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호는 야식을 다 먹고 난 후 침상에 누워 원경릉과 내일 산에 올라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우문호,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꼭 문둥산에 가야 해. 환자들의 희망을 져버릴 수는 없어.”“나도 그랬으면 해. 이왕 시작한 일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하고 싶기도 하고,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오늘 호성교에서 구조 작업을 하는데 그때 깨달았어. 물속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응. 근데 부황께서는 뭐라고 하셨어?”“부황께서 뭐라고 하시든 일단 신경 쓰지 말자. 내일 산에 갈 때는 변장을 좀 하고 가. 문둥산을 올라갈 때는 아무도 말리지 않지만, 내려올 때는 분명히 널 막아설 거야. 그때 무조건 잡아 떼. 정 안되면 잽싸게 말을 타고 도망쳐. 지금은 이 방법뿐이야.”“그럼 매일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듯 하란 말이야?” 원경릉의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지금 정세가 불안정해서 다른 방법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 네가 부황의 허락을 받으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네가 문둥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야 하고, 또 하나는 네가 황실 사람에서 퇴출되어야 해. 즉 나와 이혼을 해야 한다는 거지. 아무래도 황실 사람들이 입궁을 자주 하다보니 문둥산은 황실 사람들이 절대 가면 안 되는 곳이 됐어.”“황실 사람들만 올라가지 못하는 거야?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못 가?”“너를 제외하고 사식이 만아 그리고 원용의 모두 황실의 사람이 아니잖아. 그들은 아무 상관이 없어. 내가 경조부윤이므로 그 일대를 관리하니까 잘 아는데, 만약 네가 문둥산에 올라갔다는 것을 알고 널 체포하러 온다면 네가 거기를 올라간다는 것을 알고도 말리지 않은 동행자들도 아마 같이 체포할 거야. 하지만 넌 걱정 마 내가 있으니까. 일단 부황의 귀에만 이 일이 들어가지 않으면 돼.”“내가 나쁜 짓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매번 몰래 눈치를 살피며 가야 한다는 게 마음이 아프네. 내가 오늘 문둥산에 갔을 때,
아라의 호통소리에 동무(同茂)는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하지만 동무는 맹세코 산을 내려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한 명이 아닌 스무 명의 사람이 태자비가 산을 내려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는가?“혹시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기슭으로 내려온 것은 아닐까요?” 동무가 조심스럽게 아라에게 말했다..“그럴 가능성이 없게끔 대장군이 미리 다 막아두었습니다. 귀신도 못 도망갈 만큼 철저하게 준비했는데, 어찌 된 일입니까?”“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정말 보지 못했습니다.”동무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동대인 내가 경고 하나 하는데, 중간에서 간 보려는 생각은 하지도 마시오. 안왕부의 사람이 된 이상 안왕에게 충성을 다 해야죠. 그렇지 않으면 화를 입게 될 겁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잘 알아 들었죠?”“본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동무는 억울하다는 듯 울먹였다. “어쨌든 내 경고를 허투루 듣지 마시오.” 아라가 콧방귀를 뀌었다.동무는 아라의 건방진 태도에 화가 났지만 그녀가 안왕의 심복이기에 치미는 화를 억눌렀다. 순간 동무의 머릿속에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혹시 태자비가 문둥산에 갔다는 소문을 내는 것이 어떨까요?”“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을 내가 상상하지 못했을까 봐요? 가보세요. 이럴 시간에 태자비에게 예의주시하란 말입니다. 태자비는 분명 또 문둥산을 오를 것이오.”아라의 호통에 동무는 입을 삐죽이며 자리를 떴다.동무가 떠난 후, 적위명이 어두운 표정으로 병풍 뒤에서 걸어 나왔다.“지금 보니 동무도 믿을만한 사람은 못 되는구나. 앞으로는 몇 사람을 더 붙여 미행을 시켜야겠어.”적위명의 말을 듣고 아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예, 만약 태자비가 문둥산에 올라가 환자들을 치료하고 만약 치료를 성공한다면, 태자와 태자비를 지지하는 세력이 어마 무시하게 늘어날 겁니다. 그렇기에 동무의 말처럼 태자비가 문둥산에 올라갔다는 소문은 내면 절대 안 되죠. 그들이 민심을 얻게 할 수는 없습니다.”“지금 황제가
우문호의 말대로 문둥산 아래에는 출입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지만 출입을 막아서는 사람도 없었고 미행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들은 수월하게 산에 올랐다.‘들어가는 건 상관이 없다 이거지?’원경릉은 어찌나 변장을 제대로 했는지 원경릉을 태자비라고 생각할 사람은 전혀 없었다.아침 일찍 그녀가 문둥산에 오르겠다고 하자 이리 나리와 미색도 한사코 따라왔다. 미색은 원경릉이 회왕과 자신을 연결해 주겠다고 했으니, 그녀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리 나리는 왜 문둥산에 따라온 건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산을 올라가는 내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산을 오르다가 힘들다며 바닥에 앉아 한가로이 경치를 구경하는 둥 원경릉과는 사뭇 다른 태도로 문둥산에 올랐다. 산 중턱을 오를 때 이리 나리가 조용히 원경릉의 곁으로 다가왔다.“근데 그 환자들 말이야. 먹는 게 너무 부실한 거 아니야?” 이리 나리가 그 자리에서 원경릉에게 은표 한 묶음 주었다.“음식 배급을 하는 사람에게 고기 좀 사서 먹이라고 해.” 원경릉은 은표 묶음에 깜짝 놀랐다. 그녀가 천천히 은표를 세어보니 삼천 냥이 넘었다. 그녀는 즉시 요리사에게 50 냥을 주며 내일 먹을 닭고기를 사 오라고 했다.‘이 금액이면 아주 오래도록 음식 걱정은 없겠는걸?’원경릉은 이리 나리의 은표를 보며 문득 소답화와 현비가 떠올라 마음이 쓰라렸다.*오늘 환자들은 유달리 원경릉의 말을 잘 들었다. 다들 원경릉이 시키는 대로 했고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없었으며 약을 바꾸고 주사를 맞을 때에도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다.시간이 좀 지나자 이리 나리가 지루하다는 듯 산비탈 쪽으로 걸어가 큰 바위 위에 앉았는데, 미색이 그를 찾아와 옆에 앉았다. 초저녁 석양이 서서히 대지를 황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석양을 감상했다. “나리, 생각해 보셨습니까? 어제 일은…… 이러다가 어쩌면 신분이 드러날지도 모릅니다.”“신경 안 써.”“신경 안 쓴다고요?”어
이리 나리는 말을 마치고 쌩 돌아섰다.미색은 그런 이리를 보고 웃었다. ‘나리가 설랑도 원하지만…… 돌아가기 싫은 것은 확실하군.’오늘도 산 밑에는 사람들이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그중에는 어제부터 있던 사람들도 있었다.그들은 어제 분명 무슨 일이 있었는데,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러한 사실을 동무(同茂)에게 사실대로 전하기 무서웠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두 왕부의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적위명은 사람을 시켜 먼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다가 하산하기 직전에 신호를 보내라고 했다. 이 사실을 미색이 모를 리가 없었다. 안왕부의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이미 한번 당한 것을 두 번이나 당하겠는가. 그래서 오늘은 태자비의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들은 시커멓게 멍석을 뒤집어쓰고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변장했다. 그리고 산 위에서 날이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렸다가 하산을 시작했다. 적위명의 하인이 신호를 보내자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즉시 에워쌌다.그들이 가까이 다가오려던 찰나에 서일이 멍석 안에서 빨간 물체를 꺼내더니 불을 붙여 그들을 향해 던졌다.“펑펑-”하는 소리가 산기슭에서 울려펴졌고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망치느라 바빴다.잠시 후.시끄러운 소리가 멈추고 안왕부의 사람들이 그것이 폭죽이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그들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멀리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다! 쫓아라!” 우두머리가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말을 타고 산기슭을 달리기 시작했다.사실 원경릉 무리는 도망치지 않았다. 원경릉의 작전은 폭죽소리와 함께 미리 봐둔 산 여기저기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멍석을 덮어쓰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자 원경릉과 사람들이 조용히 멍석 아래에서 나왔다. 이렇게 안왕부의 감시를 따돌리기를 몇 번, 원경릉과 사람들 몇 명은 끝내 적위명에게 잡히게 됐다. 원경릉은 우문호의 말대로 자신이 태자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적위명은 횃불을 들고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비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
‘분명 태자비의 목소리는 아닌데.’명원제 바닥에 엎드린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넌 누구냐? 이름이 무엇이냐?”“민녀(民女)의 이름은 미색이라고 합니다. 고향은 직례이며 저와 어머니는 본래 경중에서 큰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금년 5월에 한 불량배에게 사기를 당해 그만…… 흡, 어머니께서는 그 충격으로 앓아누우셨고, 살고 있던 집까지 넘어가버려 천막에 살고 있습니다. 정말 나쁜 뜻은 없었습니다! 아프신 어머니에게 뭐라도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산으로 토끼를 잡으러 간 겁니다. 근데 토끼는 잡지도 못하고 이렇게 잡혀와서 하루 동안 집에도 못 갔습니다. 어머니께서 지금쯤 저를 찾으실 텐데……”적위명은 그 말을 듣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 순간 대전(大殿)으로 우문호가 들어왔다. 그의 눈 밑은 시커멨고 의복은 여기저기 물에 젖어있었다.“소자 늦었습니다. 송구하옵니다!”우문호가 명원제가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호성교의 시체는 모두 인양했습니다. 사망자는 13명이고 부상자는 1명인데 일곱 살 난 어린아이입니다.”신하들은 태자가 이 일을 모르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저기 거지꼴을 하고 있는 여인이 태자비였다면 태자의 행동이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 없다고 여겼다.적위명은 태자를 보며 “태자께서는 백성들을 위해 밤낮없이 열심히신데, 태자비께서는 왜 이렇게 소란을 피우시는 겁니까?” 라고 말했다.우문호는 그 말을 듣고 놀란 표정으로 적위명을 보더니 시선을 옮겨 바닥에 엎드려있는 여인을 보았다. “대장군,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그리고 저 사람은 누굽니까?”“태자께서 호성교 일 때문에 정신이 없으신가 봅니다. 매일 보는 부인의 얼굴도 잊어버리시다니요?”“대장군께서는 아침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십니다. 저 여자가 어찌 태자비라는 말입니까? 태자비는 오늘 저와 함께 입궁해 건곤전에 문안을 드리러 갔습니다.”“오호, 그래요? 건곤전에 태자비께서 계신다니 그럼 태자비를 이리로 모셔서 확인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대
“대장군께서 하시는 말과 행동에는 괴리감이 있네요.”냉정언이 말했다.“냉대인 본 장군의 말에 무슨 괴리감이 있다는 겁니까?”“지금 제가 보기에는 대장군은 백성을 위해서가 아닌 황상의 눈에 들기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태자께 보고도 하지 않고 바로 황상을 찾아오다니요?”“그건……”“그리고 태자비께서 왜 문둥산에 가셨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대장군은 알고 계십니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을 멋대로 구류하다니요? 대장군께 묻겠습니다. 대장군은 태자비를 구류할 만한 권력이 있습니까?”냉정언의 말에 적위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냉대인, 본 장군은 그럴 권력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일의 경중을 따지고 보면 제 행동이 냉대인의 비판을 받을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둥산은 법도 상에도 황실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만약 전염병이 있는 곳에 태자비께서 올라가셨다가 옮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그럼 궁은 물론이고 북당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하하, 대장군의 말은 아직도 앞뒤가 맞지 않네요. 그렇게 궁 안에 문둥병이 퍼지는 게 두려운 사람이 문둥산에서 갓 내려온 사람을 궁으로 데리고 오다니요? 주위를 둘러보세요. 이곳에는 황상과 문무백관들이 다 모여있습니다.”냉정언의 말을 듣고 문무백관들과 궁인들이 원경릉에게서 멀리 떨어졌다.“대장군, 이제 진심을 털어놓으시지요? 황상의 눈에 들고 싶다는 생각에 눈이 멀어 이런 소란을 피우는 게 아닙니까?”냉정언이 몰아붙이자 적위명은 더는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명원제의 말만 기다렸다.적위명이 냉정언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자 우문호가 냉정언을 보았다.“냉대인! 저 사람은 태자비가 아니라고요. 태자비는 지금 건곤전에 있다니까요? 태자비를 모함하지 마세요!”우문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원경릉이 눈물을 머금고 명원제를 올려다보았다. “맞습니다…… 민녀 정말로 태자비가 아닙니다. 황상 제발 저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어머니가 저를 찾고 계실 겁니다.”대전의 상
대장군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뭐가 중요한지 구별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재상께서 말씀하신 부분은 하관(下官)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겠습니다만, 태자비께서도 허락 없이 문둥산에 올라갔으니 황상과 문무백관께서 죄를 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주수보와 대장군이 얘기를 하는 와중에 우문호와 명원제는 눈빛 교환을 했다. 명원제는 주수보를 막아서며 적위명을 보았다.“태자의 말에 의하면, 건곤전에 태자비가 있다고 하잖느냐. 대장군이 그리 의심스러우면 이리로 데리고 오면 되지 않느냐? 여봐라! 태자비를 이리로 데리고 오거라.”적위명은 명원제의 말을 듣고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역시 황제께서는 태자와 한패가 아니구나.’사람들이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민녀는 꼼짝 않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야윈 몸이 어찌나 몸을 덜덜 떠는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냉정언은 그녀를 보고는 명원제에게 말했다.“폐하, 저 여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그만 일어나게 해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명원제는 민녀를 보며 “일어나거라!” 라고 말했다.“혹시 몸이 불편한 것 아니냐?” 냉정언이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민녀는 냉정언에게 고개를 껌뻑 숙여 감사를 표한 후 비틀거리며 일어나 눈물을 머금고 억울함을 토로했다.“민녀 몸은 괜찮지만,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먹은 것도 없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습니다.”그 말을 듣고 예친왕(睿親王)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아무것도 먹지 못했단 말이냐? 적위명 대장군, 저 여인을 태자비라고 잡아둬놓고서는 아무것도 먹이지 않았다는 겁니까?”“그게…… 소인이 분부를 했는데, 하인이 깜빡했나 봅니다.”예친왕은 민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보았다.“손이 왜 이런 것이냐? 목은 또 왜 이러느냐? 누가 너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냐?”예친왕의 말을 듣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민녀의 손과 목으로 향했다. 손에는 붉은 줄이 몇 개 그어져 있었고, 목은 누가 졸랐던 듯 손자국이 나있었다.민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원경릉이 궁 안으로 들어오는 광경을 본 적위명은 얼굴이 순식간에 하얘지더니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말도 안 돼! 어제 내가 분명 횃불로 얼굴까지 자세히 확인했는데!’문무백관들도 민녀와 원경릉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두 사람이 닮기는 했지만 태자비의 코가 조금 더 높고 턱이 길며 민녀 미색의 얼굴보다는 뾰족했다. 원경릉은 갑작스러운 부황의 부름에 어리둥절하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문호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적위명 앞에 세웠다. “대장군, 아무리 출세에 눈이 멀었어도 그렇지 태자비를 모함하다니요!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적위명은 귀가 먹먹해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입술을 파르르 떨렸고, 눈동자는 공허했다.“어떻게 이런 일이…… 이렇게 닮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니……”원경릉은 의아한 표정으로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라고 물었다. “적위명 대장군이 문둥산 아래에서 여인을 잡아 왔는데, 그게 너라며 아침 조회에 끌고 왔다.”우문호가 말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민녀는 억울한 듯 울음을 터뜨렸고,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 시선이 쏠렸다.“제가 분명 아니라고 했잖아요! 저는 태자비님이 아니라고요!”우문호는 화가 나서 적위명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적위명! 당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게 분명해! 설령 문둥산 아래에서 본 게 태자비였어도 저렇게 하루 종일 굶기고, 도망을 가지 못하게 묶어둘 심산이었느냐!”우문호의 주먹에 적위명은 코를 부여잡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대전에서 태자가 황제 앞에서 대장군에게 손찌검을 했지만 사람들은 태자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적위명을 안쓰럽게 보았다. 적위명을 코피를 소매로 닦으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덫에 걸려들었구나.’명원제는 씩씩거리는 우문호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다섯째 이만하면 됐다. 지금 당장 태자비와 민녀를 데리고 가거라. 그리고 민녀 너는 문둥산 근처에는 얼씬도 말거라.”“예, 황상 알겠습니다.” 민녀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노태군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안 된다. 혼인 전에는 신랑 신부가 만날 수 없어. 이건 풍습이고 규칙이니, 어길 수 없다.”그러자 일곱째 아가씨가 웃음을 터뜨렸다.“하하하. 이 혼사에 정해진 규칙이 있긴 합니까? 어머니께서는 제가 그를 만나 오히려 싸움이 나서 혼사가 그릇될까 봐 걱정되시는 것 아닙니까? 어머니께 약속했으니, 반드시 혼사를 올릴 것입니다. 이제 마음이 놓이십니까?”노태군은 이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좋다. 너도 장사하는 사람이니 신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약속했으니, 절대 번복할 수 없어. 목을 매겠다는 이 어미의 결심은 너가 반대하면 언제든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일곱째 아가씨가 이를 갈며 투덜댔다.“이렇게 얄미운 늙은이는 정말 처음입니다!”“나도 너처럼 고집 센 딸은 처음 본다.”노태군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원가 사람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일곱째 아가씨가 시집가는 것이 정말 꿈만 같게 느껴졌다.일곱째 아가씨의 혼사는 원가 사람들에게 마음의 짐과도 같았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가 무사히 경성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고 나니,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이 북받쳤다.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다는 생각에 그는 코끝이 다 시큰 거렸다.그날 밤, 일곱째 아가씨가 초왕부로 탕양을 찾아가자, 탕양은 그녀를 안으로 들인 후, 단둘이 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탕양은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붉은색 옷차림에 머리를 단정히 올려 깔끔하고 우아한 모습이 여전히 돋보였다.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었지만,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더해 주었다.그녀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패기 넘치던 청춘 시절이었는데, 눈 깜짝할 새에 이렇게나 많이 늙어 버렸다.탕양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수많은 감정이 얽혀 있었지만, 한마디 말도 제대로 꺼낼 수가 없었다.특히 약도성에서의 일을 겪고 난 뒤라, 첫마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일곱째 아가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는 지금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어찌 그와 그런 일을 한다는 말입니까?”그녀의 표정을 보았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잠시 멍해졌다.노태군이 이 상황을 보고 말했다.“정말 그와...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냐?”“물론입니다! 그날 밤 그는 술에 잔뜩 취해서 정신도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일곱째 아가씨가 퉁명스레 답했다.노태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그런 기본적인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탕양이 정말 쓸모없는 놈이라 생각되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어디 믿을 것 같으냐? 혼사는 이미 정해졌으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물릴 수 없다. 혼사를 올리지 않으면, 이 어미 시신이나 수습해야 할 거다!”노태군이 차갑게 말하자, 일곱째 아가씨는 그만 분통을 터뜨렸다.“어머니, 어찌 이렇게 억지를 부리시는 것입니까?”“이 어미는 평생 이치를 따지며 살았지만 이번 일만큼은 예외다. 본디 자식의 혼사는 부모가 결정하는 법이다. 게다가 황후까지 중매에 나섰으니, 너에겐 반대할 권리가 없다. 어서 가서 준비나 하거라. 열닷새에 식을 올려야 하니.”“열닷새요? 모레잖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이리 급히 저를 시집보내면, 제 체면은 어쩌라는 말씀입니까?”일곱째 아가씨가 소리치자, 노태군이 탁자를 쾅 내리치며 화를 냈다. “체면? 지금 체면이라 한 것이냐? 이 어미는 벌써 체면 다 버렸다! 네 혼담이 계속 흐지부지 되어 여태껏 시집도 못 가고 늙은 아가씨 취급받는 게 얼마나 창피한 줄 아느냐?! 매번 연회에 나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물어보는데, 이 어미의 체면을 생각한 적 있느냐?”“그래도 아무에게나 시집갈 순 없지 않습니까. 평소 늘 말이 통하시는 분이신데, 어찌 이 문제에서는 이리도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노태군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아무나? 그럼 내가 물으마. 탕양에게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느냐?”그러자 일곱째 아가씨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애써 침착하게 답
혼담을 꺼낸 당일에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하지만 원가는 세속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혼수도 원하는 대로 준비하게 했고, 잔칫상만 제대로 차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잔칫상은 일곱째 아가씨가 결코 시집을 못 가는 것이 아니라고 세상에 알리는 용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인 상대가 황제가 가장 신임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자리였다.따라서 잔칫상만큼은 빠질 수 없었다.이 부분은 탕양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름 저축해둔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잔칫상을 준비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하객 문제에 대해서도, 탕양은 아는 사람이 정말 많았기에 문제없었다.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경성에만 백 상 이상은 문제없이 마련할 수 있었다.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자로서, 조정의 문무백관 중 그와 친분이 없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이 모든 것을 논의한 후, 탕양은 마침내 의문을 물어볼 수 있었다.“노태군, 만약 일곱째 아가씨께서 동의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합니까?”“동의할 것이다. 원가는 혼사를 치르거나 상을 치르거나 내릴 결정을 둘 뿐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다른 선택은 없다.”노태군이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탕양이 초조해하며 말했다. 왠지 일곱째 아가씨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혼사는 본디 두 사람이 마음이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돌아가는 길에 탕양이 여전히 불안했해 하자, 원경릉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신랑이 될 마음의 준비만 해두시게. 일곱째 아가씨는 원가 식구들이 설득할 것이오.”“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곤란하게 하거나, 억지로 결혼하게 해서 그녀가 상처받는 건 싫습니다.”“아가씨도 동의할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약도성에서 자네를 뿌리치고 떠났을 것이네. 하지만 곁에 남아 자네를 보살폈잖나? 그것만 봐도 자네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오.”“정말입니까?”탕양이 놀랐는데, 얼굴에 은은하게 빛이 맴돌았
원경릉은 원가에서 이 혼사를 분명히 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노태군이 일곱째 아가씨를 시집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에서 혼담을 꺼내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원가의 유일한 문제는 일곱째 아가씨 본인이었는데,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일은 십중팔구 성공할 것이다.역시나, 다음 날 탕양과 함께 원가로 향한 원경릉은 원가에서 심지어 점쟁이까지 청해 두 사람의 사주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두 사람의 사주를 본 점쟁이는 한참 확인하더니,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두 사람의 사주가 다소 상충합니다.”원 노태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어디가 상충하는가?”“한 사람은 닭띠, 한 사람은 개띠입니다. 이는 닭과 개가 편치 않은 사주라, 혼사를 치른 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노태군은 탁자를 쾅 치며 말했다.“그럼 바꾸면 되지! 이제 보니 우리 딸은 말띠다. 방금 헷갈렸었다.”“말띠요? 말띠라면 괜찮습니다. 말띠는 올해 연분이 따르는 해 입니...”노태군은 점쟁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다니 됐다. 이제 길일을 골라주게.”그러자 점쟁이는 다시 손을 펴고 계산하더니 말했다.“올해 좋은 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연말쯤이어야...”“좋다. 이번 달 15일로 하지. 보름달이 뜨는 날, 사람도 오붓이 모이는 날이니, 좋지 않겠나?”점쟁이가 책자를 닫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예.”혼사는 원가에서 준비하니, 제시간에만 준비 된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15일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 원가에서 딸을 시집보내는 일을5일 안에 끝낼 수 있을까 걱정 되었다. 준비할 시간도 아직 부족했는데, 혼례복을 만드는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원가는 이미 일곱째 아가씨를 위해 혼례복을 준비해 두었다. 3년마다 한 번씩 새로 만들었기에, 지금껏 서랍 속에 쌓여 있는 혼례복만 해도 7~8벌이나 되었다.혼수도 일찌감치 마련해 두고, 혼담을 꺼낼 자가 나타나기만 기다리
사식이는 다들 일곱째 고모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 의아해하며 물었다.“일곱째 고모께서 편지를 보내신 겁니까?”그러자 셋째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편지가 왔단다. 며칠 놀다가 곧 경성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구나.”사식이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일곱째 고모께서 돌아오고 나서 혼담을 꺼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일곱째 고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일이 난감해질 텐데요.”노태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미 모든 일을 저질렀느넫 이제 와서 동의하지 않는다니? 감히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목을 매겠다!”노태군은 일곱째 고모가 열여덟 살이 되던 때부터 그녀의 혼사를 기다려 왔다. 계속 기다리다가 이미 머리카락이 다 하얘져 버렸지만, 그녀는 아직 혼인 기약조차 없었다. 이번에도 혼사를 정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게 더 나았다.그녀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일곱째 아가씨가 빨리 시집가기를 바라고 이씩 때문에, 이 일은 서둘러 진행하기로 했다.“사식아, 네 고모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갑작스레 병에 걸려 거의 죽게 생겼다고 전해라!”노태군이 단호히 명령했다.딸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스스로 저주까지 불사하는 그녀는 정말 독한 늙은이었다.서일은 탕양을 데리고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중매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바로 황후를 찾아가야 했다.소월궁에서 우문호 부부는 탕양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우문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짐이 보기엔, 일찍 일곱째 아가씨에게 네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이리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탕양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고,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면 불안에 휩싸여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폐하,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가 아닙니다… 제발 사람을 보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오래전의 악몽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나, 탕양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녀가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스스로 뺨을 몇 대 때리고는 다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를 따라잡으려 죽자고 달려도, 끝내 그녀를 볼 수 없었다.그렇게나 빨리 도망간 건가?그렇게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쉬지도 않고 곧장 원가로 달려갔다.마침 서일과 사식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와 있던 참이었는데, 대문 앞에 도착하니, 탕 대인이 거지처럼 문지기 앞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아 먼지투성이의 얼굴에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문지기의 옷깃을 움켜쥔 채 다급히 묻고 있었다. “일곱째 아가씨는? 너희 일곱째 아가씨는 대체… 어디 있느냐?”그러자 문지기는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나 사나운 탕 대인을 본 적이 없어 더듬거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일곱... 일곱째 아가씨께서... 탕 대인과 함께 약도성에 가신 거 아니셨습니까…?”“그럼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탕양이 소리쳤다.“아직... 아직 못 뵈었습니다…!”바로 그때, 서일이 다가와 문지기한테서 탕 대인을 떼어놓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손부터 놓으십시오. 옷이 다 찢어지겠습니다.”탕 대인은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며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큰일이야… 내가 그녀를 망쳐 버렸네! 죽어도 이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네…!”“무슨 일입니까? 저희 고모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사식이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탕 대인은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 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네… 나는 돌아온 줄 알고 있었네...”바로 그때,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원가의 노태군이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탕양이 고개를 들자, 노태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탕
냉정언은 자기도 모르게 죄책잠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에 정말 큰일을 저지른 것인가?’그는 그저 탕양에게 술을 먹여 일곱째 아가씨에게 진심 어린 말을 꺼낼 용기를 주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탕양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황제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고, 다들 그를 안타까워했었다.탕양은 다섯째가 초왕이었을 때부터 초왕부와 다섯째,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그렇게 반평생을 북당을 위해 헌신했으나, 그를 진정으로 주목한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과거에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평생을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한채, 조정을 위해 뛰어난 공을 세우고도 관직이나 봉록을 거절하며 죄를 속죄하듯 살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는 법이니까. 탕양은 이미 그 누구보다 훌륭히 잘해왔고, 게다가 정과 의리에 발목 잡힌 것은 많은 영웅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였다.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그 혼자만이 저지른 행동이 아니었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와 벗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술에 취하지 않은 이상, 맑은 정신으로는 절대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을 것이기에, 술에 취하게 하면, 경성이 아닌 변방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속마음 정도는 털어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탕 대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쌓였던 건지... 만취 상태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대체 이 마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품었던 것일까?상황이 아주 복잡해졌다.‘탕 대인 아주 못 쓰겠구먼! 이를 어찌 마무리 짓는단 말이냐…?!’원가의 상대하기 쉽지 않은 여장군들을 떠올리니, 냉정언은 순간 뒷골이 땡겨 머리를 쥐어뜯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냉명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냉명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지, 탕 대인은 어찌 일곱째 아가씨와 그런 일을 벌인
탕양은 지금까지 살면서 술에 취해 저지른 잘못이 단 하나뿐이었다. 비록 그 일도 나중에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지만, 그 일로 그는 술에 취하면 정말로 이성과 기억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기에 그 후로 술을 마시더라도 되도록이면 취하지 않게 애썼다. 하지만 어젯밤은 예외였다. 그는 이곳 사람 모두를 믿고 있었기에 경계를 풀었던 것이다.남녀 간의 일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가 되어서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의부님! 의부님!"바로 그때, 문밖에서 호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탕양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호통쳤다."일단 들어오지 말거라!"그는 급히 이불을 걷어내고, 바닥에서 옷을 찾아 황급히 입은 후, 이마를 문지르며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문밖에서 호명이 물었다."이제 막 일어나신 겁니까? 아직도 취기로 힘드십니까?"탕양은 머릿속이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괜찮다. 무슨 일이더냐?""식사하시라고 부르러 왔습니다. 아! 일곱째 아가씨께서 경성으로 돌아간 것을 알고 계십니까? 같이 가실 줄 알았는데 먼저 떠나셨더군요.""… 돌아갔다고?!"탕양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예!"호명이 그의 얼굴을 보다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의부님… 혹시 어젯밤 누구에게 맞으셨습니까?"탕양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만져 보았는데, 그제야 얼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황급히 동경을 찾아 얼굴을 비춰보았는데, 왼쪽 뺨에 여러 개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누군가에게 뺨을 맞은 것 같았다.그러자 어렴풋이 한 여인이 세게 뺨을 때리며 욕설을 퍼붓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떠올랐다.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텅 비어 있어 창백해진 안색으로 생각에 잠겼다.‘설마 내가 취기를 빌어... 그래서 떠난 것이었구나...’이번 사건은 목숨을 내놓고 속죄해도 부족할 정도였다."말을 준비하거라! 어서!"탕양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소리
연회는 계속 진행되었고, 냉정언은 술잔을 들고 계속 탕양에게 술을 권했다. 잔을 몇 번이나 주고 받자, 탕양은 머리가 머리가 어지러워져 말조차 똑바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연회가 끝난 후, 냉정언이 일곱째 아가씨에게 말했다."술을 꽤 마셨다 보니, 탕양이 좀 취한 것 같네. 정원에 나가 산책을 조금 하면서 술기운을 가시는 것이 어떻소?"일곱째 아가씨도 약간 취한 상태였기에, 바람을 쐬며 땀을 내면 술이 깰 것 같다며 동의했다."예. 그럼 다들 돌아가서 쉬시지요. 제가 호명과 함께 탕 대인을 돌보겠습니다.""좋소. 수고하시게나!"냉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자, 어서 돌아가시게!"그렇게 사람들은 모두 새가 흩어지는 것 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일곱째 아가씨는 호명과도 함께 산책할 생각이었는데, 빠르게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이 어이가 없는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탕양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물었다."괜찮습니까? 걸을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탕양이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는데, 술에 많이 취한듯 몸을 심하게 휘청거렸다."어찌 못 걷겠습니까? 취하지 않았습니다!""예. 그럼, 몇 걸음 더 걸어보시지요. 정말 못 걸으시겠으면 방으로 돌아가 쉬시고요. 취기를 덜어줄 탕을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그러자 탕양은 허리에 손을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곧게 뻗은 직선을 그리며 터벅터벅 걷고는 뒤돌아 일곱째 아가씨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보시지요. 얼마나 똑바로 걷는지! 안 취했습니다. 이제 믿을 수 있습니까?"일곱째 아가씨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하하하. 예, 안 취하셨네요. 그럼 이만 나가서 함께 산책하시지요."그녀는 그가 오래 걷지 못할거라고 생각해,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하기로 했다.역시나 문을 나서자마자 탕양은 난간을 붙잡고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하도 휘청거리는 탓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기에, 일곱째 아가씨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를 부축했다.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