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상황과의 대화붕대를 풀어 상처가 드러나자 원경릉은 잠시 숨을 멈췄다. 상처가 상당히 깊어서 약상자를 곁에 두고 소독약을 꺼내 세밀하게 상처를 닦아낸 뒤 소독하고 약을 바른 뒤 다시 상처를 동여맸다.태상황은 움직이지 않고 원경릉이 처리하는 대로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품에 안겨 있는 찰떡이를 보다가, 가끔 고개를 들어 만두와 경단이를 한번씩 곁눈질했다. 두 분 꼬마 나리들께서는 찰떡이가 울고 불고 난리를 쳐도 여전히 꼬마돼지처럼 솔솔 단잠에 빠져 있다.태상화의 마음에 비로소 현실감이 들면서 어지럽고 시끄러운 건곤전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던 것이었다.상처를 잘 싸매고 원경릉은 찰떡이를 안아서 희상궁에게 준 뒤 태상황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는 눈물을 흘리며, “황조부, 죄송해요, 제가 오랫동안 뵈러 오지 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태상황은 진작 마음이 풀렸지만 지금 원경릉이 꿇어 앉은 것을 보니 고집이 좀 남아서 씩씩거리며, “오랄 땐 안 오더니 누가 반갑데? 비켜 과인이 아침 먹는데 방해돼.”원경릉이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열심히 아침 식사 시중을 들었다.비록 아침을 먹는 내내 태상황은 참깨 과자가 덜 부드럽네, 강낭콩 떡이 덜 다네, 인삼칠보 오리탕이 좀 쓰네 하면서도 적지 않게 먹더니 원경릉에게 탕 한그릇에 과자 두 개를 하사하기까지 했다.다 먹은 뒤 원경릉이 태상황을 부축하고 어화원을 산책하는데 유모들도 아가들을 안고 따라왔다.조손 두 사람이 조곤조곤 얘기하는데 원경릉이 최근 바빴던 일을 늘어놓았다. 태상황은 사실 다 아는 얘기지만 아무 말없이 듣고 있었다.걷다가 지쳐서 둘은 정자에 앉았는데, 원경릉은 내친 김에 회왕의 혼사를 거론하며 태상황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태상황이 다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너랑 같이 문둥산에 가고자 한 걸 보면 따로 속셈이 있었거나 정말 선의가 있었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 하지만 어떤 쪽이던 용감하고 세속에 얽매인 사람은 아니다. 문둥산은 일반 사람들이 감히 가지 못하는데, 아직 시집도
날 죽이러 왔지?태상황이 원경릉에게 눈을 흘기며, “인간들이 다 이렇다니까, 별 것도 아닌데 요구하고 싶어하니 말이야. 라만이 소요공을 먼저 제자로 받아서 눈늑대 한 무리를 떼 주고, 늑대파는 회색 늑대를 얻었을 게 틀림없어.”원경릉은 미색이 그날 회색 늑대 어쩌고 했던 것 같아, “아마 그럴 거예요, 전 정말 생각도 못했어요, 늑대파가 소요공과 같은 사부를 모시는 문파라니, 그럼 말씀대로 별 문제 없겠네요.”태상황이, “그대론 별 문제 없지, 늑대파에는 3가지 살인의 규칙이 있는데, 현 천자와 태자는 죽이지 않는다, 여자와 아이는 죽이지 않는다, 단 고수 순위 100명 안에 들거나 남편과 아이를 버린 경우는 예외로 한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판도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죽이지 않는다. 이게 늑대파가 설립되던 때 정해진 규칙으로 일단 규칙을 어기면 늑대파는 해산하는 거지.”원경릉이 태상황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고 얼굴에 알듯 말듯 한 미소를 지으며, “고수 백명 안에 들거나 남편과 아이를 버린 경우란 말이죠?”태상황이, “흠, 분명 그렇지, 이 일은 운영(雲影)에게 물어봐도 돼, 운영도 알거든, 늑대파가 성립되던 날 운영도 초대를 받아서 참석했거든.”운영은 귀영위의 노장으로 전에 명을 받들어 원경릉을 보호한 적이 있으나 실수를 저질러 뒤에 나장군이 귀영위를 이어받고 다른 사람으로 교체했다.원경릉은 해괴한 웃음을 지으며, “됐어요, 알겠어요.”보아하니 이리 나리와 미색은 처음에 원경릉을 목적으로 왔다가 비록 끝내 손을 쓰진 않았지만 확실히 원경릉을 죽이려던 마음이 있었다.어쩐지 이리 나리가 전에 원경릉에게 어떻게 하면 우문호와 헤어질 거냐고 묻고 헤어지지 않겠다고 하자 이리 나리는 곧 무공을 가르쳐 준다고 하질 않나, 원경릉이 문둥산에 가기 시작했을 때 원경릉이 무공 수련을 안 한다고 성질을 부렸었던 것이다.정말 이리 나리를 난감하게 했구나, 위풍당당한 늑대파의 장문인과 대호법이 같이 출동해서 원경릉을 죽이러 오다니, 원경릉 일생을 통틀어 최
미색의 임기응변원경릉이 미색에게 평소처럼, “미색, 다 알아요, 감출 필요 없어요.”“감추는 거 아니예요, 우린 광명정대한 사람들인데 왜 태자비 마마를 죽이겠어요? 마마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뜬금없이 무슨 말씀이세요?”“늑대파가 하는 일이 사람의 머리를 사고파는 일이잖아요? 누군가 은자를 줬겠죠.” 원경릉이 말했다.미색이 웃으며, “그게 이상한 거죠, 제아무리 마마께서 현 왕조의 태자비라, 마마의 머리가 몇 만 냥이라고 해도 자객 업계에선 천정부지의 가격일 텐데, 우리가 경성에 와서 써 재낀 돈만 해도 은자 이백만 냥이 넘어요. 어떤 바보가 은자 몇 만 냥을 벌겠다고 이백만 냥을 써요? 우리 늑대파는 바보를 키우지 않는데다 돈계산이 확실한 사람들이라고요, 늑대파 자객이 이렇게 많은데 마마의 목숨을 가져가겠다고 이리 나리와 제가 나설 필요가 있겠어요?”원경릉이 듣고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그래서 이리 나리는 정말 태자 전하 때문에 오셨다? 나리는 진짜 동성애 취향이시고?”미색이 문 쪽을 보더니 원경릉 곁에 바짝 다가 앉아 목소리를 낮춰, “이리 나리의 지금 신분과 지위에서 이런 말 원래는 하면 안되는데 태자비 마마는 입이 무거우시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이리 나리는 확실히 여자는 안 좋아하시고, 직례에 계실 때도 잘 생긴 공자들이 시침을 들었죠.”원경릉이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그렇다면 왜 또 태자 전하를 찾아 온 거예요? 정말 태자 전하와 같이 있으려고요?”미색이 고개를 흔들며, “아뇨, 나리는 태자 전하를 감상하세요, 태자 전하와 사귀고 싶으실 뿐이에요, 태자비 마마 안심하셔도 되는 게 나리는 마마의 위협이 못 돼요, 태자전하를 감상하시는 거라 자연스럽게 태자 전하의 행복을 바라시니, 두 분 관계를 해치실 리가 없어요.”원경릉은 미색의 말이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 게, 그 말대로라면 우문호는 이리 나리의 아이돌 같은 존재로 나리가 이번에 경성에 온 건 아이돌 보러 온 거고, 그래서 은자 200만냥을 척 하고 내놓은 게 되는데 이리
사사 의식원경릉이 계속 앓는 소리를 했다. 자기가 비록 차를 따라주고 이리 나리가 마셨지만 사부로 모시는 게 어떻게 이렇게 간단할 일인가? 향을 피워 놓고 천지에 고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원경릉은 사부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한 적이 없는데 늑대파 2대 계승자라니 아서라 말아라. 저들의 일은 자신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게 원경릉은 염라대왕에게 가던 사람을 다시 빼앗아 오는 게 일이고, 늑대파는 염라대왕에게 사람의 목을 보내주는 게 일인 존재가 아닌가. 원경릉은 계승자가 되고 싶지 않다.원경릉이 어찌 알겠어, 이게 이리 나리와 미색이 밤새 상의한 결과로 기왕에 원경릉을 죽일 수 없고 늑대파도 해산할 수 없으니 원경릉으로 하여금 늑대파의 미래 계승자가 되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늑대파는 자신의 장문인을 죽일 수 없으므로 십만 냥은 정정당당하게 물릴 수 있다.또 지금 소답화가 이미 죽었으므로 이리 나리가 소답화에게 십만 냥 액면가의 지전을 태워줘도 아무 문제없다.이리 나리는 이 매매로 큰 손해를 봤고 오히려 200만냥을 더 보태 주다 못해 늑대파가 계율을 지키지 못해 해산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다행히도 이 ‘풍전등화’ 같은 시국에도 늑대파를 보존했다.원경릉은 반쯤 엉거주춤하게 쭈그린 자세로 주먹을 쥐고 두 손을 뻗는 자세를 취했다. 미색이 백 번쯤 바로 잡아준 덕분에 마침내 기준에 합격했으나 두 다리는 덜덜 떨고 두 손도 떨고 전신을 떨어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다.미색이 고개를 흔들며, “태자비 마마, 골격과 체력이 너무 약해요, 앞으로 위험이 닥치면 어떻게 버틸 거예요? 정말 무공수련 열심히 하셔야 돼요, 절정 고수가 되는 건 안 바래도 최소한 자신을 보호할 능력은 있어야죠.”원경릉은 미색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무술을 배워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있겠어?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원경릉은 다른 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하지만 원경릉을 무공 수련 시키겠다는 이리 나리의 결정이 초왕부 모든
사사 의식 예물 교환이번 사사 의식은 이리 나리 입장에선 소박하게 진행하고자 늑대파 호법 몇 명과 장로를 오라고 했을 뿐으로, 장로와 호법은 모두 젊어서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도 마흔이 되지 않았다.늑대파 사람이 초왕부에 도착해서 사적으로 회의를 열어 차기 계승자가 과연 자격에 부합하는지 토론을 벌였다.결국 만장일치로 태자비는 무공에 열심이지 않으므로 늑대파의 다음 장문인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리 나리가 의견을 바꾸길 바랬다.이리 나리는 줄곧 그들의 토론을 듣고도 아무 말 없다가 마지막으로 모두가 결론을 내리자 느긋하게, “흠, 다음 장문인 선출은 그렇게 결정하는 것으로 하지, 사사 의식을 준비하게.”사람들은 자기들이 아무리 반대를 해도 이리 나리가 밀고 나가는 습관이 있어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반대해도 입으로만 큰 소리칠 뿐이고 이리 나리가 일단 결단한 것은 누구 말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이리 나리의 말에 사람들은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하고 순종할 뿐이었다.나중에 미색이 사람들에게 이리 나리가 반한 건 태자비가 아니라 세분 황손이라고 해명했다.황손은 눈늑대가 있으니 앞으로 어떤 황손이 늑대파 장문인 자리를 계승하더라도 늑대파 세 글자는 이름을 그야말로 드높이는 것이니, 이리 나리의 바램은 그것이었다.세분 황손 중에 만두는 이미 황태손으로 내정되어서 만두는 늑대파 다음 장문인이 될 수 없고, 경단이와 찰떡이만 남는다.이렇게 경단이는 세상도 알기 전부터 미래 인생 경로가 정해져 늑대파 3대 계승자가 되었으니 어처구니가 없어도 한참 없지 않겠어?사사 의식은 간단하고 성대했으며 엄숙했다. 간단했던 건 모두 모여서 같이 밥 한끼를 먹고, 원경릉이 몇 번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고 차를 올린 뒤 공손하게 ‘사부님’이라고 한 번 부른 게 다 이기 때문이다.성대하고 엄숙했던 건 사부의 금일봉은 진심으로 엄청났기 때문인데, 다름 아닌 경성 초두취의 매매문서였다. 즉, ‘원경릉이 경성 초두취의 주인이 되었다’는 말이나 태자비 신분
미색의 변신원경릉 마음이 바뀔까봐 이리 나리는 다음날 수도권으로 돌아가야겠다며 눈늑대를 데리고 갔다.이리 나리는 불식에게 눈늑대를 안아서 마차에 태우라고 하더니, 눈늑대가 마차를 타자 꽉 끌어안고 몇 번이나 뽀뽀하며 사람들 앞에서 보이던 냉담함은 완전 사라지고 없다.이리 나리가 갔지만 미색은 초왕부에 남았다. 핑계는 불식이 경성에서 움직이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여기 남아 불식을 도와 초두취를 관장하는 것이지만, 당연히 최대의 목적은 자신의 혼사였다.미색은 사실 다급한 나머지 원경릉 앞에서 일부러 한숨을 푹푹 쉬며 자기가 곧 스무 살이 되는데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꽃 같은 시절에 혼례를 치르지 못하는 것을 마치 존속살인이라고 하는 것처럼 극악무도한 일로 생각했다.원경릉은 당연히 말뜻을 알아차렸지만 바로 문둥산에 가야하고, 황제는 여전히 태도를 밝히지 않고 있으니 재촉하기가 뭐했다.하지만 문둥산에 가기 전에 갑자기 궁에서 전갈이 와서, 노비가 회왕부로 갔으니 원경릉에게 와서 차나 한잔 하자는 것이다. 말을 전하는 사람이 원경릉에게 미색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원경릉은 우선 사람을 시켜 물어보니 노비가 회왕부로 갔는데 친정 동서도 같이 오라고 청했다는 걸 보니 미색을 본 뒤에 결정을 내리겠다는 의미다.원경릉이 얼른 미색에게 알리니, 미색이 이 말을 듣고 너무 좋아서 바람처럼 날아가 화장을 하고 불식에게 예물을 준비하라고 했다.불식은 빈틈 없는 성격으로 미색의 혼사도 늑대파의 대사로 미색이 순조롭게 시집가는 건 늑대파의 큰 경사다.노비가 마지막으로 아무래도 미색을 만나겠다고 결정한 건 회왕의 혼사를 더이상 미룰 수 없기 때문으로 반드시 연말까지는 마무리 지어야 했다. 해를 넘기면 한 살을 더 먹으니 궁 안팎으로 회왕이 폐병 귀신이라 아무도 시집오려 하지 않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노비가 이렇게 밀어붙이는 것도 사실 이런 괴상망측한 말을 참을 수 없어서다. 원경릉은 미색이 예물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눈알이
회왕부로 가는 미색미색이 이 말을 듣고 의미심장하게, “사식 아가씨, 아직 젊으셔서 제 곤경을 이해 못하시겠지만 제 나이가 되면 다급한 게 뭔 지 알게 되실 거예요, 그땐 척정도가 아니라 전신을 전부 뜯어고치라고 해도 혼사에 도움이 되기만 하면 얼씨구나 하고 할 겁니다.”사식이가 혀를 날름 내밀며, “전 걱정 안 해요, 17살이 되면 할머니가 제 혼사를 도와 주실 게 틀림없거든요.”미색이 한숨을 쉬더니, “가족이 있으니 좋겠어요.”사식이가 깜짝 놀라며, “미색 아가씨는 가족이 없어요?”“아버지가 너뎃 있는데 제 혼사를 망치기만 했어요, 늘 남자치고 좋은 놈 없다며 저더러 혼인하지 말라고 했죠.” 미색이 말을 꺼내니 또 열 받는다.원경릉과 사식이는 서로 마주보고, 아버지가 너뎃? 아버지는 한 분인데? 어떻게 너뎃이지?원경릉과 사식이가 묻지 않아도 미색이 이야기를 시작했다.“제 친아버지가 우리 엄마를 아내로 맞고, 또 계속 두 명의 첩을 맞아들였는데 우리 엄마가 분을 못 참고 저를 임신한 채로 나왔어요. 저를 낳았을 때 낡은 절간 안이었는데 밖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어서 마침 몇몇 사람들이 안으로 비를 피해 들어왔죠. 저는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저녁에 태어났고, 엄마는 저를 낳고 ‘꼴까닥’ 해서 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제가 가엾다며 저를 거두기로 했어요. 서로 자기가 데려가겠다고 싸우다가 한 사람이 1년씩 키우기로 했죠. 그래서 저에게 아버지가 너뎃 계신 거예요.”원경릉과 사식이가 듣더니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게, 낡은 절간에 버려진 아기를 상상 외로 네 사람이 서로 키우겠다고 싸웠다고? 그 사람들 아내는 자기가 아이를 못 낳나? 만약 불쌍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면 아무나 한 사람이 맡아서 키우는 게 맞지, 왜 돌아가면서 한 명이 1년씩 키우지?미색이 키득키득 웃더니 두 사람을 째려보며, “달리 말하는 방법도 있죠, 저는 대흥국의 군주로 제 아버지는 대흥국의 왕야인데 우리 엄마는 첩에게 살해당하고 저는 북당으로 도망왔죠. 그래서 제 아버지는
미색과 노비의 첫 만남노비는 이번 출궁 행장을 소박하게 하고, 내명부의 부인들도 거진 초대하지 않은 게, 당분간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길 원하지 않아서다. 그 여자는 전면에 내세우기에 부족한 사람으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동안 황제는 태자비가 이 여자를 소개했다는 말을 안 하더니, 노비가 계속 물어보니 마지못해 태자비가 좋게 봤다는 걸 실토했다.당초에 원경릉이 회왕의 병을 치료한 것과 회왕의 자금단을 원경릉에게 준 것에, 노비는 양가 감정이 들었으나 두 가지 일은 결코 대등하지 않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목숨을 구해준 은혜가 언제나 가장 큰 법이다. 그래서인지 원경릉에게는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그런 원경릉이 보증하고 추천하는 여자라니 원경릉에 대한 마음과 여러 원인이 겹쳐서 노비도 일단 보자고 결정한 것이다.노비는 조각해 놓은 듯한 아들을 바라보며, 불과 얼마전 까지만 해도 관에 한발짝을 넣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그때 얼마나 절망적이었던가.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너무 큰 바램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저 회왕이 평안하고 즐거우면 그만이지 않나. 만약 회왕이 그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하면 이대로 정하면 그만이지, 더 고민할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에 회왕을 상처 입히지 않아도 된다.이렇게 생각하자 노비의 눈빛은 다시 굳건해 졌다.태자비가 왔다는 보고들 듣고 회왕이 일어나 맞으러 나갔다.회왕이 막 도착하니 원경릉이 절세 미인을 데리고 들어오는데, 옷자락이 살랑거리는 것이 마치 선녀가 하강한 듯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얼른 예를 취하며, “시동생 다섯째 형수를 뵙습니다.”원경릉이 미소를 머금고, “여섯째 도련님 예의 차리실 필요 없어요, 여긴 바람이 차니 어서 들어가요.”회왕은 감히 미색을 쳐다보지 못하고, 미색의 눈동자는 회왕의 얼굴을 향해 굳어버린 듯 떨어질 줄을 모른다. 전에 그를 한 번 봤을 때도 잘생긴 게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노태군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안 된다. 혼인 전에는 신랑 신부가 만날 수 없어. 이건 풍습이고 규칙이니, 어길 수 없다.”그러자 일곱째 아가씨가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 이 혼사에 정해진 규칙이 있긴 합니까? 어머니께서는 제가 그를 만나 오히려 싸움이 나서 혼사가 그릇될까 봐 걱정되시는 것 아닙니까? 어머니께 약속했으니, 반드시 혼사를 올릴 것입니다. 이제 마음이 놓이십니까?”노태군은 이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좋다. 너도 장사하는 사람이니 신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약속했으니, 절대 번복할 수 없어. 목을 매겠다는 이 어미의 결심은 너가 반대하면 언제든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일곱째 아가씨가 이를 갈며 투덜댔다.“이렇게 얄미운 늙은이는 정말 처음입니다!”“나도 너처럼 고집 센 딸은 처음 본다.”노태군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원가 사람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일곱째 아가씨가 시집가는 것이 정말 꿈만 같게 느껴졌다.일곱째 아가씨의 혼사는 원가 사람들에게 마음의 짐과도 같았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가 무사히 경성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고 나니,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이 북받쳤다.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생각에 그는 코끝이 다 시큰 거렸다.그날 밤, 일곱째 아가씨가 초왕부로 탕양을 찾아가자, 탕양은 그녀를 안으로 들인 후, 단둘이 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탕양은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붉은색 옷차림에 머리를 단정히 올려 깔끔하고 우아한 모습이 여전히 돋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었지만,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더해 주었다.그녀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패기 넘치던 청춘 시절이었는데, 눈 깜짝할 새에 이렇게나 많이 늙어 버렸다.탕양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수많은 감정이 얽혀 있었지만, 한마디 말도 제대로 꺼낼 수가 없었다.특히 약도성에서의 일을 겪고 난 뒤라, 첫마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일곱째 아가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는 지금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찌 그와 그런 일을 한다는 말입니까?”그녀의 표정을 보았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잠시 멍해졌다.노태군이 이 상황을 보고 말했다.“정말 그와...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냐?”“물론입니다! 그날 밤 그는 술에 잔뜩 취해서 정신도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일곱째 아가씨가 퉁명스레 답했다.노태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그런 기본적인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탕양이 정말 쓸모없는 놈이라 생각되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어디 믿을 것 같으냐? 혼사는 이미 정해졌으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물릴 수 없다. 혼사를 올리지 않으면, 이 어미 시신이나 수습해야 할 거다!”노태군이 차갑게 말하자, 일곱째 아가씨는 그만 분통을 터뜨렸다.“어머니, 어찌 이렇게 억지를 부리시는 것입니까?”“이 어미는 평생 이치를 따지며 살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예외다. 본디 자식의 혼사는 부모가 결정하는 법이다. 게다가 황후까지 중매에 나섰으니, 너에겐 반대할 권리가 없다. 어서 가서 준비나 하거라. 열닷새에 식을 올려야 하니.”“열닷새요? 모레잖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이리 급히 저를 시집보내면, 제 체면은 어쩌라는 말씀입니까?”일곱째 아가씨가 소리치자, 노태군이 탁자를 쾅 내리치며 화를 냈다. “체면? 지금 체면이라 한 것이냐? 이 어미는 벌써 체면 다 버렸다! 네 혼담이 계속 흐지부지 되어 여태껏 시집도 못 가고 늙은 아가씨 취급받는 게 얼마나 창피한 줄 아느냐?! 매번 연회에 나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물어보는데, 이 어미의 체면을 생각한 적 있느냐?”“그래도 아무에게나 시집갈 순 없지 않습니까. 평소 늘 말이 통하시는 분이신데, 어찌 이 문제에서는 이리도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노태군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아무나? 그럼 내가 물으마. 탕양에게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느냐?”그러자 일곱째 아가씨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애써 침착하게 답
혼담을 꺼낸 당일에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하지만 원가는 세속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혼수도 원하는 대로 준비하게 했고, 잔칫상만 제대로 차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잔칫상은 일곱째 아가씨가 결코 시집을 못 가는 것이 아니라고 세상에 알리는 용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인 상대가 황제가 가장 신임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자리였다.따라서 잔칫상만큼은 빠질 수 없었다.이 부분은 탕양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름 저축해둔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잔칫상을 준비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하객 문제에 대해서도, 탕양은 아는 사람이 정말 많았기에 문제없었다.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경성에만 백 상 이상은 문제없이 마련할 수 있었다.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자로서, 조정의 문무백관 중 그와 친분이 없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이 모든 것을 논의한 후, 탕양은 마침내 의문을 물어볼 수 있었다.“노태군, 만약 일곱째 아가씨께서 동의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합니까?”“동의할 것이다. 원가는 혼사를 치르거나 상을 치르거나 내릴 결정을 둘 뿐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다른 선택은 없다.”노태군이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탕양이 초조해하며 말했다. 왠지 일곱째 아가씨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혼사는 본디 두 사람이 마음이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돌아가는 길에 탕양이 여전히 불안했해 하자, 원경릉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신랑이 될 마음의 준비만 해두시게. 일곱째 아가씨는 원가 식구들이 설득할 것이오.”“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곤란하게 하거나, 억지로 결혼하게 해서 그녀가 상처받는 건 싫습니다.”“아가씨도 동의할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약도성에서 자네를 뿌리치고 떠났을 것이네. 하지만 곁에 남아 자네를 보살폈잖나? 그것만 봐도 자네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오.”“정말입니까?”탕양이 놀랐는데, 얼굴에 은은하게 빛이 맴돌았
원경릉은 원가에서 이 혼사를 분명히 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노태군이 일곱째 아가씨를 시집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에서 혼담을 꺼내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원가의 유일한 문제는 일곱째 아가씨 본인이었는데,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일은 십중팔구 성공할 것이다.역시나, 다음 날 탕양과 함께 원가로 향한 원경릉은 원가에서 심지어 점쟁이까지 청해 두 사람의 사주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두 사람의 사주를 본 점쟁이는 한참 확인하더니,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두 사람의 사주가 다소 상충합니다.”원 노태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어디가 상충하는가?”“한 사람은 닭띠, 한 사람은 개띠입니다. 이는 닭과 개가 편치 않은 사주라, 혼사를 치른 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노태군은 탁자를 쾅 치며 말했다.“그럼 바꾸면 되지! 이제 보니 우리 딸은 말띠다. 방금 헷갈렸었다.”“말띠요? 말띠라면 괜찮습니다. 말띠는 올해 연분이 따르는 해 입니...”노태군은 점쟁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다니 됐다. 이제 길일을 골라주게.”그러자 점쟁이는 다시 손을 펴고 계산하더니 말했다.“올해 좋은 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연말쯤이어야...”“좋다. 이번 달 15일로 하지. 보름달이 뜨는 날, 사람도 오붓이 모이는 날이니, 좋지 않겠나?”점쟁이가 책자를 닫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예.”혼사는 원가에서 준비하니, 제시간에만 준비 된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15일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 원가에서 딸을 시집보내는 일을5일 안에 끝낼 수 있을까 걱정 되었다. 준비할 시간도 아직 부족했는데, 혼례복을 만드는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원가는 이미 일곱째 아가씨를 위해 혼례복을 준비해 두었다. 3년마다 한 번씩 새로 만들었기에, 지금껏 서랍 속에 쌓여 있는 혼례복만 해도 7~8벌이나 되었다.혼수도 일찌감치 마련해 두고, 혼담을 꺼낼 자가 나타나기만 기다리
사식이는 다들 일곱째 고모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 의아해하며 물었다.“일곱째 고모께서 편지를 보내신 겁니까?”그러자 셋째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편지가 왔단다. 며칠 놀다가 곧 경성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구나.”사식이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일곱째 고모께서 돌아오고 나서 혼담을 꺼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일곱째 고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일이 난감해질 텐데요.”노태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미 모든 일을 저질렀느넫 이제 와서 동의하지 않는다니? 감히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목을 매겠다!”노태군은 일곱째 고모가 열여덟 살이 되던 때부터 그녀의 혼사를 기다려 왔다. 계속 기다리다가 이미 머리카락이 다 하얘져 버렸지만, 그녀는 아직 혼인 기약조차 없었다. 이번에도 혼사를 정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게 더 나았다.그녀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일곱째 아가씨가 빨리 시집가기를 바라고 이씩 때문에, 이 일은 서둘러 진행하기로 했다.“사식아, 네 고모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갑작스레 병에 걸려 거의 죽게 생겼다고 전해라!”노태군이 단호히 명령했다.딸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스스로 저주까지 불사하는 그녀는 정말 독한 늙은이었다.서일은 탕양을 데리고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중매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바로 황후를 찾아가야 했다.소월궁에서 우문호 부부는 탕양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우문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짐이 보기엔, 일찍 일곱째 아가씨에게 네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이리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탕양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고,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면 불안에 휩싸여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폐하,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가 아닙니다… 제발 사람을 보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오래전의 악몽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나, 탕양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녀가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스스로 뺨을 몇 대 때리고는 다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를 따라잡으려 죽자고 달려도, 끝내 그녀를 볼 수 없었다.그렇게나 빨리 도망간 건가?그렇게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쉬지도 않고 곧장 원가로 달려갔다.마침 서일과 사식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와 있던 참이었는데, 대문 앞에 도착하니, 탕 대인이 거지처럼 문지기 앞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아 먼지투성이의 얼굴에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문지기의 옷깃을 움켜쥔 채 다급히 묻고 있었다. “일곱째 아가씨는? 너희 일곱째 아가씨는 대체… 어디 있느냐?”그러자 문지기는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나 사나운 탕 대인을 본 적이 없어 더듬거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일곱... 일곱째 아가씨께서... 탕 대인과 함께 약도성에 가신 거 아니셨습니까…?”“그럼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탕양이 소리쳤다.“아직... 아직 못 뵈었습니다…!”바로 그때, 서일이 다가와 문지기한테서 탕 대인을 떼어놓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손부터 놓으십시오. 옷이 다 찢어지겠습니다.”탕 대인은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며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큰일이야… 내가 그녀를 망쳐 버렸네! 죽어도 이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네…!”“무슨 일입니까? 저희 고모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사식이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탕 대인은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 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네… 나는 돌아온 줄 알고 있었네...”바로 그때,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원가의 노태군이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탕양이 고개를 들자, 노태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탕
냉정언은 자기도 모르게 죄책잠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에 정말 큰일을 저지른 것인가?’그는 그저 탕양에게 술을 먹여 일곱째 아가씨에게 진심 어린 말을 꺼낼 용기를 주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탕양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황제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고, 다들 그를 안타까워했었다.탕양은 다섯째가 초왕이었을 때부터 초왕부와 다섯째,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그렇게 반평생을 북당을 위해 헌신했으나, 그를 진정으로 주목한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과거에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평생을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한채, 조정을 위해 뛰어난 공을 세우고도 관직이나 봉록을 거절하며 죄를 속죄하듯 살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는 법이니까. 탕양은 이미 그 누구보다 훌륭히 잘해왔고, 게다가 정과 의리에 발목 잡힌 것은 많은 영웅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였다.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그 혼자만이 저지른 행동이 아니었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와 벗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술에 취하지 않은 이상, 맑은 정신으로는 절대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을 것이기에, 술에 취하게 하면, 경성이 아닌 변방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속마음 정도는 털어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탕 대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쌓였던 건지... 만취 상태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대체 이 마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품었던 것일까?상황이 아주 복잡해졌다.‘탕 대인 아주 못 쓰겠구먼! 이를 어찌 마무리 짓는단 말이냐…?!’원가의 상대하기 쉽지 않은 여장군들을 떠올리니, 냉정언은 순간 뒷골이 땡겨 머리를 쥐어뜯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냉명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냉명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지, 탕 대인은 어찌 일곱째 아가씨와 그런 일을 벌인
탕양은 지금까지 살면서 술에 취해 저지른 잘못이 단 하나뿐이었다. 비록 그 일도 나중에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지만, 그 일로 그는 술에 취하면 정말로 이성과 기억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기에 그 후로 술을 마시더라도 되도록이면 취하지 않게 애썼다. 하지만 어젯밤은 예외였다. 그는 이곳 사람 모두를 믿고 있었기에 경계를 풀었던 것이다.남녀 간의 일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가 되어서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의부님! 의부님!"바로 그때, 문밖에서 호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탕양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호통쳤다."일단 들어오지 말거라!"그는 급히 이불을 걷어내고, 바닥에서 옷을 찾아 황급히 입은 후, 이마를 문지르며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문밖에서 호명이 물었다."이제 막 일어나신 겁니까? 아직도 취기로 힘드십니까?"탕양은 머릿속이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괜찮다. 무슨 일이더냐?""식사하시라고 부르러 왔습니다. 아! 일곱째 아가씨께서 경성으로 돌아간 것을 알고 계십니까? 같이 가실 줄 알았는데 먼저 떠나셨더군요.""… 돌아갔다고?!"탕양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예!"호명이 그의 얼굴을 보다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의부님… 혹시 어젯밤 누구에게 맞으셨습니까?"탕양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만져 보았는데, 그제야 얼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황급히 동경을 찾아 얼굴을 비춰보았는데, 왼쪽 뺨에 여러 개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누군가에게 뺨을 맞은 것 같았다.그러자 어렴풋이 한 여인이 세게 뺨을 때리며 욕설을 퍼붓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떠올랐다.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텅 비어 있어 창백해진 안색으로 생각에 잠겼다.‘설마 내가 취기를 빌어... 그래서 떠난 것이었구나...’이번 사건은 목숨을 내놓고 속죄해도 부족할 정도였다."말을 준비하거라! 어서!"탕양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소리
연회는 계속 진행되었고, 냉정언은 술잔을 들고 계속 탕양에게 술을 권했다. 잔을 몇 번이나 주고 받자, 탕양은 머리가 머리가 어지러워져 말조차 똑바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연회가 끝난 후, 냉정언이 일곱째 아가씨에게 말했다."술을 꽤 마셨다 보니, 탕양이 좀 취한 것 같네. 정원에 나가 산책을 조금 하면서 술기운을 가시는 것이 어떻소?"일곱째 아가씨도 약간 취한 상태였기에, 바람을 쐬며 땀을 내면 술이 깰 것 같다며 동의했다."예. 그럼 다들 돌아가서 쉬시지요. 제가 호명과 함께 탕 대인을 돌보겠습니다.""좋소. 수고하시게나!"냉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자, 어서 돌아가시게!"그렇게 사람들은 모두 새가 흩어지는 것 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일곱째 아가씨는 호명과도 함께 산책할 생각이었는데, 빠르게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이 어이가 없는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탕양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물었다."괜찮습니까? 걸을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탕양이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는데, 술에 많이 취한듯 몸을 심하게 휘청거렸다."어찌 못 걷겠습니까? 취하지 않았습니다!""예. 그럼, 몇 걸음 더 걸어보시지요. 정말 못 걸으시겠으면 방으로 돌아가 쉬시고요. 취기를 덜어줄 탕을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그러자 탕양은 허리에 손을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곧게 뻗은 직선을 그리며 터벅터벅 걷고는 뒤돌아 일곱째 아가씨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보시지요. 얼마나 똑바로 걷는지! 안 취했습니다. 이제 믿을 수 있습니까?"일곱째 아가씨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하하하. 예, 안 취하셨네요. 그럼 이만 나가서 함께 산책하시지요."그녀는 그가 오래 걷지 못할거라고 생각해,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하기로 했다.역시나 문을 나서자마자 탕양은 난간을 붙잡고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하도 휘청거리는 탓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기에, 일곱째 아가씨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를 부축했다.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