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원경릉이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했다.“잘 싸웠어요.” 우문령도 기왕비가 눈에 거슬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무모했네. 기왕비에게 미움을 사다니……. 앞으로 기왕비가 초왕 내외를 어떻게 대할지 걱정입니다.” 낙평공주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오늘 일이 아니라도, 기왕 내외가 우문호와 나를 가만뒀을까? 전에도 우문호를 암살하려고 했는데?’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고개를 돌려 낙평공주를 보았다.“이미 엎어진 물입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회왕의 치료니까, 거기에 몰두 할 겁니다.”“일리가 있네요. 그럼 일단 치료에 몰두하세요. 근데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본궁은 도와줄 수 없어요.” 낙평공주가 원경릉을 보고 말했다.“제가 도와줄게요!”우문령이 큰 소리로 외치며 손을 번쩍 들자, 낙평공주가 우문령의 이마를 한대 쳤다.“너는 좀 조용히 있어라. 앞으로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러느냐!”앞으로 황실에서 누가 권력을 쥐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에 낙평공주는 쉽게 나서지 않을 것이다. 원경릉은 낙평공주의 행동을 보고 그녀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빠삭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우문령은 어려서 잘 모르는 걸까? 아니면 천성이 이런걸까? 원경릉은 후자가 맞지 않을까 생각했다.노비가 회왕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원경릉이 다시 회왕부로 치료를 하러 들어갔을 때 회왕의 태도가 조금 바뀐게 느껴졌다. 하지만 원경릉 마음 한구석엔 이것도 잠깐이겠지라는 생각이 있었다.그녀는 회왕이 약을 뱉어내는지 감시하느라 술시(戌時)까지 회왕부에 있었다. 날이 제법 어둑해지자 그녀는 초왕부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우문호가 데리러 오지 않자 원경릉은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초왕부로 돌아가는 마차가 청석(青石) 길 위를 달리자 이리저리 흔들렸다. 원경릉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장막을 걷고 “마차를 세워라!”라고 외쳤다.마차가 멈추고 구사가 말에서 내렸다. “왕비님 무슨 일이십니까?”원경릉은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구사가 잠시 침묵하더니 “권력은 전부입니다!”라고 말했다.“전부?”아닐걸요. 제가 보기엔 권력이 있다고 모든 것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원경릉이 빈정거렸다.“권력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권력의 끝인 황제가 되어도 만족을 모르고 하늘의 신과 권력을 비교하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의 욕심에 끝이 있기는 한 걸까? 우문호도 이렇게 될지 모르겠다.“구사와 초왕의 친분이 두터운 것 같던데, 알고 지낸지 얼마나 됐습니까?”그녀가 구사에게 물었다.구사는 빙그레 웃으며 “꽤 됐지요.”라고 말했다.“어린 시절을 공유했다는 것은 귀한 경험이죠. 그럼 우문호와 주명취 사이의 일도 알고 있겠네요?”“알죠. 다 압니다.” 구사는 원경릉의 눈을 빤히 보며 “왕비는 뭐가 알고 싶은 겁니까?”라고 물었다.“알고 싶은 거 없어요. 그 둘 사이에 일을 내가 왜 알고 싶어 합니까.”구사는 의외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소인은 왕비께서 초왕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줄 알았습니다.”원경릉은 뒤를 돌아보며“사서 고민하지 말자! 이게 내 좌우명입니다.”라고 말했다.구사는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사서 고민하지 말자면서 왕야와 주명취의 일은 왜 물어보는 건가? 왕비의 말에 모순이 있다.“그만 걸을래요. 힘들어.” 원경릉이 말했다.구사는 장막을 걷어주며 “왕비. 잘 앉으세요.”라고 말했다.마차에 올라탄 원경릉은 장막을 치며 “구사 어른. 아침저녁으로 배웅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했다.“폐하의 명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구사가 담담하게 말했다.원경릉은 눈을 감고 안 좋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정신을 가다듬었다.우문호는 원경릉보다 조금 일찍 왕부에 도착했다. 마음 같아서는 원경릉을 마중 나가고 싶었지만, 어젯밤 그녀가 자신을 거절했던 일이 생각나서 차마 가지 못했다. 그 역시도 두 사람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원경릉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회왕부에 가지 않았다. “왕야! 오셨습니까!” 서일이 문어귀에서 환
우문호를 기다리고 있는 두 명의 미인“소녀가 대감을 모시겠습니다!” 요염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고,온 몸을 우문호에게 찰싹 붙였다.그 순간 우문호는 우주의 모든 기운이 몸 안을 타고 흐르다가 뇌를 뚫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태산을 뽑을 기세로 노하며, “서일!”서일은 싱글벙글 웃으며 문 앞에서 수고했다는 칭찬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왕야가 소리치는 것을 듣고 천둥이 치나 황급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옆에 서 있던 기라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하며 달음질쳐 안으로 들어갔다.서일은 그제서야 서둘러 기라를 따라 들어가며 무슨 일입니까? 너무 못 생겼나요? 마음에 안 드십니까? 하지만 마담이 그러는데 이 둘이 제일 잘나가는 명기(名妓)라고 했는데.서일은 할 수 있는 한에서 왕야에게 최선을 다했다.방안은 일진 광풍이 불어 닥친 후로 서일은 주눅이 든 채로 떨어진 옷을 주워 기방 아가씨들을 덮어주었다. 기방 아가씨들은 상당히 전위적이게도 홀랑 벗고 있다. 여자들을 데리고 복도를 지나는데 구사와 원경릉이 앞에서 걸어온다.원경릉이 서일이 데려온 두명의 여자를 보니, 양가집 규수 같지 않게 화장이 진하고 향수가 코를 찌르는 데다 행동거지가 떳떳하지 못하고 눈썹을 살짝 들어올려 그린 게 영락없이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직업 여성이다.서일 이 녀석, 덜렁인 줄로만 알았더니 이런 쪽으론 아주 ‘빠삭’하네.그래도 세상에 가슴 큰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 있을까?옆에 서서 여자들의 가슴에 눈이 고정된 구사가 정신을 차리도록 원경릉이 헛기침을 한 번 했다.구사는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얼굴을 굳히더니 정색한 목소리로 서일에게, “서일, 초왕부에 어찌 함부로 바깥 사람을 데려왔단 말인가?” 서일이 거의 울 것처럼, “탕대인 생각이었어요, 왕야께 드리라고.”서일이 어젯밤 탕대인에게 물어봤는데 동의하고 은자도 탕대인이 줬는데 왜 왕야는 서일 한사람만 혼내십니까?이건 분명 탕양이 꽁지를 뺀 거다.원경릉은 서일을 보고, “탕양이 왕야께 드리라고 했다고?”
원경릉의 방을 찾아온 우문호우문호는 방에서 성질을 부리며 밥도 먹지 않았다. 오늘 관아에서 종일 시체를 보고, 멸문지화를 당한 사건의 자초지종도 들었으나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해 마음이 초조한데 돌아오니 서일이 벌인 이런 일에 맞닥뜨리고 나니 화를 참지 못하고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탕양은?” 성질을 부린 후 기라에게 화를 내며 물었다.기라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왕야, 탕대인은 오늘 저녁에 외출했습니다.”우문호는 탕양이 원경릉을 마중 나갔다고 생각하고: “문지기에게 탕대인에 알리라고 해라, 돌아오는 대로 바로 소월각으로 오라고.”“예!” 기라는 석방을 받은 죄인처럼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우문호는 목욕을 하고 방에서 차를 마셨다.계속 밖을 보며 탕양이 왜 안 오지? 탕양이 안 온다는 건 원경릉도 안 왔다는 얘긴데.향이 하나 탈 정도 시간이 지나고 탕양이 비로소 총총히 들어와, “왕야, 부르셨습니까?”“어디 갔었어?” 우문호가 찻잔을 내려놓고 눈을 들어 탕양을 보니 원경릉을 마중하러 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복장이라 물었다.탕양이: “소인은 오늘 마을에 갔었습니다. 이제 곧 추수때가 아닙니까.”우문호는 ‘어’하더니, “마을에 갔었군, 아무 일도 아니다. 가봐.”탕양은 감히 머물지 못하고 서일 이 망할 놈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틈에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우문호는 기라를 들라 해서, “왕비는 오셨느냐?”“왕야, 왕비 마마께서는 이미 오셔서 봉의각에 계십니다.”“돌아왔어? 언제 돌아왔지?”기라가 조심스럽게: “아마 그리 오래 되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우문호는 기라를 내보내며, “알았다, 나가봐.”기라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밖으로 나가며, 왕야께서 요즘 감정이 급변하셔.우문호는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지만 마음이 평온해지질 않는다.봉의각에 가봐야 하나? 가 말어? 가 말어? 가 말어?우문호가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 문 밖에 기라가 급히 묻길: “전하, 어디를 가십니까?”“과식해서 마당이나 좀 걸으며 소화를 시켜야 겠다.”
둘의 냉전과 구사의 충고원경릉은 꼭 이런 식으로 우문호를 대해야만 해?우문호는 얼어붙을 듯한 목소리로, “네 맘대로 해!”휙 돌아서 가버렸다.뒤로 원경릉의 공손한 목소리가 전해 온다. “전하를 배웅합니다.”우문호는 화가 치밀어 이를 갈며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뭐 하자는 건데? 내가 너를 쥐면 터질까 불면 꺼질까 애지중지해야는 거야?원경릉은 돌계단에 서서 우문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자신을 건드리지 못한 게 한 건 우문호가 더럽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원경릉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방금 전에 두 기생이랑 재미 보고 나서 바로 원경릉한테 와서 수작을 부리다니, 그녀는 우문호의 애완동물이 아니다.원경릉이 천천히 방으로 돌아오니 기상궁이 조용히: “왕비마마, 왕야를 왜 이렇게 대하십니까?”원경릉이 기상궁을 보고, “내가 방금 예의에 어긋났던 점이 있었어?”기상궁은 말문이 막혔다.예의를 갖췄지요, 너무 갖춰서 문제지만요!우문호는 씩씩거리며 소월각으로 돌아왔는데 뭔가 목구멍에 걸린 듯 좀처럼 석연치가 않다.어제까진 사랑을 속삭이다가 오늘 돌변하다니 원경릉은 자기가 뭐 라도 되는 줄 아나?손으로 만지지도 못하게 하다니 입궁해서 황조모에게 아직 합방을 못했다고 말한 게 누군데?원경릉의 쌀쌀맞은 눈빛을 떠올리니 둘 사이 거리가 천리나 되는 것 같아 우문호의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다.밤새 두 사람은 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구사가 밖에서 기다리다가 원경릉이 나오는 것을 보고, 마차를 가까이 대령하며 원경릉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다.원경릉은 오늘 청색에 검은 구름무늬 비단에 자수가 없는 깔끔한 옷을 입고 녹주는 원경릉이 편하도록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올려 뒤에서 보면 머리가 두 개 고리로 사려져서 간드러지면서도 청순하다.기다리고 있는데 우문호가 나왔다.원경릉은 바로 두 걸음 물러나 예를 갖추며, “왕야 안녕하십니까!”우문호는 밤새 치밀어 오른 화를 누르고 또 눌러서 겨우 억제했는데 원경릉의
아픈 회왕 앞에서 사랑싸움하는 두 사람우문호의 눈이 똥그래지다 못해 왕방울처럼 튀어나오며, “네 말이…… 네가 원경릉이랑 같이 서일이 여자들을 데리고 가는 걸 봤단 말이지?”“당연히 봤지. 우리가 봉사가 아닌데.” 구사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우문호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그래서 원경릉이 화가 났다?”순간 너무 놀라 펄쩍 뛸 뻔했다.“화나는 게 당연하지 않아?” 구사가 의미심장하게 충고하며, “내가 그랬잖아, 밖에서 사람을 데려올 필요가 어디 있냐고, 네가 어떤 신분이야? 초왕부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렇게까지 네 명성을 깎아 먹을 필요는 없잖아?”우문호는 가르침을 받는 숙연한 얼굴표정으로, “알았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 게. 너는 먼저 회왕부로 가 있어, 나도 오늘밤엔 그녀를 데리러 갈게.”“그래, 모시러 가야지. 어젯밤에 회왕부에서 귀가길에 네가 있나 둘러보고, 없어서 얼마나 실망했는데. 그리고 초왕부에 와서 그 여자들을 봤으니 왕비마마께서 화가 안 나고 배겨?”우문호는 확실히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어젯밤에 데리러 갈 수도 있었는데 좀 튕긴 거 였다.구사는 충고를 마치고 자리를 떴다.해가 지기 전에 우문호는 시간 맞춰 회왕부에 나타났다.원경릉은 마침 안에서 회왕이 약을 제대로 먹는지 뚫어지게 쳐다보자 회왕은 그녀 앞에서 약을 먹어 보이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이제 됐습니까?”원경릉은 눈을 내리깔고 환자와 싸우지 않았다.일어서는데 우문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못 본 척하고 사발을 들고 나가려 했다.우문호는 원경릉을 흘끔 보고 아무 말 없이 회왕에게 가서 얘기한다.“좀 좋아졌어?” 우문호가 침대 곁에 앉았다.원경릉이 빛과 같은 속도로 나가며 마스크 한 장을 우문호에게 던져주며, “써요!”우문호는 마스크를 원경릉에게 다시 던지며, “됐어.”원경릉이 우문호를 노려보며, “쓰시라고요.”우문호가 고개를 저으며, “그럼 먼저 왜 나한테 화가 났는지 얘기를 해.”원경릉이 눈을 내리깔고 무심하게: “화 안
원경릉과 우문호의 냉전말을 마친 우문호는 원경릉의 손목을 잡고 “가자, 마차에서 설명하게.”“손 놔!” 원경릉은 얼굴이 파랗게 질리도록 화가 나고, 더럽혀진 손은 그냥 잘라줘 버리고 싶다.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원경릉은 우문호에게 잡혀 억지로 마차에 태워졌다.오늘 마부는 서일이 아닌데 어젯밤 일이 있은 뒤 서일은 강제로 쫓겨난 상태다.“나한테 변명할 기회를 주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우문호는 몸부림 치느라 새빨개진 원경릉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원경릉이: “먼저 날 놔줘, 안 그러면 말할 필요 없어, 난 한마디도 안들을 테니까.”우문호는 원경릉을 놔주고 진지하게 물으며, “네 맘속에 나는 어떤 사람이야?”“내 마음 속에 네가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내가 직접 봤다고.” 원경릉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네가 본 게 뭔 데? 서일이 여자 둘을 데리고 가는 것만 봤잖아. 그럼 서일이 그 둘을 데려가기 전에 일은?”원경릉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우문호를 노려보며, “그래,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어? 내가 직접 못 봤네. 하지만 나도 바보가 아니야, 딱 보면 몰라?”“딱 보면 뭐?” 우문호는 곁으로 바짝 다가와 숨조차도 눌러 버릴 듯 거의 원경릉을 바닥에 깔아 눕히기 일보직전이다.원경릉은 우문호를 밀어낼 수 없어 창피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이 얘기 하고 싶지 않아, 우리 예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게 최고야. 기회를 봐서 나랑 이혼해 줘. 우리 편하게 각자 인생을 살자.”원래 이랬어야 했는데 요 며칠 의외의 사태가 발생해서 둘이 어쩌면 뭔 가에 씌었던 거다.서로 미워했던 두사람이 귀신이 홀린 게 아니고 서야 이럴 수는 없다. 우문호가 천천히 손에 힘을 빼고, “이게 네 진심이야?”“그래!” 원경릉은 우문호를 보지 않고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이게 내 진심 맞아, 화원에서 있었던 일, 마차에서 있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 보니 귀신에 홀렸던 것 같아.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우리 원래 약속과 어긋나는 일이었어.”
회왕을 병문안 온 주명취와 손왕손왕도 요 근래 손왕비를 데리고 회왕부를 찾았다.손왕비는 특히 아리땁고 농염한 미모의 소유자로 몸매도 좋아서 손왕 곁에 있으면 미녀와 야수 같은 기시감이 든다.손왕비는 자주 오지 않지만, 한 번 올때 마다 예물을 많이 가져 오는데 딱 봐도 세심하게 정성을 들인 티가 난다. 가져온 예물과 약재는 전부 폐병환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주명취도 한 번 왔다 갔는데 제왕과 같이 왔다.우문령은 호시탐탐 주명취를 주시했는데 심지어 회왕 방에 가서 병문안을 할 때조차 옆에 착 붙어서 허튼 수작 부리지 못하도록 지켜봤다.주명취는 원경릉과도 몇 마디 주고 받았다. 예의 상 회왕의 상태가 어떤지 묻고 예를 갖춰 감사인사를 한 후 나갔다. 두 사람은 불쾌한 일이 전혀 없었던 사람처럼 행동했다.회왕의 태도가 가장 눈에 띄게 바뀌었다.어의가 말한 기한이 이미 지났는데도 자신이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고 심지어 각혈도 하지 않으며 기침은 하지만 상당히 횟수가 줄어들어 앞으로 더 버틸 수 있다. 가장 기쁜 건 노비로, 요며칠 원경릉을 아주 신처럼 떠받들며 원경릉이 먹고 쓰는 것을 노비가 나서서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했다.그러나 원경릉은 가슴이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다.이 날 오후 원경릉은 회왕에게 주사를 놓은 후 회왕부 마당에 앉아 혼자 멍하니 있었다.사실 원경릉은 7~8일이 지나도록 둘이 한번도 마주치지 않은 게 영 어색했다. 원경릉이 초왕부로 돌아오면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적막한 봉의각으로 늘 그렇듯 기상궁과 녹주 뿐이다. 다바오를 빼면 같이 대화를 나눌 사람조차 없다.원경릉은 심지어 우문호와 다투고 지내던 나날이 그리워지기까지 했다.원경릉은 난간에 기대어 화원 한 켠을 바라다 봤다.짙은 나무그늘에 가려진 곳으로 바로 우문호가 원경릉에게 키스한 곳이다.그날의 상황, 매 순간의 세세한 움직임까지 원경릉은 모두 그려낼 수 있다.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다.우문호 입술의 체온, 손가락의 굳은 살 하나하나까지 전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
오늘은 성주의 생일이기에 경사라 섣불리 피를 볼 수는 없으므로 칼은 빼 들었지만 먼저 나서서 늑대를 죽이는 사람은 없었다.안지여는 어두운 눈빛으로 ‘늑대 무리라고? 척후병의 보고로는 안풍 친왕이 늑대 무리를 끌고 온다고 했는데, 저들이 의외로 성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이거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지여는 잔을 들고 꿈적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지기 직전까지 미동도 없는 태산처럼 냉정하고 침착했다. 늑대 무리는 안으로 들어온 뒤로 두 패로 나뉘어 서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호시탐탐 엿보며 으르렁거렸다.“성주님, 성주님, 저들이 기어코 쳐들어오겠다고….” 문지기가 외치는 소리는 들렸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더니, 그보다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먼저 들이닥쳤다.앞에 걸어들어오는 두 사람을 안지여는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안풍 친왕 부부로 예전에 그들이 천문 세가 사람들을 조사하러 왔을 때 그에게 속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당시 일면식 뿐이었으나 천문 세가 일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탓에 그들의 얼굴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서 별로 변한 게 없는 거지?’안풍 친왕 부부 뒤에 따라오는 10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그들의 호위 무사일 것으로, 주인인 안풍 친왕 부부는 별 표정이 없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고개를 들자 괴팍하고 악랄한 얼굴이 안지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안지여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저들이 돌계단을 오르면 그때 일어나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게 그의 태도였다.하지만 안풍 친왕 부부는 돌계단을 오르지 않았고, 손님 중 건배를 권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람들 의자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차지하고 앉아, 그들을 대놓고 밀치더니 품에서 자기 젓가락을 꺼내 옆 사람 상관하지 않고 먹기 시작해 사람들이 다 경악했다.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두 사람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
풍도성 안은 술잔을 주고받고 건배하며 흥겨운 잔치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안지여는 오늘 황금색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에 거대한 이무기를 수놓았으며, 황실의 밝은 황색과는 약간 구별되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짜 곤룡포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이무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과 매우 흡사했다.안지여는 자신의 야심을 이미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당연히 안지여는 오늘도 야심을 감출 생각 없이 손님들에게 보란 듯이 자세를 잡았다. 심지어 인근 지역 조정 관리들이 손님으로 왔어도 안지여는 전부터 맺어온 관계였기에,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매우 두터워 산 넘고 물 건너 저 멀리 있는 황제가 그들을 시시콜콜 관리할 수 없었다.그 자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오늘 황실에서 파견한 일행이 온다는 것을 알고, 연회석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성주님, 듣자하니 안풍 친왕 전하와 이리 부마께서 오늘 오신다던데 어째서 안 보입니까?”안지여가 잔을 들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한다면 결국 오겠지요.”“여정을 듣기론 오늘 분명 풍도성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밤이 되도록 아직 안 보입니까? 설마 성주님이 직접 나가서 맞이하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성주님이 가서 맞이하셔야 한다고? 아주 허세가 대단한데? 퉤!”“누가 아니랍니까? 진심으로 생신을 축하하는 거였으면 며칠 전에 풍도성에 도착해 성의를 보여야지, 오늘까지 늑장을 부리다가 늦게서야 와서, 아직도 잔치에 오지 않은 건 분명 성주님의 체면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행태입니다. 제가 보기에 못 들어오게 막고 돌려보내시지요, 마음만 받은 셈 치고요. ”“맞습니다. 그동안 조정에서는 풍도성에서 받은 공물이 적지 않았으니, 만족한 줄도 알아야죠.”“풍도성은 더 이상 조공을 바칠 필요 없어요. 뭐 때문에 그럽니까? 수백 년 전에 풍도성은 원래 북당의 영토가 아니었어요. 선을 긋고 나와 독립해야 합니다.”모두 안지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서, 몇 잔 들어가자, 비위를
소여쌍의 욕은 거의 반 시진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도 별로 드문 일이 아니라 무쌍거 사람들은 다 익숙해져 있었다. 성주가 오지 않거나 소여쌍이 아프기 시작해도 이렇게 욕을 해댔다.욕하다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늙은 몸종이 가서 달랬다. “부인 그러실 게 뭐가 있으십니까? 몸이 가장 중하십니다.”소여쌍이 의자에 기대 늘어졌다. 극도로 피곤해 풀린 눈으로 천정을 보며 비참함이 가슴 깊은 곳을 타고 내렸다. “오늘이 초엿새지?”“네!” 늙은 몸종이 대답했다.소여쌍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곧 15일이구나. 또 내 명을 재촉하는 고통이 오겠지.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그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그러자 늙은 몸종도 매우 괴로워했다. “부인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고통도 며칠이면 그럭저럭 지나가서, 그동안도 그렇게 지내셨잖아요?”“며칠이면 뭐 그럭저럭 지나가나?” 소여쌍이 잔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네가 이 고통을 안 당해봐서 그래. 이게 다 이리봉청 그년 짓이야. 오빠가 그년을 쫓아가서 죽이게 한 걸 정말 후회해. 그년을 잡아 와서 가두고 내가 한 번씩 아플 때마다 그년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나보다 수천 수백 배 고통스럽게 해야 했어.”늙은 몸종이 소여쌍의 손을 쥐었다. “부인 그런 생각 마세요. 벌써 죽은 사람을 이제 와서 생각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성주님과 자꾸 다투지 마세요. 자꾸 다투시다 보면 감정이 사라집니다.”소여쌍이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는 진작부터 나한테 아무 감정 없어.”“성주님은 이리봉청에게 아무 감정 없으세요. 감정이 있을 리도 없고요. 안 그러면 당시 부인을 위해 이리봉청을 죽이고 천문 세가 사람을 다 죽이셨을 리가 없죠.”소여쌍이 고개를 돌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전에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요 몇 년간, 성에 들어온 여자들 생긴 걸 보라고. 전부 이리봉청을 쏙 빼닮았잖아? 오빠는 역시 후회하고 있는 거야. 날 위해 이리봉청을 죽인 걸.”소여쌍은 늙은 몸종의 손을 잡는데 고여서 썩
안지여는 소야쌍을 놓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이틀 뒤가 내 생일인데, 당신 몸 상태는 어때?”그러자 소여쌍은 시녀의 손을 뿌리치고 얼른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 했는데, 몇 걸음 만에 휘청거리더니 하마터면 안지여 뒤로 넘어질 뻔했다.안지여는 소여쌍을 잡아줄 수 있었지만, 손을 뻗지 않고 그녀를 등지며 보이지 않는 척했다.시녀는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얼른 소여쌍을 부축해 바닥에 넘어지는 것까지 막았다.소여쌍이 숨을 돌리고 살짝 웃었다. “몸이 많이 좋아져서 오빠 곁에 있을 수 있어요. 오빠 생일에 당연히 제가 곁에 있어야죠.”안지여는 그제야 소여쌍을 돌아봤다. “생일엔 손님이 많이 올 거야, 올해는 다른 어떤 해보다 성대하게 하니까 당신도 잘 차려입어. 내가 내일 사람을 시켜 장신구를 보내도록 하지.”“네, 알았어요!” 소여쌍이 기쁜 듯이 말하며 안지여를 한없이 바라봤다.하지만 안지여는 소여쌍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정 설명했고 체면도 차렸으니 됐다 싶어 말했다. “난 아직 일이 있어서. 당신 쉬는 걸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잘 쉬고 있어.”안지여는 말을 마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려고 했다.이때 소여쌍이 갑자기 닭발 같은 손을 뻗어 안지여의 팔을 붙잡으며 서둘렀다. “오빠, 어렵사리 왔는데 저랑 얘기 좀 더 해요.”안지여가 고개를 숙이고 소여쌍의 마르고 늙은 손을 바라봤다. 손등에 주름이 자글거리는 것이 구겨진 비단 뭉치처럼 너무 흉해서 혐오감이 든 나머지 쓱 손을 뺐다. “말했잖아, 일이 바쁘다고.”소여쌍의 눈빛이 갑자기 매서워지며, 늙고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일이 바쁜 거예요, 아니면 그 여우 년을 찾아가는 거예요? 제가 모를 줄 아세요?! 여자를 성에 얼마나 숨겨놨는지.”안지여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야?”소여쌍이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축 처진 눈에서 원한이 쏟아져 나왔다. “제가 늙었다고 싫어하는 거잖아요, 아녜요? 잊지 마세요. 오빠의 동안도 결국 늙는다고요. 이리봉청이 아직 살아있어도 지금 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