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우가 차에 앉아 있었고, 창밖에는 비가 내렸다.도로 양쪽의 풍경이 꿈결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서현우는 차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어렴풋이 보았다.수척한 얼굴, 입가에 거뭇한 수염 자국이 있었다.눈빛과 안색이 서현우가 지금 얼마나 괴로운지 말해주고 있었다.옆에는 정장을 입은 한 여섯 살짜리 남자아이가 크고 동그란 눈으로 서현우를 호기심 가득 바라보고 있었다.진아람의 아들이었다.서현우는 받아들이기가 꺼려졌다.어렴풋이 자신이 진아람의 남편이고, 아들이 아니라 귀엽고 이해심 많은 딸이 있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다만 딸의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한 시간 가까이 달리다 차가 멈췄다.서현우는 기억 속에서 아주 익숙한 저택을 보았다.진씨 가문 저택.왼쪽에 작고 하얀 건물이 있었다.서현우에게도 익숙한 건물이었다.하지만 깊게 생각해 보려 하니 머릿속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몸까지 떨리게 하는 고통이 영혼 깊숙이 파고들었다.경호원이 우산을 들고 다가오자, 진아람은 차 문을 열고 우산을 펼친 다음 아들을 데리고 하얀색 건물로 향했다.경호원은 우산을 서현우의 머리에 씌워주며, 그가 타고 있는 휠체어를 끌고 진아람의 뒤를 따라갔다.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경호원들은 자리를 떴다.얇은 파자마를 입은 한 남자가 계단을 내려왔다.아이는 곧바로 아빠라고 부르며 남자에게 달려갔다.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어린 소년을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았다.아이는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이 장면 또한 서현우에게 익숙하게 느껴졌다.자신의 딸에게도 똑같이 해줬던 것 같았다.그런데…….서현우는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파지며 안색이 창백해졌다.“괜찮아?”진아람이 물었다.남자는 아이를 내려놓고 다가와 서현우를 살피며 다소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여보, 이 자식은 왜 데려왔어?”“많이 불쌍하잖아.”진아람이 말했다.남자는 불만이 가득했다.“애초에 이놈이 한 바보 같은 짓 때문에 당신 평판이 나빠질 뻔했는데, 아직도 이놈을 동정해?”“그래
며칠이 지나면서 서현우에 대한 괴롭힘은 더욱 심해졌다.진원은 서현우에게 개의 배설물까지 뿌렸다.골머리를 앓던 진아람은 어쩔 수 없이 가족들을 불러다 함께 상의했다.결국 그녀는 서현우를 다시 요양원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서현우는 덤덤했다.입을 벌려 의미 없는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도 멈췄다.요양원에서의 나날들은 꽤나 평화로웠다.그는 이제 모든 것에 무감각해졌다.그렇게 2년이 지나고, 서현우의 머릿속에 있던 이상한 기억들은 거의 사라졌다.그는 매일 책을 읽었다.온갖 종류의 책을 다 읽었다.그러던 어느 날, 진아람이 다시 나타났다.서현우는 진아람에 대한 깊은 사랑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내색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평범한 옷차림을 한 진아람은 눈이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그녀는 서현우에게 진씨 가문이 부도가 났다고 전했다.진개산 네 식구는 모두 빚더미에 올라앉아 각자 흔적도 없이 도망쳤다.남편은 아들을 데리고 떠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녀는 당연히 서현우의 요양원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안 되었다.서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그는 진아람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진아람은 눈물을 흘리며 목 놓아 울었다.한참 후 감정을 추스른 그녀가 서현우에게 물었다.“나랑 같이 살래요? 내가 정성껏 돌봐줄게요.”서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마음속으로 환희를 느꼈다.암울한 삶에 진아람의 존재는 유일한 빛이었다.날이 어두워지자 진아람은 휠체어에 앉은 서현우를 밀며 요양원 밖으로 나갔다.옷 몇 벌 빼고 짐도 없었다.두 사람은 석양 속으로 걸어 나갔다.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소화 거리.진아람은 마지막 남은 돈으로 낡은 집에 세 들었다.월 24만원에, 수도세와 전기세, 가스비는 직접 내야 했다.관리비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진아람은 이제 막 자리를 잡은지 얼마 안 되어 큰일을 당하고 말았다.여전히 아름다운 얼굴과 완벽한 몸매가 원흉이었다.서현우의 눈에는 처음으로 두려움이 스쳤
서현우의 마음속 살기가 증폭되며 필사적으로 기고 또 기었다.그러다 누군가 그의 다리를 잡고 수십 미터 뒤로 끌고 가서 내려놓았다.그는 다시 앞으로 기어갔다.진아람은 몸부림치며 울면서 서현우의 이름을 불렀다.서현우는 온 힘을 다해 앞으로 기어갔다.음침한 남자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위기의 순간, 사이렌이 울렸다.순찰 차량 두 대가 다가왔고, 임진이 부하들과 함께 도착해 서현우가 이를 갈던 상대들을 체포했다.임진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이렇게 말했다.“정의를 믿어요. 정의는 영원히 존재하니까”서현우는 큰 소리로 미친 듯이 웃었다.웃음소리가 꼭 지옥에서 온 악마 같았다.이번엔 운이 좋았지만 다음엔?정의는 매번 제때 찾아오지 않는다.윤 아주머니는 병원으로 이송되고, 서현우와 진아람도 검사와 치료를 받았다.의사는 두 사람에게 윤 아주머니가 가망이 없다며, 마지막 만남을 준비하라고 했다.진아람은 주체할 수 없이 흐느끼다 기절했다.서현우는 눈앞이 흐려지며 문득 아련한 꿈을 다시 떠올렸다.“그게 꿈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저 악한 사람들을 다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윤 아주머니는 산소마스크를 쓴 채 머리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스며 나온 피가 보는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윤 아주머니는 진아람과 서현우에게 집을 넘겼다고 했다.임진이 제3자로 증인 노릇을 했다.삐-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모니터에 물결치던 선이 일직선으로 바뀌었다.눈을 감은 윤 아주머니는 그렇게 영원히 잠들었다.진아람의 히스테릭한 울음소리가 병원 전체에 퍼졌다.무기력함과 고통, 체념과 원망이 한 번에 밀려왔다.윤 아주머니는 독거노인이었다.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모두 전쟁터에서 죽었다.윤 아주머니의 장례와 화장은 전부 나라에서 지원해 주었다.크게 다치지 않은 진아람은 묵묵히 서현우를 밀면서, 임진의 배웅을 받으며 소화 거리로 돌아왔다.임진은 진아람에게 소화 거리는 리모델링이 꼭 필요하니, 하루빨리 지원금을 마련해서
서현우는 이 세상 단 하나뿐인 보물을 보듯, 멍한 표정으로 진아람을 바라보았다.비록 말은 할 수 없었지만, 빛나는 두 눈에 담긴 진심과 무한한 다정은 속일 수 없었다.진아람은 덥석 서현우를 끌어안고 그에게 바짝 기대어 더 큰 소리로 울었다.오늘 밤, 처음으로 두 사람은 한 침대에 누워 서로를 껴안고 잠들었다.창밖으로 햇빛이 부드럽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서현우가 눈을 뜨자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진아람은 앞치마를 두른 채 방으로 들어와 서현우가 잠에서 깬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일어나서 아침 먹어요. 국숫집 며칠째 문 안 열었잖아요. 아침 먹고 장 보러 가야죠.”서현우는 약간의 걱정과 망설임이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진아람은 서현우의 신발을 신겨주다가 눈치를 채고 고개를 살짝 들어 서현우와 눈을 마주쳤다.“왜 그래요?”서현우는 입을 벙긋하다가 수화로 물었다.“어젯밤 한 말…… 진짜야?”진아람은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진짜예요. 우리 잘살아 봐요.”서현우는 바보처럼 웃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진아람은 서현우를 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타일이 떨어진 지 오래인 화단 옆에 앉힌 뒤, 돌아서서 위층으로 올라가 휠체어를 가져와 그를 앉혔다.진아람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얇은 천에는 땀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두 사람은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시장에 가서 음식을 잔뜩 산 다음 서현우의 휠체어 손잡이에 걸었다.진아람은 쉬지 않고 서현우에게 말을 걸었다. 두꺼운 면 마스크를 뚫고 나온 목소리는 여전히 맑았고, 여유와 기쁨이 담겨 있었다.촤락-커튼이 열렸다.환기가 잘 안되는 탓에 국수 가게 안은 퀴퀴한 곰팡내가 희미하게 풍겼다.뒤쪽 주방으로 가서 채소와 면을 다듬고 씻는 서현우의 손놀림은 능숙했고, 마음과 눈빛엔 기쁨으로 가득했다.진아람은 앞치마를 두르고 물을 길어와 식탁과 의자를 닦으며 청소했다.냄비 속 물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그녀는 반죽이 담긴 국수를 뽑아내는데, 행동이 깔끔하고 부드러웠다.
“쓰레기 같은 자식!”서현우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남자를 향한 걷잡을 수 없는 살기가 일었다!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싶었다!안타깝게도 휠체어는 침대 끝에 있었고, 서현우는 휠체어 밑에 있는 석궁에 손이 닿지 않았다.남자는 자신을 증오의 눈으로 바라보는 서현우를 비웃더니, 그를 개처럼 침대에 던져버리고 상자를 뒤졌다.그는 꽤 많은 돈을 발견했다.서현우가 진아람에게 반지를 사주려고 조금씩 모아둔 돈이었다.결혼식은 꿈도 꾸지 못했고, 그저 최선을 다해 반지를 사주어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하지만 이제 반지를 사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전부 남자의 술값이 되고 말았다.서현우는 괴로웠다.하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남자를 죽일 수도 없었다.그는 이 남자가 진아람의 정신적 지주라고 생각했다.그 남자를 죽이면 진아람이 슬퍼할 것이다.서현우가 이 쓰레기의 목숨을 앗아간다면, 진아람에게는 아들만 남게 된다.그는 진아람을 떠날 수 없다.하여 서현우는 묵묵히 견뎌냈다.그는 그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견뎌왔다.갖은 굴욕과 다양한 인간군상을 겪어왔다.서현우의 인내심에 남자는 더욱 기갈을 부렸다.그에게서 받은 돈을 다 쓴 남자는 서현우에게 돈을 더 달라고 했다.서현우가 돈을 주지 않으면 남자는 그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찼다.남자는 영악하게 진아람이 보지 못하도록 서현우에게 표면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그리고 진아람이 곁에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서현우에게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했다.적어도 진아람의 눈에는 화목한 가족이었다.아이도 변했다.순수하고 착해서 지나가다가 만난 가난한 거지에게도 돈을 주던 아이는, 아마도 아버지와의 고단한 삶 때문인지 이기적이고 못되게 변했다.다만 거짓말을 하지는 못해 진아람 앞에서 서현우를 자기 집에 얹혀사는 쓰레기라 쫓아내야 한다고 말했다.소년은 서현우에게 슬리퍼를 던지고 서현우의 찻잔에 침을 뱉기도 했다.진아람이 아이를 혼냈지만, 아이가 우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자신도 덩달아 울면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겹겹이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중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고, 누군가 공포에 질려 비명을 내질렀다.그러나 표정은 잔뜩 흥분에 겨워 저마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과 영상을 찍어댔다.깡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채 그대로 쓰러졌다.서현우가 석궁에 다시 화살을 끼우자 일행은 황급히 도망쳤다.누구도 다음 희생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진아람은 멍하니 서현우를 바라보다가, 재빨리 달려가 서현우의 손에서 석궁을 빼앗고는, 손잡이와 시위를 수건으로 열심히 닦은 뒤 자신의 손에 쥐었다.서현우는 진아람이 자신의 죄를 뒤집어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고, 사진과 영상까지 있었다.진아람은 괜한 짓을 한 것이다.사이렌이 울리고, 임진이 왔다.그녀는 한참 동안 말없이 멍한 표정으로 서현우를 바라봤다.서현우는 침착했고, 그의 두 손에는 수갑이 채워진 채 휠체어와 함께 조사받으러 끌려갔다.차에 타는 순간, 빤히 진아람을 바라보는 서현우의 눈빛에는 미련이 가득 담겨 있었다.털썩-진아람이 바닥에 쓰러졌다.서현우는 멍하니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그는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르며 큰 소리로 꺽꺽 울었다.하지만 그래도 끌려가는 건 변함이 없었다.임진은 응급조치를 하고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현장에 남았다.경찰서에 도착한 서현우는 취조실의 차가운 의자에 앉아 취조받고 있었다.서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철컥-취조실 문이 열렸다.임진이 들어왔다.서현우는 불안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손짓했다.“아람이는 어때요?”임진은 감히 서현우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진아람 씨, 돌아가셨습니다.”서현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아아아악…….”그는 죽어가는 짐승처럼 미친 듯이 쉿 소리를 냈다.그리고 기절했다.“이번 생에 다시는 깨어나지 않길…….”서현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그는 깨어났다.새하얀 천장, 새하얀 벽, 새하얀 침대 시트, 새하얀 햇빛.임진이 말했다.“서현우 씨, 불쌍
깊은 밤, 천운 거리의 지하 통로에는 거지 몇 명이 누워 있었다.공간이 뒤틀리고 서현우가 그 속에서 걸어 나온다.핏빛이 지하 통로 전체를 가득 채운다.거지들은 깜짝 놀라 깨어나서 피에 굶주린 눈동자를 보았다.그들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내가 누군지 기억 안 나?”서현우가 웃으며 물었다.거지 중 한 명이 서현우를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너는 그 벙어리!”그의 말에 다른 거지들도 서현우를 알아봤다.“나를 알아봐 주니 다행이군. 그동안 너무 힘들게 살았는데, 이젠 내가 편히 보내주지!”“안 돼!”“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당신들의 돈과 음식을 빼앗는 게 아니었는데!”“저랑 아무 상관 없어요. 다 저 사람들이 한 짓이고,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이 개자식아, 네가 안 했다고? 그때 가장 세게 때린 건 너였잖아!”“내가 안 때렸어! 때린 건 너였어! 나한테 뒤집어씌우지 마!”“죽어 마땅한 건 너야!”“너야!”“해보자는 거야?”거지들끼리 싸움이 붙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죽음의 협박 앞에서 잘못을 타인에게 미루기 급급했다.그들은 엉겨 붙어 싸우기 시작했다.곧 피가 이리저리 튀었다.서현우는 악으로 뒤덮인 그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저마다 크게 다쳐 일어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 서현우도 흥미를 잃었다.그는 손을 들어 극도로 겁에 질린 거지들의 뺨을 때렸고, 그들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두들겨 팼다.피 냄새가 지하 통로를 가득 채우자 서현우는 쾌감을 느끼며 숨을 들이마셨다.그러면서 입술을 핥았다.이윽고 서현우가 뒤돌아 한 발짝 내딛자 공백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사라졌다.마치 한 번도 이곳에 온 적 없는 것처럼.서현우는 감옥에 나타났다.우해미를 잔인하게 괴롭혔던 중년 남자는 어느새 감방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나머지 죄수들은 그에게 아부하느라 바빴다.서현우는 감방 안의 수감자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그만 남겼다.그는 두려움에 바지에 오줌을 싸며 무릎을 꿇은 채 서현우
고통!전례 없는 고통이다!마치 인두로 심장을 직접 지지는 것 같았다.이 날카로운 통증은 서현우의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날 때까지 잡아당기고 비틀었다.와르르-서현우는 힘겹게 눈을 떴고, 흐릿하게 보이던 세상이 서서히 선명해졌다.맑고 잘생긴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검소한 승복을 입고 목에는 염주 한 줄이 매달린 스님이었다.맨머리에는 여섯 개의 점이 있었다.온몸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반야곡에 남겨진 불교 지존경 강자였다!스윽-붉은 안개가 서현우의 몸 주위로 순식간에 퍼지면서 혈도가 공격 태세를 취했다.“아미타불!”불교 지존 강자는 봄바람 같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모은 채 서현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기쁨, 분노, 슬픔, 두려움, 사랑, 악, 욕망의 일곱 가지 감정과 생로병사, 원망과 참회, 사랑과 이별, 기대와 실망을 경험하고 깨달음을 얻으신 걸 축하드립니다.”서현우는 남몰래 혀를 깨물었다.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비릿한 맛이 퍼져나갔다.대체 뭐가 진실일까?“선비님께서 테스트를 통과했으니 한가지 요구를 말씀하시면 제가 최대한 들어드리겠습니다.”불문 지존 강자는 서현우가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말을 이어갔다.서현우는 여전히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저 멀리 구불구불한 길이 펼쳐졌다.양옆의 산은 가파르다.산 아래에는 야생화와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모든 것이 낯설고 특이해 보였다.“여긴 어디지?”서현우는 경계심을 잔뜩 품은 눈으로 지존경의 강자의 남아 있는 영혼을 바라보았다.“아미타불.”불문 지존 강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기가 반야곡 입구입니다.”그의 말에 서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그럼 내가 방금 반야곡에 들어와 환상을 본 겁니까?”“그렇습니다.”불교 지존 강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서현우의 뒤쪽을 가리켰다.“선비님만 그런 게 아니라 저들도 마찬가지입니다.”서현우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고,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그의 뒤에는 진아경 강자들이 서 있었다
서현우와 진아람은 빛줄기가 되어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번산은 미간을 찌푸린 채 종적을 감췄다.다음 순간, 번산이 서현우의 머리로 돌아왔다.“무슨 일이 일어났어?”“내 여동생이 잡혔어.”“누구한테?”“몰라, 하지만 상대방이 단서를 남겼어...”반나절이 지난 후 번산이 갑자기 말했다.“이 방향은... 큰일이야, 수라곡이야!”“수라곡?”“그곳은 진정한 수라가 존재하는 곳이야, 수라 선조가 뼈를 묻은 땅이지!”“나는 수라 혈맥이고, 극락도 수라 혈맥인데, 설마 우리가 진정한 수라가 아닌 거야?”“우리 모두가 수라 선조의 혈맥을 전승하고 있잖아!”“설마 수라 선조가 죽지 않았단 말이야?”“죽었어, 하지만...”번산의 표정이 변화무쌍하게 바뀌면서 말했다.“알겠다. 너는 제물이야.”“제물?”서현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자신이 노복의 힘에 침식된 후에 느꼈던 그 모든 것을 생각했다.“네 여동생은 너를 대신해서 제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너는 지금 정말 가려는 거야? 아마도 우리 모두는 그곳에서 죽어야 할 거야!”“당연히 네가 수라계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여야 하지 않아?”“하지만 그건 수라 선조야... 수라 선조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수단을 남겼는지는 아무도 몰라. 나는 고사하고 역사상의 모든 수라를 포함해서 진짜 극락조차도, 수라곡에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현우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절망감이 생겨났다.‘설마 해결할 방법이 없단 말이야?’‘나영이나 내가 반드시 제물이 되야 하는 건가?’쾅!바로 그때, 멀리서 귀청이 터질 듯한 폭발 소리가 울렸다.하늘에는 핏빛 빛줄기가 미친 듯이 퍼져나갔다.끝없는 핏빛은 하늘을 찌를 듯한 거인의 모습을 구축했다.몹시 화가 난 듯이 손을 뻗어서 전방의 허공을 움켜쥐었다.그리고 그 방향에서 핏빛의 형상이 허공을 갈랐다.눈 깜짝할 사이에 서현우 등과는 이미 백 리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나영아!”핏빛의 형상이 혼수상태에 빠진 나영이를 바로 품에 안는 모습을 보았다.
“누구야!”혈하신존의 부릅뜬 눈이 터질 듯했다.‘이렇게 많은 중견 역량들이 뜻밖에도 동시에 죽다니!’‘누가 이렇게 할 수 있어?’그리고 그 허황된 모습을 정확하게 보았을 때, 혈하신존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극락 선조?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극락 선조?”수많은 눈빛이 번산의 몸에 집중되었다.싸움도 멈추었다.몇 초가 지난 뒤...“극락 선조님을 뵙습니다!”수많은 사람들이 노도 같은 기세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이 장면은 너무나 충격적이다!극락이라는 이름은 수만 년 동안 더없이 놀라운 이름으로, 전대미문의 인물이다!그와 같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극도 등 세 사람은 흥분해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위풍당당하신 선조님이시여!”이미 혈하신존 앞에 나타난 번산이 입을 열었다.“혈하성궁은 제명됐어.”“아니야!”혈하신존은 미친 듯이 소리쳤다.“네가 극락 선조일 리가 없어! 어떻게 천지의 규칙을 피할 수 있어? 그럴 리 없어!”“중요하지 않아.”번산이 큰 손으로 잡았다.혈하신존은 피하려고 했지만, 온 천지가 억지로 벗겨져서 피할 공간이 전혀 없다는 걸 발견했다.“안 돼!”혈하신존은 다시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극락 선조님, 살려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람을 내놓겠습니다!”“너무 늦었어.”번산이 뻗었던 손을 꽉 쥐었다.피식...신의 경지 중기로 최강 전력으로 일컬어지던 혈하신존은 이렇게 허무하게 핏빛 안개로 사라졌다.모든 혈하성궁 소속 사람들은 멍하니 이 장면을 보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듯이 느꼈다.혈도는 그 자리에 선 채 벌벌 떨면서,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천수 랭킹 1위?’‘이런 강자 앞에서는 여전히 한낱 벌레와 다르지 않아!’“노부는 살육을 많이 하고 싶지 않다. 항복한 사람은 죽이지 않겠다.”번산이 입을 열었다.응답하는 사람이 없었다.그러나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않았다.곧이어 혈하성궁 소속 무자들이 무릎을 꿇고 투항했다.남은 네 명의
“싸우면 싸우는 거야. 극락산은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데, 마침 이 기회를 틈타 일거에 극락산을 멸망시켜야겠어. 극락이 수만 년의 신화를 이어왔는데, 오늘 끝내는 거야!”“그래, 싸우자! 극락산을 멸망시키면 마침 자원을 좀 더 차지할 수 있어!”혈하성궁 소속 사람들은 분분히 전쟁 준비를 했다.경사스러운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멀찌감치 달아난 손님들은 긴장한 채 주목했다.‘이 싸움은 정말 시작될까?’‘극락산은 도대체 무슨 미친 짓이야?’“왔다, 왔어! 극락산이 진짜 왔어!”“맙소사... 정말 전쟁 보루야! 극락산 저 자들이 혈하성궁과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게 분명해!”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전쟁을 목격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긴장과 격동 속에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존재한다.‘도대체 왜?’사람들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도무지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그리고 이 스산한 긴장 속에서, 극락산의 전쟁 보루가 혈하성궁 밖에 도착했다.혈하성궁은 이미 방어진법으로 뒤덮여 있었다.혈하신존을 비롯한 혈하성궁의 고수들은 모두 대진 밖에 선 채 음산하고 흉악한 표정을 지었다.“극도! 오늘 네가 극락산에서 우리 혈하성궁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끝장을 보겠어. 나 혈하가 너희 극락산을 멸망시킬 것을 맹세하겠어!” 혈하신존이 크게 외쳤다.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설명? 무슨 설명을 해? 우리 극락산 직계 후손의 아내를 빼앗은 너희 혈하성궁에서 해명을 해야지!” 극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와...”떠들썩한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모두가 경악했다.‘혈도의 신부가 뜻밖에도 극락산 직계 후계자의 아내야? 이건 너무 엄청난데?’“X자식! 극도 네가 감히 이렇게 우리 혈하성궁을 욕보이다니, 정말 끝장을 보겠다는 거야?”혈하신존은 크게 노했다.혈도의 안색도 아주 좋지 않았다.자신은 영문도 모른 채 남의 아내를 뺏은 간악한 도적이 된 것이다.“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사람을 내놓든지 전쟁을 시작하든지 결정해!”“그럼 싸우자! 혈
모든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명령은 이미 하달되었으니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이다.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모두 돌아가서 전쟁 준비를 했다.극락산의 분위기는 금세 무거워졌다.그리고 극락산에서 영혼의 수정석을 고가로 사들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혈도의 혼례는 큰 행사다.56개 구역의 무수한 사람들이 이 성대한 혼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전송진을 타고 왔다. 그 중에는 영혼의 수정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비싼 값에 팔기 위해서든 극락산에 아부하기 위해서든 영혼의 수정석을 잇달아 보냈다.하나씩 잇달아 들어왔다.날이 밝기 전까지 모두 800여 개의 영혼의 수정석을 수집했다.성과는 만족스러웠다.물론 극락산에서 지불한 대가도 만만치 않았다.앞으로 5년간의 자원을 모두 썼다고 할 수 있다.하나라도 잘못된다면, 극락산은 무너질 것이다.그러나 극도 등 세 신존은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신의 경지 후기인 극락 선조님이 계셔.’‘모든 노력은 가치가 있어.’이 영혼의 수정석이라면 번산이 4, 5 번 손을 쓰기에 충분했다.신의 경지에 이르면, 전기 경지의 10명이 반드시 중기 경지의 한 명을 이길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중기 경지 10명이 후기 경지의 한 명을 이길수 있는 것도 아니다.‘혈하성궁이 아무리 강해도, 신의 경지 후기 한 명과 중기 3사람을 동시에 대처할 수는 없어!’‘이 실력이면 모든 걸 깔아뭉갤 수 있어!’해가 떴다.극락산에 모든 사람이 모이자 스산한 기운이 가득했다.호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을 향해서 극도가 손을 휘저었다.“오늘 이후, 더 이상 혈하성궁은 없다! 우리 극락산이 수라계 1위가 되는 거야! 극락 선조님의 눈부신 무적의 영광을 이어가자!”“무적! 무적!”많은 사람들이 분분히 맞장구를 쳤다.비록 이 늙은이가 술을 마시고 정신이 나갔는지 뭘 잘못 먹고 갑자기 이렇게 자신감이 생겼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들은 이미 극락산과 생사를 같이 하는 처지이기에 전혀 관여
세 사람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그리고 급히 대전 뒤쪽의 벽에 걸려 있는 한 폭의 그림을 보았다.그림 속에는 천하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독보적인 패자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그... 극... 극락 선조님?”세 사람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자신에게 환각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그게 어떻게 가능해?’‘극락 선조는 수만 년의 인물이야. 그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규칙의 제한을 벗어날 수는 없어. 절대 지금까지 살 수 없어!’“노부는 바로 극락이다. 육신을 버리고 영혼체로 존재하지. 시간의 규칙이 없는 곳에서 수만 년 동안 잠들어 있다가 이 아이에 의해 깨어나게 되었다.”위엄 있게 입을 연 번산의 모습은 완전히 극락과 똑같았다.그 자체가 극락의 악념의 화신이니, 이 세상에 번산보다 극락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극락 선조님을 뵙습니다!”삼대 신존이 잇달아 무릎을 꿇었다.“너희들이 아직도 나를 조상으로 여기는 거야?”“선조님, 화를 가라앉히시지요. 저희 못난 후손들 어떤 점 때문에 선조님께서 이렇게 화가 나셨는지 모르겠습니다.”세 사람은 안절부절 못하면서 물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또 미친 듯이 기뻐했다.‘극락 선조님이 여전히 계신다면, 육신이 없더라도 신의 경지 후기인 영혼체는 현재 수라계의 모든 신의 경지 강자들을 쉽게 이길 수 있어.’‘혈하성궁은 개뿔!’‘극락산이 당연히 1위야!’“예전에 노부는 천하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천하무적이었어. 너희 못난 후손들은 오히려 극락산을 이렇게 쇠락한 모습으로 만들었고, 혈하성궁을 두려워하고 있지. 노부가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겠어?”“선조님, 노여움을 푸세요!” 세 사람은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자신들은 억울했지만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필경 예전의 극락 선조는 정말 무적의 존재였다.한 시대를 짓눌러 버린 것이다그러나 후손들은 극락 선조의 휘황찬란했던 업적을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이 아이는 우리 극락산 사람이야. 이 아이의 아내 역시 우리 극락
계속해서 전송진을 통과하면서 반나절도 안 돼 수라계의 핵심 구역인 수라역에 도착했다.다른 곳과 다를 바 없이 핏빛이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하지만 다른 곳에 비하면 번화한 지역이 한두 곳이 아니다.어떤 도시에도 큰 짐승이 대지 위에 포복하는 것과 같다. 왕래하는 무자는 가장 약한 자도 모두 생사경의 경지였다.생사경 이하의 사람들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서현우는 깊은 시름에 빠진 채 극무 등을 따라 극락산으로 돌아왔다.극락산은 하나의 산맥으로, 주위의 네 개의 약간 낮은 산봉우리가 중간에 있는 아주 높은 산봉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네 개의 낮은 산은 극락산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제자, 내외문 제자들, 고위 지도층과 장로들, 그리고 극락산과 관계가 있거나 종속된 크고 작은 가문의 거주지이다.중간의 아주 높은 산봉우리는 직계 후계자만 거주할 수 있다.극락노조의 혈맥을 품고 있는 적통만 극락산에 장기 거주할 수 있는 것이다.다른 사람들도 극락산에 올라갈 수는 있지만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서현우의 출현은 극락산을 들끓게 했다.거의 모든 직계 자제들이 서현우를 보러 달려왔고, 궁금해하거나 불만을 내비치면서 서현우와 겨루면서 실력을 한 번 보고 싶어했다.특히 극상 등이 서현우에게 한 수만에 졌다는 소식을 듣자, 손이 근질거리면서 서현우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넘치게 되었다.그러나 극무는 서현우를 데리고 다른 두 신급 강자들을 만나러 갔다.하얀 수염을 기른 노인은 극도라고 하고, 또 체구가 크고 우람한 남자는, 극전이라고 한다.서현우를 훑어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극락노조의 혈맥은 밖에서는 거의 전해지지 않았는데, 네가 혈맥을 이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앞으로 극락산에서 편히 살면서 잘 수련하도록 해라.” 두 사람은 서현우에게 매우 친절했다.아무래도 직계 혈맥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서현우는 예를 갖추면서 물었다.“감히 두 신존에게 여쭙겠습니다. 혈도가 곧 결혼할 상대의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극무는 갑자기 흥미를 느꼈
“일이 좀 늦어졌어요. 수확은 그런대로 괜찮았어요.”서현우가 얼버무리며 말했다.“그럼 됐어요.”홍세령은 고개를 끄덕였다.“곧 나갈 거예요. 준비하세요.”서현우도 알았다고 말했다.홍세령이 말한 준비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지금은 갱도 세계의 통로가 닫히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이 시점에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 걸 바라지 않았다. 만약 나가는 시간이 지체되어 이 안에서 말살된다면 너무 가치가 없는 일이다.하지만, 나간 뒤에는 확실하지가 않았다.아주 혼란스러운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예로부터 이처럼 재물 때문에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였다.윙...곧 문이 열렸다.거의 백만 명에 가까운 무자들이 몰려나왔다.서현우가 뒤를 돌아보니 빛줄기들이 잇달아 스쳐 지나갔다.그것은 신급의 강자들이다.그들의 눈빛에서 분노와 어쩔 수 없다는 기색이 드러났다.11층과 12층을 왔다갔다하면서 찾았다.거의 물샐틈없는 수색이었다.그러나 결국 만령광모의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어떻게 그들이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서현우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핥았다.‘만령광모가 내게 있다는 이 비밀을 끝까지 지켜야 해.’이번 갱도 세계로의 여정에서 최대 승자가 된 서현우가 환고광맥의 중심부로 돌아왔다.짧은 침묵 끝에 싸움이 시작되었다.신급의 강자들은 이에 대해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최고 세력의 대열에서도 감히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주화입마된 자들이 예외적으로 이들을 건드렸지만, 모두 빨리 죽게 되었다.모두들 공중으로 솟아올라서 전쟁처럼 미친 듯이 싸우는 지면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표정을 지었다.“가자, 이제 떠나야지.”극무가 담담하게 말했다.홍세령은 서현우를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시간이 있으면 다시 함께 탐험하도록 해요.”“그래요.” 서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지내세요.”“잘 지내세요, 아마도 곧 극락산에 갈 거예요. 그때 다시 이야기하죠.”“안녕히 계세요.”서현우를 보고 또 홍세령을 보
“무슨 뜻이야?” 서현우의 안색이 변했다.“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들어.”번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육신이 없어. 일단 손을 써서 공간의 장벽을 열면 령혼체는 순식간에 공간의 역량에 의해 없어지게 돼.”“나한테 빙의하면 안 돼? 그때 극무를 속인 것처럼?” 서현우가 다급하게 말했다.번산이 말했다.“그때는 내 영혼의 힘이 약해서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지금은 안 돼. 너의 육신의 강도가 이미 내 영혼의 부착을 지탱하기에 부족해.”서현우의 얼굴은 더없이 일그러졌다.“설마 다른 방법이 없단 말이야?”“내가 한 신급의 강자에게 공간의 장벽을 열도록 강요할 수는 있어. 그러나 지구의 좌표를 확정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게다가 그 신급 강자가 너에게 열어준 것이 바로 지구의 공간 장벽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어. 만약 어떤 험악한 곳으로 전송되면, 다시 지구의 좌표점을 찾는 것이 더없이 어려워질 거야.”‘사실 번산은 아주 보수적으로 말한 거야.’‘완전히 낯선 세상에서 길을 잃는다면, 지구의 좌표를 알아내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게다가 그곳에 신급의 강자가 있는지, 수라계의 공간 장벽을 다시 뚫을 수 있는지도 확실치 않아.’‘불확실한 요소가 너무 많아.’‘억지로 강행한다면 목숨을 가지고 농담을 하는 거야.’“방법이 또 있어?” 침묵하던 서현우가 물었다.“그리고.”번산이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강제로 내가 신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은 깨달음을 너에게 주입할 수 있지만, 반드시 네가 나의 깨달음을 복제해서 신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야. 너는 사람마다 길이 다르고 깨달음이 다르며 신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는 방향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해.”“게다가, 너의 바탕과 축적된 실력은 신급 경지와 비교해서, 아직 일정한 차이가 있어. 일단 실패하면, 결과는 네가 잘 알 거야.”서현우는 이를 악물었다.비록 가슴이 설렜지만,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나도 내 영혼의 힘을 없애
만령에게 감격한 번산이 웃었다.“고마워, 만령. 만약 네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오래 걸려야 이 정도로 회복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아빠 말을 들은 거예요.” 서현우의 곁으로 달려간 만령은 한 손을 안고서 의지하는 표정을 지었다.서현우는 만령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이 새로 얻은 딸에 대해서도 보호의 정이 더 많아졌다.번산은 활짝 웃으면서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얼마나 남았어?” 서현우가 번산에게 물었다.번산과 공생 계약이 있기에 서현우도 번산의 영혼체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이 사실에 서현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영혼의 수정석은 아주 드물고 얻기 어려워. 정말 밖에서 찾는다면 수라계 전체를 다 찾아도 천 개를 찾을 수 없을 거야.’‘이렇게 많은 양으로도 번산의 영혼체를 완전히 회복시키지 못했으니 정말 엄청난 거야.’‘그리고 신경 후기인 강자의 영혼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어.’“지금 내 실력은 신의 경지에 막 들어갔다고 할 수 있어. 2천 개만 더 있으면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 것 같아.”번산이 기대하는 말투로 말했다.서현우는 혀를 내둘렀다.‘말은 편하게 하네.’‘만약 만령이라는 만령광모의 존재가 없었다면, 번산은 평생 영혼체를 복구할 수 없었을 거야.’“완전히 복구되면 신의 경지 후기에 도달할 수 있어?”서현우가 물었다.“그래.”번산은 아주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그러나 내가 손을 대면 영혼의 힘을 소모하게 돼. 영혼의 수정석만 이를 보충할 수 있어.”서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음을 표시했다.‘육신을 가지고 있는 무자는, 흡수하는 것이 정기든 혈악의 힘이든 모두 천지 사이에서 보충할 수 있어.’‘육신이 그릇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거지.‘그러나 번산은 영혼체야. 그에게 가장 적합한 악의 몸은 이미 부패하고 소멸되었어. 이 세상에는 아마도 누구의 몸도 지금의 번산을 수용할 수 없을 거야.’‘번산은 영혼체의 상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얘기야.’‘육신이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