 속임수를 쓰는 겁니까.”원경릉은 낙평공주의 분노를 너무도 이해한다.자신의 생일 잔치는 친구와 지인을 불러 축하하는 자리라, 원래는 상당히 체면을 차리는 자리로 식사를 하거나 연극을 보는게 정상인데, 낙평공주는 자신이 부른 연극배우들보다 정후부 부녀가 그렇게 연기가 출중할 줄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황실의 체통에 먹칠을 했을 뿐 아니라, 그런 비열하고 상스러운 일에 낙평공주가 이용당했다는 사실이 가장 끔찍했다. 그녀의 명예가 일순간에 금이 가고 말았다.악의 축인 원경릉은 방금 기왕비에게 하듯 그렇게 당당할 수 없었다. 주명취에게 배운 걸 바로 써먹어 속 눈썹을 내리깔고 애처롭고 불쌍한 모습으로 작게: “아바마마께서 교지를 내리셨습니다.”“네가 지금 아바마마의 이름을 들먹이며 나를 위협하려는 것이냐?” 낙평공주가 눈썹을 치켜세웠다.“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원경릉은 얼른 손을 내젓고 위축된 모습으로, “사실 저도 아바마마께서 왜 이런 교지를 내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낙평공주는 본래 한바탕 쏘아붙이려고 했으나, 막상 그녀의 불쌍한 모습을 보니 울화가 도리어 수그러들었다.하지만 기왕비는 이때다 싶어,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만은 없어 힘껏 낙평공주를 도왔다.기왕비가 웃으며 앞으로 나와 위로하는 얼굴로, “초왕비, 치료에 관해 공주와 얘기를 나누면 되겠군요, 오늘 초왕비가 나와 노비마마께서 병을 치료하는 규칙을 모른다고 질책했잖아요, 공주는 식견이 넓으니 잘 이해하실 거예요. 초왕비가 공주에게 얘기를 해 드리는 편이 좋겠어요. 공주의 마음 속 의혹도 가시도록 말이죠
원경릉과의 키스를 반추하느라 넋이 나간 우문호특히 노비는 진심으로 감동한 눈치다.원경릉은 거하게 욕을 먹을 상황이었으나 결국 어째서인지 모두의 용서와 양해를 얻었다.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듯한 그런 용서와 양해였다. 주명취는 먼 곳에 서서 조용히 원경릉의 말을 듣고 있었다.주명취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극도로 요동치고 있었다.원경릉, 진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앞으로 원경릉이 회왕부에 있어도 아무도 그녀를 흘겨보며 수근거리지 않을 것이다.우문호는 키스 뒤 바로 관아로 갔다.마차에서 우문호는 찬찬히 키스를 다시 음미하는데 생각만 해도 전신에 힘이 빠지고 뼈까지 다 녹아버리는 것 같다.우문호는 오늘은 종일 키스를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관아가 바빠도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니다. 한 무더기의 일을 처리하고 수많은 안건을 확인하느라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띵 해져서 눈을 감고 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쉬고 있는데 오늘 회왕부에서의 그 일이 또 떠오른다.가슴이 쿵쾅거리고 심장이 요동치니 마음이 자꾸 콩밭으로 간다.“왕야, 왕야…”우문호는 번쩍 눈을 뜨며 탁자를 쾅 치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소리치며, “왕야가 동네북이야 왜 자꾸 불러, 나 좀 쉬면 안돼?”보좌관이 당황해서 한걸음 물러서며 한쪽에 찌그러져 있는 서일을 째려보며 눈빛으로 묻길, 누가 왕야 기분 상하게 한 거야?서일도 황당한 게 방금까지 계속 서서 자고 있느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고!우문호는 한마디 화를 내더니 냉정을 되찾고 보좌관을 쳐다보며: “무슨 일이야? 얘기해!”하아, 보좌관의 얼굴은 푸석푸석하다. 눈 호강을 시켜주는 원경릉의 보드라운 얼굴에 비할 수가 있을까? 계란처럼 탱탱한 얼굴은 꾹 누르면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이 있다.보좌관이 보고하길: “취작 거리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일가족 4명중 생후 일주일 된 영아를 제외한 3명이 죽은…..왕야, 지금 웃고 계십니까?”보좌관은 오싹한 기분으로 우문호를 바라보는데 우문호는
우문호가 사건의 세부 사항을 묻고 난 후, 포도대장과 아역(衙役)의 보고를 기다렸다. 시체 부검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잠깐 사이에 벌써 날이 저물었다. 그가 경조부를 떠날 때는 이미 술시(戌時)가 지난 시간이었다. 그는 서둘러 회왕부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원경릉과 낙평공주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공주댁 사건 이후, 삼황 누이(三皇姐)가 원경릉을 그닥 좋게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둘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낙평공주는 자신과 원경릉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는 우문호를 보면서 웃어 보였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다섯째 안색이 어두워보이는데 어디 아픈겐가?”낙평공주가 물었다. 우문호는 원경릉을 힐끗 보았다. 원경릉은 어색한 모습으로 찻잔을 들고는 그에게 슬그머니 눈짓을 보냈다. 우문호는 그런 원경릉을 보고 웃음이 터져나왔다.“삼황 누이, 관아에 일이 많아서 좀 피곤해서 그런가봅니다.”“피곤하다고요? 그럼 왕비와 빨리 댁으로 돌아가시게.” 낙평공주가 말했다.“그래도 여섯째는 보고 가야죠.”우문호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리는데 낙평공주가 그를 말렸다.“지금은 들어가지말게나. 방금 잠에 들었습니다.”낙평공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원경릉을 보았다.“본궁은 처음에 부황이 원경릉을 시켜 여섯째의 병을 치료하게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오늘보니 부황이 옳은 결정을 하신 것 같아. 기침도 적었고, 지금까지 피를 토한 적도 없으니, 상황이 호전된 것 같네.” 라고 낙평공주가 말했다.이 말을 들은 우문호는 그제서야 삼황 누이가 원경릉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는지 이해가 갔다.“삼황 누이. 그럼 저희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우문호가 낙평공주를 보고 말했다.“가보게. 내일 아침엔 일찍 오시게나.”우문호와 원경릉은 밖으로 나왔다. 원경릉은 희상궁에게 회왕부에 남아 회왕이 약을 먹는 것을 지켜보라고 했다. 그녀는 회왕이 약을 먹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다른 사람이 약 먹는 것을 방해할까 두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발정이라도 난 것일까?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나를 조금이나마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 걸까?원경릉의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갑자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우문호는 그녀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보고 심장이 바닥으로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긴장되는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의 힘이 어찌나 세던지 원경릉이 손을 빼며 꽥 소리를 질렀다.“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아팠느냐?” 그가 원경릉을 보며 물었다.원경릉은 자신에 무릎에 손을 올리고 난처한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조금 아팠어.” 라고 말했다.“지금도 아파?”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니야 지금은 괜찮아.” 원경릉이 고개를 저었다.“아…… 응.” 우문호는 그녀의 무릎에 올려진 가느다란 손을 한번 쳐다보며 다시 잡을까 말까 망설였다.손을 잡고 싶어 몇 번이나 움찔거렸지만, 결국 용기가 나지 않아 포기했다.‘서일은 오늘 어찌 이리 평온하게 마차를 모는 것일까? 전에는 이리저리 흔들려 원경릉이 나에게 기대기도 했는데 말야.’우문호가 속으로 서일을 욕하고 있는데 갑자기 원경릉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피곤해서 조금만 기댈 게.”원경릉이 조용하게 그에게 속삭였다.기댄 그녀의 머리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는 곧게 허리를 펴고 앉아 그녀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어 끌어당겼다. “이러면 좀 더 편하지 않아?” 우문호가 조용히 말했다.“응.” 원경릉이 대답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온몸을 그의 품속으로 묻었다.우문호는 갑자기 숨이 가빠져 고개를 푹 숙였다. 원경릉은 고개를 숙인 우문호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아 심장이 가빠졌다. 그는 그녀를 꼭 껴안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야 “원경릉?”하고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원경릉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고 숨을 헐떡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 “원경릉!”“응!”그러자 갑자기 우문호가 다가와 입을 맞췄다. 그렇게 몇 분이 지
서일은 주눅 든 모습으로 왕부로 들어가더니 회계방으로 문방사보(文房四寶)를 찾으러 갔다. 회계방을 지키는 선생은 서일의 사촌동생이었는데, 서일이 느닷없이 들어와서는 선지(宣纸) 1000장이 필요하다고 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렇게나 많이? 그럼 창고에서 가져와야 하는데, 탕대인(汤大人)에게 열쇠를 받아서 직접 가져가세요.”서일은 하는 수없이 탕양을 찾으러 갔다.탕양은 장부를 꺼내 기록을 하던 중에 서일이 들어와 선지 1000장을 가져가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그렇게나 많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많은 종이를 어디에다가 쓰게?” 탕양이 물었다.“탕어른, 저 좀 도와주세요.” 서일이 울상이 되었다.“무슨 일이야?” 탕양은 서일의 낯선 모습에 당황했다.“왕야께서 저에게 ‘예의염치’라는 네 글자를 천 번 베껴 쓰라고 벌주셨습니다. 예의는 쓸 수 있는데, 염치는 어떻게 씁니까?”이 말을 들은 탕양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이상하다. 자네야 염치가 없으니, 염치를 쓰라고 하신 건 그렇다 치고, 왕야께서 예의를 쓰라고 하셨다고? 자네 왕야께 예의 없이 행동했나?”“지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이렇게 불쌍한 저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놀리기나 하고! 앞으로 저도 탕어른을 도와주지 않을 겁니다!” 서일이 발을 동동 구르며 탕양에게 소리쳤다.“자네가 나를 언제 도와줬어?” 탕양이 웃었다.“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겁니다!” 서일이 말했다.탕양은 웃으며 창고 열쇠를 들었다. “어서 창고에 선지를 가지러 가자. 가는 길에 왜 왕야께서 그런 벌을 내렸는지 나에게 알려줘야 해.” 탕양이 웃으며 말했다.“마차가 왕부에 도착했으니, 장막을 걷고 왕야와 왕비께 내리라고 했습니다. 근데 마차 안이 더웠는지 두 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땀을 한 바가지를 흘리고 있지 뭡니까? 그리고 왕비의 옷 앞섶이 열려있길래 슬쩍 눈이 갔는데, 왕야가 욕을 하시지 뭡니까!”창고로 가는 길에 그는 탕양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이 말을 들은 탕양은 발걸음을 멈추고는 넋이
소월각에 도착하니 시중을 드는 청색 옷을 입은 서너 명의 시녀들이 있었다. 그들의 나이는 열다섯 살 내지 열여덟 살 정도로 보였으며 청순한 얼굴에 행동거지가 얌전한 것이 대갓집의 계집종의 소양을 띄고 있었다. 그들 몇은 원경릉에게 깍듯하게 대했으며 그녀가 식사를 하는 내내 옆에서 세심하게 시중을 들었다.원경릉은 우문호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폈는데 그들 사이에 묘한 기류라거나, 계집종을 귀여워하거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녀들의 눈빛에도 우문호를 향한 경외심뿐 다른 느낌은 없었다. 원경릉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자리 시중을 드는 여인이건 첩이건 다른 여자들과 한 명의 사내를 나누어 가질 바엔 차라리 갖지 않는 편이 낫다. 우문호는 소월각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원경릉이 시녀들을 뚫어져라 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풉’하고 소리를 냈다. 원경릉은 어리둥절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뭐가 웃깁니까?”우문호는 그녀의 하얗고 깨끗한 얼굴을 보았다. 이마에 작은 분홍색 흉터, 맑은 눈가, 들쑥날쑥하지만 빽빽한 속눈썹, 핏기를 머금은 붉은 입술, 그녀는 마치 활짝 피어있는 장미꽃 같았다.그는 지금 당장 원경릉을 번쩍 들어 올려 침대 위로 내동댕이치고 싶었다.원경릉은 불타오르는 우문호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숙이고 수저를 들었다. 그녀는 속으로 계속 그 문제를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이 우문호를 저렇게 만든 것일까?잠시 후,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사실대로 말해, 내가 어장(御杖)을 가지고 있어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지? 내가 어장으로 너를 내리칠까 봐?”우문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수저를 들어 탕을 한술 떴다. 목구멍에서 넘어갈랑 말랑한 탕을 겨우 삼키며 그는 방 안의 시녀들을 모두 내보낸 후 원경릉의 눈을 직시했다. 원경릉은 바짝 긴장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우문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내
원경릉은 온몸이 굳은 채 눈동자만 이리저리 움직였다. 우문호의 뜨거운 눈동자를 피하기 위해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의 입술이 온기를 머금고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녀는 온몸이 나른해지며 눈을 감았다.“오늘 밤은 소월각에서 어때?”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원경릉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밀어냈다.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좀 혼란스러워서.”말은 마친 후 원경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어찌나 마음이 급했는지 단숨에 아주 멀리까지 뛰어갔다. 오래간만에 달리기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허리를 굽히고 두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이게 무슨 일일까? 이 둘은 원래 만나기만 하면 싸우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핑크빛 기류가 흐르는 사이로 발전하다니? 우문호가 원경릉을 좋아한다고? 그럴 리가 있나? 그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죽이고 싶어 이를 부득부득 갈지 않았는가?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다!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원하는 게 무엇일까? 돈? 돈은 우문호가 원경릉보다 많을 텐데. 지위? 우문호의 신분이 원경릉보다 높은데……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걸까?“왕비, 괜찮으십니까?” 뒤에서 탕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경릉은 깜짝 놀라 휙 뒤를 돌아보니, 흰옷을 입은 훤칠한 모습의 탕양이 보였다.그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탕양님. 저를 심장마비로 죽이려고 하십니까?” 라고 말했다.“왕비, 제가 무례했습니다!” 탕양이 미소를 지으며 “그런데 왕비님은 원래 이렇게 잘 놀라지 않으셨잖아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물었다.원경릉이 어찌 탕양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터놓겠는가?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별일 아닙니다. 밥을 많이 먹어서 소화시킬 겸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탕양님의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랐지 뭡니까.”라고 말했다.“그렇군요. 근데 왕비 고민이 있으면 저에게 털어놓으십시오. 제가 비록 이래 보여도 알고 있는 게 많습니다.”탕양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원경릉을 쳐다보았다.당당한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