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유민은 초소형 카메라에 담긴 도아린과 협의했던 장면을 배건후에게 보내주었다.분노와 걱정이 뒤섞인 여자의 표정을 보며 배건후는 손으로 볼펜을 리드미컬하게 돌렸다.쓴맛을 좀 봐야지 정신 차리지, 아니면 시도 때도 없이 이혼을 운운하면 골치가 아팠다.배건후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미팅하러 갔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 우정윤이 나지막이 말했다.“남궁 변호사님이 연락이 왔어요.”남자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고, 차분한 걸음걸이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머릿속은 프로젝트의 다음 단계 진행 방향을 고민하고 있었기에 이혼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어쨌거나 바보가 아닌 이상 실수는 범하지 않을 테니까.“내가 제시한 요구는 우 비서도 알고 있으니 그대로 전달해.”즉, 에이트 맨션에 돌아가서 앞으로 이혼 얘기는 입 밖에 꺼내지도 않으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준다는 것이다.우정윤은 침을 꼴깍 삼키고 사무실에 따라 들어서더니 문을 닫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변호사님께서 말하길 사모님이 사인했다고 하네요.”물론 나쁜 놈이라는 둥, 인간 말종이라는 둥, 비열하다는 둥, 업보를 받는다는 둥 배건후에 대한 욕설과 비방은 건너뛰고 결론만 전달해주었다.의자를 끌어당기던 배건후가 멈칫하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도아린이 동의했다니?혹시 머리가 잘못되었나?칼날처럼 날카로운 상사의 시선에도 우정윤은 고개를 끄덕였다.눈을 살짝 내리깐 배건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고, 남자다운 턱선이 금세 팽팽하게 당겨졌다. 우정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조마조마한 얼굴로 물었다.“구청에는 언제 가면 좋을까요?”벌컥!남자는 테라스 문을 열고 싸늘한 기운을 내뿜은 채 걸어 나갔다.이내 차단을 해제하고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감히 그를 차단하다니?도아린이 병원에서 주현정의 퇴원 수속을 처리하던 중 휴대폰이 문득 울렸다.“사인했어?”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네.”그리고 휴대폰을 볼과 어깨 사이에 끼고 맨 뒤로 가서 줄을 섰다
입구를 지나 사라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배지유는 등골이 오싹했다.그럴 리가 없었다. 워낙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일이라 도아린은 절대 모를 것이다.주현정을 보자마자 날이 잔뜩 서 있던 도아린도 금세 표정을 바꾸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어머님, 약이랑 주의사항은 민정 아줌마한테 전달했어요.”주현정이 옆자리를 두드리며 앉으라고 손짓했다.“오늘 친구들이 내가 퇴원한다는 걸 알고 보러 오겠대. 지유는 약속이 있다고 나갔으니까 네가 남아서 같이 도와줘.”비록 손님 접대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성치 않은 몸으로 주현정 혼자서 사람을 맞이하면 힘들기 마련이다.결국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어차피 재벌가 여사님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기에 기껏해야 과일을 자르고 차를 준비할 뿐이었다.주현정은 일반 부잣집 사모님과 달리 본인의 커리어를 갖고 있다. 비록 공개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지만 그녀가 설립한 JS 픽처스는 연예계에서 꽤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따라서 어떤 일은 대놓고 부탁하기 어려웠고, 사적으로 찾아와서 해결하는 게 대다수였다.과일이 준비되자 손님도 속속 도착했다. 그중에서 도아린은 성대호의 어머니 연장미만 알아보았다.여사님들은 하나같이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했지만 주현정 앞에서는 어딘가 초라해 보였다. 그리고 도아린이 내린 차를 마시며 신기한 듯 훑어보았다.“며느리가 참 예쁘게 생겼네요. 회사에서 새로 영입한 배우인 줄 알았어요.”주현정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네, 사람도 어찌나 똑똑한지.”겉모습만 그럴싸하고 머리는 텅 비었다고 비꼬려는 걸 마냥 지켜볼 그녀가 아니었다.도아린이 주방에 간 틈을 타서 한 사람이 말했다.“안색이 훨씬 좋아 보이는데 한약이 효과가 있었나 봐요?”“그러게요.”“아주 용한 한의사라고 하던데 왜 현정 씨 며느리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죠? 설마...”“요즘 애들은 다 자기 생각이 있기 마련이에요.”사실 주현정도 손주가 간절했지만, 외부인들이 도아린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드디어 반응을 보이자 우정윤은 이때다 싶어 필살기를 날렸다.“여사님을 뵈러 손님들이 찾아와서 사모님이 접대하는 중이에요.”배건후가 문득 콧방귀를 뀌었다.“고슴도치처럼 가시 돋친 말만 골라서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어?”우정윤은 사실 대표님한테만 날이 잔뜩 서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아니면 또 심기가 불편해지기 마련일 테니까.“사모님은 워낙 사교 모임에 익숙하지 않아 억울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라도 말실수해서 여사님까지 곤란하게 하는 건 아닌지 싶네요.”배건후는 서류를 탁 덮었다.“능력도 없으면서 설치기는! 당해도 싸.”우정윤은 즉시 입을 꾹 닫았다....그나마 주현정과 사이가 좋은 연장미가 화제를 바꾼 덕분에 분위기도 서서히 화기애애해졌다.도아린은 가끔 과일이나 차를 가져다주었고, 유민정을 도와 점심을 준비했는데 오히려 마음이 훨씬 더 편했다.식사를 마치고 여사님들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고, 누군가 경마를 언급하자 TV를 켜고 경기를 시청했다.그녀는 이내 구석에 앉아 소유정과 문자를 주고받았다.소유정은 도성 경찰서에 가서 진행 상황을 물었지만 증거가 없다는 핑계로 처리해주기 싫어하는 눈치라고 했다.한편, 불꽃놀이 영상은 이제 실검 순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손보미의 팬들은 여전히 공유하느라 바빴고 소유정이 [배건후는 유부남, 손보미는 내연녀]라는 댓글을 달자 금세 욕설로 도배되었다.자칭 내막을 알고 있다는 네티즌이 배건후와 손보미가 소꿉친구라는 증거를 제시하더니 배건후에게 질척이며 둘 사이를 훼방 놓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비록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나열한 사건에서 유추해보면 전부 도아린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글쓴이가 누구인지는 뻔했다.손보미는 이번 화제에 힘입어 여주인공 캐스팅 확정 소식까지 발표했다. 어쨌거나 안티팬이 많으면 인기가 높다는 반증이기도 했으니까.게다가 함예진을 태그하고 앞으로 최고의 여배우한테서 열심히 연기를 배우겠다고 선언했다.물론 함예진은
말과 당나귀도 구분 못 하는 사람이 몇 번 해본다고 과연 마스터하겠는가?결국 비주얼만 보고 골랐다가 연속으로 참패당해 뼈아픈 교훈을 얻고 그녀는 절대로 외모에 혹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백전백승한 김영실은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주현정을 보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현정 씨 쉬는 거 방해하지 말고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주현정은 도아린의 종이를 흘긋 쳐다보았다.“어때?”“딱 한 번 5등 했어요.”김영실이 웃으면서 말했다.“자, 나한테 6,000만 원 주고 장미 씨한테 2,400만 원 보내줘.”도아린은 어안이 벙벙했다.경마에서 지면 돈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해준 사람은 없었는데?게다가 배건후와 이혼하면서 이미 1,000억의 빚을 졌는데 돈이 어디 있겠는가?그녀는 차라리 한 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손을 떼는 것이었는데.결국 종이를 너무 세게 움켜쥔 나머지 김영실이 빼내려고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설마 용돈이 1억도 없는 건 아니지?”비록 순순히 인정할까 고민도 했으나 주현정에게 배건후와 사이가 틀어졌다는 걸 들키기 마련이었다.‘골치 아프군.’도아린은 속으로 눈물을 머금고 마지못해 이체해주었다.연장미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경기가 곧 끝날 텐데 아니면 후반전까지 시청하고 갈까요?”김영실은 활짝 웃으면서 귀걸이를 만지작거렸고, 이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난 상관없는데 누군가 계속 돈을 잃어 울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네요.”이때, 문이 열리며 구두 굽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곧이어 싸늘하면서도 감미로운 음성이 들려왔다.“대체 얼마를 땄기에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죠?”도아린이 흠칫 놀랐다. 고개를 돌리자 건장하고 훤칠한 남자가 거실로 들어섰고, 길쭉한 팔다리를 감싼 슈트핏은 가히 환상적이었다.한 마디로 너무 멋졌다.‘겉모습에 속으면 안 돼!’도아린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김영실이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니야. 전복이나 좀 사 먹겠는지. 그나저나 회사가 안 바쁜가 보
배건후는 기다린 다리를 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역시나 익숙한 맛이었다.이내 차를 음미하면서 도아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한편, TV에서는 후반전 경기에 참석하는 말을 소개하고 있었다.도아린은 절대로 외모에 혹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상기했고, 화면을 한참 동안 쳐다보더니 목에 흰색 점이 있는 검은색 말을 선택했다.그리고 종이에 선택하려는 찰나 남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보는 눈은 여전히 형편없군.”도아린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고, 다시금 TV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2번 말도 생김새는 나쁘지 않았다. 갈색 털은 윤기가 흘렀고, 비록 덩치가 큰 편은 아니지만 외모가 출중했다.하지만 비주얼만 보고 돈을 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참혹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는가?화면이 바뀌면서 다음 경주마로 소개가 넘어가자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망설임은 패배의 지름길이야.”“아린아, 골랐어? 이제 곧 시작해.”김영실이 재촉했다.도아린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과감하게 2번 말을 찍었다.출발음이 울리자 경주마들이 쏜살같이 뛰어나갔고, 도아린이 선택한 2번 말이 제일 뒤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배건후를 노려보았다.결정적인 선택을 내리기 전에 괜스레 방해하고 말이야!아주 그냥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작정했나 보네? 개자식 같으니라고!“이번에도 나야!?”김영실은 흥분한 나머지 춤이라도 출 기세였고, 연장미에게 자신이 선택한 번호를 보여주었다.연장미가 찜한 말은 2등으로 달렸고, 그녀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안 했다.그러나 두 번째 바퀴를 달릴 때 2번 말이 갑자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도아린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TV를 쳐다보았고, 마음 같아서는 현장으로 날아가 연신 채찍질해서 경주마가 더 빨리 달리게 하고 싶었다.마치 그녀의 간절한 기도가 닿기라도 한 듯 2번 말은 끝까지 페이스를 잃지 않고 결국 3위로 결승선에 도착했다.해설자는 2번 말이 다크호스라고 극찬했고, 작
도무지 밥 먹을 기분이 아닌 김영실은 일이 있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게다가 연장미가 데려온 사람인지라 그녀도 뒤따라 집을 나섰다.배건후는 도아린과 함께 돌아가려고 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순순히 보내 줄 주현정이 아니었다.“아린아, 이모님이 요리 준비했으니까 먹고 가. 살이 빠진 것 좀 봐.”“어머님도 많이 드세요.”주현정이 이상한 낌새라도 눈치챌까 봐 도아린은 배건후의 접시에 반찬을 덜어주었다.주현정은 아들을 흘겨보며 말했다.“저놈은 몸매 관리해야 하니까 야채만 먹으면 돼.”말을 마치고 나서 일부러 팔을 찰싹 때렸다.그때 여자의 손톱에 긁혀 상처가 났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배건후는 눈을 내리깔았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내가 친아들 아닌가요?”“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줬으면 의무를 다했지, 뭐. 앞으로 아린과 함께 있을 때만 엄마라고 불러.”식사를 마치고 주현정은 약을 먹고 쉬러 가기 전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도아린에게 말했다.“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 괜히 마음만 약해졌다가는 점점 더 기고만장할지도 몰라.”그동안 배건후의 행세는 그녀도 지켜봐 와서 잘 알고 있다.아들이 바람 피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유독 손보미한테만 약했다. 게다가 워낙 잔꾀가 많은 여자라서 도아린이 손해 볼까 봐 걱정이었다.시어머니의 배려에 그녀는 감동을 금치 못했다.그리고 뒷정리를 마치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유민정을 불러 세웠다.“혹시 한약재 찌꺼기인가요?”“네.”“왜 예전 거랑 냄새가 다르죠?”유민정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지난번에 사모님이 주신 처방전인데 여사님께서 드셔보더니 몸이 훨씬 개운하다고 하셨어요.”“아, 약재가 바뀐 게 있긴 했죠. 알겠어요, 일 보세요.”도아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한약 덕분인지 양약 덕분인지 몰라도 이번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주현정은 예전보다 안색이 많이 밝아졌다.도아린이 방에 돌아오자 배건후는 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디 필로우를 침대 한가운데에
도아린은 침대에 털썩 쓰러졌고, 남자의 가슴에 얼굴이 파묻히는 순간 은은한 민트향을 맡았다.상쾌한 느낌은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했다.배건후와 결혼하고 나서 껴안은 채로 잠이 든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동안 때가 되면 각자 알아서 잤고, 설령 동시에 침실에 들어선다고 한들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웠기에 가운데가 휑 비어 있었다.남자는 기다란 팔다리로 마치 창살처럼 도아린을 가두었다. 그녀는 답답한 느낌에 벗어나고 싶었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눈 감고 얼른 자.”배건후는 갈라진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정작 가슴 근육에 숨이 막힐 듯한 도아린은 남자의 신체 변화 따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힘껏 밀쳤다.“이거 놔요! 답답하단 말...”그러다 특정 부위에 닿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저녁은 분명 같은 메뉴를 먹었기에 약을 탄 적이 없다고 맹세할 수 있었다.“건후 씨?”이내 싸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널 건드리지 않는 이유는 단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야. 만약 계속 반항하겠다면 내가 과연 서긴 서는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증명해줄 테니까 각오해.”도아린은 엉큼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속으로 저주를 마구 퍼부었다.곧이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거의 사라진 팔뚝의 흉터를 발견하고 이를 악물었다.“당신 팔뚝에 상처를 낸 사람이라면 친히 경험했겠죠? 하지만 전 결벽증이 있어서 사양할게요.”배건후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악!”도아린은 너무 아픈 나머지 남자를 힘껏 밀어냈다.“강아지도 아니고 뭐 하는 거예요!”그는 쇄골까지 지분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3년 전 그날을 제외하고 남자랑 자 본 적이 없어?”도아린의 눈에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그래요. 여러 명이랑 해보면 건후 씨 스킬이 엉망이라는 것을 알고 섣불리 결혼하지 않았을 텐데!”그녀는 목을 가리고 남자를 밀어냈다.배건후는 앙증맞은 얼굴을 붙잡고 가슴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어떤 게 손톱에 긁힌 상처인지 잘 봐. 괜히 몰상식
손보미는 수박 한 조각을 집어서 배지유에게 건넸다.“수박이 엄청 달아. 얼른 먹어.”...다음 날 도아린이 씻고 있을 때 배건후가 화장실로 걸어 들어왔다.그는 옆에 서서 치약을 짜고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내일 나랑 행사장에 같이 가.”“싫어요.”도아린은 칫솔을 물고 딱 잘라 거절했다.이혼하고 전남편과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안 그래도 둘의 관계는 수시로 부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데 스스로 가십거리를 제공할 수는 없지 않은가?배건후는 화를 내기는커녕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그럼 어제 딴 돈을 돌려줘.”도아린이 치약 거품을 퉤 하고 뱉었다.“참 뻔뻔스럽네요.”“힌트가 없었더라면 더 많이 잃었을 텐데?”비록 사실이지만 이게 무슨 말이 안 되는 소리인가?“와이프를 위해 돈을 따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제 이혼하는 마당에 돌려줘야 하지 않겠어?”도아린은 어이가 없었다.사사로운 원한까지 반드시 갚는 쪼잔한 놈 따위 좋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게 아니었는데.“건후 씨랑 행사장 갈 테니까 이혼 합의금 중에서 200억을 면제해줘요.”도아린이 지지 않고 받아쳤다.“아는 게 돈밖에 없는 사람이 대체 왜 이혼하자고 하는 거야?”배건후는 경멸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돈을 적게 버는 것도 아닌데 부족하다고 시위라도 하는지 싶었다.도아린은 화가 나서 펄쩍 뛰었다.“통이 큰 척하더니 누구보다 꼼꼼하게 따지잖아요.”도지현의 치료비를 계산하면서 면봉 하나의 가격까지 놓치지 않는다니, 뻔뻔스러운 쓰레기 같으니라고!배건후는 양치를 마치고 변기로 걸어갔다.“나랑 가던지, 돈을 갚던지.”“미친!”도아린이 화장실을 쏜살같이 뛰쳐나왔고, 문이 닫히는 순간 물소리가 들려왔다.이제 곧 이혼할 사이인데 이미지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가?도아린이 옷을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배지유가 돌아왔다.“아줌마, 물 좀...”그리고 거실에 들어서는 순간 도아린을 보자마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당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