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건후는 기다린 다리를 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역시나 익숙한 맛이었다.이내 차를 음미하면서 도아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한편, TV에서는 후반전 경기에 참석하는 말을 소개하고 있었다.도아린은 절대로 외모에 혹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상기했고, 화면을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목에 흰색 점이 있는 검은색 말을 선택했다.그리고 종이에 선택하려는 찰나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보는 눈은 여전히 형편없군.”도아린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고, 다시금 TV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2번 말도 생김새는 나쁘지 않았다. 갈색 털은 윤기가 흘렀고, 비록 덩치가 큰 편은 아니지만 외모가 출중했다.하지만 비주얼만 보고 돈을 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참혹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는가?화면이 바뀌면서 다음 경주마로 소개가 넘어가자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망설임은 패배의 지름길이야.”“아린아, 골랐어? 이제 곧 시작해.”김영실이 재촉했다.도아린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과감하게 2번 말을 찍었다.출발음이 울리자 경주마들이 쏜살같이 뛰어나갔고, 도아린이 선택한 2번 말이 제일 뒤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배건후를 노려보았다.결정적인 선택을 내리기 전에 괜스레 방해하고 말이야!아주 그냥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작정했나 보네? 개자식 같으니라고!“이번에도 나야!?”김영실은 흥분한 나머지 춤이라도 출 기세였고, 연장미에게 자신이 선택한 번호를 보여주었다.연장미가 찜한 말은 2등으로 달렸고, 그녀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안 했다.그러나 두 번째 바퀴를 달릴 때 2번 말이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도아린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TV를 쳐다보았고, 마음 같아서는 현장으로 날아가 연신 채찍질해서 경주마가 더 빨리 달리게 하고 싶었다.마치 그녀의 간절한 기도가 닿기라도 한 듯 2번 말은 끝까지 페이스를 잃지 않고 결국 3위로 결승선에 도착했다.해설자는 2번 말이 다크호스라고 극찬했고, 작
도무지 밥 먹을 기분이 아닌 김영실은 일이 있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게다가 연장미가 데려온 사람인지라 그녀도 뒤따라 집을 나섰다.배건후는 도아린과 함께 돌아가려고 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순순히 보내 줄 주현정이 아니었다.“아린아, 이모님이 요리 준비했으니까 먹고 가. 살이 빠진 것 좀 봐.”“어머님도 많이 드세요.”주현정이 이상한 낌새라도 눈치챌까 봐 도아린은 배건후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주었다.주현정은 아들을 흘겨보며 말했다.“저놈은 몸매 관리해야 하니까 야채만 먹으면 돼.”말을 마치고 나서 일부러 팔을 찰싹 때렸다.그때 여자의 손톱에 긁혀 상처가 났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배건후는 눈을 내리깔았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내가 친아들 아닌가요?”“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줬으면 의무를 다했지, 뭐. 앞으로 아린과 함께 있을 때만 엄마라고 불러.”식사를 마치고 주현정은 약을 먹고 쉬러 가기 전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도아린에게 말했다.“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 괜히 마음만 약해졌다가는 점점 더 기고만장할지도 몰라.”그동안 배건후의 행세는 그녀도 지켜봐 와서 잘 알고 있다.아들이 바람 피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유독 손보미한테만 약했다. 게다가 워낙 잔꾀가 많은 여자라서 도아린이 손해 볼까 봐 걱정이었다.시어머니의 배려에 그녀는 감동을 금치 못했다.그리고 뒷정리를 마치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유민정을 불러 세웠다.“혹시 한약재 찌꺼기인가요?”“네.”“왜 예전 거랑 냄새가 다르죠?”유민정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지난번에 사모님이 주신 처방전인데 여사님께서 드셔보더니 몸이 훨씬 개운하다고 하셨어요.”“아, 약재가 바뀐 게 있긴 했죠. 알겠어요, 일 보세요.”도아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한약 덕분인지 양약 덕분인지 몰라도 이번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주현정은 예전보다 안색이 많이 밝아졌다.도아린이 방에 돌아오자 배건후는 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디 필로우를 침대 한가운데에
도아린은 침대에 털썩 쓰러졌고, 남자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히는 순간 은은한 민트향을 맡았다.상쾌한 느낌은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했다.배건후와 결혼하고 나서 껴안은 채로 잠이 든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때가 되면 각자 알아서 잤고, 설령 동시에 침실에 들어선다고 한들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웠기에 가운데가 휑 비어 있었다.남자는 기다란 팔다리로 마치 창살처럼 도아린을 가두었다. 그녀는 답답한 느낌에 벗어나고 싶었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눈 감고 얼른 자.”배건후는 갈라진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정작 가슴 근육에 숨이 막힐 듯한 도아린은 남자의 신체 변화 따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힘껏 밀쳤다.“이거 놔요! 답답하단 말...”그러다 특정 부위에 닿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저녁은 분명 같은 메뉴를 먹었기에 약을 탄 적이 없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건후 씨?”이내 싸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널 건드리지 않는 이유는 단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야. 만약 계속 반항하겠다면 내가 과연 서긴 서는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증명해줄 테니까 각오해.”도아린은 엉큼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속으로 저주를 마구 퍼부었다.곧이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거의 사라진 팔뚝의 흉터를 발견하고 이를 악물었다.“당신 팔뚝에 상처를 낸 사람이라면 친히 경험했겠죠? 하지만 전 결벽증이 있어서 사양할게요.”배건후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악!”도아린은 너무 아픈 나머지 남자를 힘껏 밀어냈다.“강아지도 아니고 뭐 하는 거예요!”그는 쇄골까지 지분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3년 전 그날을 제외하고 남자랑 자 본 적이 없어?”도아린의 눈에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그래요. 여러 명이랑 해보면 건후 씨 스킬이 엉망이라는 것을 알고 섣불리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그녀는 목을 가리고 남자를 밀어냈다.배건후는 앙증맞은 얼굴을 붙잡고 가슴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어떤 게 손톱에 긁힌 상처인지 잘 봐. 괜히 몰상식
손보미는 수박 한 조각을 집어서 배지유에게 건넸다.“수박이 엄청 달아. 얼른 먹어.”...다음 날 도아린이 씻고 있을 때 배건후가 화장실로 걸어 들어왔다.그는 옆에 서서 치약을 짜고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내일 나랑 행사장에 같이 가.”“싫어요.”도아린은 칫솔을 물고 딱 잘라 거절했다.이혼하고 전남편과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안 그래도 둘의 관계는 수시로 부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데 스스로 가십거리를 제공할 수는 없지 않은가?배건후는 화를 내기는커녕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어제 딴 돈을 돌려줘.”도아린이 치약 거품을 퉤 하고 뱉었다.“참 뻔뻔스럽네요.”“힌트가 없었더라면 더 많이 잃었을 텐데?”비록 사실이지만 이게 무슨 말이 안 되는 소리인가?“와이프를 위해 돈을 따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제 이혼하는 마당에 돌려줘야 하지 않겠어?”도아린은 어이가 없었다.사사로운 원한까지 반드시 갚는 쪼잔한 놈 따위 좋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게 아니었는데.“건후 씨랑 행사장 갈 테니까 이혼 합의금 중에서 200억을 면제해줘요.”도아린이 지지 않고 받아쳤다.“아는 게 돈밖에 없는 사람이 대체 왜 이혼하자고 하는 거야?”배건후는 경멸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돈을 적게 버는 것도 아닌데 부족하다고 시위라도 하는지 싶었다.도아린은 화가 나서 펄쩍 뛰었다.“통이 큰 척하더니 누구보다 꼼꼼하게 따지잖아요.”도지현의 치료비를 계산하면서 면봉 하나의 가격까지 놓치지 않는다니, 뻔뻔스러운 쓰레기 같으니라고!배건후는 양치를 마치고 변기로 걸어갔다.“나랑 가던지, 돈을 갚던지.”“미친!”도아린이 화장실을 쏜살같이 뛰쳐나왔고, 문이 닫히는 순간 물소리가 들려왔다.이제 곧 이혼할 사이인데 이미지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가?도아린이 옷을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배지유가 돌아왔다.“아줌마, 물 좀...”그리고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도아린을 보자마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당신이
도아린은 배건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그동안 다짜고짜 꾸짖거나 누명을 씌웠을 때 아무리 억울해도 꾹 참고 변명해 본 적이 없었다.오늘 그녀를 모욕하는 여동생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으니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물론 자기편을 들어주리라 바라지도 않았고, 단지 안하무인에 막무가내인 배지유를 보고 무슨 생각 할까 알고 싶었을 뿐이다.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소매를 정리하며 가까이 다가왔다.“지유가 술을 마셔서 제정신이 아닌가 봐.”고작 이게 다인가?무려 새언니도 안중에 두지 않고 어미 없는 자식이라고 욕하는 것도 모자라 남동생은 남편 돈을 빼먹는 존재라고 하는데 제정신이 아닌 탓이라고 얼버무리다니?제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남의 약점만 쏙쏙 골라서 비꼬겠는가?비아냥거림과 경멸이 가득한 여자의 표정을 보자 배건후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엄마가 이미 때렸으니까...”그러나 끝까지 말을 이어가지는 못했다.왜냐하면 주현정이 갑자기 쓰러졌기 때문이다.방금 퇴원한 그녀는 다시 VIP 병동에 입원했다.아무리 신분이 존귀한 사람이라도 의사 앞에서는 한낱 환자에 불과했다. 주치의가 노발대발하며 호통쳤다.“환자분께서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왜 자꾸 자극합니까?”배건후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꾹 닫고 있었고, 천생 귀공자답게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뿜어냈다.의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도아린에게 또다시 환자를 흥분하게 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으름장을 놓았다.진료실을 나서자 배건후는 도아린을 막아섰다.“엄마가 깨어나면 지유 얘기 잘 좀 해줘.”도아린은 화가 나서 되레 웃음이 터졌다.욕설을 퍼부은 사람을 용서할뿐더러 사정까지 하라니?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지?“과연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 맞아요?”배건후의 눈빛은 싸늘하게 식어갔다.“어렸을 때부터 금지옥엽으로 자란 녀석이야. 부모님도 여태껏 혼내신 적이 없는데 오늘 너 때문에 엄마가 지유의 뺨을 때렸어.”“그래서?”배씨 가문의 귀한
하지만 검사 결과는 주현정이 어제의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다.아마도 기분이 몹시 상한 일이 있었기에 환자가 선택적 기억 상실증이 걸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차라리 이대로 잊고 지내면 다행이었다. 적어도 다시 떠올려 속상해서 건강까지 해치는 상황은 없을 테니까.의사의 말에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그냥 넘어가라고 더욱 당당하게 강요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잘 챙겨주셨는데 기어코 지유랑 싸워서 병세를 악화하게 할 거야?”도아린은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고, 골조차 보기 싫었다.이때, 휴대폰이 울렸고 발신자는 다름 아닌 문나연이었다.“통화 괜찮아? 중요한 할 얘기가 있는데...”그녀가 행여나 말실수라도 할까 봐 도아린은 서둘러 끼어들었다.“지금 찾으러 갈 테니까 만나서 얘기해.”이내 전화를 끊고 뒤돌아서 떠나려고 했다.찬바람을 쌩하니 일으키며 멀어져가는 고집스러운 여자의 뒷모습을 보자 배건후는 짜증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모습을 감추는 순간 배지유한테서 연락이 왔다.“오빠, 엄마 괜찮아요? 얼른 경호원 치워줘요. 엄마 보러 가야 하니까.”“집에서 반성해.”비록 병원은 금연이지만 배건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담배에 불을 붙였다.“술집에서 술을 처먹고 외박까지 해? 간덩이가 부었어?”도아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늦게까지 놀다 온 것에 화가 난 듯한 오빠의 말투를 듣자 배지유는 금세 어깨가 으쓱했다.하지만 목소리만큼은 고분고분했다.“어제 친구 생일이라서 좀 늦었어요. 나가기 전에 엄마한테 얘기했는데... 그나저나 엄마는 괜찮아요?”배건후가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엄마 앞에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은 언급하지 마.”대신 해결해줬다는 뜻인가? 역시 그녀를 가장 아끼는 건 오빠밖에 없었다.“알았어요.”배지유는 전화를 끊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한 채 침대에 마구 뒹굴었다.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니나 다를까 오빠는 도아린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그러나 뺨 맞게 한 것만큼은 반드시 대가를 받아낼 생각이었다....
“워낙 잔꾀가 많아서 혹시 가는 길에 내 옷을 망가뜨릴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되면 나한테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하겠지, 설마 어시한테 배상시키겠어?”손보미는 옷이 들어 있는 캐리어를 덥석 붙잡았다.도아린이 니들 케이스를 열자마자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닫았다.“개나 소나 아현 씨를 만나게 된다면 과연 신분을 숨길 필요가 있을까? 수선할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이만 가볼게.”그러고 나서 몸을 돌려 떠났다.하지만 손보미는 어디까지나 배짱부리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일개 어시스턴트 주제에 잘난 척하기는!“이게 얼마짜리 드레스인지 알아? 네가 배씨 가문에 3년 동안 있다고 한들 소유하기 힘든 브랜드라고!”손보미는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문나연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어떻게 도아린을 보내 물건을 가져가게 할 수 있지? 아현 씨도 사람 보는 눈이 참 없군.”도아린의 뒤를 따르던 문나연이 입을 열었다.“지금 아현 씨가 눈이 멀었다고 저주한 거야? 토씨 하나 안 빼먹고 전해줄게.”결국 신발 커버를 벗고 나가려는 도아린을 보자 손보미는 이를 악물고 캐리어를 툭툭 쳤다.“농담이었으니까 확인해 봐.”그녀에게 옷을 무조건 수선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안 그래도 급이 낮다고 브랜드사에서 마지못해 대여해줬는데, 더욱이 다른 연예인이 출연 예정인 예능 프로그램 의상으로 이미 확정된 상황이었다.다시 말해서 배상만 한다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연예계는 워낙 시기와 질투가 넘치는 곳이라 설령 드레스를 실수로 망가뜨렸다고 할지언정 기자들이 한술 더 떠서 누군가를 겨냥하기 위한 의도적인 계획이라고 보도될 가능성이 컸다.물론 잘나가는 쩐주가 당사자의 뒤를 봐주고 있다면 상관없지만 아직 배건후와 결혼 약속도 받아내지 못한 시점에서 상대방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가 연예계 생활이 마냥 순탄치 않을지도 모른다.“글쎄, 우리가 농담할 정도로 친했더라?”도아린이 돌아왔다.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캐리어가 열렸다.손보미가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괜히 더 망가뜨리
그녀는 허리를 펴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건후 씨 카드 긁으려고? 우리 아직 부부 사이인 건 알고 있지? 이혼 수속하기 전까지 보미 씨는 내연녀라는 타이틀을 영원히 달고 살 텐데?”손보미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묵묵히 카드를 도로 집어넣었다.드디어 주위가 조용해지자 도아린은 드레스의 안감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배건후가 수선비를 낼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비싸게 불렀을 텐데.결국 드레스를 다시 캐리어에 집어넣고 사인할 계약서를 꺼내서 전해주었다.손보미는 종이를 넘기며 조소를 금치 못했다.“연성대학교의 간판스타 도아린, 다재다능은 물론 졸업하기도 전에 디자인 대상을 받더니 고작 가정부 신세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건가? 3년 동안 갖은 고생하면서 자존심도 이미 바닥났을 테고,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네.”다만 타격이 1도 없는 상대방을 보자 마지못해 펜을 들고 사인했다.도아린은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얼굴은 서글픈 기색이 역력했다.비록 문나연도 발견했으나 모른 척 외면했다.그동안 도아린은 소유정의 집에서 같이 지냈지만,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서로 방해되지 않도록 같은 동네에 방을 따로 구했다.치마 겉감의 수선을 마치고 도아린은 몸이 뻐근한 나머지 일어나서 스트레칭했다.이때, 소유정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아린아! 살려줘.”휴대폰 너머로 흐느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누군가 그녀를 허위사실 유포죄와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고 말했다.도아린은 서둘러 경찰서로 달려갔다.소유정을 발견하는 순간 눈은 이미 빨갛게 충혈되었고 누가 봐도 화난 얼굴이었다.비록 그녀는 유명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만 명의 팬을 거느리고 있는 연예인으로 경찰서에 들락이는 모습이 찍힌 이상 추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무슨 일인데?”“내가 업로드한 게시물 때문에 뭐라고 하잖아!”도아린의 손을 붙잡은 소유정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그녀는 친구 대신 분풀이하려고 손보미의 흑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