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호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사나운 얼굴로 “너…… 본왕의 이부자리를 빨아 오거라.”서일은 한쪽 눈을 손으로 감싸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문호를 쳐다보았다.그러자 남은 한쪽 눈에도 주먹이 날아왔다. 우문호가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잔에 담긴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날이 밝지도 않은 어두컴컴한 시간, 서일은 억울하다는 듯 울먹이며 이부자리를 끌어안고 밖으로 나갔다.기라(綺羅)가 침상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우문호를 바라보니, 그는 화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자 기라는 무서워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왕야께서 오늘 왜 이러시지?’기라는 벌벌 떨며 침상 위에 새 이부자리를 펴놓고 서둘러 나갔다.우문호는 다시 잠자리에 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 계속 뒤척였다.서일은 우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방망이로 연신 이불을 내리치며 울었다. 그 모습을 본 탕양이 멀리서 초롱(燈籠)을 들고 왔다. “서일.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왕야가 쓰라는 건 다 쓰고 이불을 빨고 있는가?”서일은 억울한 눈빛으로 탕양을 보았다. “탕어른께서는 어찌 주무시지 않고, 이 시간에 돌아다니십니까?”“잤다. 밖이 시끄러워서 나와 본 것이야.” 탕양은 서일의 옆에 앉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매번 왕야의 미움을 사는 거야?”라고 서일에게 물었다.서일은 한숨을 내쉬며 “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네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왕야가 널 내보내고 다른 사람을 들일 수도 있어.”탕양이 말했다.그 말을 들은 서일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잡고 있던 이불을 놓아버렸다.“탕어른! 그게 정말입니까? 왕야께서 설마 저를 내보내 버리려고?”“네가 이렇게 왕야의 심기를 거스르게 한다면, 그럴 수도 있지. 너도 알다시피 왕야를 모시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 너 하나쯤 대체하는 건 식은 죽 먹기다.”탕양은 어깨를 으쓱였다.서일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생각에 잠겼다.‘내가 비록 얻어 맞고, 욕을 먹어도 절대 이 자리를 남에게 내어줄 수는 없다.’
“은화(银子)가 없는데 어떻게 여인을 부릅니까? 그곳은 은화로 계산을 합니다.”서일이 씩씩하게 말했다.“내일 회계방으로 와서 은화를 찾아가거라.” 탕양은 천천히 뒤를 돌며 “참, 왕야의 이불을 잘 빨아라.”라고 말했다.서일은 이런 생각을 해낸 자신이 대견해서 이불을 빠는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원경릉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미치겠네! 도대체 우문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그녀는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렸다. ‘우문호를 정말 믿어도 될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매일 폭력을 휘두르던 그가 한순간에 이렇게 바뀌다니? 하지만…… 그와 입을 맞추는 게 왜 이리도 좋을까?’마차를 타고 왕부로 돌아올 때, 그녀는 우문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 그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가 갑자기 입을 맞추는 바람에 그 평온함도 잠시였지만 말이다.만약 마차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면 마차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원경릉은 자신이 미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우문호의 숨결, 심장박동, 입술. 이 모든 것들이 그녀를 잠 못 들게 했다.‘제발 진정해!’그녀는 침상에서 내려와 찬물을 한 잔 마시며, 만약 계속 잠에 들지 못한다면 약 상자에서 수면제를 꺼내 한 알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잠시 후,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이 들어 그녀는 약 상자를 열었다. 하지만 그 안엔 수면제가 없었다.하는 수 없이 그녀는 다시 침상에 누웠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네 마리, 우문호 다섯 마리, 우문호 여섯 마리…….’다음 날, 두 사람 모두 일찍 눈이 떠졌다. 그 둘은 다크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온 채로 본관에서 마주쳤다.서로를 마주 보고는 넋이 나간 듯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서일도 눈 밑이 퀭한 채로 하품을 하며 본관으로 들어왔다. 때 마침 구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구사는 그들을 보고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판다 세 마리를 보는 것 같았다.
회왕이 일어나지 않자, 원경릉은 밖에 나가 지난밤 시중을 든 사람에게 물었다. 시동은 간밤에도 피를 토한 적은 있었지만 기침은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희상궁은 회왕이 약을 먹은 현황을 말했다. 저녁 식사 후에 한 번, 한밤중에 깨어나서 각혈 후에 또 한 번 복용했고, 오늘 아침은 아직 약을 먹지 않았다고 했다. 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희상궁님 수고하셨네요. 가서 주무세요. 낮에는 제가 지켜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희상궁은 고개를 저으며 “필요 없습니다. 회왕님이 약을 복용하는 시간 외에는 저도 잠을 잤습니다. 제가 잠을 자는 동안에는 노비(魯妃) 마마께서 보낸 사람이 시중을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다.“그렇군요. 그럼 노비 마마는요?” 원경릉이 물었다.“주무십니다. 어젯밤 마마님께서 밤새 돌아다니셨습니다.”원경릉은 의아했다. 오늘 노비는 원경릉을 감시하지 않는 거지?그녀는 어제 노비가 그녀를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노비가 완전히 그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비가 끝끝내 나타나지 않자, 원경릉은 아마도 어제 회왕의 상태가 호전되면서 노비가 생각을 바꾼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회왕은 희상궁과 원경릉의 대화 소리에 뒤척이며 기침을 두 번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시동이 수건을 들고 급히 달려갔다. 회왕은 시동의 도움을 받아 세수와 양치를 마친 후, 간단하게 머리를 정돈하고는 좁쌀죽을 먹었다.우문령은 마스크를 쓰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여섯째 오라버니. 초왕비가 왔습니다.”회왕은 원경릉을 보고 활짝 웃었다.“알겠다. 근데 넌 왜 이렇게 일찍 온 것이냐?”“며칠 내내 제가 회왕부에서 살다시피 한 것을 이제야 안 겁니까?” 우문령이 입을 삐죽거렸다.“어? 그래?” 회왕은 눈에 웃음을 머금은 채 우문령을 바라보며 “현모비(賢母妃)께서 여기 와 있다고 뭐라고 하지 않으시냐?” 라고 물었다.“모비는 항상 저를 꾸짖잖아요. 그래서 부황에게 이미 허락을 맡았죠.” 말을 마치고 우문령이 방석 위에 앉으며 시동을
회왕이 약을 복용한 이후 별다른 부작용은 보이지 않았다. 원경릉은 약 복용량을 좀 더 늘려 결핵균을 가능한 한 빨리 없애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바늘은 무엇이죠? 어의가 쓰던 것이랑 다른데?” 우문령이 다가와 물었다.“이건 결핵에 효과가 좋은 약입니다. 치료 기간은 보름 정도고, 일반적으로 이걸 사용하면 전염성이 급격히 낮아집니다. 그 이후에 약을 바꿔 반년 정도 치료하면 완치가 가능합니다.”원경릉이 설명했다.우문령이 눈을 부릅뜨고 원경릉을 보았다.“진짜로 완치가 가능하다고요? 여섯째 오라버니의 병이 낫는다니, 정말 다행입니다!”원경릉은 미소를 지으며 회왕을 바라보았다. 회왕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했다.“병세를 보아하니 완치의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모든 병에 맞서 싸우려면 환자의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특히 환자의 낙관적인 태도가 중요합니다. 저는 많은 환자를 만나봤는데 그중에는 이미 손을 쓰기 늦은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살려는 의지가 강해 오래 사는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회왕님 주변에서 이렇게 응원을 하는데 꼭 건강을 되찾으셔야죠.”원경릉의 말을 들은 회왕은 고개를 살짝 들어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 미소를 지었다.“예. 초왕비 말이 맞습니다.”원경릉은 그가 아직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회왕은 오랜 병치레 때문인지 시종일관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원경릉은 회왕에게 약물치료와 함께 심리치료도 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회왕은 겉으로 보면 치료에 협조적인 듯했지만 사실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자신의 병세가 호전되는 것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했으면서도 이것은 잠깐이고, 자신은 결국 죽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병이 호전된 것을 보고 기뻐할 때, 그들을 따라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공허했다.“모두 나가주시지오. 제가 왕야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원경릉이 말했다.원경릉이 정색을 하며 말하자 우문령과 시동, 그리고 희상궁이 바쁘게 밖으로 나갔다.밖에는 사람들로 시끌벅적
원경릉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회왕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씁쓸하게 웃었다.“들었죠? 이제 아시겠습니까? 본왕이 비관적인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제가 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요.”“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던 상관없습니다. 제 판단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판단을 하는 제가 당신을 고치는 사람이고요.” 원경릉은 의자를 끌어다가 회왕의 침상 옆에 앉았다.회왕은 그녀를 보고 큰 소리로 웃었다. “초왕비도 면보로 입과 코를 가리고 있지 않습니까? 초왕비도 비관적인 것 아닙니까?”원경릉은 자신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이게 회왕님 눈에는 거슬리십니까?”“거슬리는 건 아니고, 그냥 본왕이 병을 퍼뜨리는 죄인이 된 것 같아요.”“이 병에 걸린 게 죄가 아닙니다. 죄인이라뇨. 회왕님은 피해자입니다. 제가 이렇게 면보로 입과 코를 가리고 있는 것은 저를 보호하려는 겁니다. 제가 병에 걸린다면 회왕님은 누가 치료합니까? 저는 회왕께서 병에 걸린 후 3년 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압니다. 폐가 아파 거동도 힘드셨을 거고, 기침도 심하게 하셨을 겁니다. 긴 기간 동안 많은 어의들이 왕야의 병을 고치려고 시도했겠습니까? 그때마다 효과가 있는 듯하다가 다시 돌아오고, 약을 바꾸면 또 효과가 있다가 다시 병이 나빠지고 했을 겁니다. 과거의 반복됐던 실패로 왕야께서 저를 신임하지 않으시는 거죠?”회왕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원경릉은 그를 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왕야께서 병을 이겨내겠다는 의지가 없으시면 제가 아무리 좋은 약을 쓴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결핵은 굉장히 위험한 병입니다. 왕야께서 의지를 가지고 협조해 주셔야만 나을 수 있습니다.”“본왕이 협조를 안 한다고?” 화가 나 빨개진 얼굴의 회왕이 고개를 돌려 수건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했다.“겉으로만 협조하는 척하는 거 압니다.” 원경릉이 일어나 그의 침상으로 가서 그가 방금 기침을 한 수건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축축한 알약이 있었다.회왕은 자신이 나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원경릉은 몸을 돌려 몇 발자국 걸어가다 멈춰 서더니 갑자기 의자를 집어 들어 바닥에 내리쳤다. 의자는 ‘쾅’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붉어지더니 회왕을 노려봤다. “너만 성깔 있는 줄 알아? 나도 성깔 있어! 내가 네 병 치료해 주면서 네 눈치까지 봐야 해? 네 병을 고친다고 나한테 콩고물이 떨어지는 줄 알아? 천만의 말씀이야! 너는 너 하나만 죽으면 그만이지? 너 죽고 난 다음에 이 황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랑 같이 순장되는지 알기나 해? 그리고 이 약들이 얼마나 비싼 건 줄 알아? 어디 감히 약을 뱉어? 밖에 얼마나 많은 결핵 환자들이 약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늘 이 시간부로 네가 약을 뱉거나 협조하지 않으면 내 손으로 널 죽여버릴 거야! 제발 주위를 좀 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너를 아끼고 걱정하고 있잖아! 기왕비가 네가 죽을 거라고 한 헛소리는 믿으면서, 주변에서 널 응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거야? 현비가 반대해도 매일 여기로 출퇴근하는 우문령을 봐! 미안하지도 않니? 제발……제발 철 좀 들어!” 원경릉은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밖에서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중에는 잠에서 깨자마자 회왕부로 달려온 노비 마마도 있었다. 밖으로 나온 원경릉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기왕비가 달려와서는 그녀를 멈춰 세웠다.“초왕비 말은 똑바로 하셔야죠. 제가 언제 죽을 거라고 말했습니까? 사람을 그런 식으로 몰아가지 마세요.”원경릉은 뻔뻔한 그녀의 얼굴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럼 기왕비는 회왕의 병세가 호전되기를 바라는데도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한 겁니까? 아직 치료 중인 사람 들리라고 쩌렁쩌렁하게? 지금 와서 왜 딴 소리입니까? 분명 문 앞에서 회왕의 병을 고치지 못한다면! 회왕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그렇게 말했잖아요? 여기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 물어볼까요?”기왕비는 화가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모두 입 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노비 쪽으로 달려와서는 그녀의 관자놀이를 주무르고 부채질을 했다. 한참 뒤 노비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는 기왕비를 가리키며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너는 왜 회왕에게 그런 말을 한 거야? 힘도 없는 우리 가문이 너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회왕이 살아나면 네 앞길을 막을 것 같으냐? 그래서 내 아들의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빼앗는 것이야?”노비는 지금까지 아무도 기왕비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쏟아냈다.기왕이 태자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황실 안에 있는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다들 쉬쉬하며 모른 체했다. 노비의 말이 끝나자 모든 사람들은 기왕비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기왕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노비를 응시했다. “노비 마마, 예부터 충언은 귀에 거슬린다고 했습니다. 노비 마마께서 제 뜻을 이해하지 못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며칠 동안 제가 걱정이 되어 회왕께 신경을 쓴 것이 되레 화를 불렀네요.”기왕비는 고개를 숙여 노비에게 인사를 하고는 원경릉을 쳐다보았다.“먼저 가보겠어요. 여섯째를 잘 돌봐주시지요.”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그래 저게 진정한 기왕비의 모습이지.’원경릉은 또 한번 기왕비의 처세에 감탄했다.기왕비가 떠난 후, 많은 사람들이 노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노비는 창백한 얼굴로 원경릉을 보았다.“초왕비 치료를 계속하세요. 만약 회왕이 약을 먹지 않는다면 입에 물을 부어서라도 먹이세요. 기왕비 말대로 여기 몇 사람이나 회왕이 살 거라고 믿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어미로서 목숨을 걸어서라도 내 아들을 살리고 싶습니다.”노비는 남에게 미움을 사는 성격이 아니기에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기왕이나 기왕비같은 권력있는 자들의 심기를 거스를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노비는 기왕비가 일부러 회왕부에 들락날락하며 걱정하는 척 연기를 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남에게 폐를 끼치는게 아니기에 그냥 두었다. 하지만 오늘같이
“이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원경릉이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잘 싸웠어요.” 우문령도 기왕비가 눈에 거슬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무모했네. 기왕비에게 미움을 사다니……. 앞으로 기왕비가 초왕 내외를 어떻게 대할지 걱정입니다.” 낙평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오늘 일이 아니라도, 기왕 내외가 우문호와 나를 가만뒀을까? 전에도 우문호를 암살하려고 했는데?’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고개를 돌려 낙평공주를 보았다.“이미 엎어진 물입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회왕의 치료니까, 거기에 몰두 할 겁니다.”“일리가 있네요. 그럼 일단 치료에 몰두하세요. 근데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본궁은 도와줄 수 없어요.” 낙평공주가 원경릉을 보고 말했다.“제가 도와줄게요!”우문령이 큰 소리로 외치며 손을 번쩍 들자, 낙평공주가 우문령의 이마를 한대 쳤다.“너는 좀 조용히 있어라. 앞으로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러느냐!”앞으로 황실에서 누가 권력을 쥐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에 낙평공주는 쉽게 나서지 않을 것이다. 원경릉은 낙평공주의 행동을 보고 그녀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빠삭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우문령은 어려서 잘 모르는 걸까? 아니면 천성이 이런걸까? 원경릉은 후자가 맞지 않을까 생각했다.노비가 회왕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원경릉이 다시 회왕부로 치료를 하러 들어갔을 때 회왕의 태도가 조금 바뀐게 느껴졌다. 하지만 원경릉 마음 한구석엔 이것도 잠깐이겠지라는 생각이 있었다.그녀는 회왕이 약을 뱉어내는지 감시하느라 술시(戌時)까지 회왕부에 있었다. 날이 제법 어둑해지자 그녀는 초왕부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우문호가 데리러 오지 않자 원경릉은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초왕부로 돌아가는 마차가 청석(青石) 길 위를 달리자 이리저리 흔들렸다. 원경릉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장막을 걷고 “마차를 세워라!”라고 외쳤다.마차가 멈추고 구사가 말에서 내렸다. “왕비님 무슨 일이십니까?”원경릉은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
한편, 안왕과 위왕은 이미 명월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부하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왔기에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몸 전체가 먼지투성이였다.하지만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바로 궁에 들어가라는 통보를 받았다. 정혼 연회가 예정보다 앞당겨 열리게 되었다고 했다.그들은 의아해하며 금나라가 막무가내라고 투덜거렸다. 처음에는 혼례라더니, 이제는 정혼식이라 하고, 심지어 약속했던 날도 지키지 않고 앞당겼으니 말이다.혼사라는 중대사가 이렇게 어린아이 장난처럼 진행될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신부가 북당 사람이니, 그들은 신부의 친정과도 마찬가지였기에 금나라의 일정을 따르며, 금나라의 계획을 지지하는 것이 맞았다. 다른 나라 사절들이 함께 있었기에, 그들은 무관의 신분으로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친구를 사귀고 주변 무역 문제를 논의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래전에 다섯째가 특별히 당부한 적이 있었다. 그는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른 나라의 사신을 만나면 국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상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라고 말했었다. 장사는 대화로 시작되는 일이니, 이야기를 많이 나누다 보면 결국 성사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비록 처음에 다섯째의 이런 태도가 약간 뻔뻔하다고 느꼈었지만, 지난 10여년간 나라 경제가 눈에 띄게 번영했다는 사실을 차마 부인할 수는 없었다.다섯째의 말처럼 경제를 앞서게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한 덕분에, 돈이 끊임없이 북당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그들이 다른 나라 신하와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황제가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안왕과 위왕은 금나라의 황제에 대해 호기심이 가득했다. 이 젊은 황제는 올해 열여덟도 되지 않는 어린 나이라 들었다. 어린 나이에 유명한 진국왕을 몰락시켰으니, 얼마나 대단한 결단력과 꾀를 가졌을까?내시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밝은 황금빛 용포를 입은 젊은 황제가 시위에게 둘러싸여 등장했다.혼례복이 아닌 용포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나 혼례를 올리는 것은 아닌 듯했다
세 사람은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그 중, 택란은 베일을 쓴 채 궁에서 준비한 마차에 올랐다.때마침 불이 하나둘씩 밝혀질 시간이라, 거리는 무척 떠들썩했다. 금나라 수도의 번화함은 약도성이 비교할 수 없는 정도였다.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통행금지가 없어, 백성들이 밤늦게까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택란은 마차의 가림막을 살짝 들어 올려 거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장사에 열중하는 상인들, 주루나 주막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상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이런 활기 넘치는 모습은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그러고는 순간 어린 황제를 본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3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은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해졌다.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3년 사이에 자신도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 말이다. 키도 훤칠해졌고 이제 얼굴도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 한층 성숙하고 침착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도성이 지난 몇 년간 겪어온 일들이 많았기에 당연히 성숙해질 수밖에 없었다.한편, 금나라 황궁에서는 이미 정혼 연회의 준비를 마쳤으나, 중요한 두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안왕과 위왕이었다.북당의 두 친왕이 도착해야만 연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한편, 경천 황제는 내내 택란을 만나고 싶어 했다.지난 3년 동안, 그는 그녀와 재회할 순간만을 간절히 기다렸다.3년간 간절히 바랐던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들떴지만, 첫 만남은 너무도 중요했다.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준비된 상태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그리고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가 자신의 눈앞에 생생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그는 사실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조정을 되찾아 그녀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물론 지금 그녀는 아직 어리기에, 혼담을 논하기엔 이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아쉬워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생각이 훨씬 개방적이었고,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장 큰 행복이라 여겼기에 의식 자체를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그래도 아버지의 아쉬움을 덜어주기 위해 현대에서 한 번, 즉위 후에 또 한 번 의식을 치렀다.주 아가씨는 객사로 돌아오자마자, 객사 일꾼에게 소식을 물었다.그러자 일꾼은 황제가 곧 혼례를 올린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멈칫했다.“혼례요? 정혼 아니었습니까?”“정혼? 정혼이라니? 그럼 이미 혼사를 올릴 나이가 되었는데, 어찌 바로 혼례를 하지 않다는 것이냐?”“그건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정혼한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미래의 황후가 북당 사람이 맞느냐?”일꾼이 말했다.“예. 북당 출신의 아가씨라고 합니다. 게다가 황제의 생명의 은인이라고 들었습니다.“택란은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경천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말 은인의 언니라는 말을 믿다니 말이다.설사 그렇다고 해도 굳이 그녀와 혼례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혼사를 어찌 장난처럼 다룰 수 있단 말인가?택란은 경천 황제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저 정치적인 판단에서만큼은 어리석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택란은 원래 이틀 정도만 량주를 둘러본 뒤 바로 궁으로 들어가 알현할 생각이었지만, 아직 혼례 날짜가 다가오지 않았으니 며칠 더 머물며 시간을 보냈다. 궁으로 들어가 정체를 드러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녀가 생명의 은인인 것을 알아차리면, 정혼식을 진행할지 말지 애매해질 것이기에, 택란은 며칠 동안 객사에 머물며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펴보는 한편, 참고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했다.그렇게 살펴보던 중, 주 아가씨가 정보를 알아보러 나갔다가 안왕과 위왕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며칠 동안 다른 나라 사절들은 계속 장관에 묵고 있었는데, 택란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삼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 무렵 장관으로 갔다.그런데 도착하고 나서야 그들이 이미 황
량주는 금나라의 수도가 된 이후 지난 2년간 크게 발전했다. 또한,금나라와 북당이 우호적인 교류를 시작하면서, 북당 변방 도성의 백성들도 장사를 위해 많이 찾아왔다.이전에 택란도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 위해 금나라에 왔었다. 하지만 그때의 량주는 지금처럼 북당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택란은 객사에 머문 뒤 주 아가씨와 냉명여를 데리고 거리로 나가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폈다.여기도 어쨌든 금나라의 수도 아닌가!진국왕은 물러나기 전까지 나라를 잘 다스렸고, 특히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야망이 지나친 탓에 늘 약도성을 되찾겠다고 욕심을 부렸다.그리고 동시에 북막을 두려워하기도 했다.경천이 즉위한 후, 광산 자원 개발 외에도, 그는 농경지와 산지를 개간하려고 노력했다. 금나라의 서북부에는 농사에 적합한 땅이 있었지만,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북당의 다른 도성을 본받아 사람들을 개간지로 보내고 그들에게 이익을 나누어주었다.나라가 상승세일 때, 그 분위기는 눈에 띄기 마련이다. 백성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택란은 경천이 황제로서 매우 적합하다고 느꼈기에, 그가 이끄는 금나라는 분명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발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기에,그가 광산을 함께 개발하자는 제안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았다.택란은 이내 자신감을 얻었다. 궁에 들어가 알현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량주 백성들이 북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과거, 약도성과 량주의 관계는 다소 안 좋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나라가 약도성에 사람을 침투시켜 많은 폭동을 일으켰기에, 약도성 백성들도 그들을 매우 싫어했다.그렇기에 지난 2년간의 교류를 통해, 택란은 그들의 원한이 천천히 사라지기만을 바란 것이었다.이제 북당 쪽은 문제가 없으니, 량주 백성들의 생각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택란은 물건을 사면서 점포 주인과 상인들에게 북당 약도성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곤 했다.그 중, 다
원경릉은 뒤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사식이가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서일이 비록 평범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마음과 눈에는 오직 사식이만 있었다.그야말로 진실한 남편이다.물건을 산 뒤, 서일은 계속 계산기를 두드리며, 여기서 쓴 금액을 북당으로 돌아가 황후에게 얼마만큼의 금으로 바꿔 드려야 할지 열심히 계산했다.계산을 마친 후, 지갑형편이 다소 여유롭다고 느껴지자, 그는 귀걸이와 금팔찌까지 더 구매했다. 이곳의 디자인은 북당보다 훨씬 아름다웠다.한편, 금나라에서는 완안경천이 혼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웃 나라 사신들도 연이어 축하해주기 위해 도착했다.택란은 냉명여와 주 아가씨를 데리고 량주로 갔는데, 그들이 량주성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가 경천 황제에게 보고했다."폐하, 초상화 속의 아가씨가 이미 도착하여 객사에 머물고 있습니다. 근처에서 감시 중이며, 가까이 다가가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경천 황제는 어서방에 앉아 이 보고를 들으며 눈매를 약간 올리고는, 온화하고 잘생긴 얼굴에 빛을 발했다. "그녀가 왔구나. 마침내 그녀가 왔다!""폐하, 바로 부를까요?""아니. 사람을 보내 그녀를 계속 감시하도록 하거라. 절대 그녀를 놓쳐서는 안 된다."경천 황제 또한 손끝이 떨릴 정도로 감격했다. 수많은 밤, 그는 초상화를 보며 멍하니 그녀가 살아있기를 바라고 또 바랬기 때문이다.그 초상화는 그가 직접 그린 것이었다. 원래 그는 서화에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화가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화가의 그림이 그녀와 닮지 않아, 직접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그렇게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녀를 자신의 그림으로 완성했다.그는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보내 북당에서 한 부녀를 데려왔다. 그 중 딸이 자신이 란이의 언니라고 주장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택란과 닮은 점이 조금도 없었다. 심지어 분위기도 전혀 닮지 않았다.친자매가 어찌 조금도 비슷한 부분이 없다는
원경릉은 병실로 돌아간 뒤, 서일을 따로 불러내서 물었다.당시에는 상황이 급박했던 탓에 서일이 어떻게 그 약을 가져왔는지, 약상자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두 번째 약은 어디서 꺼낸 것이냐?"원경릉이 약상자를 열며 묻자, 서일이 약상자 두 번째 칸을 가리켰다."이쪽이였습니다. 그 당시 약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주삿바늘에 뚜껑도 씌워져 있었습니다."원경릉은 약을 세 번째 칸에 넣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세 번째 칸은 자동으로 수축하는 구조여서, 사용하지 않는 약을 넣고 약상자를 닫는 순간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반면 두 번째 칸은 평소 사용하는 약으로 꽉 차 있어, 추가로 주사를 넣을 공간조차 없었다.게다가 약상자를 10년 넘게 사용해 온 그녀였기에, 약을 어디에 두는지 몸이 기억할 정도로 익숙했다. 그녀가 약을 잘못 넣었을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다. 설령 잘못 넣었다 하더라도, 약상자는 위험성을 자동으로 감지하는 기능이 있어, 그 약이 서일 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서일은 원경릉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우문호의 병세가 다시 악화한 줄로 착각하며 구석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참고 또 참아왔지만, 이제는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다. 그가 울기 시작하자, 원경릉이 깜짝 놀라 물었다."왜 그래? 설마 또 무슨 약이라도 먹인 것이냐?""아닙니다..."서일은 빨개진 눈에 머리도 헝클어진 채로 원경릉을 바라보며 처량하게 말했다."마마, 폐하께서 아직 낫지 않은 것입니까? 혹시 제가 폐하를 죽게 만든 것입니까?"원경릉은 웃음을 터뜨리며, 서일의 반응 속도가 정말로 느리다고 생각했다."그런 소리 하지 말거라. 그런 일 없다. 그저 사실을 알아보는 것뿐이니, 괜히 걱정하지 말거라. 다섯째도 아주 좋아졌다. 단지 조금 더 검사가 필요할 뿐이다."서일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서일은 우문호에게 가서 울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것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