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릉과 우문호의 첫 키스원경릉은 손을 내리고 조금 내키지 않은 듯: “그럼 어떻게 하길 바래? 내가 잘못 했다. 그럼 됐냐?”“잘못한 주제에 뭐가 그리 당당해? 아직도 이렇게 거만하단 말이지? 잘못했다면서 잘못했다는 태도가 그래? 그게 사과야? 제대로 사과 했냐고?”연달아 쏘아 대는 걸 보니 정말 오래 참았다.원경릉도 성질을 내며, “나도 한마디만 하면 안될까? 어쩌다 그런 거고 고의도 아닌데 막돼먹은 여자처럼 여기서 머리끄덩이 잡고 싸워야 해? 넌 내가 알던 모르던 날 좋게 말하지 않을 게 분명해, 나는 좋은 싫든 네가 내 은……”원경릉은 들뜬 얼굴에 앵두 빛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고 깊은 눈동자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몸은 약간 기우뚱한 상태다. 켕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약간의 죄책감이 있지만 은인이란 한 마디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 우문호의 눈빛을 피하고 마는 것이다.우문호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감히 은혜를 가지고 위협을 해?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야?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이, 고개를 숙여 원경릉의 벌어진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때릴 수 없기 때문에 본래는 벌칙으로 그런 건데, 붉은 입술에 닿는 순간 부드러운 감촉이 심장을 꿰뚫어 온몸이 굳어버리고 머리속이 순간 하얗게 번했다.원경릉의 머리도 순간 하얘졌다.무슨 상황이지?두 사람의 호흡이 가빠지며 서로의 두 손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를 안았는데, 이건 완전 자의식이라 곤 전혀 없는 무의식이 낳은 행동이었다.우문호가 자신의 입술을 포개자 심장이 세차게 뛰고, 온 세상이 마치 잠시 멈춘 것만 같다.잠시 후 우문호는 입술을 원경릉의 귓불로 가져가며 온몸에 힘이 빠진 그녀를 안고 쇄골 위에 흐트러진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졌다.원경릉은 기운이 하나도 없는 게 머리와 몸이 모두 산소결핍 상태 같다.그저 온몸으로 부드럽게 우문호의 가슴에 파묻혀 북소리 같은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고 있었다.이성이 천천히 돌아와서 냉정을 되찾았다.서로 떨어져 난감해서 어쩔 줄 모른
우문호와 원경릉을 키스를 훔쳐본 주명취눈을 돌려보니 반대편 작은 나무 숲에 여인이 하나 서있다.그녀의 얼굴빛은 창백하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눈가엔 눈물이 맺히고 두 주먹을 꽉 쥐고 서있는 모습이 상당히 뻣뻣해 보인다.주명취다.거리를 두고 눈빛이 마주쳤다.증오와 질투가 미친듯이 뒤엉켜 있다.주명취는 증오로 원경릉은 민망함으로. 이 일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어서는 안되는 거였다.게다가 이 사람은 주명취다.주명취가 결국 천천히 걸어왔다.그녀의 눈물이 모두 삼켜버렸는지 얼굴에 있던 질투와 증오의 빛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주명취는 원경릉 앞에서 서서, 친절한 미소를 띠고, “실수로 보게 된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적이 가시를 세우지만 강철 칼 인들 겁날까, 원경릉은 당연하다고 느꼈다.하지만 지금 이 미소는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다.원경릉이: “저는 신경 안 쓰는데, 신경 쓰이세요?”주명취의 미소는 한층 사람을 미혹 시키며, “제가 왜 신경을 쓰겠어요? 전 기뻐요. 호 오빠가 드디어 행복을 찾았네요.”이렇게까지 위장을 해도 원경릉은 조금도 믿지 않았다.하지만 여전히 공손하게 , “고맙습니다!주명취와 어떤 충돌도 일으켜서는 안된다. 치료기간 동안 주명취가 앙심을 품거나 음모를 꾸미고 방해하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주명취는 깊은 원망의 눈빛으로, “사실 마음으론 상당부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있어요, 하지만 현실은 전 이미 제왕과 결혼했으니, 이전 일은 잊는게 맞아요. 전부 잊어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전에 했던 말이 맞아요. 자기가 선택한 길은 아무리 어려워도 이를 악물고 걸어가야 해요.”말을 마치고 주명취는 원경릉에게 절하며, “물에 빠진 일은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예를 갖춰 사과하더니 원경릉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서서 가버렸다.원경릉은 어안이 벙벙했다. 갑자기 이렇게 온화하게 변하다니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하지만, 됐다. 주명취가 원경릉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낙평공주 앞에서 잘못을 시인한 원경릉원경릉은 할 수 없이 눈 딱 감고 낙평공주와 마주했다.낙평공주는 냉랭하게 원경릉을 쳐다보고, “듣자 하니 초왕비가 와서 여섯째의 병을 치료한다는데 초왕비에게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 주변에서는 모르지만 나는 잘 알고 있지요. 내 집에서 저질렀던 그 일에 대해 아직 따진 적이 없죠. 초왕비는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회왕부에 와서 허장성세를 떨며 속임수를 쓰는 겁니까.”원경릉은 낙평공주의 분노를 너무도 이해한다.자신의 생일 잔치는 친구와 지인을 불러 축하하는 자리라, 원래는 상당히 체면을 차리는 자리로 식사를 하거나 연극을 보는게 정상인데, 낙평공주는 자신이 부른 연극배우들보다 정후부 부녀가 그렇게 연기가 출중할 줄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황실의 체통에 먹칠을 했을 뿐 아니라, 그런 비열하고 상스러운 일에 낙평공주가 이용당했다는 사실이 가장 끔찍했다. 그녀의 명예가 일순간에 금이 가고 말았다.악의 축인 원경릉은 방금 기왕비에게 하듯 그렇게 당당할 수 없었다. 주명취에게 배운 걸 바로 써먹어 속 눈썹을 내리깔고 애처롭고 불쌍한 모습으로 작게: “아바마마께서 교지를 내리셨습니다.”“네가 지금 아바마마의 이름을 들먹이며 나를 위협하려는 것이냐?” 낙평공주가 눈썹을 치켜세웠다.“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원경릉은 얼른 손을 내젓고 위축된 모습으로, “사실 저도 아바마마께서 왜 이런 교지를 내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낙평공주는 본래 한바탕 쏘아붙이려고 했으나, 막상 그녀의 불쌍한 모습을 보니 울화가 도리어 수그러들었다.하지만 기왕비는 이때다 싶어,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만은 없어 힘껏 낙평공주를 도왔다.기왕비가 웃으며 앞으로 나와 위로하는 얼굴로, “초왕비, 치료에 관해 공주와 얘기를 나누면 되겠군요, 오늘 초왕비가 나와 노비마마께서 병을 치료하는 규칙을 모른다고 질책했잖아요, 공주는 식견이 넓으니 잘 이해하실 거예요. 초왕비가 공주에게 얘기를 해 드리는 편이 좋겠어요. 공주의 마음 속 의혹도 가시도록 말이죠
원경릉과의 키스를 반추하느라 넋이 나간 우문호특히 노비는 진심으로 감동한 눈치다.원경릉은 거하게 욕을 먹을 상황이었으나 결국 어째서인지 모두의 용서와 양해를 얻었다.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듯한 그런 용서와 양해였다. 주명취는 먼 곳에 서서 조용히 원경릉의 말을 듣고 있었다.주명취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없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극도로 요동치고 있었다.원경릉, 진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앞으로 원경릉이 회왕부에 있어도 아무도 그녀를 흘겨보며 수근거리지 않을 것이다.우문호는 키스 뒤 바로 관아로 갔다.마차에서 우문호는 찬찬히 키스를 다시 음미하는데 생각만 해도 전신에 힘이 빠지고 뼈까지 다 녹아버리는 것 같다.우문호는 오늘은 종일 키스를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관아가 바빠도 이만저만 바쁜 게 아니다. 한 무더기의 일을 처리하고 수많은 안건을 확인하느라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띵 해져서 눈을 감고 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쉬고 있는데 오늘 회왕부에서의 그 일이 또 떠오른다.가슴이 쿵쾅거리고 심장이 요동치니 마음이 자꾸 콩밭으로 간다.“왕야, 왕야…”우문호는 번쩍 눈을 뜨며 탁자를 쾅 치고 다가오는 사람에게 소리치며, “왕야가 동네북이야 왜 자꾸 불러, 나 좀 쉬면 안돼?”보좌관이 당황해서 한걸음 물러서며 한쪽에 찌그러져 있는 서일을 째려보며 눈빛으로 묻길, 누가 왕야 기분 상하게 한 거야?서일도 황당한 게 방금까지 계속 서서 자고 있느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고!우문호는 한마디 화를 내더니 냉정을 되찾고 보좌관을 쳐다보며: “무슨 일이야? 얘기해!”하아, 보좌관의 얼굴은 푸석푸석하다. 눈 호강을 시켜주는 원경릉의 보드라운 얼굴에 비할 수가 있을까? 계란처럼 탱탱한 얼굴은 꾹 누르면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이 있다.보좌관이 보고하길: “취작 거리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일가족 4명중 생후 일주일 된 영아를 제외한 3명이 죽은…..왕야, 지금 웃고 계십니까?”보좌관은 오싹한 기분으로 우문호를 바라보는데 우문호는
우문호가 사건의 세부 사항을 묻고 난 후, 포도대장과 아역(衙役)의 보고를 기다렸다. 시체 부검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잠깐 사이에 벌써 날이 저물었다. 그가 경조부를 떠날 때는 이미 술시(戌時)가 지난 시간이었다. 그는 서둘러 회왕부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원경릉과 낙평공주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공주댁 사건 이후, 삼황 누이(三皇姐)가 원경릉을 그닥 좋게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둘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당황스러웠다. 낙평공주는 자신과 원경릉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는 우문호를 보면서 웃어 보였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다섯째 안색이 어두워보이는데 어디 아픈겐가?”낙평공주가 물었다. 우문호는 원경릉을 힐끗 보았다. 원경릉은 어색한 모습으로 찻잔을 들고는 그에게 슬그머니 눈짓을 보냈다. 우문호는 그런 원경릉을 보고 웃음이 터져나왔다.“삼황 누이, 관아에 일이 많아서 좀 피곤해서 그런가봅니다.”“피곤하다고요? 그럼 왕비와 빨리 댁으로 돌아가시게.” 낙평공주가 말했다.“그래도 여섯째는 보고 가야죠.”우문호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리는데 낙평공주가 그를 말렸다.“지금은 들어가지말게나. 방금 잠에 들었습니다.”낙평공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원경릉을 보았다.“본궁은 처음에 부황이 원경릉을 시켜 여섯째의 병을 치료하게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오늘보니 부황이 옳은 결정을 하신 것 같아. 기침도 적었고, 지금까지 피를 토한 적도 없으니, 상황이 호전된 것 같네.” 라고 낙평공주가 말했다.이 말을 들은 우문호는 그제서야 삼황 누이가 원경릉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는지 이해가 갔다.“삼황 누이. 그럼 저희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우문호가 낙평공주를 보고 말했다.“가보게. 내일 아침엔 일찍 오시게나.”우문호와 원경릉은 밖으로 나왔다. 원경릉은 희상궁에게 회왕부에 남아 회왕이 약을 먹는 것을 지켜보라고 했다. 그녀는 회왕이 약을 먹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다른 사람이 약 먹는 것을 방해할까 두려
그게 아니라면 혹시 발정이라도 난 것일까?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나를 조금이나마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 걸까?원경릉의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갑자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우문호는 그녀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보고 심장이 바닥으로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긴장되는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의 힘이 어찌나 세던지 원경릉이 손을 빼며 꽥 소리를 질렀다.“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아팠느냐?” 그가 원경릉을 보며 물었다.원경릉은 자신에 무릎에 손을 올리고 난처한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조금 아팠어.” 라고 말했다.“지금도 아파?”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니야 지금은 괜찮아.” 원경릉이 고개를 저었다.“아…… 응.” 우문호는 그녀의 무릎에 올려진 가느다란 손을 한번 쳐다보며 다시 잡을까 말까 망설였다.손을 잡고 싶어 몇 번이나 움찔거렸지만, 결국 용기가 나지 않아 포기했다.‘서일은 오늘 어찌 이리 평온하게 마차를 모는 것일까? 전에는 이리저리 흔들려 원경릉이 나에게 기대기도 했는데 말야.’우문호가 속으로 서일을 욕하고 있는데 갑자기 원경릉이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피곤해서 조금만 기댈 게.”원경릉이 조용하게 그에게 속삭였다.기댄 그녀의 머리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는 곧게 허리를 펴고 앉아 그녀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어 끌어당겼다. “이러면 좀 더 편하지 않아?” 우문호가 조용히 말했다.“응.” 원경릉이 대답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온몸을 그의 품속으로 묻었다.우문호는 갑자기 숨이 가빠져 고개를 푹 숙였다. 원경릉은 고개를 숙인 우문호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아 심장이 가빠졌다. 그는 그녀를 꼭 껴안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야 “원경릉?”하고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원경릉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고 숨을 헐떡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 “원경릉!”“응!”그러자 갑자기 우문호가 다가와 입을 맞췄다. 그렇게 몇 분이 지
서일은 주눅 든 모습으로 왕부로 들어가더니 회계방으로 문방사보(文房四寶)를 찾으러 갔다. 회계방을 지키는 선생은 서일의 사촌동생이었는데, 서일이 느닷없이 들어와서는 선지(宣纸) 1000장이 필요하다고 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렇게나 많이? 그럼 창고에서 가져와야 하는데, 탕대인(汤大人)에게 열쇠를 받아서 직접 가져가세요.”서일은 하는 수없이 탕양을 찾으러 갔다.탕양은 장부를 꺼내 기록을 하던 중에 서일이 들어와 선지 1000장을 가져가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그렇게나 많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많은 종이를 어디에다가 쓰게?” 탕양이 물었다.“탕어른, 저 좀 도와주세요.” 서일이 울상이 되었다.“무슨 일이야?” 탕양은 서일의 낯선 모습에 당황했다.“왕야께서 저에게 ‘예의염치’라는 네 글자를 천 번 베껴 쓰라고 벌주셨습니다. 예의는 쓸 수 있는데, 염치는 어떻게 씁니까?”이 말을 들은 탕양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이상하다. 자네야 염치가 없으니, 염치를 쓰라고 하신 건 그렇다 치고, 왕야께서 예의를 쓰라고 하셨다고? 자네 왕야께 예의 없이 행동했나?”“지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이렇게 불쌍한 저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놀리기나 하고! 앞으로 저도 탕어른을 도와주지 않을 겁니다!” 서일이 발을 동동 구르며 탕양에게 소리쳤다.“자네가 나를 언제 도와줬어?” 탕양이 웃었다.“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겁니다!” 서일이 말했다.탕양은 웃으며 창고 열쇠를 들었다. “어서 창고에 선지를 가지러 가자. 가는 길에 왜 왕야께서 그런 벌을 내렸는지 나에게 알려줘야 해.” 탕양이 웃으며 말했다.“마차가 왕부에 도착했으니, 장막을 걷고 왕야와 왕비께 내리라고 했습니다. 근데 마차 안이 더웠는지 두 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땀을 한 바가지를 흘리고 있지 뭡니까? 그리고 왕비의 옷 앞섶이 열려있길래 슬쩍 눈이 갔는데, 왕야가 욕을 하시지 뭡니까!”창고로 가는 길에 그는 탕양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이 말을 들은 탕양은 발걸음을 멈추고는 넋이
소월각에 도착하니 시중을 드는 청색 옷을 입은 서너 명의 시녀들이 있었다. 그들의 나이는 열다섯 살 내지 열여덟 살 정도로 보였으며 청순한 얼굴에 행동거지가 얌전한 것이 대갓집의 계집종의 소양을 띄고 있었다. 그들 몇은 원경릉에게 깍듯하게 대했으며 그녀가 식사를 하는 내내 옆에서 세심하게 시중을 들었다.원경릉은 우문호가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폈는데 그들 사이에 묘한 기류라거나, 계집종을 귀여워하거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녀들의 눈빛에도 우문호를 향한 경외심뿐 다른 느낌은 없었다. 원경릉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자리 시중을 드는 여인이건 첩이건 다른 여자들과 한 명의 사내를 나누어 가질 바엔 차라리 갖지 않는 편이 낫다. 우문호는 소월각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원경릉이 시녀들을 뚫어져라 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그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풉’하고 소리를 냈다. 원경릉은 어리둥절해서 그를 돌아보았다. “뭐가 웃깁니까?”우문호는 그녀의 하얗고 깨끗한 얼굴을 보았다. 이마에 작은 분홍색 흉터, 맑은 눈가, 들쑥날쑥하지만 빽빽한 속눈썹, 핏기를 머금은 붉은 입술, 그녀는 마치 활짝 피어있는 장미꽃 같았다.그는 지금 당장 원경릉을 번쩍 들어 올려 침대 위로 내동댕이치고 싶었다.원경릉은 불타오르는 우문호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고개를 숙이고 수저를 들었다. 그녀는 속으로 계속 그 문제를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이 우문호를 저렇게 만든 것일까?잠시 후,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사실대로 말해, 내가 어장(御杖)을 가지고 있어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지? 내가 어장으로 너를 내리칠까 봐?”우문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수저를 들어 탕을 한술 떴다. 목구멍에서 넘어갈랑 말랑한 탕을 겨우 삼키며 그는 방 안의 시녀들을 모두 내보낸 후 원경릉의 눈을 직시했다. 원경릉은 바짝 긴장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우문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천천히 손을 뻗었다.“내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
한편, 안왕과 위왕은 이미 명월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기에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몸 전체가 먼지투성이였다.하지만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바로 궁에 들어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혼 연회가 예정보다 앞당겨 열리게 되었다고 했다.그들은 의아해하며 금나라가 막무가내라고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혼례라더니, 이제는 정혼식이라 하고, 심지어 약속했던 날도 지키지 않고 앞당겼으니 말이다.혼사라는 중대사가 이렇게 어린아이 장난처럼 진행될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신부가 북당 사람이니, 그들은 신부의 친정과도 마찬가지였기에 금나라의 일정을 따르며, 금나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것이 맞았다. 다른 나라 사절들이 함께 있었기에, 그들은 무관의 신분으로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친구를 사귀고 주변 무역 문제를 논의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다섯째가 특별히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른 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국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상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라고 말했었다. 장사는 대화로 시작되는 일이니,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면 결국 성사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비록 처음에 다섯째의 이런 태도가 약간 뻔뻔하다고 느꼈었지만, 지난 10여년간 나라 경제가 눈에 띄게 번영했다는 사실을 차마 부인할 수는 없었다.다섯째의 말처럼 경제를 앞서게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한 덕분에, 돈이 끊임없이 북당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들이 다른 나라 신하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황제가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안왕과 위왕은 금나라의 황제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 젊은 황제는 올해 열여덟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라 들었다. 어린 나이에 유명한 진국왕을 몰락시켰으니, 얼마나 대단한 결단력과 꾀를 가졌을까?내시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밝은 황금빛 용포를 입은 젊은 황제가 시위에게 둘러싸여 등장했다.혼례복이 아닌 용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나 혼례를 올리는 것은 아닌 듯했다
세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그 중, 택란은 베일을 쓴 채 궁에서 준비한 마차에 올랐다.때마침 불이 하나둘씩 밝혀질 시간이라, 거리는 무척 떠들썩했다. 금나라 수도의 번화함은 약도성이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통행금지가 없어, 백성들이 밤늦게까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택란은 마차의 가림막을 살짝 들어 올려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장사에 열중하는 상인들, 주루나 주막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상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이런 활기 넘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그러고는 순간 어린 황제를 본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3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3년 사이에 자신도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 말이다. 키도 훤칠해졌고 이제 얼굴도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 한층 성숙하고 침착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도성이 지난 몇 년간 겪어온 일들이 많았기에 당연히 성숙해질 수밖에 없었다.한편, 금나라 황궁에서는 이미 정혼 연회의 준비를 마쳤으나, 중요한 두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안왕과 위왕이었다.북당의 두 친왕이 도착해야만 연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한편, 경천 황제는 내내 택란을 만나고 싶어 했다.지난 3년 동안, 그는 그녀와 재회할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3년간 간절히 바랐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들떴지만, 첫 만남은 너무도 중요했다.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생생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그는 사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조정을 되찾아 그녀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물론 지금 그녀는 아직 어리기에, 혼담을 논하기엔 이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생각이 훨씬 개방적이었고,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장 큰 행복이라 여겼기에 의식 자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그래도 아버지의 아쉬움을 덜어주기 위해 현대에서 한 번, 즉위 후에 또 한 번 의식을 치렀다.주 아가씨는 객사로 돌아오자마자, 객사 일꾼에게 소식을 물었다.그러자 일꾼은 황제가 곧 혼례를 올린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멈칫했다.“혼례요? 정혼 아니었습니까?”“정혼? 정혼이라니? 그럼 이미 혼사를 올릴 나이가 되었는데, 어찌 바로 혼례를 하지 않다는 것이냐?”“그건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정혼한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미래의 황후가 북당 사람이 맞느냐?”일꾼이 말했다.“예. 북당 출신의 아가씨라고 합니다. 게다가 황제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들었습니다.“택란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경천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말 은인의 언니라는 말을 믿다니 말이다.설사 그렇다고 해도 굳이 그녀와 혼례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혼사를 어찌 장난처럼 다룰 수 있단 말인가?택란은 경천 황제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저 정치적인 판단에서만큼은 어리석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택란은 원래 이틀 정도만 량주를 둘러본 뒤 바로 궁으로 들어가 알현할 생각이었지만, 아직 혼례 날짜가 다가오지 않았으니 며칠 더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궁으로 들어가 정체를 드러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녀가 생명의 은인인 것을 알아차리면, 정혼식을 진행할지 말지 애매해질 것이기에, 택란은 며칠 동안 객사에 머물며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펴보는 한편, 참고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그렇게 살펴보던 중, 주 아가씨가 정보를 알아보러 나갔다가 안왕과 위왕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칠 동안 다른 나라 사절들은 계속 장관에 묵고 있었는데, 택란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삼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 무렵 장관으로 갔다.그런데 도착하고 나서야 그들이 이미 황
량주는 금나라의 수도가 된 이후 지난 2년간 크게 발전했다. 또한,금나라와 북당이 우호적인 교류를 시작하면서, 북당 변방 도성의 백성들도 장사를 위해 많이 찾아왔다.이전에 택란도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 위해 금나라에 왔었다. 하지만 그때의 량주는 지금처럼 북당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택란은 객사에 머문 뒤 주 아가씨와 냉명여를 데리고 거리로 나가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폈다.여기도 어쨌든 금나라의 수도 아닌가!진국왕은 물러나기 전까지 나라를 잘 다스렸고, 특히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야망이 지나친 탓에 늘 약도성을 되찾겠다고 욕심을 부렸다.그리고 동시에 북막을 두려워하기도 했다.경천이 즉위한 후, 광산 자원 개발 외에도, 그는 농경지와 산지를 개간하려고 노력했다. 금나라의 서북부에는 농사에 적합한 땅이 있었지만,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북당의 다른 도성을 본받아 사람들을 개간지로 보내고 그들에게 이익을 나누어주었다.나라가 상승세일 때, 그 분위기는 눈에 띄기 마련이다. 백성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택란은 경천이 황제로서 매우 적합하다고 느꼈기에, 그가 이끄는 금나라는 분명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발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기에,그가 광산을 함께 개발하자는 제안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았다.택란은 이내 자신감을 얻었다. 궁에 들어가 알현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량주 백성들이 북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과거, 약도성과 량주의 관계는 다소 안 좋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나라가 약도성에 사람을 침투시켜 많은 폭동을 일으켰기에, 약도성 백성들도 그들을 매우 싫어했다.그렇기에 지난 2년간의 교류를 통해, 택란은 그들의 원한이 천천히 사라지기만을 바란 것이었다.이제 북당 쪽은 문제가 없으니, 량주 백성들의 생각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택란은 물건을 사면서 점포 주인과 상인들에게 북당 약도성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곤 했다.그 중, 다
원경릉은 뒤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사식이가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서일이 비록 평범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마음과 눈에는 오직 사식이만 있었다.그야말로 진실한 남편이다.물건을 산 뒤, 서일은 계속 계산기를 두드리며, 여기서 쓴 금액을 북당으로 돌아가 황후에게 얼마만큼의 금으로 바꿔 드려야 할지 열심히 계산했다.계산을 마친 후, 지갑형편이 다소 여유롭다고 느껴지자, 그는 귀걸이와 금팔찌까지 더 구매했다. 이곳의 디자인은 북당보다 훨씬 아름다웠다.한편, 금나라에서는 완안경천이 혼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웃 나라 사신들도 연이어 축하해주기 위해 도착했다.택란은 냉명여와 주 아가씨를 데리고 량주로 갔는데, 그들이 량주성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가 경천 황제에게 보고했다."폐하, 초상화 속의 아가씨가 이미 도착하여 객사에 머물고 있습니다. 근처에서 감시 중이며, 가까이 다가가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경천 황제는 어서방에 앉아 이 보고를 들으며 눈매를 약간 올리고는, 온화하고 잘생긴 얼굴에 빛을 발했다. "그녀가 왔구나. 마침내 그녀가 왔다!""폐하, 바로 부를까요?""아니. 사람을 보내 그녀를 계속 감시하도록 하거라. 절대 그녀를 놓쳐서는 안 된다."경천 황제 또한 손끝이 떨릴 정도로 감격했다. 수많은 밤, 그는 초상화를 보며 멍하니 그녀가 살아있기를 바라고 또 바랬기 때문이다.그 초상화는 그가 직접 그린 것이었다. 원래 그는 서화에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화가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화가의 그림이 그녀와 닮지 않아, 직접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그렇게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녀를 자신의 그림으로 완성했다.그는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보내 북당에서 한 부녀를 데려왔다. 그 중 딸이 자신이 란이의 언니라고 주장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택란과 닮은 점이 조금도 없었다. 심지어 분위기도 전혀 닮지 않았다.친자매가 어찌 조금도 비슷한 부분이 없다는
원경릉은 병실로 돌아간 뒤, 서일을 따로 불러내서 물었다.당시에는 상황이 급박했던 탓에 서일이 어떻게 그 약을 가져왔는지, 약상자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두 번째 약은 어디서 꺼낸 것이냐?"원경릉이 약상자를 열며 묻자, 서일이 약상자 두 번째 칸을 가리켰다."이쪽이였습니다. 그 당시 약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주삿바늘에 뚜껑도 씌워져 있었습니다."원경릉은 약을 세 번째 칸에 넣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세 번째 칸은 자동으로 수축하는 구조여서, 사용하지 않는 약을 넣고 약상자를 닫는 순간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반면 두 번째 칸은 평소 사용하는 약으로 꽉 차 있어, 추가로 주사를 넣을 공간조차 없었다.게다가 약상자를 10년 넘게 사용해 온 그녀였기에, 약을 어디에 두는지 몸이 기억할 정도로 익숙했다. 그녀가 약을 잘못 넣었을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다. 설령 잘못 넣었다 하더라도, 약상자는 위험성을 자동으로 감지하는 기능이 있어, 그 약이 서일 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서일은 원경릉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우문호의 병세가 다시 악화한 줄로 착각하며 구석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참고 또 참아왔지만, 이제는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다. 그가 울기 시작하자, 원경릉이 깜짝 놀라 물었다."왜 그래? 설마 또 무슨 약이라도 먹인 것이냐?""아닙니다..."서일은 빨개진 눈에 머리도 헝클어진 채로 원경릉을 바라보며 처량하게 말했다."마마, 폐하께서 아직 낫지 않은 것입니까? 혹시 제가 폐하를 죽게 만든 것입니까?"원경릉은 웃음을 터뜨리며, 서일의 반응 속도가 정말로 느리다고 생각했다."그런 소리 하지 말거라. 그런 일 없다. 그저 사실을 알아보는 것뿐이니, 괜히 걱정하지 말거라. 다섯째도 아주 좋아졌다. 단지 조금 더 검사가 필요할 뿐이다."서일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서일은 우문호에게 가서 울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것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