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정은 따지지도 않고 내쫓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그러나 배석준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지막 남아있던 그 빛마저 사라져 버렸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배석준은 이내 앞으로 달려가 김지민을 밀어냈다.“꺼져. 당장 꺼지라고.”“회장님, 회장님. 몇 마디만 하게 해주세요.”“얘기하게 놔둬요.”소파에 앉아 있는 주현정은 우아하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바닥에 있는 김지민은 비교가 안 될 만큼. 배석준은 경고의 눈빛으로 김지민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김지민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주현정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사모님, 전 사모님과 회장님을 갈라놓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두 분 사이에 끼어든 건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저도 제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저 정말 회장님 많이 사랑합니다. 회장님 아이를 가졌어요. 절 이리 쫓아내시면 저더러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는 거예요.”“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배석준은 불같이 화를 냈다. 피임을 했는데 어떻게 임신을 할 수가 있겠는가?그러나 그 얘기를 꺼내면 김지민과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그는 이를 악물며 사나운 눈빛으로 김지민을 노려보았다. 이때, 김지민이 가방에서 임신 진단서를 꺼내 배석준의 손길을 피하여 주현정의 손에 쥐여주었다.“사모님, 저 바라는 거 없습니다. 명분도 원치 않고요. 그저 이 아이를 생각해서 회장님 곁에만 있게 해주세요.”임신 진단서는 구겨졌고 주현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었다. 오래전부터 배석준에 대해 크게 실망하였으니까.“여보, 이 아이는 분명 내 아이가 아닐 거야. 나한테 꼬리를 쳤다면 다른 남자한테도 꼬리를 쳤겠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지고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라고.”배석준은 급하게 변명했다.“여보, 한 번만 기회를 줘. 난 이미 헤어지자고 했어. 그런데 그럴 받아들이지 못하고 쟤가 지금 이러는 거야.”주현정은 임신 진단서를 그한테 건네주었다.“당신한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어요.”“이혼
김지민은 잔뜩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렸다. 당연히 아이는 배석준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없으면 어떻게 배석준을 묶어둘 수가 있겠는가?사실 이 아이는 술집에서 만난 원나잇 상대의 아이였다. “회장님 아이예요.”김지민은 눈물을 쏟으며 말을 이어갔다.“저도 처음 알았을 때는 많이 놀랐어요. 병원에서 잘못 진단한 줄 알았고요. 그런데 다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봐도 결과는 똑같았어요.”“회장님께서는 매번 느낌이 올 때만 콘돔을 사용하셨잖아요.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그렇게 하면 피임 성공률이 80%에 불과하대요. 믿지 못하시겠다면 아이가 태어난 후 유전자 검사 하세요. 그때가 되면 제가 회장님을 속였는지 아닌지 알게 되실 테니까.”그녀의 말에 배석준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솔직히 콘돔을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네가 누구의 아이를 가졌든 난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귀찮게 매달리지 마. 계속 이러면 네 다리를 부러뜨릴 거야.”“어떻게 이리 모질게 절 대할 수가 있어요? 아이를 가지게 만들어놓고 지금 저한테 죽으라는 거예요?”김지민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밖으로 걸어나가 복도에 털썩 주저앉았다. “불쌍한 내 아가. 넌 결국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랑 함께 죽게 되는구나. 아빠, 엄마. 제가 못난 자식이에요. 더는 아빠 엄마 곁에 있을 수 없게 되었어요.”배석준은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 화가 치밀어 올라 혈압도 높아졌다.김지민에게 입 닥치라고 하면 할수록 울부짖는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이내 간호사들과 환자들이 달려와 주위를 에워쌌다.그녀의 옷은 흐트러지고 다리는 걷어차인 탓에 울긋불긋 멍이 들어 있었다. 김지민이 처참히 울고 있는 모습에 사람들은 혐오감과 경멸로 가득한 눈빛으로 배석준을 바라보았다. “경찰에 신고 좀 해주세요. 절 죽이려고 하고 있어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정말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했고 이런 일은 가족 간의 갈등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사실 경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봤지만 두 사람 모두 건강한 상태였고 배란에 도움 되는 한약도 많이 챙겨 먹었었다.두 사람 몰래 콘돔도 몇 개 구멍 냈었는데 왜 아이가 생기지 않는 건지... 주현정은 불임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전에 똑똑히 묻지 않았던 건 두 사람의 화해에 대해 조금은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부부한테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가 해서...그러나 현재 도아린의 옆에는 새로운 친구가 생겼고 도지현과도 사이가 좋아졌고 배건후는 그녀의 인생에서 완전히 아웃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 이유가 뭔지 똑똑히 알고 싶었다. 이런 얘기를 하기가 거북했던 도아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저희 두 사람 함께 잔 적 없어요.”이게 무슨...주현정의 손에 있던 사탕 집게가 테이블 위로 떨어졌고 그녀는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건후 문제니?”도아린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글쎄... 누구의 문제인 것일까?첫 관계를 가진 그날 밤, 그녀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일주일 동안이나 고열과 감염 때문에 고생했었다. 그러나 그는 매번 몸이 달아오를 때까지 달아올라도 결국은 절대 선을 넘지 않는 남자였다. 한편, 배건후가 주현정을 마중하러 왔을 때 도아린은 집에 일이 있다고 먼저 돌아섰다.도아린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주현정은 조롱이 가득 찬 말투로 입을 열었다.“출전 자격도 없는 사람이 우승까지 꿈꾸고 있는 건 우습지 않니?”그는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거두었고 어이없어하는 주현정을 표정을 발견하고는 한마디 물었다.“저 사람이 무슨 얘기 하던가요?”“일 얘기했어.”아들이 사내구실을 못 한다는 사실은 엄마로서 비웃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열등감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한의사를 찾아 아들의 몸을 돌봐줘야 할 것 같았다. 어찌 아들이 평생 외롭게 사는 걸 두고 볼 수만 있겠는가?...진씨 가문, 도유준이 또 찾아왔다. 강홍련이 도정국에게
“그러니?”윤명희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꺼내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이 브랜드의 마스크팩이 그렇게 좋더라. 두 개밖에 안 남았어. 다음에 살 때는 네 것도 사줄게.”“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는 거 아니에요? 저 툭하면 여드름이 나거든요.”두 모녀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스크팩 얘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차화영은 오늘 이 일이 성사되지 않을 거라는 걸 짐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달갑지가 않았다. 외손녀에게 주는 혼수를 왜 도아린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건지.“명희야. 민아는 어렸을 때부터 네 곁에서 자랐어. 친자식처럼 데리고 다니던 아이가 아니더냐. 네가 이 집안으로 시집온 지난 시간 동안, 난 너의 일 처리가 줄곧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 이번 민아의 혼사도 네가 전적으로 맡아서 준비하거라.”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윤명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아무리 가까워도 친자식은 아니죠. 그리고 친엄마가 있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이제 막 세은이를 찾게 되었으니 세은이를 더 많이 사랑해 줄 생각입니다. 민아의 결혼식까지 준비할 여유가 없어요. 잘못하다가 결혼식을 망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나요?”차화영은 벌컥 화를 냈다.“민아는 절대 네 탓을 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딸을 시집보낸다는 생각으로 준비하거라.”“그건 더더욱 안 되죠. 이제 막 돌아온 딸인데 전 세은이가 시집가는 걸 절대 용납 못 합니다.”그동안 한약을 마시고 마침내 손을 떨지 않던 차화영은 화가 나니 또다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다들 이런저런 핑계만 대면서 내 체면을 짓밟는 것이냐? 그래도 아직은 내가 이 집안의 어른이야. 어떻게 이리 내 말을 무시한단 말이냐?”“차라리 장례식을 치르거라. 언젠가는 너희들 때문에 화병으로 죽을 것 같으니까. 장례식 부조금은 민아의 혼수로 사용해. 민아야, 섭섭지 말거라. 이 할미가 목숨까지 너한테 준 거니까.”“할머니, 오래오래 사셔야죠. 전 아직 할머니께 효도도 못 해 드렸어요.”안민아는 차화영의 품에 안
사실 안민아는 남자에 빠져 사리 분별이 안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아린보다 잘 살고 싶었고 도아린의 기를 꺾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도움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도유진을 동아줄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빠한테 회사 경영을 맡길 생각이에요. 아빠의 능력이라면 이 혼수는 분명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더 이상 할 말 없어.”도아린이 이리 통쾌하게 동의할 줄은 몰랐다. 안씨 가문의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승리 직전의 기쁨을 만끽했다.“다들 이의가 없다면 혼수를 얼마나 해줄 건지에 대해 의논해 보자.”이때, 차화영이 다급히 입을 열며 외손녀의 손을 토닥였다.“이 할미가 그동안 아껴 쓰고 모은 돈이야. 2천만 원 되는데 다 너한테 줄게.”아껴 쓰기는 개뿔. 어렵게 살았던 차화영은 아들이 부자가 된 후부터는 욕망만 늘어났다. 아들딸 집에 갈 때는 간단한 음식들을 위주로 먹었지만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면 호의호식하였다. 사실 모아둔 돈이 2천만 원밖에 없는 건 아니었다. 그저 진범준한테 들으라고 한 소리일 뿐. 생활비를 더 뜯어내려는 목적이었다. 안민아도 외할머니한테 고작 2천만 원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할머니가 자신을 위해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할머니, 이 돈을 다 저한테 주시면 어떡해요? 젊었을 때부터 고생 많이 하셨는데 몸에 좋은 거 많이 사드세요.”“역시 내 생각하는 건 우리 민아밖에 없다니까. 민아만 좋다면 이 할미는 뭐든 다 줄 수 있어.”“엄마, 할머니께서 2천만 원을 주셨으니 엄마는 얼마 줄 거예요? 할머니보다 더 많이 내놓은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은데.”핸드폰을 계속 주시하고 있던 윤명희가 무심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난 1600만 원 줄 거야.”“그럼 난 1200만 원.”차화영과 안씨 가문의 사람들은 말문이 막혀버렸다.한편, 도유준의 안색도 어두워졌다.진씨 가문에 혼수를 바라고
“하지만 민아의 혼수는...”진범준이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자네도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한 사람이니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겠지. 새로운 사업을 한다는 소문만 조금 내면 합작하자고 찾아올 사람이 있을 거야.”화가 치밀어 오른 안준휘는 진옥경을 향해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등을 꼿꼿이 펴던 그녀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오빠, 다른 사람이 이 일에 끼어들면 결국은 민아의 혼수를 나눠 가질 거잖아. 그럼 부모 입장에서 우리가 뭐가 되겠어?”“그렇다고 너희 딸 혼수 때문에 내 딸의 사업이 물 건너가는 걸 어떻게 두고만 보니.”진범준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세은이는 그동안 밖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살았어. 세은이가 돌아왔을 때 너희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 그런데 지금 또 내 딸의 사업을 망치려 하는 거야?”그 순간, 안준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형님께서 도와줄 생각이 없다면 됐습니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수밖에요. 민아가 시집가는 날 남들이 형님의 험담을 하더라도 형님은 그저 모른 척하세요.”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안준휘의 모습에 도유준과 안민아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안 서방, 민아야...”차화영은 조급한 얼굴로 딸을 쳐다보았다. 진옥경은 따라가고 싶지 않았지만 혼수를 챙기지 못한 안준휘가 그녀를 괴롭힐 것이 뻔했다. 그러나 또 따라가지 않으면 더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앞까지 걸어간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진범준을 쳐다보았다.그러나 단호한 그의 모습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뒤돌아섰다. “옥경이가 돌아가면 분명 또 한 소리 들을 거다.”차화영이 소파를 내리치며 화를 냈다.“20억이 없으면 10억은? 어떻게 합쳐서 2억도 안 돼? 옥경이가 시댁에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있겠니?”“어머님, 아가씨가 진씨 가문의 돈으로 시댁에서 고개를 들고 산다면 진작에 이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남편의
차화영이 계단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도아린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할머니, 드릴 말씀이 있어요.”“너랑 얘기하면 화가 나고 머리가 아파. 난 얘기하고 싶지 않다.”“그래요? 민아한테 혼수를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였는데.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뭐.”도아린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자. 얘기해.”손을 뻗어 문을 밀던 차화영은 문틈에 손가락이 끼여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문을 세게 내리쳤다.“넌 정말 나랑 궁합이 안 맞는 것 같구나.”도아린은 급히 차화영이 안으로 들어오도록 한발 물러섰다. 손끝에 멍이 생긴 차화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진작 그렇게 철이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그럼 오늘같이 난처한 상황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그래, 넌 얼마를 보탤 생각이니?”그녀는 차화영의 손을 주무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전 정말 돈이 없어요.”손을 빼고 일어서려는데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돈을 구할 방법은 있어요.”차화영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똑바로 말해. 수작 부리지 말고.”“할머니, 제가 이혼할 때 빈털터리로 쫓겨나서 정말 돈이 없거든요. 진씨 가문에 기여한 게 없으니 아빠가 주신 주식도 받지 않았고 오빠가 주겠다고 한 회사도 거절했어요.”진지한 얼굴로 말을 하는 그녀를 보며 차화영은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주제 파악은 되는 애네. 돌아오자마자 돈을 요구하지 않은 걸 보면...“민아의 결혼은 큰일이에요. 제가 도유준을 계속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도유준은 아마 지금도 도정국과 인연을 끊지 못했을 거예요. 강씨 가문에서 이렇게 큰 사업도 가져오지 못했겠죠. 전 다 민아를 위해서 그런 거예요.”“정말이냐?”차화영은 반신반의한 얼굴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사생아인 도유준이 안민아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강씨로 성을 바꾸라고 한 사람은 도아린이었다. 강씨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해남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명문 가문이다. 만약 도유준이 도정국
안방 안, 진범준이 아내를 끌어안고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나 어땠어?”얼굴의 홍조가 아직 가시지 않은 그녀는 일부러 시치미를 뗐다.“아주 잘했어요. 사람들 앞에서 우리 세은이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졌을 때, 말문이 막힌 그 사람들 보면서 내가 얼마나 통쾌한 줄 알아요?”“그거 말고.”“그럼요?”그가 그녀의 입술을 살짝 머금었다.“방금 말이야.”그녀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젊었을 때보다는 조금 형편없긴 했어요.”충격을 받은 진범준은 다음날부터 운동하기 시작했다. 정원에서 달리기를 하던 도아린과 진경수는 힘들게 턱걸이를 하는 진범준의 모습을 보고 다가갔다. “아빠, 운동은 왜 하세요?”“왜... 너희들만... 복근 만들라는 법 있어?”진경수는 그의 드러난 뱃살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엄마가 뭐라고 해요?”“뭐라고 하긴... 너희 엄마 그런 사람이 아니야.”철봉에서 내려온 그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너희 엄마가 뭐라고 한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고 있는 거야. 애프터서비스는 충분히 보장해 줘야지. 너희 엄마가 나한테 시집왔을 때는 내가 너보다 훨씬 몸이 좋았어.”“네. 넓은 어깨에 가는 허리, 메뚜기 다리 맞죠?”진범준은 아들의 농담에 발을 뻗었고 진경수는 도아린을 끌고 이내 도망쳤다. “도망쳐. 아버지한테 맞으면 병원에 입원해야 할지도 몰라.”도아린은 깔깔 웃다가 숨을 들이마시며 딸꾹질을 해댔다.“아빠랑 엄마 두 분 사이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결혼한 지 30년이 넘었는데도 신혼처럼 알콩달콩한 두 사람이 너무 부러웠다. 한참을 뛰다가 진경수가 걸음을 늦추며 입을 열었다.“엄마가 아팠을 때, 아버지는 일을 하시면서도 엄마를 직접 돌보셨어. 형이 과묵해진 건 아버지가 고생하시는 걸 보고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더 일찍 아버지를 도와 회사 일을 하게 된 거고.”진경수는 고개를 들고 나뭇잎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태양을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가 갑자기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