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화영이 계단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도아린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할머니, 드릴 말씀이 있어요.”“너랑 얘기하면 화가 나고 머리가 아파. 난 얘기하고 싶지 않다.”“그래요? 민아한테 혼수를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였는데.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뭐.”도아린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자. 얘기해.”손을 뻗어 문을 밀던 차화영은 문틈에 손가락이 끼여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문을 세게 내리쳤다.“넌 정말 나랑 궁합이 안 맞는 것 같구나.”도아린은 급히 차화영이 안으로 들어오도록 한발 물러섰다. 손끝에 멍이 생긴 차화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진작 그렇게 철이 들었으면 얼마나 좋아. 그럼 오늘같이 난처한 상황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그래, 넌 얼마를 보탤 생각이니?”그녀는 차화영의 손을 주무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전 정말 돈이 없어요.”손을 빼고 일어서려는데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돈을 구할 방법은 있어요.”차화영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똑바로 말해. 수작 부리지 말고.”“할머니, 제가 이혼할 때 빈털터리로 쫓겨나서 정말 돈이 없거든요. 진씨 가문에 기여한 게 없으니 아빠가 주신 주식도 받지 않았고 오빠가 주겠다고 한 회사도 거절했어요.”진지한 얼굴로 말을 하는 그녀를 보며 차화영은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주제 파악은 되는 애네. 돌아오자마자 돈을 요구하지 않은 걸 보면...“민아의 결혼은 큰일이에요. 제가 도유준을 계속 몰아붙이지 않았다면 도유준은 아마 지금도 도정국과 인연을 끊지 못했을 거예요. 강씨 가문에서 이렇게 큰 사업도 가져오지 못했겠죠. 전 다 민아를 위해서 그런 거예요.”“정말이냐?”차화영은 반신반의한 얼굴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사생아인 도유준이 안민아와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강씨로 성을 바꾸라고 한 사람은 도아린이었다. 강씨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해남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명문 가문이다. 만약 도유준이 도정국
안방 안, 진범준이 아내를 끌어안고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나 어땠어?”얼굴의 홍조가 아직 가시지 않은 그녀는 일부러 시치미를 뗐다.“아주 잘했어요. 사람들 앞에서 우리 세은이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졌을 때, 말문이 막힌 그 사람들 보면서 내가 얼마나 통쾌한 줄 알아요?”“그거 말고.”“그럼요?”그가 그녀의 입술을 살짝 머금었다.“방금 말이야.”그녀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젊었을 때보다는 조금 형편없긴 했어요.”충격을 받은 진범준은 다음날부터 운동하기 시작했다. 정원에서 달리기를 하던 도아린과 진경수는 힘들게 턱걸이를 하는 진범준의 모습을 보고 다가갔다. “아빠, 운동은 왜 하세요?”“왜... 너희들만... 복근 만들라는 법 있어?”진경수는 그의 드러난 뱃살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엄마가 뭐라고 해요?”“뭐라고 하긴... 너희 엄마 그런 사람이 아니야.”철봉에서 내려온 그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너희 엄마가 뭐라고 한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고 있는 거야. 애프터서비스는 충분히 보장해 줘야지. 너희 엄마가 나한테 시집왔을 때는 내가 너보다 훨씬 몸이 좋았어.”“네. 넓은 어깨에 가는 허리, 메뚜기 다리 맞죠?”진범준은 아들의 농담에 발을 뻗었고 진경수는 도아린을 끌고 이내 도망쳤다. “도망쳐. 아버지한테 맞으면 병원에 입원해야 할지도 몰라.”도아린은 깔깔 웃다가 숨을 들이마시며 딸꾹질을 해댔다.“아빠랑 엄마 두 분 사이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결혼한 지 30년이 넘었는데도 신혼처럼 알콩달콩한 두 사람이 너무 부러웠다. 한참을 뛰다가 진경수가 걸음을 늦추며 입을 열었다.“엄마가 아팠을 때, 아버지는 일을 하시면서도 엄마를 직접 돌보셨어. 형이 과묵해진 건 아버지가 고생하시는 걸 보고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더 일찍 아버지를 도와 회사 일을 하게 된 거고.”진경수는 고개를 들고 나뭇잎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태양을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가 갑자기
차화영은 아무 말도 없이 밥을 먹고 난 뒤, 도아린을 계속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도아린은 그녀가 안민아의 혼수 때문에 자신을 재촉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할머니, 아빠, 오빠. 회사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그녀는 눈치껏 자리를 떴다. 한편, 그녀가 강재민을 찾아가기도 전에 강재민이 먼저 회사로 그녀를 찾아왔다. “이 프로젝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묻는 전화가 끊기질 않네요.”어제 도유준이 가져온 그 사업 계획서가 강재민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안준휘는 투자할 능력이 되는 사람 몇 명에게만 이 일을 알려주었다. 강씨 가문의 사업이라는 걸 알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안준휘는 다른 사람이 권력을 가로채 갈까 봐 지분을 조금만 주겠다고 했다.하지만 돈은 많이 벌면 벌 수록 좋은 게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자연히 강재민과 직접 연락을 했고 안준휘라는 중개인을 따돌리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안준휘가 진 대표님을 찾아가 투자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들었어요.”강재민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다리를 포개고 미소를 지었다.“나랑 사업하기 싫은 건가?”“속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도아린은 이미 서대은에게 조사해 보라고 하였고 이 프로젝트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업이었다. 사실 그전에는 안준휘도 함께 이 일을 꾸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투자자를 찾는 걸 보면 안준휘 역시 속은 것 같았다. 강재민은 피식 웃으며 긴 손가락으로 책상을 몇 번을 두드리며 물었다.“내가 폭로할까요?”“조금만 더 기다려봐요.”안민아와 도유준이 결혼하고 모든 일이 다 결정되었을 때 이 일을 폭로할 것이다. 안씨 가문의 사람들이 더는 일어설 희망이 없게 만들어버릴 것이다. 강재민은 그녀가 독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오히려 장난꾸러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적으로 협조할게요.”“지현이한태 농구 가르쳐준 거 고마워요. 오늘 점심은 내가 살게요.”도아린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든 다 돼요?”사악하게 웃는 그를 보며
이 미친 여자가 아빠를 이렇게나 망가뜨린 주제에 아빠의 돈까지 함부로 쓰고 있다.“엄마, 엄마랑 여동생의 금팔찌를 샀어요. 택배로 보내드릴게요. 남동생이 결혼한다면서요? 해남으로 와서 금붙이를 사라고 해요. 제가 다 사줄게요. 맞아요...”김지민은 한 손으로 전화를 들고 한 손으로 휠체어를 밀었다.“신부 측에서 예물을 1억 정도 요구한다고요? 일단 서두르지 말아요. 회장님의 카드가 저한테 있는데 한도가 있을지는 모르겠어요.”김지민은 오늘 외출한 이유가 바로 한도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몇천만 원짜리 금붙이는 문제가 없었다. 만약 2억을 긁을 수 있다면 해남에서 집을 하나 계약할 수 있었다.그다음에는 배석준의 자금을 조금씩 빼돌릴 수 있다. 배석준의 돈을 다 빼돌린 다음 배석준 다시 돈을 달라고 하면 그들은 배석준이 배를 곪지는 않게 할 것이다.김지민은 도아린과 스쳐 지나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도아린은 김지민과 배석준을 보았다. 그녀는 바로 일남에게 문자를 보내어 배지유를 유인하게 했다.하여 김지민이 부동산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배지유가 도착한 것이다.“김지민! 왜 우리 아빠를 데리고 여기로 온 거야!”직원은 두 부녀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지금은 둘 다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집을 사려고 왔지. 뭐하러 왔겠어.”김지민은 당당하게 말했다.“그럼 우리 길바닥에서 잘까? 너는 입으로만 아빠한테 효도한다고 하면서 언제 한번 아빠한테 밥을 먹여준 적이 있어? 아빠의 대소변을 청소한 적 있어? 너는 아빠한테서 돈을 달라고 할 줄만 알지. 네 아빠는 너 때문에 화가 나서 이렇게 되셨는데 무슨 낯으로 여기를 와!”배지유는 자신의 돈줄을 김지민에게 빼앗기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녀는 당장에 김지민에게 손가락질하면서 욕을 퍼부었다.“이 뻔뻔한 내연녀야, 네가 우리 아빠, 엄마의 사이를 이간질한 거야. 네가 우리 엄마 앞에서 터무니없는 얘기나 하고 함부로 지껄였기 때문에 아빠가 화가 나서 뇌졸중에 걸린 거야!”“
배석준은 그런 게 아니라고 힘겹게 몸을 흔들었다.입원해서 치료를 받으려면 가족의 사인이 있어야 했고 가족들과 등을 돌린 배석준의 곁에는 김지민뿐이었다.이 여자는 혼인신고를 하자마자 완전히 바뀌었다.식사할 때도 뜨거운지 아닌지 상관하지 않고 쑤셔 넣으면 끝이었다. 대소변을 청소한다는 것도 다 간병인이 하는 것이었다. 한밤중에 일어나서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해도 김지민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나이가 들어 전립선이 원래도 좋지 않았는데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해 염증이 더 엄중해져서 소변을 볼 때마다 벌을 받는 것 같았다.김지민이 계속 그를 보살핀다면 돈을 다 쓰기도 전에 그가 먼저 저세상으로 갈 것 같았다.“화내지 말아요. 몸조심해요...”김지민은 세게 배석준의 몸을 누르고는 불쾌한 눈빛으로 배지유를 쳐다보았다.“네 아빠는 너를 보고 싶지 않아. 당장 돌아가. 아니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배지유는 화가 나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이 방법이 없었다.경찰이 와도 두 사람은 부부인데 김지민이 아빠를 학대했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증거가 없었다.그녀는 돌아가지 않았고 난리도 피우지 않고 김지민이 뭘 하는지 보고 있었다.김지민은 직원과 함께 자리를 떠서 몇 마디 나누더니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여보, 우리 둘만 살 집이니 너무 큰 게 필요 없을 것 같아요. 50평 좀 넘는 집을 하나 봤는데 오늘 바로 계약하죠!”배석준은 고개를 흔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당신도 동의했으니 절차를 진행할게요.”김지민은 배석준을 끌고 가서 사인했다. 그녀는 머리가 좋았다. 배석준의 손도장을 찍은 다음 자신의 이름을 사인했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배석준이 건강을 되찾고 자신과 이혼을 하려고 해도 집의 절반은 그녀에게 줘야 했다.배지유는 다급하게 배건후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김지민 저 미친년이 아빠의 돈을 사기 치고 있어요! 아까는 몇천만 원짜리 금팔찌를 사더니 이제는 집을 사러 왔어요! 빨리 여기로 와요. 늦으면 아빠의 돈
배건후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감사하다고 말하고는 안쪽에 있는 자리로 들어갔다.“배 대표님의 취향대로 다 주문하세요.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강재민은 걸음을 옮겨 도아린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지금 뭐 하자는 거지?’원래도 어두운 배건후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날카로운 눈빛은 강재민을 난도질할 것만 같았다.방금 그는 체면을 생각하지 말고 바로 도아린의 곁에 앉았어야 했다.“제 넥타이 클립 예쁘죠? 아린 씨가 저한테 선물한 거예요.”강재민은 배건후가 잊었을까 봐 다시 자랑하기 시작했다.“6천만 원이 넘어서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아린 씨가 저한테는 아깝지 않은 선물이라고 하길래 거절하지 않았어요.”‘아린 씨...’오글거려서 못 봐줄 지경이었다. 메뉴판에 비닐을 덧대지 않았더라면 배건후는 진작에 찢어버렸을 것이다.그는 눈을 내리깔고 일부러 덤덤한 척 말했다.“안목이 항상 뛰어났어요. 전에 저한테 골라준 것들은 모두 유일무이한 것들이었어요.”확실히 도아린이 그에게 골라준 것들은 다 최고급인 것들이었다. 이는 그가 도아린의 마음속에서 강재민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다.“아, 그래요?”강재민은 의아하게 도아린을 쳐다보았다. 도아린은 이렇게 유치한 화제에 끼고 싶지 않아 이마를 짚었다.“아린 씨가 그렇게나 잘해줬는데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다니, 아린 씨가 배 대표님을 버린 이유가 있었네요.”찍 하는 소리가 나고 메뉴판의 끝부분이 찢어졌다.“저기요, 여기 주문 빨리 좀 부탁드릴게요.”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종업원을 찾았다.빨리 먹고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남자 둘의 나이를 합치면 60살이 넘는데 6살짜리 어린 애보다도 유치했다.첫 번째 요리가 올라오고 배건후가 젓가락을 들자마자 도움을 요청하는 배지유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지만, 배지유가 전화에서 난리를 피웠다.“죄송합니다.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겠어요.”배건후는 몸을 일으켰다.강재민도 일어서서 배건후를 문 앞
배건후는 아파서 바들바들 떨며 힘겹게 차로 돌아가서 약을 찾아 삼켰다.위통이 사그라들고 나서야 그는 차에 시동을 걸고 떠났다.“일부러 그런 거죠.”도아린은 강재민의 마음을 읽고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끝난 인연이라면 죽은 사람처럼 더는 나타나지 않아야 하죠. 그런데 고집스럽게 아린 씨 앞에서 알짱거리는데 저라고 뭐 어쩌겠어요.”강재민은 손사래를 치고는 다시 넥타이 클립을 만지작거렸다.“저는 이 선물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도아린은 소파에 올려둔 그의 정장 외투를 흘깃 보았다. 그 소매 단추의 모양도 검은색 마름모였다.“누군가가 제 디자인이 표절이라고 고발했어요.”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음식을 먹으며 자연스럽게 물었다.“재민 씨가 생각하기에 제가 스스로 증명할 방법이 있을까요?”그녀는 곁눈질로 강재민이 요리를 집는 동작이 멈칫했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는 다정하게 웃는 모습이었다.“팔찌의 제작 방법은 거의 다 공개되었고 드물게 몇 개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죠. 팔찌가 표절했다고 하는 주장 자체가 성립되기 어려워요. 파리의 명품 가방에는 국내 디자인의 꽃무늬도 있는걸요!”강재민은 도아린이 라즈지만 먹는 것을 보고 그 요리를 그녀의 앞으로 밀어주었고 그녀에게 시원한 음료를 따라주었다.도아린은 잔이 놓여있는 식탁을 몇 번 손가락으로 두드리더니 그가 음료를 다 따르자 말했다.“티파니 주얼리라고 한 적 없는데 어떻게 그 디자인이라는 걸 알았어요?”“...”강재민은 살짝 멈칫했다.남자는 빠르게 다정한 얼굴을 하고는 젓가락을 들고 허공을 찌르며 도아린에게 말했다.“제가 아린 씨한테 쓰는 마음을 아린 씨가 절반이라도 배건후한테 썼더라면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았을 거예요.”도아린은 라즈지를 한 조각 먹고는 미소를 지었다.강재민은 시원한 음료 잔을 들고 그녀와 잔을 맞추었다.“아린 씨는 제 누나의 눈엣가시에요. 당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죠. 당신이 잘못한 게 없어도 잘못을 찾아내기 위해 애를 쓰죠
도아린은 다급하게 차화영의 곁으로 가서 얘기했다.“재민 씨가 신혼집이랑 연회를 모두 강씨 가문에서 전담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프로젝트는 참여하지 않을 거라고 해요. 다른 사람들이 신부 측의 혼수를 탐낸다고 말할까 봐 그런다고 해요.”“그 사람들의 말이 맞아!”차화영이 동의했다.“강씨 가문에서 투자만 하고 관리를 하지 않는다면 혼수를 주는 것보다 못하지. 만약 끼어들어서 부러워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이 쓴소리할 건더기를 주는 거야!”차화영은 드디어 도아린을 마음에 들어 했다.“네가 결혼을 해봐서 다행이다. 본인이 당해보았으니 어떻게 하면 민아한테 좋은 건지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진경수는 들어오자마자 이 말을 듣고 반박하려고 했지만, 도아린이 그를 향해 눈짓하는 걸 보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다시 삼켰다.진경수는 문자를 보내는 척하면서 동생의 말을 들었다.이 계집애는 여우가 따로 없다. 누가 또 구덩이에 빠지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화영은 위층으로 올라갔고 안씨 가문에 어떻게 얘기를 했는지 이튿날 도유준과 안민아는 혼인신고를 하러 갔다.안준휘는 두 테이블 규모 정도의 연회를 열었고 진씨 가문의 사람들과 협력을 맺은 친구들을 불렀다.협력을 맺은 친구들은 강씨 가문을 탐내고 있으므로 안준휘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안준휘는 기분이 좋아 술을 많이 마셨다.자리가 끝날 무렵, 차화영은 진옥경에서 마음속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녀에게 손을 대자마자 그녀가 퍼뜩 몸을 떨었다.“왜 그래?”차화영은 서둘러 진옥경의 소매를 걷었다. 그녀의 팔뚝에는 속박의 흔적이 남아있었다.“사위가 그런 거야?”진옥경은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며 빠르게 소매를 다시 내렸다.“엄마, 괜찮아요.”차화영은은 마음이 아파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딸이 아들을 낳지 못해서 시댁에서 입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하지만 안준휘가 진옥경에게 이렇게 폭력을 행사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고 위로했다.“조금만 더 참아! 민아가 강씨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